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세례는 유다교의 ‘미크바’라고 하는 물로써 부정함을 씻어내는 예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제사의 가치가 상대화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씻는 예식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특히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고 광야로 들어간 꿈란 공동체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여러 세례 운동가가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씻는 예식이 반복적이었다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었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해 근처의 요르단강 하류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회개하게 하는 세례입니다.(루카 3,3) 그런데 회개해야 할 죄가 없는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왜 세례를 받으실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해석이 분분합니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주기 위함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였기에 세례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모든 죄인과의 연대를 봅니다. 예수께서 요르단강 변에 길게 줄지어 서서 자기 차례의 세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죄인들 사이에 계신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 없으신 분이 가련한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우리 모든 죄인 가운데 하나가 되십니다. 요르단에는 ‘내려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을 스스로 더 낮춰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를 낮춰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의 자리에서 받으신 세례 구원의 문 활짝 열어주신 의미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뱃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물속에 던져지기를 청했던 요나가 떠오릅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에 비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온 백성’.(루카 3,21)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구원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립니다. 옛 아담의 원죄 이후 닫혔던 하늘과 땅이 새 아담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통하기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 즉 예수께서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이)이심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6) 그리고 하늘에서 성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짧은 문장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먼저 메시아를 가리키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우리와의 관계와는 다름도 알려줍니다. 사실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맏아들이라 불렸습니다.(탈출 4,23 참조)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는 못합니다. 그리스어로 ‘사랑하는’이라는 단어가 아들이나 딸과 함께 사용될 때는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유일무이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현재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아들, 성부의 뜻을 잘 헤아려 받드는 순종적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구조 안에 있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자께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위해 성령을 받은 메시아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말합니다. 또한, 유다 전승에 따르면, 하늘의 열림, 성령의 강림, 하느님의 목소리는 종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세 가지 표지입니다. 종말은 믿는 이에게는 두려운 멸망이 아니라 바라마지않는 궁극적인 구원의 때이죠. 예수님의 세례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 (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안동교구 함원식 신부는 1999년 사제품을 받고 2017년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논문 「욥기 안에서의 조화 혹은 불협화음」으로 성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영덕·안계본당을 거쳐 현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겸 안동교구 성서 사도직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의 구조

요한묵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요한묵시록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요구한다. 대부분 주석서들의 첫 장은 요한묵시록이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이러 저러한 순서로 적어나간 글이라고 소개하는 이른바 서술의 ‘외형적 구조’에 관한 것을 다룬다. 요한묵시록을 읽기 위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고,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약’이기도 해서 주석학자들마다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요한묵시록은 역사서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연대기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 구약의 역사서처럼 어떤 임금이 즉위해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어떻게 하느님 곁으로 갔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 예수께서 어디서 언제 태어나셨고 갈릴래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어떤 일과 말씀을 남기셨는지, 그 결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지,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 있는 게 요한묵시록이 아니다. 요한묵시록은 두 개의 크게 다른 문학적 장르를 선보인다. 2장에서 3장까지의 일곱 개 편지와 4장에서 21장까지의 묵시문학적 환시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문학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편집이 일곱 개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례와 모임 안에서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나갔고, 이후 일곱 개의 편지들이 소개하는 내용들을 묵시문학적 상징들로 새롭게 해석하고 소개한 4장에서 21장까지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 3장까지는 일곱 교회가 처한 현세적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여겼고 4장에서 21장까지는 그 현세적 상황에 대한 영성적 해석이라고 이해했다. 요한묵시록의 본격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는 4장에서 21장 8절까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어린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곱 개의 봉인과 일곱 개의 나팔 이야기(4,1-11,19)가 첫 번째 부분이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나서 펼쳐지는 악의 세력들의 서술이 두 번째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왕관을 쓴 여인, 용, 두 짐승, 그리고 대탕녀 바빌론과 용의 멸망을 다루는 여러 장면들로 구성된다. 처음 일곱 개 편지는 문학적 장르가 바오로 서간이나 가톨릭 서간과 닮아 있고 대개의 내용이 훈계나 교훈에 관련된 것이라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4장에서 21장까지 역시 그렇다. 어린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대탕녀 바빌론을 향하는 두 번째 부분과 대립하는 구도로 펼쳐지는데, 이것 역시 이야기의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주체, 곧 어린양과 대탕녀 바빌론에 대한 묵시문학적 설명 혹은 해석으로 읽혀진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읽어내는 데 있어 또 다른 전통적 관점은 숫자 ‘7’과 관련이 있다. 일곱 개의 편지(2,1-3,22), 일곱 개의 봉인(6,1-8,1), 일곱 개의 나팔(8,6-11,19),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16,1-21) 순으로 요한묵시록은 짜여져 있다는 것. 각각의 ‘7의 시리즈’는 그 시작과 마침이 모두 천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상은 이른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키는 공간이어서 요한묵시록은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는 설화적 흐름이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성격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고 풀어놓고 있는 글이라는 것이다. 다만, 구원을 이해하는 데 각각의 ‘7의 시리즈’는 처음과 끝 사이에 세상의 비참함이나 한계성, 그리고 악의 상황을 천상의 공간과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7의 시리즈’가 끝나면 또 하나의 ‘7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구도로 짜여진 요한묵시록은 네 번에 걸쳐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원은 그만큼 간절한 것이고 요한묵시록이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서술의 본질이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살피다 보면, 요한묵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해서 ‘주 예수여, 오소서’라고 마치는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주어진 삶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면서 마주치는 유혹과 일탈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구원에의 지향성을 더욱 어지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탕녀 바빌론의 악함에 맞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향한 걸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천상의 삶이 이 혹독한 지상의 삶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요한묵시록은 찬찬히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셨고, 이미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여전히 갈망해야 한다는 것. 다만, 예수께서 오실 그날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현실의 무엇이 이미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묻기 위해 요한묵시록은 여전히 읽혀져야 한다는 것. 요한묵시록의 구조는 그래서 우리 삶의 ‘오래된 미래’에 예수님이라는 변치 않는 분을 끊임없이 상상하게끔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계시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 안에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2025-01-12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노래한 즈카르야

모스 부호(Morse Code)는 전신기발명자인 새뮤얼 모스(Samuel Morse, 1791-1872)가 고안하여 1844년에 완성한 전신 기호이다. 모스 부호로 짧은 발신 전류( · )와 긴 발신 전류(−)만을 가지고 전신부호를 구성하여 문장을 작성하여 전신기로 전송할 수 있다. 모스는 이전에는 유명한 화가로 유럽에서 작품활동을 한 후 미국으로 귀국을 준비하다 최신 전자기학을 접하게 된다. 모스는 열심한 신앙인으로 전자기술을 탐구하면서 가장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에게 특별한 탈렌트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창조만을 묘사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저에게 전신을 발명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소서.” 그는 채 2년이 안 되어 전신 기호 모스를 발명했다. 모스는 이 모든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는 전신 기호를 완성하여 1844년 5월 24일 “하느님이 큰일을 하셨다”는 의미를 담은 민수기 23장 23절을 송신했다. 그 이후에 각국에서 전신을 개통할 때는 성경 한 구절을 송신하는 전통이 생겼다. 모스는 모든 활동과 업적을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役事)로 이해한 충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 즈카르야와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즈카르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였다. 즈카르야 부부는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자녀가 없었다. 부부는 하느님께 자식을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이고 드디어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 즈카르야가 성전에 머물 때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천사는 부부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었고 곧 아내가 자식을 낳을 터인데 하느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될 인물이고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당황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바로 믿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부부가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벌로 아이가 출산할 때까지 말을 못할 것이라 했다. 즈카르야는 당연히 인간적인 판단을 했지만 그 순간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을 것이다. 천사가 떠난 후 실제로 즈카르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즈카르야가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되자 성전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라 사람들은 추측했다. 천사의 예고대로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을 했고 아들을 출산했다. 친척들이 몰려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출산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를 축하했다.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으라고 할 때 비로소 입이 풀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즈카르야는 두려움과 기쁨을 안고 성무일도에서 매일기도를 바치는 즈카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67-79 참조)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 행위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를 수용하는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12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이번 주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은 예수님의 신성이 처음 공식적으로 나타난 일을 뜻합니다. 곧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첫 사건을 경축하는 날로서, 구약 시대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드러난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따르면,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맨 먼저 방문해 경배한 이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성경에서 ‘동방’은 이스라엘 기준이므로 메소포타미아 방향이고, 동방 박사는 페르시아 전통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로 추정됩니다. 조언자로서 임금을 섬겼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로아스터’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책으로도 유명한 ‘차라투스트라’입니다. 말하자면,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로서 우리 문화권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의미의 배화교(拜火敎)로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속보다 천상의 일 중요시 메시아 만나는 큰 기쁨 누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던 점성술가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박사’는 학식이 뛰어난 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마고스’를 번역한 말로, 페르시아어로는 ‘마구쉬’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천체 운동을 관찰해 인간의 운명을 점치고, 꿈도 풀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동방 박사는 동방의 세 왕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3세기 초에 들며 이들의 신분을 왕으로 격상했기 때문입니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라는 시편 72장 10-11절처럼 모든 권세가들이 메시아께 복종하리라는 예고가 실현되었음을 강조하려던 목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점성술가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방의 임금도 도구로 쓰시고(예레 25,9 등 참조) 이방의 점술도 때로 진실을 말하게 하십니다.(에제 21,26-28 참조)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고(마태 2,1 참조) 헤로데의 왕실에서 현인들의 조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마태 2,6 참조) 그 현인들이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 나오리라.”라는 미카 5장 1절을 들려주며, 유다 임금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어야 한다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조언 덕에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내는데, 그 장소는 현재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 안에 자리해 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짓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유서 깊은 성당입니다. 더구나 전쟁 많은 이스라엘에서 이 성당만은 보존되었는데, 이는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의 성화 덕분이었습니다. 7세기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 탄생 성당의 성화 속에 그려진 동방 박사들이 페르시아 복장을 한 걸 보고, 자기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줄 알고 파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멀리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이 죽어서도 메시아의 탄생지를 보호해준 셈입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를 셋으로 보지만, 사실 성경에는 몇 명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친 선물이 셋이라 세 명으로 추정해온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예수님의 거룩한 사제직을 예고하는 제사 ‘유향’,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몰약’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듯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였습니다. 사진 속의 제대가 그 장소를 상징합니다. 페르시아 왕실을 섬긴 이들이 초라한 구유 속의 아기에게 무릎을 꿇었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처세술에 따르면, 자신에게 와 줄 것을 청한 헤로데에게(마태 2,8 참조) 돌아가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편이 더 이익이었겠지만, 동방 박사들은 세속보다 천상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마태 2,12 참조)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베들레헴까지 왔고, 이스라엘 백성보다 먼저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런 이들의 행보는 세속의 일에 몰두하느라 천상의 일을 잊곤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먼 데서 구세주를 알아보고 찾아온 일은 이후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이방인들의 예표도 되어줍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며 메시아를 찾아 나선 동방 박사들을 별이 인도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밤은 어두워도 별은 빛난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가 때로 칠흑 같은 곤경에 빠져 길을 잃어도 주님께서 늘 희망의 별빛을 뿌려주고 계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김명숙 교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2012년부터 2024년 1월까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그해 2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조교수에 임명됐다.

2025-01-05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 저자, 요한

‘요한묵시록은 누가 썼을까’라는 물음에 우리는 주로 역사의 한 인물을 찾으려 애쓴다. 예컨대, 파트모스섬에 갇힌 사도 요한을 떠올리는 것이다. 2세기의 유스티노나 이레네오 교부의 증언을 시작으로 교회는 사도 요한을 요한묵시록의 저자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원로 요한’ 혹은 ‘마르코라는 요한’(사도 12,12.25; 13,13 참조)으로도 소개되기에 역사적 저자에 대한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혼재되어 흩어진다. 물론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묵시록의 저자가 같은 요한인가’라는 질문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현대 주석학의 발전으로 요한묵시록이 한 시대, 한 사람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 이후 요한묵시록은 이른바 ‘요한계 학파’라는 어떠한 사상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적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의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요한묵시록이라는 책이 소개하는 저자의 문학적 실루엣이다. 요한이라 명명된 저자는 ‘하느님의 종’(묵시 1,1 참조)이자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이고 동반자’(묵시 1,9 참조)이다. 또한 자신이 본 것을 직접 써 내려가는 작가의 면모 또한 요한으로 소개된다.(묵시 1,11.19 참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요한은 모든 민족에게 ‘예언’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기도 한다.(묵시 10,11 참조) 그러나 그는 파트모스섬에 갇혀 있다. 형제와 함께 환난을 겪고 형제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써 보내야 하고, 나아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요한은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떨어져 있다. 그의 공간적 단절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증언은 역설적이게도 두 가지 대립 개념을 하나의 통합적 사유로 조망하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증언 때문에 요한은 ‘환난’을 겪고 있고, 그럼에도 증언을 통해 독자들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한다는 것.(묵시 1,3;22,7 참조) 요한이라는 인물의 묘사는 물리적 거리감을 기반으로 한 어느 영웅의 희생적이고 특별한 삶을 기리는 데 소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적 일치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일치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일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수많은 형제와의 일치로 확장되고, 그 일치를 요한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환치해서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요한은 특정 시공간의 범주를 뛰어넘어 신과 인간의 일치를 위해 보고 쓰고 선포하는 행복의 매개체다. 요한을 따라 요한묵시록을 읽어나가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환시는 신과 인간의 일치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장치가 된다. 요한이 처음 본 ‘사람의 아들’이 대표적 경우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7-18) 요한이 본 것은 특별하고 생소한, 그리하여 흔한 유다의 묵시문학들이 제공하는 천상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 다만, 여느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신적 신비를 보게 될 뿐이다. 종말의 시대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람의 아들’(다니 7장 참조)을 예수님께 적용한 요한묵시록은 신적 신비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환시는 사람에 대한 사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신적 가치가 사람의 가치 안에서 어떻게 사유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다시 요한이 갇힌 파트모스섬이라는 공간과 요한의 선포가 끝없이 펼쳐질 무한한 공간의 연결성에 대해 사유해 보자. 한 사람이 겪는 환난의 공간이 행복의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유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머물게 된 환난의 공간에서 요한은 이미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단절의 공간에서 이미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그리하여 모든 대립과 단절을 뛰어넘는 ‘사람의 아들’을 보았고 전하게 된다. 단절이 초월이 되고 환난이 행복이 될 수 있는 건, 놀랍게도 철저하게 한 공간에 머물며 자신이 보고 듣고 쓰는 것에 집중한 요한 덕택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수많은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지식이나 정보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제한적이고 한계적이라 해서 천상의 하느님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에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저항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우리가 천상적 삶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염두에 두는 입장에 선다면, 모든 인간적 삶과 거기서 오는 행복은 얼마간 부족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다. 시공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제 삶의 환난을 기꺼이 짊어지며,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은 진솔하고 담담히 적어 내려갔을 뿐이다. 요한은 자신의 시공간과 다른 또 하나의 시공간을 꿈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어진 시공간을 저만의 왕국으로 만들지 않았다. 갇혀 있으되 열려 있는, 고요하되 수많은 말들이 이곳저곳에 울려 퍼지는, 그러한 자리를 요한은 파트모스에서 만들어 갔다. 제 삶에 두 발을 디디고 굳건히 서 있을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찬란하고 완전하게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제 삶에 가장 순수하고 진솔할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선명한 행복으로 그 삶 안에 육화할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25-01-0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 세례자 요한

튀르키예는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파병했고, 튀르키예군은 유엔군 안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고 후퇴를 모르는 군대라는 칭송을 받았다. 지금도 튀르키예 국민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며 친근감을 보이고 있다. 수도 이스탄불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대교가 유명하다. 2016년에는 튀르키예의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틀 만에 실패했다. 당시에 인기가 하락한 에르도안 대통령을 축출하려던 시도는 불발로 그쳤다. 당시 쿠데타가 실패한 데에는 SNS가 큰 역할을 했다. SNS로 시민들은 거리로 일시에 쏟아져 나와서 보스포루스대교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군사 작전에서 보안이 생명인데 쿠데타군과 시민들의 대치가 개인 스마트폰으로 생중계되었다. 방송국 몇 곳을 장악한 쿠데타군은 모든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보스포루스대교에서 쿠데타군의 탱크를 막아서는 수많은 시민들은 세계에 아주 큰 인상을 남겼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불린다. 성경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고, 아버지는 제사장인 즈카리야,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다.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광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다.(탈출 15,22-26) 동시에 하느님과의 친교 장소로 그분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였다.(탈출 16,32) 신약성경에서 광야는 고행이나 수련, 정화, 기도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극기 생활을 하면서 회개와 세례를 촉구했다.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 혹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인물로 믿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그 표지로서 세례를 받을 것을 외쳤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고 회개의 필요성이 절박하다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고 생활에서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 외에는 징수하지 않아야 하고 군인들은 무력한 백성들을 억압하여 착복하는 것을 금지했다. 세례자 요한의 교훈들은 당시에 만연한 과중한 징세와 권력의 남용이 공공연한 부패한 사회상의 반영이라고 수 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 1,7-8)라고 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한 구약이 마지막 예언자가 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왕에게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며 정권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결국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세례 운동은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0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고통 중에도 희망의 기도 드린 토빗

‘교황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1732-1809)은 열성적인 그리스도교인,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이든은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는 작은 기도방이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이 그의 유한한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작은 기도방에서의 기도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이든은 동료 음악가에게 “나는 일에 지치게 될 때 작은 기도실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제 경험으로 이 방법이 성공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하이든의 곡은 특별히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역시 기도 중에 주님을 묵상할 때 무한한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으로 춤추는 악보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처럼 하이든의 곡들은 기도 자체였다. 1808년 그가 작곡한 <천지창조>가 비엔나에서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며 일어나 하이든에게 감격의 박수를 쳤다. 하이든은 “내가 아닙니다. 이 음악은 하느님에게 나온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말했다. 토빗기는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 시대에 티스베에서 포로로 끌려간 토빗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토빗 1,2 참조) 토빗은 살만에세르 시대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궁궐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관리였다. 이후 살만에세르가 죽고 그 아들 산헤립이 왕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비참하게 죽은 이스라엘 사람의 장례를 지내다 임금의 눈 밖에 나 벗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토빗은 낮잠을 자다가 불행하게도 새의 배설물에 의해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나가던 토빗은 자신의 어려운 생활을 하소연하는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다. 기도를 들은 하느님은 라파엘 천사를 보내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토빗의 이야기는 사실 유배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토빗기의 주제는 하느님의 섭리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있다. 보통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결과를 연결시킨다. 토빗서는 유배 시대, 특히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 신앙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준다. 토빗은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한 동포들의 운명도 예언자들의 빛으로 해석한다. 토빗은 때가 되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으로 재건되리라는 밝은 희망을 선포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도 기도로 장식된다.(토빗 13장 참조) 포로 생활과 나그네 살이라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안고 미래를 향하면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행복에 이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기도하는 토빗의 모습은 유배지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 중에 있는 기도하는 이의 전형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01

[말씀묵상]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24년의 마지막인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며,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삶의 터전인 가정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성가정의 모범은 축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이루신 가정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구세주인 예수님과 성인들이 그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성가정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자라고 삶의 경험이 쌓이자, 이분들의 가정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는 자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슴 아픈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이분들의 가정이 성가정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알린 하느님의 초대를 처음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가졌지만, 결국 “예”라는 응답으로 하느님 뜻을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응답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알아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나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대임에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배운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으로의 초대를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용기 있는 응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아버지 요셉의 응답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약혼녀의 임신 소식에 너무도 마음이 상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는 인내심을 보였던 요셉에게 하느님은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와 함께 가정을 이루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대를 하십니다. 요셉 성인이 이러한 쉽지 않은 초대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착한 성품 때문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부부 관계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함에 있어 부모가 끼치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성장에도 마리아와 요셉 두 분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면서도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한 인간으로서 성장의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춘 어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작고 약한 어린아이로 오셔서, 하느님의 총애뿐 아니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인생에서 겪어야 할 것을 겪으며 성장하셨습니다. 그 여정을 함께 한 이들이 바로 가정 공동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신뢰하며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부모의 깊은 신뢰 속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 날로 지혜와 키가 성장했을 것입니다.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며 따듯하게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자녀 역시 부모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을 키우신 마리아와 요셉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은 줍니다. 많은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기대를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살아갈 때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모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여정을 통해 성화 됩니다. 자녀 역시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자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 동안 부모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헌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녀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부모님께 순종했다는 구절은 단순히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성장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의 모형이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성가정은 단순히 서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그 뜻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되고 구체화되는 자리이며, 세상 속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여정입니다. 이번 ‘가정 성화 주간’ 동안, 우리 가정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가정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2025-01-01

[말씀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의 시작은 축복과 결심과 변화를 위한 때입니다. 그중에서도 축복은 우리가 다른 이에게 해주는 것으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면서 또한 그가 어떤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좋은 축복은 결심과 변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축복을 할지가 중요합니다. 세태를 따르는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와 같은 축복의 인사는 그 사람의 새해가 물질과 이득을 따라 매진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하는, 그다지 신앙인답지는 못한 인사가 아닐지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제가 백성을 축복할 때 사용하도록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문장은 두 가지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리고 뒤의 두 문장은 그것들을 다시 설명해 줍니다. 다음 문장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다음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평화’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여건입니다. 생명의 위협, 시기와 질투, 사회 모순과 혼란으로 나 자신과 이 세상이 평화 속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는 모든 복의 전제 조건이며, 그 완성입니다. 이 축복에는 두 번 다 하느님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감당할 수가 없어 구약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이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축복은 말 그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탄으로, 아버지가 아드님을 내어주시고 아들은 여인에게서 탄생하시어 온전한 인간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이 축복이 실현됩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는 주님이 성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에게 얼굴을 들어 보이시는 주님은 복음 속에서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자비로이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우리에게도 큰 응답 요구 성모님의 모범 기억하며 하느님 뜻 따라 걸어가길 그러면 우리는 그 평화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택배 기사처럼 잘 포장된 평화를 건네주고 휙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초대와 응답, 그리고 친교와 일치의 과정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우리에게도 큰 응답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이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은 헛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과 머물며, 그분께 배워서 그분의 길을 함께 걷습니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합니다. 평화는 선물이지만 그저 받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완성해 가는 구원 역사 자체입니다. 복음에서 목자들을 비롯한 성모님과 성 요셉, 예수님은 모두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한없이 무력하고 무고한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표징입니다. 그분은 천사의 찬양을 받으시는 세상의 구원자입니다.(루카 2,8-14 참조) 목자들이 전한 이 소식에 모두가 놀라워하지만, 경탄은 순간적인 느낌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 놀라운 사명을 곰곰이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어주셨던 주님을 이제 가슴에 품으시고, 그분과 함께 걸어갈 내일의 사명까지 마음에 품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서 주님과 함께 앞장서 걸으실 준비를 마치신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어떻게 기도하고 축복하고 결심하고 살아야 할지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눈을 감고 침묵 중에 곰곰이 새겨봅시다. 두려움도 경탄도 분노나 슬픔도 근심 걱정도 잠시 가라앉히고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을, 그리고 부족하기만 한 우리를 모아 주시어 구원의 길, 평화의 길, 희망의 길을 함께 걷도록 불러주신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주님께 드립시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땅에서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이가 주님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2025-01-01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상

신악성경의 마지막인 ‘요한묵시록’을 1장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며 묵상하는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와 함께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지금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성찰해 본다.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상상’(想像)이란 단어에 집착한다. 실제로 요한묵시록은 ‘상상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Ιησοῦ Χριστοῦ)는 미래에 펼쳐질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다. 예전부터 유다 사회 안에 켜켜이 쌓여 온 신앙의 흔적들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예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어낸 게 요한묵시록이다. 요한묵시록이 적혀진 시절(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들었고 알고, 그래서 믿고 있던 터였다. 그분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싶어 요한묵시록을 쓰고 읽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고 이 삶을, 이토록 애틋하나 힘겨운 삶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갈까 ‘상상’하며 쓰고 읽고 간직한 게 요한묵시록이다. 대개 요한묵시록을 공부한, 혹은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은 주석서들을 찾기 마련이다. 주석서에 기록된 내용들의 대부분은 문법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열거, 또 아니면 구약 이곳저곳에 요한묵시록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이를테면, 글의 ‘지시적 기능’에 충실한 것이 요한묵시록을 바라보는 주석서들의 흔한 경향성이다. 이 단어는 원래 이런 뜻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 상징은 이렇게 읽혔다 등등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요한묵시록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고, 대개의 신앙인 역시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이 지시하는(가리키는) 사건이나 사람, 혹은 실제 상황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게 사실이다. 그런 주석서의 내용들은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쓰고자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대해 간과할 수 없고 당연히 설명해야 하겠지만,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징과 표현들을 적어 내려가야만 했던 요한묵시록의 공시적(共時的) ‘의도’에 있다. 이 ‘의도’는 한 시대, 한 시절의 이야기로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많은 역사서들을 읽어나갈 때,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넘어 지금 우리 삶에 어떤 교훈이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지 우리는 묻게 된다. 요한묵시록도 마찬가지다.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한묵시록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2000년 전 그들만이 아닌, 지금의 우리, 미래의 암묵적 독자들에게까지 열려 있다. 2000년 전 글인 요한묵시록이 당시 어떤 의미로 읽혔다는 주석적 분석은 필요한 것이나 지금과 미래의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꽤나 진부하고 게으른 일이 될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께서 말씀하셨듯 ‘성경은 읽는 이와 자라는’ 역동적인 생물체고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독자를 만나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놓는 모든 글의 본성이자 운명이다. 오늘날 글의 지시적 기능에 매몰된 주석서에 의존한 성경 읽기는 수많은 신앙인,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독자들의 다양한 읽기 앞에 필자 자신의 한계성과 편협함을 반성하는 게 옳다. 우리는 끝없이 요한묵시록을 읽을 것이고 그 읽기의 결과는 전혀 기대치 않은 신앙의 다양한 결과물들로 쏟아질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글의 문자적 의미와 지시적 의미에 치중한 ‘주석’의 작업 너머 오늘날 우리에게 이 상징과 표현들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고,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 것인지 캐묻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요한묵시록은 이 상징과 표현들을 통해 왜 이렇게 상상했을까’ 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사회적 사유와 묵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한묵시록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고민하는 것은 지난 시대에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흔적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님을 묻고 또 물어 얻어낸 것이 갈릴래아의 지형과 그분이 실제 하신 말씀, 혹은 그분의 연대기적 활동 흐름 정도라면, 요한묵시록을 해석해서 얻어낸 것은 천상과 지상, 태초와 종말의 시공간적 연대 안에 ‘어린양’으로서 늘 함께하시는 초월적 존재의 예수님이다. 역사의 예수님을 좇아가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요한묵시록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들 안에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고 해석해서 얻어 낸 결과가 요한묵시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읽어나갈 요한묵시록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예수님은 지금 나에게 도대체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는 요한묵시록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내일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읽혀져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요한묵시록은 어떻게 우리에게 행복을 전해주는가?” 요한묵시록에 “행복하여라”라고 하는 말마디는 총 일곱 번 나온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묵시문학적 가치는 ‘완전함, 풍성함’ 정도로 해석되는데, 요한묵시록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완전하고 풍성한 ‘행복’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다. 필자는 가톨릭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동안 이 두 질문에 계속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요한묵시록의 수많은 상징들을 통해 물을 것이고 그 물음의 답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행복한 삶으로 전해질 것인가 또한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이 또 다른 우리 삶을 ‘상상’하는 신앙의 기폭제이자 신앙의 사회학적 전망이 되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을 통해 간절한 기다림과 설렘으로 당신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요한묵시록의 끝이 이렇게 끝나는 건, 바로 상상의 자유로움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아닐까. 이미 오셨지만, 아직 오셔야만 한다는 예수님은 그분을 이미 만났으나 아직 기다리는 우리 삶을 그분에 대한 상상과 해석의 풍요로움으로 가꾸길 나가길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25-01-01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