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 문득 혼자가 된 듯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부모를 잃을 때만이 아니라, 믿고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기댈 곳이 사라진 듯 느껴질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깊은 상실감과 공허를 경험합니다. 그때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지금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은 누구인가?” 수녀원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떤 수도자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모두 선종하셨을 때, 주변에서는 슬픔을 나누며 더 이상 의지할 혈육이 없다는 현실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하느님께 봉헌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깊은 상실감과 고독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부터 21절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러한 두려움과 상실감의 한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떠나신 뒤 제자들이 겪게 될 불안과 공허 그리고 제자 공동체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깊은 염려를 품으신 스승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방황하게 될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경에서 ‘고아’는 단순히 부모 없는 아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고아는 사회적 약자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고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의 대상입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탈출 22,21)라고 명령하십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라 부르며,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시편 146,9)고 노래합니다. 고아는 흔히 결핍 속에 살아가며, 잃어버린 부모를 되찾고자 하는 갈망을 지닙니다.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속해 있고 싶어 하며, 보호받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이러한 고아의 현실을 잘 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로 홀로 두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며, 성부께 청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은 곧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아버지 없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며,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아버지께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호자”, “진리의 영”(요한 14,16-17 참조)이라고 부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법정에서 ‘변호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동시에 위로하고, 돕고, 곁에서 함께 머무는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장 불안하고 두려울 때, 이러한 보호자를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 공동체, 곧 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일 공동체에 성령은 가장 깊은 보호와 위로가 되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자, 많은 이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병자와 불구자들이 치유됩니다. 그 결과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사도 8,8)라고 전합니다. 이어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1베드 3,15)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이들을 하나로 묶어, 한 하느님 아버지께 속한 형제자매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아처럼 고독 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하늘나라’가 공간적 개념만 나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는 진정 ‘우리 마음 안에’ 또는 ‘마음속에만’ 들어 있을까요? 이 물음에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 마음에’ 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니라 ‘너희에게(고대 그리스어로 너희 위에 또는 너희 둘레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시간이나 장소적 의미만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주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움터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0-11) 마귀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이들이 해방되고 치유되어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활동 경과를 보고하자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마귀(사탄)의 시대는 사그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마태 10,1) 신약성경에서 ‘더러운 영’은 악마, 마귀, 악령 등과 맞바꾸어 놓을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악령 퇴치 권한뿐 아니라, 갖가지 병자와 허약한 이들에 대한 치유 권한까지도 부여받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 6,12-13)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마태 12,28) 대신에, 루카는 병행 구(句)에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루카 11,20)이라고 전해줍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기적들을 부정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 하느님의 위력을 체험한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탈출 8,15) 그와 같이 놀라운 기적들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바로 그분 손가락이, 곧 그분께서 친히 이루신 그분의 작품이라고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입니다.…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7-19)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경에서 찾는 불면·우울증의 치유

불면증과 우울증은 전문의를 찾아 상담과 진료로 치유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오늘은 성경에 뚜렷이 등장하는 경우를 통해 그 극복의 길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저지른 권력 남용 사례를 지난 주간에 들려드렸습니다.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부하 장수들이 잇따라 패배하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다는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1마카 6,11)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찾아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1마카 6,12) 안티오코스는 다시는 유다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절망에 이릅니다. 그는 친지들을 불러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1마카 6,10)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는 불면증 호소이며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는 우울증 호소입니다. 다른 원인에서 오는 불면증과 우울증에는 치료 방법이 따로 있겠지만, 전쟁광 안티오코스의 치료제는 ‘회개’뿐일 테죠. 그 회개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2001년 여름 전국 신학부 교수 모임 때, 통풍으로 양쪽 발이 퉁퉁 붓고 아파서, 거실에서 불과 70여m 떨어진 모임 장소조차 걸어가지를 못해 암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저는 2003년부터 십일조 정신으로 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도, 또 우울감이 짙어 올 때도 자꾸만 은혜로운 일을 떠올립니다. 안경을 개발한 분들, 신발을 만들어 준 분들, 농어민, 자동차나 옷을 만들어 주는 분들, 의료진, 도로 건설, 건축가, 그리고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는 분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고마운 분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면 이웃과 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부족했던 사랑과 배려에 죄송한 마음, 이제라도 아껴 주고 덮어 주고 감싸 주고 갚아드리고 싶은 마음도 차오릅니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축복을 빌어드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더군요. 이같이 은혜로운 마음이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 꿀잠도 자게 되고 행복한 마음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입니다. 희년의 기본 정신이 다음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참된 회개는 자기 책망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찾을 줄 아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설령 어둠 속을 걷고 있어도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지 묵상해 봅시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힘에 귀 기울이며 점점 익숙해져 봅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 갈 터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오늘 불안한 인간 영혼을 향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잘 들어보십시오. 주님은 먼저 세상을 고치려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마음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혼란은 먼저 인간 마음의 혼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살고 있지만 안에서는 자주 무너집니다. 젊은이는 지쳐 있고, 중년은 흔들리며, 노년은 외롭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자기 영혼이 얼마나 목마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보다 먼저 희망을 말합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말합니다. “주님...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길을 모른다는 이것이 사실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우리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끝내 남는 생명인지.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주님은 길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길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경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성으로 길이시고 신성으로 목적지이시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길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길이신 분께 자신을 맡기는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과부들이 소외되고 불평이 생겨서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불평이 있던 자리에 봉사가 생기고, 분열의 자리에서 친교가 태어났습니다. 성령은 무너진 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세우십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1베드 2,5)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이건 존재 선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로 세워지는 집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돌입니다. 우리는 무너진 돌이 아니라 세워질 돌입니다. 버려진 돌이 아니라, 성전이 될 돌입니다. 외로운 이여, 당신은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아무도 고아가 아닙니다. 이처럼 공동체의 분열은 사랑의 질서로 치유되고, 봉사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몸을 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놓일 때 집이 됩니다. 성령은 혼란을 버리지 않고 질서를 세워주십니다. 그리스도는 모퉁잇돌이고, 신자들은 그 위에 놓이는 산 돌입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흩어진 마음은 무너진 돌 같지만, 주님 안에 놓이면 성전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시킨 공작의 입을 통해 속삭입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름다움입니까?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아름다움, 상처 입고도 사랑하는 아름다움, 십자가를 통과한 아름다움 곧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고 이제 조용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폭력 앞에서 온유를 지키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버티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숨은 기도, 어머니의 눈물, 이름 없는 자비입니다. 「필로칼리아(Philokalia)」(기도와 내적 고요 수행, 특히 마음의 기도와 정화의 길을 다룬 교부·영성가들의 글을 모은 선집)는 말합니다. “흩어진 마음을 주님의 이름 안에 모아라.” 이 얼마나 깊은 처방입니까. 마음이 모이면 평화가 생기고, 평화가 생기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과거에 있었고 현재도 진행되며, 미래에 있을 세계의 전쟁도 인간 내면의 전쟁도 같은 뿌리를 가집니다.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고요는 도피가 아니라 평화의 시작입니다. 지친 젊은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길은 있습니다. 불안한 중년이여,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중입니다. 외로운 노년이여, 하느님은 당신 안에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은 힘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구원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기도입니다. 이제 침묵 안에서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침묵) 주님, 흩어진 마음을 모아주시고 우리를 살아있는 돌로 세우소서. 기도가 평화가 되고, 평화가 세상의 구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세상은 논쟁보다 기도로, 힘보다 아름다움으로, 지배보다 자비로 살아남습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누카의 유래

고대 유다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임금을 대라면, 흔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를 꼽을 터입니다. 도대체 재위 12년 동안 안티오코스의 업적이 어땠길래 그럴까요? 업적이라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겠죠. 안티오코스는 세계화(그리스화) 정책을 펼쳤고, 모든 나라 곧 그가 지배한 주변 나라는 하나같이 그리스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야훼 하느님’ 신앙을 버리고 이교도들의 풍습과 종교까지 그대로 따르도록 강요당했죠. 그리스 잡신들을 공경해야 했던 겁니다. “임금(안티오코스)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안티오코스는 유다교 탄압에 열을 올리며, 특히 리시아스를 시켜 유다인 말살 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의 병력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을 없애버리고…”(1마카 3,35)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영토에 외국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땅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1마카 3,36) 그즈음에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인들의 용기를 북돋웁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고 몰살시키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고는, 서로 ‘우리 백성을 폐허에서 일으키고 우리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싸우자’ 하고 말하였다.”(1마카 3,42-43) 그때 유다 군중은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싸울 준비를 하며 주님께 기도 올립니다.(1마카 3,44 참조) 기도에 힘입어 전투는 유다의 대승으로 끝납니다.(1마카 4,28-35 참조) 이와 같이 유다 마카베오는 안티오코스의 오른팔 격인 리시아스 군대를 물리치고 나서, 안티오코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물리쳤으니 올라가서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이어 흠 없이 율법에 충실한 사제들로 하여금 성소를 정화하고 더럽혀진 돌들도 치워버리며 더럽혀진 제단까지도 헐어버립니다.(1마카 4,42-45 참조) 유다인들은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아침에 더럽혀진 성전을 새로 봉헌합니다.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1마카 4,53-54)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하던 그날은 에피파네스 임금이 성전 제단 위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2마카 6,2) 히브리어로 하누카(봉헌)라고 부르는 이 봉헌 축일은 요한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오늘날의 우리도 삶에서 우리의 믿음을 꺾어놓는 시련과 적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누카를 기억하며 의지를 다지면 좋겠습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부활 제4주일은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Vocatio Dei)이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결심이나 선택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부르시는, 당신 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부르심을 받은 이의 구체적 상황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이지만, 언제나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불러주시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교회 전체로 이끄신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이 전하는 목자의 비유는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부르심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을 잘 드러내 줍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목자는 먼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만, 그런 다음에는 양들이 한 무리를 이뤄 자기를 따르도록 하지요.(요한 10,3-4 참조) 이때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요한 10,4)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형은 ‘에이도(εἴδω)’입니다. 그런데 이는 본래 ‘보다’라는 뜻에서 출발하는 말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사용되지요. 이를테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을 때 “그분의 별을 보고”(마태 2,2) 따라갔는데, 이때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에이도입니다. 그들은 또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자’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는데(마태 2,11 참조), 이때도 에이도가 반복되고요. 그 후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그분은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는데(마태 3,16 참조), 이때도 역시 에이도를 씁니다. 그렇다면, 원래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왜 목자의 비유에서는 ‘안다’라고 번역할까요?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요? 내 눈으로 직접 ‘본다’라는 것은 곧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통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앎’을 형성하지요.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 냄새를 맡아‘보는’ 것, 음식을 먹어‘보는’ 것, 감각을 만져‘보는’ 것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은 보는 것을 통해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고백록」, 10권 35장 참조) 인간 정신의 인식 능력은 보는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는 것은 양들이 이미 목자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또 양들이 목자를 ‘보았다’는 건, 양들이 목자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체험적으로 목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다는 건, 알게 된 대상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따라서 복음에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요한 10,4)라고 한 건,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양들이 목자를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상호신뢰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목자가 양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양들이 한 무리를 지어 목자를 따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믿음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은 결국 관계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아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내가 그분을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보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기 위해서는 오래 보아야 하고 자주 만나야 하며 깊은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분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깊이가 곧 부르심의 척도입니다.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바라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나요?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기도 열심히 하시고요, 미사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성당 나오셨다는 분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병에 걸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병에 걸리신 분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데 병’입니다. 계속 ‘그런데’를 외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이 ‘그런데 병’은 삶 안에서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책 읽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바빠요.” “많이 웃어야 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요.”, “그런데 웃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병’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런데’ 대신 ‘어떻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제자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예순 스타디온’(약 11km)이 넘는 씁쓸한 도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여자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계속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 돌아가셨잖아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필연적인 계획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차갑게 식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로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날이 저물어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루카 24,30 참조) 최후의 만찬과 동일한 이 행위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제 ‘그런데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저물어 어둡고 위험한 밤길임에도 즉시 일어나 돌아간 것입니다. 절망 안에서 엠마오로 도망갔던 제자들이 마음을 바꿔 이제 기쁨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성경 풀이’를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었던 것”(사도 2,24 참조)이라고 완벽하게 논증합니다. 제2독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가졌던 현세적 해방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영적 해방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1베드 1,19 참조) 우리도 주님께 자기 삶의 고통을 없애주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내려달라는 ‘빗나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만을 외치면서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 ‘어떻게’를 말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이 타오르며 영성체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데 병’에 걸려서 엠마오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나의 이웃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루카 24,34 참조)라며 자기 삶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합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8면

[말씀의 우물] 불면증과 우울증 이야기

불면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갓난아기도 오랜 질병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뒤척이거나 잠 못 이루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부모가 큰소리로 자주 다투면 입이 무거워지고 웃음이 차츰 엷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수까지 줄고 아예 미소까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자연히 우울감이 속마음을 짓누르게 되어, 생각도 판단도, 내·외적 성장이나 발육도 더디거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실은 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겪으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울증세가 스며듦을 느낍니다. 불면증을 뜻하는 라틴어 ‘인솜니아(insomnia)’는 본디 수면(睡眠)을 뜻하는 라틴어 ‘솜누스(somnus)’에서 유래합니다. 그 반대말로 접두사 ‘인(in-)’을 붙여서 불면증이 자연스레 ‘인솜니아(in-somnia)’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잠 못 이루다 보면 누구나 결국 우울한 마음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를 자주 만납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겪은 불면증과 우울증은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 예라고 봅니다.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안티오코스는 신하들과 자기 측근을 불러 놓고 이릅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불면증)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우울증).”(1마카 6,10) 우울증을 뜻하는 영어 ‘디프레션(depression)’도 본디 ‘짓누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데프리메레(deprimere)’에서 유래합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75년부터 164년까지 12년 동안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린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해 ‘에피파네스(신으로 나타난 자)’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부도덕함과 오만함을 보고서 ‘에피파네스’ 대신에, 뒤에서는 ‘에피마네스(Epimanes, 미쳐버린 자)’라고 부르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유다 민족을 멸망시키려던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갔다. … 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마카 1,25-28) 안티오코스는 이스라엘을 점령해 약탈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유다인들을 박해한(1마카 1,36 참조) 결과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음과 영을 맑게 해주고 축복해 주는 음악과 그림 등이, 잠을 설치게 하는 침울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다.”(1사무 16,23) 말씀의 우물을 읽으시는 여러분 중에도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실 터입니다. 그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잠시 숨이라도 돌리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부터 31절에는 이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주님은 “오시어”(요한 20,19.26) 제자들 가운데 서시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요한 20,20.27 참조) 이는 부활이 십자가를 지워 버린 사건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사랑의 현존임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토마스의 의심은 바로 이 상처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 곧 십자가의 상처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부활의 진실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상처를 통해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임을 알아보고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또한 이 상처는 토마스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날 저녁, 두려움 속에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여드레 뒤, 의심 가운데 머물러 있던 토마스를 위해 다시 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같은 장소에 두 번 오셨다는 사실은, 부활이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들, 의심하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이 닫혀있어도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오심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청하지도, 맞이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준비와 자격을 앞섭니다. 또한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데도” 오셨다는 사실은, 어떤 장벽도 막을 수 없는 주님의 초월적인 현존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 부활 신앙이 개인의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신앙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의 의심마저 껴안으시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은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주님은 토마스에게 왜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토마스를 시험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도 아니며, 오히려 그의 의심을 당신의 상처 안으로 초대하시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세상을 향해 열린 하느님 자비의 문입니다. 토마스에게 주님의 상처는 실패와 좌절이 남긴 고통의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마침내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가 이끌어 온 신앙의 정점이며 부활 신앙의 가장 완전한 언어입니다. 토마스는 더 이상 증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상처를 만졌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분’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1베드 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산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새로 태어남은 상처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의심과 상처를 안고서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으며(1베드 1,8 참조) 그분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증거를 요구하며 두려움과 의심 속에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닫힌 마음의 문을 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가 오늘도 고통받는 이들의 상처 안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부활의 믿음으로 이끕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셉의 운명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섬세하게 펼쳐집니다.(창세 37장, 39~50장 참조)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 37,7) 이 꿈 이야기를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세 37,8)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힘껏 보살펴줍니다.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창세 37,11)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은 흔히 신이 꿈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계시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넘겨져 그의 종으로 지내게 됩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창세 39,6)는 요셉은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창세 39,7-23 참조) 쓰라린 운명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중요한 때마다 꿈풀이를 잘한 덕분에 이집트 왕국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재상직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제2인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구걸을 온 자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내가 …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이어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일은 주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요셉은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짧고 명료하게 요약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셨다’고요. 이는 구세사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이 모든 이스라엘 선조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요약하여 정리한 설화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서 이끄시고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 가 살던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겪던 억울함과 서글픔과 그리움으로 한꺼번에 참아오던 울음을 터트립니다. “요셉은 …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30) 그때까지 요셉이 지녔던 든든한 무기는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변함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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