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 19,1-10)

‘할렐루야’라는 외침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히브리어 ‘할랄(הלל, 찬양하다)’과 하느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야(יה)’가 결합된 말, 곧 하느님을 향한 가장 큰 찬미의 호응이다. 이 외침이 터져 나오는 까닭은 분명하다. 대탕녀 바빌론이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바빌론을 경제적 사치와 부의 폭력으로 이해해 왔다. 바빌론으로 은유 되는 로마의 번쩍이는 문명 뒤편에서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제국의 욕망을 가차 없이 고발했다.(17–18장) 이제 그 고발은 한 시대의 끝맺음으로 응답받는다.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묵시 19,2)는 표현은 열왕기 하권 9장 7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제벨의 손에 죽은 나의 종 예언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모든 종의 피를 갚게 해야 한다.” 구약 전통에서 피의 복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이들에게 내리는 최종적 심판의 은유였다. 그리고 그 심판은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묵시 19,3)는 표현이 바로 그 비극적 결말을 연기로 형상화한다.(이사 34,14; 묵시 14,11 참조)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다시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 4~5장에서 천상과 지상의 만남을 상징하던 이들이, 바빌론의 몰락 앞에서 또다시 하나의 찬미로 모인다. 그 하나 됨의 중심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이 찬란히 서 계신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자연스레 “아멘, 할렐루야!”(묵시 19,4)가 된다. 시편 106편 47절의 외침처럼,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하느님을 향해 수렴되어 간다. 5절은 그 장엄한 찬미 안으로 더 많은 존재가 초대됨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모든 종, 낮은 이든 높은 이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은 모두 그 찬미 안으로 부름을 받는다. 마지막 시대에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노래하게 된다는 이 장면은 종말 묘사의 오랜 전통을 잇는다. 그 찬미의 소리는 거대한 물살 같고, 굉음의 천둥 같고, 무수한 무리의 목소리 같다.(시편 113,1; 134,1; 135,2 참조) 하느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로,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찬가로 빚어내신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곧 하느님에서 어린양으로 이동한다. 어린양의 혼인날이 도래했고, 신부는 이미 단장을 마쳤다.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아내로 그리던 예언자들의 오래된 이미지(호세 2,16; 이사 54,6; 에제 16,7–8 참조)는 이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공동체의 관계로 확장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고(마르 2,19–20; 마태 22,1), 바오로는 이 이미지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2코린 11,2) 어린양의 신부는 특정 집단의 특권적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묵시 5,9; 7,14; 14,3–4 참조) 신부가 몸단장을 마쳤다는 표현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교회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지만(에페 5,26–27), 그 은총은 특정 제도나 사람들의 이름으로 독점되지 않는다. 이미 앞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모든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고, 바빌론의 몰락과 함께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권세가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약하고 상처투성이지만,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모든 민족이 속량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묵시 5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입은 “고운 아마포 옷”(묵시 19,8)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입히신 의로움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록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 책이 ‘행복’을 위해 쓰였음을 기억한다. 그 행복은 세상이 약속하는 부·명예·권력의 언어에서 찾을 수 없다. 하느님과 어린양과의 일치, 상호 개방과 존중, 그리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요한 묵시록이 가리키는 행복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며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한다. 하느님의 편과 어린양의 자리에서 흐르는 것은 언제나 ‘보편’의 은총이며, 용과 짐승과 대탕녀 바빌론의 편에 흐르는 것은 오직 ‘배타성’과 그로 인한 폐쇄적 집착뿐이라는 것을. 10절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로 소개된다. 그들은 천사와 같은 위상을 부여받지만, 천사의 권위는 더 이상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 위치가 아니다. 천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동료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하느님을 따라 사는 이들, 하느님의 구원 안에 초대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 바빌론의 멸망은 인간 사이를 가르던 모든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와 배제와 증오가 사라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다시 선포하는 일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가 말한 한 문장이 이 지점에서 더욱 깊게 와닿는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인생의 역사」 168쪽)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무한한 유혹, 재물을 선택한 젊은 부자 청년

동창 신부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오래전 부인을 보내고 혼자된 한 부자 노인이 자녀들의 끈질긴 청을 이기지 못했다. 일생의 피와 땀이 얼룩진 그의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는 요구였다. 자식들에게 당장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는 고민 끝에 유산을 미리 상속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 모든 형제가 지극정성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병원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게 되었고 오랜 시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부자 아버지는 병원 입원비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점차 발걸음을 끊더니 병든 아버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자식들의 배신에 관해 들은 담당 의사도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조언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연락하여 사실은 아직도 친구의 명의로 토지가 아주 많이 남아있으니 처분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라고 했다. 연락을 받은 자식들은 바로 아버지 계좌로 많은 돈을 보냈다. 그래야 더 많은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자식들은 생각했다. 돈을 받은 아버지는 돌아가실 게 뻔한데 뭐 하러 생돈을 쓰냐는 똑똑한(?) 자식들과 연을 끊었다. 돈과 재물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때론 가족, 부부관계 등 애틋한 인간관계도 파괴해 버리니 말이다. 물론 돈과 재물, 그 자체는 좋은 것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재물 역시 세상의 모든 만물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며 영원하지 않다. 재물 욕심이 너무 과할 때 자제력을 잃고 몸과 마음은 파멸에 이른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최고의 자리를 돈과 재물이 차지한다면 재물의 노예와 다름없다. 어느 날 한 금수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주님, 제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 청년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켰던 열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 능력도 출중하고 인생에서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조차 자신이 가진 엄청난 돈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청년은 예수님께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등은 어릴 때부터 잘 지켜 왔다”며 의기양양했다. 그 청년에게 예수님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꼭 하나 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재산을 모두 포기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청년은 몹시 슬펐다. 부자 청년은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고 슬퍼졌다. 처음 느끼는 좌절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말씀은 돈과 재물 자체를 최고인 양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이나 돈이 인생의 최종 목적,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생에서 올바른 최고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8면

[말씀묵상]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세례자 요한은 사해 동북쪽에 있는 마케루스 성채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갈릴래아의 영주 안티파스가 이복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비판한 결과입니다. 따지고 보면 안티파스가 헤로디아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두매아 출신으로서 유다의 통치자가 된 헤로데 가문은 늘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와 이혼하고 유다 독립전쟁의 영웅 마카베오 가문이 세운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의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기 아내를 버린 안티파스를 세례자 요한이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유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파스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안티파스는 요한이 세력을 규합해 정통성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한 자신을 축출할지 두려워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감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전해 들은 요한은 두 제자를 보내 그분의 정체를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여기서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약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좀 이상합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한 이래 오직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데 온 삶을 바쳤으며,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께 세례까지 베푼 요한이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말입니다. 지금 요한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힘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면 메시아가 맞는 것도 같지만, 그분이 이어가는 행보는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심판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더 크게 보이는 모습은 정의로운 심판자보다 자비로운 치유자가 아닙니까? 게다가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오히려 메시아의 정의를 외치던 자신이 안티파스의 불의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혀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요한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이 말씀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가 도래하면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요한에게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요한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서에는 위에서 언급한 메시아의 모습뿐 아니라 심판하는 메시아의 모습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심판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오심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음을 몰랐기에 오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궁극적인 심판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이는 세례자 요한처럼 메시아께서 오셨음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성경은 메시아의 시대에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바닷물처럼 흐르리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우리가 체험하는 이 세상은 종종 더 아름답고,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워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져 가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왜 늦어지고 있을까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오셔서 시시비비를 준엄하게 가려 주시기를 학수고대할 텐데요. 아직 마지막 때가 오지 않은 것은 하느님이 사람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설사 그가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비의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 모든 것은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가 권고하듯이, 가을비와 봄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해야겠습니다. *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릅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8면

[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

오늘 복음에는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며,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는 경고가 나옵니다.(마태 3,1-12 참조) 이는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는 루카복음 6장 44절과 맞닿아 있는 말씀이며, 열매가 없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마태 21,18-22 참조)도 떠오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 무화과나무는 철도 아니었는데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이 저주하고 죽게 하셨으므로(마르 11,12-14과 그 병행구 참조)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신 것일까요? 무화과는 우리나라에도 잘 자라지만 가나안의 일곱 토산물(신명 8,8 참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옛 유다 전승에서는 무화과를 선악과로 보았습니다. 원조들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책감을 느낀 뒤 선악과의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6-7 참조)고 풀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에도 자랐고 가나안의 토산물에 속하는 무화과는 예부터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한 나무입니다. 호세아서 9장 10절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 만나셨을 때 무화과의 맏물을 발견하신 듯 기쁘게 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무화과와 관련된 지명도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셨다는 마태오복음 21장 1절의 ‘벳파게’는 ‘덜 익은 무화과의 동네’를 뜻합니다. 벳파게 바로 근처에 자리한 베타니아(마태 21,17-19 참조)는 ‘무화과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을 주는 구절은 예레미아서 8장 13절입니다. “내가 거두어들이려 할 때 ···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이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인데도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기에 당신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건 나무가 상징한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기 위한 일종의 상징 행위였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뽑아와 가나안에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는데(시편 80,9 참조) 양질의 열매가 아닌 딱딱하고 시큼한 들포도만 맺으므로 이를 꾸짖은 것(이사 5,2.7; 예레 2,21 등 참조)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도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복음 11장 13절 등에 따르면 무화과나무는 당시 열매를 내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의 첫 열매가 5~6월에 나오지만, 보통 수확하는 건 당도 높은 8월 중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는 성경에서 ‘여름 과일’로 자주 통합니다.(아모 8,1; 미카 7,1 등 참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는 과월절 직전이므로(마르 11,12-14과 병행구 참조) 말 그대로 무화과 철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코복음 11장 13절의 ‘철’은 그리스어로 ‘크로노스’, 곧 시계처럼 객관적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 곧 주관적이고 질적으로 의미화된 시간으로서 ‘때’를 의미합니다.(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등 참조) 이에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상징임을 감안하면, 이 ‘때’는 백성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시기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지만 자기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은 건강해 보였지만 실속이 없어 빛 좋은 개살구와 같았다는 꾸짖음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처럼 그들이 변질시킨 성전이 특히 그러하였는데(마르 11,17 참조), 언뜻 백성이 성전에서 기도도 하고 비싼 제물도 바치는 등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율법의 핵심인 공정과 정의는 맺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완고함과 그들이 타락시킨 공허한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리라는 예고를, 백성의 상징인 무화과나무를 매개 삼아 전달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 11장과 그 병행구에는 무화과나무와 성전 정화 사건이 나란히 나옵니다. 성전은 이후 예수님의 예고처럼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이제는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된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2코린 6,16 참조)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무화과나무 일화와 더불어 소리만 요란한 수레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닥치므로(1테살 5,2 참조)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부와 사치, 그리고 사람(묵시 18,9-24)

울며 가슴을 치는 장면은, 예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한다. 티로의 멸망 앞에서 바다의 임금들이 통곡하던 모습(에제 27,16–18 참조)이 그러했고, 오늘 세상에서도 화려함에 매달리던 욕망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그렇게 절망 앞에 무너져 내린다. 땅의 임금들이란 결국 부에 대한 집착이 무너질 때 폭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대변하는 얼굴들일 것이다. 그런데,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 결핍과 가난 속에 있었다. 세상의 화려한 부는 가난한 자에게 ‘넘사벽’처럼 보였지만, 요한 묵시록은 그 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울어야 할 이는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와 사치를 붙잡던 이들이어야 했다. 그 울음은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삽시간에 닥칠 불가역적인 심판의 울음이었다.(여기서 ‘삽시간’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단 하나의 시간’을 뜻한다.) 부와 소유를 향해 목을 매고 사는 우리 역시, 늘 급박한 울음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더디 오지만, 결핍과 상실은 갑자기 그리고 무참하게 삶을 무너뜨리곤 한다. 본문은 이러한 부의 붕괴를 상품 목록이라는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12절부터 나열되는 물품들은 에제키엘 27장의 목록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활발한 무역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장로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는 동방과의 교역에서 연간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얻었다고 한다.(1세스테르티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고,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는 오늘날 가치로 거의 1조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금, 은, 보석과 진주는 바빌론의 불륜을 상징했던 사치의 언어이다.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도 마찬가지다. 부와 사치를 하느님의 뜻과 대립하는 힘으로 바라보는 요한 묵시록의 시선은 보석의 화려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관철된다. ‘비단’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극치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향나무는 정교히 다듬어져 귀족의 탁자로 놓였고, 상아 공예품과 대리석 장식은 부유층의 집안을 가득 채웠다. 계피와 향료 역시 귀족적 취향의 일부였는데, 특히 계피는 인도에서 건너온 고급 향이었고, 귀족의 향수, 연회장의 공기 그리고 옷장과 침실의 향을 채우는 데 쓰였다. 한 리브라, 곧 300g의 계피는 2000데나리온에 해당했으니, 노동자가 5년 반 동안 일해 버는 임금과 맞먹는 가치였다. 올리브기름과 고운 밀가루는 당시 서민들이 심각하게 겪던 결핍을 떠올리게 한다. 물가가 치솟아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그 현실 속에서, 이 식품들은 단순한 재화를 넘어 굶주림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 등장하는 단어 - 노예, 곧 σώμα, ‘몸’ - 는 가장 잔인한 진실을 드러낸다. 부와 사치의 정점은 결국 사람을 몸뚱이, 노동 기계, 객체화된 신체로 만든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는 물건이었고, 오락과 향락을 위해 소모되는 존재였다. 인간의 존엄은 값으로 환원되었다. 요한 묵시록은 말한다. 부와 사치는 인간을 ‘사람답지 않게’ 만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의 구조가 된다. 14절에서 ‘네 마음이 탐내던 열매’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물질과 권력이며, 그것은 이제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선언된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 그 절정에 있다. 모든 선장, 선객, 선원, 바다에서 일하는 이들까지도 바빌론의 몰락을 보며 울부짖는다.(17-20절 참조) 그들은 바다 무역의 번영을 등에 업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돈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지는 그들의 운명은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이며,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살해된 이들의 피(24절 참조)는 증언의 흔적이고, 그 증언은 바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다. 세상의 사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만, 신앙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존재로 회복시킨다. 부와 사치는 한때 달콤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생활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대우받는 것,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 우리의 존엄이 가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사도단에 치맛바람 일으킨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유다인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천재들이 많은 것은 그들의 특별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교육이 지식이나 암기, 연역적 방법을 중시하는 것에 비해, 유다인들은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감성이나 지혜에 초점을 두고 토론이나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가장이며 제사장이며 교육자의 역할을 한다. 유다인들에게 식사 시간은 성경 공부 시간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율법을 직접 받은 것 같은 감동으로 자녀들에게 토라를 가르친다. 논리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자녀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그런데 과학계는 지능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주장한다. 유다인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어머니는 자녀 정서교육의 원천이며 최고의 심리치료사이며 교육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자녀의 거룩함, 올바른 행위, 좋은 성품을 계발해 주고 남편과 자녀들이 하느님 말씀을 배우게 도와준다. 자비로운 어머니는 동시에 능력이 있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교육열이 유별난 우리나라의 어머니들도 치맛바람(?)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좀 더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식만 챙기다 보니 교권을 침해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사도단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는데 어머니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 예수님께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여성 제자그룹의 가장 핵심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녀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을까? 유다 사회에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사상과 활동에 매력을 느껴 전심전력으로 사도단을 도왔다. 살로메는 보통 유다인 가정처럼 아들들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살로메는 인간적으로도 예수님께 큰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청탁한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하나씩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분명히 예수님이 언젠가 큰 권력을 잡아 세상을 통치할 큰 인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도들 안에서는 당연히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물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살로메의 치맛바람으로 사도단 내에 말썽이 난 셈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제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친 후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했던 의리있는 여장부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욕망의 자리, 대바빌론(묵시 18,1-8)

요한 묵시록 18장은 에제키엘서 27~28장을 선명히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있다. 옛 예언자는 몰락해 가는 티로를 향해 장송곡을 불렀고(에제 27장 참조), 그 도시 위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을 단호한 어조로 선포했다.(에제 28장 참조) 요한 묵시록은 그 오래된 비애와 심판의 언어를 되살려, 이번에는 대바빌론의 추락을 노래한다. 로마 제국의 은유로 기능하는 대바빌론은 부와 힘이 응축된 무대였고 사치와 문화가 폭발하는 도시였다. 이런 대바빌론이 추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상의 해석이며 그 해석을 요한 묵시록 18장은 과거 예언자들의 애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문명의 가장 화려한 무대가 돌연 폐허의 무대로 전환된다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해석의 다짐이다. 그 다짐은 ‘다른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다른 천사가 나타나고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지는 장면은, 마치 구약에서 하느님 영광의 발현이 풍성히 묘사되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에제 43,2 이하 참조) 빛은 단순한 조명 이상의 의미를 띤다. 그것은 한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가 문을 열기 직전, 경계 위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임을 빛은 가리킨다. 천사가 힘찬 목소리를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우렁찬 외침을 암시한다.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외침이 이 지상을 향해 울려 퍼진다. 이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결의에 찬 외침이다. 천사의 목소리는 ‘무너짐’에 대한 선포다. 대바빌론의 몰락은 단지 도시가 파괴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마귀들의 거처, 더러운 영들의 소굴, 그리고 더러운 새들의 둥지뿐이다. 묵시문학에서 ‘더러움’은 단순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질서가 무너진 뒤 남는 세상의 잔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된 예언서들이 폐허의 자리에서 들짐승과 재앙의 새들을 불러 모았듯(이사 13,21–22; 34,11–15; 바룩 4,35; 예레 50,39 참조), 요한 묵시록은 대바빌론을 더러운 것들의 본령으로 선언한다. 인간 문명의 정점이었던 곳이, 몰락의 순간 가장 낮고 추한 것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 이 아이러니가 묵시의 핵심 서사다. 대바빌론이 왜 이런 추한 자리로 전락했는지 요한 묵시록은 아주 묘하게 짚어낸다. 그 중심에는 ‘난잡한 불륜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 술은 특정 행위의 상징이라기보다, 모든 민족을 하나의 욕망의 연동 장치로 이해시키려는 은유다. 힘을 향한 갈망, 주류의 대열에 끼어들고자 하는 조급함, 사치에 자신을 비벼 넣어 존재를 증명하려는 충동, 이 모든 것이 한 잔의 술처럼 서로 뒤섞인다. 술을 마시면 가려지는 것처럼, 욕망에 취하면 자기 파멸의 흔적도 흐릿해진다. 요한 묵시록은 이 욕망의 구조를 ‘사치’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 그러나 그리스어 ‘스트레노스(στρῆνος)’는 단순한 사치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교만, 거만, 건방, 욕망의 과잉을 동시에 가리키는, 인간 영혼의 팽창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사치는 물질적 번영만이 아니다. 영적 우월감, 정신적 허영, 자리를 차지하려는 끝없는 경쟁심 모두가 대바빌론의 얼굴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적 번영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욕망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이 본문은 특정 시대에 갇히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욕망 앞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4절에서 하늘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와라.” 이 목소리는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초대다. 하느님을 잊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종종 성공의 서늘한 그림자다. 성취와 번영의 달콤한 향이 오랫동안 영혼을 감싸면, 어느 순간 하느님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언제나 ‘나오라’고 외쳤다.(이사 48,20; 예레 50,8; 51,6.9.45 참조)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은 종종 자기 욕망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6절에서는 다시 ‘잔’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미 14장에서 살펴보았듯, 이 잔은 하느님의 분노가 담긴 상징이다. 대바빌론이 누린 사치만큼, 아니 그 사치의 깊이만큼 하느님의 심판은 되돌아온다. 욕망이 잔을 채웠다면, 심판 또한 잔에 가득 찰 것이다. 대바빌론의 목소리는 무례하고 허영으로 가득하다. “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니 슬픔도 모를 것이다.” 이 말은 구약의 바빌론과 티로가 과거에 외쳤던 교만의 울림을 되풀이한다.(이사 47,7–9; 에제 28,2 참조) 하느님의 자리는 비워둔 채, 스스로의 힘과 화려함에 취한 이들의 고집스러운 독백, 그 마지막 회오리가 바로 대바빌론이다. 이 교만의 도시는 결국 흑사병, 불, 붕괴의 잔해 속으로 추락한다.(8절) 큰 능력 앞에 인간 문명의 허세는 먼지처럼 흩어진다. 예언자들이 오래전 예고했던 그 무거운 심판의 단어들이, 이제 다시 18장의 공기를 채운다.(이사 47,9; 예레 50,32 참조) 많은 학자가 이 장을 로마 제국 번영에 대한 영적 비판으로 읽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다. 권력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 길게 흔들린다. 거대한 도시는 무너져도, 욕망의 도시는 인간 마음 안에서 여전히 건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의 외침은 고대 로마를 향한 비판이기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무너져야 할 대바빌론, 우리의 과도한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은 어디에 있는가? 그 도시로부터 “나오라”는 부름은 결국, 나 자신이 만든 욕망의 감옥에서 제발 벗어나라는 자유에의 호소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9면

[말씀묵상] 대림 제1주일

전례력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는 언제나 기다림으로 시작되는데, 그 다른 이름은 희망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희망합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집에 갈 날을 이야기하고 사도 바오로는 구원의 때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노아의 홍수와 도둑에 비유하십니다. 대림 시기의 기다림은 메시아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기다림이자 그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연중 마지막 주간과 대림의 첫 주간은 같은 주제로 어울립니다. 여러분은 이 기다림에 공감하십니까? 박해받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이제나저제나 세상 종말이 오기를 기다리십니까? 어느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드십시오!” 말했더니 모두 손을 들었고, “그러면, 지금 당장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드십시오!” 했더니 모두 손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실 세상 종말이란, 영화에서도 막아야 할 재난으로만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세상이 끝난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영화 속의 멸망과는 좀 다른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안정된 삶을 바랍니다.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면 가족과 함께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저축합니다. 안정된 삶이 없이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도 어렵습니다. 안정과 여유가 있어야 삶의 질도 높이고 예술과 문화도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변화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참된 안정은 변화 없이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고, 생각하고, 나아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험을 선택해야 우리는 성장하고 더 큰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변화는 세속적인 발전보다는 영적 깨우침입니다. 변화의 시작은 시야를 넓히는 데 있습니다. 경제적인 안정은 만족을 주지만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보면 사회적 불의와 환경 파괴 등이 보입니다. 그러면 경제적인 관점만을 보지 않고 그런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마치 애벌레가 열심히 먹이를 먹어 몸을 키운 후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안정 속에서 성장한 우리는 깨달음과 회개를 통해 새사람이 되어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들의 삶을 살면서 메시아를 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를 위한 준비를 충실히 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초대가 변화보다는 안정에 머물고 싶어 하던 이들에게는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랍스터는 수명이 없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무슨 이유인지 랍스터는 세포가 노화하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나 포식자에게 잡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랍스터가 죽는 이유는 허물을 벗다가 힘이 빠져서 죽는다고 합니다. 몸이 어느 정도 커지면 허물을 벗어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허물은 더 단단해지고, 나중에는 허물을 벗는 일이 너무 힘들어져서 허물을 벗다가 죽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이 회개하는 일, 즉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새사람이 되는 일은, 얼마나 더 힘들고 또 얼마나 많은 이가 걸려 넘어질 일이겠습니까? 그러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노아의 홍수처럼, 그리고 도둑처럼 오는 그날을 깨어 기다리고 있습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주님의 뜻에 나의 삶을 맡길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내 삶을 주님 앞에 벗어놓고 주님이 주시는 흰옷을 입고, 그분의 집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분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나라를 내 삶으로 기꺼이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희망과 기다림으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합시다.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화답송, 시편 122,1 참조)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회개의 표지로 네 배의 보상을 약속한 자캐오

스웨덴의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27세에 나이트로글리세린 제조법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는 평화와 문명을 파괴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되면서, 그에게는 칭찬보다 비난이 쏟아졌다. 한동안 깊은 시름에 빠져 정작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던 그에게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십만 프랑을 주며 “세계 산업에 일대 변혁을 초래할 발명품”이라고 격려했다. 그 이후 노벨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였던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화약이 인간을 살상하는 무기로 더욱 악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큰 실망과 함께 자책감에 빠졌다. 유명한 ‘노벨상’은 이런 인간적인 고뇌에서 시작되었다. 노벨은 천문학적인 유산을 원금으로 맡기고, 매년 그 이자를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위대한 일을 한 사람’에게 큰 상금으로 수여하도록 했다. 각종 기초과학·응용과학 분야의 상이 있지만, 수학상이 제정되지 않은 것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노벨은 친구인 수학자 미타크 레플러가 자신의 부인과 몰래 밀애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벨 수학상이 제정되면 당대의 천재인 레플러가 수상자가 될 것은 거의 확실했다. 노벨이 수학상을 두지 않은 것은 연적에 대한 마지막 복수였다는 것이다. 세리는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에 꼭 있는 직업이었다. 로마는 식민지의 세금 징수에 그 나라의 사람들을 이용했다. 세관장들은 한 해의 예상 세입을 먼저 로마에 지불했다. 그러니 당연히 세리들은 선불금을 포함해 최대한 세금 수입을 올리려고 부당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자 대리인으로, 이방인이나 창녀 같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자캐오란 인물도 다른 세리들처럼 법을 악용하여 재물을 모은 부자였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자자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과도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이미 들은 터였다. 길가에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키가 작은 자캐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주님은 나무 위에 올라간 자캐오를 보고 그를 부르셨다. 주변 사람들이 죄인과 어울린다며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캐오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동족에게도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고독하고 소외된 삶을 살던 자캐오는, 자신을 평범한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예수님께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은 자캐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자캐오는 주님께, 많은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약속했다.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소유를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율법에는 남을 기망하거나 착취해서 부당한 이익을 챙겼을 때, 이익을 본 액수에 20%를 더해 되갚도록 하여 죗값을 치르게 했다.(레위 5,24 참조) 자캐오는 자신의 회심을 이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사도 바오로를 후원하고 동행했던 티토

가곡의 왕이란 불리는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관현악곡, 교회음악,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명작을 남겼다. 31세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가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슈파운이라는 친구 덕분이었다. 교직에 있던 아버지는 슈베르트도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좋은 시를 발견하기만 하면 즉석에서 작곡할 수 있는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 슈베르트의 학창 생활은 빗나가 보였다. 화가 난 아버지는 슈베르트의 용돈마저 끊어버려 15세의 슈베르트는 외롭고 힘들었다. 악상이 떠오를 때 정리할 오선지를 구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때 다행히도 슈베르트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친구 슈파운이 있었다. 슈파운은 자신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슈베르트에게 오선지를 사 주곤 하였다. 슈베르트는 교직 과정을 이수하여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평탄하지 못했다. 그는 17세에 <C장조의 교향곡>을 완성할 정도로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친구 슈파운은 학교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슈베르트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슈파운은 돈 많은 친구 쇼벨의 하숙집으로 슈베르트를 데려가 작곡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그리고 후원회를 만들어 슈베르트를 적극 후원하는 데 앞장섰다. 슈베르트를 사랑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모임도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슈베르트의 음악이 눈부시게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슈베르트는 생전에 그럴듯한 연주회 한 번 못 한 불우한 음악가였지만, 인간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친구를 가진 행운아였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 명의 좋은 협력자 덕분에 성공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었다. 성공한 이들을 보면 항상 좋은 은인, 친구가 있다. 바오로에게는 그리스 출신으로 바오로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티토라는 인물이 있다. 티토는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바오로의 어려운 전교 활동에도 항상 그가 동행했다. 티토는 믿음직스럽고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신심 깊은 신자였다. 바오로가 “이 형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모든 교회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영광과 우리의 열의를 드러내려고 우리가 맡아 수행하는 이 은혜로운 일을 위하여, 여러 교회가 우리의 여행 동반자로 뽑아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2코린 8,18-19)라며 티토를 칭송했다. 문제가 생긴 교회에 파견되어 사태를 수습한 것을 보면 티토는 지혜와 정치적 수완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티토의 가장 중요한 활약은 코린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고린토 교회의 분열은 바오로의 큰 관심사였다. 교회가 분열되어 붕괴로 이어질 위험한 상태였는데, 티토는 코린토 교회를 다시 하나로 만들어 사태를 수습했다.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는 것도 티토같은 성실하고 도움을 주는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고 함께해주는 진정한 친구는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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