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喜)를 찾아서

이번 여름, 다시 평화의 섬 제주에 다녀왔다. 3년 전, 국제평화학과 가톨릭교육학을 접목해 만든 평화교육 프로그램인 ‘삶을 살리는 평화캠프’의 첫발을 떼었다. 교육 현장의 중심이 아닌 시민 단체와 교회 기관에서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는데, 서귀포 강정마을의 평화센터에서 시작한 평화캠프가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특히 이번에는 지난해 참여한 멋진 청년들의 주체적 역할이 더해져, 다양한 참여자들과 함께 더욱 풍성하게 구성되었다. 언제나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반갑고 신비롭다. 더욱이 첫 캠프에서 청소년으로 만났던 친구가 청년으로 성장하고, 또 친구까지 초대해 같이 온 모습을 보니 더욱 기뻤다. 첫 평화캠프의 소중한 기억, 그중에 자꾸만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다. 활기찬 얼굴로 재잘거리던 ‘희’의 모습이다. 왠지 SNS 활용을 두려워하는 나는, 참여자를 모집할 때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던 이전 참여자들에게 조심스레 소식을 전하며 안부를 전한다. 그때마다 항상 가장 기쁘게 응답하던 희와 어느 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안읽씹.’ 대학 입학을 앞두고 평화캠프에 참여했던 희가 신나게 청춘을 즐기느라 카톡을 읽을 틈도 없나 보다 가벼이 넘겼는데, 희와의 채팅창에서 1이 한참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얼마 후, 희의 전화번호가 바뀌고 연락도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개인정보가 도용되고 사기를 당했다는 거다. 아, 왜 힘든 환경에 힘듦은 더 쉽게 겹쳐지고, 열악함은 쉬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걸까. 좀 더 자주 연락해 볼 걸 그랬나. 온갖 자책과 염려가 쌓인다. 내가 평화교육을 통해 만난 이들은 참여 동기부터 성장 배경까지 다양했다. 평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활동을 겸비한 청년부터 그저 단순하게 지인 추천으로 여행객 모드로 온 청년, 탄탄한 직업을 지닌 청년과 진로를 탐색 중인 청년, 부모 없이 시설에서 자랐거나, 가까운 가족에게 폭력을 당하며 자란 청년, 분쟁 지역을 떠나 바다 건너 먼 나라로 피난을 온 청년까지, 그런 색다름은 서로에게 더욱 다채로운 배움을 주었다. 구획 지어진 교육 현장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의 만남이 주는 혜택은 엄청난 자원이 되지만, 평화에 대한 고민이 현실의 억울함과 비탄한 삶을 마주하면 다시 어쩔 수 없이 ‘왜 그런 세상이냐’고 또 주님께 묻게 된다. 때론 버려지고 때론 도망쳐야 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밝게 자라며 꿈을 키워가기도 한다. 그런데 돌봄의 빈틈을 이용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맨땅에 내동댕이치고 황야로 내쫓는다. 그리 기쁘게 웃던 희가, 어쩌면 그렇게 희망을 잃었을까 봐 겁이 난다. 아이에겐 잘못이 없다. 미숙한 어른이, 또 그런 어른을 키운 그 위의 어른들이 만든, 그런 잘못된 세상을 방관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평화를 공부한 거다. 그 잘못된 회로를 끊어낼 수 있는 끈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만난 걸 거다.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런 희망의 회로가. 주님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람 안에서 기적을 행하시기에, 알게 모르게 구성한 다양한 관계망이 결국 우리를 살릴 거다. 희야! 연락 한번 줄래? 우리가 함께 웃던 그 시간에 기대어, 같이 가 보자! 다시 기쁜 시간을 살아갈 희(喜)를 찾아서, 이 글을 띄운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22면

가톨릭 학교의 이상한 사람들

“엄마는 왜 그렇게 성당에 가요?” 평화를 찾아다니다 어느덧 매일미사가 일상이 된 어느 날, 처음 받은 어버이날 편지에 꾹꾹 눌러쓴 아이의 글씨는 내 맘에 또렷이 새겨졌다. 그러게, 그렇게 가던 성당에서 만난 주보 안의 가톨릭 학교 간지는 내 맘을 또 가로챘다. 어떻게든 살아낼 스펙을 쌓겠다고 유명 대학원 원서를 쓰던 그때, 하느님에 대한 궁금함이 세상의 이치를 이겼다. 결국 돈 안 되는 공부를 하러 대출을 받아 가톨릭 대학원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스스로 찾은 학교, 함께하는 동료들의 지식에 감탄하며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는 즐거움에 마냥 기뻤다. 아이를 키우던 나는 교육을 중심으로 탐구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오가는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과제를 썼다. 내 지도교수가 된 신부님은, 그런 내가 아이에게 읽어 준 그림책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도 칭찬하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분이셨다. 그런 분께 “신부님도 60년대생이시죠?”라며, 내가 존경하던 세대의 이중성에 대한 실망을 투사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힐난에도, 깜짝 놀란 눈으로 곰곰이 새기시던 맑은 눈빛이 떠오른다. 또 성인의 영성에 대해 강의하던 한 신부님께는 장문의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호기심을 결코 참지 못하는 내가 한 질문에, “여러분 수준에서는 아직 몰라도 돼요”라고 한마디하셨던 탓이다. 거센 질책을 보냈는데, 정중하게 사과를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철저하게 가난을 사는 영성의 대가셨다. 내가 만난 첫 가톨릭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가톨릭 학교, 평화교육과 연구를 위해 교사로 갔던 학교에서 오히려 학부모로서의 감탄을 안고 돌아왔다. 내가 갔던 가톨릭계 일반 고등학교는 큰아이가 다니던 학교와는 정반대였다. 동물을 좋아하던 큰아이는 방학 중에도 매일 학교에 가서 실험을 하더니 전국 1등으로 국제대회에 나갈 정도로 과학에 열중했다. 그런데 담임과의 상담에서 들은 한마디는 나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다른 학교에 갔다면, 참 사랑받았을 텐데요.” 이게 무슨 뜻이지? 그럼 지금 학교에서는 아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인가? 교사의 말인즉슨 명문대 입학 요건이 부족한 아이에게 관심을 둘 수 없단 뜻이었다. 과학 중점 학교지만 과학보다 성적이 중요했고, 인간보다 성과가 먼저였다. 그런데 내가 갔던 가톨릭 학교는 달랐다. 꼴찌를 하고, 학교를 빠지며, 말썽 피우는 아이를 위해 밤낮없이 고민했다. ‘그 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교육’을 실현하는 공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수녀님과 교사의 모습에 그저 눈물이 났다. 그 경험 덕분에 가톨릭의 ‘가’자만 들어도 도망치던 둘째 아이를 겨우 얼러서 가톨릭 학교에 지원했다. 운 좋은 아이는 추첨이 되었고, 싫다던 기숙사 체험에 가자마자 축구화를 보내 달라며 신이 났다. 철학 교사인 신부님을 보고 “저렇게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똑똑한데, 왜 신부가 됐는지 이해가 안 간다”더니 그 신부님이 좋아서 견진성사를 받았고, 가장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다. 가톨릭 학교에서 나는 실력도 태도도 엉망인 꼴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하고 달래며 응답하는 이상한 사람이 가톨릭 학교에는 가득했다. 그런 이상한 사람들 덕택에, 가톨릭 학교는 내 교육 ‘맛집’이 됐다. 맛집이 붐비는 건 좀 아쉽지만, 맛난 건 같이 나눌수록 더 좋다는 걸 이제는 좀 알게 되었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2면

한 우주가 온다

그 아이를 만난 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였다. 당시 나는 국제평화학을 공부하고 평화 활동에 몰두했지만, 특정 전문가 내에만 머물던 한계와 모순을 고민하며 잠시 멈췄다. 그동안 우연히 둘째 아이의 학교에서 봉사하다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 교육을 비판하더니 교육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하느님께 따지더니 가톨릭교육에서 평화교육을 탐색했다. 결국 나를 겸손히 내려놓게 하는 것은 세계적인 대학도 아니었고, 주님 안에서의 공부였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기는 많은 활동을 집 안에서 하는 비대면체제로 전환됐고, 덕분에 어린아이를 키우던 나는 돌봄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내던 2020년, 성탄을 앞둔 어느 날 고해를 했다. 마침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은 내게 선행을 하라는 보속을 주셨고, 그때 들은 ‘선행’이라는 단어는 유독 어렵게 다가와 무거웠다. 그 의미를 성찰하면서, 개인·가정·사회 차원의 선행 목록을 작성했고 그중에 시작한 것 하나가 교육 봉사였다. 그동안 배웠던 것들을 활용해서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했고, 여러 지역에 있던 학교 밖 청소년이라 불리는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학교 안에서보다 더욱 반짝이는 눈빛과 열정을 보았다. 그 반짝임 중에 있던 그 아이, 우리가 함께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멋진 프로젝트를 기획해 전시를 열었고 나를 초대했다. 기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갔다. 열심히 사는 아이의 모습이 온통 담긴 전시는 정말 뜻깊었다. 같이 사진도 찍고, 카페에서 즐겁게 수다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말했다. “이렇게 멋진 일을 끝내면, 오늘은 정말 좋단 말이에요. 근데 저는 또 내일 죽을 걸 생각해요.”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알지 못하던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제네바 국제기구에서 무급으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실직한 가장들의 비애를 짐작해 본 경험은 있지만, 자살에 대한 고백을 이리 담담하게 내 앞에서 얘기하는 현실의 아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질문과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나의 당황함과 어쩔 줄 모름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터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살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조금씩 공부했다. 모르던 삶과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자살 예방 교육도 받았다. 몇 년 후, 다행히 잘 살아내고 있는 이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갑자기 연애를 한다고 고백했다. 너무나 축하할 자리에서 나는 또 당황했다. 성소수자, 내게 모르던 세상을 가지고 다시 온 거다. 아니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평화를 공부했던 아일랜드는 가톨릭국가임에도 동성혼이 합법화되었고, 그때 만난 친구의 경험을 통해 이미 감정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한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또 책을 찾아 읽었고, 성소수자를 위한 미사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내게 다른 우주를 자꾸만 가져온다. 우리는 흔한 통념으로 학교를 잘 다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디고, 정해진 성으로 살아야 함을 규정으로 여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이슈와 삶의 문제를 지니며, 어떤 이는 더 어려운 상황들을 온통 마주하며 겨우겨우 버틴다. 그런 우주를 나는 이 아이를 통해 만난다. 나의 배움은 사람에게서 온다. 한 사람은 온 우주를 안고 오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선행의 하나일 것이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2면

내게로 보내신 아기

모든 아기는 정말 신기한 존재다. 인간 근원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찬미와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아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가 미국에 머물 때였다. 당시는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 출산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아이를 낳고 귀국할 수 있겠다며 주위의 부러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자아이일 경우,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덤으로 주어지니 당연한 선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없는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내가, 나의 엄마인 할머니의 사랑과 지혜 없이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더욱이 편법은 싫고, 군대도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곧 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귀한 생명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매콤한 낙지볶음도 먹고, 모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동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으니 더욱 편안했다. 그런데 아기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서둘러 세상에 왔다. 아직 폐가 완성되지 않았을 시기라 급히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열이 40도까지 오른 상태로 꼬박 하루를 진통한 끝에 첫 아이를 만났다. 의사들의 염려와 달리, 아기는 다행히 숨도 잘 쉬었고 크고 건강했다. 위험할 만큼 출혈이 심했다지만 그런 상황은 이미 흘러갔고, 그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품 안에 놓여 있다는 것만 보였다. 아기는 젖을 빨 힘이 부족해 마냥 울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러던 아기는 어느새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하더니, 바람을 쌩쌩 가르며 두발자전거를 탔다. 품 안의 아기는 아이가 되었다. 마구 달리는 아이를 따라가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아이의 말 속에서 “아하!”를 외치며 순간의 진리를 발견했다. 엄마에게 첫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슈퍼 천재’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아기가 또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그런 아기도 성장 과정을 거치며 때론 깨어지고 또 빛난다. 동시에 엄마를 깨우치고 깨지게도 한다. 세상 모든 아이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독립심을 키우며 엄마의 틀을 깨고 나간다. 사춘기 아이를 걱정하던 나에게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엄마처럼밖에 더 되겠어?”라고 하시던 내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의 부조리함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 온 아이는, 어리숙하고 무딘 엄마가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날카롭게 지적하고 반항하며, 새로운 세대의 원리를 알려주고, 세상을 배우는 동시에 또 바꾸어간다. 그런 나의 첫 아이가 훌쩍 커서 군대에 갔다. 입대하고 딱 1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대했던 만큼 평화롭지 않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다시 전쟁이 난무하고, 난 내 아이와 세상의 모든 아이를 걱정한다. 노인이 된 나의 엄마가 그렇듯이, 엄마에게 자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이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요람 속의 아기는 결국 우리의 스승이 된다. 주님은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돌보고 배울 존재로, 우리에게 새로이 고유한 아기를 보내신다. 그 순리의 과정에서 결국 구원으로 닿으리라 믿으며, 세상의 모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처음으로, ‘스승’을 만나다

학창 시절, 매해 다가오는 스승의 날이면 뭔가 학급에서 행사를 기획하거나 선물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스승의 날에 특별히 챙기고 싶은 선생님이 없었다. 딱 한 명 평생 찾아뵐 교사로 여겼던 초등학교 때 담임은 당시 무슨 행동인지 인식도 못 하던 어린 나에게 성추행을 했었고,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의 학교는 위계로 가득했다. 주어진 지식을 넘어선 질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질문이 닿지 않으니 진정한 소통과 존중이 생겨날 틈도 없었다. 그렇기에 안정된 직업으로 교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그 시절에도, 난 교사가 될 꿈은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스승’이란 그저 사전 속에 묻혀있던 단어이던 그때, 내가 당연하다고 믿던 평화가 깨어졌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인지. 내가 어릴 때부터 믿어 온 하느님은 뭘 하는 건지. 이런 세상과 개인의 우여곡절을 통해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답답함과 궁금함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나는 평화를 찾아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교회로 갔다. 불합리한 삶에 관해 물으러, 아니 하느님에게 따지러 갔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매일미사에 가는 것이었다. 나의 절실함과 세상의 불합리함을 따지러 간 곳은, 집에서 15분 남짓 개천을 따라 걸으면 닿는 자그마한 동네 성당이었다. 마침 막 부임한 새 신부님은 첫 본당 사제 소임에 열정이 가득했다. 직접 잼을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었고, 신자들에게 매일 묵상 글을 문자로 나누어 주며 홀로 하루에 3번씩 미사를 집전하셨다. 그 덕분에 젖먹이를 키우던 나는 온갖 불규칙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일미사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에는 담요로 꽁꽁 싸맨 아이를 노오란 유모차에 태워 눈발을 헤치며 성전에 들어섰고, 유아실에서 젖을 먹이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단어 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열중했다. 보통 30분이면 끝나는 평일 미사에서 강론은 10분도 채 되지 않지만, 무한한 깊이의 의미를 찾으려 열중하다 보면 3시간 강의를 들은 것보다 더 큰 피로감이 밀려오곤 했다. 차곡차곡 쌓인 나날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고, 매일미사는 아이와 소풍 가는 행복한 일상이 되었다. 신자들에게 보내주던 신부님의 묵상 글은 어떤 날은 너무 어려워 빙빙 돌기만 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영혼이 깊이 꿰뚫리는 배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에게 첫 스승이 생겼다. 교회 안의 아버지였던 신부님을 첫 스승으로 만났고, 처음으로 스승의 날에 드릴 양말을 샀다. 그런데 첫 스승을 발견하자, 스승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마을버스 안 중년 부부의 수다 속에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말에서도 가르침이 들렸다. 어느 순간, 지난 삶의 단편 속에 나누었던 말 한마디에 담긴 의미, 상념을 통해 문득 다가온 섭리, 무심코 지나쳤고 몇십 년 동안 묵혀 있던 파편들이 진리로 연결되었다. 정말, 스승은 준비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의 깨어짐이 스승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고, 그 통로에서 만난 모든 스승은 주님의 원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안간힘을 다해 답을 찾아보겠다는 간절한 질문이 내가 그토록 되지 않으려던 선생님의 위치에도 놓이게 했고,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을 온 세상 안에서 발견하게 했다. 그렇게 오늘도 난 매일의 스승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2면

땅에 계시는 ‘최고 멋진 울 아빠’

나에게는 세 아버지가 계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교회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땅에서 나를 낳으신 아버지이다. 세 분 모두 나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그 덕분에 지금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아빠’라고 처음 부른 존재, 나의 휴대전화에 ‘최고 멋진 울 아빠’로 저장된 내 아빠는 나에게 더욱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특별하고 애잔한 존재이겠지만, 나에게 내 아빠가 더욱 최고인 데는 이유가 있다. 아빠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는 동생을 낳고 돌아가셨다. 곧이어 갓난아기였던 동생마저 죽음을 맞았다. 당신 어머니의 장례식인 줄도 모르고 손님들 사이에서 놀던 5살의 아빠에게 곧 새어머니가 생겼다. 그 아래 6명의 이복동생이 태어났고, 장남이던 아빠는 단 한 번도 한국 사회의 큰아들이 받던 혜택을 누릴 새도 없이 콩쥐처럼 학대받았다. 학창 시절에는 온 식구가 먹은 아침밥 설거지를 하고 등교하느라 항상 지각 대장으로 불리었고, 대학 입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과 학업을 병행하셨다. 80세가 넘으신 아빠는 지금도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몽둥이를 들고 문을 열어젖히는 새어머니의 서슬 퍼런 호통과 눈초리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동 학대와 가정폭력에 사회가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한 아이의 소중한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폭력은 결국 눈덩이처럼 확대되면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폭력에 시달린 아이는 그토록 싫어하던 폭력을 답습해 스스로 학대하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빠는 다행히 사랑 가득한 아내인 나의 엄마를 만났고, 부정적인 성장 기억은 반면교사가 되어 딸 셋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특히 맏딸인 나는 더욱 애틋한 기억이 많다. 집에 가면 만날 딸에게 학교로 편지를 보냈던 아빠,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뒤늦게 평화를 공부하러 멀리 떠나겠다는 딸을 흔쾌히 응원했던 단 한 사람, 먼 나라에서 인턴 근무를 하는 딸을 위해 스스로 설거지 기계가 되길 청하였고, 본인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내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기막히게 알아차리고 동생들 몰래 용돈을 보내주던 아빠의 모습, 셀 수 없이 기쁘고 가슴 찡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으로 와서 우리를 구원한 기적처럼, 이 땅에 사는 ‘최고 멋진 울 아빠’를 통해 사랑의 결핍을 극복하고 확장한 기적을 본다. 그 기적의 접점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결국 사랑이다. 한국전쟁 참전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조차 몰랐던 두 살 엄마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집성촌의 따스함 속에서 자랐다. 그 사랑은 아빠를 치유했고, 곧 나에게로 이어졌다. 이는 또 나의 아이와 주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쩌면 나를 살리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땅에 계신 우리 아빠와 언젠가는 다 같이 만나겠지만, 최고 멋진 울 아빠가 이 땅에서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제 곁에 머무르게 해 주세요! 제가 배우고 갚아 나갈 사랑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거든요….”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2면

신앙의 빚을, 신앙의 빛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지 어느덧 30년이 되어간다. 문득 ‘나는 어떻게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신앙의 길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의 첫 시작은 언제였을까? 내가 생각하던 평화가 산산이 깨진 덕분에, 바닥부터 다시 돌이켜 내 삶을 전환한 15년 전이었을까? 아니면 예측조차 못 한 사건을 처음 맞닥뜨린 타국에서의 청춘 시절이었을까? 잘 알아듣지도 못하던 영어 미사에서, 할아버지 신부님이 끊임없이 절박하게 반복하던 한 마디 “Hang in there(조금만 더 버텨)!”라는 구절에 매달려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그 20대 끝자락이었을까? 아니면 유럽 배낭여행 이후 개종한 시점이었을까? 그렇게 거슬러 오르다 보니, 결국 가닿은 곳은 사람이었다. 6살쯤 만났던 가무잡잡한 동네 친구, 간식을 준다며 나를 이끌던 그 친구를 따라 개신교회에 갔다. 그리고 나 혼자 가던 교회에 온 가족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맛있는 간식에 이끌린 나의 응답이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인도한 계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렵 아빠가 사랑하던 이복동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부모님을 교회로 이끈 더 깊은 계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였던 나는 ‘만나’처럼 내려오는 간식을 따라 교회에 갔다. 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계속해서 캐묻던 어린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음을 이미 그 시절에 감지했음에도, 친구를 만나러 교회에 갔고 열심히 활동했다. 그런데 한 달 남짓의 배낭여행은 그리 길지도 않았건만, 유럽의 성당과 바티칸 먼발치에서 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케토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물 흐르듯 가톨릭교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교회 친구들과는 연락이 뜸해졌고, 나를 처음 교회로 데려간 그 친구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기도 중에, 꼬마였던 그 친구가 떠올랐다.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그렇게 가볍고 즐겁게 그 친구를 통해서 나를 부르셨구나. 그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찾았다. 그들 중 몇몇은 목사가 되었고, 몇몇은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고, 몇몇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아름다운 제주에서 가장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좋은 버스 기사도 되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면서 종교와 종파를 넘어선 하나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일치를 느꼈다. 종교 간의 대화와 원리는 그리 멀리 있지도 어려운 데 있지도 않았다. 우리가 만나는 매일의 일상 속에 섞여 사는 사람들, 그저 옆에 있기에 서로를 돌보고 사랑했던 날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매일 빚을 지며 살아간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이자,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되어 갈 것이기에…. 이미 시작된 2026년 이 뜨거운 여름, 두 달 동안 내가 진 신앙의 빚을 작은 빛으로 나아가도록 이끈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여름을 보내볼까 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2면

모든 것이 그분의 성실한 초대였습니다

지난 두 달간 가톨릭신문에 글을 연재하며 내 삶의 파편들 속에 숨어 계시던 주님의 손길을 기록할 수 있었던 시간은 참으로 복된 축복이었다. 마지막을 정리하는 오늘,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진 단어는 바로 ‘초대’다. 주님께서는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언제나 당신을 향해 걸어오라며 새로운 선택의 길로 이끄셨다. 세상의 잣대와 시선 속에서 ‘쓸모’를 증명하려다 지독한 우울증이라는 삶의 바닥을 쳤을 때, 주님은 나를 가장 먼저 ‘치유와 회복’의 자리로 초대해 주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태 3,17 참조) 이 말씀은 나의 영적 이름표이고 정체성이다. 문화선교로의 초대, 내가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탈렌트를 온전히 주님을 위해 쓰고 싶다고 바쳤던 청원기도를 들어주신 주님은, 이후 10년 동안 나를 교회 안의 문화선교로 이끄셨다. 광야로의 초대, 수없이 포기하려던 배우의 삶을 아주 가는 빛으로 이어가 주시며, 그 끈을 잡고 깜깜한 앞길을 더듬거리며 따라오라고 하신 광야로 나를 초대하셨다. 내 길을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 거친 길에서도 돌보셨고, 만나를 먹이시며 언제나 내 곁을 함께 걸어가 주셨다. 희망으로의 초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공원을 달리며 절망하던 2024년 가을, 1년 6개월간의 영적 면담을 통해 희망의 문을 열어주신, 내 삶에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신 희망으로의 초대였다. 허접함에서 완성으로의 초대, 저를 이끌어주던 영적 스승이 머나먼 아일랜드로 떠나고 찾아온 마음의 빈자리,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나를 ‘매일 새벽 미사’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영적 심연으로 초대하셨다. 고요한 새벽어둠을 뚫고 제대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내 마음을 한없이 낮고 가난하게 만들고, 게다가 미사가 끝난 후 교우들과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누며 가감 없이 삶을 고백하는 시간은, 내 개인의 신앙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시고 ‘참된 공동체로의 초대’로 완성해 가시는 주님의 세밀한 손길이었다. 그 모든 초대의 순간들이 늘 평탄하고 명쾌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답답했고, 때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막연함과 두려움에 떨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모든 막막함이 실은 나를 더 좋은 길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훈육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성실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 확신이 자리 잡았다. 내 뜻대로 되지 않던 순간조차도 주님은 당신의 선을 향해 나를 이끌고 계셨다. 과거를 거룩하게 기억하기에 오늘을 기쁘게 걸을 수 있고, 또다시 펼쳐질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그 성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도의 청원조차도 조급한 집착이 아니라 설레는 희망으로 기대한다. 돌이켜보면 무언가에 집착했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불신이 내 안에 믿음처럼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동안 늘 집착했고, 초대에 거부했으며, 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이루려다 뜻대로 안 되면 좌절하고 무너졌다. 스스로 무너지니 타인을 쉽게 비판했고, 종국에는 내 존재 자체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주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내게 주어진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은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집착이 올라오면 바로 주님께 봉헌하며 내 약함을 고백한다. “주님 저라는 자 여전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은총을 입고, 여전히 깨지기 쉽고 허접한 질그릇과도 같은 나 자신을 봉헌하며, 이 볼품없는 질그릇 안에 주님의 은총이 또다시 가득히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그동안 부족하고 서툰 저의 신앙 여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읽어주신 모든 교우분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주님의 평화가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2면

또 다른 차원의 초대로, 새벽을 깨우는 말씀의 미사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이 정교하게 짜 놓으신 거룩한 타임라인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지난 1년 6개월간 내 절망의 밭을 희망으로 일궈주셨던 영적 지도신부님께서 아일랜드로 떠나셨다. 이제 홀로 직면해야 할 큰 파도 앞에 선 듯한 막막함이 밀려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 주 토요일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고해를 보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나의 고해 내용을 가만히 들으시던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미사가 끝난 후 사무실 앞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을 하며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마주 앉은 신부님 집무실에서의 면담 시간. 신부님께서는 내 교적까지 미리 받아놓으신 채 한 시간가량 깊은 대화를 나눠 주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건네셨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매일 새벽미사를 나오면 좋겠어.” 사실 나는 이미 매일 오전 10시 미사에 참례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에는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가끔 본당에 갈 때마다 새벽미사를 강조하시던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면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속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다는 잔잔한 울림이 일었다. 나를 이끌어주시던 신부님이 외국으로 떠나시자마자,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또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내 영적인 과정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보는 말씀 카드에도 ‘허접한 그릇’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혔다. ‘이쯤 하면 됐지’ 하는 나의 허접함을 주님께서 복된 그릇으로 바꿔주시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제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에 나를 준비시켜 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신부님께서는 매일 봉헌할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미리 10번씩 읽고 오라는 영적 숙제를 주셨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5시30분까지 성당에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에, 전날 밤 미리 말씀을 10번씩 읽고 묵상한 뒤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겼고 그런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렸다. 그전에는 부담스러운 10번 읽기가 며칠 만에 10번을 넘어 그 이상을 읽고 또 읽는 나를 보면서 그 능력도 함께 주시는 주님께 감사했다. 그날의 말씀 중 내 마음에 온 일부 말씀이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2베드 3,12-17 참조)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를 봉헌할 때, 전날 읽었던 말씀들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을 앞당기는 것은 나보다 주님께서 더욱 기다리신다는 마음과 그러기 위해서 오류에 휩쓸리지 말고 흠 없고 티 없이 평화로이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정진하라고 이 새벽 주님은 오늘도 나를 깨우신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2면

움막의 거리 30미터

나의 유년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미움과 분노가 뒤섞인 차가운 관계였다. 할머니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밥상을 엎으시던 할아버지의 서슬 퍼런 모습, 할아버지 보란 듯 작은 실수만 있어도 매를 들고 화를 내며 때리시던 아버지. 부자는 상대에게 소리치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그리도 화를 내며 지내셨다. 결국 할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집에서 불과 30미터 떨어진 곳에 작은 움막을 지어 스스로를 유배시키셨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차마 한 울타리 안에 머물지 못했던 그 30미터의 거리는, 우리 가족이 대대로 짊어져 온 상처의 깊이와도 같았다. 늘 소화가 안 되던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에게 약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움막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황도 통조림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셨다. 폭군 같은 노인이 건네는 황도의 달콤함은, 가족에게 표현이 어색한 할아버지에겐 최선의 사랑 표현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미워하며 지냈지만, 세월이 흘러 마주한 아버지는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았다. 결혼 전, 나의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은 이 상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지금까지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 살며 마주한 현실은 시렸다. 아버지의 호통과 그 뒤에 숨겨진 손주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아이들은 늘 혼란스러워했다. 할아버지의 서툰 다정함조차 위협으로 느낀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피해 방으로 숨어들었고, 아버지는 그런 손주들이 피하는 모습을 보며 화를 내곤 하셨다. 그런 이후엔 아이들은 더욱 할아버지를 마음에서 더 멀게 피하곤 했다. 꼭 우리 할아버지가 물리적인 30미터 움막의 거리에서 사신 것과 같이 아버지와 아이들은 심리적 30미터 움막의 거리를 두고 사는 듯했다. 주님께서는 ‘수술’이라는 예기치 못한 도구로 이 낡은 움막의 문을 두드리셨다. 한 달 전 쓸개 제거 수술에 이어 담석 제거를 위해 다시 입원하신 아버지는, 더는 호령하던 호랑이가 아니셨다. 아버지는 왜 왔냐고 하시면서도 몸 상태와 지난 수술 얘기 등을 하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의 기도 권유로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기도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어색해하며 피하시기는커녕 제 손을 더 꼭 맞잡으셨다. 곁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드는 동안, 투박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 시간을 감사했다. “주님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 바오로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주님과 화해하고 이 수술을 통해 회복하게 도와주소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주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섬세한지 느꼈다. 육신의 수술을 통해 주님은 아버지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할아버지의 움막에서 느꼈던 그 황도의 사랑 표현처럼, 아버지와 내가 서로에게 기도로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셨다고 본다. 이제 남은 수술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린다. 아버지가 회복되어 돌아오시는 날, 이번에는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먼저 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어주길 소망한다. 그 심리적 30미터, 움막의 거리가 이제는 더 가까워져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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