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렙톤 두 닢 커피

신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 신부님께서 강조하신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신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야 해.” 다양한 신자분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식사를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음식을 가리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여전히 입 짧은 신부로 남아있습니다만, 이런 식성에도 다행히 딱 한 가지 장점은 있습니다. 유일하게 2차 성징이 오지 않은 미각 세포 덕분에 입맛이 저렴하다는 것입니다. 식도락은 남의 이야기이고 맛집은 손님이 오실 때만 찾아봅니다. 고양이 똥 속 원두로 만든 커피가 비싼 값을 받는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적어도 제 입에는 커피, 프림, 설탕의 삼위일체가 빚어내는 영성적인(?) ‘믹스 커피’가 언제나 최고입니다. 이제는 K-커피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만큼, 다들 이 믹스 커피와 관련된 추억들이 한 가지씩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에게는 신학교 시절 동기 수녀님들이 사주시던 자판기 커피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한 교시 수업이 끝나고 꿀맛 같은 10분의 쉬는 시간이 되면 신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커피 마시러 가자. 오늘은 내가 쏜다!” 비몽사몽 중인 동기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수녀님들은 자신의 동전 주머니를 아낌없이 탈탈 털곤 했습니다. 때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끌려나가기도 했지만 시원한 바람과 함께 다디단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장정만도 수십 명가량이나 됩니다. 일반 대학교와는 달리 카페 한곳 없는 작은 신학교이기에 ‘커피 하우스’라고 이름 붙인 그 야외 휴게실의 자판기 커피를 참 많이도 즐겨 마셨습니다. 하지만 수녀님들이 뽑아주시던 커피가 조금 더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아마도 서로에게 200원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돈이 궁한 학생 시절이었어도 자판기 커피값 정도는 거의 문제 되지 않던 우리들이었지만, 정말 적은 용돈을 받는 수녀님들에게는 몇 잔만 모여도 적잖이 영향을 주는 금액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을 때는 아낄지언정 베풀 때는 주저함 없이 자판기 배를 불려주던 수녀님들의 마음이 담겨있었기에 지금까지도 그 커피 맛을 잊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몇 해 전 인기 있었던 드라마 제목처럼 ‘커피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수녀님’들의 그때 그 커피에, 저는 이제야 이렇게 이름 붙여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렙톤 두 닢 커피’라고 말이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마르 12,41-44)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넣은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절대적인 양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담겨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눈여겨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 얼마만큼의 소중함을 예수님께 내어드릴 수 있을까요? 글_김영철 요한사도 신부(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1-24

[신앙에세이] 이 교우를 받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이끌어 주소서

본당 연령회장을 맡아서 봉사하던 어느 날 생각하기도 싫은 가슴 아픈 큰 사건이 일어났다. 2014년 4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날도 장례미사를 드리고 장지에 동행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고 전 신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문자를 보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장례가 발생하면 전 신자에게 상장례 문자를 보내던 때였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전 신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문자를 발송하고 나니 다시 본당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침몰한 배에서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 잠시, 많은 학생들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저녁 학생들 가족과 신부님 모두 팽목항으로 달려갔고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시작됐다. 그날 이후 매일 매일 슬픈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본당에도 네 명의 아이들이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모든 교우들이 애타게 간절하게 기도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끝내 주검으로 돌아온 학생이 안산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그 친구는 당시 신부님 옆에서 복사를 하며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님이 되겠다던 학생이었다. 임마누엘. 지금도 복사 유니폼을 입고 관 속에 누워있는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입관 때 본당 신부님께서 주신 묵주와 친척 수녀님이 주신 묵주를 양손에 쥐어 주고 복사를 설 때 입었던 복사 유니폼을 입혀 줬다. 참으로 많은 분들을 입관해 드리면서도 울지 않았었는데, 이때만큼은 참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장례 미사 때 같이 복사를 서던 친구가 고별사를 할 때 미사에 참례한 모든 신자 신부님 수녀님들이 다 슬퍼하며 눈물을 훔치며 미사를 드렸던 기억도 난다. 그때 고별사를 읽었던 임마누엘의 친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얼마 후 신부님이 되신다. 12월에 새 신부님이 되시는 그분께서도 아마 임마누엘 성호 군을 잊어보신 적이 없으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지금은 다른 본당에 다니지만 우리 신부님 첫 미사 때 꼭 참례하려고 한다. 그래서 친구 임마누엘 몫까지 다 하셔서 가장 훌륭하고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목자가 되시기를 기도드리려고 한다. 지금도 위령 성월이면 내가 기억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특히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 그중에서도 우리 본당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기억하며 연도를 바치고 있다. 글_김태은 안셀모(수원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

2024-11-24

[신앙에세이] 제게는 당신의 제단이 있나이다

그후 본당에 초상이 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참석해 뜻도 모르는 연도(위령기도)를 바쳤다. 연도를 하면서도 ‘어떻게 이런 가락에 이런 가사를 도대체 왜 누가 만들어서 불렀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어느 날 장례식장에서 연도를 바치다가 ‘그래 이걸(연도) 제대로 한번 배워보자’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주변에 교우들에게 연도를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보니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매일미사 뒷면의 피정 광고를 보다 대전에서 연도 교육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곳으로 전화를 해서 연도 교육을 받고 싶다고 하니 접수를 하고 언제까지 오라고 해서 안산에서 대전까지 연도를 배우러 열심히 다녔다. 그 후로 연도 교육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서울과 대전, 마산, 광주 등으로 10년을 넘게 다녔던 것 같다. 그 무렵 상조회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장례가 발생하면 거의 모든 교우들의 장례를 상조 회사에서 했다. 내가 염습실에 들어가서 상조회사 직원들이 하는 염습을 보니 우리 교회의 예식에 맞지 않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참견을 하면 “우리는 장례지도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격증도 없는 분이 참견하지 마세요”하며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난 우리 교우들이 선종하면 내 손으로 깨끗하게 닦아드리고 정성껏 옷을 입혀 하느님께 보내 드려야지’하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게 됐다. 그래서 가톨릭 상장례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니 대전가톨릭대학교 정하상교육회관에서 상장례 교육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나는 프랜차이즈 제과점과 피시방 두 개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두 곳 모두 주말이면 엄청 바쁜데 하필 교육이 한 달에 한 번씩 금·토·일요일 이렇게 주말에 있었고, 그것도 일 년 과정이었다. 난 아르바이트 직원과 아내에게 맡겨놓고 교육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참고로 우리 가정은 내가 먼저 세례를 받아 성당에 다니고 아내는 성당에 다니지 않을 때였다. 당연히 다툼이 있고 성당 나가는 것에 대한 반대가 심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의 마음이 이해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에게 가게를 맡겨놓고 교육받으러 다닌다고 하니 좋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을 것 같다. 그래도 ‘이걸(장례지도사) 안 배우면 안 될 것 같다’는 굳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너는 이걸 배워서 이런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글 _ 김태은 안셀모(수원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

2024-11-17

[밀알 하나] 어떻게 해서든 먹이시는 분!

첫 본당, 첫 보좌 신부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평소와 같이 주일 저녁 미사 봉헌이 끝나갈 무렵,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영성체 전, 감실의 성체를 모셔 오려고 열쇠를 돌리는데, 아무리 해도 감실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새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 감실이었는데, 날씨 탓으로 변형된 원목 때문에 자물쇠가 고장이 나버린 것입니다. 돌리고 돌려도 돌아가지 않는 열쇠 때문에 저만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시간은 눈치 없이 흐르고, 덩달아 제 등줄기에서도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고민하던 찰나, 새로 축성된 성체가 담긴 성합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마치 이순신 장군님이 된 것처럼 속으로 외쳤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한 개의 성합이 남아있사옵니다.’ 그리고 비장하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 어떻게든 성체를 쪼개고 쪼개서 나누어 드려야겠다.’ 제의방에서 가지고 나온 두 개의 빈 성합에 곧장 성체를 나눠 담고 수녀님들께 상황을 설명해드린 후에야 그렇게 뒤늦은 분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반대편에 계신 원장 수녀님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나누어드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문제가 해결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기에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사 후 수녀님께서 저에게 들려주신 눈물의 이유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려고 이렇게 가루가 되도록 쪼개지시는데, 어떻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신부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다시 하게 됐습니다.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추모 미사에 참례했을 때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참석하신 까닭에 성체가 모자랐던 것입니다. 성체를 모두 나누어 드린지라 방법이 없겠구나 싶던 그때, 앞에 계신 신부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제대 위에는 아직 성혈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곳에 있던 모든 신자분은 성혈을 조금씩 모실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잊지 못할 두 번의 ‘성체의 기적’ 체험입니다. 이 소중한 기억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헤아려볼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로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절대로 굶기지 않으십니다. 당신 몸을 쪼개고 쪼개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나누어 먹이십니다. 기적은 빵과 물고기가 불어난 시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마음으로부터 이미 시작된 것 아닐까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매일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나누어 먹을 수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글 _ 김영철 요한 사도 신부(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위원장)

2024-11-17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