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②

열 가지 재앙과 과월절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마음은 완고하기만 합니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재앙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 열 차례에 걸친 재앙을 통해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탈출 7,5.17; 8,6), 온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십니다.(탈출 9,16)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을 구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탈출 10,2; 11,7) 거듭되는 재앙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던 파라오는 이집트의 맏배를 치신 열 번째 재앙을 맞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로 표시를 합니다. 이윽고 열 번째 재앙이 닥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맏배의 생명을 보존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권능에 굴복하게 된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합니다.(탈출 12,31) 과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했던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중요한 종교 축제입니다.(탈출 12,1-14.21-28.43-51) 종살이의 억압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구원 체험을 기념하는 과월절은 ‘건너감’을 뜻하는 파스카라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과월절은 신약에 이르러 하느님의 인간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감)를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긴 여정을 가게 됩니다. 갈대 바다와 만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병거부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이 변한 이집트 파라오가 추격해온 것입니다.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탈출 14,13) 하느님께서는 바닷물을 밀어내어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갈대 바다를 건너가게 됩니다.(탈출 14,15-31)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다시금 체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벅찬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탈출 15장) 갈대 바다 너머 시나이 반도로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막과 같이 척박한 광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마라(탈출 15,23-25)와 르비딤(탈출 17,6)에서는 백성들이 물을 마시게 해 주시고, 신 광야에서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 주십니다.(탈출 16,13) 특히 하느님께서 매일 내려주신 만나는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는데(탈출 16,31)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양식이 됩니다.(탈출 16,35 참조; 시편 78,24-25; 105,40) 이스라엘 백성은 힘든 광야 여정 가운데 하느님을 더 절실하게 찾았고,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척박한 광야가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예전 신학생 때 만난 한 아이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일일 노동자가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저 같으면 “그래, 꼭 갚아라”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예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형제적 교정’입니다. 오늘날은 충고나 조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는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 앞에서 쉽게 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난하고 험담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를 단죄하기보다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바라십니다. 사람을 포기하기는 의외로 쉽습니다. 많은 경우 ‘괜히 말했다가 관계만 더 나빠질 텐데’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침묵하거나, ‘어쩔 수 없어’ 하며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침묵이 사랑이라고 여기지만, 기다림에서 비롯된 침묵은 사랑일 수 있어도 두려움과 무관심에서 나온 침묵은 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면 형제를 잃고 맙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악한 길을 가는 이에게 그 잘못을 일러 주어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바로잡는 일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책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때로 충고하고 권고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과 함께 만나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를 망신 주거나 처벌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그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심지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도 그를 단죄하고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방인 가나안 여인과 세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때 우리는 그 형제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얻는 것”(마태 18,15 참조)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바로 ‘듣는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들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는 악인이 경고의 말을 들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화답송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라”(시편 95,7-8 참조)고 노래합니다. 사랑은 무딘 마음에서 자라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형제를 향한 사랑도 싹틉니다. 복음에서 ‘듣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형제를 바로잡는 일이 일방적인 판단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고 마음을 여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형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시는(마태 18,14 참조) 사랑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허물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잘못한 형제를 품을 수 있습니다. 형제를 얻으려는 사랑은 먼저 우리를 품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무뎌지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잘못한 형제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잘못한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그의 회개와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①

이번 편지부터 탈출기의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탈출기는 창세기와 더불어 하느님 구원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탈출기는 왜 구약성경의 복음서라 불릴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구원하심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약속의 땅을 향한 40년 광야 여정 가운데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나이산에 이르러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처럼 탈출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했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복음서라 불립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체험 야곱 집안(이스라엘)은 이집트 이주 후 자손이 번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혹독한 시련이 찾아옵니다. 과거 요셉의 업적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로운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핍박하였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으로 삼아 강제 노역을 시킵니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탈출 1,14) 파라오는 심지어 이스라엘 집안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강에 던져 죽이도록 합니다. 파라오의 핍박이 극심하던 때 레위 가문에 한 아들이 태어납니다. 모세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갓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왕골 상자에 넣어 강기슭에 숨깁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 의해 발견되어 그녀의 양자가 되고 왕궁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성인이 된 모세는 어느 날 노역장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채찍질하는 이집트 감독관을 해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파라오의 위협을 피해 미디안 지방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모세의 소명(탈출 3-4장; 6,2-7,7)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새로운 파라오의 핍박으로 종살이를 하며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고역에 짓눌려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도움을 간절히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굽어 살펴보시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십니다.(탈출 2,23-25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구하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당시 모세는 미디안 지역에서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호렙산(시나이산)에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는 사명을 부여하십니다.(탈출 6,8 참조) 그런데 모세는 주저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3,11; 4,10.13 참조) 그러한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함께하실 것임을 약속하시고(탈출 3,12 참조), 아론을 협력자로 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돌아가게 됩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아주 힘든 고백을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환영이 아닌 조롱과 모욕이었습니다.”(예레 20,7-8 참조) 그는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침묵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대로 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과 주님이 이끄시는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내 생각보다 하느님의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말씀을 시대 앞에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인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뒤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인간적으로 보면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베드로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메시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애정이 하느님의 뜻보다 앞선 것입니다. 이 지점이 한국교회가 넘어야 할 커다란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자녀가 가야 할 길을 대신 정해 주기도 합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생각을 교회의 뜻처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여라.”(마태 16,23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아주 정확한 해답을 줍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분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감정적인 열심만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요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로칼리아」(사막 교부들의 내적 고요 생활 발췌 글)의 ‘마음지킴(깨어있음)’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마음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동의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분노와 욕심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내가 하나가 되거나,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자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지킴은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세상의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생각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지킴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내 뜻을 하느님의 뜻 안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듣게 해주십시오.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세요.” 그때 조금씩 알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때로 어려워도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하며, 겸손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⑦

야곱의 열두 아들 야곱은 타향인 하란의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지만 많은 아들을 얻어 일가를 이룹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장차 구약의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12지파의 시조가 됩니다. 맏아들 르우벤, 시메온, 레위, 유다, 이사카르, 즈불룬, 단과 납탈리, 가드와 아세르, 그리고 요셉과 막내인 벤야민입니다.(창세 29,31-30,24; 35,23-26 참조) 이 12지파 가운데 특히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레위 지파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직과 성전 봉사 직무를 수행하고, 유다 지파에서는 후에 다윗과 솔로몬 임금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는데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귀향하던 야곱은 중요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 연유합니다. 야곱은 진심어린 사과로 형 에사우와 화해하고(창세 33장),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나안의 베텔에 정착하게 됩니다.(창세 35장 참조) 그 후 가나안 땅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자 야곱은 식솔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의 아들 요셉이 큰 역할을 합니다. 요셉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요셉은 이복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게 됩니다. 파라오의 경호대장이었던 포티파르 집에서 지내게 된 요셉을 하느님께서는 돌보아 주십니다. 그 후 파라오의 꿈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을 밝혀준 일을 계기로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앞으로 다가올 대기근을 지혜롭게 대비합니다. 양식을 구하러 가나안에서 온 형들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아버지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이주해 오게 됩니다. 먼저 요셉이, 그 후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온 것은 장차 일곱 해 동안 지속되는 대기근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요셉의 말입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20)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에게 주신 축복 약속을 당신의 섭리로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 이야기는 세 쌍의 꿈을 통해 전개됩니다. ▲요셉의 두 꿈(창세 37,5-8.9-11 참조)-형들의 시기를 초래하여 이집트로 팔려가는 원인이 됩니다. ▲파라오 두 시종장의 꿈(창세 40,5-15.16-23 참조)-요셉이 주목받는 계기가 됩니다. ▲파라오의 두 꿈(창세 41,1-4.5-7 참조)-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죽기 전 유언을 남깁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24) 장차 있을 출애굽 사건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세월이 흐른 뒤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구원하시게 되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하느님 구원 체험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1주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는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시지요. 그러고 나서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라며 교회의 수위권을 넘겨줍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 계시에 대한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기원과 사명을 짧은 단락이지만 한꺼번에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텍스트입니다. 성경 본문은 첫째, 신앙인인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둘째, 그 믿음을 어떻게 보존하고 이어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요. 눈여겨보아야 할 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단순히 한 개인의 고백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묻고 베드로가 답했듯이, 남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든 간에 나에게 그분이 누구인지 먼저 깨닫고 증언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분에 대한 신앙은 사적인 믿음이나 개별적 인식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곧 교회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마태 16,18)이라며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으로 확장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교회를 통해,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고백 될 때 보편적 진리의 위상을 가진다는 뜻이지요. 아시다시피, 위 1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하느님께 부름 받은 이들이 모인 집회 또는 회중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내’ 교회라고 하셨다는 것은, 교회의 기원이 예수님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 당신의 그 교회를 베드로라고 하는 반석 위에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셨으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모든 이는 그 반석을 중심으로 사도적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사도적 일치’를 세속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권한과 권력에 대한 복종 또는 상하 수직적인 관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맡겼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베드로는 스승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죄인이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적 일치를 이룬다는 건, 베드로의 회심 체험에 깊이 공감하면서,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셨듯이, 나약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도 교회의 믿음을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회심에 일치함으로써 주님의 깊은 사랑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도적 일치란 으뜸 사도의 권한이나 권력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라고 하는, 죄 많은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 특별히 그 교회의 성사 안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세상에 나아가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결심하게 됩니다. 곧 ‘성사’를 통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가 사도적 일치를 이루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셈이지요. 성사를 거행하는 교회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더 많은 이에게 나누어줄 사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또 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합니까? 그 보편적 신앙고백은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네, 교회와 성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열쇠는 오늘도 구원의 성사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성사에 자주 참여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가서, 그 열쇠를 세상에 전하십시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⑥

이사악 이번 편지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성조 이사악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부부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십니다. “내년 이 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 18,10; 21,1-7 참조)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 약속을 이사악을 통해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이사악의 출생 자체가 하느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는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보낸 늙은 종과 낙타들에게 물을 길어다 주었던 착한 마음씨를 가진 처녀였습니다.(창세 24장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사악과 혼인한 레베카를 돌보시어 쌍둥이 두 아들인 에사우와 야곱을 얻게 하십니다.(창세 25,19-28 참조) 이사악이 극심한 기근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가족을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 약속을 이사악에게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6,3-4) 이사악은 헤브론에서 삶을 마치고 두 아들인 에사우와 야곱에 의해 아브라함과 사라 곁에 안장됩니다.(창세 35,27-29 참조) 야곱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사악의 아들인 야곱. 성조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야곱은 여러 차례 타향살이를 하는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야 했고, 멀리 떨어진 하란의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처남들의 시기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그는 그 후 극심한 가뭄이 닥치자 집안 식솔들과 함께 머나먼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야곱은 타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실 야곱은 인간적인 단점도 적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어려움에 처한 그의 집안을 돌보아 주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사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야곱은 쌍둥이 형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장자권 때문입니다. 이사악의 맏아들인 에사우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도움을 받아 형의 권리를 가로챘던 것입니다. 결국 분노한 형의 복수를 피해 야곱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창세 27장 참조)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낯선 길을 가게 됩니다. 어느 곳에 이르러 돌을 베개 삼아 밤을 보내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립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이어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주셨던 ‘땅’과 ‘후손’ 그리고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축복 약속을 주십니다. 또한 야곱과 함께 계시며 지켜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창세 28,13-14 참조) 야곱은 그곳을 베텔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창세 28,17 참조)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0주일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상대방이 사랑을 주지 않음에 크게 슬퍼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 친구 등의 사랑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고 울며 말합니다. 그러나 이때 자기 사랑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사랑인지, 욕망인지를 말입니다. 사랑이 욕망으로 흐를 때, 상대를 소유하려는 집착이 생겨납니다. 욕망의 본질은 자기 안의 불안을 달래는 데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달래줄 수 있는 상대가 늘 내 곁에 있어야 하고,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상대를 소유하려고 할 때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 필요만을 청하고 있다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을 경험해도 이를 인정할 수 있고, 그 인정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때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필요를 얻으려는 가짜 사랑인 욕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상대를 통제하려 하고,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려 합니다. 욕망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사랑은 상대를 자유롭게 합니다. 욕망은 확인을 요구하고, 사랑은 바라보고 존중합니다. 이렇게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진짜 사랑을 보여주는 한 여인을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방인 지역인 이곳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알아보며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고, 종교적으로도 적대적인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 이방인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여인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침묵을 통해 여인의 믿음이 점차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소리치다가, 예수님께 가까이 와 엎드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 응답합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침묵이 곧 거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라고 말하면서 여인의 고통보다 자신들이 겪는 불편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도움의 목소리가 아닌 귀찮은 소음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제자였지만 그분의 자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자비를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성경에서 개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흔히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표현에 분노하거나 물러날 수 있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라면서 물러나지 않고, 더 큰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자녀들이 먹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빈약하지 않다고 믿은 것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딸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제자들은 자주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책망받지만, 이 여인은 칭찬받습니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기에,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바로 진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욕망이 아닌 사랑. 그 사랑은 어떤 상황이든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을 때 완성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⑤

아브라함의 소명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되고, 그의 후손인 이사악, 야곱과 함께 거룩한 조상, 성조라 불리게 됩니다. 둘째, 하느님 구원 역사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운명에 놓인 인간에게 구원 약속을 주셨고(창세 3,15), 이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창세 12,1-3)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로 (축)복을 뜻하는 단어가 가장 많이 제시됩니다.(5회) 이것은 창세기 1~11장(원역사)에서 죄의 어둠에 놓이게 된 인간의 상황과 대조를 이루며, 하느님의 구원이 풍성한 축복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 축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삶의 터전인 땅, 많은 후손, 그리고 만민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세 가지 축복 약속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이어 후대 다윗 왕국 시대에 실현됩니다. 만민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세 번째 축복 약속은 하느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운명에 놓여 있던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계약 창세기 15장과 17장에는 아브라함 계약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창세 12,1-3) 주셨던 축복 약속을 계약을 통해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 계약을 전하는 창세기 15장에서 주목할 점은 계약을 맺는 형식(8절 이하)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희생 제물을 반으로 자른 뒤 당사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면서 맹세하였습니다. 이 행위는 만약 누구든 계약의 내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반으로 쪼개어 놓은 희생 제물처럼 죽음을 맞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계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하나의 맹세 의식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에 있어 하느님을 상징하는 횃불만이 쪼개어 놓은 희생 제물 사이를 지나갑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축복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리라는 확고한 뜻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계약을 전하는 창세기 17장에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즉 ‘많은 민족의 아버지’란 뜻처럼 그는 더 이상 한 가족의 가장이 아니라 많은 민족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는 인생의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둘째, 계약의 징표인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모든 남자는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할례의식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지켜오는 전통이 됩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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