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노크 소리

똑!똑!똑!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밝고 큰 소리로 반갑게 대꾸하였습니다. 본당 빈첸시오회 자매님이었습니다. 오십견이 와서 불편하다 하시면서도 오늘도 어김없이 도시락과 샌드위치 등을 가져오셨습니다. 마트에서 팔다 남은 걸 가져오십니다. 그 덕분에 생활비 30~40만 원이나 절약됩니다.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알기 쉽게 말하자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사랑 덕분에 요즘 웃음을 도로 찾았습니다. 처음에 본당 빈첸시오회에서 사전 조사를 나왔을 때, 병을 앓거나 가정 경제가 파탄 난 것을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빌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하느님 은총’이라는 말에 힘입어 자존심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 물품과 현금을 빈첸시오회에서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노크 소리에 문을 연 결과입니다. 형편이 좀 웬만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취하고 나면 알바라도 할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감사해하자, 지원을 받자고 생각하며 고맙게 도움의 손길에 손을 내밀고 글을 쓰며 생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저도 도와주시는 여러분 생각하며 제 재주, 글쓰는 능력을 봉헌하고 싶습니다. 이런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좋았던 건 아닙니다. 전에 살던 곳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누가 문을 두들기면 겁부터 났습니다. 한번은 인천도시가스공사에서 남자 직원들이 나왔는데, 겁에 질려 진땀을 흘렸습니다. 지난 부활 대축일에 근처 교회 목사님께서 오셨을 때도 사실 남자 목소리라 문 열기가 좀 그렇더라구요. 하지만 문을 열자 부활 축하 선물로 오렌지와 떡, 달걀 등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날 간식거리가 생각나 화살기도를 했거든요. 주님께서는 목사님을 통해 응답하신 겁니다. 그렇게 믿기로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 맘에 노크를 하십니다. 과거의 슬픔과 어둠에서 벗어나 게으름과 안주에서 벗어나 문을 엽니다. 도시락이나 샌드위치 등이 생기듯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은 걸 주시겠느냐는 말씀에 의지한 결과입니다. 평화와 함께 기쁨이 찾아옵니다. 강건하고 담대해 집니다. 지난 부활 대축일, 봄날이라 문 다 열어놓고 이불 빨래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제 맘에 기쁨의 등불이 켜졌습니다. 미소 지으며 지나가는 이웃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아멘! 글 _ 이선희(수산나·인천 십정동본당)

2024-04-21

[독자마당] ‘손녀 바보’의 간절한 기도

저에게는 60대 중반으로 접어든 현재에도, 코로나19의 위기가 한창이던 암울한 시기에도, 정년퇴임 이후의 일상의 변화로 외로움을 겪던 시간에도, 기다림의 설렘을 가져다주고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을 소중한 선물로 나누어주는 주님의 천사가 있습니다. 이제 39개월의 생명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면서 날로 ‘끌림’을 유발하는 손녀가 바로 그 당사자입니다. 저는 어디서나 공개적으로 ‘손녀 바보’임을 선언하고 주님께 변함없는 은총과 행복을 간구하며 신앙의 힘을 키우고 감사의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손녀 스텔라가 15개월째 되던 달, 어린이집에 등록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아이의 엄마 비비안나, 아빠 바오로가 직장생활을 하는 관계로 육아 보조의 책임을 저와 할머니 데레사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율리아와 바오로 두 자녀를 키워 온 이력이 낯설 정도로 처음에는 온통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에 손녀의 집을 찾아 무심코 초인종을 눌러 한창 잠에 빠진 손녀를 방해하던 우매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낮에 잠을 재워야 할 시간에 자기 싫다는 아이가 측은해 온갖 기분을 맞추려 하다 보니 결국 그날 아이의 낮잠을 빼앗아 일상의 평화를 깨뜨려 따끔한 눈총을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두 해 전에 아이가 코로나19에 감염돼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하느님께 할아버지인 제가 대신 아프게 해 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주일을 기침하며 고열로 고생할 때 감기 증상일 뿐이라고 말하던 동네 의원의 말을 믿고 폐렴 치료의 시기가 늦어 아이의 부모보다 더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 때도 있었습니다. 손녀가 잦은 병치레로 여기저기 동네 병원을 전전할 때는 불면의 시간을 보내며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그저 신앙의 힘으로 치유의 기도만을 열심히 바칠 뿐이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듯이 오늘도 손녀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요즘은 동화 속의 이야기를 역할극으로 함께 만들어 아이의 상상력을 키우려 합니다. 그때마다 어디서 놀라운 생각이 나오는지 하느님께서 빚으신 작품인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 빠져듭니다. 처음에 ‘도깨비’란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손녀가 이제는 “도깨비가 오늘 할아버지 집에 온다고 나한테 말했어요~”라고 은근슬쩍 협박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변신을 유도해 ‘퇴치’해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그러면 온갖 몸동작을 통해 변신을 시도하고 손녀의 마음에 들고자 최선의 연기를 합니다. 손녀는 이런 할아버지를 놀이 친구로 매우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 18,1-6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가끔씩 “할아버지가 좋아~”라고 말하는 손녀가 주님의 큰 상처럼 느낍니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니 오늘도 건강한 할아버지가 되어 손녀와의 동행에 온 힘을 쏟습니다. 이제는 손녀 바보가 되어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퇴임 이후 제2의 삶을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행복과 감사를 나눔과 기부의 신앙으로 이어서 세상의 고통 받고 배고프고 아파하며 외로움에 처한 어린이들의 수호천사가 되도록 기도를 바칩니다! 글 _ 전재학(대건 안드레아·인천교구 중3동본당) 원고량 7.9매

2024-04-14

[독자 마당]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나누는 것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잘하지 못하는데 계속 악기 봉사를 해도 될까?’ 유치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는 청주로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바이올린 배우는 아이들을 보고 ‘나중에 내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꼭 시키고 싶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바이올린을 낑깡거리며 시작했고, 중학교 때부턴 본당의 작은 행사들에서 구색을 맞추는 역할 정도로 바이올린 연주 봉사를 했다. 보통은 환영도 받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 연주가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를 볼 때면 주눅이 들기 일쑤였고, 어려운 기교가 나오는 악보를 켜지 못할 때마다 좌절하고는 했다. ‘왜 나에겐 하느님께서 큰 탈렌트를 주지 않으셨을까’ 심통도 났다. 바이올린 악기를 들고 다니기만 해도 엄청난 실력자로 보는 눈길 때문에 더욱 부담도 됐다. 하지만 어디선가 ‘바이올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안 할 수가 없었다. 안 하면 성경에 나오는 탈렌트를 묻어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망한 마음으로 바이올린 봉사를 한 지도 어느덧 20년쯤 됐을 때였다. 어느 날 성당에서 평범하게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특송으로 바이올린 연주가 흘러나왔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악기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연주를 듣는 사람들도 이런 기분일까?’ 이날부터 나는 바이올린을 ‘잘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가톨릭 성가나 모차르트 미사 음악 정도만이라도 듣기 좋게 연주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 본당에서는 이사를 가자마자 성가대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바이올린 봉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새 성당 신축을 추진 중이어서 작은 가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본당이었기에 더욱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현재는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저녁 미사와 성탄·부활·성모의 밤 등 행사가 있을 때 봉사를 하고 있다. 신부님들께서 신경 써주셔서 미사 때 박수도 받고, “오늘 연주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맞죠? 잘 들었습니다”라는 신자분들의 관심의 말을 들을 때면 바쁜 일상을 쪼개 봉사하는 데 대한 큰 위안이 된다. 또 집 인근 병원의 준본당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고 있는데, 환자분들의 쾌유에 대한 염원을 담아 연주하다 보니 더욱 보람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잘함’의 끝은 없었다. 어느 수준에 도달해도 세계적, 역사적으로 보면 더 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도 계시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왜 저것밖에 못 하나’하고 비웃으실까? ‘잘함’에 집착했던 예전에는 예민하게 들렸던 불협화음이나, 나와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도 거의 무뎌졌다. 특히 봉사에 있어서는 더욱, 잘하는 것보다 정성과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생겼다. 성가대처럼 보여지는 실력이 우선시 되는 단체에서는 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곤 하는데 음악적 완성도보다 조금 더 사랑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공통 감사송 4 : 찬미는 하느님의 은사’ 중) 글 _ 박 아녜스(수원교구 서부본당)

2024-04-07

[독자마당] 고요해져라!

한 처음에 빛과 어두움의 고요하고 적막한 심연 사이로 그분의 영과 함께 생명의 근원인 물이 창조되었네. 너무도 산만하고 혼돈된 삶 안에서 내 안에 어지러운 물결들의 모습을 눈을 감고 침묵하며 바라봅니다. 거친 풍랑과 비바람에 두려워하며 그분께 나아가지 못하고 자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며 들려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고요해져라! 잔잔한 바람과 숨소리처럼 들려오는 그분의 모습과 음성을 잘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깊은 침묵과 고요함으로 귀 기울여봅니다. 우리를 위해 상상하기 어려운 온갖 세상의 시끄럽고 더러운 모욕과 핍박과 고통을 처절한 무언의 피땀으로 견디시며 끝내 숨을 거두시고 비로소 주위가 온전히 고요해지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값진 부활이 이루어졌음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많은 헛된 생각과 말로 인해 그분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거친 풍랑과 비바람 같은 불평과 판단과 미움들의 짙은 어둠과 죄로 가득한 내 안의 흔들리는 물결들을 바라보시며 큰 소리로 외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봅니다. 고요해져라! 참 평화를 주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에 온전히 내어 맡기며 그분의 뜻과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조용히 되뇌어봅니다. 고요해져라! 시_ 한민희(바오로·수원 화서동본당)

2024-03-24

[독자마당] 오늘도 행복합니다

주님! 당신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요 순한 착한 일을 생각하고 따뜻할 내일을 설계해요 그리고 나무를 사랑하고 풀잎과 얘기를 하고 별을 보면서 꿈을 키워요 아침이면 태양 앞에서 희망의 노래도 부르죠 오늘도 나를 기쁘게 해주시는 당신의 온화한 미소를 그리며 저도 미소 지어요 당신은 웃는 제 모습을 예뻐하시죠 거울을 깨끗이 닦고 환한 얼굴도 환한 마음까지도 비춰보죠 당신 앞에 있을 때 그 황홀한 설렘을 경건한 예의로운 말씀과 평화로운 바다가 출렁이는 소리 저는 가난도 두렵지가 않지만 당신에게 미움을 탈까 그것이 두렵죠 당신과 멀어질까 그것이 두렵죠 당신과 영영 만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죠 제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죠 제가 누추해져도 초라해져도 당신이 계시니 든든한 힘이 생겨나죠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제 가슴에 가득하죠 오늘도 산들바람이 불고 냇물은 흐르고 산에서는 예쁜 새들이 날고 이렇게 아름다운 날도 제 안에 당신이 안 계신다면 즐거운 아침 인사도 잊고 살겠죠 춤추는 나비도 날지 않고 슬픔에 젖어있겠죠 향기로운 꽃에 입맞춤도 하지 않겠죠 기쁜 편지도 쓰지 않겠죠 오늘도 소박한 소망으로 시작되는 환희로운 새 날은 당신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께 의지하면서도 어쩌면 푸른 하늘에 흐르는 흰 구름처럼 정처 없을지라도 제 영혼은 당신 품에서 신나게 뛰놀기를 철없는 아이처럼 아무 걱정 없기를 사랑이신 주님께 기도합니다.

2024-03-10

[독자마당] 양말 파는 노인

여느 때와 같이 주일 교중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서둘러 아내와 시내버스에 올랐다. 대전 부사오거리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다리가 불편한지 힘들게 버스에 올라오시는데, 자세히 보니 학교를 방문하면서 양말을 판매하는 안면이 있는 분이셨다. 근처에 사시는가보다 생각하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잠시 후 할머니께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묵주를 꺼내 성호를 긋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15년 넘게 매년 한두 번씩 만났음에도 성함은 물론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깜짝 놀랐고, 무엇보다 그동안 친절하지 않고 고압적인 자세로 대했던 것에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렇다고 당장 사죄를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다음에 학교에서 만나면 정중히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구청에서 내리려는데 그분도 내리시기에 이때다 싶어 얼른 다가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만 원을 가방에 넣어드렸다. 내 얼굴을 어렴풋이 아시는지 “고맙다” 하시며 “어느 학교에 근무하지?” 물으셨다. 미사 시간이 다 되어 “다음에 만나면 말씀드릴게요”하고는 돌아섰고, 할머니께서는 “형제님을 위해 기도할게요!”라고 하셨다. 자매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3월 초 정년퇴직을 하고 초등학교에서 꿈나무 지킴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학년 초인 데다가 업무에 익숙하지 못해 긴장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남루한 차림에 천가방을 든 할머니가 절룩거리며 오셔서는 교감 선생님 면회를 요청하셨다. 약 한 시간쯤 후에 할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셨다. 잠시 후 교감 선생님이 오셔서 “아까 찾아오신 노인분을 아세요?”하고 물으니 웃으시며 “학교를 방문하며 양말을 판매하는 분이신데 대전시 선생님들을 다 안다”면서 차후에는 가급적 교내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2008년에 시작한 지킴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근무하는 여러 학교마다 자매님을 1년에 한두 번씩 만나곤 하였다. 가끔 그분은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쓰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마음속으로는 믿지 않고 생계 수단으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으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오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성당에 들어가 곧바로 무릎을 꿇고 주님께 빌며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주님은 무표정으로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늘 미사 중 성수 예절이 있다는 점이었다. 성수 예절이 진행되는 동안 용서를 구하며 성수가 듬뿍 내게로 뿌려지길 기대했다. 드디어 신부님께서 내 앞으로 다가오셨고 나는 바짝 긴장하여 눈을 감고 주님을 간절히 불렀다. 순간 내 머리 위에 소낙비가 쏟아졌다. 그동안 수 없이 참례한 예절에서는 성수 한두 방울이 고작이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순간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것 같아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고 눈물도 나왔다. 미사 후 성당에 홀로 남아 주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면서 나중에 자매님을 만나면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같은 교회의 지체로서 친절하게 대할 것을 약속했다. “자매님! 꼭! 또 만납시다. 사랑합니다.”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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