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 다들 아실 테죠. 유명한 이 비유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 여러 이름이 붙여집니다. 잃었던 양을 되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인(루카 15,6 참조),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부인(루카 15,9 참조)에 이어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쁨에 젖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루카 15,24 참조)의 비유가 나란히 나옵니다. 세 비유는 100분의 1(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 10분의 1(잃었던 은전 열 닢 중에 한 닢), 2분의 1(두 아들 중에 한 아들)로 긴박함이 급상승하며, 한결같이 우리 독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비유를 들려주시는 동기가 다음에 나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탕자의 귀환’을 통하여, 우리는 작은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회개한 동생을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아버지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인류 구원 의지를 봅니다. 회개한 친동생을 보고 ‘저 아들(그리스어 본문: 당신의 저 아들은)’이라 부르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친형에게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는’이라고 부르시면서 큰아들의 빗나간 자세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는 죄를 짓기 전에든 후에든 형과 아우, 곧 형제자매 관계는 전과 다름없이 또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200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초청 강연을 마치고, 이튿날 몇몇 자매님과 함께 부근에 있는 발달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오전 9시경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침 식사를 하던 이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낯선 우리를!’ … 천사들이 운영하는 천상 공동체에 들어선 느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 신부(Henri J. M. Nouwen, 1932~1996)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지내던 중, 자신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큰아들’이라면서 교수직을 접고 토론토의 이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분은 저서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A Story of Homecoming)」에서 말합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 가득한 축복을 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언제나 기다려주십니다. 실망 속에서도 두 팔을 내리지 않고, 언제나 당신 자녀들이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사랑 가득한 이야기를 건네시며 그들의 어깨 위에 당신의 팔을 올려 놓아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죄인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96페이지) 나우웬 신부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106페이지)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사람들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본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됨을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 사람은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영적 고전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의 저자인 월터 J. 취제크 신부님은 1940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에 잠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3년 만에 미국으로 귀환하기까지의 긴 세월 속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지 5년 만에 다시 드린 어느 날의 미사를 신부님은 잊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건포도로 만든 미사주와 부엌에서 간신히 구한 빵, 위스키 유리잔과 회중시계 뚜껑을 성작과 성반 대신 사용해 봉헌한 그 미사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짓밟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그 미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양식이 그들의 참된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을 지탱한 힘은 더 많은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준 성체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을 형성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길러낸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우리는 살기 위해 매일 양식을 먹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성찬례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양식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굶주림을 채우며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 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살과 피’는 성경에서 한 인간의 생명과 존재 전체를 뜻합니다.(마태 16,17; 1코린 15,50; 히브 2,14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그분의 생명 전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일상적인 빵과 동일시하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일상과 배고픔 속으로 들어오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빵을 매일 먹어야 하듯이, 성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분과 점점 더 일치하게 됩니다. 성체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이 우리를 형성하듯이, 영적 양식인 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사람은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는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장 안에서 성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동시에 공동체적으로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라는 진리 안에서 상호 일치와 친교의 형제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그 빵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게 합시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령의 열매는?

사도 바오로는 육의 행실(부도덕)을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갈라 5,19-20) 등 열다섯 가지나 나열합니다. 이어서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여기 나오는 부도덕(악덕)을 네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불륜, 더러움, 방탕 등은 우리의 사랑을 빗나가게 합니다. 둘째, 우상 숭배와 마술은 하느님 예배(경신례)를 빗나가게 합니다. 셋째, 분열과 분파 등은 사랑의 끈을 풀어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넷째,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 등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인간성을 타락시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사랑은 뒤따르는 여덟 가지 덕목의 으뜸 개념입니다. ‘육(肉)의 행실’을 나타내는 그리스말 본문은 본디 ‘육의 행실들(ta erga te-s sarkos)’로 복수로 쓰인 데 반해, 성령의 열매 ‘사랑(agape-)’은 단수로 쓰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다양하지만, 그 모든 열매는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짧게 설명해 주는 구절을 대라면 다음 둘을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24) 요한의 첫째 서간 저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한마디로 서술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요한의 첫째 서간 주해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 ‘신비의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한마디로 요한의 첫째 서간은 ‘사랑(agape-)’이시라고 서술해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라면 둘째가는 계명은 이웃 사랑입니다.(마르 12,29-31 참조)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쭈그러들 때는 소화력도 떨어지고 기쁨도 줄어들지만, 거꾸로 사랑이 충만해질 적에는 의욕도 생기고 기쁨도 솟아남을 느낍니다. 지난해 무더운 여름 7월과 8월을, 산골짜기 작은 농장에서 작물도 가꾸고 닭과 개 두 마리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1~2m씩 거리를 두던 닭들에게 3주 정도 지나면서, 기본 먹이 외에 씀바귀, 참비름, 상추 등 즐기는 것을 뜯어다 주었더니, 닭들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리로 손등이나 신발을 장난치듯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을 주면 식물도 동물도 친근해지고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보답하는구나.’ 아울러 시편 노래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 함께 시편으로 기도드리시겠습니까?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시편 85,11-13)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삼위일체를 단순히 ‘이해해야 할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삶’으로 가르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시나이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이는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먼저 전능함보다 자비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중심이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라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교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한 자연만이 아니라 때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 세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입니다. 저는 얼마 전 교구에서 인공지능(AI)에 관련된 사제연수에 참여하여 AI에 대한 장점과 문제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영성과 가장 극한이 되는 물성의 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AI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빠릅니다.’ ‘물음에 답을 완성합니다.’ AI가 ‘인간의 뇌를 닮게 만들었다’ 해서 인공지능일 텐데, 현대의 바벨탑 곧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고 있는 신격 모사처럼 보였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1만 년 동안 읽을 책의 단어를 48시간 만에 읽어댄다니, AI는 수학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문학적 가치와 특히 신학적 가치로 검증하지 않으면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을 간파했습니다. 연수의 마지막 메시지는 AI와 대화하지 말고, 필요한 때만 도구처럼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I가 불가역적 사건이고, 기왕에 하느님을 닮으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따랐으면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삼위일체의 성부께서는 성자를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닫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성부는 성자를 향하고, 성자는 성부께 응답하며, 성령은 그 사랑의 일치라고 설명합니다. 즉 삼위일체의 중심은 고독한 힘이 아니라 사랑 안의 관계입니다. 동방 교부들은 이것을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즉, 서로 안에 머무시는 사랑입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며, 성령은 그 사랑 안에서 일치하십니다. 삼위일체 안에는 경쟁도 없고, 지배도 없으며, 고립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기 증여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만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의 가장 깊은 뜻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지만 AI는 하느님의 뜻과 충분히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을 다시 봅니다. 삼위일체는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친교의 하느님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주장만 하면 일치는 깨집니다. 그러나 서로 들어주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 줄 때 사랑은 살아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워가는 공동체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때 흩어진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하나가 되고, 우리는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말씀의 우물] 다니엘 안에 있는 거룩한 영

다니엘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본문까지 모두 세 가지 언어로 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다니엘서 1장부터 14장까지 전체가 다 쓰여서 최종 편집된 시기는 기원전 164년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의 그리스화 정책 아래 억압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할 무렵 부활 희망이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우리 개인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 명시적으로 나오는 구절은 다니엘서가 처음입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 12,2)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유다교 말살 정책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니엘이 그의 하느님께 기도와 간청을 올리는 것을 발견하였다.”(다니 6,12) 그 즉시 다니엘은 임금에게 고발당해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오히려 그를 악의로 고발한 이들이 사자 굴에 던져져 죽게 됩니다.(다니 6,15-29 참조) 그즈음 바빌론 어느 곳에 수산나라는 미모의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다니 13,1-64 참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다니 13,2-3) 그 무렵 유다 원로 둘이 부정한 마음을 품고서 수산나와 정을 통할 기회를 엿보다가, 수산나가 혼자 정원에서 목욕할 때를 알아채고, 다가가 불륜을 저지르려 합니다. 수산나가 거절하자, 원로들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수산나가 어떤 젊은이와 정을 통하려 했다고 오히려 수산나에게 자기들의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게 된 수산나는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다니 13,42-43) 주님께서는 수산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다니 13,45) 혜성처럼 등장한 다니엘, 성령의 인도를 받은 다니엘은 사형 집행을 멈추라고 소리 지릅니다.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다니 13,48) 다니엘은 타락한 두 원로 재판관을 갈라놓고서 ‘어떤 나무 아래에서 수산나가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따로따로 묻습니다. 한 원로는 ‘유향나무 아래’라고 대답하고, 다른 원로는 ‘떡갈나무 아래’라고 다른 대답을 하는 바람에 그들의 거짓이 들통납니다. 그 결과 수산나는 무죄로 풀려나고, 두 원로는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의롭게 살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주변을 정화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의 ‘고별사’(요한 13~16장)와 한 번의 ‘고별기도’(17장)를 남기셨습니다. 이때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요한 14,16) 보호자 성령을 약속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고별사 안에서 보호자 성령에 대한 약속은 모두 네 번 등장합니다.(요한 14,16-17; 14,26; 15,26; 16,7-15) 복음서에서 ‘보호자’로 번역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여기 옆으로(παρα) 오라고 살갑게 부르는(καλέω) 것을 뜻하는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유다교 회당에서 추방당하거나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지내야 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곁에 머물러 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얼마나 큰 용기와 위안이 되었을까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지요. 그런 다음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별사를 통해 약속하셨던 보호자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성령’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이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로 사용한 그리스어는 ‘엠퓌사오(ἐμφυσαω)’입니다. 엠퓌사오는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곳에만 유일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그 유래나 성경의 다른 용례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에 해당하는 ‘퓌사오(φυσάω)’는 생명을 산출하고 자라게 한다는 뜻의 동사 ‘퓌오(φύω)’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숨을 불어넣는 것이 곧 생명을 움트게 하고 생장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엠퓌사오는 한 생명체가 자라나고 형성되기까지(φυσάω) 그 과정 안(ἐν)으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엠퓌사오 곧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그들을 다시 살게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표현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네우마(πνεῦμα)’입니다. 프네우마는 창조 때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창세 2,7)과 태초에 땅이 아직 꼴을 갖추기 전,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을 적에, 그 물 위를 감돌고 있던 ‘하느님의 영’(창세 1,2)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지요. 프네우마는 바람처럼 스며드는 하느님의 숨결로, 생명을 생명이도록 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생명체의 힘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내쉬는 숨이나 호흡과는 또 다른 차원의 숨결입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이 생명의 숨결로 말미암아 비로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숨만 쉰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듯 내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지요. 제자들은 믿었던 스승 예수가 처참하게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살아갈 이유와 삶의 근거를 잃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스승을 배반한 죄책감과 온갖 두려움으로 순간순간 숨이 막혀 제대로 숨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이 내쉬는 숨이라 해 봤자 온통 좌절의 한숨과 슬픔의 탄식뿐이었습니다. 꺼져가는 그들에게 숨통을 트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숨의 근원이신 생명의 숨뿐이었습니다. 생명의 숨, 그것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 그분의 숨결, 프네우마, 그 거룩한 성령이 우리의 숨구멍을 통해 들어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희망의 숨결로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가 숨 쉬는 한, 우리는 그분 사랑의 숨결인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숨보다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청하십시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의 우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독일어 christsein)’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독일어 christwerde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표현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본당 교적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된 우리는 모두 완성된 신자일까요? ‘신자인가? 비신자인가?’라는 물음, 곧 존재론적인 물음에는 ‘예, 신자입니다!’라고 마땅히 응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한 신자, 곧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참신자가 되어 ‘이제는 회개도 발전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신자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하고 응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존적 차원에서는 아직 더 배우고 더 회개하고 매일 조금씩 더 노력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보다 더 나은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 곧 나그네 살이 중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도록(christwerden) 힘껏 노력해야 할 터입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나의 성화뿐 아니라 이웃의 회개와 성화에도 기여하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뵙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 품 안에서 그분을 뵙고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지복직관이라 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하느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4) 이마에 이름을 적어 놓는다는 이야기는 “인장 반지를 새기듯, 그(아론, 훗날 대사제) 위에 ‘주님께 성별된 이’라고 새겨라”(탈출 28,36)라는 전통에서 유래하죠. 베드로의 첫째 서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멈춰있지 말고 성장하여 보다 나은 신앙인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의 첫째 서간 속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 곧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받으면 그때부터 온 힘을 다해 ‘참신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이제(오늘)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의 우물] 마르타의 선택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가 집으로 모십니다.(루카 10,38-42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분 말씀을 듣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 발치(발 앞)에 앉는다’는 말은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먹은 사람, 곧 그분 제자로서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루카 8,35) 마르타가 한마디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루카 10,41-42) 의문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곁에서 말씀 경청에 몰입하는 마리아의 몫만 좋다는 말일까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모시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르타의 몫은 별 가치가 없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선택이나 시중드는 일을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시중드는 일에만 몰두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선택한 일 즉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몫이니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잡아 주실 뿐이죠. 그날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시며 축복을 가득히 내려주고 떠나가셨을 겁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바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도, 그분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것도 다 그분 말씀을 듣고 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 말씀이 이미 강복이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당에서 구역이나 가정방문 때, 함께 나눌 대화나 필요한 성사와 미사 집전에보다는, 상대에게 무엇을 대접할까에 더욱 마음을 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마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말씀을 경청하고 나누며 그분과 하나 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참조) 바로 앞에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루카 10,25-28 참조)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가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믿음에 따른 행동이 강조됩니다. ‘행동주의(Activism)’라고 일컬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동 중심의 신앙생활도 결국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처럼 그분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경건주의(Pietism)’에서 꽃을 피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개화(開花)의 절정은 바로 미사성제 안에서 영원하신 분을 모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뤄지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들(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말씀 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구경꾼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춤은 이제까지 흔히 보던 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놀라움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어이없어하며 이 남자의 춤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남자가 나와서 이 사람의 춤을 따라 추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며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이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처음에 춤꾼 한 명을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첫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당시 모습은 미친 짓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죄인과 먹고 마셨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안식일 법도 어기곤 했습니다. 만약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따름’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따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곁을 떠나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사라지신 주님의 부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성령을 통해 세상 어디서나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더욱 깊고 충만하게 머무르십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현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존이 우리의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깁니다. 이는 완벽하게 준비된 성인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모이고 모여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너무나 부족한 우리인데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엄청난 사명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사명만 던져주고 떠나시는 방관자 같은 주님이 아니십니다. 실패와 박해,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파견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우리입니다. 이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고, 또 부족한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도 들겠지만, 어떻게든 따르려는 우리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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