특집

[창간 16주년 특집-어제의 교구가 내일의 교구에게] 주교좌에서 교구사를 보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3-10-24 수정일 2023-10-24 발행일 2023-10-29 제 3365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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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좌성당 위치·규모는 변화… 교구는 연속성 유지하며 꾸준히 성장

교회법은 교구를 교회의 수위권자인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중심으로 이룬 교회공동체라고 말한다.(제389조) 그렇기에 교구장 주교가 앉는 의자, 주교좌는 초기 교회부터 교회 권위의 상징이었다. 교구장 주교의 교도권과 사목권이 선포되고 시행되는 주교좌, 그리고 그 주교좌가 자리한 주교좌성당은 교구 역사의 중심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주교좌였던 고등동성당에서 조원동주교좌성당, 정자동주교좌성당까지 주교좌성당을 찾으며 교구의 역사를 돌아봤다.

주교좌시절 고등동성당의 모습. 교구 기록관

현재의 고등동성당.

첫 주교좌, 고등동성당

고등동성당 입구 왼편에 머릿돌이 보였다. 머릿돌 아래에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칙서 「최고 목자」의 원문과 번역문이 있다.

칙서에는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내에 있는 수원시와 부천군, 시흥군, 화성군, 평택군, 광주군, 용인군, 안성군, 이천군, 양평군, 여주군을 포함한 지역을 분리해 한 교구로 설정하고, 이를 ‘수원교구’라 명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바로 1963년 10월 7일 교구를 설정한 교황 칙서다.

교황은 칙서에서 “이 교구의 주교는 자기 주교좌를 수원시에 두고, 또 그 주교좌를 같은 곳에 있는 성 요셉 성당에 두기를 나는 원하며, 따라서 이 성당을 합당한 모든 권리와 특전을 가진 주교좌성당으로 승격시킨다”고 밝혔다. 성 요셉 성당이란 ‘노동자의 모범이신 성 요셉’을 주보로 하는 고등동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교황은 이 칙서를 반포하면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었던 윤공희 빅토리노 신부(현 윤공희 대주교)를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윤 대주교는 교황청으로 떠나 10월 20일 오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전교지역에서 임명된 다른 주교 13명과 함께 교황에게 주교품을 받았다. 이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제2회기에 참석한 윤 대주교는 12월에 귀국해 12월 21일 이곳 고등동성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했다.

윤 대주교는 고등동성당 건너편에 주교관을 두고 화서동에 교구청사를 마련하기 전까지 4년 여간 임시 교구청으로 사용하면서 교구의 기틀을 다지고 다양한 사목을 전개했다. 특히 순교신심을 강화하고 평신도 양성을 통해 교구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웠다.

그리고 1973년 10월 윤 대주교가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공석이 된 교구장 자리에 1974년 10월 5일 김남수(안젤로) 주교가 임명됐다. 이어 11월 21일 이곳 고등동성당에서 윤 대주교 주례로 김 주교의 서품식과 착좌식이 거행됐다.

이곳은 교구의 첫 주교좌로서 13년 7개월 동안 초대교구장과 2대 교구장의 착좌식뿐 아니라 사제서품식과 교구의 주요행사가 열린 곳이다. 교구 초기 역사가 담긴 장소지만, 현재는 교구 첫 주교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기존의 낡은 성당을 허물고 1992년 새 성당을 지으면서 더 이상 ‘주교좌성당’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현재의 조원동주교좌성당.

조원동성당 내부.

‘평화의 모후’ 주보가 되다, 조원동주교좌

김남수 주교는 1974년 서품 당시부터 새 주교좌성당을 생각해왔다. 고등동성당은 교구 설정 당시 수원 시내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지만, 수용 인원이 500여 명에 불과했다. 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를 감당하기엔 아쉬운 크기였다.

김 주교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 주교는 주교 서품식 성인호칭기도 중 “‘주교좌성당이 너무 작아서 안 되겠다. 좀 더 큰 것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면서 “엎드려서 성당 한 채를 다 지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성당 입구 성모상 아래에 ‘평화의 어머니’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교구의 주보인 ‘평화의 모후’다. 1977년 5월 18일 조원동주교좌성당이 준공되면서 교구의 주보도 ‘평화의 모후’로 공식 선포됐다. 기존 주교좌였던 고등동본당은 준교구좌본당이 됐다.

제대에 걸린 십자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활하신 예수상이 양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교구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느낌을 줬다. 공간 자체도 전통적인 성당은 중앙이 솟은 형태로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조원동주교좌성당은 오른쪽이 높은 사선형태의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신자들에게 열린 느낌을 줬다.

성당 설계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남도광(Honoratus Millemann) 신부가 맡았다. 당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사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자들의 전례 참례를 위한 성당건물을 적극적으로 설계했는데, 조원동주교좌성당도 이런 흐름 안에서 설계된 것이었다.

공의회 정신을 살린 주교좌성당의 모습처럼 교구는 적극적으로 세상 안에 복음을 선포해나갔다. 평신도 지도자 교육을 강화하고 전교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본당 수입의 10%를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등 가난한 이들 곁에 함께하는 활동을 잊지 않았다. 또 중국 지린교구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교구 간 인적·물적 교류를 진행했다. 도움을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이었다.

조원동주교좌성당과 함께 교구는 크게 성장해 신자 수가 40여 만 명으로 증가했다. 교구는 이제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교구에 대비해야 했다. 이에 준비한 것이 정자동 새 교구청사와 새 주교좌성당이었다.

정자동주교좌성당.

정자동주교좌 대성당 제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정자동주교좌

웅장하다. 정자동주교좌성당을 마주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단어다. 연회색의 화강암으로 싸인 이 성당의 모습은 마치 튼튼한 성채를 보는 듯한 위용이 있다. 종탑의 높이까지 더하면 높이만도 50m가 넘는 이 성당은 지하 1층, 지상 5층에 건축면적 6611㎡에 달하고, 수용인원도 2500명이 넘는다. 첫 주교좌였던 고등동성당 규모가 400㎡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16배가 넘는 규모의 거대한 성당이다.

교구는 1990년대 초반, 교구 장래 발전을 예상하고 수원 정자동에 새 성당과 교구청 신청사 예정부지를 매입했다. 1993년부터 건축에 들어간 성당은 1997년 8월 20일 ‘한국 순교 성인’을 주보로 봉헌됐다.

정자동주교좌성당 봉헌을 앞두고 1997년 6월 4일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은퇴하고 부교구장이던 최덕기(바오로) 주교가 교구장직을 승계했다. 이어 9월 25일 최 주교는 갓 봉헌식을 마친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제3대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정자동주교좌성당은 폭만 해도 30m에 달하는데 기둥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 당시 최신의 기법을 도입해 넓으면서도 기둥이 없는 건물을 구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성당 안 어느 곳에서라도 제대를 바라볼 수 있다.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대를, 제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향할 수 있다. 어쩐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론이, 그리고 시노달리타스가 떠오른다.

실제로 이곳은 교구의 온 하느님 백성이 참여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자리, 교구 시노두스가 열린 자리기도 하다. 1998년부터 준비해온 교구 시노두스는 이곳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1~3차 본회의, 폐막미사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현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도 이곳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착좌했다. 2009년 3월 30일 최덕기 주교의 사임에 따라 부교구장이던 이 주교의 착좌식은 5월 14일 거행됐다.

주교좌성당은 교구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등동성당, 조원동주교좌성당, 정자동주교좌성당으로 물리적 자리는 변화해 왔지만, 변모한 주교좌성당의 규모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큰 신앙공동체로 연속성 안에서 성장했다. 어제의 교구는 오늘, 그리고 다시 내일의 교구로 이어진다.

지난 10월 6일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에서 이용훈 주교는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미사 당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현 복음화부) 장관 페르난도 필로니 추기경의 말을 언급, “교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함께 태어난 교구”라고 강조했다. 이 주교는 “교구 설정에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지혜롭고 선한 계획을 마음에 새기는 가운데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 교구 역사의 발자취를 엄중히 되돌아 보아야한다”면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통해 우리 믿음의 내용이 끊이지 않고 전해지듯이 그동안 우리 교구의 복음화 목표와 사목정책 방향은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져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