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남양성모성지 : 병인박해의 시작

남양성모성지는 오늘날 성모성지로 더 유명하지만, 남양이 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이유는 성모신심 고양을 위서만은 아니다.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던 순교지다. 남양성모성지는 순교자들의 성모신심만이 아니라 박해 사상 유래없이 큰 규모로, 또 가혹하게 진행돼 ‘대박해’라고도 불리는 병인박해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접촉 1864년 1월 철종이 사망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였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 대비는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세워 국정을 위임했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이 집권 세력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천주교에 관한 인식이 변해 입교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해를 주도하던 당파가 권력을 쥐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대원군이 조선의 선교사를 찾았다. 당시 러시아는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하고 조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대가로 시베리아 동부를 차지하게 됐다. 그렇게 두만강을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되자, 러시아가 조선에 국교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대원군은 러시아의 요구를 물리치기 위한 방안으로 프랑스 개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성 베르뇌 주교의 1864년 8월 18일자 서한을 보면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와 안면이 있는 관장에게 “만약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러시아 사람들과는 종교가 달라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답했다. 베르뇌 주교의 거절에도 대원군은 한 번 더 베르뇌 주교에게 접촉했다. 러시아의 요구가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조선교회의 지도급 신자들 사이에서도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방법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일이며,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편지를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성 남종삼(요한)은 서한을 작성해 직접 대원군에게 전달했는데, 대원군은 좌의정 김병학과 의논한 후 남종삼을 불러 과연 베르뇌 주교가 러시아인들을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한 후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종교의 자유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에 기뻐했다. 신자들은 대원군과 주교들의 면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주교들이 서울에 올 수 있도록 보필했고, 1866년 1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서울에 도착했다. 주교들은 서울에 머물면서 면담을 기다렸지만,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고 2월 19일에는 성 최형(베드로), 이어 2월 23일에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다.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 병인박해의 시작 면담까지 생각했던 대원군의 태도 전환에 관해 샤를르 달레 신부는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지고 조정 대신들의 압력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단 선교사를 만나고자 염두에 둘 만큼 골칫거리였던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지면서, 대원군은 굳이 서양 선교사를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1866년 1월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조선 사신의 보고가 도착했고, 이에 대신들이 서양인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대신들의 의견을 따랐고, 병인박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잡혀 들어가기 시작했고,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표적이 됐다. 서울에 있던 베르뇌 주교와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됐고, 경기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성 볼리외 신부와 성 도리 신부가 붙잡혔다. 그리고 충청도 제천 배론신학교를 운영하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잡혔다. 이렇게 체포된 선교사와 신자들 중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는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3월 9일 최형과 전장운이 순교했는데, 그 다음날 조 대비는 ‘사교(邪敎)를 금지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조 대비는 교서에서 “단속하고 특별히 더 체포해 기어코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만약 숨겨두고 조사에서 발각됐을 경우에는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베어 죽여야 할 것이며, 사람들도 역시 다 같이 그를 처단하게 될 것”이라고 강경한 박해 의지를 내비쳤다. 박해령이 내리고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와 신자들의 처형이 이뤄졌고, 충청도에서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됐다. 포졸들이 다른 선교사들이 숨어있는 곳을 재촉하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이 쓸데없이 약탈과 고문을 당할 것을 염려해 성 위앵 신부를 불렀고, 다블뤼 주교의 심부름꾼과 포졸을 만난 위앵 신부도 붙잡혔다. 성 오메트르 신부도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생각에 자수했다. 불과 2달 사이에 당시 한국교회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순교했다. 나머지 선교사들은 가까스로 조선을 빠져나가 중국으로 향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신자들의 괴로움을 염려했던 선교사들의 바람처럼 박해는 소강상태가 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박해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2024-05-19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남양성모성지: 박해시기 성모신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단아하게 머리를 묶고 치맛자락을 끌어안은 아기예수와 함께 서있는 성모상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남양에 성모발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모님에 관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양에 ‘성모성지’가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이 지녔던 깊은 성모신심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서다. ■ 성모님을 본받으려던 신자들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서적을 통해 성모신심을 배우고 키워나갔다. 아직 조선에 선교사가 오지 않았던 시절인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경기 감영에서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수색했을 당시 「매괴경」이 발견됐다. 이미 초기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묵주기도도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초기 교회 지도자였던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는 「주교요지」에서 성모님의 동정 잉태와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는 정약종이 이끌었던 명도회원을 비롯해 그들에게 배운 초기 신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복자 권상연(야고보)는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했고, 여러 순교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성모님을 통해 기도했다.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파견된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명도회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정하고, 신자들에게 성모신심을 가르쳤다. 초기 신자들 사이에 성모신심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복자 윤점혜(아가타)는 기도 중 성모님 위로 성령이 내려오는 모습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또 주문모 신부는 동정부부를 맺어주고, 동정녀들의 모임을 축복하며 지도했는데, 이들은 특별히 성모님의 동정을 본받으려하는 의지를 보였다.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다양한 신심서적을 읽고, 또 묵주기도에도 열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집안에서 압수된 물품 중에도 묵주, 성모님의 상본, 성모님에 관련된 다양한 서적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한 성모신심 확산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은 성모신심을 더욱 확산시켰다. 앵베르 주교는 특히 성모신심이 돈독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조선 입국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착하신 예수님의 어머님의 축일인 12월 18일 밤, 사랑하올 동정녀의 보호 아래서 사고 없이 중국의 국경을 넘었다”면서 “우리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와 성스러운 천사들의 보호 아래 조선의 수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자신의 선교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뤄졌다고 여겼던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한지 1년 만인 1838년 12월 1일 조선교구의 주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정하고 교황청에 허가를 요청했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이를 승인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신부는 성모님의 도움 아래 활동하고자 수리치골에 ‘성모성심회’를 설립했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돼, 성모님을 공경하고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께 죄인들의 회개를 청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신심단체였다. 성모성심회를 설립한 두 선교사는 곧바로 파리 본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교회 성모성심회 회원들의 명단을 보냈다. 사실 이 단체는 이미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신학생 시절에 가입했던 단체다. 성모성심회 회원들은 ‘기적의 패’를 몸에 지니고 매일 성모송을 바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모성심회의 활동은 적어도 병인박해가 발생한 1866년까지도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865년과 1866년 첨례표에는 성모성심회와 관련된 날이 표기돼 있을 뿐 아니라 성모성심회 회원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수록돼 있다. ■ 묵주기도를 바치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묵주기도를 바쳤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다블뤼 주교가 교우촌 순방 때마다 “신자들을 매괴회와 성의회에 입회시키는 일을 한다”고 기록한다. 성모성심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조선의 신자들은 매괴회 등의 신심단체를 통해서 묵주기도를 바쳐온 것이다. 1850년대 후반 신자들 사이에서 묵주기도는 가장 대중적인 기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57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주시되 묵주는 보내지 말라”며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든다”고 전하고 묵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집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최양업 신부가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법을 가르친 것은 무엇보다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기록에서는 묵주기도에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성 최형(베드로)는 묵주를 만들어 보급하는데 앞장섰고, 1869년 죽산에서 순교한 유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나서도 “묵주를 꺼내 목에 건 다음 십자고상을 앞에 모시고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2024-05-05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부엉골 : 신학교의 설립

경기 여주 강천면 부평리 581. 부엉이가 많았다고 해서 부엉골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박해 시기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려던 선교사들의 열망이 가득했다. 전국 구석구석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외진 이곳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은 1885년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 신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꾸준히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고 활동했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 조선인의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36년 첫 번째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성 김대건(안드레아)·가경자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로도 신학생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페레올 주교는 1850년 병으로 사목 순방을 다니기 어려운 성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1854년에는 이렇게 국내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을 통해 사제를 양성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여러모로 어려움이 컸다. 어린 신학생들이 유학길을 견뎌야 했을 뿐 아니라 현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리거나 최방제의 경우처럼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박해 때문이었다. 성 앵베르 주교도 성 정하상(바오로) 등을 비롯한 신학생을 국내에서 양성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 성 요셉 신학교 설립 마침내 1855년 메스트르 신부는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성 장주기(요셉)가 배론 교우촌의 3칸짜리 초가집을 봉헌해 신학교 건물로 사용했고, 1856년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됐다. 초기 성 요셉 신학교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이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 신학생들은 다른 마을에 거주하면서 학교를 오가기도 했고, 비신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소리 내서 글을 읽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신학생들이 박해를 피해 안전하도록 밤낮으로 좁은 방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하다 보니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1865년 푸르티에 신부는 서한을 통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 신학교의 학생들은 거의 환자로, 이러한 병의 원인은 장소의 협소함보다는 운동과 활동의 부족에 있다”면서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나의 불쌍한 학생들은 낮이나 밤이나 문을 굳게 닫고, 병에 걸린 상태에서 공부한다”고 전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성 요셉 신학교는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1861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교 교사로 합류해 교육체계를 다져나갔다. 신학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교 교사를 맡은 두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면서도 교리서를 번역하고, 또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페낭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도 1861년과 1863년에 귀국해 성 요셉 신학교로 편입하면서, 10여 명의 신학생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배론 교우촌을 방문한 베르뇌 주교가 신학생들에게 삭발례, 소품(小品)을 주는 성과도 있었다. 대품(大品)을 통해, 또 한 명의 조선인 성직자가 탄생하는 것도 머지않은 일처럼 보였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신학교는 1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게 된다. 당시 성 남종삼(요한)을 체포하기 위해 제천에 왔던 서울의 포졸들이 서양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 요셉 신학교를 급습했던 것이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이때 체포돼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 신학교의 부활 병인박해의 피해는 컸지만, 선교사들은 여전히 조선인 사제 양성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교 설립을 지시했고, 마땅한 자리로 찾은 곳이 부엉골이었다. 배론의 신학교처럼 박해로 신학교가 와해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부엉골본당 주임을 맡았던 가밀로(Camile Bouilon) 신부는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난한 산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1885년 부엉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숲에서 통나무를 베고 진흙 벽돌을 쌓아 초가집을 짓고 신학교를 세웠다. 20년 만에 다시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부엉골에 다시 세워진 신학교 교장을 맡은 마라발 신부는 신학교를 ‘예수 성심 신학교’라 명명했다.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신학생 4명과 국내에서 입학한 신학생 3명이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엉골에 자리했던 신학교는 2년 만에 용산으로 이전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박해가 종식되면서 더 이상 깊은 산골에 숨어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1945년 다시 서울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의 가톨릭대학교로 이어오기까지 수많은 한국인 사제를 탄생시키고 있다.

2024-04-21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1) 손골성지 :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교회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됐지만, 박해를 딛고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프랑스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은 한국 땅에 신앙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큰 힘이 돼줬다. 프랑스교회는 어떻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해왔을까. ■ 파리 외방 전교회의 헌신 손골성지 주차장 뒤편을 보면 벽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 그 위에 십자가를 올린 듯한 모습의 순교비가 있다. 바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억하는 순교비다. 이 순교비는 프랑스교회와 한국교회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함께했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순교비 위에 세워진 돌십자가는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보내온 것으로, 도리 신부의 부모가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두 개의 십자가 중 하나다. 프랑스 딸몽본당은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하나는 도리 신부의 생가에, 다른 하나는 도리 신부가 사목하던 손골에 보냈다. 이 돌십자가를 계기로 손골성지 개발이 시작됐다. 손골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사목을 하던 곳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모두 프랑스에 본부를 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이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를 시작으로 많은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 땅을 향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에는 12명의 사제가 활동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이른 새벽에 기상해서 묵상과 미사 봉헌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각까지 활동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편지를 통해 “주교님은 초보 선교사들에게 7시간의 수면을 명령하시지만, 정작 당신은 절대 4시간 이상 주무실 수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1년에 2차례가량 교우촌들을 순방했는데, 이 기간에는 신자들의 교육, 고해성사, 예비신자들의 시험을 비롯해, 사목 관할지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다. 특히 선교사들이 이동 중에는 늘 상복을 입고 커다란 모자를 덮어썼다. 상복을 입은 이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조선의 풍습 덕분에 서양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매진했는데, 파리 외방 전교회는 원칙적으로 양성된 사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온전히 현지 교회만을 위한 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를 맡은 수도회들은 대체로 현지에 해당 수도회 분원을 세우는 형태로 이뤄졌다. 이는 수도원의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지원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현지 교계제도 정착이나 복음의 토착화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파리 외방 전교회는 전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지인들을 통해 현지에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뒀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전교회의 후원 조선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은 비단 선교사들만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 뒤에는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의 영적·물적 후원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활동에 가장 크게 협력한 단체는 ‘전교회’다. 전교회는 복자 폴린 마리 자리코가 프랑스 리옹에서 시작한 평신도 단체다. 전교회 회원들은 함께 모여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금을 모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전했다. 이런 후원금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자금으로 활용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교회 이사회가 내게 5600프랑을 기부했다”면서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걸작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된) 선교지들의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강력한 동기”라면서 전교회 연보 편집장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선교에 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조선까지 가서 생활하기 위한 경비는 물론이고, 성사를 위한 제의나 포도주, 기름, 신자들을 위한 성물, 선교사들의 생활용품에서 커피 같은 기호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이 이뤄졌다. 이런 지원이 조선교회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할 것도 없다. 전교회의 지원 내역을 살피면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해인 1865년에는 2만6789프랑을 조선교회를 위해 지원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전교회 회원이 프랑스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선교회의 신자들도 전교회 회원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서한을 통해 “1년 동안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다”고 밝히기도 하고,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도 전교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프랑스 신자들과 조선의 신자들은 이 땅에 복음을 뿌리내리기 위해 한마음이었다. 피상적으로 마음을 모은 것 아니라 ‘전교회’라는 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선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교회는 1922년 교황청 소속 기구로 승격됐는데, 바로 오늘날의 ‘교황청 전교기구’다.

2024-04-07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0) 손골성지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특별히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현양하고 있다. 그러나 손골은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 동료 사제들과 함께 손골에 관한 최양업 신부의 기록은 그가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묵었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신부님이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을 느꼈다”며 “또 우리가 인연으로 함께 묶여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고 손골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전국 방방곡곡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신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해에만 조선 신자의 28%를 만났다고 하니 그 고단함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외롭고 고단한 여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 중 하나가 바로 함께 사목하는 동료 사제들이었다. 홀로 외진 교우촌을 찾아야 했던 최양업 신부는 대부분 혼자 사목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료 사제들과 함께 사목하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신학생 양성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4년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조선에서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떠난 신학생 3명의 안부를 물으면서, 신학생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각 신학생들의 특성과 신앙, 지식수준, 염려되는 점 등을 설명했다. 최양업 신부가 안부를 물은 신학생들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에 이어 선발된 조선인 신학생들이었다. 최양업 신부 이후 신학생 양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후에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맡게 되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명하면서부터다. 이후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해 1854년 3월 신학생 3명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다블뤼 신부는 이 기간 중 1853년 여름에는 손골에서 머물기도 했다. 자료의 부족으로 최양업 신부도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는지,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최양업 신부와 동료 사제들의 서한에서 유추해 볼 때,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 신학생 각자를 상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양업 신부가 직접 신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 경신박해와 최양업 신부의 선종 최양업 신부가 열정적인 사목을 펼친 결과, 조선교회의 교세는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1859년 11월 베르뇌 주교는 예비신자를 1200명 이상으로 추산했는데, 그 수는 2개월 만에 2000명으로 증가했다. 최양업 신부도 1860년에는 자신이 맡은 사목지에서만 세례 받을 준비가 된 예비신자가 1000명 가량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신박해는 이런 희망을 무너뜨렸다. 경신박해는 1859년 말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반감을 품고 있던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이 조정의 허가 없이 교우촌들을 급습하면서 시작됐다. 이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혔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집을 불태우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당시 조정은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약탈과 방화 등의 만행이 저질러지자 두 포도대장을 파면시키고 박해를 중단시켰다. 경신박해는 국가가 주도한 대대적인 박해는 아니었지만, 최양업 신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전국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신부는 주요한 박해 대상이었다. 박해자들에게 붙잡힐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 남쪽의 죽림 교우촌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사목을 멈추지는 않았다.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인근 교우촌을 찾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활동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그보다도 신자들이 박해의 위협에 신앙을 잃는 것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박해가 잠잠해지자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성사 집전 상황을 보고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위중한 상태가 됐고, 결국 그해 6월 15일에 선종했다. 베르뇌 주교가 “우리 중에 가장 튼튼한 사람은 최 토마스 신부”라고 말했을 정도로 건강한 최양업 신부였지만, 경신박해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크게 쇠약해졌던 것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푸르티에 신부는 “그(최양업)는 아주 열정적으로 예수, 마리아 두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면서 “두 이름을 죽기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그처럼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을 보며 각별한 은총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미 경신박해로 침체된 조선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으로 또다시 큰 슬픔에 빠졌다. 최양업 신부의 빈자리는 그가 아닌 다른 누가 메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롱 신부는 “그(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 전체의 초상”이라고 슬퍼했다. 그는 특히 “그(최양업 신부)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고,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누구보다 적격이었다”며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2024-03-24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9)한덕골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619-1 한덕골 사적지. 많은 교우촌이 그랬듯, 이곳도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한덕골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은이공소로 정착하기 전 머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는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발자취도 남아있다. 한덕골 전경.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국내 성지와 교우촌을 순례할 수 있도록 지정된 순례지 중 하나다. 신자 찾아 8만 리 한덕골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입구에 ‘희망의 순례자’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희망의 순례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고자,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국내 성지와 교우촌을 순례할 수 있도록 지정된 순례지다. 한덕골은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인 최영겸(베드로) 일가가 1837년부터 정착해 살던 곳이다. 기해박해로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하자 최양업 신부의 막냇동생 최신정은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 한덕골로 와서 생활했다. 1849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한덕골을 찾아 동생과 상봉하고, 이후에도 이곳에 들러 성사를 집전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한덕골은 현재 천리요셉본당이 관리하고 있고, 용인시가 ‘청년 김대건 길’로 지정해 한덕골로 이어진 길을 정비하는 등 한덕골을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박해 당시 이곳은 외딴 산속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머물 당시 집을 마련하지 못해 나무에 칡을 얽고 억새를 덮어 머물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당시 교우촌들이 대부분 그랬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하던 전국 구석구석 이런 외딴 산속을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가 맡은 사목구역은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 등 5개 도에 걸쳐있었다. 강원도의 일부 교우촌도 방문했고, 한덕골처럼 경기도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최양업 신부가 국내에서 사목하기 시작할 무렵인 1851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는 교우촌이 127곳이었다. 이후 새로운 교우촌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최양업 신부가 찾아야 할 교우촌은 더욱 늘었다. 1861년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최양업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최양업 신부의 이동거리를 가늠했는데, 적어도 8만 리, 약 3만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평탄하고 잘 닦인 길이 아니라, 가파르고 험한 산을 걷고 또 걸어 오르내렸으니 그 고단함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최양업 신부가 찾아다닌 신자 수가 1851년에는 5936명에 달했다. 당시 조선 전체 신자의 절반이 넘는 수다. 또 해마다 조선 전체 세례자의 30~40%가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만이 아니다. 매스트르 신부는 “최 신부는 한 해의 대부분을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의 초인적인 활동이었지만, 최양업 신부가 남긴 기록에는 힘든 내색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최양업 신부는 1855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에게는 더 큰 기쁨이 있다”며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태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 풍년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한덕골에 있는 성모상.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성사만 집전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활용해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연구하고 노력했다.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에 능통할 정도로 언어에 재능이 있었던 최양업 신부는 한글을 활용해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천주성교공과」, 「성교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도 참여하고, ‘가사’(歌辭) 양식을 활용해 누구든 교리를 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도록 ‘천주가사’도 만들었다. 최양업 신부는 세례를 받고 싶어도 교리를 익히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는 것에 늘 안타까워했다. 특히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며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 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신자들이 익히기 어려운 교리를 지적하기도 했다. 사본문답은 「교리문답」 중 세례·고해·성체·견진성사에 관한 문답이다. 이에 만든 것이 천주가사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많이 불리던 ‘가사’ 양식을 활용한 천주가사는 다소 어려운 「교리문답」과 달리 누구나 쉽게 우리말로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었다. 오늘날 최양업 신부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는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와 칠성사를 노래하는 ‘영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와 향주삼덕을 노래하는 ‘신덕’, ‘망덕’, ‘애덕’이 있고, ‘칠극’, ‘제성’, ‘행선’ 등이다. 최양업 신부는 교리교육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심활동을 북돋는 데도 열의를 보였다. 특히 신학생 시절부터 성모성심회에 가입할 정도로 성모신심이 깊은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성모신심을 전했다.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묵주기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열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최양업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 신자들이 묵주를 아주 잘 만든다”며 자랑하고, “묵주를 보내달라고 청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대신 “묵주를 만드는 도구를 보내주면 조선 신자들에게 묵주를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는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2024-03-10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