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 사랑

나는 9개월차 규영이 엄마다. 마흔이 넘어 결혼해 다들 노산이라며 걱정했지만, 다행히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자연임신이 되어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고 열심히 모유 수유 중인 ‘육아맘’이다. 신선한 모유를 제공하기 위해 직접 수유하고자 출산 후부터는 맘 놓고 외출 한번 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루하루 감사함 속에서 몸소 신앙을 느끼며 살고 있다. 사실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런 감사함을 모른 채 불안함과 우울함이 앞섰다. 나이가 있어 임신이 어려울 테니 애초부터 시험관을 시작해 보라거나 임신 준비를 위해 한약을 먹어 보라는 등 주변에서 염려와 우려 섞인 말들 많이 해주신 터라 임신 준비를 1년 정도 잡아놓은 상태였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한약도 먹고 산전 검사도 하며 1년 동안 몸을 만들면 ‘임신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도 1년 동안 정리해놓으면 되겠다는 치밀한 계획까지 잡아놨었다. 다행히 좋은 드라마 두 편의 섭외가 들어왔고 드라마 촬영과 경성대 AI미디어학과 학과장을 하며 1년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막 임신 준비를 시작할 무렵, 이미 임신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적 같은 기쁜 일인데도 불구하고 촬영 번복과 학교 휴직을 순식간에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언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는 앞날을 생각하니 그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내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흘렀다. 두통, 메스꺼움, 속쓰림, 부종, 당 등 임신으로 인해 견뎌야 하는 고생스런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배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잉태의 신비로움에 따른 신앙적 생각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내 몸에 콩알 하나가 생기더니, 갑자기 콩닥콩닥 심장이 만들어지고 혈관이 하나씩 이어져 몸통과 머리가, 그리고 팔다리가 뿅뿅 생겨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나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필요한 신체 일부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지면서 어떻게 온전한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는지…. 이건 신이 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느님의 대단하심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는 더했다.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엄마 품에 안기면 포근함을 느끼고 잘 들리지도 않으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나면 울음을 그치는 모습은 그 어떤 마술쇼보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 가서 하느님의 따스한 품을 느끼며 안정감을 찾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가 뭐길래….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도 나를 따르고 나를 의지하고 나를 제일로 생각해 주는 내 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큰 감동이 밀려와 힘듦과 고통은 사라지고 울컥함만 남는다. 아직도 산후통이 있어 일어나서 첫발을 디딜 때마다 뼈가 아프고 아기를 안느라 팔목은 시큰하고 수유하느라 어깨는 말려있고 골반도 틀어져서 처녀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내 품에 안기면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난 하느님처럼 해준 것도 없는데, ‘내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행복해 할까’ 순간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왜 제 부탁 안 들어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하며, 내가 원하는 것만 쭉 늘어놓고 투정만 부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기가 나를 만날 때 해주듯이, 하느님을 만날 때 환한 웃음으로 좋음을 표현하고 함께 계셔주심에 감사하는 내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7-28

부르심과 응답

나에게 초등부주일학교 여름 캠프는 20대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중 하나이다. 강의가 끝나면 대부분의 친구들이 학회실이나 동아리방에 남아 수다를 떨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보냈지만 나는 좀 달랐다. “인혜야, 오늘 강의 끝나고 술 한잔하러 갈까?” “미안, 나 오늘 성당 교사 회의라서 가야 해.” “그럼 내일은? 단체 미팅하는데 낄래?” “미안해, 나 내일은 레크리에이션 교육받으러 가야 해.” 특히 여름 캠프와 주님 성탄 대축일, 은총시장 등 초등부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준비를 위해 매일 성당으로 출근하기 일쑤였다. 간혹 어떤 친구는 나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너 혹시 수녀님 되고 싶은 마음 있어?” 다양한 의혹 속에서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 생활의 절반을 성당에서 바쁘게 보냈다. 그땐 성당에서의 활동이 마냥 신나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미사를 드리는 것도 즐겁고 미사 후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뿌듯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재미나게 신앙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좋았다. 아이들이 연기자인 선생님을 반가워하고, 학부모들이 나를 믿고 캠프를 보내주거나 모금에 참여해 주실 때의 보람은 연기자 활동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의 교사 활동은 진심으로 적극적이었다. 평교사로 시작해 부교감, 교감까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교사 활동을 했고 연기자로 가장 이름을 알린 ‘쾌걸춘향’ 드라마를 촬영하면서도 본당 대표로 주님 성탄 대축일 행사 교육을 받으러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나에게 신앙심이 대단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 그 시절은 빈약했던 내 신앙심이 단단하게 뿌리내리던 시기로 기억된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말씀에 눈을 뜨고 기도하는 방법도 터득했기 때문이다. 토요일 초등부 미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마치면 나는 늘 맨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왔다. 불 꺼진 성당 맨 앞줄에 홀로 앉아 기도하면 그 시간만큼은 솔직한 내 안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쭉 늘어놓다 보면 억울하고 불만투성이였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감사한 한 주로 마무리되곤 했다. 불투명한 내 미래 또한 더 이상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어진 기회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느님께서 진정한 길로 인도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사를 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게 주신 여러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되었고 연기자와 교수라는 두 가지 직업을 가진, 남들과는 다른 길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봉사라고 여겨졌던 일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남다른 ‘자녀 교육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부 교사 활동을 통해서 나의 말랑말랑한 신앙심을 단단하게 키우시고 나약하고 위태로웠던 마음을 단련시키는 기도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직업과 잘할 수 있는 직업을 직접 찾게 해주시기도 했다. 여유 있을 때 하는 봉사가 아닌, 나를 필요로 하실 때 적극적으로 응한 덕분에 지금의 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날이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

2024-07-21

오늘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넌 연기자로 안 돼. 다른 일을 선택해 봐.” 11살에 MBC 어린이 합창단을 시작으로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가 20살에 KBS 드라마 ‘학교3’의 주인공을 맡을 때까지 내가 꾸준하게 듣던 말이다. “예술가는 술도 마시고 놀아보기도 하는 경험이 많아야 하는데, 넌 너무 모범생 마인드야.” “네가 엄청 이쁜 얼굴도 아니잖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느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칠 뿐이었다. 나는 연기가 좋았다. 한없이 못나 보이는 실제 내 모습을 숨기고 또 다른 내 안의 모습을 연기로 당당히 표현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다들 내게 연기자는 안 된다고 하니 늘 속상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과 고민을 안고 꾸역꾸역 버티며 연기자 활동을 이어오던 어느 날, cpbc 라디오에서 연락이 왔다. “인혜씨,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낮 12시부터 1시까지 시간 어떠세요? 어려운 이웃의 사연을 소개하고 청취자분들께 기부받는 프로그램 진행을 부탁드리려고요.” 지금 내 마음도 힘든데 힘든 이웃을 도와주는 프로그램 진행자라니…. 너무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불현듯 내 마음속 외침이 생각났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던 내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시려는 하느님의 사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나눔’은 토·일요일 이틀 꼬박 진행해도 총 기부액이 몇백만 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부담이 없게 다가왔다. 덕분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어지는 사연에 진심만을 담아 내 방식대로 프로그램 진행을 할 수 있었다. 제작진들은 연기자라는 나의 장점을 살려 사연자의 감정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내레이션 파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연을 읽다 보면 때때로 목이 메이고 울먹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기부액이 2배, 3배, 5배까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다들 그만하라고 했던 내 연기를 이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연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연기자로서 적합한 성격도, 뛰어난 외모도, 다양한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은 내게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잘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특별하게 내려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보람과 감사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시작한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려운 이웃들의 사연이 너무 기구하다 보니 진행하면서 우울해질 텐데 왜 임신해서도, 9개월된 갓난아기를 키우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지 말이다. 가정폭력, 심각한 화상 환자, 미혼모. 기구한 이들의 삶의 이야기가 내게 전혀 우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 말 한마디, 내 내레이션 한번이 이들에게 또 다른 희망의 날을 불러오게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기자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이제 더는 없다. 내 연기가 이렇게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음에도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재능을 직업으로 주신 하느님께 오늘도 감사드린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

2024-07-14

김대건 신부, 한국의 성인을 넘어 세계의 성인이 되다

돌이 좋아 오로지 돌조각만 고집하며 50년이 넘도록 돌과 함께 살아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장에 간다. 그곳에 가면 돌조각을 할 수 있어 즐겁기 때문이다. 1972년, 명지고등학교 1학년 때 유영교 선생님을 만나면서 망치질을 배우기 시작해 1975년부터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전뢰진 교수님께 돌조각을 배웠다. 이후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유학을 하면서 다양한 대리석을 공부하게 되었다. 조각의 재료는 돌, 철, 나무, 테라코타, 브론즈 등 다양하지만 작가와 특별히 궁합이 맞는 재료가 있는 것 같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조각이 탄생하려면 조각가와 재료, 작품의 형태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돌조각을 하는 작가는 참을성이 많고 끈기있고 성실해야 한다. 반면에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면이 있다. 성질이 급하거나 역동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는 돌 보다는 철이 잘 어울린다. 돌은 진솔하고 정직한 재료여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한번 망치질하면 한번 망치질한 효과만 나타난다. 조각용 돌은 대리석, 화강석, 현무암 등 다양하고 대리석 종류만 수백 가지가 된다. 신경질적인 성격(Nero Belgium), 맑고 고귀한 느낌(Statuario), 텁텁하고 서민적인 성격(Traveritino), 귀티가 나는(Rosso Portugal),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Carrara Bianco), 자유분방한 아줌마 같은(Rosso Verona), 따뜻하고 화사한(giallo Siena) 느낌 등으로 분류된다. 돌을 조각하려면 조각하기 전에 돌을 완전히 파악해 돌의 결을 읽어내야 하며 돌과 대화하면서 타이르고 구슬러야 한다. 돌과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작업을 할 때는 먼저 머릿속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구상된 형태를 다양하게 스케치해 본다. 스케치한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점토로 제작하고 완성된 점토가 마음에 들면 석고나 폴리로 캐스팅을 한다. 그에 어울리는 크기와 색상의 대리석을 찾아 조각하는 것이 마지막 단계다. 대리석 조각을 하다 보면 무늬와 크랙이 대리석 속에서 나타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돌조각을 하는 작가들은 “사람의 속마음도 알 수가 없지만 대리석의 속은 더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얼굴이나 손과 같은 중요한 부분에 이상한 크랙이 나타나면 작업을 중단하고 다른 대리석을 찾아서 처음부터 다시 조각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완성될 때까지 이상한 크랙이나 무늬가 나타나지 않았다. 완벽한 대리석이었던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제작할 때 사용한 대리석(Statuario)보다 더 좋은 대리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상의 대리석을 찾아서 성상을 무사히 완성하고 안전하게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의 기도와 김대건 신부님이 옆에서 항상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가이드가 “갓”이라고 설명하면 외국인들은 “GOD?”이라고 되묻는다고 한다. 이제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의 성인을 넘어서 세계의 성인이 되셨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하는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김대건 신부님의 담대하고 배짱 있으며 겸손하고 너그러운 심성을 배우고 본받기를 희망한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7-07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과 감사미사

2023년 9월 16일 오후 4시30분(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 성인상 축복식이 거행됐다. 이날은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한 지 177년 되는 날이었다. 축복식을 주례한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사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님은 “김대건 신부님을 시작으로 이제는 각 민족과 나라를 대표하는 성상들이 들어설 것”이라며 “오늘의 행사는 동양과 서양의 교회가 함께 나가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며 시작”이라고 말했다. 축복식에는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를 비롯해 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전 군종교구장 유수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티토) 주교, 청주교구장 김종강(시몬) 주교, 부산교구 신호철(비오) 주교 등 주교단과 한국과 로마에서 찾아온 한국 순례단 400여 명이 참석했다. 김대건 신부의 삶을 그린 영화 ‘탄생’ 제작진과 출연진들 그리고 우리 정부 대표들도 함께했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에 이어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님과 염수정 추기경님이 뿌리는 성수를 받으며 가톨릭교회의 자랑스러운 성인임을 전 세계 알렸다. 축복식 끝엔 로마 한인 본당 청년들의 사물놀이 공연으로 더욱 빛이 났고, 추기경과 주교, 사제 그리고 대표단 모두가 한국의 전통 사물놀이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우리 문화를 환영했다. 축복식에 앞서 오후 3시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베르니니의 조각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유흥식 추기경님의 주례로 감사미사가 봉헌됐다. 유흥식 추기경님은 강론에서 “25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어떤 어려움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전 세계 젊은이가 본받길 기대하고 기도드린다”고 했다. 유흥식 추기경님은 감격스러워 눈시울을 붉히며 강론을 잠시 멈추기도 하셨다. 한국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로 구성된 성가대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와 추기경님의 강론은 감격스럽고 웅장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사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날 오전 10시에 교황 사도궁 클레멘스 홀에서 한국의 순례단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환영을 해주셨고 2014년 8월 방한 당시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난 충남 당진 솔뫼성지를 방문했던 일을 회고했다. 교황은 당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문구가 떠올랐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나이에 순교한 김대건 성인은 여러분들 신앙의 아름다운 역사를 영적인 눈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하셨고 우리 김대건 신부님을 존경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교황님 알현 때 한국 전통의상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이 옷이 김대건 성상의 두루마기와 같은 옷”이라고 소개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550년간 비워져 있던 중요한 자리에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니 내 손을 꽉 잡아주셨다. 그리고 바로 엄지손가락을 세우시며 최고라고 답례를 해주셨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6-30

김대건 신부님 성상, “여긴 내자리야” 하듯 벽감 안에 들어가다

카라라 대리석 산지를 샅샅이 뒤져 5개월 만에 양질의 대리석을 찾았다. 겨우 숨을 돌리고 작업을 시작하려니 한여름 40도가 넘는 더위가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또 다른 걱정거리가 내 앞에 펼쳐졌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피에트라산타에서 바티칸까지 약 400km를 운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하늘이 하얘지기 시작하였다. 바티칸까지 운반하려면 상자를 짜고 눕혀서 차에 실어야 한다. 도착하면 다시 세워야 하는데 전체가 하나의 통으로 된 돌이기 때문에 눕힐 때 발목에 힘이 집중되면서 부러질 것이 염려됐다. 그리고 운반 도중에 충격이 생기면 대리석에 손상이 갈 수도 있기에 내내 노심초사했다. 전문가들을 찾아가 구조 계산도 해보고 조각가들과 상의해 대리석을 덧붙여 보강하는 방법도 연구해 봤으나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전문가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조반니(Giovanni Gherarducci)라는 나무 상자 작업하는 천사가 나타났다. 조반니는 조수 한 명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8일간 작업을 했다. 그는 전체를 4등분해 앞뒤 좌우로 움직이지 않게 나무를 끼우고 붙이는, 그야말로 신의 경지일 만큼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였다.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인데 그 천사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도와준 덕분에 작품을 눕힐 때 무게가 발목에 가지 않고 힘이 전체로 분산돼 안전하게 눕힐 수 있었다. 트럭에서 떨림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아 400km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도착해서 세울 때도 손상이 가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이 세워질 장소의 벽감은 지상에서 4.5m 높이에 있었고 그 위에 올려놓고 벽감 속에 밀어 넣어야 했다. 이 작업은 피에트라산타에서 바티칸으로 옮겨오는 일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천사가 나타났다. 이탈리아에서 설치 작업을 제일 잘한다는 밍구치(Minguzzi)라는 전문가를 만난 것이다. 그는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올려놓기 위한 튼튼한 철조구조물을 제작했다. 작품의 무게는 6t 정도인데 60t이 올라가도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평도 완벽하게 맞췄다. 또한 공구를 이동하는 계단, 추락 방지를 위한 난간도 아주 튼튼하게 만들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님 성상. 이제 크레인으로 성상을 들어 올려 벽감으로 옮기는 난도 높은 작업이 남았다. 머리 위의 갓, 도포 자락과 영대 끝자락을 잘못 건드리면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온몸은 비 오듯 땀이 흘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연속해서 벌어졌다. 평소라면 작품을 들었다 내리길 수차례 반복하는데 한 번에 벽감 안에 내려놓은 것이다. 안쪽으로 넣기 위해 바닥에 비누를 바르고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때 사용하는 잭으로 펌프질했다. 정확히 중앙에 한 번에 밀어 넣어야 했기에 긴장감이 작업장은 감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김대건 신부님 성상이 “여긴 내 자리야”라고 하듯이 뒷걸음질하면서 벽감 안에 쏙 들어갔다. 1cm의 오차도 없이 정중앙으로 말이다. 아래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시던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님, 예술담담 국장님, 신부님들, 수녀님들 그리고 신자들 모두가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600년 가까이 비어 있던 이 자리는 하느님께서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6-23

김대건 신부님 성상 작업에 힘이 된 순간들

김대건 신부님 성상 제작과 설치가 결정된 데는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님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님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유 추기경님은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과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을 기념 하기위해 성상 봉헌을 건의해 교황님이 이를 허락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4년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에 참석을 하셨고 김대건 신부님 탄생지인 솔뫼성지도 직접 방문하셔서 이미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를 허락하시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3년 5월 24일 전세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수요 일반 알현 강론(베드로광장)에서 김대건 신부님을 이야기하실 만큼 교황님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수 있었다. 김대건 성상 제작을 위한 허락을 받은 다음 작가를 찾는 과정에서 예술담당 마우로감베티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의 작품이 있는 대성당에 어울릴 수 있는 이태리 유명작가를 찾기 시작했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 제작이 결정된 뒤 유 추기경님은 “한국의 성인인데 한국 작가가 만드는 것이 그 정신을 잘 표현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한국 작가가 작업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유흥식 추기경님은 성상을 제작하고 있는 조각가 한진섭을 격려해주기 위해 2023년 5월 6일 세 분의 한국 신부님과 로마에서 400km 떨어져있는 피에트라산타에 오셨다. 바티칸 성직자부 장관님이 피에트라산타에 오신다고 하니 시장님과 문화담당관, 신문기자, 이태리 조각가 그리고 한국인 조각가들이 유추기경님을 환영하기 위해 작업장에 모였다. 유추기경님은 작업 과정 설명을 들으시고 김대건 신부님상을 둘러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안심을 하신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동안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작업장은 축제의 장이 되었다. 유추기경님과 세 분의 신부님 그리고 환영하러 오신 모든 분들은 나와 니콜라가 매일 식사하는 식당(La Volpe e l'uva)으로 이동해 식당주인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며 김대건 신부님 성상 제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피에트라산타와 한국 그리고 바티칸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는 멋진 모습이 펼쳐졌다. 식사를 마치고 추기경님과 축성식에 대한 이런저런 회의를 하고 걸어서 시내를 둘러보면서 두오모 성당에 도착했는데 마침 장례식을 마치고 고인의 관이 차에 실려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추기경님은 바로 차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시고 관에 입을 맞추셨다. 이 모습을 본 이탈리아 사람들은 감탄을 하며 유 추기경님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이러한 모습은 곧 피에트라산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지역 안에서 한국인 성인의 성상을 제작하고 있는 내게 관심을 갖고 많은 도움을 받는 계기가 됐다. 많은 부담을 안고 작업을 하고 있는 와중에 힘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유 추기경님이 다녀가신 뒤로 김대건 신부님 성상 작업은 술술 풀리기 시작하였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6-16

돌 안에 갇힌 김대건 신부님, 자유를 찾아 드리다

2023년 1월 9일 성상 작업에 딱 맞는 대리석을 기적같이 찾아서 신부님의 축성을 받은 후 바로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있는 작업장(Studio Stagetti)으로 이동해 조각을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작업을 하던 동네, 피에트라산타에서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조각가 이경재 선생의 소개로 현지인 니콜라와 그의 아들 세바스티아노와 같이 작업하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사용하던 나의 공구와 작업 시스템이 다르고 또 작업하는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니콜라와 의견이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니콜라는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벽감 안에 설치되기 때문에 뒷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뒷면은 조각을 자세히 하지 말자 했지만, 나는 뒷모습도 정면과 똑같이 정성껏 조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내가 조각을 한다는 것은 돌 속에 갇힌 인체를 해방시켜 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작업 후반기에 미완성작을 만들면서 완전한 자유를 찾아주지 못했으니 ‘노예’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나 또한 조각가로서 돌 속에 갇힌 김대건 신부님에게 완전한 자유를 찾아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뒷모습을 정면보다 더 열심히 작업하게 된 것이다. 2023년 여름, 이탈리아에서는 40℃를 넘는 무더위가 이어졌다. 예년의 이탈리아는 여름에는 비가 잘 오지 않고 건조하기 때문에 밖은 덥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한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2023년 여름은 특별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더웠고, 마음도 타들어 갔다. 작업장에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고 돌가루가 많아서 니콜라는 선풍기를 틀어놓는 것도 싫어했다. 나의 숙소는 프란치스코 성당 수도원에 있었는데 이곳 역시 에어컨은 없었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셔지는 최초의 동양 성인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작업을 하는 동안 잠을 편히 잔 날이 거의 없었다. 몸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은 숙소에서 달걀 반숙 두 개를 삶아서 먹고 점심은 니콜라와 식당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먹고 저녁에는 과일과 모차렐라 치즈를 먹으며 체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작업장에는 작품을 들어 올리는 호이스트 장비가 없었다. 높은 곳을 작업하기 위한 가설 비계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은 4m 가까운 높이에서 작업을 하다가 사다리가 넘어져서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보통은 뼈가 부러지고 병원에 실려 가는 것이 정상인데, 잠시 누워 있다가 신기하게도 벌떡 일어나 다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면서 “이건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옆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항상 지켜주시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됐다. 처음에 잦았던 니콜라와의 충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호흡을 맞추어 나갔고 작업은 수월하게 완성되기 시작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김대건 신부님이 항상 지켜주신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6-09

김대건 신부님, 담대한 모습으로 조각하다

한국 최초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성상은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2년 동안의 제작을 마치고 2023년 9월 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됐다. 그리고 9월 16일, 성 김대건 신부님 순교일에 성대한 축복식을 열었다. 1846년, 25살에 돌아가신 김대건 신부님 성상의 재료는 흰색의 카라라 대리석이다.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이 대리석은 따뜻한 느낌이 나고 무늬와 크랙이 없는, 그리고 외부가 강한 것으로, 높이 377cm와 가로 183cm, 폭 120cm의 통 돌이었다. 성상은 갓을 쓰고 한국의 전통의상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을 표현했다. 영대를 두른 채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에서 세상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김대건 신부님의 따뜻함을 보여준다. 얼굴에는 담대함을 담았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의 길을 걸었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한 표정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담대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티칸을 오가는 순례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돌의 질감을 통해서도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모자(갓)는 터치를 조금 강하게 주고 얼굴 부분은 부드럽고 매끄럽게 표현했다. 김대건 신부님이 입고 있는 두루마기의 돌출부는 곱게, 오목한 부분은 거칠게 표현해 지루하지 않게 보이면서 자연스러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손은 상대적으로 크게 조각,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의미를 극적으로 보일 수 있게 했다. 성상을 자세히 보면 좌우가 대칭이 아니다. 인체를 표현할 때 무게를 한쪽 발에 집중하고 다른 쪽 발은 편안하게 놓는 구도인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기법을 사용해 오른쪽 다리에 힘을 줘 오른쪽 골반이 살짝 위로 올라가게 하고 반대로 어깨는 왼쪽이 조금 올라가게 했다. 머리는 왼쪽으로 기울어 오른쪽이 조금 올라가게 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님이 몇백 년을 서 있어도 힘들지 않고 보는 사람도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도록 했다. 또한 옆에서 보면 고개를 약간 숙이고 어깨는 뒤로 젖히고 배는 약간 힘을 줘 안정되고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해 힘들고 피곤하지 않게 표현했다. 4.54m 위에 설치하여 올려다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얼굴 크기와 전체적인 비례도 원근법을 활용해 시원스럽게 보이도록 했고 두루마기 속의 바지도 상세히 표현했고 발과 신발이 잘 보이도록 좌대의 앞부분을 과감히 절단했다. 두루마기의 주름은 단순화시켰으나 묶인 갓끈 영대 고름 등은 사실적으로 표현해 한국 전통 두루마기의 느낌을 조형화했다. 대성당 오른쪽 외벽에 있는 4.54m 높이 위에 있는 4.17m 높이의 벽감에 설치되기 때문에 뒷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돌 속에 갇힌 신부님에게 자유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정면보다 더 열심히 뒷모습 작업을 했다. 신비로운 것은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과 등을 맞대고 있는 안쪽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묘가 있는데 이분은 1984년에 한국에 오셔서 김대건 신부님의 시성(성인으로 선포)하신 교황이시다. 그리고 교황님의 묘 옆에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가 있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가 550년 동안이나 비워져 있었고 이곳에 김대건 신부님 성상이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6-02

김대건 신부님 성상, 피에트라산타에서 조각하다

43년 전인 1981년,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대학을 다니며 피에트라산타에서 십여 년간 작업을 했었다. 바로 이곳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할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제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준비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성스러운(Santa) 돌(Pietra)이라는 뜻을 가진 피에트라산타는 이탈리아 중부 베르실리아(카라라와 피에트라산타 일대를 지칭하는 고장 이름) 지방이며, 로마에서 북쪽으로 400여 km 떨어져 있는 산과 바다(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인구 2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조각의 도시다. 작은 도시지만 26개의 갤러리와 예술 공간이 있고 장인들과 같이 작업할 수 있는 대리석 작업장이 18곳, 또한 5개의 브론즈 공장이 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인 조각가들의 개인 스튜디오가 셀 수 없이 많이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피에트라산타는 이탈리아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예술 갤러리가 집중된 역사적인 도시가 되어 수만 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 국제예술도시에 걸맞게 이곳에서 작업을 했거나 전시했던 세계 유명 조각가들의 모형을 한곳에 모아놓은 모형박물관이 있다. 도로를 따라 건설된 로타리에는 크고 작은 조각 작품이 있고 도시 곳곳에 대리석 브론즈 작품들이 설치돼 있어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야외 조각공원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토라이(Mitorai)와 보테로(Botero)의 조각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밀라노와 베네치아, 피렌체에 있는 유명 갤러리들이 이곳에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1995년 칸 야수다(Kan Yashuda)의 작품 전시가 피에트라산타의 중심에 있는 두오모 광장(Piaza dei duomo)과 산타고스티노 성당(Sant'Agostino)에서 열린 이후로 두오모 광장은 야외전시장이 되었고 산타고스티노 성당도 박물관으로 재탄생됐다. 광장에서 열리는 전시는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이어지는데 이 전시를 관람하러 전 세계에서 약 4만 명 정도가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피에트라산타는 돌이나 브론즈, 테라코타 등 어느 재료를 선택하더라도 조각을 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이곳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춰진 곳으로 바다 쪽에는 하얀 백사장이 수십 km가량 이어져 있다. 산 쪽에는 올리브나 포도나무로 덮여있는 푸른 산들과 계곡이 아름다움을 뽐낸다. 아름다운 돌산에는 옛날부터 건축가와 조각가들의 재료인 하얀색 대리석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의 대리석들이 풍부하게 자리하고 있다. 16세기에 미켈란젤로도 그의 작품 제작을 위한 양질의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수개월을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좋은 음식으로 유명하다. 피에트라산타에 있는 크고 작은 레스토랑들은 예약이 필수일 만큼 인기가 좋다. 두오모 광장에는 4개의 유명한 바가 있는데 이곳에서 즐기는 와인 한잔은 특별한 시간을 선물한다. 피에트라산타가 근처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는 작은 예술 도시가 두오모 광장을 중심으로 걸어서 모든 곳을 체험할 수 있고 예술가들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피에트라산타는 최고의 대리석뿐만 아니라 예술을 느낄 수 있는 매우 활기찬 도시로서 예술가들의 최종 목적지가 되고 있다.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이 탄생됐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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