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

주막거리가 북적였다. 이곳은 용인과 안성, 원삼 등지에서 ‘천주쟁이’들을 잡아 온 포졸들의 중간 집결지, 죽산 관아가 지척이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취기가 오른 포졸 하나가 오라에 묶인 죄인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돈을 내. 네놈들은 저 고개만 넘으면 죽은 목숨이야. 돈을 내면 풀어줄게.” “안된다고? 돈이 없다고? 이 고약한 놈들. 너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몽둥이질, 발길질 온갖 매질이 시작됐다. 혹시 풀려날까 호송 행렬을 뒤따른 죄인의 가족들이 그 모습에 땅을 쳤다. 두드렸다. 죽산성지에서 6km 떨어진, 오늘의 안성시 삼죽면 덕산리. 죄인들이 두들겨 맞고 가족들이 안타까움에 땅을 두들겼다 해 ‘두둘기’ 마을이라 불린다. ‘잊은 터’ 죽산 중부고속도로 일죽 IC를 나와 안성 방향으로 300미터정도 가면 ‘죽산성지’라 새겨진 큰 돌을 만난다. 성지 초입이다. 이곳에서 성지까지는 800여 미터. 포졸들에게 잡혀 와 죽산 관아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초주검 된 신자들이 처형터로 향하던 그 길이다. 죽주산성을 마주하는 이곳은 고려 때 원나라 군사가 진을 친 곳이어서 ‘이진(夷陳)터’라 불렸는데, 박해 시기 ‘잊은 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거기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해서였다. 두둘기와 잊은 터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은 이제 성스러운 땅,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다. 주차장 한가운데 예수성심상이 두 팔 벌려 순례자를 맞이한다. 기와를 얹은 담벼락을 따라 걷자 ‘성역’(聖域)이라는 현판 걸린 커다란 대문이 세워져 있다. 속(俗)의 세계를 벗어나 성스러운 영역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푸른 잔디밭이 널따랗게 자리한 성지 광장. 양옆으로 돌 묵주알이 줄지어 서 있고 장미 넝쿨이 반원 모양으로 묵주알을 감싸고 있다. 묵주기도의 길 곁은 장미 터널이다. 5월 성모성월의 끝 무렵이면 장미가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복자와 하느님의 종 그리고 무명 순교자들, 이곳에 잠들다 성모신심의 길 끝에 놓인 피에타상을 지나면 ‘순교신심의 길’이다. 죽산에서는 병인박해를 전후해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었다. ‘병인박해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 순교신심의 길에는 24명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봉분 그리고 한가운데는 보다 큰 둥근 봉분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죽산에서의 박해는 잔혹했다. 부자(父子)를 같은 날 함께 처형하는 것을 국법이 금했음에도 순교자 여정문(1867년 순교)은 아내와 15살 아들, 순교자 최성첨(1868년 순교)은 아들과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순교신심의 길에는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병인박해를 피해 4형제를 데리고 충북 진천 절골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부부는 1868년 절골에 들이닥친 죽산 포졸들에게 쫓기게 된다. 젖먹이 아이를 안은 채 쫓기던 오 마르가리타는 산중에서 잡히고 박경진 또한 숨어있던 집 주인의 밀고로 붙잡혀 죽산 관아로 끌려온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지만 부부는 배교하지 않고 그해 9월 함께 순교한다. 꽃이 지지 않는 성지 죽산은 꽃이 지지 않는 성지다.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와 영산홍, 조팝나무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장미가,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들국화, 겨울에는 눈꽃과 함께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꽃을 대신한다. 참혹했던 피의 순교가 이뤄진 땅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향연. 그리고 그 아름다움 안에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믿음의 자유가 주어져 있음에 감사한다. 피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천주님께서 안배하신 대로 순명하여라” 이곳을 다녀간 순례자들이 봉헌한 초가 가지런히 놓인 현양탑을 돌아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다. 야트막한 오르막에서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14처 길은 성지마당에서 보면 순교자 묘역을 감싸 안은 모양이다. 순교자들이 성인 반열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십자가의 길 1처 앞에 섰다. 하느님의 종 박경진 프란치스코가 옥중에서 동생 필립보와 아들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 글을 묵상한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아멘… ◆ 순례길잡이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종배길 115)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교우가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순교성지다. 순교자묘역에는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과 오 마르가리타 그리고 하느님의 종 8명 등 24위 순교자의 묘와 무명순교자 묘가 조성돼 있다. - 미사 : 화~주일 오전 11시 - 순례 문의 : 031-676-6701

2024-05-19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공세리성지성당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을 잇는 아산만방조제를 지나며 올려본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구름은 어디 갔나 싶었는데 공세리성당을 들어서며 답을 찾았다. 진입로를 벗 삼아 선 십여 그루 벚나무에 구름이 내려앉았다. 벚꽃 구름 너머 야트막한 언덕은 꽃 잔디가 분홍빛 바다를 이뤘다. 대전교구 공세리성지성당이 봄의 절정 한 가운데서 순례자를 반긴다. 조선의 공세 창고, ‘복음의 창고’로 거듭나다 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보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성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충청 서남부 40개 마을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공세리라는 이름도 공세곶 창고지에서 비롯됐다. 이곳이 ‘복음의 창고’로 새로 난 것은 1895년 이곳에 부임한 에밀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에 의해서다. 공세리에서만 39년간 사목한 드비즈 신부는 1922년 버려진 공세 창고 터에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 언덕을 오르자 고딕풍의 붉은 벽돌 성당이 350년 된 팽나무와 어우러져 모습을 드러낸다. 종탑 위 십자가가 푸른 하늘을 만나 더욱 높아 보인다. 성당 내부는 소박하다. 제대 뒤 정중앙에는 베네딕토 성인상이 놓여 있다. 성당 건립 당시 베네딕토 성인 패를 묻고 3일간 기도한 다음 성당을 지어 무탈히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그 은덕에 감사하며 성인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토 성인은 공세리본당의 주보성인이다.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공세리는 박해시기 신앙 요충지였던 충청 내포지방이 시작되는 곳이다. 성당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 서울, 수원, 공주 등지에서 순교한다. 신유박해 때는 당시 18세이던 하 바르바라가 아산 최초의 순교자로 하늘나라에 올랐고, 병인박해 때는 걸매리에서 신앙생활을 한 박의서(사바)와 박원서(마르코), 박익서 등 박씨 삼 형제를 비롯해 부부 순교자인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그리고 삼부자인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가 영광스럽게 순교했다. 아산 출신 순교자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32명이다. 성모상을 곁에 두고 소로를 따라 걸으면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과 현양비를 마주한다. 현양비 앞에서 하느님의 종 박원서 순교자의 말씀을 묵상한다.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순교의 터전이자 믿음 선포의 거룩한 자리, 그곳에 다시 봄이 오다 현양탑 너머 공세리성당과 단짝인 듯한 모습의 건물은 성지박물관이다. 옛 사제관을 개보수한 박물관은 1890년 공세리성당의 전신인 신창 간양골성당이 설립된 때부터 현재까지 한국교회 신앙의 못자리이자 순교의 터전이었던 내포교회 순교사와 순교자들의 일생을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보여준다. 에밀 드비즈 신부의 유품과 신부가 개발 전수한 이명래 고약도 소개한다. 박물관은 6·25전쟁의 아픔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공산군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8대 주임 뷜토 오 신부는 “양떼를 두고 목자가 떠날 수 없다”며 피난을 마다하고 북으로 끌려가 결국 순교했다. 뷜토 오 신부가 신자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던 그 사제관 2층, 지금은 박물관 2층 난간에 섰다. 공세리성당과 성모상, 널따란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봄을 반기는 이들의 탄성이 마당에 가득하다. 순교자들이 믿음을 증거한 터전이었고 창고 터가 헐리고 하느님의 집이 들어섰을 때는 믿음을 선포한 자리였다. 6·25전쟁 때는 양떼를 사랑한 목자가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한 거룩한 장소였다. 한결같이 그 모습을 내려다본 공세리성당의 십자가를, 그보다 훨씬 먼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함께 한 고목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 순례 길잡이 공세리성지성당은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144호이면서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한 성당이다. 350년이 넘는 국가 보호수가 세 그루나 있고 그에 버금가는 오래된 거목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 왼편으로는 피정의 집이 들어서 있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는 평일과 토요일 오전 11시, 주일은 오전 11시30분 봉헌된다. 벚꽃에 이어 철쭉이 활짝 피어날 5월에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5월 11일 오후 2시 ‘제의 전시회’, 5월 12일 오후 2시에는 ‘음악회와 함께하는 고해성사’가 있다. 6월 1일 오전 10시30분에는 대전교구장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주교 주례로 ‘2024 공세리 성체거동’ 행사가 열린다. ※ 순례 문의 : 041-533-8181

2024-04-14

[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전교구 갈매못순교성지

첫 칼은 다블뤼 주교가 받았다. 망나니는 잔인했다. 품삯을 더 받고자 칼에 힘을 덜 줬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블뤼 주교를 두고 흥정이 다시 이뤄졌다. 삯이 오르고 나서야 두 번째 칼을 내리쳤다. 그리고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의 목이 차례로 떨어졌다. 다섯 순교자의 피로 모래사장이 물들었다. ‘다섯 분의 머리가 기둥 위에 내걸렸을 때 은빛 무지개가 하늘을 뚫고 내려와 주위를 놀라게 했다.’(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220번) 1866년 3월 30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 그들도 하늘에 올랐다. 다섯 순교자들은 1984년 서울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피로 물들었던 해변, 순교성지가 들어서다 성지의 너른 마당. 순교터를 알리는 비석과 순교성인비, 다섯 성인의 첫 매장터가 있다. 순교비 너머 그날 성인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봤을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대전교구 갈매못순교성지가 자리한 이곳은 조선시대 당시 수군통제사가 관할하던 수영(水營), 지금으로 치면 해군부대가 있던 곳이다. 1866년 3월 23일 한양 의금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은 이곳으로 끌려왔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당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돼 있어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6년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외연도가 이곳과 가까운 것도 이유였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함으로써 서양 오랑캐들을 내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순교터 맞은편에 자리한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내부에는 다블뤼 주교의 중백의와 저서, 친필 서명을 비롯해 오매트르 신부의 제병기, 다블뤼 주교가 머물던 신리공소 주교관 주춧돌, 교회사 편찬 작업 중인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의 모습 모형, 갈매못에서의 순교장면을 그린 순교화 등이 전시돼 있다. 가시관 쓴 십자가를 바라보며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기에 알맞다. 기념관 입구 좌우로 우뚝 선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 동상을 뒤로 하고 ‘승리의 성모성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르막 곁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놓여 있다. 조개껍데기 모양의 성당 지붕은,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순교자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지를 통해 순례자들이 교회의 진주로 거듭나길 바라는 의미다. 14처가 끝나는 언덕 위. 성당 문을 열었다.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가 시선을 끈다. 산 속 숨은 신자들이 나무 사이로 모래사장의 순교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모습을 담았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미닫이로 만들어져 좌우로 열면 서해가 한눈에 보인다. 순례자가 선 자리는 순교의 순간을 바라보던 그 산 스테인드글라스가 이야기해주듯. 순례자도 지금 구경꾼들 사이에서 숨죽이며 순교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나무를 방패 삼아 십자가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만 서 있다. 무늬뿐인 신앙을 간직한 채 아직도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본다. 성체조배실에 들어섰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가 놓인 공간. 주님께서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순례자를 안아주실까. 못난 자식을 아직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닐까. < 순례 길잡이 > ◇ 갈매못순교성지(www.galmaemot.or.kr)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 미사 : 주일(오전 8시, 오전 11시30분), 화~토(오전 11시30분, 월요일 제외) ◇ 문의 : 041-932-1311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2024-03-24

[순례, 걷고 기도하고] (3)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주는 변덕스럽다. 어제는 더없이 푸른 하늘과 옥색 바다가 맞닿은 자리에 유채꽃이 피어 탄성이 절로 나오더니, 오늘은 한치 앞 보이지 않는 안갯속이다. 검은 먹구름에 부슬비까지 더해 우중충하기까지 하다. 변덕으로 치면 그때, 예루살렘 군중들도 만만치 않았다. 예수님 향해 ‘호산나’라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그들은 금세 돌변한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소리친다. 조롱한다. 침을 뱉고 뺨까지 때린다. 인간들이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사순 시기의 시작. 한라산 중산간 마을 금악에서 환호와 조롱의 두 얼굴 가진 예루살렘 군중과 수난의 길 걷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예루살렘 입성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겟세마니 언덕을 지나 사형선고, 십자가의 길까지…. 예수님 고통의 여정이 오롯이 조각으로 기록된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짙은 안개 머금은 삼나무 숲길에는 십자가의 길 열 네 편의 이야기가 걸음마다 자리하고 있다. 사형 선고를 받는 예수님 가시관에는 빗방울이 매달려 있다. 예수님의 눈물이다. 십자가 진 어깨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신의 희생’이 스며있다.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손 내미는 예수님에게서 오늘도 인간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주님 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 세 십자가가 순례자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어둠이 온 땅에 덮이듯’(마르 15,33), 먹구름과 안개로 뒤덮인 그곳에서 십자가 위 예수님이 입을 여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백인대장의 탄식을 순례자 또한 기도로 되뇌어 본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 순례 길잡이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의 특별한 사건과 기적들이 실제 사람 크기 조각품으로 표현되어 있는 ‘예수 생애 공원’,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 산책하며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묵주기도 호수’,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모 동굴’ 등이 조성돼 있다. 삼위일체 대성당에서는 ‘성모의 밤’과 ‘묵주기도의 밤’ 행사 등이 열린다. 새미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은 조각가 박창훈(요한)씨 작품이다. ※순례 문의: 064-796-7191 새미 은총의 동산 성이시돌센터(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53)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2024-02-18

[순례, 걷고 기도하고] (2) 제주교구 김기량길

함덕해수욕장 전경. 멀리 한라산도 보인다. 김기량은 제주 함덕 사람으로 그의 생가도 해변가 어디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교구 김기량길은 ‘산토 비아조’(Santo Viaggio, 거룩한 여행)라 이름 붙은 제주의 6개 순례길 중 하나로 2014년 6월 열렸다. 조천성당에서 출발해 조함(조천·함덕)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총 9.3㎞의 순례길에는 제주의 첫 신앙인이자 순교자인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얼이 서려 있다. 김기량길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비석이 입구에 선 조천성당은 조천읍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지붕 위 예수상과 마당의 성모상, 김기량 순교비가 나란히 자리한 성당의 고즈넉한 풍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성당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바다와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현무암 돌무지 아래는 계절을 잊은 들꽃이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 #1. 김기량은 제주 함덕 사람이다.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영국 배에 구조돼 홍콩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 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1857년 5월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조천성당에서 출발한 순례길은 조천포구 앞 연북정(戀北亭)에 다다른다. 유배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북에 있는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해서 붙은 이름. 세례를 받은 후 조선 의주로 입국해 페롱 신부, 최양업 신부를 만났던 김기량도 이곳을 통해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예수상과 성모상 그리고 김기량순교기념비가 들어선 조천성당 전경. #2. 최양업 신부는 김기량의 성실함과 신앙 열정을 보고 그가 ‘제주도의 사도’가 될 것을 확신했다. ‘교우를 찾으려는 그의 열성을 보면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최양업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연북정을 지나 함덕 해변에 이르는 길을 걷다 보면 제주만의 풍경과 마주한다. 해남 땅끝마을과 가장 가까운 ‘관곶’과 ‘불턱’(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곳), 해안을 따라 쌓은 환해장성, 오밀조밀한 해안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는 신흥포구를 지나면 멀리 서우봉과 그 아래 함덕 해변이 펼쳐져 있다. 김기량의 생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3. 최양업 신부의 바람처럼 김기량은 고향 땅 제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다. 가족을 중심으로 20여 명을 입교시켰고, 사공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 1866년 제주 신자는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제주의 사도가 매일 아침 바라봤을 해변에 발을 디딘다. 바다 아래 산호초가 만들어낸 총천연색 바닷물이 탄성을 자아낸다. 복자도 매일 아침 저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을 신앙의 길로 이끌어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바쳤을 것이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김기량은 경남 통영에서 체포된다. 수차례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킨 김기량은 1867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교한다. 당시 김기량의 나이 51세. 포졸들은 김기량이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시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함덕 해변에서 내륙으로 1.3㎞ 들어가면 제주교구 김기량순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기량길의 끝이다. 복자가 지은 천주가사가 기념관 외부 회랑에 새겨져 있다. 푸른 하늘 지붕 삼아, 비취 빛 바다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하며 천주가사를 읽어 내려간다. 기도를 봉헌한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복자 김기량의 천주가사) 조천성당 정문 김기량길 출발 표시석. 김기량순교기념관. 함덕포구 인근 해안도로. 김기량길에서는 제주의 해안도로가 안겨주는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2024-01-28

[순례, 걷고 기도하고] (1) 수원교구 은이·골배마실 성지

함박눈 내린 은이성지 전경. 함박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작은 길을 따라 닿은 한적한 터. 우뚝 선 큰 바위에 새겨진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은이(隱里). 언덕에 가려 숨은 동네라는 한자를 머리에 새기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름 그대로다. 골짜기에 걸터앉아 한숨 돌린 안개가 막 걷히자, 눈꽃 핀 골짜기를 좌우 병풍 삼은 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은이성지의 아침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소년 안드레아, 부르심을 받다 지금이야 영동고속도로 양지 나들목을 나와 차로 10분이면 닿을 거리지만, 박해시기 이곳은 용인의 교우촌 중 하나였다. 이름 그대로 숨은 동네였고 박해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에 공소가 자리할 수 있었다. 이곳 은이에서 소년 김대건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성지 마당. 세례를 받는 소년 김대건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 아래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교우촌 후손들의 증언으로 찾은 은이공소 터다. 1836년 4월. 은이와 지척인 골배마실에 살던 15살 소년 김대건의 꿈이 이뤄졌다.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이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한 것이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소년에겐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심. 성소의 은총이었다. 김대건은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조선교회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 그리고 성직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 기쁘면서도 외로웠을 것이고 감사하면서도 두려웠을 것이다. 약관에도 미치지 않은 어린 소년의 어깨는 무거웠을 것이다. 그 마음 살펴 새기며 몇 걸음 옮겨 성당 앞에 섰다. 김가항(金家巷)성당은 부제 김대건이 1845년 8월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의 원형을 최대한 살렸다. 제대 근처의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기둥(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1개는 철거 당시 성당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눈 내린 겨울 풍경과 성당의 흰색 외벽이 조화를 이룬다. 사제 안드레아, 조선 땅을 다시 밟다 은이는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의 처음이자 유일한 사목 장소다. 신학생으로 발탁돼 떠난 지 9년 만인 1845년 10월 신학생이 아닌 성직자로 조선 땅을 밟은 김대건 신부는 1846년 4월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에 나선다. 은석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 미리내,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그리고 한양까지.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든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깊은 밤을 기다려 길을 나섰다. 교우 집에 가서는 깨끗한 종이를 정성껏 벽에 붙이고 십자가를 모셨다. 하느님을 초대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은이에서의 사목 기간은 대부분 겨울. 얼마나 춥고 고된 길이었을까. 하지만 목자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울 신자들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교우촌을 돌고 은이로 돌아올 때면 하얗게 날이 샜다. 성지 마당 김대건 신부 성상과 기념각. 목자 안드레아, 천국에서의 재회를 약속하다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막 끝났다. 178년 전인 1846년 4월에도 이곳에서 미사가 봉헌됐다. 은이를 떠나는 날. 김대건 신부가 이별을 아쉬워하는 교우들에게 당부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분이 잘 돌보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천국에서 즐거이 다시 만나자는 목자의 말은 그대로 유언(遺言)이 됐다. 그해 9월 새남터에서 목자는 천국으로 향했다. 성지 밖 커다란 이정표가 신덕(信德)고개로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발해 신덕, 망덕(望德), 애덕(愛德) 고개를 넘어 미리내로 향하는 10.3㎞ 길은 김대건 신부가 은이에서 사목할 때 거닐던 길이자 순교한 그의 유해가 거쳐 간 길이다. 지금은 ‘청년 김대건 길’로 불리며 많은 순례자가 걷고 기도하며 순교성인의 자취를 묵상하고 있다. ※주일·평일미사: 오전 11시(월요일 미사 없음) ※순례문의: 031-338-1702, www.euni.kr ■ 순례 길잡이 김가항성당 곁 김대건 기념관에서 성인의 생애와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탄생과 성장, 서품, 입국, 사목, 순교에 이르는 장면과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한국·중국·필리핀에 걸친 성인의 활동 여정도 살펴볼 수 있다. 김가항성당 복원과정 소개 자료와 은이공소와 인근 양지성당에서 사용했던 유물과 오래된 교회서적도 있다. 1961년 골배마실성지 조성 당시 야외제대에 설치됐던 부조도 최근 기념관에 전시됐다. 소년 김대건이 살았던 골배마실의 아담한 초가를 배경으로 절구질하는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올 6월 성지 마당에 들어선 김대건 기념각은 1947년 성지 인근 벌터에 자리했던 남곡리성당(현 양지본당)의 기념경당을 복원, 재현한 것이다. 기념각 내부 제대 위에는 성지 옛 성당 종탑에 있던 김대건 성인상을 모셨다. 올해부터 기념각을 중심으로 순례자들을 위한 야외 미사도 봉헌될 예정이다. 은이 순례 전후 꼭 들러야 할 성지는 골배마실이다. 은이성지에서 차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 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심을 다졌던 곳이고, 사제품 후 귀국해 모친인 고 우르술라와 함께 머물며 몇 달 동안 사목한 자리다. 1961년 성지로 조성되기 전부터 이곳은 김대건 신부 집터로 지역의 교우들에게 구전돼 왔다. 마을 주민들은 가족이 아프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이곳을 찾아 기도를 봉헌했다고 전해진다. 성지에는 김대건 신부 청동상과 생가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성인이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의 원형을 최대한 살린 은이성지 성당 내부. 성인의 일대기와 유물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김대건 기념관. 골배마실 성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24-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