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최후의 날 예언한 스바니야 예언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개를 가축과 애완용으로 길들여 옆에 데리고 살았다, 그 역사가 약 2만 년에서 4만 년 전부터라니 유구하다. 얼마 전 동영상에서 큰 곰이 우리를 넘어 강아지를 공격하자 어미 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0배나 큰 곰을 맹렬하게 공격해 곰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용맹성에 놀랐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시각장애인인도견이 되는 아주 이로운 동물이다. 그런데 비슷한 줄 알았던 들개와 이리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이리는 개와 달리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잔인한 동물이다. 성경에서 이리는 안 좋은 것에 비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이리의 습성을 비유했다.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스바 3,3) 성경 저자들은 이리에 비유되는 악인들이나 악한 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끔찍함과 잔인함을 비유하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부정직한 대신들과(스바 3,3)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도 싸잡아 이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매섭게 공격했다.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를 의미하는데 활동 현장은 예루살렘 성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에게 근동의 패권이 넘어왔다. 아시리아는 주변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세력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왕국의 주권과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렸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는 아시리아의 우상을 세워졌고, 매음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요시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고작 8살이라 직접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 상당 기간 섭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스바니야가 열심히 활동했다. 요시야 왕 때 섭정을 한 권세가들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한 지도층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1,2-13), ‘아시리아의 몰락’(2,13-15)을 예언한다. 스바니야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반항, 우상 숭배,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마침내 사회 부정과 불의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예언자와 달리 무섭게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의 예언은 50년 후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된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께만 기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이 희망이 된다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희망할 근거는 존재한다는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 스승 엘리야를 백성들과 이어준 엘리사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은 천혜의 방어망 라인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라인강은 강폭이 넓고 회오리치는 곳이 많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최적지이다. 히틀러는 라인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중부 라인강변에 도착한 미군 일부는 아침 안개가 걷히고 포연이 사라진 뒤 기적을 목격했다. 라인강 사이의 레마겐과 에르펠을 잇는 철교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이 다리에서만 폭발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 특공대는 다리 위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한발씩 전진해 1945년 3월 7일 다리를 접수했다, 연합군에게 점령된 라인강 최초의 다리인 셈이다. 연합군은 라인강 너머로 교두보를 마련했고 대공포대를 설치했다. 베를린으로 직행하는 독일의 전략요충지로 계속 병력과 탱크와 물자를 수송했다. 히틀러는 크게 화를 내며 지휘한 장교들을 처형했고, 독일군은 여러 번의 공습과 심지어 실험 중이던 V2로켓까지 10발 이상 발사했지만 다리를 폭파시키지 못했다. 열흘 정도 지나 다리 중간이 무너졌지만 이미 많은 병력이 동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는 연합군 심리와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마겐의 철교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투와 전쟁에서 다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레마겐 철교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예언자도 결국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이어주고 백성들에게 예언을 전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엘리사가 처음 예언자로 활동할 때는 아합의 통치 말년이었다.(1열왕 19,1-17)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와 같이 기적으로 유명하다. 엘리사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이 스승의 승천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엘리야의 옷을 집어 들고 내리쳐 요르단강물을 갈라친 것이었다. 엘리야가 행했던 기적을 다시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엘리사를 그들의 지도자와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섬겼다. 대부분의 기적 설화들은 깊은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지닌 예언자 그룹과 목격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엘리사는 기적 설화들이 쌓여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기적은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을 고친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엘리사의 기적은 중단되지 않았다. 죽은 엘리사의 몸에 닿은 다른 주검이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탁월하고, 동정심 많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엘리사의 인간성이 예언자 그룹의 제자들 기억에 깊이 간직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역사에 준 영향력에 대한 진정성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우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맨 앞자리에 놓았다. 그가 행한 무수한 기적들도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평생을 스승과 제자단, 그리고 백성들을 이어주는 평화와 생명의 다리 역할을 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언자들의 스승 엘리야

신학생 시절 한 선배가 소개해 준 헬렌 켈러의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글을 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장애인이었다. 그는 장애를 훌륭히 극복한 현대의 위인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의 삶을 성공적으로 가능하게 한 스승이 있다. 헬렌이 7세 때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스턴의 한 시각 장애 학원을 찾았다가 만난, 평생의 교사가 될 앤 설리번이었다. 당시 앤 설리번은 겨우 21살이었다. 앤 설리번도 5세 때 눈병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평생 실명의 불안과 싸우면서 살아야 했다. 앤 설리번의 이러한 체험이 헬렌의 교육에 도움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엄마가 아기에게 말을 걸듯이 끊임없이 헬렌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말을 써 주었다. 헬렌도 마찬가지로 손가락 말로 대답했다. 헬렌은 1904년 하버드대학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3중 장애의 몸으로 대학 교육을 마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학교 강의실에서 언제나 곁에 앉아 강의를 손가락 말로 헬렌에게 전해 주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내용을 점자로 다시 적어 읽게 하였다. 이처럼 헬렌 같은 위인의 생애에서 앤 설리번이라는 스승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인생의 큰 행복은 없을 듯하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유명한 예언자 엘리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통치기간 중 이스라엘의 종교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 엘리야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혹독했는지 고증된 심각한 가뭄이 닥쳐올 것을 경고한다.(1열왕 17,1) 아합은 엘리야에게 나라를 불행하게 만든 자라고 힐책했지만, 엘리야는 오히려 임금의 잘못이라고 맞받아친다. 엘리야는 카르멜산으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모아 대결을 벌인다.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고 백성들은 반대편의 예언자들을 죽인다. 엘리야의 승천(2열왕 2,1-12 참조)은 엘리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정당성을 부과하고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혼자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여정을 같이 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가 곧 승천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적 능력 가운데 장자로서 받아야 할 몫을 요구했다. 예언자들은 분명히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감을 내렸다고 확신한다.(2열왕 2,15) 엘리야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열성적인 헌신으로 바알과의 투쟁을 선도한 예언자이다. 그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가르침을 계속 오랫동안 기억하며 실천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일편단심 예언자 느헤미야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하나인 율곡 이이(李珥)는 1582년 황해도 감사로 부임했는데, 그곳에는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양반집 딸에서 기생이 된 ‘유지’(柳枝)라는 소녀가 있었다. 총명하고 시도 잘 쓰는 유지는 율곡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말벗이 되었다. 얼마 후 율곡은 한양으로 떠나 둘은 이별했다. 그 후 어느날 율곡이 황해도 재령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은데 문을 두드려서 보니 성숙한 여인이 된 유지였다. 그리운 임을 보기 위해 험한 수십 리 산길을 걸어 찾아온 것이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연을 시로 남겼는데 “수용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을 애틋하게 느끼면서, 천한 기생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유지가 걱정이 되고 만약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 만나겠다”고 노래했다. 당시에 율곡이 유지를 소실(小室)로 두는 것에 걸림돌은 없었지만, 문제는 율곡의 건강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갑자기 죽으면 어린 유지를 돌볼 수 없다는 책임감에 소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과 유지의 사랑을 담은 세 편의 편지 ‘유지사’(柳枝詞)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지는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삼년상을 치렀고,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나서도 율곡을 그리는 시를 썼다. 유지는 평생 죽을 때까지 율곡을 일편단심 마음에 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 일편단심한 인물로 느헤미야 예언자가 떠오른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을 책임지는 시종이었다. 황제는 늘 독살의 위험이 있어 술 시종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어느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굶주리고 성전은 폐허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고 통탄하며 슬피 울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왕에게 ‘고향 이스라엘’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황제는 느헤미야를 신뢰했기에 그의 예루살렘 귀환을 적극 도왔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지 두 세대가 지난 뒤였는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가난에 시달렸고 정치가들은 여러 파로 갈려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며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도록 이끌었다. 꼭 좋은 일에는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성전재건은 불가능하며 반대하고 심지어 느혜미야가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 건축을 한다는 가짜 뉴스도 성행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고 지혜롭게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성전 건립이라는 대공사를 밀어붙였다. 느헤미야에게 성전 재건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전쟁보다 더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환난 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돌파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역시 필요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니네베의 멸망을 예언한 나훔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는 청년 시절 문학적이며 지성적이었다. 그는 마르크스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사회주의 이념에 진심이었다. 무솔리니는 19세 때 병역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쳐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사회주의를 연구했는데, 선동가로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11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10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파멸 상태를 본 그는 사회당원으로서의 활동을 그만뒀다. 1918년 무솔리니는 구체제의 악습들을 완전히 청산해 낼 수 있는 단호한 독재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파시스트 운동은 민족주의와의 결합에 힘입어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재향군인들의 실업과 정부의 취약성, 국회의원들의 부패 사이를 파고들어 무솔리니는 세력을 확장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폭동을 이용해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 권력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국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한 지도자의 정책이 나라의 운명을 지옥과 같은 고난으로 몰아넣은 사례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그의 시체는 밀라노 미잘로 로레토 광장 과거 공산당원들을 공개 처형하던 바로 그 교수대에 거꾸로 매달렸다. 예레미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예언자 나훔은 고향이 ‘엘코스’라는 것 외에는 별로 정보가 없다. 나훔서는 지도자들의 불의한 시책이 국가를 패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니네베의 폐허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들의 올바른 지도와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예언자 나훔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예언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과 7세기 초엽은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팽창하는 시기였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100여 년간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 기원전 652년부터 왕좌 계승을 위한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통해, 결국 앗시리아의 힘은 기울고, 멸망을 향해 추락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멸망하고 시리아 하란 지역의 아시리아 군대도 공격으로 전멸당해 기원전 609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하느님께서 위로하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훔은 이름 그대로 고통 중에 억압받던 유다인 위로하며 악행의 말로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전체적으로 나훔서에는 앗시리아의 지배에 고통 당하던 유다인의 울분과 증오가 잘 담겨 있다. 나훔은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뜻이며, 심판의 날에 악인은 처벌당하고 성읍은 완전히 파멸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한다. 나훔서의 내용은 니네베의 멸망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다. 니네베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결국 포악한 통치자들 때문이다. 나훔은 불의는 결국 망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결국 승리한다는 위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외친 예언자 에제키엘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긴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파스칼은 본래 착실하고 검소한 청년이었는데 갑자기 노는 일에 빠져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1654년 11월 23일에도 파스칼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밤에 약 2시간 동안 그는 놀라운 초월적인 체험을 했다. 그 이후 파스칼은 사교계에 발을 끊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파스칼은 죽기 얼마 전부터 그리스도교에 깊이 빠져들어 신앙을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엮은 책이 바로 유명한 「팡세」(Pensées,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이 메모는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600여 단어의 신앙고백은 뜨거운 체험에 대한 확신과 기쁨, 감동이 서려있다. 이처럼 신비롭고 초월적인 체험은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에제키엘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정복하고 주요 인사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바빌론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에제키엘은 제사장인 동시에 예언자였다. 에제케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하고 위협하고 경고하지만 동시에 위로하며 격려한다. 유배 기간이 지나면서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는데도 많은이들이 그냥 정착하려고 했다. 유배 기간 중 배교하는 이들도 많았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도덕,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개탄했다. 에제키엘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속에 끼어있다가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로운 발현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때 에제키엘이 본 것은 바람, 구름, 불이었다. 이어서 네 짐승, 바퀴, 홍수와 같은 소리, 말소리 등을 보고 듣게 되었다. 에제키엘이란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이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이다. 에제키엘은 환시, 환청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의 영(靈)에 이끌려 예언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에제키엘도 미움과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 가운데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에제키엘은 젊은 나이에 포로가 되어 고국을 떠나게 되었고 나라가 망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인물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장래에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민족중흥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본국 귀환을 예언하고 회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소생시켜야 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언했다. 누구라도 삶에서 신비롭고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체험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5장에서 열매로써 하느님에게 온 것인지 악의 세력에게 온 것인지를 분명히 식별하게 해주셨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1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게 된 투덜이 예언자 요나

더운 여름에는 공포영화가 제격이다. 서스펜스 영화의 달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어린 시절의 우연한 경험에서 연출의 바탕을 얻었다. 그는 어린 시절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부두에 있는 상선 숫자를 세어 자기 방의 벽에 기록하는 일을 즐겨 했다. 아들의 이상한 행동이 늘어가자, 아버지는 히치콕에게 친구인 경찰서장에게 편지를 갖다주도록 했다. 편지를 받은 경찰서장은 히치콕을 그대로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유치장에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어린 히치콕은 긴장감과 불안, 공포를 경험했고, 풀려났을 때 느끼는 자유의 기쁨을 체험했다. 훗날 긴장과 공포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후련한 기쁨이 온다는 것을 터득해 자신의 영화에 이용했다. 성경에서 여름에 볼만한 공포영화를 만든다면 단연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요나서는 한가지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계기가 됨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이 흥미를 유발한다. 하느님께서 니네베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 때, 요나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줄행랑을 쳤다. 요나는 유다인을 억압했던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요나는 편협한 마음을 가진 애국자였다. 요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기꺼이 했지만, 사악한 니네베의 선교사가 되는 일은 단호히 거부했다. 요나가 탄 배가 커다란 폭풍우에 휩싸였고 이방인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요나가 폭풍우의 원인임을 알아냈다. 이방인 선원들은 심한 폭풍우 때문에 배가 망가질 판이 되자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폭풍우는 즉시 잠잠해졌다. 하느님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했고 요나는 사흘 밤낮을 꼼짝없이 그 안에 머물러야 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고 사흘 후 나올 수 있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잿더미로 변한다며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자 니네베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에 들어갔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느님께서는 계획했던 재앙을 거두셨다. 요나는 니네베가 망하지 않게 되자 하느님께 불평을 터뜨리며 화를 냈다. 요나는 성을 떠나 초막을 치고 아주까리 나무 그늘에 앉았다. 시원한 그늘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튿날 벌레가 먹어 그늘이 사라졌다. 해가 쨍쨍 내리쬐자, 요나는 더위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며 투덜거렸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아주까리 나무하나가 죽었다고 화를 내는 것을 지적하며, 니네베에 많은 사람과 가축이 있는 것을 상기시켰다. 요나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너무 크고 신비롭다. 인간은 편협한 생각으로 은총과 축복 속에 살면서도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 보이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를 닫고 있는 처사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구원에는 어떤 차별이나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1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예로보암

1974년 3월, 중국 시안(西安) 교외에서 주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용과 청동 화살촉을 발견했다. 진시황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었다. 무덤 안에는 온통 구리를 녹여서 왕궁을 재현하고 수은을 환류시켜 은하수를 만들었으며, 천장에 이십팔수의 성좌를 그렸다. 죽어서 살 집의 규모가 이 정도라면 그가 생존했을 때 왕궁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이후 아방궁(阿房宮)은 초호화 건물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초대형 건물을 짓고자 하는 것은 독재자들의 꿈인 것 같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도 베를린 시내를 완전히 재건축하려 했다. 유럽을 지배하는 새로운 대(大) 게르만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용을 갖추겠다며 세계의 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 건축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초대형 공사가 이루어지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노력 봉사에 동원되는 힘없는 서민들이다. 솔로몬도 거대공사를 진행했는데 예로보암은 그 책임자였다. 솔로몬은 통치 기간 특별히 이방인 여성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였는데 외국인 아내들을 위하여 그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국방력과 경제력이 안정되어 너무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이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예로보암이 우연히 길에서 아히야 예언자를 만나는데, 아히야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중 열 조각을 예로보암에게 주면서 10개의 지파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고 예언했다. 소문이 퍼져 솔로몬의 귀에도 이 사실을 들어가 예로보암을 죽이려 하자, 예로보암은 이집트로 망명했다. 예로보암은 기원전 931년경에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솔로몬을 이어 왕좌에 오른 르하브암에게 힘겨운 백성들의 과도한 노동력 동원과 무거운 과세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다. 며칠 말미를 주고 르하브암은 솔로몬의 원로들을 불러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그런데 결론은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라며 강대강으로 맞섰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개로 쪼개지는 분단의 상황이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예로보암이 등극했다. 기세등등했던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스켐을 세우고 살다가, 그곳에서 나와 프누엘을 세웠다. 남유다의 침공이 두려워 군사 요충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의 노역과 무거운 과세로 고통을 받아 예로보암을 왕으로 세웠는데, 예로보암도 솔로몬이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또한 두 마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겨 하느님께도 죄를 지었다. 권력을 잡은 예로보암은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고 간신들의 기분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사람은 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운다고 했던가. 북이스라엘 왕 19명 중, 예로보암의 성적표는 꼴찌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아합 왕과 이제벨의 악행

중국 역사에서 고황후(高皇后), 측천무후(則天武后), 서태후(西太后)는 3대 악녀(惡女)로 불린다. 이들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의 권력을 휘두르고 무고한 신하들을 포함해 많은 수의 대신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으며 나라를 크게 흔들었다. 조선시대에 악명을 떨쳐서 유명했던 악녀 중에는 오늘날까지 드라마와 연극 등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녹수와 정난정, 장희빈 등이 유명하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조선 왕이나 왕실을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다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수렴청정이나 국정농단의 결과는 뻔하다는 결과를 보여 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악명 높은 여자는 누구일까? 아합 왕의 부인 이제벨이 아닐까? 이제벨은 시돈의 왕 엣바엘의 딸이었는데, 아합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결혼은 이스라엘에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다. 아합도 어느새 바알을 숭배하고 이스라엘에는 이방 종교가 침투하게 된다. 이제벨의 유혹에 넘어간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과 단을 건축했고 아세라 여신상도 세웠다. 이제벨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왕과 백성들을 꾀어 바알 숭배자들로 만들었다. 끝내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였다. 이제벨의 아버지, 엣바엘은 본래 아세라 신당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이었다. 그가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역모를 통해 왕좌를 찬탈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종교까지 정복하기 위해 딸을 이용했다. 이제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자칭 선지자로서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전하는 전형적인 사기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과 함께한다는 뜻이 있다. 복잡한 종교 환경과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겨루어 이기고 하느님이 진정한 하느님이심을 증명한다. 이제벨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며, 엘리야마저 살해하려 했다. 이제벨은 사람을 내세워 포도원의 주인인 나봇이 하느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으로 증언하게 했다. 결국 이제벨의 음모대로 나봇은 살해당했고 그의 포도원은 빼앗겼다. 이제벨은 이런 악행으로 결국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다행히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 이제벨은 아랫사람들에 의해 2층에서 땅으로 내던져지고, 그 시신은 개들에게 먹히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요람 왕을 죽이고,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켰했다. 쿠데타는 가장 측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일반적인 공식이 증명된 셈이다. 예후는 바알 신앙 척결을 철저하게 이행하여 하느님으로부터 4대까지 왕조가 존치되는 것을 약속받기까지 한다. 이제벨은 이스라엘에서 부정한 단어로 쓰였으며 악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말씀에 잡혀 활동한 예레미야 예언자

중국의 두보(杜甫)는 사회풍자와 교훈적인 주제를 담아낸 시를 많이 썼다. 두보가 살던 당나라는 찬란한 문화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다. 당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정비된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강했던 당나라도 잦은 전쟁과 반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차츰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현종이 임금일 때 아름다운 여성 양귀비에 빠져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 낙양 등의 큰 도시를 점령한 큰 군벌들이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왔는데, 당나라 중엽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이 가장 유명하다.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꽁무니를 뺐고 장안을 지키는 군인들도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당시 말단 관리였던 두보도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만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도망쳐 나오다가 높은 성 위에서 수도 장안이 불타고 부서져 내려 폐허가 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보가 눈물을 흘리며 쓴 시 “國破山河在(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고) 城春草木深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지는구나)…(후략)”는 그의 시집 「춘망」(春望)에 남아있다. 두보는 지금도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애민정신에 투철하고 사람의 마음과 역사적 진실을 아주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한 시들을 많이 써서 중국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시인이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방 사제의 아들이었다. 예레미야는 20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때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인 약 40여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혹독한 시기였다. 55년간 왕들의 폭정이 계속됐고, 요시아왕의 개혁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나라가 부실한 상태가 되다 보니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굶주림과 고통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종교가 더 부패하여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였다. 그는 예언자와 사제들을 정조준했다. 그들의 부패상을 모두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실 당시의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지나친 경고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활동은 녹록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는 와중에 예레미야는 펑펑 울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까지 사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너무 억울했지만, 백성들의 어두운 미래가 측은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는 웃음거리, 조롱거리로 내몰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잡혀있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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