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하나] 성전의 초는 하루 중 아주 잠깐만 타오릅니다

성전의 초는 하루 중 아주 잠깐만 타오릅니다.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 수많은 시간 동안 차갑게 식어 있을 뿐입니다. 제단 위에 있는 종은 미사 시간 중 세 번만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때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나머지 모든 시간은 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침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있는 세탁기는 자리도 많이 차지하면서 하루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신발장은 집을 오가는 사람이 없으면 한 번도 열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주변의 많은 것들은 자신의 시간을 침묵으로 지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침묵은 의미 없는 것일까요? 차갑게 식어 있는 초도,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제단 위의 종도, 꺼져 있는 세탁기도, 열리지 않는 신발장도 의미 있는 침묵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 침묵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지 못한다면 제때에 타오르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참지 못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실을 맺기 위해 땀 흘리고 때로는 실패하는 그 시간을 의미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조화가 아닌 이상 매번 피어 있는 꽃은 없는데 오늘날 우리는 향기 나는 조화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지금 나의 침묵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그분께서 마련하신 모든 것의 제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괜찮습니다. 그분께서 그리 해주시겠다는데 우리가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존재의 침묵 혹은 고요함을 견디고 그 시간을 성실하게 채운다면 어느샌가 아름답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를 기억하는 것,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사는 건 참 어렵습니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누군가를 바라보면 조바심도 나고, 자꾸만 실수하고 실패하는 자신을 보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더 깊은 침묵을 찾습니다. 하느님 빛으로 나의 침묵에 빛을 밝힙니다. 기도는 침묵이 어둡지만은 않음을 다시 알려줍니다. 만약 지금 마음이 힘들고 괴롭다면 침묵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선택한 침묵은 우리의 존재를 밝혀줄 것입니다.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2025-03-23

[신앙에세이]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4) - 서로 간의 사랑

“나이가 많아도 신체가 불편해도 분과위원이 될 수 있나요?” 나는 하고자 하시는 분은 모두 분과위원으로 모셨다. 생태영성의 길은 나이가 많아도 신체가 불편해도 다 같이 잘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사랑만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활동을 못 할 때도 생긴다. 그러면 미안한 마음에 아무 도움도 못 되느니 차라리 그만둘 결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분께 공동체 안에 남아 기도로써 공동체를 지탱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느님께서는 시련 중에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들과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약할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하기도 한다. 초자연적인 사랑은 자연적인 사랑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분과 활동을 위해 모이는 것 외에도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대방이 원한다면, 더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돌본다. 이런 시간을 내어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세속적인 친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다른 봉사직을 위해 떠나거나 다른 봉사를 하다 되돌아오는 분도 계신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 온 사람들의 관계가 세속적으로 변질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버티기 힘들다. 이러한 일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서로의 영적인 성장을 돕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을 성실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부족함이 많다. 그래서 서로에게 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단순한 친교로는 극복하지 못하는 갈등도 생긴다. 이때에는 서로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이 요구된다. 그러지 못하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드물지만 진리 안에서 서로 충고하며 악습을 고쳐가기도 한다. 이를 허락하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이처럼 우리는 모든 활동에 앞서 복음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핍된 최선보다는 사랑이 감도는 차선을 기꺼이 선택하고 역할 분담을 했어도 항상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한 분이라도 소외되지 않도록 여러 차례 일을 하거나 이미 결정된 사항을 미룰 때도 있다. 늘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기도가 필요한 분을 위해 마음을 모은다. 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분들이 바쳐주시는 기도에 감사하며 모든 공로를 함께 나눈다. 궂은일일수록 더욱 솔선수범하시는 분과위원들이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함께 기도하고 봉사하는 가운데 자라난 서로 간의 사랑은, 우리를 내적·외적으로 성장시키고 작지만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글 _ 안현정 소피아 (수원교구 제1대리구 용인본당)

2025-03-23

[밀알 하나] 마음 속 응어리

그늘진 곳에 뭉친 눈은 쉽사리 녹지 않습니다. 봄바람이 부는 3월에도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쓸쓸히 남겨진 그 눈 무더기는 우리 삶에 응어리진 마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상처받고 아픈 마음, 시련과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애절한 마음,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어두운 마음 등이 떠오릅니다. 봄바람에 설레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봄바람 속에서 녹지 않는 눈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눈 무더기는 어느샌가 사라져 버립니다. 밤사이 봄비라도 내리면 버티질 못하고 비와 함께 녹아내려 땅으로 흘러갑니다. 우리의 응어리진 마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따듯한 공기와 더 따듯한 봄비가 그 눈들을 다 녹이듯이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내 마음이 다시 새로워질 수 있도록 변함없는 사랑을 다양하게 보내주십니다. 필리피서 1장 6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곧 우리가 주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내 마음의 응어리만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응어리가 사라지고 사랑이 남은 그 자리를 통해 우리는 내 삶을 다시금 긍정하고 불어오는 봄바람을 즐길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시련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좋은 일을 완성하시고자 함께 하십니다. 별생각 없이 읽은 성경 구절 한 대목이 당신에게 상처가 된 말을 없애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무심코 들린 성당에서 모르는 누군가에게 건넨 인사가 그 사람에게는 오늘 하루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따듯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했던 기도는 그 사람이 살아갈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눈송이가 그늘진 곳에 뭉쳐 녹지 않듯이, 누군가 가볍게 던진 말들이 내 안의 큰 설움이 된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통해 행한 작은 선행과 기도는 누군가 삶의 가장 튼튼한 버팀목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쁜 것만이 우리 삶에 오래 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우리들의 작은 도움과 기도가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우리의 작은 움직임들이 그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녹이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들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사회입니다. 우리라는 개념보다 ‘나’라는 가치가 지나치게 우선되고, 포용과 수용보다 배척과 미움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늘날 사회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선 작은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 봄의 따스함을 이 땅에 사는 모두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면 어떨까요?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2025-03-16

[신앙에세이]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3) -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

2022년 10월 1일이 그 시작이었다. 그날 본당 주임신부님을 뵈러 가는 길에 나는 한 신자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께 청하는 마음이었다. “본당에 가정생명환경분과가 신설된다고 해요. 신부님께서 부르셔서 가고 있는데 함께 기억해 주세요.” “응 잘 다녀와요. 기도하고 있을게. 다녀와서 연락줘요.” 그분은 내 전화를 받고 직감했다고 한다. 앞으로 나와 함께 봉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제분과위원장님의 요청대로, 앞으로 하고 싶은 사업계획 두 가지를 정리한 자료를 들고 갔다. 신부님께서는 역시나 한국교회와 특히 교구의 발자취를 익히 알고 계셨다. 그리고 상대방을 경청하는 태도와 친환경적인 생활습관까지, 어쩌면 생태적 감수성도 아주 뛰어난 분이실 가능성이 높았다. 신부님과의 면담은 아주 편안하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약간의 암시만 있으면 서로가 바로 이해하고 같은 생각, 같은 결론에 이를 정도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신부님은 내가 걷는 길이 곧 용인본당 생태환경분과의 길이 될 것이라고 축원해 주셨다. 이 모든 내용을 함께 기억해 주고 계신 그분께 알려드렸고 우리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신부님을 뵙고 오면서 나는 이 봉사직을 통해서 진정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뻤고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도 느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 필요했다. 나는 대전교구 전민동본당에서 여러 가지 생태환경적인 행사를 진행했던 경험이 많은 한 분이 떠올랐다. 우리는 같은 포콜라레 영성을 살고 있었기에 나침반을 어디로 고정하면 좋을지를 함께 의논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내가 망설임 없이 연락하자 그분도 흔쾌히 시간을 내어줬다. 바로 다음 날, 나는 단숨에 대전으로 차를 몰아 내려갔다. 한 카페에 앉아서 우리는 4시간 넘게 질문하고 답하기를 이어갔다. 그분의 풍요로운 자산과 너그러움 덕분에 나는 정말이지 큰 도움을 받았다. 앞으로 용인본당이 내딛는 모든 발걸음에 함께 해주시기를, 또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그분께 청했다. 우리는 둘이었지만 셋이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내가 찾아야 할 나침반도, 또 고정해야 할 방향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글 _ 안현정 소피아(수원교구 제1대리구 용인본당)

2025-03-16

[신앙에세이]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2) - 두 개의 못과 십자가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으로 나는 예수님의 마음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됐다. 내게는 결혼 선물로 받은 특별한 십자가가 하나 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은 안 계시고 단 두 개의 못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예수님의 오상을 떠올려 보아도 못 2개로는 부족하다. 창작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애써 물어보지 않았다. 언젠가 삶 안에서 나에게 필요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어렴풋한 희망과 함께 왠지 모를 이끌림에 나는 그 십자가를 선택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부부 동반으로 참여할 수 있는 종교적인 행사가 열렸는데, 나는 남편의 일정을 존중해 혼자서 그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가 시작될 무렵, 한 부부가 내게로 와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내게로 다가온 주된 용건은 따로 있었다. “평소 내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남편이 이런 데도 따라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내 남편의 성향에 대해서 특히 우리 부부의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니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의 비언어적인 행동까지 모두 고려해 보더라도 그것은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서 나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내 가슴에 하나의 못이 되어 박혔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소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남에게 함부로 판단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그 순간에는 가슴에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기도가 떠올랐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내 마음에서도 똑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저 사람도 자신이 지금 저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겠습니다.’ 못 하나는 이미 내 가슴에 박혔으니 나머지 못 하나로 나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단 두 개의 못과 십자가! 내 일생을 통해 찾아내야 할, 천국문의 열쇠 중 하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마치도 예수님과 은밀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미소가 지어졌고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다.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 위에서 속삭이고 계신다. “나를 바라보아라. 나를 사랑해다오. 내가 너에게 한 것처럼!” 글 _ 안현정 소피아(제1대리구 용인본당)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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