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것들은

60대에 들어선 내 친구들은 요즘 청년들이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자존심만 세고, 용기와 모험심이 없고, 헌신은 부족하고 계산적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대차는 늘 있어 왔다. 기원전 1800년의 수메르 점토판부터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비판하며 한탄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노인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중요했던 농경사회와 달리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노인들은 소외되기 십상이다. 노령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는 줄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관공서나 식당에 설치된 키오스크의 조작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기성세대는 MZ 세대에게 말을 건네기를 어려워한다. 태어날 때부터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와 MP3 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자라나 '디지털 네이티브’라고도 불리는 이 세대는 디지털 언어와 장비를 특정 언어의 원어민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어떤 사람은 이들을 신세대가 아닌 '신인류'라고 일컫기도 한다. 알아듣기 힘든 줄임말을 남발해서 이들이 “우리말을 하는 외국인 같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소통하기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수천 년 전에도 똑같은 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젊은 세대 앞에서 “나 때는 말이야 ~” 하고 운을 떼는 순간 꼰대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나이든 사람들은 융통성이 부족하고 권위적이며 제대로 경청할 줄 모른다. 서로 다른 세대 사이에 감성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차이가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시간과 자리가 더 필요하다. 내가 대표로 있는 ‘이음새’는 한 달에 한 번씩 여러 세대와 문화가 어우러져 함께 걷는다. 요컨대 같은 눈높이에서 편안하게 만나는 것이다. 인구 절벽의 시대에 세대간 소통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더 많이 들으려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물어본다면 실제로 배우는 것도 있고 관계도 더 좋아질 것이다. 나이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나이든 사람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내가 그들의 나이 때 했던 경험을 똑같이 반복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대학과 한국 사회는 30-40년 전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경험을 기준으로 젊은이들을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각각 다른 경험을 안고서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인이다. 기후 재앙과 저출생 고령화 시대의 도전에 책임있게 응답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동료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처신하면 좋겠다. 그게 진정 나잇값 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5-19

적대와 증오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가 끝나고 몇 주가 흘렀다. 변화를 바라는 민심이 총선 결과에 분명히 나타났지만 현실 정치가 여기에 부응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서로를 적대시해 온 집권 세력과 거대 야당이 머리를 맞대고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많은 사람은 대화와 타협이 없고 일방적 소통과 대결만 있는 한국의 정치문화를 한탄한다.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이 지속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국회와 정치에 들어갈 여지도 점점 줄었다. 진영대결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적대감과 증오는 정치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이 배어있는 DNA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는 적대의 감정이 만연해 있다. 이제는 종교인들조차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총선 과정은 안타깝게도 일상화된 증오와 적대를 여과하거나 승화하지 못했다.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이런 적대감의 뿌리를 백년 전 일제 치하에서 시작된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에서 찾는다. “3.1 운동 이후 격화된 좌우 대립 속에서 적에게도 이성과 양심이 있으리라는 믿음은 서서히 사라졌다.” (「영성 없는 진보」 온뜰 2024, 이하 모든 인용). 이 두 진영의 반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초기에 자행된 민간인학살은 우리가 한 공동체에 속한다는 믿음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그 결과 “정치는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동지와 적을 가르고, 그 적대적 대립 속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유일한 현실적 목적이 되었다.” 김 교수는 한국의 진보 운동이 1980년대 이후 분노와 증오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말하면서 아프게 지적한다. “차이를 적대적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건설적 협동이 되게 하는 것은 전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진보 운동 속에서도 보수화된 신앙 속에서도 우리는 이제 더는 전체에 대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자기가 선이라 믿으면서 남을 악이라 단죄하고, 남과 싸워 이기는 일에만 골몰한다.” 그에 따르면 “모두 전체로부터 이탈하여 치우져 있기 때문에 (...) 우리는 보다 높은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차이 속에서 적대적으로 분열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분열상을 치유하려면 다름과 차이를 용인해야 한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도 전체 속에서 나의 일부라는 믿음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릴 때 가능할 것이다.” (111쪽) 형식적 민주주의는 성취했지만 적대와 증오, 혐오와 배제가 고개를 드는 오늘날, 우리를 하나로 모아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 주목하는 것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과제다. 우리 시대의 예언자다움은 거짓과 불의를 단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5-12

‘불법’인 사람은 없다

서울 종로5가의 한 빌딩 지하에 있는 서울 디아스포라 교회는 교인들 다수가 미등록 필리핀 노동자다. 한국에 온 지 5년부터 25년이 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대부분 고국에 있는 부모의 의료비와 자녀 혹은 동생들의 교육비를 책임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없는 주말과 저녁 시간에 잔업이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매년 ‘불법’ 노동자 특별단속 기간이 되면 이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적발되어 벌금을 물고 추방당하면 다시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올봄에도 이렇게 한국을 떠나는 교인이 계속 생기고 있다. 교인이 단속에 붙잡혀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면 정진우 담임목사는 회사를 찾아가 못 받은 임금과 퇴직금을 받아내고 그가 살던 방에 가서 짐을 정리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아 전해 준다. 비행기표도 추방되는 노동자가 사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회사 사정에 미등록노동자 고용으로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며 퇴직금을 못 준다는 사장도 있다. 어떤 집주인은 외국인보호소에 억류된 당사자와 연결해 주어도 정 목사를 믿지 못해 다시 자기에게 직접 전화하라고 요구한다.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 단속을 강화하면서 인권 침해도 잇달아 발생했다. 작년 3월 대구에서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주일 예배를 보다가 토끼몰이식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11월에는 경주의 공단에서는 법무부 남성 직원이 미등록 이주 여성 노동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작업장에서 끌어내는 영상이 국제적인 공분을 자아내었다. 정부는 한쪽으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추방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매년 수천 명씩 외국인노동자를 추가로 들여온다. 이른바 3D업종뿐 아니라 농어촌에도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런데 20년 넘게 시행되고 있는 ‘고용허가제’는 노동자가 일터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들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한다. 아무리 강력히 단속해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줄지 않고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43만 명을 헤아린다. 그들 가운데는 20년 넘게 한국에 산 사람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는 필리핀 가사도우미 100명이 7월에 입국해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빠르면 8월 말부터 서울 지역에서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의 증가하는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기에 시범사업으로 해 본다는 것이다. 공론화 과정에서 노동계와 인권단체의 반대와 비판도 적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가 오는 것은 노동력에 앞서 무엇보다 사람이 오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는 이웃이다.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이민 이주민 이주노동자 정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5-05

눈물꽃 소년

박노해 시인이 자전 수필집 「눈물꽃 소년」(느린 걸음, 2024)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작가는 초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가 그때의 눈으로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 자연과 학교와 하느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독자는 가난과 결핍과 열망으로 가득 찬 시절을 살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소년 ‘평이’(박노해의 본명은 박기평이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제는 사라진 자신의 유년기와 잃어버린 순수함을 추억하게 된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동심이 심연에서 깨어날 때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문한다. 평이가 자라는 남도의 시골 마을 동강은 작은 우주다. 거기에는 신앙의 요람이었던 동강공소와 멕시코 선교사 호세 신부, 학교와 반 친구들, 배고픔을 채우듯 많은 책을 읽게 해 준 선생님과 도서실, 밤하늘의 별들과 자연, 할머니와 어머니, 애틋한 첫사랑 여자애까지 있다. 작가는 오늘날 도시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원형의 것들, ‘순수하고 기품 있는 흙 가슴의 사람들’을 소환하면서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슴 시린 풍경’을 그려낸다. 어린 평이는 벙어리 처녀 연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요,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맘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의 입이 되고 글이 될라요.” 첫사랑 소녀를 만나서는 “나처럼 외롭고 혼자인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 눈물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눈물꽃 소년」에는 훗날 박노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만든 싹이 다 담겨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직관, 강직함과 인내, 약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아우르는 인간의 심성과 자세의 큰 부분은 유년기에 형성된다. 그런데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며 쉼 없이 달려온 우리는 그 순수한 눈길과 동심을 잃어버렸다. 어른들은 자신의 동심을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동심마저 타락시켰다. 장래 희망을 ‘건물주’라 말하는 초등학생이 다른 급우를 ‘빌거’(빌라에 사는 거지), ‘휴거’(임대아파트 휴먼시아에 사는 거지)라 비하하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부동산이 계급이 된 사회’에서 어른들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의대 준비반을 만들어 선행학습을 시킨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물신주의 속물주의, 무한 경쟁의 사고와 의식을 심어준다. “세상이 하루하루 독해지고 사나와지고, 노골적인 저속화와 천박성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지금”, 작가는 “길잃은 날엔 자기 안의 소년 소녀로 돌아가기를” 권한다. 우리에게도 ‘영혼의 순수가 가장 빛나던 시간’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천진무구함이 상처받은 모습이 지금의 나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작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영원한 소년 소녀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고 속삭인다. 그 소년이 우리에게 눈물꽃을 건넨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28

잊지 않겠습니다

10년 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 가장 슬프고 가장 아픈 주님 부활 대축일을 보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떤 글도 쓰지 못한 보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뜰에 핀 금낭화가 눈에 들어왔다. 금낭화의 불어 이름은 ‘마리아의 심장’(Coeur de Marie)이다. 꽃 모양이 심장에서 피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서 ‘피 흘리는 심장’(영어), ‘눈물 흘리는 심장’(독어)이라 명명했을 것이다.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본 어머니 마리아의 심장에서 어찌 피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세월호 참사 때 많은 사람이 제 자식을 잃은 것처럼 함께 울었다.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수많은 약속이 있었고,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한편에서는 유족들의 피맺힌 목소리에 귀를 닫고 노란 리본에조차 적대감을 표시한다. 불편한 기억들을 자꾸만 지우려는 사람들과 세력에 거슬러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저 피해자로 남아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난을 사회화했다. 다수의 유가족이 국가의 보상금을 거부하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벌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받았다. 그 배상금을 출연해 재단을 세웠고 지난해 11월에는 다른 여러 재난 참사의 피해자들과 연결망을 만들었다. 녹슨 세월호는 진작 인양되었지만 새로운 ‘한국호’는 아직도 진수되지 않았다. 공동체는 점점 파편화되고 개인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지만, 우리 사회는 거기서도 배우지 못했다. 일상의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극도의 경쟁과 효율 추구, 소비와 과시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누군가는 세월호의 기억을 지우려 했을 때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고 해병대 채상병의 죽음이 있었다. 기후 위기와 결합된 재난 참사도 계속된다. 그래도 높은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가장 많이 환기된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그리스도인은 기억의 백성이다. 부활의 증인인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참혹한 죽음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았다. 2000년 동안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기억하고 경축한다. 성경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마지막이 아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시작된 예루살렘의 교회, 그 새로운 공동체에 함께 계셨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깊은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나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며 새로운 한국 공동체의 초석을 놓고 있다. 1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오열하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함께 울어야겠다. 금낭화의 서양말 이름처럼 눈물 흘리는 마리아의 마음으로.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21

여기 와서 고개 숙이라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제주 4·3을 알지 못했다. 현 작가는 소설을 출간한 뒤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독재 시절에 이 책은 금서가 되었다. 나라가 민주화되자 대통령이 국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고 4월 3일은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제주의 4·3 평화공원에 가 보면 희생자의 규모와 비극의 강도에 전율하고 유족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극단적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정권이 바뀌자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려 한다.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이루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4·3 유적지 가운데 애월읍 하귀리의 ‘영모원’은 특별한 곳이다. 주민들은 마을 출신 항일운동가와 4·3 희생자, 4·3 및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군인과 경찰을 모두 영모원에 모셔 추모하고 있다. 지난해 평화 순례를 하면서 이곳에 들렀을 때, 화해를 위해 진력해 온 고창선 선생(1935년생)의 증언을 들었다. 4·3의 광풍이 지나간 이후로 하귀 마을은 갈라졌고 고통과 원한에 응어리진 마음으로 수십 년을 살았다. 사정이 비슷한 마을이 제주와 전국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여기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들의 생각이 비석에 담겨 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6·25의 아픔이 한반도에 닥치기도 전에 이 죄 없는 땅 죄 없는 백성들 위에 아직도 정체 모를 먹구름 일어나서 그 수많은 목숨들이 지금도 무심한 저 산과 들과 바다 위에 뿌려졌으니, 어느 죽음인들 무참하지 않았겠으며 어느 혼백인들 원통하지 않았으랴. 단지 살아있는 죄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마음들은 또 어떠했으랴.” 비석을 세운 이들은 수많은 무고한 죽음과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기억하면서도 “오래고 아픈 생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고”,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면서 화해를 시도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하귀리 분들은 슬픔과 아픔이 너무 크고 깊어서 용서와 화해 없이는 그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정의를 세우려는 시도만으로는 해결도 치유도 될 수 없다고 믿었을까? 제주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비석 앞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14

라마단 식사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에 해질녘에 먹는 저녁 식사를 ‘이프타르’라 부른다. 낮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조차 마시지 않은 사람들이 저녁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프타르는 보통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하지만 한국에 사는 무슬림들은 유학생이나 이주노동자, 난민처럼 혼자인 경우가 많다. 올해는 이음새 회원들이 라마단 동안 무슬림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식사 준비는 아들 셋과 사는 시리아 난민 어머니 한 분께 부탁했다. 토요일 저녁 전철 역 근처의 한 사무실에서 열린 이프타르에는 시리아, 수단, 모로코, 한국, 일본, 프랑스 국적의 17명이 모였다. 종교간 대화라기보다 이웃의 조금 다른 문화를 만나는 문화 교류에 방점을 둔 시간이었다. 비무슬림 참가자들에게도 가능하다면 한 끼를 금식하고 오도록 권했다. 나의 경우 점심을 먹지 않고 오후에는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갈증을 좀 느꼈지만 견딜만했다. 우리 대부분에게 라마단 식사는 처음이었다. 무슬림들과 한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무슬림 친구들은 우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 우리는 한국어와 아랍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서로의 생각과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고 경청했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압둘와합과 12년 전 열아홉 살의 나이로 한국에 온 압둘라만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 두 시리아 친구 덕분에 아직 한국말이 서툰 수단의 유시프는 아랍말로 자기 얘기를 할 수 있었고 유머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압둘라만의 어머니 루브나 바샤르가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고 안전한 곳에서 함께 모여 식사하고 얘기 나누니 너무 행복합니다. 그런데 고향에서 지금도 고통받고 어렵게 지내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랍어와 영어, 코란과 이슬람 교육 선생님인 그는 우리가 먹은 음식을 이틀 전부터 정성을 다해 준비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아 여럿이 싸서 나누었다. 신실한 무슬림 여성 루브나는 헤어지기 전에 그의 글이 실려 있는 책을 한 권 나에게 건네주었다. 제목은 「아랍 무슬림 여성들의 이주 여정에서 만난 오아시스」. 한국이주인권센터가 ‘와하 커뮤니티’의 협조로 펴낸 이 책은 한국에 사는 아랍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국적과 배경이 다른 열 명의 이야기를 단번에 읽으면서 나는 아랍 문화와 무슬림들의 신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올해 라마단이 끝날 무렵에 다시 한번 이프타르 모임을 갖기로 했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루브나의 얘기를 더 들어볼 예정이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좌석을 늘였지만 공지하자마자 인원이 찼다. 이번에 무슬림들을 만나면 ‘앗살라무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고 인사하리라.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4-07

에이미와 게이코

에이미 미야케는 도쿄의 국제기독교대학 3학년을 갓 마친 여학생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한 사실을 대학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큰 사안으로 다루어지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모르거나 외면하는 과거였다. 엄청난 수치심과 커다란 죄책감을 느낀 에이미는 “젊은 세대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자문했다. 마침 대학생들의 평화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이 있었다. 영국에 가서 과거 일본의 전쟁 포로들을 인터뷰하는 그의 프로젝트도 뽑혀서 100만 엔(약 900만 원)을 지원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를 위해 활동해 온 게이코 홈즈 여사를 제일 먼저 찾아갔다. 1948년 미에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공부한 게이코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영국인과 결혼했다. 미에현의 이루카 구리 광산에서 일하다 사망한 영국군 포로 16명의 기념비를 보았던 이 부부는 뒤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게이코는 1984년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긴 애도의 시간을 보내던 중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는 영국 포로의 비석이 있던 자리가 대리석과 꽃으로 단장된 것을 보고 감동했다. 게이코 홈즈는 영국 극동 전쟁 포로의 연례행사에 참석했고 1992년 26명의 전쟁포로와 두 명의 미망인을 데리고 이루카 (현재명 아타야)의 추념식에 갔다. 일본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 사무쳤던 이들은 주민들이 가꾸어 온 기념공원을 보았고 50년이 흐른 뒤에 그들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았다. 치유의 시작이었다. 에이미는 영국인 전쟁포로와 억류 민간인, 가족 등 200명이 참석한 ‘평화와 우정’ 모임에도 갔다. 거기서 만난 20명을 영국 각지로 찾아가 인터뷰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게이코 홈즈가 만든 단체인 ‘아가페’와 함께 일본으로 화해의 순례를 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가 일본인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에이미는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사죄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일본인이 사죄해도 금방 용서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에이미는 잘 안다. 그는 상대가 용서하지 않고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는 7월 에이미는 네 명의 친구들과 다시 영국에 간다. 학생들이 인터뷰할 사람들은 10월에 일본에 오고 이들이 참석하는 ‘화해의 예배’가 도쿄의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열린다. 게이코를 존경하는 에이미가 영국 다음으로 한국에 와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서로 연락하기로 했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3-31

메가와티와 대현동

인도네시아 배구 선수 메가왓티 퍼티위(등록명 메가)가 큰 인기다. 메가 선수는 2023-2024 시즌 여자 프로배구 정관장의 아포짓 히터로 활약하고 있다. 첫 경기부터 대활약을 해서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던 그는 뛰어난 실력과 좋은 성격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정관장이 7년 만에 봄배구를 하게 된 것에는 다른 외국인 선수 지아와 함께 메가의 공이 제일 컸다. 동부 자바의 젬버 출신인 메가는 무슬림이다. 그는 한국 배구에서 처음으로 히잡을 쓰고 경기를 뛰는 선수다. 인구 2억의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18살 때부터 히잡을 썼다는 메가는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같이 더운 나라에서도 히잡을 쓴 채 운동을 했지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메가 선수는 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에게 인도네시아 문화도 소개한다. 그가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동료와 나누어 먹는 모습은 영상으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펼치는 그의 활약은 인도네시아에도 거의 실시간으로 알려진다. 덕분에 정관장 유튜브는 프로배구단 최초로 실버 버튼을 받게 되었고 이제 한국말보다 인도네시아 말 댓글이 더 많이 달린다. 메가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자부심이 되었다. 메가가 인도네시아의 손흥민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시즌 3위를 확정한 정관장이 플레이오프에서도 기세를 몰아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승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기대하는 팬들이 많고 충분히 ‘일을 낼 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미 정관장이 더 많은 연봉으로 내년에도 메가를 잡아두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히잡을 쓴 채로 경기장을 누비는 메가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인도네시아 사람이자 무슬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인들과 인도네시아 인들이 관중석에 뒤섞여 함께 응원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한국에는 3만6000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살고 있다.(2022년 통계) 스포츠 중계에서 무슬림 여성의 히잡이 장시간 노출되고 ‘다름’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대구 대현동에서는 이슬람 사원을 지으려는 무슬림 유학생들의 소박한 소원이자 권리가 주민들의 반대로 몇 년째 막혀 있다. 온갖 구실로 사원 건축을 방해하는 불관용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무슬림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거기에 기생한 편견과 혐오를 키워온 한국에서 메가의 존재는 소중하다. 올봄에 메가와티가 팀을 승리를 이끌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고 싶다. 무슬림을 향한 차가운 시선이 멈추고 대현동에 그들의 사원이 세워져 신자들이 기뻐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그들은 우리의 손님이자 이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3-24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경계를 넘어 함께 걷는 사람들

3월초 접경지역 파주와 연천의 강둑과 들판, 산길과 도로변을 ‘생명평화순례’가 새겨진 녹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걸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사와 불교 스님, 원불교 교무가 함께하는 ‘2024년 DMZ 생명평화순례’는 2월 29일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했다. 4대 종단 20여 명이 유동적으로 참가해 400km를 걸어 3월 21일 동해안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 마친다. 전 구간을 다 걷는 사람도 여럿이다. 순례 이틀째인 3·1절에는 임진각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타종과 순례 선언문 낭독 등의 행사도 했다. 이주 노동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평화누리길’을 걸었다. 장파리공소까지 가서 밤을 지낸 순례단은 셋째 날 연천의 백학공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이날 저녁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는 초대를 받은 나는 ‘이음새’ 이사를 맡은 목사 세 분과 함께 가 순례단에 합세했다. 아침 기온이 영하 10℃였지만 오후에는 조금 풀렸다. 걷는 분들 가운데 아는 얼굴도 여럿 보였다. 접경지대를 4대 종단이 함께 기도하며 걷는 것은 처음이라 더 뜻깊다. 총무 역할을 하며 길 안내를 맡은 성공회의 김현호 신부는 “하루 종일 같이 걷고 식사도 함께 하니 옆에서 코 고는 소리조차 정겹다”고 했다. 10년 전부터 철원 접경지대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본인 잇코 스님도 네팔에서 수행 중인 젊은 스님과 함께 전 구간을 걷고 있다. 날이 추워 빨리 걸은 까닭에 예정보다 두 시간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학공소에서 일행은 떼제의 노래를 배우고 바로 기도를 시작했다. 교파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소리가 우렁차고 아름다웠다. 한국어로 독서를 하고 일본어로도 한 대목 읽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미가 4,3-4 참조 공동번역) 기도 한복판에 자리한 긴 침묵의 시간은 종교인들을 더욱 하나로 모아주었다. 우리는 한반도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미얀마, 남수단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화해의 기운이 사라진 지금, 이 순례는 평화의 불씨를 되살려 보려는 종교인들의 기도 수행이다. “종교가 없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참석자는 “대립과 분열의 시대에 4대 종단이 어울려 순례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며 "돌아가면 주위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경계를 넘어 함께 걷는 모습이 그에게는 어떤 설교나 설법보다 더 와 닿았던 것이다.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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