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의 들보] 역사 앞에 정직해야

가톨릭 상장례 강의를 위해 교회사를 연구하고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면, 신앙 선조들부터 오늘을 사는 우리에 이르기까지 늘 바람직하게 산 것이 아님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때 우리 교회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반일 항쟁에 대한 교회 장상(長上)의 몰이해,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에 대한 왜곡과 은폐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뜻있는 이들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고자 노력한 덕분에 이제는 감출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일제에 부역한 이들의 명단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때 교회 인사의 이름을 빼라고 강요한 이들이 있었다. 혜택을 누렸다면 그로 인한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건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어떤 수사(修辭)를 들이대더라도 왜곡과 은폐는 십계명의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의 변형이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라는 말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후손이나 후배를 위한다며 이 계명을 어기는 그리스도인이 있는지라 왜곡과 은폐에 대한 몰이해가 불러오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역사를 배웠어도 많은 사람들이 입시 위주로 공부한 탓에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외우는 데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건만 자기 목적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그 학문이 지향하는 바를 외면하고 악용하는 이도 있다. “굳이 좋지 않은 내용을 남길 필요가 있습니까?”라며 분명히 있었던 사실인데도 빼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지난날 혹심한 박해로 인해 기도서·교리서·예식서 등에 있는 한글만 겨우 깨친 신앙의 선조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시편 139,7-8)라는 말씀을 듣거나 본 적이 없었을지라도 “교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라는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 세대에까지 물려주었다. 왕실도, 민간도 역사의 현장을 문헌으로 남겼고, 교회도 자기 삶을 분명하게 기록했다. 개인이나 집단의 판단 부족, 잘못된 결정, 어리석은 행동을 나머지 구성원이 수정‧보완한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족과 잘못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겠다는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 이 세상은 선한 것으로만 이뤄지지 않아 악한 세력이 넘보기도 하지만, 악독한 기운은 바깥보다 자기 안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는다. 성령께서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을 늘 지켜보시면서 바르게 이끄심을. 주님께서는 인간 각자의 능력에 맞는 고통을 주신다고 배웠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헤쳐가려는 노력은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지만, 성령께서 그저 쳐다보고 계시지 않는다는 믿음도 이어받았다. 누구나 잘못 저지른 행동을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고 감추거나 억지로 변명하면 더 큰 잘못에 빠질 뿐이다. 늘 어제를 뒤돌아보며 반성하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잘못을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므로 더 큰 부족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야 할 길이기에···. 글 _ 박명진 시몬(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상장례 강사)

2024-05-19

[독자마당] 선배 어르신의 봉사와 사랑 정신 잊지않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이신 어르신들은 오랜 시간 어떤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이어오시고, 주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셔서 오늘의 가톨릭교회를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저희 대구 칠곡본당(주임 장희만 베드로 신부)은 그런 선배 신앙인들을 생각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5월 5일 교중미사 후 저희 본당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팔순의 축복에 감사드리며 7분의 원로인 류은하 스테파노, 배종찬 대건 안드레아, 윤학수 베드로, 이월근 대건 안드레아, 정병준 알베르토, 최동수 세바스티아노, 최정수 프란치스코 어르신을 모시고 본당 신자들과 함께 팔순잔치를 열었습니다. 팔순잔치는 먼저 장희만 주임신부님께서 팔순을 맞으신 어르신들에게 꽂다발과 꽃 목걸이를 드리는 예식으로 시작됐습니다. 이어 축하 떡케이크를 자르고 성가대의 축하곡이 선사됐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이어진 축하연은 푸짐한 음식과 어르신들을 축하하는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 그야말로 행복한 잔치였습니다. 선배 어르신들께서 지난날 베풀어주신 봉사와 사랑을 생각하며, 후배인 저희도 그 정신을 본받아 하느님 자녀로서의 길에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다짐한 하루였습니다. 글 _ 권용현 프란치스코(대구 칠곡본당)

2024-05-12

[독자마당] 가시 없는 장미송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립니다. 덩달아 가슴이 열리며 심장의 붉은 색 날숨이 창공에 뿌려집니다. 로마의 창끝에 아파하였던 대지는 이렇게 핏빛이었습니다. 장미꽃 그 속에 감추어진 가시는 로마의 붉은 대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기억 속의 로마가 창끝의 핏빛이었기에 장미꽃 가시가 아프기만 합니다. 아드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찬란하고 영롱하신 빛의 색깔로 부활하셨습니다. 위대하신 분,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 그분의 어머니가 ​ 저희의 영원하신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니! 5월은 화려합니다. 저희는 환호합니다. 성모님! 5월은 붉습니다. 저희는 붉은 장미가슴 가득하게 안아봅니다. 창공에 뿌렸던 붉은 날숨이 장미꽃 송이마다 춤추라고 속삭입니다. 어머니! 이제는 가시없이 춤추는 장미를 두르십시오. 기억합니다. 아랫목의 이불속 꽁보리밥 식을까 노심초사하시며, 허기를 달래시며 저희를 먹이셨던 세상의 어머니, 얼음 냇물 빨래터에서 누더기 옷 하얘지라고 손이 시리셨던 세상의 어머니, 머나먼 길, 성전 찾아 기도하셨던 어머니, 아드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픔을 감추시고 두 손 모으셨던 천상의 어머니, 이제, 쓰라림 버리시고 아름답게 피어나십시오. 어머니! 가시는 멀리하시고 장미꽃 향기만 맡으십시오. 어머니! 꼬마의 작은 손으로 묵주송이 돌리며 작은 장미꽃 만들겠습니다. 농부의 투박한 손으로 비뚤지만 커다란 장미꽃 만들겠습니다. 묵주송이 알알이 가슴속 공경의 날숨으로 불어 넣겠습니다. 저희 모두 안개꽃 다발되어 묵주송이 감싸겠습니다. 오늘을 허락하시고 매일을 기억하시는, 저희의 모든 것을 아끼시는 어머니, 굴리는 묵주알 소리로 어머니 귓전에 조심스레 다가섭니다. 가슴에 담은 ‘성모송’ 어머니께 바칩니다. 어머니! 나약한 영혼의 미약한 묵주기도, 향기 머금으신 웃음으로 받아 주시니, 여린 가슴 다져지고 차가운 가슴 녹아내립니다. 천상의 어머니! 저희의 성모님! 오늘 이 밤 세상은 기뻐하며 꽃향기 가득한 어머니를 공경합니다. 5월의 장미는 모두 어머니의 것입니다. 5월의 찬란함은 원래 어머니의 것이옵니다. 겸손하신 어머니! 기뻐 하십시오. 그리지 못하는 그림, 부르지 못하는 노래이지만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심장의 붉은 색 날숨으로 가슴에 그리며 장미꽃 송이마다 조용히 노래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시 _ 이재복(벨라도·마산교구 고성본당)

2024-05-05

[독자마당] 노크 소리

똑!똑!똑!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밝고 큰 소리로 반갑게 대꾸하였습니다. 본당 빈첸시오회 자매님이었습니다. 오십견이 와서 불편하다 하시면서도 오늘도 어김없이 도시락과 샌드위치 등을 가져오셨습니다. 마트에서 팔다 남은 걸 가져오십니다. 그 덕분에 생활비 30~40만 원이나 절약됩니다.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알기 쉽게 말하자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사랑 덕분에 요즘 웃음을 도로 찾았습니다. 처음에 본당 빈첸시오회에서 사전 조사를 나왔을 때, 병을 앓거나 가정 경제가 파탄 난 것을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빌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하느님 은총’이라는 말에 힘입어 자존심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 물품과 현금을 빈첸시오회에서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노크 소리에 문을 연 결과입니다. 형편이 좀 웬만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취하고 나면 알바라도 할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감사해하자, 지원을 받자고 생각하며 고맙게 도움의 손길에 손을 내밀고 글을 쓰며 생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저도 도와주시는 여러분 생각하며 제 재주, 글쓰는 능력을 봉헌하고 싶습니다. 이런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좋았던 건 아닙니다. 전에 살던 곳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누가 문을 두들기면 겁부터 났습니다. 한번은 인천도시가스공사에서 남자 직원들이 나왔는데, 겁에 질려 진땀을 흘렸습니다. 지난 부활 대축일에 근처 교회 목사님께서 오셨을 때도 사실 남자 목소리라 문 열기가 좀 그렇더라구요. 하지만 문을 열자 부활 축하 선물로 오렌지와 떡, 달걀 등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날 간식거리가 생각나 화살기도를 했거든요. 주님께서는 목사님을 통해 응답하신 겁니다. 그렇게 믿기로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 맘에 노크를 하십니다. 과거의 슬픔과 어둠에서 벗어나 게으름과 안주에서 벗어나 문을 엽니다. 도시락이나 샌드위치 등이 생기듯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은 걸 주시겠느냐는 말씀에 의지한 결과입니다. 평화와 함께 기쁨이 찾아옵니다. 강건하고 담대해 집니다. 지난 부활 대축일, 봄날이라 문 다 열어놓고 이불 빨래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제 맘에 기쁨의 등불이 켜졌습니다. 미소 지으며 지나가는 이웃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아멘! 글 _ 이선희(수산나·인천 십정동본당)

2024-04-21

[독자마당] ‘손녀 바보’의 간절한 기도

저에게는 60대 중반으로 접어든 현재에도, 코로나19의 위기가 한창이던 암울한 시기에도, 정년퇴임 이후의 일상의 변화로 외로움을 겪던 시간에도, 기다림의 설렘을 가져다주고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을 소중한 선물로 나누어주는 주님의 천사가 있습니다. 이제 39개월의 생명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면서 날로 ‘끌림’을 유발하는 손녀가 바로 그 당사자입니다. 저는 어디서나 공개적으로 ‘손녀 바보’임을 선언하고 주님께 변함없는 은총과 행복을 간구하며 신앙의 힘을 키우고 감사의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손녀 스텔라가 15개월째 되던 달, 어린이집에 등록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아이의 엄마 비비안나, 아빠 바오로가 직장생활을 하는 관계로 육아 보조의 책임을 저와 할머니 데레사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율리아와 바오로 두 자녀를 키워 온 이력이 낯설 정도로 처음에는 온통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에 손녀의 집을 찾아 무심코 초인종을 눌러 한창 잠에 빠진 손녀를 방해하던 우매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낮에 잠을 재워야 할 시간에 자기 싫다는 아이가 측은해 온갖 기분을 맞추려 하다 보니 결국 그날 아이의 낮잠을 빼앗아 일상의 평화를 깨뜨려 따끔한 눈총을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두 해 전에 아이가 코로나19에 감염돼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하느님께 할아버지인 제가 대신 아프게 해 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주일을 기침하며 고열로 고생할 때 감기 증상일 뿐이라고 말하던 동네 의원의 말을 믿고 폐렴 치료의 시기가 늦어 아이의 부모보다 더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 때도 있었습니다. 손녀가 잦은 병치레로 여기저기 동네 병원을 전전할 때는 불면의 시간을 보내며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그저 신앙의 힘으로 치유의 기도만을 열심히 바칠 뿐이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듯이 오늘도 손녀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요즘은 동화 속의 이야기를 역할극으로 함께 만들어 아이의 상상력을 키우려 합니다. 그때마다 어디서 놀라운 생각이 나오는지 하느님께서 빚으신 작품인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 빠져듭니다. 처음에 ‘도깨비’란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손녀가 이제는 “도깨비가 오늘 할아버지 집에 온다고 나한테 말했어요~”라고 은근슬쩍 협박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변신을 유도해 ‘퇴치’해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그러면 온갖 몸동작을 통해 변신을 시도하고 손녀의 마음에 들고자 최선의 연기를 합니다. 손녀는 이런 할아버지를 놀이 친구로 매우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 18,1-6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가끔씩 “할아버지가 좋아~”라고 말하는 손녀가 주님의 큰 상처럼 느낍니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니 오늘도 건강한 할아버지가 되어 손녀와의 동행에 온 힘을 쏟습니다. 이제는 손녀 바보가 되어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퇴임 이후 제2의 삶을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행복과 감사를 나눔과 기부의 신앙으로 이어서 세상의 고통 받고 배고프고 아파하며 외로움에 처한 어린이들의 수호천사가 되도록 기도를 바칩니다! 글 _ 전재학(대건 안드레아·인천교구 중3동본당) 원고량 7.9매

2024-04-14

[독자 마당]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나누는 것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잘하지 못하는데 계속 악기 봉사를 해도 될까?’ 유치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는 청주로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바이올린 배우는 아이들을 보고 ‘나중에 내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꼭 시키고 싶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바이올린을 낑깡거리며 시작했고, 중학교 때부턴 본당의 작은 행사들에서 구색을 맞추는 역할 정도로 바이올린 연주 봉사를 했다. 보통은 환영도 받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 연주가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를 볼 때면 주눅이 들기 일쑤였고, 어려운 기교가 나오는 악보를 켜지 못할 때마다 좌절하고는 했다. ‘왜 나에겐 하느님께서 큰 탈렌트를 주지 않으셨을까’ 심통도 났다. 바이올린 악기를 들고 다니기만 해도 엄청난 실력자로 보는 눈길 때문에 더욱 부담도 됐다. 하지만 어디선가 ‘바이올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안 할 수가 없었다. 안 하면 성경에 나오는 탈렌트를 묻어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망한 마음으로 바이올린 봉사를 한 지도 어느덧 20년쯤 됐을 때였다. 어느 날 성당에서 평범하게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특송으로 바이올린 연주가 흘러나왔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악기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연주를 듣는 사람들도 이런 기분일까?’ 이날부터 나는 바이올린을 ‘잘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가톨릭 성가나 모차르트 미사 음악 정도만이라도 듣기 좋게 연주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 본당에서는 이사를 가자마자 성가대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바이올린 봉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새 성당 신축을 추진 중이어서 작은 가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본당이었기에 더욱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현재는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저녁 미사와 성탄·부활·성모의 밤 등 행사가 있을 때 봉사를 하고 있다. 신부님들께서 신경 써주셔서 미사 때 박수도 받고, “오늘 연주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맞죠? 잘 들었습니다”라는 신자분들의 관심의 말을 들을 때면 바쁜 일상을 쪼개 봉사하는 데 대한 큰 위안이 된다. 또 집 인근 병원의 준본당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고 있는데, 환자분들의 쾌유에 대한 염원을 담아 연주하다 보니 더욱 보람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잘함’의 끝은 없었다. 어느 수준에 도달해도 세계적, 역사적으로 보면 더 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도 계시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왜 저것밖에 못 하나’하고 비웃으실까? ‘잘함’에 집착했던 예전에는 예민하게 들렸던 불협화음이나, 나와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도 거의 무뎌졌다. 특히 봉사에 있어서는 더욱, 잘하는 것보다 정성과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생겼다. 성가대처럼 보여지는 실력이 우선시 되는 단체에서는 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곤 하는데 음악적 완성도보다 조금 더 사랑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공통 감사송 4 : 찬미는 하느님의 은사’ 중) 글 _ 박 아녜스(수원교구 서부본당)

2024-04-07

[독자마당] 고요해져라!

한 처음에 빛과 어두움의 고요하고 적막한 심연 사이로 그분의 영과 함께 생명의 근원인 물이 창조되었네. 너무도 산만하고 혼돈된 삶 안에서 내 안에 어지러운 물결들의 모습을 눈을 감고 침묵하며 바라봅니다. 거친 풍랑과 비바람에 두려워하며 그분께 나아가지 못하고 자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며 들려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고요해져라! 잔잔한 바람과 숨소리처럼 들려오는 그분의 모습과 음성을 잘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깊은 침묵과 고요함으로 귀 기울여봅니다. 우리를 위해 상상하기 어려운 온갖 세상의 시끄럽고 더러운 모욕과 핍박과 고통을 처절한 무언의 피땀으로 견디시며 끝내 숨을 거두시고 비로소 주위가 온전히 고요해지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값진 부활이 이루어졌음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많은 헛된 생각과 말로 인해 그분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거친 풍랑과 비바람 같은 불평과 판단과 미움들의 짙은 어둠과 죄로 가득한 내 안의 흔들리는 물결들을 바라보시며 큰 소리로 외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봅니다. 고요해져라! 참 평화를 주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에 온전히 내어 맡기며 그분의 뜻과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조용히 되뇌어봅니다. 고요해져라! 시_ 한민희(바오로·수원 화서동본당)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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