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미사 전례] 예물 준비 성가? 봉헌 노래?

오랫동안 성가대 봉사를 하신 신자분이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해야 하나요? 봉헌 노래라고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전례위원회에서 2008년 라틴어 제3표준 개정판의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 용어에 대해 논의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라틴어인 ‘cantus ad offertorium’(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7, 74항)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미 2009년에 발간된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에서는 ‘예물 준비 성가’라고 표현을 했었기에 이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직역을 하여 ‘봉헌 노래’라고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다른 언어권에서의 번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직역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 개정판에는 ‘봉헌 노래’(57항)를 기본으로 하고 옆에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하여,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지요. 봉헌 노래는 신자들이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가는 행렬에 동반하며, 적어도 예물을 제대 위에 차려 놓을 때까지 계속하는데, 분향이 이어질 경우에는 분향을 마칠 때까지 노래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상을 차리고 고유 음식인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을 ‘예물 준비’라고 하며, 이는 최후 만찬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드셨던 빵과 포도주와 물을 제대로 가져가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초기에는 교우들이 예물을 아무런 기도나 노래 없이 행렬을 지어 제대로 가져갔으나, 4세기 말경부터 행렬이 더욱 길어지고 예물 봉헌의 의미를 드러내는 행렬에 동반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8세기까지 동방이든 서방이든 누룩 든 일반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했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 서방에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때 사용하는 누룩 안 든 빵 사용을 도입하였고, 11세기경에는 현재와 같은 작은 제병들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은 여전히 누룩 든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합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는 ‘예물 준비 기도’는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파스카 축제, 학가다에 포함된 축복 기도인 베라카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빵 축복 기도는 빵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땅의 열매이며 인간 노동의 결실임을 기억하고, 이 빵을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생명의 빵인 주님의 몸이 되게 해주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포도주에 물을 섞는 이유는 고대 관습이 그대로 예식에 들어온 것으로, 의미는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인간인 신자 공동체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잔 축복 기도는 포도나무를 가꾸어 얻은 결실인 술을 주님께 돌려드리니 구원의 음료, 곧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피가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의 예물로 준비하며 아버지 하느님께 이 빵과 포도주를 마치 우리를 보듯 보아 달라고 청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준비합니다. 예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물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곧 주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놓으시듯,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봉헌되는 제물처럼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9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보편지향기도’인가 ‘신자들의 기도’인가?!

신학생 때 읽었던 책 중 요즈음 다시 읽는 책이 있습니다. 루이 에블리의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인데,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주 적게 기도하고 보기 드물게 기도하며 또 보잘 것 없이 기도한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몹시 분주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활은 활동과 혼란, 때로는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 … 즉 우리는 일을 정지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며 기도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통찰력있는 지적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혼자보다는 이웃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1-2; 2코린 1,11; 에페 6,18-19 참조). 이러한 모범에 따라 교회는 이미 1세기 말경부터 세상 구원을 위한 특별기도를 전례 중에 바쳤습니다. 95년경에 기록된 클레멘스 교황 저서에는 고통받는 이, 국가 지도자, 평화 등을 위한 여러 청원 기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론 후 예비 신자들을 보낸 다음 신자들만 남아서 이 기도를 바쳤는데, 기도 내용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예비 신자들과 모든 이의 구원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전통이 남은 형태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바치는 ‘보편지향기도’인데, 당대의 기도 내용과 형식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사라진 원인은 전례 시간을 줄이려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전례 역사가 테오도로 클라우저는 「서방 전례의 역사」에서 밝힙니다. 현재의 ‘신자들의 기도’와는 달리 기도의 수가 많았고, 각 기도 다음에 주례자의 본기도가 있어서 다소 장황했으며, 반복이 잦아서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축일 미사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는 것을 문제 삼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개혁을 통해 신자들의 기도를 없앴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현재의 자비송이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1400여 년 전 사라졌던 ‘신자들의 기도’의 가치를 인정하여 복구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용어인 ‘신자들의 기도’(oratio fidelium)와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기도’(oratio communis)를 ‘보편지향기도’(oratio universalis)로 대신하면서, 누가 기도하고, 어떤 지향으로 해야 하는 지를 더욱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 기도는 세 가지 특징, 곧 ‘하느님을 향한 간청’이며,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고, ‘교우들의 참여와 그들의 현실 반영’을 특징으로 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여 세상 구원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사람임을 이 기도를 통해 실천합니다. 물론 기도한 내용을 살아가려는 실천 의지가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2

[알기 쉬운 미사 전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신경’

정신없이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덥다’와 ‘춥다’로 표현하는 단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 주변의 꽃과 나무,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참 이쁘다’라는 감탄,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렇게 감성에 열린 마음이면 인간 역사에 개입해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에 대해 고백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했지요. 신자들은 강론 후에 잠시 침묵을 하면서 막 들은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고 한 목소리로 ‘신앙 고백’(Professio fidei) 곧 ‘신경’(Symbolum)으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합니다. ‘신앙 고백’이 처음 행해진 곳은 ‘미사’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성 치프리아노(+258)가 처음으로 세례 때 행하는 신앙 고백에 ‘상징’을 뜻하는 ‘Symbolum’이라는 용어를 적용합니다. 특정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간의 상호 식별과 인정 수단인 ‘Symbolum’을 신앙 고백에 사용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게 하는 ‘상징’이라는 의미이지요. 다양한 신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경 예루살렘의 세례 고백문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 초엽 히폴리투스 교부가 저술한 「사도전승」에 수록된 세례 고백문입니다. 미사 중에 신앙 고백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 후반이며, 안티오키아 교회가 가장 먼저 도입하였고, 6세기 말경에는 스페인의 톨레도 시노드(589년)를 시작으로 하여 갈리아 등 서방에도 번져갔습니다. 당시 교회가 미사에 신경을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아니즘 이단을 막고 믿음의 기본 도리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신경의 위치가 현재와 같이 복음 후로 변경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으며, 1014년에 이르러 로마 전례에서는 신경이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두 신경, 곧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을 바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예루살렘에서 사용하던 세례 신앙 고백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신경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거쳐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세례 신앙 고백에서 발달했으며, 3세기경에 이미 기본 골격이 형성됐습니다. ‘사도 신경’이라는 명칭은 성 암브로시오가 393년에 성 시리치오 교황(재위 384~399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신경’은 주일과 대축일 및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미사 때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신경을 바칠 때, 구원의 시작인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구절에서 깊은 절을 하여 육화의 신비와 파스카 신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5000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라고 묻는 군중처럼, 많은 신자들 경우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하시며, ‘먼저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답하십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05

[알기 쉬운 미사 전례] 파스카 초의 상징

제단 위에서 빛을 밝히는 파스카 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이 있습니다. 하얀 눈이 덮인 설악산을 보좌 신부님과 선배 신학생들과 함께 등산하면서,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서 없어진 길을 헤치며 오르다가 해가 떨어지며 어두워지는 즈음에 만난 ‘산장의 불빛’이 파스카 초 촛불에 오버랩됩니다. ‘어둠의 골짜기’(시편 23,4)에서 만난 희망의 빛이었지요. 예전에는 ‘파스카 초’를 ‘부활 초’라고 했었는데, 현재 전례서에서는 ‘파스카 초’라고 합니다. 이유는 라틴어 ‘Cereus paschalis’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파스카 신비에서 하나의 사건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전체를 드러내는 초의 상징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파스카 초의 유래는 어떤가요? 이 초는 파스카 성야를 많은 횃불로 밝히던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크기의 초로 파스카 성야 동안 하느님의 집에 필요한 빛을 밝히던 로마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축복하는 관습은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 바실리카에서만 국한된 관습이었으며, 5세기까지는 교회 전체에 퍼지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례에서 파스카 초는 단 하나의 큰 초로 제한했으며, 갈리아의 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상징성을 지닌 우의적인 요소들로 초는 장식됐습니다. 그 요소들로써 다섯 개의 향 덩이로 이루어진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와 당해 연도는 자유재량으로 남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든 거룩한 밤샘 전례의 어머니’라고 칭송한 거룩한 밤인 파스카 성야에 봉사자들은 성당 앞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주례자는 그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 초에 옮겨 붙임으로써 전례가 시작됩니다. 이 파스카 초는 칠흑같이 어두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끕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하시고 밤새 앞장서 이끄시며 자유를 향해 밝혀주셨던 불기둥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3,21 참조) 다른 한편으로 파스카 초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의 불꽃으로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불꽃은 돌무덤의 어둠에서 부활하시어 걸어 나오는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파스카 초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파스카 초를 선두로 제대를 향해 들어가는 행렬은 세 차례에 걸쳐 멈추어 서고, 그때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은 다음, 빛의 예식을 마무리하는 ‘파스카 찬송’(Exsultet)을 독서대에서 노래합니다. 곧 파스카 초를 옆에 놓은 독서대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전례 공간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에 독서대 옆이나 제단에 마련된 촛대에 놓여있는 파스카 초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후에는 성당에 세례대가 있으면 그 옆에 둡니다. 세례식에서 세례자에게 촛불을 켜줄 때, 파스카 초에서 불을 당겨주고, 장례미사 때에는 파스카 초를 고인의 머리맡에 놓는 까닭은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곧 교회는 신앙인 모두가 세상에서 ‘파스카 초’가 되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이길 기원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8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복음의 탁월함

‘우월’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예전 어머니들이 자식을 야단치면서 주변에서 보기 쉬운 비교 대상이자 자기 자식이었으면 하는 허상인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 ‘엄마 친구 딸’(엄친딸)을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비교 우위를 말할 때 ‘우월’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반대로는 ‘열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급의 ‘우월’보다는 최상급인 ‘탁월’이 복음에 더 적합한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말씀 전례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1독서 구약, 화답송, 제2독서 서간서, 복음환호송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대화 구조는 ‘복음’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에는 파스카 신비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교우들이 인지 했든 못했든 교회는 전례에서 복음의 탁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예식을 행합니다. 백성 전체의 일어섬, 복음 준비 기도, 향과 촛불 행렬, 교우들에게 인사, 십자 표시, 복음집 분향, 복음 후 기도, 복음집 강복 등은 모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요약하면 복음을 통해 현존하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 환영, 존경, 경청, 감사, 결심, 간청 등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 환호송(알렐루야)을 부를 때는 모든 이가 일어섭니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께 대한 존경심과 환영을 드러내며, 그분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여 실천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봉독할 부제는 주례자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축복을 청합니다. 부제가 없는 경우에는 주례자가 제대에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합당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은총을 청합니다. 이 기도는 11세기경 미사에 들어왔으며, 이사야서 6장 5-7절의 소명 기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부제는 제대로 가서 입당할 때 들고 온 「복음집」을 높이 들고 향로와 촛불을 든 복사들과 함께 독서대로 갑니다. 이런 성대한 행렬은 고대 로마의 황제 행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복음집」에 존경과 예우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복음집」은 주일과 의무 축일 미사 때 봉독하는 복음만 수록해 놓은 전례서로, 동방과 서방의 전례 전통에서는 늘 「복음집」과 「미사 독서」를 구별했습니다. 복음을 봉독하는 부제나 사제는 독서대에서 먼저 교우들에게 인사합니다. 12~13세기에 도입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심을 암시하며, 다른 때와 달리 손을 벌리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복음서와 이마, 입술, 가슴에 십자를 그으면서 복음 명칭을 알립니다. 복음의 참 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교우들은 “주님, 영광 받으소서”하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분향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수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일시적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예식들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복음의 탁월함은 이런 예식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살아있는 복음집’인 우리들을 통해 드러날 때 그 탁월함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1

[알기 쉬운 미사 전례[(15) 복음 환호송과 부속가

‘굶는다’는 것은 주로 먹는 것에 사용하는 동사이지만, 어떤 것을 꾹 참고 기다리는 상황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순 시기에 가톨릭신자들은 미사 중에 두 가지, 곧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굶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수난받고 묻혔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때에 웅장한 악기 연주와 함께 장엄하게 노래로 부르기 위해서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아꼈던 거지요.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야 전까지는 ‘알렐루야’ 대신에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또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등을 복음환호송의 후렴구로 사용합니다. ‘하느님(ia)을 찬미하라(allelu)’는 뜻의 ‘알렐루야’(alleluia)는 시편에서 사용되던 고대의 전례 환호로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의 전례적 유산에 속합니다. 서방의 여러 지역에서는 4세기 말 복음에 앞서 화답하는 후렴인 알렐루야가 50일 동안 곧 부활절부터 오순절(성령강림)까지 불렸고, 아프리카에서는 이 시기를 ‘알렐루야 시기’라고까지 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말로 하지 않고, 말 없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설명에 가장 적합한 것이 환호의 알렐루야일 겁니다. 부활 시기 50일 동안 바치던 알렐루야를 대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년)의 전례 개혁을 통해 연중 주일에도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황께서 모든 주일이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대축일과 동일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의 ‘야’(ia)는 지금은 ‘주님’으로 번역하는 ‘야훼’를 의미하며 이를 음악적 용어로 ‘유빌루스’(Jubilus, 환희)라고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로 ‘알렐루야’를 부르는 경우, 특히 ‘야’(ia)의 음절에 많은 음을 사용하여 길고 화려하게 부르는 멜리스마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점차로 ‘야’(ia)가 지니고 있던 멜로디와 여기에 추가된 새로운 가사가 별도의 노래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부속가’(Sequentia)입니다. 9~10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부속가는 16세기에는 수천 곡에 이르게 되어 전례에 혼란을 야기했고,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부속가를 4곡,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의 ‘파스카의 희생께 찬미를’, 성령 강림 대축일의 ‘오소서, 성령이여’,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시온아, 찬양하라’, 그리고 위령의 날의 ‘분노의 날’로 제한합니다. 여기에 1727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재위 1724~1730)에 의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일)의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가 추가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전례 개혁으로 부속가는 모두 4개로 제한됐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의 부속가는 의무이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의 부속가는 선택입니다.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Stabat mater)의 11절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각 처를 이동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사용하여 귀에 익습니다. 미사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위령의 날 부속가인 ‘분노의 날’(Dies irae)은 성무일도 연중 제34주간 독서기도 찬미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를 뒤따르던 부속가가 지금은 전례적 흐름 때문에 알렐루야 앞으로 배치된 것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14

[알기 쉬운 미사 전례] (14)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하느님! 화답송

여러분은 언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아버지, 어머니 사랑해요’라고 했나요? 저의 경우에,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처음 사용한 것은 군대에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서입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대부분 가는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 ‘아버지도 이런 힘든 훈련 과정을 거치셨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마음에서, 그동안 저에게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감사함이 흘러나왔던 것이지요. 사람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형성되고 더욱 굳건해집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사이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말씀 전례에서 ‘화답송’은 그 말 그대로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그에 따른 구원의 사건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응답의 노래입니다. 화답송은 말씀 전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전례적으로 사목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사목자는 화답송에서 바치는 시편의 내용을 연구하여 교우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소위 ‘화답 시편’(Psalmus Responsorius)은 고대 유다인들이 회당 예배 중에 성서를 봉독하기 전이나 후에 시편을 읊던 관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4세기경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독서 후에 시편이나 창작 성가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다. 그런데 4세기 이후에 교리적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 성가가 폐지됨에 따라 시편은 교회의 공식 성가로 굳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나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화답 시편으로 불렀던 구절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초기 화답송은 독서대에서 불렀는데, 7세기경부터 서방 전례의 중심이 로마에서 프랑크 지역(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노래와 복음의 등급 차이를 드러내려고 층계에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층계’(Gradus)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층계송’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층계송을 모은 성가집을 ‘Graduale’라고 했습니다. 현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 본래의 의미를 살려서 ‘층계송’이 아니라 ‘화답송’(Responsorium)이라는 용어를 되찾았으며, 고유한 몇 가지 특징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화답송은 시편으로, 일부는 성서 찬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모든 화답송은 제1독서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것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 제1독서와 조화를 이룹니다. 셋째, 화답송의 내용은 말씀을 들려주신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 감사, 고백, 결심, 청원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넷째, 반복하여 부르는 후렴은 화답의 기능을 강화하며, 화답 시편의 주요 구절이나 그에 상응하는 환호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려주시고 사랑을 풍성히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인 화답송은 전례에서 울려 퍼지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가 화답송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베트남의 응우옌 반 투안 추기경은 오랜 감옥살이를 통해 얻은 신앙의 지혜를 담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에서 참된 응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적 삶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에 가장 참되게 응답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으며 인정받기를 원하는 뿌리 얕은 신앙인이 되기 쉬움을 통찰하는 영적 가르침이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07

[알기 쉬운 미사 전례] (13) 독서대와 독서자

1980년대 초까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는 한국에서 유일한 ‘설교대’(pulpitum)가 제대를 바라보며 오른쪽 세 번째 기둥에 있었습니다. 현대적 음향 시설이 없던 시절, 성당 회중석 중간에 이런 ‘설교대’를 만들어 복음과 강론 및 특별한 설교를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했지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Trastevere)은 ‘설교대’에 마이크를 설치해 여전히 복음 선포를 위하여 사용하는 전통과 발전의 조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말씀 전례는 독서대에서 주로 이뤄집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독서대에서는 오로지 독서들, 화답송, 파스카 찬송을 한다. 그러나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도 할 수 있다”(309항)라고 합니다. 화답송의 경우 ‘시편 담당자 또는 독서자가 시편 구절을 바치고, 일반적으로 교우들은 후렴을’(129항) 바칩니다. 한국 성당에서는 대개 해설자와 성가대가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 성당에 가면 독서자가 독서대에 가면서 인사하는 곳이 있는데, 대개 세 곳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대입니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성사적 표지로 재현되는 곳이며, 미사에 모인 하느님 백성이 다 함께 참여하는 주님의 식탁’(296항)인 제대는 성찬례로 이뤄지는 감사 행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집전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집전자의 인격 안에’(27항) 현존하시며, 이를 통하여 집전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을’(30항) 이끌어 거룩한 백성 전체와 모든 참석자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칩니다. 세 번째는 독서집이지요. 하느님 말씀을 전례 주년에 따라 배분한 독서집을 하느님 말씀을 대하듯 인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곳이 각기 다른 이유는 현재 전례 규정에 독서자가 인사해야 하는 곳에 대한 지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 교구에서 관련 지침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여 제단 아래에서 제대를 향하여 인사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퇴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독서자도 독서를 하기 위해 제단 위 독서대로 오르기 전과 후, 제대에 인사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부활 시기에 명동대성당을 가보면 파스카 촛대가 독서대 옆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주간 파스카 성삼일」 예식서에 “부제는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큰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는다”(195쪽)는 지침에 의한 것이며, 파스카 촛대를 파스카 선포 장소인 독서대 옆에 두는 오랜 교회 전통을 강조한 배치입니다. ‘용약하여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로 시작하는 파스카 찬송이 부제나 사제의 입을 통해 독서대에서 울려 퍼지며 그 옆에 어둠을 이기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파스카 초 촛불이 타오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찬미의 시간입니다.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공간, 독서대는 이미 구약의 느헤미야서에서 미리 보여졌습니다.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가 ‘나무 단 위에’(느헤 8,4) 서서 낭독하는 율법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건이 선포되는 독서대를 향해 집중하여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3-31

[알기 쉬운 미사 전례](12) 전례 개혁에 따른 미사 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믿음’과 ‘들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서로 연결된 삼각형 같은 구조를 연상시킵니다. ‘믿음’은 무엇을, 누구를 믿느냐는 질문을 동반하고, ‘들음’은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서 듣느냐는 질문을 동반합니다. 그 결정적인 열쇠 역할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되겠지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룰 메시아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했던 구약과 나자렛 예수님이 참된 구원자인 그리스도임을 설명하는 신약의 사도서 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적은 네 복음서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말씀’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1년 주기에 2독서(독서와 복음)로 구성됐던 예전의 ‘미사 독서’ 배열을 전례 개혁을 통해 재구성합니다. 현재의 주일과 축일 독서 목록의 세 가지 특징은 ▲세 독서(구약, 사도서, 복음) ▲3년 주기(가나다 해) ▲두 가지 원칙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원칙은 전례 시기를 고려하고 독서들 사이 주제의 일관성을 고려한 ‘주제의 조화’와 시작한 서간서나 복음서를 계속해서 읽어나가지만, 필요성이 적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빼는 ‘준연속 독서’를 말합니다. 평일 독서 목록의 네 가지 특징은 ▲두 개의 독서(구약이나 사도서, 복음) ▲사순 시기는 세례와 회개를 주제로 한 해 주기로 배정 ▲대림·성탄·부활 시기의 평일에 한 해 주기로 배정 ▲연중 시기 평일에는 복음은 한 해 주기, 독서는 2년 주기(홀수, 짝수)로 배정입니다. 현재의 「미사 독서」는 4권입니다. 1권은 대림과 성탄, 연중(제1주간-제9주간 화요일까지), 사순, 부활이며, 2권은 성령 강림 대축일 후 연중 시기(제6주일-제34주간), 3권은 성인 고유와 성인 공통, 4권은 예식, 기원, 신심, 죽은 이를 위한 미사의 독서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집」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2017년 공식 출판되었습니다. 「복음집」은 ‘구원의 경륜에서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근거하여 가장 큰 경의를 표현합니다. 입맞춤(한국교회에서는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절함)과 분향, 높이 들어 올림 또는 촛불과 향로를 든 행렬을 합니다. 주교가 집전한 미사에서는 「복음집」으로 강복을 할 수 있으며, 주교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집」을 부제에게 수여하고, 주교 서품식에서 후보자 머리 위에 「복음집」을 펼쳐 얹습니다. 교회는 “미사 거행에서 성경 독서와 성경에서 따온 노래들은 생략하거나 줄여서는 안 되며, 어떤 사유로든 결코 성경이 아닌 다른 독서로 대치해서는 안된다”(「미사독서목록지침」 12항)라고 강조합니다. 기록되어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으로 지금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하느님 백성은 성경을 끊임없이 읽음으로써 믿음의 빛을 받아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고, 자기 삶과 행동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건네실 때는 언제나 응답을 기대하십니다. 그 응답은 들음이며,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3)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응답을 유효하게 하시어,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는 권고대로(야고 1,22 참조), 전례 행위에서 들은 것을 삶에서도 실천하게 하십니다. 귀로 듣고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에 새기어 손과 발로 행동하는 신앙인이길 오늘도 기원합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3-24

[알기 쉬운 미사 전례] (11) 말씀 전례는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

말씀 전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이 봉독될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신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는 그 말씀을 경청하고 응답한다. 사진은 미사 중 복음서를 들어보이는 프란치스코 교황. CNS 자료사진 서로가 말하고 듣고 하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감’(共感)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공감이라는 관점에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플랑드르의 전장에서 있었습니다. 독일군 병사들이 위문용으로 보내온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수천 개에 촛불을 붙이고 캐럴을 부르기 시작하고 얼마 후에 영국군들도 캐럴을 함께 부르고 손뼉도 치며 화답하면서 전장은 적이 아닌 대화의 상대자로 서로를 인정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2005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로 재조명됩니다. 동료 인간과의 유대감에 대한 갈망에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공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낸 일화로 기억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공감을 위한 구조를 전례에 반영했습니다. 특히 미사에서 하느님과의 소통과 공감을 위해 대화와 식사라는 두 구조, 곧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합니다. 그래서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이하 ‘총지침)에서 “미사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부분은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오직 하나의 예배 행위를 이룬다”(28항)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 전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대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먼저 시작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이 봉독될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총지침, 29항)하십니다. 이때 참석한 모든 이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석한 이들은 듣기만 하는가?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응답합니다. 말씀 전례에서 ‘선포’된 하느님 말씀은 제1독서, 화답송 본문, 제2독서, 알렐루야 본문, 복음, 강론입니다. 반면에 ‘응답’에 속하는 것은 각 독서 후 ‘아멘’, 화답송의 후렴, 알렐루야의 후렴, 강론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독서 내용에 대한 반향들, 신앙 고백, 보편 지향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서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계시헌장, 21항)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활동’이 꼭 필요합니다. “귀에 들려온 하느님 말씀이 참으로 마음속까지 움직이게 하려면 성령께서 활동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영감과 도움으로 하느님 말씀이 전례 행위의 토대가 되고, 온 삶을 받쳐 주는 규범이 됩니다”(「미사 독서 목록 지침」, 제9항). 귀로 듣고 입으로 응답하며, 마음에 새기고 몸이 움직이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매 미사의 말씀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왜 우리는 그만큼 변화되지 못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 마르 4,1-9; 루카 8,4-8)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잘못된 태도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성서 주석가인 아돌프 줄리허는 잘못된 청취 형태를 인간 마음의 세 가지 잘못된 태도, 곧 둔감하거나 경솔, 그리고 세속적 물욕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말씀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은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을 넘어서 ‘지금 여기’에서 선포되는 기쁜 소식임을 모든 이가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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