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예로보암

1974년 3월, 중국 시안(西安) 교외에서 주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용과 청동 화살촉을 발견했다. 진시황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었다. 무덤 안에는 온통 구리를 녹여서 왕궁을 재현하고 수은을 환류시켜 은하수를 만들었으며, 천장에 이십팔수의 성좌를 그렸다. 죽어서 살 집의 규모가 이 정도라면 그가 생존했을 때 왕궁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이후 아방궁(阿房宮)은 초호화 건물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초대형 건물을 짓고자 하는 것은 독재자들의 꿈인 것 같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도 베를린 시내를 완전히 재건축하려 했다. 유럽을 지배하는 새로운 대(大) 게르만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용을 갖추겠다며 세계의 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 건축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초대형 공사가 이루어지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노력 봉사에 동원되는 힘없는 서민들이다. 솔로몬도 거대공사를 진행했는데 예로보암은 그 책임자였다. 솔로몬은 통치 기간 특별히 이방인 여성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였는데 외국인 아내들을 위하여 그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국방력과 경제력이 안정되어 너무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이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예로보암이 우연히 길에서 아히야 예언자를 만나는데, 아히야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중 열 조각을 예로보암에게 주면서 10개의 지파를 지배하는 왕이 된다고 예언했다. 소문이 퍼져 솔로몬의 귀에도 이 사실을 들어가 예로보암을 죽이려 하자, 예로보암은 이집트로 망명했다. 예로보암은 기원전 931년경에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솔로몬을 이어 왕좌에 오른 르하브암에게 힘겨운 백성들의 과도한 노동력 동원과 무거운 과세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다. 며칠 말미를 주고 르하브암은 솔로몬의 원로들을 불러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그런데 결론은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라며 강대강으로 맞섰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개로 쪼개지는 분단의 상황이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예로보암이 등극했다. 기세등등했던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스켐을 세우고 살다가, 그곳에서 나와 프누엘을 세웠다. 남유다의 침공이 두려워 군사 요충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의 노역과 무거운 과세로 고통을 받아 예로보암을 왕으로 세웠는데, 예로보암도 솔로몬이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또한 두 마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겨 하느님께도 죄를 지었다. 권력을 잡은 예로보암은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고 간신들의 기분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사람은 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운다고 했던가. 북이스라엘 왕 19명 중, 예로보암의 성적표는 꼴찌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안일해지는 어느 날이면, 일찍 일어나 장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어스름을 깨고 전을 펴는 가운데, 끓어오르는 솥은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터의 일상을 마음에 담다 보면 발걸음은 어물전에 이르고, 짠내가 덮쳐와 안일한 정신의 따귀를 칩니다. 제가 맡았던 어물전의 짠내는 생명이 넘치는 바다 냄새인가요, 죽음을 맞아 살이 썩어가는 고린내인가요. 물속을 춤추던 물고기들은 이제 나란히 누워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대답합니다. 생선이 죽어야 산 사람이 밥을 먹지 않느냐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어느 서생이 말했습니다. 삶이란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것이라고.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요한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밥을 먹고 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장터에 다녀옵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성서를 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요한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른 세 복음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네 복음서는 저마다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지만, 복음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5000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의 쟁점은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12절) 두 구절은 막 바로 이어집니다. 복음사가는 그 과정에 대해 조금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이야기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행간을 줄여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숙박시설이나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여정을 떠날 때 간단한 식량을 챙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서, 긴 여정을 대비해서 먹을 것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겠지요.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므로, 얼마만큼 식량을 챙겼는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아이 하나가 자기 먹을 것을 꺼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요. 지금도 보리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보리빵은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옵살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어부들이 내다 버린 작은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가난한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던 거지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가난한 아이 하나가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부끄러운 마음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람들이 내놓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시간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은, 빵이 많아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따뜻한 해석을 세차게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표적인 기적을 인간적인 문제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하느님 아들의 절대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두 구절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할 뿐, 행간의 진실은 여전히 멀고 아득합니다. “빵이 어떻게 많아지는가?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남은 빵 열두 광주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던진 이런 질문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빵의 늘어남이나, 그 숫자가 아닐 겁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책입니다. 복음사가가 애써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자 함이었겠지요. 다시 복음서를 마주합니다. 나누어 먹은 빵과 남은 빵을 살피다가, 잊어먹은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예수님은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네셨을까요. 한 끼 굶는다고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님이 건네주시고자 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 지옥을 헤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셨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밥을 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밥을 벌기 위해 땀을 흘리고, 그 땀 내음은 바다 냄새와 고린내 사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성당을 찾은 분들에게,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풀이 많은 호숫가에 자리 잡게 하시고, 보잘것없은 음식이지만 저마다 원하는 대로 먹게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만히 앉아 쉬시라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 풍요로움을 누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글 _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7-28

[말씀묵상] 연중 16주일

오늘 복음은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이야기는 우리에게 고유한 묵상 주제를 제공합니다. 복음의 앞부분은 지난 주일 들었던 복음(마르 6,7~13)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여러 고장을 돌며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며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의 병을 고쳐주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늘 함께했던 선생님 없이 제자끼리 둘씩 다니면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제자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서 회개를 외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마귀들의 저항이 강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병자들을 최선을 다해 고쳐준 제자들이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왔고, 그들은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과 너무도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현실 때문에 아픔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파견한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파견되어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 백성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한 모든 활동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천명합니다. 물질과 돈이 주인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눔과 섬김의 복음적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회개를 권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세상을 치유하는 사도직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겪었듯이 세상의 냉소와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삶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공동체는 파견되고 사명을 다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서로의 체험에 대해 나눔을 하고 하느님 안에서 쉬고 서로를 격려하는 터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전례에 참여하여 세상 속에서 각자 살아간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위로를 얻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고 다시 파견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또 다른 묵상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보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애쓴 이들을 좀 쉬게 놔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움을 절박하게 원하는 많은 사람이 제자들이 쉬어야 할 곳에 먼저 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명을 갖고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쉬어야 하는데 자신들 생각만 하고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매정함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 사람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있나 하는 의문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제자들의 상황, 능력과는 별개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가 도움을 바라며 그토록 매달리듯 찾아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비롯하여 선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세상의 아픔과 고통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어떨 때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입니다. 불가능, 좌절, 절망, 포기,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밀려오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요동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들을 보면서 일어난 ‘가엾은 마음’입니다. 복음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가엾은 마음’은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예수님 안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 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Compassion입니다. 흔히 ‘연민’이라고 번역되지만, ‘함께’(Com)와 ‘고통’(Passio)이 결합한 단어로, ’함께 고통을 겪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좀 불쌍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을 창자가 끊어지듯이 함께 아파하시며 마주합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죄와 고통 중에 있는 인간들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 절망 가운데 도움을 바라는 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아파했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도 당신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의무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삶은 그분의 삶을 보고 배울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엾은 마음’이 어디서 오는 마음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7-2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말씀에 잡혀 활동한 예레미야 예언자

중국의 두보(杜甫)는 사회풍자와 교훈적인 주제를 담아낸 시를 많이 썼다. 두보가 살던 당나라는 찬란한 문화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다. 당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정비된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강했던 당나라도 잦은 전쟁과 반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차츰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현종이 임금일 때 아름다운 여성 양귀비에 빠져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 낙양 등의 큰 도시를 점령한 큰 군벌들이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왔는데, 당나라 중엽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이 가장 유명하다.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꽁무니를 뺐고 장안을 지키는 군인들도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당시 말단 관리였던 두보도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만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도망쳐 나오다가 높은 성 위에서 수도 장안이 불타고 부서져 내려 폐허가 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보가 눈물을 흘리며 쓴 시 “國破山河在(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고) 城春草木深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지는구나)…(후략)”는 그의 시집 「춘망」(春望)에 남아있다. 두보는 지금도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애민정신에 투철하고 사람의 마음과 역사적 진실을 아주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한 시들을 많이 써서 중국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시인이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방 사제의 아들이었다. 예레미야는 20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때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인 약 40여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혹독한 시기였다. 55년간 왕들의 폭정이 계속됐고, 요시아왕의 개혁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나라가 부실한 상태가 되다 보니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굶주림과 고통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종교가 더 부패하여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였다. 그는 예언자와 사제들을 정조준했다. 그들의 부패상을 모두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실 당시의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지나친 경고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활동은 녹록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는 와중에 예레미야는 펑펑 울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까지 사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너무 억울했지만, 백성들의 어두운 미래가 측은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는 웃음거리, 조롱거리로 내몰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잡혀있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21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7-14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혜로운 왕 솔로몬의 타락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해도 즐겁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유해도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857-?)은 생활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만족하면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원님과 백정이 있었다. 원님은 그야말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착하고 예쁜 부인을 만나 자식도 여럿 두었다. 백정은 천한 신분 때문에 매일 무시당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여 일찍 늙어 보여 결혼도 못 하는 신세였다. 어느 날 원님이 산책 중에 백정을 만났다. 백정은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였다. “그런데 원님, 안색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곳이라도?” 원님은 하늘을 한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걱정이 너무 많네. 혹시 고을에 강도나 도둑이 들지 않을까? 혹시 누가 나에게 불만이 있는 자가 나를 모함하여 임금님이 갑자기 벼슬에서 파직시키지 않을까? 그 밖에도 걱정거리가 많다네. 내가 이런데 자네는 오죽하겠나?” 그 말에 백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쇤네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으니 걱정할 게 없고, 가진 재산도 없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고기를 사람들에게 팔면 돈을 받으니 기쁘고, 매일매일 그냥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 백정의 말에 원님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이 왔다. 비로소 백정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의 삶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보통 인간의 고통은 욕심에서 비롯되고 이 욕심이 사람들을 죄와 잘못된 길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다. 솔로몬 하면 항상 지혜라는 단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영민한 왕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정을 확립했다면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안정된 정치적 수완으로 왕국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정략적인 혼인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고,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부전자전이라 했나? 솔로몬도 아버지를 닮아 호색가의 DNA(?)를 갖추었다. 그는 수많은 외국 이방인 여인들, 모압 여인, 아몬 여인, 에돔 여인, 시돈 여인, 헷 여인 등 온갖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분명 정치적 장점도 있었지만, 왕궁 깊숙한 곳에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게 됐다.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국가이며 항상 이스라엘의 문제는 역사는 잡신들과의 투쟁과정으로 점철돼 있었다. 솔로몬은 우상숭배가 궁정 안에서 이루어지게 했고, 지나친 세금 부과와 강제노역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 큰 둑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분부터 방심한 사이 어느새 전체가 무너진다.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받는 것으로 시작된 솔로몬의 통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풍요와 큰 성공은 솔로몬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는 결국 타락하게 됐다. 인생에서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의 마음을 지니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14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0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간 다윗왕

중국 명나라 시대에 큰 도둑 떼가 국경에 몰려들었다. 왕양명(1472-1528)은 황제의 명령으로 국경 마을로 떠났는데 도둑들은 산속 깊이 숨어 있고 좀처럼 쉽게 정벌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읍에 있는 왕양명의 제자들이 학문을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양명은 즉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험한 산속에 버티고 있는 도둑이라도 무찌르기를 계속하면 결국 정벌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도둑은 완전히 무찌르기가 정말 어렵다.” 스승의 편지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유혹의 연속이다. 왕양명은 안 될 일인 줄 알면서 하는 것, 열심히 해야 할 때 피우는 게으름, 이런 것들이 모두 마음속의 도둑이라 했다. 그는 이 도둑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의 것을 탐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그저 혼자만 잘 먹고 잘살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왕양명은 항상 곧은 마음으로 자신 속의 도둑을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윗왕은 어느 날 밤에 궁전을 거닐다가 멀리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그 여성은 밧 세바란 여성인데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다, 그의 남편은 충신 우리야였다. 그런데 다윗은 부하를 시켜 여성을 데려와 정을 통했다. 다윗은 부하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꾀를 냈다. 다윗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에 보내 결국 그를 죽었다. 그후 다윗은 우리야의 부인을 아내로 삼았다. 다윗은 탐욕에 눈이 멀어 부하를 일부러 죽게 하고 그 아내마저 차지하는 죄를 지은 것이었다.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이가 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부자는 자기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저런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 놈이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다윗을 보고 나단은 결정구를 날린다. “그 파렴치한 놈이 바로 임금님입니다. 임금님은 충신 우리야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하느님은 마치 대낮처럼 그 일을 온 천하에 비출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느님께 큰 죄를 지었소.” 다윗왕은 나단에게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위대한 성군으로 존경받는 다윗왕도 예상외로 죄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다윗이 위대한 것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칠 줄 알았던 다윗,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순수한 그의 믿음을 높이 존경하는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07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30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민심을 잃고 몰락한 이스라엘의 사울왕

1939년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폴란드를 완전히 장악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회의를 제의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거부하자 독일은 프랑스 파리까지 단번에 진격했다. 이제 마지막 영국만이 남았다. 영국을 향한 공격이 계속됐기 때문에 영국 국민은 대단히 불안했다. 평화 협상을 제의하는 국민들도 많았다. 말이 평화 협상이지 독일에 점령당하는 것이었다. 이때 영국은 처칠을 수상의 자리에 앉히고 전시 내각을 구성했다. 처칠은 의원들과 국민들에게 “내가 영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노력과 땀과 눈물뿐입니다. 나는 모든 힘을 기울여서, 또한 하느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마지막 목적은 단 한 가지, 승리입니다”라고 역설했다. 처칠은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는 민심이 떠나면 민심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힘이 분산되어 전쟁에서는 백전백패한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뽑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있겠어?’하며 얕잡아 보고 사울을 따르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사울은 처음에는 큰 포용력을 가지고 자신의 정적들을 감싸 안았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책봉된 사울은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고 백성들은 사울을 하느님이 보내주신 임금으로 섬겼다. 사울이 왕에 오른 지 2년이 지나 필리스티나와 전쟁을 벌였다. 아군의 군대는 적군의 위세에 눌려 모두 떨고 있었고 병사들도 하나둘씩 도망쳤다. 마음이 급해진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지냈다. 그때 바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백성들 앞에서 추궁했다. 사울은 전쟁에서는 다행히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전폭적인 존경을 받던 예언자 사무엘의 추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는 큰 결함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사울은 후에도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전승비를 세우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결국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사울은 더욱 궁지로 몰렸는데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백성의 인기를 독차지한 것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시기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민심이 떠나고, 가족들의 냉대를 받고, 스승 사무엘에게도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사울은 왕의 자리는 차지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손꼽는 영웅이었지만 국민들의 마음을 놓쳐버린 실패한 군주였다. 능력이 출중한 장수였던 사울왕이 권력을 잡은 후 교만해져 민심을 잃고 하느님의 징벌을 당했다, 추락하는 그의 삶은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안겨준다. 지도자의 가장 큰 힘은 민심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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