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전대사는 ‘면죄부’다?

‘면죄부(免罪符)’라는 말은 ‘책임이나 죄를 없애 주는 조치나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사실 ‘대사(大赦, indulgentia)’가 잘못 번역된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대사는 교회가 정한 조건을 채우면 잠벌을 면해 주는 것(교회법 제992조 참조)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는데요. 잠벌은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와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받는 벌입니다. 이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을 ‘전대사’, 일부를 없애 주는 것을 ‘부분 대사’라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데 왜 벌이 남아있는 걸까요?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을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벌은 고해성사를 통해 벗어나게 되지요. 반면 모든 죄는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도 가져오는데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3항) 교회는 이를 생전에, 혹은 죽은 뒤 연옥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를 통해 잠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 견디고, 또 자비와 자선의 행위, 기도와 속죄 행위들로 잠벌을 정화해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잠벌을 정화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 도움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받은 교회는 대사를 통해 그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대사는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에 대한 증서를 표현하자면 ‘대사부’가 바른 번역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면죄부’라는 오역이 생긴 것일까요? 대사가 남용됐던 역사에서 비롯한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 반박문」에서 “연옥 영혼에게 벌의 면제를 전구의 방식으로 베푸는 것은 옳은 행위”라고 대사의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 소리를 내는 즉시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오른다”고 설교하며 대사를 파는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잘못된 설교와 증서 발부로 인해 신자들이 대사의 의미를 잊고 ‘돈을 내면 죄가 사라진다’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면죄부’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자 최근에는 역사학계나 교과서 등에 ‘면벌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후 교회는 대사의 남용을 바로잡고자 트리엔트공의회 「대사에 대한 교령」을 통해 “대사를 얻기 위한 모든 부적절한 돈벌이들을 전적으로 철폐”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전대사의 수를 줄이고 신자들이 전대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규범을 수정했습니다. 대사는 ‘면벌’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신심과 참회와 사랑의 행위, 특히 신앙의 성장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행위”를 북돋는 역할도 합니다. 또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봉헌하는 것은 “탁월한 사랑의 실천이자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령 「대사 교리」 8항)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가톨릭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종종 길거리에서 ‘유월절’을 알려주시겠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요. 그 설명을 듣다 보면 ‘가톨릭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과월절’,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성경」에서는 ‘파스카’라고 번역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를 말합니다. 우리에겐 파스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요. 파스카(πασχα, Pascha)는 ‘거르고 지나가다’라는 의미로, 유월(逾越)·과월(過越) 모두 이 뜻을 한자로 옮긴 말입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실 때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재앙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탈출 12,13)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탈출 12,14)면서 파스카 축제를 제정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파스카 축제에는 어린 양을 잡아 불에 굽고,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습니다. 심지어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쥔 채 서둘러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예식을 한 기억이 없으실 겁니다.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통해 파스카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난 전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라 하시며,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지내던 파스카 축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의 피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새로운 파스카 축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를 거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특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간 첫날, 즉 주일에 기념하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 특히 주님 부활 대축일에 더욱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주일에 모여 기도하고, 또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1코린 11,26)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파스카는 단순히 기념일이나 축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파스카를 통해 옛것을 버리고 새로 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기도 끝에 꼭 ‘아멘’을 해야 할까?

우리는 기도를 “아멘”으로 끝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끝에 아멘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기도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아멘이 뭐길래 이렇게 자주 말하는 걸까요? 실은 아멘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기도 끝에 하는 아멘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아멘은 ‘믿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확실하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으로, 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확인할 때, 하느님의 심판이나 저주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표현할 때, 하느님을 찬양할 때 그리고 시편의 찬미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주로 기도와 찬미의 끝에 아멘을 사용합니다. 서간을 보면 기도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끝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 바오로 사도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초심자가 어떻게 그대의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1코린 14,16)라며 신령한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기도 하는데요. 초대교회에서도 오늘날 우리처럼 교회 공동체가 모여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멘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멘은 예수님도 자주 사용하신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에서 “진실로”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이 사실 아멘입니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마태오복음에서 30번, 마르코복음에서 13번, 루카복음에서 6번, 요한복음에서 25번 말씀하십니다. 특히 아멘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고 아멘을 두 번씩 반복해서 사용하시는데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아멘의 하느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사 65,16)으로 번역됐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멘’이시다”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5항)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2코린 1,20)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 아멘이십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아멘을 받아서 완성해 주십니다. 기도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아멘만큼 훌륭하게 기도를 마무리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8면

[교회상식 더하기] 시노달리타스? 왜 우리말 번역은 없을까

교회의 여러 문헌이나 교육 등을 통해 많은 분이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꾸 들어도 ‘무슨 뜻이었더라?’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곤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면 기억하기도 쉽고, 이해도 빠를 것 같은데 왜 ‘시노달리타스’는 우리말 번역어가 없는 걸까요? 실은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번역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2021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원어 그대로 ‘시노달리타스’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번역어로는 새로운 개념인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온전히 담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에서 온 말입니다. 시노드(synodus)는 그리스어로 ‘함께(syn)’와 ‘길(hdos)’을 합성해 ‘함께 가는 길’이란 뜻에서 온 말로, 라틴어 콘칠리움(concilium)과 더불어 공의회를 일컫는 말로 쓰여왔습니다. 이 시노드의 형용사형 ‘시노달레’(synodale)에 명사형 어미 ‘타스’(-tas)를 결합시킨 단어가 시노달리타스입니다. 문자로만 보면 공의회적인, 그러니까 공의회가 보여준 활동의 방식·특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노드의 경우 하나의 사건으로, ‘함께 모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라는 용어에서 유래했고, 의미 면에서도 많이 통하지만, 의사결정에 대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삶의 방식, 교회가 사명을 수행하는 활동에 대한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라는 번역으로는 시노달리타스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교회의 삶과 사명은 2000년 넘게 이어져 왔고, 초대교회나 지금의 교회나 같은 교회인데, 이것이 왜 새로운 개념일까요? 물론 교회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시대나 상황에 따라 교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새롭게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정의합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항)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고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선언합니다.(9항)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길과 품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11항 참조) 시노달리타스란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사명을 위해 서로를 협력자로 존중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찾아 실현해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민주주의나 의회주의와 다릅니다. 구성원의 소리를 경청하지만, 구성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식별한 성령의 말씀에 따라 각자의 고유한 은사에 따라 서로 다른 직무 안에서 제 몫을 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교회의 사명을 향한 길을 걸어갑니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에는 ‘아빠’가 많다?

아기가 태어나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역시 ‘엄마’, ‘아빠’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아기가 발음하기 쉬운 발음이다 보니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언어권에서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르는 유아어가 ‘엄마’, ‘아빠’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아람어에서도 ‘아버지’의 유아어는 ‘아빠(abba)’입니다. 아람어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중동지방에서 널리 사용되던 언어인데요. 우리말과 의미도 비슷해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를 부를 때, 또 성장한 뒤에도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아빠(abba)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아빠에서 유래한 호칭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바로 아빠스입니다. 이집트, 시리아 등 동방 지역에서 수도자들은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로 자신들의 스승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에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원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아빠스의 직무와 역할이 체계화됐습니다. 오늘날 아빠스는 주로 성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서」를 따르는 대수도원에서 장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대수도원이 ‘아빠티아(Abbatia)’입니다. 아빠티아는 수도원을 일컫는 영어 ‘Abbey’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여자 대수도원장은 ‘아빠티사(Abbatissa)’라고 부릅니다. 모두 아빠에서 온 말입니다. 사실 아빠스 말고도 교회 안에는 아빠가 많습니다. 일단 교황님을 뜻하는 ‘파파(Papa)’가 그렇습니다. 발음 면에서도 아빠와 유사한데요. 파파는 아버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파스(πάπας)’에서 온 말입니다. 본래 교구장·대수도원장 등 지역 교회의 최고 장상을 부르던 말인데, 8세기 이후부터 로마교구장, 바로 교황님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사도들을 이어 교회를 이끌고 신앙을 가르치는 ‘교부(敎父, pater ecclesiae)’도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의 말입니다. 더 가깝게는 ‘신부(神父, pater spiritualis)’님도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의 호칭이지요. 교회 안에 이렇게 많은 아빠가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아빠들은 한 분이신 아빠를 향해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앞서 ‘abba’가 아람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람어는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언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소리와 같은 의미로,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아주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르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해주셨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됐다”고 가르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2항, 갈라 4,6 참조) 혹시 하느님이 멀고 어려우신가요? 그렇다면 한 번 “아빠”라고 친근하게 불러보면 어떨까요?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는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성경은 단순히 가르침이 적힌 책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가 글로 담겨지고 표현되어 보존된 것”이라면서 “사도의 신앙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을 그 각 부분과 함께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여깁니다. 사람이 기록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몸소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셨기에 궁극적으로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되기를 바라신 진리가 성경에 담겨 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 11항 참조) 이처럼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기에 교회는 성경의 말씀으로 구원의 양식과 거룩한 힘을 얻고, 성경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합니다. 미사 입당에도 사제에 앞서 성경(복음서)이 행렬하고, 교회가 거행하는 모든 전례 안에 성경의 말씀이 함께하지요. 성경이 지닌 위상이 이렇듯 특별하다 보니 우리 신앙이 모두 성경으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항)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말씀’이란 바로 사람이 되시어 살아계신 말씀,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요한 1,14 참조)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사람의 방식으로 썼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바로 성경 저자들이 살아간 시대와 문화뿐 아니라 당시의 문학 유형, 이해·표현·서술 방식 등을 알아야 성경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먼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단일성에 유의”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 46권과 신약 성경 27권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의 동일한 한 ‘말씀’이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聖傳)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성전은 사도들에게서 이어온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 그리고 성령을 통해 배운 것을 전해온 교회의 거룩한 전승입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믿으며, 이 둘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상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의 유비”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신앙 진리들이 서로 일관성을 지녀야 하고, 또 계시의 전체 계획 안에서 일관성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에서 특정 한 구절만 가져와서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 그 교리는 틀렸다”는 식의 해석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계시헌장」 12항 참조) 성경 해석이 너무 어려우신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신부님들께서 강론을 통해 이런 기준에 따라 해석한 성경 내용을 잘 풀이해 주실 테니까요. 거기에 교회가 마련한 성경공부도 하면 금상첨화일 듯합니다.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만 세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비신자가 많이 방문하는 성당이나 큰 행사 등에서는 미사 중 성체 분배에 앞서 해설자가 이렇게 안내하는 것을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천주교(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들만 성체를 모실 수 있습니다”라고요.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는 물론이고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가톨릭교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성사를 교류할 수 없는 이유는 교리·신앙이나 성사, 제도 등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들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한 세례가 아니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든지 적법한 방식으로 이뤄진 세례라면 가톨릭교회에서도 유효합니다.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가톨릭교회로 입교하는 분이 계시다면 먼저 물로 씻는 예절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세례를 받는 본인과 세례를 준 집전자의 의향이 적합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켜진다면 꼭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례는 유효합니다.(「교회법」 제869조 2항 참조) 이 기준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는 성공회와 정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별도로 물로 씻는 예절과 천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형식을 확인할 수 있으면 인정합니다. 만약 적법한 세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면 조건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세례가 불확실하거나 유효하지 못하다면”이라는 조건을 두고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비가톨릭 그리스도교파의 세례 유효성 관련 사목 지침」 참조) 이처럼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직제에 있어 온전한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은 분이 가톨릭교회에 입교할 때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포함한 교리교육을 받은 후에 ‘일치 예식’을 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일치교령」 3항 참조)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일치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교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길 희망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반려동물도 세례받을 수 있을까?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10가구 중 3가구(약 28.6%)는 집에서 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동물보호법」은 이렇게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가까이에서 교감하며 생활하는 동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다 보니 우리 집 강아지나 고양이도 세례받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다 보니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동물에게는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모든 ‘사람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교회법 864조 참조) 기본적으로 세례성사를 비롯해 교회의 모든 성사와 전례는 ‘믿는 사람’을 위해 거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세례성사에 관해 말씀하시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3,5-15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례성사 때 “여러분은 무엇을 청합니까?”라는 주례자의 질문에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답하고, 이어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물음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사람도 아니고, ‘믿음이 있다’고도 보기 어렵지요. 그렇다고 동물이 구원과 관련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홍수 때 동물들도 방주에 태워 구해주시고, 홍수가 끝난 뒤 인간뿐 아니라 방주에 탄 모든 동물도 계약에 참여시켜 주십니다.(창세 9,9-10 참조) 이 홍수는 세례성사의 예표기도 하지요. 교회는 “짐승들도 인간의 속죄 의식에 참여해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축복 예식」 728항 참조)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영혼을 식물의 생장혼, 동물의 감각혼, 인간의 이성혼으로 구분했는데요. 동물의 감각혼은 인간과 달리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죄는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항)입니다. 그러니 동물들이 ‘죄를 짓는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통해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라고 고백합니다. 죄를 짓지 않은 동물에게 세례는 필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마 많은 분이 신앙 안에서 동물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싶을 겁니다. 그렇다면 ‘동물 축복 예식’이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동물 축복 예식은 이탈리아에서는 동물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1월 14일)에, 세계적으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10월 4일)에 하는 등 성인의 축일에 열리곤 합니다. 최근에는 한국교회에도 ‘동물 축복 예식’을 하는 본당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교회 상식 더하기] 동방 박사는 세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 “동방 박사는 몇 사람인가요?”라고 질문하면 많은 분이 “세 사람!”이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의 왕’이라는 의미로, 삼왕(三王)이라 부르기도 하니, 세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교회 지식에 해박하신 분들은 이 세 사람의 이름이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라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동방 박사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은 분들도 계실 테고요. 그런데 동방 박사의 이야기가 실린 마태오복음(2, 1-11)을 잘 읽어보면 동방 박사를 ‘박사들’이라고 여러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그 수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지하 묘소인 카타콤바의 벽화에서는 동방 박사를 세 명으로 표현한 작품 외에도 두 명이나 네 명으로 표현된 작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덟 명 심지어 열두 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 박사는 세 명이라는 인식이 정착됐고, 6세기 무렵에는 이름도 퍼졌습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으로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기 예수님께 봉헌한 예물 때문입니다.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세 가지 예물에서 세 사람을 연상한 것이지요. 이 예물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드러내기에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단순히 세 가지 예물에 맞춘 숫자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성 베다 신부(673~735)는 「마태오복음서 주석」에서 “영적으로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세계의 세 부분,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또는 노아의 세 아들(셈·함·야펫)로부터 씨를 얻은 사람들의 종족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은 그 당시 이해하던 세상 전체고, 노아의 세 아들들은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을 쓸어간 대홍수 이후 세상에 인류를 퍼트린 조상입니다. 다시 말해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미술 안에서도 동방 박사를 백인, 흑인, 황인으로 그리거나, 혹은 청년, 장년, 노년으로 그렸습니다. 모든 인종, 모든 세대의 사람을 표현한 것이지요. 그 안에는 2026년 오늘 이곳에 있는 우리도 포함돼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서 「놀라운 표징」을 통해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집으로 돌아온 동방 박사들은 분명 메시아와의 이 놀라운 만남을 다른 이에게 전했으며 그리하여 민족들 사이에 복음 전파가 시작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만남’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성당에서 구유에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가 바로 또 하나의 동방 박사가 아닐까 합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성직자가 아니어도 ‘강복’할 수 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미사의 마침 예식 중 우리는 신부님을 통해 강복을 받습니다. 미사 때만이 아닙니다. 다른 성사에서도, 그리고 기도, 모임 등에 신부님이 함께하시면 강복을 받곤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는 기도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강복 받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교님이나 교황님의 강복을 받는 일은 더 그렇지요. 그러다 보니 강복이라 하면 성직자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문득 하느님의 복을 청하는 기도가 강복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강복, 다시 말해 ‘축복’은 준성사에 해당합니다. 준성사란 우리가 아는 일곱 가지 성사를 모방해서 교회의 간청을 통해 영적 효과를 얻을 수 있고, 또 이를 보여주는 거룩한 표지입니다. 성사의 집전자가 성직자인 것처럼 교회법은 “준성사들의 집전자는 합당한 권력을 받은 성직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1168조) 이렇게 보면 ‘아, 역시 성직자만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준성사의 거행은 보편 사제직에 속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이 사제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이 ‘복’이 되어야 하며 남을 축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9항) 다만 교회 생활과 성사 생활에 더 밀접한 축복은 서품을 받은 성직자만 할 수 있습니다. 「축복 예식」을 보면 평신도가 어떻게 축복 예식을 집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축복 예식」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축복 예식서들을 모은 전례서입니다. 사람을 축복하는 예식에서부터 신자들의 생활과 건물, 성당 기물, 신심 증진을 위한 물건 축복 등 다양한 축복 예식들이 실려 있습니다. 「축복 예식」에는 평신도가 집전할 수 있는 예식도 많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자녀 축복 예식’과 같이 “부모나 사제나 부제가 집전할 수 있다”고 평신도인 ‘부모’를 집전자로 명시하는 경우도 있고, ‘병자를 위한 축복 예식’, ‘새 집 축복 예식’ 등 많은 예식서들이 평신도 집전자를 위한 예식문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 실은 축복 예식이 아니어도 이미 우리는 일상 안에서 자주 강복을 청하고 있습니다. ‘식사 전 기도’에서는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저녁 기도’에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지켜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렇지요. 공적 전례가 아닌 개인의 기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우리 자신과 주변, 이웃을 위한 축복을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의 복을 빌어 주며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롭게 해가 시작되는 오늘, 가족·친구·이웃에게 세속적인 복만을 빌어 주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청하며 기도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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