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우리말이다. 박해를 피해 모여 살던 신앙 선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과 밤하늘의 달빛, 별빛이 시냇물과 어우러진 모습이 은하수 같다고 해 붙여진 예쁜 지명이다. 성지 입구에서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기념성당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20여 분. 색동옷 갈아입은 만추(晩秋)의 숲길 따라 묵주기도의 신비를 담은 커다란 조각들이 길동무처럼 안내한다. 묵주 꺼내 손에 쥐고 한 걸음 내딛는다. †.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성인이 고향도 아닌 왜 이곳에 묻힌 것일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846년으로 돌아가야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미리내에 살던 17살 청년 이민식(빈첸시오)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 유해만이라도 수습하겠다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성인의 순교 40일 만인 10월 26일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유해를 모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유해를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50여 리를 밤에만 걸어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미리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널따란 잔디광장의 끝에 김대건 신부 동상 그리고 그 너머 언덕에 1928년 봉헌된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이 있다. 성당 앞뜰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조선교구 3대 교구장), 최문식 신부(미리내본당 3대 주임) 등 네 성직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옛 무덤이다. 성인의 유해는 1901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60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안치됐다. 현재 미리내성지는 성인의 아래턱뼈 등 유해 일부를 모시고 있다. 무덤 앞에서 두 손 모으고 성인의 넋이 깊이 스며 배인 진토(塵土) 위에 경당이 들어서고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오늘에 감사를 드린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상과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성모칠락) 벽화가 이채로운 성모당을 지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으로 향한다. 성인의 종아리뼈를 모신 제대 위로 성령과 성모님 그리고 김대건 신부와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유리화가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 성전 뒤 십자가의 길을 지나 맨 처음 묵주기도를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한국 순교 성인 복자상과 김대건 신부가 사목하던 조선 시대의 성문 형상으로 지어진 성체조배실이 있다. 성체조배가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가장 좋은 길. 성문의 이름이 ‘천국문’(天國門)인 이유다. 성체조배실 너머로는 또 다른 성당이 아름드리나무 아래 들어서 있다. 1907년 봉헌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의 얼이 서린 곳이다. 1896년 사제품을 받고 첫 소임지로 미리내에 온 강도영 신부는 33년간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며 성 요셉 성당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띤 해성학교를 설립했고 농촌개혁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 성지를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순례길 함께한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부르심에 응답했고 그 때문에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목자 성 김대건 신부. 목자의 마지막 길을 편히 모시고자 목숨을 걸고 유해를 짊어진 이민식의 열렬한 신심. 그리고 선배 목자의 순교를 모범 삼아 사목에 충실하며 헌신한 강도영 신부. 때와 곳 가리거나 탓하지 않고 순명의 마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한 신앙 선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미리내가 순례자들의 기도와 묵상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처럼,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 내어놓은 채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창세 22,1 참조)라 답할 수 있는 용기 주시길…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한다. ◆ 순례 길잡이 - 수원교구 미리내성지(www.mirinai.or.kr) - 미사 : 주일(오전 11시, 오후 2시), 화~토(오전 11시 30분) - 유해 친구식: 매월 첫 금요일 미사 중 - 순례 문의 : 031-674-1256

2024-11-17

[순례, 걷고 기도하고]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130년 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서 사목하던 임 가밀로 신부(Camille Buillon, 파리 외방 전교회)가 본당 사목지로 안성맞춤인 자리를 찾았다. 장호원과 이웃한 감곡 매산(梅山) 아래,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109칸짜리 집이었다. 그리고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성당의 주보는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거짓말처럼 목자의 기도는 현실로 이뤄졌다. 1896년 성모 성월, 임 가밀로 신부는 모든 집터와 산을 얻고 그해 묵주 기도 성월 이 자리에 본당을 설립한다.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된 땅, 성모님과 관련된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곳,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된 성소의 보금자리 그리고 한국의 루르드라 불리는 곳.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의 처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해발 160m 남짓한 매산을 병풍 삼아 가까이는 감곡 시내, 멀리는 경기 장호원의 너른 들판을 내려보는 자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마당에서 본당 초대주임 임 가밀로 신부 동상을 가장 먼저 만난다. 1947년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 기도하며 선종할 때까지 51년간 이곳에서 사목한 임 가밀로 신부. 1869년 프랑스 루르드 인근 빌레아드루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루르드를 찾았고 루르드 성모께 자신을 봉헌하며 사제의 꿈을 키웠다. 1893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해 조선에 입국해 성모님 사랑의 역사를 이곳 감곡에서 꽃 피운다. 동상 발아래는 그가 평소 자주 신자들에게 전하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 성당 입구를 지나면 성모자상과 옛 사제관인 박물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든 그늘을 머리에 이고 몇 걸음 더 걸으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라 쓰인 글귀 곁으로 예수 성심상이 예수 성심 광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길가에 놓인 국화 화분 하나하나를 묵주알 삼아 묵주 기도 바치며 성모 광장으로 향한다. 성모 광장은 임 가밀로 신부의 성모님 사랑과 이에 응답하신 성모님의 큰 은총을 보여주는 자리다. 1943년 일본인들이 매산 중턱, 성당보다 더 위쪽에 신사를 지으려 터를 닦자 그는 공사 터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무염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두고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주신다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 묘하게도 공사 중 기상 이변이 자주 일어나며 공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이내 해방을 맞이한다. 1955년 성모승천대축일 이곳에는 성모 광장이 들어섰고 100차 성체대회가 열린 2018년에는 프랑스 루르드의 것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성모 동굴이 봉헌됐다. 환희의 신비로 시작해 영광의 신비로 마친 묵주 기도의 끝. 신사가 지어질 뻔했던 광장 가장 높은 곳에 성모님이 두 손 모은 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 121,8) 감곡 시내 어디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고딕식의 붉은벽돌성당은 1930년 세워졌다. 제대 위 성모상은 아픈 역사와 이를 감내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루르드 성지에서 만들어져 성당 봉헌 당시 안치된 성모상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총탄에 상처를 입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7개의 탄흔은 ‘성모칠고’(聖母七苦)를 연상케 한다. ‘매괴의 어머니’, ‘칠고의 어머니’로 불리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많은 이가 외적·내적 치유를 받는 자리. 정갈하게 차려입은 한 신자가 홀로 앉아 묵상하는 모습을 성모님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성당을 나서는 길. 라틴어 문구가 순례자의 발아래 새겨져 있다. 그 마음 간직하며 순례를 마친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 121,8) ◆ 순례 길잡이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www.maegoe.com)은 2006년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발표된 청주교구장 교서를 통해 ‘매괴성모순례지’로 지정됐다. 성체성사가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드러내기 위한 성체현양대회는 1914년부터 매년 10월 첫 주 목요일 거행된다. 올해 106차 성체현양대회는 지난 10월 3일 미사와 성체행렬, 산상 성체강복 순으로 열렸다. 옛 사제관을 개축한 박물관에는 임 가밀로 신부가 1914년 국내 첫 성체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등과 본당의 옛 문서, 사진 등 본당과 한국교회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기도에 맛 들이고 삶의 현장에서 사랑하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기도와 찬미의 밤’은 매월 첫 토요일 저녁 열린다. 순례자들의 개인 묵상과 기도를 위한 ‘소울 스테이’(매주 금~주일)도 운영되고 있다. ※ 미사 수~토 오전 11시 주일 오전 10시30분(본당 교중미사) ※ 순례 문의 043-881-2808 매괴성모순례지 사무실

2024-10-20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충남 서산 해미읍성. 매년 10월이면 축제로 들썩이는 관광지이지만 한편으로 조선 박해시기 내포 지역의 수많은 신자가 잡혀 와 고통받은 자리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1000여 명의 믿는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때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읍성 남문을 지나 마주한 성안은 평온하다. 저 멀리 다른 나무보다 몇 배 키 큰 나무가 보인다. 학명으로는 회화나무,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다. 300년 넘은 거목은 박해가 한창이던 그때도 저 자리에 서 있었다. 안내문은 이 나무가 감내한 박해의 아픔을 소개한다. ‘옥사에 수감된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으며 (지금도) 철사가 박혀 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나무 곁 옥사에는 관광객들의 병영 체험을 위해 들여놓은 목칼과 형구들이 놓여 있다.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읍성 밖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1868년 5월. 충남 홍주 출신 박 요한과 그의 장모 문 마리아도 옥사에서 끌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신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그리고 그제도 옥을 나선 동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나무에 매달려 매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서문 밖에서 참수치명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참수도 마땅치 않다며 사지를 들어 돌에 메치는 자리개질로 죽임을 당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계속 서쪽으로 걷기만 했다. 돌다리 아래 바위는 ‘이름 모를’ 이들이 흘린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박 요한이 가만히 성호를 그었다. “기다리시오. 그대들을 따라가렵니다.” 해미천을 건너서야 행렬이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구덩이.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예수 마리아 우리를 돌보소서.” 그는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모두 용기를 냈다.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귀신 들린 놈들이라 혀를 차며 포졸들이 외쳤다. “성교(聖敎)를 버린다 해라. 그러면 풀어주마, 살려주겠다.” 박 요한의 차례였다. 구덩이에 들어가 선 채 두 손을 모았다. “천주님 버리고 구차하게 목숨 건져 무얼 한단 말이오? 죽이시오.” 머리 위로 흙이 쏟아졌다. 생매장이었다. “이름 없이, 이름 없이” 대전교구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처형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은 ‘예수 마리아’라는 순교자의 외침을 ‘여수머리’라 들었고 이곳은 ‘여숫골’로 불렸다. 박 요한처럼 이름을 남긴 순교자는 132명. 하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수천의 무명 신자들이 생매장당한 터에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성전이 세워졌다. 화강석으로 외형을 갖춰 읍성의 이미지를 재현한 성당에는 생매장터를 형상화한 둥근 모양의 대성당과 소성당, 디지털역사체험관이 들어서 있다. 대성당과 다리로 이어진 높다란 탑은 팔각이다. ‘진복팔단’의 말씀 그리고 교회를 지켜주시는 파수꾼인 주님을 상징한다. 대성당과 탑을 잇는 다리를 지붕 삼아 걸으면 왼편으로 성지 기념관, 오른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진둠벙’이다. 생매장마저 번거롭다고 여긴 포졸들은 개울 한가운데 둠벙(웅덩이)에 빠뜨려 신자들을 죽였다. 죄인둠벙이라는 단어가 변해 진둠벙이 됐다. 진둠벙 곁에는 신자들의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잡고 동시에 들어 떨어트려 처형했던 ‘자리개질’에 썼다는 그 자리개돌이 놓여 있다. 물에 몸을 반쯤 담근 채 두 손을 모은 순교자 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당시의 처참했던 순교의 현장을 떠올린다. 2014년 이곳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도 진둠범 앞에 한참이나 머물고 기도하며 “이름 없이, 이름 없이”를 되뇌었다.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진둠벙 맞은편은 커다란 무덤 모양의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유해참배실이다. 생매장터를 향하던 순교자들의 모습을 담은 조각이 순례자를 먼저 맞이한다.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 유해참배실에 이르렀다. 순교자들의 유해 너머로 양반과 상민, 여인과 아이 그리고 노인, 지위고하를 떠나 한 신앙을 향해 하늘로 오른 순교자들의 조각이 천사들이 떠받친 구름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 순례 길잡이 해미순교자국제성지(www.haemi.or.kr,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는 한국교회 최초이자 유일의 국제성지로 교황의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해미천을 따라 2만8400여㎡의 부지에 조성된 성지에는 대성당과 소성당, 진둠벙과 자리개돌, 무명순교자 묘와 순교탑, 복자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의 무덤을 형상화한 원형 모양의 성지 기념관에는 순교 당시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올해 문을 연 디지털역사체험관은 내포의 꿈과 역사를 기억하고 현대 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 역사와 문화를 전달하는 공간이다. 서산 지역 소개, 내포 신자들의 모습과 순교의 역사, 빛의 세계를 최첨단 기술로 표현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성지를 찾는 타종교 신자들과 젊은이들을 배려해 성지·지역 소개와 함께 일반작품들도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7일 해미를 찾아 아시아 주교들과 만났고, 해미 순교자 3위(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의 시복 기념비 축복식을 주례했다. 오후에는 호야나무가 서 있는 해미읍성에서 열린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도 주례했다.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전담 한광석(마리아 요셉) 신부는 “해미순교성지는 성지로는 드물게 생매장 순교 터와 묘가 함께 있는 곳으로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함께 묵상할 수 있다”며 “신앙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체험으로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인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을 수 있는 성지를 순례하며 어려운 시대에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길 희망한다”고 당부했다. ※ 미사 : 매일 오전 11시 ※ 순례 문의 : 041-688-3183

2024-08-25

[순례, 걷고 기도하고] 제주교구 ‘김대건길’

‘김대건길’은 2012년 9월 15일, 제주교구 6개 순례길(산토 비아조, SANTO VIAGGIO, www.peacejeju.net) 중 가장 먼저 열렸다. 제주의 서쪽 끝 아름드리 야자수가 이국적인 고산성당에서 출발해 신창성당에 이르는 11.5km 여정에는 바다와 섬, 포구와 산이 있다.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와 순교자들의 자취가 스며 있다. 그 흔적 찾아 첫걸음을 뗀다. 제주교구 고산성당 성 김대건 신부님 순례길 쉼터에서 출발해 해안 쪽으로 1.9km 걸으면 바다와 수월봉 입구에 다다른다. 한눈에 담기도 부족할 푸르고 너른 바다. 바다와 맞닿은 바위에 올라 낚싯줄 드리우는 강태공도 그 풍경에 녹아들었다. 순례자도 그 안에 들어 자구내포구까지의 해안 산책로, 여기 말로 ‘엉알길’이라 부르는 길을 밟아 걷는다. 왼쪽으로는 차귀도가 가지런히 누워 있고 오른쪽은 화산이 만든 신비로운 물결과 절벽이 조화를 이룬다. #1845년 8월 31일 - 이제 조선으로 간다. 불과 보름 전 사제품을 받았지만 마냥 중국에 머물 수는 없었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조선 신자 여럿이 함께 배에 올랐다. 토비아의 길을 인도한 대천사 라파엘의 이름을 단 배가 상하이 항구를 떠난다. 목자가 나셨다며 기뻐할 조선의 신자들을 생각하니 김대건 신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바람이 심상치 않다. 자구내포구에 닿으니 몸 가누기 힘들 만큼 바닷바람이 세졌다. 해풍에 맨몸 드러낸 한치가 포구 곳곳에 내걸려 펄럭인다. 걸음 내내 따르던 차귀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포구를 지나 당산봉에 오른다. 옛날 이곳에 호랑이를 모시던 신당이 있어 붙은 이름. 수월봉보다 높은 해발 146m지만 오르기는 수월하다. 당산봉을 내려와 용수포구를 향하는 1.1km 길은 제주 올레길 중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을 뽐낸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푸른 바다와 차귀도를 이웃한 순례길이 고즈넉하다. #1845년 9월 28일 - 몸도 마음도 지쳤다. 표류 20여 일.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즈음 신자 한 명이 소리쳤다. “섬이 보인다.” 차귀도다. 육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우리 땅 제주에 닿았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모두가 기뻐 덩실덩실 춤을 췄다. 육지로의 항해를 이어가려면 거친 풍랑에 몸살 앓은 라파엘호를 수리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감사와 찬미의 미사를 봉헌해야 했다. 제대를 차렸다. 제주교구 용수성지 입구. 김대건 신부가 오른손을 들어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의 정면은 성인이 사제품을 받은 중국 김가항(金家巷) 성당의 모습이다. 등대 모양의 종탑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는 교회와 성인을 상징한다. 성지 마당 작은 연못 곁으로 라파엘호가 복원돼 있다. 김대건 신부가 간직했던 ‘기적의 성모상본’ 속 성모상도 라파엘호의 귀국길 때처럼 지금도 곁을 지키고 있다. 제주표착 기념관 옥상에 오르면 순례길을 함께한 수월봉과 자구내포구, 당산봉, 차귀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차귀도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성지 잔디마당에 둘러앉아 묵주기도를 봉헌하는 순례자들을 지나 성지를 나선다. 신창성당까지는 4.8km. 용수포구를 지나 풍차가 운치를 더하는 해안도로를 걷는다. 제주 해안을 따르는 180km의 일주도로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이 길은 ‘성 김대건 해안로’라고도 부른다. 풍경에 취해 넣어두었던 묵주를 꺼내 들었다. ‘빛의 길’이라 이름 붙은 김대건길의 끝자락. 빛의 신비를 봉헌한다. #1845년 10월 어느 날 - 하느님의 섭리로 제주 해안에 닿았던 라파엘호가 다시 바다로 나섰다. 조선으로의 길은 곧 순교의 길임을 일행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꼭 1년 후 박해의 칼날 아래서 천상의 영광을 안은 성 김대건 신부가 오늘을 살아가는 순례자에게 당부한다. “교우들 보아라.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몸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성 김대건 해안로를 따라 늘어선 커다란 풍차 너머로 붉은 하늘이 내려앉고 있다. ◆ 순례 길잡이 - 제주교구 김대건길(www.peacejeju.net/bbs/page.php?hid=course01) ‘김대건길’은 제주교구 고산성당에서 시작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수월봉 인근과 자구내포구, 성 김대건 신부의 라파엘호가 도착한 용수성지를 거쳐 신창성당에 이르는 11.5km의 순례길이다. 제주 올레길 12코스와도 여정이 겹치는 김대건길은 제주 천주교 여명의 역사를 묵상할 뿐 아니라 바다와 섬, 화산지형, 오름 등 제주 천혜의 자연 경관도 체험할 수 있다. 순례 여정의 중간지점인 용수성지에는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복원한 라파엘호도 전시돼 있다. 용수성지에서 신창성당까지의 성 김대건 해안로에서는 2023년 세워진 높이 2.5m의 김대건 신부 성상도 만날 수 있다. ▶ 용수성지 미사 - (월요일 제외) 오전 11시 ▶ 성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오전 10시~오후 6시) ▶ 문의 064-772-1252

2024-07-28

[순례, 걷고 기도하고] 청주교구 배티성지

안성의 너른 평야를 지난 것이 불과 10여 분 전인데 어느새 깊은 산 속에 들었다. 일대 가장 깊은 산골짜기라 하더니 자동차로 오르는데도 만만치 않다. 가파른 오르막을 서너 차례 힘겹게 지나 고개 정상에 올랐다. 경기도 안성과 충북 진천을 잇는, 돌배나무가 많던 이 고개를 예로부터 배나무 고개, ‘배티’(이치, 梨峙)라 불렀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첩첩산중이었던 고개 바로 아래 청주교구 배티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배티성지는 박해시기 교우촌이자 복자 오반지(바오로) 등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모신 순례지다. 무엇보다 배티성지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다. 1849년 사제품을 받은 후 조선에 돌아온 최 신부는 1853년부터 3년간 이곳을 사목 중심지이자 본당으로 삼아 교우촌 순방에 나섰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나흘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1851년,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 성지 입구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을 곁에 두고 언덕을 오른다. 갓과 지팡이, 짚신에 괴나리봇짐. 먼 길 나서는 양반 차림새의 최양업 신부 동상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차림 그대로 그는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난’ 목자였다. 무려 12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 교우촌을 찾았다. 관할 교우촌만 127곳, 해마다 7000리(2800km)를 걸었다. 밀고자의 눈을 피해 한겨울 신자 집에서 쫓겨나 맨발로 산야를 헤매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소 따른,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순교의 삶이었다. 가경자를 ‘땀의 순교자’, ‘길의 순교자’라 부르는 이유다. 언덕을 다시 내려와 ‘순교현양’ 글귀 새겨진 커다란 비석을 끼고 양업교를 건너면 ‘최양업신부박물관’이다. 외관은 신학생 최양업이 동료 김대건(안드레아),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유학했던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 건물과 인근 성 안토니오 성당을 재현해 놓았다. 전시실을 따라 한국교회 박해사,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목활동, 저서와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박물관 곳곳에 놓인 둥글둥글한 모양의 백색 의자는 최양업 신부의 땀을 상징한다. 박물관을 나서는 길. 봇짐 짊어지고 양 떼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나서는 최양업 신부의 전신 초상화에 눈길이 멈췄다. 사목 여정 후 교우촌 앞에 이르러 늘 십자성호를 긋고 큰절을 올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복음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진 목자의 깊은 신심과 희생을 마음에 새긴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게 시복 시성의 은혜를 허락하시어 그에게 주셨던 굳건한 믿음과 온전한 헌신의 정신을 본받아 오늘 저희도 한마음으로 복음을 살고 전하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1846년, 최양업 신부의 세 번째 서한) ◆ 순례 길잡이 배티성지(www.baeti.org,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에서 313번 지방도를 따라 경기도 안성 쪽으로 향하다 보면 도로 우측으로 최양업 신부 옛 성당이 복원돼 있고, 고개를 더 오르면 복자 오반지 묘, 무명 순교자 6인묘·14인묘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에서 출발해 산상 제대, 복자 오반지 묘와 무명순교자묘, 옛 성당 등을 걷는 총 3.8km 코스의 ‘최양업 신부님과 함께 걷는 순례길’을 비롯해 4개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한국교회는 올해부터 최양업 신부의 선종일인 6월 15일을 가경자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전구 기도의 날’로 지낸다. 특별히 위중한 질병을 앓고 있는 본인, 가족, 친구, 지인 등의 기적적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도록 최양업 신부께 전구를 청하면 된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배티성지 등 가경자 관련 성지에서 구체적인 사람의 치유를 지향으로 주모경, 묵주기도 등과 함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을 바치는 것이 좋다. ※ 성지 미사 : (월요일 제외) 매일 오전 11시 ※ 순례 문의 : 043-533-5710

2024-06-16

[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

주막거리가 북적였다. 이곳은 용인과 안성, 원삼 등지에서 ‘천주쟁이’들을 잡아 온 포졸들의 중간 집결지, 죽산 관아가 지척이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취기가 오른 포졸 하나가 오라에 묶인 죄인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돈을 내. 네놈들은 저 고개만 넘으면 죽은 목숨이야. 돈을 내면 풀어줄게.” “안된다고? 돈이 없다고? 이 고약한 놈들. 너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몽둥이질, 발길질 온갖 매질이 시작됐다. 혹시 풀려날까 호송 행렬을 뒤따른 죄인의 가족들이 그 모습에 땅을 쳤다. 두드렸다. 죽산성지에서 6km 떨어진, 오늘의 안성시 삼죽면 덕산리. 죄인들이 두들겨 맞고 가족들이 안타까움에 땅을 두들겼다 해 ‘두둘기’ 마을이라 불린다. ‘잊은 터’ 죽산 중부고속도로 일죽 IC를 나와 안성 방향으로 300미터정도 가면 ‘죽산성지’라 새겨진 큰 돌을 만난다. 성지 초입이다. 이곳에서 성지까지는 800여 미터. 포졸들에게 잡혀 와 죽산 관아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초주검 된 신자들이 처형터로 향하던 그 길이다. 죽주산성을 마주하는 이곳은 고려 때 원나라 군사가 진을 친 곳이어서 ‘이진(夷陳)터’라 불렸는데, 박해 시기 ‘잊은 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거기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해서였다. 두둘기와 잊은 터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은 이제 성스러운 땅,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다. 주차장 한가운데 예수성심상이 두 팔 벌려 순례자를 맞이한다. 기와를 얹은 담벼락을 따라 걷자 ‘성역’(聖域)이라는 현판 걸린 커다란 대문이 세워져 있다. 속(俗)의 세계를 벗어나 성스러운 영역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푸른 잔디밭이 널따랗게 자리한 성지 광장. 양옆으로 돌 묵주알이 줄지어 서 있고 장미 넝쿨이 반원 모양으로 묵주알을 감싸고 있다. 묵주기도의 길 곁은 장미 터널이다. 5월 성모성월의 끝 무렵이면 장미가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복자와 하느님의 종 그리고 무명 순교자들, 이곳에 잠들다 성모신심의 길 끝에 놓인 피에타상을 지나면 ‘순교신심의 길’이다. 죽산에서는 병인박해를 전후해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었다. ‘병인박해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 순교신심의 길에는 24명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봉분 그리고 한가운데는 보다 큰 둥근 봉분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죽산에서의 박해는 잔혹했다. 부자(父子)를 같은 날 함께 처형하는 것을 국법이 금했음에도 순교자 여정문(1867년 순교)은 아내와 15살 아들, 순교자 최성첨(1868년 순교)은 아들과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순교신심의 길에는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병인박해를 피해 4형제를 데리고 충북 진천 절골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부부는 1868년 절골에 들이닥친 죽산 포졸들에게 쫓기게 된다. 젖먹이 아이를 안은 채 쫓기던 오 마르가리타는 산중에서 잡히고 박경진 또한 숨어있던 집 주인의 밀고로 붙잡혀 죽산 관아로 끌려온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지만 부부는 배교하지 않고 그해 9월 함께 순교한다. 꽃이 지지 않는 성지 죽산은 꽃이 지지 않는 성지다.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와 영산홍, 조팝나무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장미가,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들국화, 겨울에는 눈꽃과 함께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꽃을 대신한다. 참혹했던 피의 순교가 이뤄진 땅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향연. 그리고 그 아름다움 안에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믿음의 자유가 주어져 있음에 감사한다. 피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천주님께서 안배하신 대로 순명하여라” 이곳을 다녀간 순례자들이 봉헌한 초가 가지런히 놓인 현양탑을 돌아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다. 야트막한 오르막에서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14처 길은 성지마당에서 보면 순교자 묘역을 감싸 안은 모양이다. 순교자들이 성인 반열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십자가의 길 1처 앞에 섰다. 하느님의 종 박경진 프란치스코가 옥중에서 동생 필립보와 아들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 글을 묵상한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아멘… ◆ 순례길잡이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종배길 115)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가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순교성지다. 순교자묘역에는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과 오 마르가리타 그리고 하느님의 종 8명 등 24위 순교자의 묘와 무명순교자 묘가 조성돼 있다. - 미사 : 화~주일 오전 11시 - 순례 문의 : 031-676-6701

2024-05-19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공세리성지성당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을 잇는 아산만방조제를 지나며 올려본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구름은 어디 갔나 싶었는데 공세리성당을 들어서며 답을 찾았다. 진입로를 벗 삼아 선 십여 그루 벚나무에 구름이 내려앉았다. 벚꽃 구름 너머 야트막한 언덕은 꽃 잔디가 분홍빛 바다를 이뤘다. 대전교구 공세리성지성당이 봄의 절정 한 가운데서 순례자를 반긴다. 조선의 공세 창고, ‘복음의 창고’로 거듭나다 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보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성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충청 서남부 40개 마을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공세리라는 이름도 공세곶 창고지에서 비롯됐다. 이곳이 ‘복음의 창고’로 새로 난 것은 1895년 이곳에 부임한 에밀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에 의해서다. 공세리에서만 39년간 사목한 드비즈 신부는 1922년 버려진 공세 창고 터에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 언덕을 오르자 고딕풍의 붉은 벽돌 성당이 350년 된 팽나무와 어우러져 모습을 드러낸다. 종탑 위 십자가가 푸른 하늘을 만나 더욱 높아 보인다. 성당 내부는 소박하다. 제대 뒤 정중앙에는 베네딕토 성인상이 놓여 있다. 성당 건립 당시 베네딕토 성인 패를 묻고 3일간 기도한 다음 성당을 지어 무탈히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그 은덕에 감사하며 성인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토 성인은 공세리본당의 주보성인이다.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공세리는 박해시기 신앙 요충지였던 충청 내포지방이 시작되는 곳이다. 성당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 서울, 수원, 공주 등지에서 순교한다. 신유박해 때는 당시 18세이던 하 바르바라가 아산 최초의 순교자로 하늘나라에 올랐고, 병인박해 때는 걸매리에서 신앙생활을 한 박의서(사바)와 박원서(마르코), 박익서 등 박씨 삼 형제를 비롯해 부부 순교자인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그리고 삼부자인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가 영광스럽게 순교했다. 아산 출신 순교자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32명이다. 성모상을 곁에 두고 소로를 따라 걸으면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과 현양비를 마주한다. 현양비 앞에서 하느님의 종 박원서 순교자의 말씀을 묵상한다.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순교의 터전이자 믿음 선포의 거룩한 자리, 그곳에 다시 봄이 오다 현양탑 너머 공세리성당과 단짝인 듯한 모습의 건물은 성지박물관이다. 옛 사제관을 개보수한 박물관은 1890년 공세리성당의 전신인 신창 간양골성당이 설립된 때부터 현재까지 한국교회 신앙의 못자리이자 순교의 터전이었던 내포교회 순교사와 순교자들의 일생을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보여준다. 에밀 드비즈 신부의 유품과 신부가 개발 전수한 이명래 고약도 소개한다. 박물관은 6·25전쟁의 아픔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공산군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8대 주임 뷜토 오 신부는 “양떼를 두고 목자가 떠날 수 없다”며 피난을 마다하고 북으로 끌려가 결국 순교했다. 뷜토 오 신부가 신자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던 그 사제관 2층, 지금은 박물관 2층 난간에 섰다. 공세리성당과 성모상, 널따란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봄을 반기는 이들의 탄성이 마당에 가득하다. 순교자들이 믿음을 증거한 터전이었고 창고 터가 헐리고 하느님의 집이 들어섰을 때는 믿음을 선포한 자리였다. 6·25전쟁 때는 양떼를 사랑한 목자가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한 거룩한 장소였다. 한결같이 그 모습을 내려다본 공세리성당의 십자가를, 그보다 훨씬 먼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함께 한 고목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 순례 길잡이 공세리성지성당은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144호이면서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한 성당이다. 350년이 넘는 국가 보호수가 세 그루나 있고 그에 버금가는 오래된 거목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 왼편으로는 피정의 집이 들어서 있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는 평일과 토요일 오전 11시, 주일은 오전 11시30분 봉헌된다. 벚꽃에 이어 철쭉이 활짝 피어날 5월에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5월 11일 오후 2시 ‘제의 전시회’, 5월 12일 오후 2시에는 ‘음악회와 함께하는 고해성사’가 있다. 6월 1일 오전 10시30분에는 대전교구장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주교 주례로 ‘2024 공세리 성체거동’ 행사가 열린다. ※ 순례 문의 : 041-533-8181

2024-04-14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갈매못순교성지

첫 칼은 다블뤼 주교가 받았다. 망나니는 잔인했다. 품삯을 더 받고자 칼에 힘을 덜 줬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블뤼 주교를 두고 흥정이 다시 이뤄졌다. 삯이 오르고 나서야 두 번째 칼을 내리쳤다. 그리고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의 목이 차례로 떨어졌다. 다섯 순교자의 피로 모래사장이 물들었다. ‘다섯 분의 머리가 기둥 위에 내걸렸을 때 은빛 무지개가 하늘을 뚫고 내려와 주위를 놀라게 했다.’(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220번) 1866년 3월 30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 그들도 하늘에 올랐다. 다섯 순교자들은 1984년 서울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피로 물들었던 해변, 순교성지가 들어서다 성지의 너른 마당. 순교터를 알리는 비석과 순교성인비, 다섯 성인의 첫 매장터가 있다. 순교비 너머 그날 성인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봤을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대전교구 갈매못순교성지가 자리한 이곳은 조선시대 당시 수군통제사가 관할하던 수영(水營), 지금으로 치면 해군부대가 있던 곳이다. 1866년 3월 23일 한양 의금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은 이곳으로 끌려왔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당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돼 있어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6년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외연도가 이곳과 가까운 것도 이유였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함으로써 서양 오랑캐들을 내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순교터 맞은편에 자리한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내부에는 다블뤼 주교의 중백의와 저서, 친필 서명을 비롯해 오매트르 신부의 제병기, 다블뤼 주교가 머물던 신리공소 주교관 주춧돌, 교회사 편찬 작업 중인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의 모습 모형, 갈매못에서의 순교장면을 그린 순교화 등이 전시돼 있다. 가시관 쓴 십자가를 바라보며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기에 알맞다. 기념관 입구 좌우로 우뚝 선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 동상을 뒤로 하고 ‘승리의 성모성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르막 곁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놓여 있다. 조개껍데기 모양의 성당 지붕은,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순교자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지를 통해 순례자들이 교회의 진주로 거듭나길 바라는 의미다. 14처가 끝나는 언덕 위. 성당 문을 열었다.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가 시선을 끈다. 산 속 숨은 신자들이 나무 사이로 모래사장의 순교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모습을 담았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미닫이로 만들어져 좌우로 열면 서해가 한눈에 보인다. 순례자가 선 자리는 순교의 순간을 바라보던 그 산 스테인드글라스가 이야기해주듯. 순례자도 지금 구경꾼들 사이에서 숨죽이며 순교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나무를 방패 삼아 십자가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만 서 있다. 무늬뿐인 신앙을 간직한 채 아직도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본다. 성체조배실에 들어섰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가 놓인 공간. 주님께서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순례자를 안아주실까. 못난 자식을 아직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닐까. < 순례 길잡이 > ◇ 갈매못순교성지(www.galmaemot.or.kr)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 미사 : 주일(오전 8시, 오전 11시30분), 화~토(오전 11시30분, 월요일 제외) ◇ 문의 : 041-932-1311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2024-03-24

[순례, 걷고 기도하고] (3)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주는 변덕스럽다. 어제는 더없이 푸른 하늘과 옥색 바다가 맞닿은 자리에 유채꽃이 피어 탄성이 절로 나오더니, 오늘은 한치 앞 보이지 않는 안갯속이다. 검은 먹구름에 부슬비까지 더해 우중충하기까지 하다. 변덕으로 치면 그때, 예루살렘 군중들도 만만치 않았다. 예수님 향해 ‘호산나’라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그들은 금세 돌변한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소리친다. 조롱한다. 침을 뱉고 뺨까지 때린다. 인간들이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사순 시기의 시작. 한라산 중산간 마을 금악에서 환호와 조롱의 두 얼굴 가진 예루살렘 군중과 수난의 길 걷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예루살렘 입성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겟세마니 언덕을 지나 사형선고, 십자가의 길까지…. 예수님 고통의 여정이 오롯이 조각으로 기록된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짙은 안개 머금은 삼나무 숲길에는 십자가의 길 열 네 편의 이야기가 걸음마다 자리하고 있다. 사형 선고를 받는 예수님 가시관에는 빗방울이 매달려 있다. 예수님의 눈물이다. 십자가 진 어깨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신의 희생’이 스며있다.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손 내미는 예수님에게서 오늘도 인간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주님 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 세 십자가가 순례자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어둠이 온 땅에 덮이듯’(마르 15,33), 먹구름과 안개로 뒤덮인 그곳에서 십자가 위 예수님이 입을 여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백인대장의 탄식을 순례자 또한 기도로 되뇌어 본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 순례 길잡이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의 특별한 사건과 기적들이 실제 사람 크기 조각품으로 표현되어 있는 ‘예수 생애 공원’,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 산책하며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묵주기도 호수’,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모 동굴’ 등이 조성돼 있다. 삼위일체 대성당에서는 ‘성모의 밤’과 ‘묵주기도의 밤’ 행사 등이 열린다.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은 조각가 박창훈(요한)씨 작품이다. ※순례 문의: 064-796-7191 새미 은총의 동산 성이시돌센터(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53)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2024-02-18

[순례, 걷고 기도하고] (2) 제주교구 김기량길

함덕해수욕장 전경. 멀리 한라산도 보인다. 김기량은 제주 함덕 사람으로 그의 생가도 해변가 어디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교구 김기량길은 ‘산토 비아조’(Santo Viaggio, 거룩한 여행)라 이름 붙은 제주의 6개 순례길 중 하나로 2014년 6월 열렸다. 조천성당에서 출발해 조함(조천·함덕)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총 9.3㎞의 순례길에는 제주의 첫 신앙인이자 순교자인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얼이 서려 있다. 김기량길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비석이 입구에 선 조천성당은 조천읍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지붕 위 예수상과 마당의 성모상, 김기량 순교비가 나란히 자리한 성당의 고즈넉한 풍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성당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바다와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현무암 돌무지 아래는 계절을 잊은 들꽃이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 #1. 김기량은 제주 함덕 사람이다.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영국 배에 구조돼 홍콩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 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1857년 5월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조천성당에서 출발한 순례길은 조천포구 앞 연북정(戀北亭)에 다다른다. 유배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북에 있는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해서 붙은 이름. 세례를 받은 후 조선 의주로 입국해 페롱 신부, 최양업 신부를 만났던 김기량도 이곳을 통해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예수상과 성모상 그리고 김기량순교기념비가 들어선 조천성당 전경. #2. 최양업 신부는 김기량의 성실함과 신앙 열정을 보고 그가 ‘제주도의 사도’가 될 것을 확신했다. ‘교우를 찾으려는 그의 열성을 보면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최양업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연북정을 지나 함덕 해변에 이르는 길을 걷다 보면 제주만의 풍경과 마주한다. 해남 땅끝마을과 가장 가까운 ‘관곶’과 ‘불턱’(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곳), 해안을 따라 쌓은 환해장성, 오밀조밀한 해안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는 신흥포구를 지나면 멀리 서우봉과 그 아래 함덕 해변이 펼쳐져 있다. 김기량의 생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3. 최양업 신부의 바람처럼 김기량은 고향 땅 제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다. 가족을 중심으로 20여 명을 입교시켰고, 사공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 1866년 제주 신자는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제주의 사도가 매일 아침 바라봤을 해변에 발을 디딘다. 바다 아래 산호초가 만들어낸 총천연색 바닷물이 탄성을 자아낸다. 복자도 매일 아침 저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을 신앙의 길로 이끌어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바쳤을 것이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김기량은 경남 통영에서 체포된다. 수차례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킨 김기량은 1867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교한다. 당시 김기량의 나이 51세. 포졸들은 김기량이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시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함덕 해변에서 내륙으로 1.3㎞ 들어가면 제주교구 김기량순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기량길의 끝이다. 복자가 지은 천주가사가 기념관 외부 회랑에 새겨져 있다. 푸른 하늘 지붕 삼아, 비취 빛 바다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하며 천주가사를 읽어 내려간다. 기도를 봉헌한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복자 김기량의 천주가사) 조천성당 정문 김기량길 출발 표시석. 김기량순교기념관. 함덕포구 인근 해안도로. 김기량길에서는 제주의 해안도로가 안겨주는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202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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