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평신도 주일

오늘 제1독서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587/6년 이스라엘은 가나안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완전히 주권을 잃고, 많은 백성이 정복국인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에제키엘이 활동한 장소도 이스라엘이 아닌 바빌론 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레미야와 더불어 ‘성전과 예루살렘 파괴’라는 충격적 사건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백성의 죄를 들며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혹독한 심판을 예고하였지만 멸망이 실현된 뒤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예고하여 동족을 위로하고 회복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 죄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절정에 자리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에제 47,1-12) 이는 에제키엘이 환시 가운데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생명력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환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면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큰 강을 이룰 것입니다. 그 강은 지나는 곳마다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며 죽음의 바다인 사해(死海)까지 닿아 그곳 역시 살아나게 합니다. 제1독서 8절에 언급된 ‘바다’가 사해임은 ‘아라바’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라바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동편 계곡의 이름이며 사해는 성경에서 ‘아라바 바다’(신명 3,17; 여호 3,16 등)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합니다. 사해의 부활 예고는 당시 백성에게 매우 적절한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잃고 유배 생활하던 그들은 죽음의 바다에 빠진 듯이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해는 죽음 같은 유배살이를 상징한 곳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백성을 용서하시고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시면 성전에서 생명수가 솟아나 사해를, 곧 죽은 듯 보인 이스라엘을 부활시켜 주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성전수 신탁에는 에덴동산 모티프가 많이 쓰입니다. 첫 번째 모티프는 산입니다. 에덴이 ‘하느님의 거룩한 산’이라 일컬어지듯(에제 28,13-14; 창세 2,8 참조) 에제키엘서 40장 2절과 43장 12절에 따르면 새 성전도 높은 산 위에 봉헌됩니다. 두 번째는 과일나무입니다. 에덴동산에 과일나무가 많이 자랐듯이(창세 2,9 참조) 제1독서의 12절에도 성전 생명수로 말미암은 과일나무, 시들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 나무들이 언급됩니다. 세 번째는 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강 하나가 네 줄기로 갈라져 흘렀듯이(창세 2,10 참조) 제1독서에서는 성전에서 솟아난 물이 강이 되어 흘러갑니다. 히에로니무스와 안티오키아의 테오도루스는 생명을 주는 이런 성전수에서 죄를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도록 돕는 세례수를 떠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수가 큰 강이 되어 흘러간다는 이 예언은 흥미롭게도 예루살렘의 실제 지형을 충실하게 반영한 신탁입니다. 사해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곳으로서 바다 밑 400m에 자리합니다. 그에 비해 예루살렘은 해발 750m의 고지대라 사해와 고도차가 1km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수가 아라바로 내려가 강을 이룬다는 제1독서의 묘사처럼, 지금도 예루살렘에 비가 내리면 고도가 낮은 아라바 계곡으로 모여 휘몰아치는 강처럼 사해로 흘러들게 됩니다. 다만 에제키엘이 전달한 새 성전 신탁은 바빌론 유배 뒤에도 문자 그대로 실현된 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에제키엘서에서는 재건될 성전을 묘사하기만 할 뿐 그걸 지어야 한다는 명령도 빠져 있는데요. 의미심장하게도 이후 예수님께서 당신 몸이 성전이 되리라고 예고하십니다.(요한 2,19-22 참조) 교부들은 에제키엘이 예언한 새 성전이 마지막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 곧 이상적 교회를 표현한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에제키엘은 실제 성전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관념상의 성전으로 예고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셨고요. 이처럼 제1독서의 성전수도 성전이 되실 예수님에게 적용되기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 합니다.(요한 7,37-38 참조) 에제키엘서의 새 성전 환시는 요한 묵시록 21장에서 22장의 천상 예루살렘 묘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성전수 신탁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 이미지에 반영되기에 이릅니다.(묵시 22,1-2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을 죽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지금은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서 전쟁 상황이 정리되면 많은 분들이 이스라엘의 성지를 찾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할 때 안식일이 되면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거나 시내가 텅텅 비고 호텔 엘리베이터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다. 유다교의 중심은 율법이다. 율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이란 뜻이다. 율법이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율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 등은 바로 율법의 뼈대가 된다. 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하면서 율법도 세분됐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세분되고,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령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율법 중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 같은 경우에도 아주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다. 나뭇가지와 잎을 뽑거나 자르기, 잔디 깎기, 화초에 물주기도 할 수 없다.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기, 타작하기, 알곡 고르기, 빻기나 찧기도 금지된다. 심지어 불 켜기와 끄기도 할 수 없다. 특히 바리사이파(Pharisees)는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다교의 중요한 분파이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후 바리사이파는 유다교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리사이파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이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다. 율법 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가장 존경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라며 율법 학자들을 직접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은 이스라엘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모르니까 지킬 수 없어 이미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했을까? 예수님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지키는 율법주의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율법을 선언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했다.(마태 5,38-48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잃어버렸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은 변질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고 생명이므로 그분이 곧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이라 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높아졌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칠 것으로 생각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다. 유다교에서는 현재도 예수님을 한 사람의 예언자로 여길 뿐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유다교는 여전히 다윗 왕조를 다시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번영의 뒷자리,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6)

드디어 대탕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묵시록의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심판을 선고받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에게 허락된 존중은 없다.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를 우리말 번역은 ‘탕녀’라 하여 방탕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본문이 고발하는 바는 더 노골적이다. 땅의 임금들과 몸을 섞은 여인(17,2), 그러니 차라리 ‘창녀’라 부르는 것이 정직하다. 이 단어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불편을 피하려 돌려 말하는 순간, 이 계시의 순수성과 급진성이 희석된다. 그녀는 그냥 창녀가 아니다. ‘큰’ 창녀다. 이 과장된 수식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 17장 5절에서 밝혀지는 그의 진짜 이름, ‘큰 바빌론’과 닿아 있고, 다시 예레미야서 51장 13절이 말하는 대바빌론의 패망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가 말하던,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 그 바빌론을 요한 묵시록은 ‘물 위에 앉은 창녀’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치며 심판의 대상을 분명히 한다. 예레미야의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 시대에 로마로 은유되며 심판은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제국이라는 체제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심판받는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륜은 육체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결탁의 비유다. 땅의 임금들은 바빌론, 즉 로마와의 동맹 속에서 경제적 평온함을 확보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 현실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묵시 2,9.13; 13,16–17 참조) 요한은 이 상황을 한 단어로 비유한다. ‘취기.’ 그는 말한다. 땅의 임금들이 창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취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로지 성장과 돈의 감미로운 향에 취한 삶, 그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경고하던 영적 실명이다.(이사 29,9; 호세 4,11–12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은 정치·경제적 번영과 그에 수반한 우상숭배를 흔히 불륜과 창녀의 이미지로 그렸다.(이사 23,18; 1열왕 5,1–12; 아모 1,9; 요나 3,5–10; 에제 16,33–34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오래된 언어를 끌어와 18장(3.9–19)에서 경제적 번영을 곧 ‘불륜’과 ‘취기’라고 단언한다. 고대 창녀가 몸을 팔고 돈을 받았듯,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땅의 임금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셈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이미지는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무역의 복잡한 외교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가난한 나라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번영의 논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요한의 언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누리는 번영이 혹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은 아니냐?” 이 질문을, 우리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면은 갑자기 광야로 이동한다. 광야는 시선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사 21,10 참조) 이사야는 그곳에서 바빌론의 몰락을 보았고(이사 21,1–10 참조), 요한도 같은 자리에서 바빌론과 로마의 종말을 조망한다. 광야의 시선은 제국의 거대함을 상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바빌론과 로마는 든든히 서 있다. 바빌론은 묵시록 쓰이던 시기 ‘로마’ 은유 종교·정치·경제적 결탁 현실 비판하며 오로지 성장과 물질에 취한 삶 경고 그러나 광야에 서면, 그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권력과 돈과 명예는 광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과도한 무게를 실어 온 우리의 삶을 뚜렷이 보게 되는 자리. 광야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 광야는 단순히 거룩한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진홍빛 짐승을 탄 여인을 본다. 머리 일곱, 뿔 열.(17,3) 12장 3절의 붉은 용과 동일한 형상이다. 광야는 하느님의 시선이 열리는 곳임과 동시에 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요한 묵시록은 선과 악을 단순히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통찰이 깊어질수록 악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창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다. 이는 곧 제국의 경제적 번영이 악의 시스템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번영 역시 하느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번영이라는 이름의 신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릎 꿇어왔는가. 4절로 넘어가면 창녀의 외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견고한 번영의 색깔인 자주와 진홍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큰 창녀 바빌론. 그녀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불륜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화려함은 로마 제국의 무역 품목들과 정교하게 연결된다.(묵시 18,12–14 참조) 상업적 성공이 창녀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왜 창녀의 짓인가?”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그 번영이 만들어낸 자리는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로마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모여 유행이 되는 곳.” 요한은 창녀를 “역겨운 것들의 어미”라고 부른다. 유행과 번영이 결합한 자리를 ‘어머니’라 이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기 위함이다.(예레 27,12 참조) 다시 말해, 세상이 탐하는 모든 화려함의 모태가 그 창녀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화려함 앞에서 박해를 받는다. 창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것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행렬에서 낙오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본질이다. 화려함의 앞줄에서 환호하는 대신, 뒤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론적 운명, 예수님의 운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그런 예수님을 미련하다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창녀의 후손인가. 나는 때때로 백화점에서 그 질문을 떠올린다. 명품매장 앞에 늘어선 줄, 그 긴장된 눈빛들.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눈빛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좋은 삶’인가, 아니면 ‘옳은 삶’인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종말에 대한 성찰(묵시 16,17-21)

일곱 번째 대접은 일곱 번째 나팔과 닮았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여전히 등장한다.(묵시 11,19 참조) 이집트에 내려졌던 다섯 번째 재앙과 역시 닮았다.(탈출 9,22 이하 참조)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집트의 탈출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길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재앙들은 믿음의 길을 촉구하는 하나의 호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되짚었다.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대개 ‘하느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다. “다 이루어졌다.” 이 외침은 단순한 종말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안에 비로소 개입하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하느님이 등장하는 서사들 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 그러니까 천둥, 번개, 요란한 소리, 지진 등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탈출 19,16; 묵시 4,5; 8,5; 11,19 참조)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한다는 믿음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문장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좌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큰 도성’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큰 도성’을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은 은유적 표현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은유를 통해 인간 세상과 그 역사의 불의와 부패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로마와 이방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이기도 하겠고, 내일의 우리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앞에 어느 민족이, 어떤 세상이 지진과 같은 징벌의 대상이 될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적인 태도로 요한 묵시록의 징벌을, 세상의 불의를 살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에게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온전히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자세 말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로마 혹은 그 이전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실재이나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축인 것인 양 이해하면서 마치 특정 세력이 악하므로 그 특정 세력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의로움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놓고 ‘세속’에 따라 살지 말자는 외침을 함부로 남발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이 아니라 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선동가의 아집일 경우가 많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느님 입장에선 당신의 섭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의 공간이다. 교회는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분의 정의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저만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형제적 공동체다. 하느님은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신다’(묵시 16,19 참조)는 문장 역시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이미 확고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예컨대 모든 섬과 산이 자취를 감출 만큼 결정적이다.(묵시16,20) 교회가 세상 속 하느님의 정의를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권태로운 타협이나 눈치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고, 저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기대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세상이라는 곳은 견고한 시스템과 복잡한 사상들이 얽혀 있는 곳이라 어느 하나도 쉬이 돌아서거나 변화되긴 힘들다. 21절에 엄청난 우박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박의 무게가 한 탈렌트인데, 26~36kg의 무게다. 이 무게는 로마군이 쏘아 올린 투석기에 담긴 돌의 무게와 일치한다. 재앙 묘사는 종말의 의미 아닌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세상에 당신의 섭리 펼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담긴 표현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할 때 쏘아 올린 그 투석기의 돌이 한 예다. 유다 사회는 로마의 그러한 군사적 행동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는 때 여전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박이라는 재앙을 로마 군대의 투석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재앙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사람들의 모독이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므로 사람들의 죄악이 그만큼 독하고 무겁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엔 성급하다. 큰 도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우박이 매섭게 이 땅 위에 떨어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 익숙해져 있고, 익숙한 만큼 변화를 싫어한다.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도 온 나라가 갑론을박의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요한 묵시록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특정 불의나 구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이어지는 17장부터 바빌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그것은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었고, 로마가 유독 잘못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뜻을 반한다고 여긴 하나의 ‘해석’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익숙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익숙해서 다른 것과 낯선 것에 귀와 마음을 닫고 있는 일들 말이다. 가까이는 내 이익을 위해, 멀리는 거대 담론을 무턱대고 수용한 무지하고 성급한 사상들을 위해 타인과 그의 다름을 무작정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완고한가, 유연한가. 요한 묵시록이 끝나기 전에, 우린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말씀묵상]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오늘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노력과 공덕만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기도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인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인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의미와 지향을 새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을 알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탓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희로애락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남아를 선호하고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지만, 주된 요지는 자신이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 또한 그런 미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욥은 자신의 희망을 바꿉니다. 구원자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살갗이 벗겨져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겠다는 희망과 믿음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학교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후회도 모두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어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고 나이 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고 노년과 죽음은 결실과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허무와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만 희망을 걸고 집착하지 않지만, 세상의 가치는 오히려 믿는 이에게 훨씬 큽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만날 희망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부와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는 세상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이 희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운 저주가 아니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 희망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 8-9)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신자가 되어 가치있는 삶을 산 노예 오네시모스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베르디(Giuseppe Verdi)의 초기 오페라 <나부코(Nabucco)>에 나오는 유명한 합창곡이다. 나부코는 구약성경의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가리키며, 이 합창은 유다인들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노역을 하며 잃어버린 조국 예루살렘을 그리워해 부르는 노래다.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이 노역 중 부르는 이 장면은 오페라의 압권으로 꼽힌다. 노예란 자유 없이 주인의 지배 아래 놓인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뜻하며, 본래 경멸적 의미가 담긴 단어다. 다만 유다 사회에서 유다인 노예의 법적 지위는 외국 노예와 크게 달랐다. 특히 유다인 노예는 대개 6년이 지나면 아무런 보상 없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탈출 21,2 참조) ‘히브리인 노예를 산 사람은 상전을 산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노예는 인권을 기대하기 어려운 힘없는 존재였고, 주인에게 노예는 재산이자 생사여탈권의 대상이었다. ‘유익하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오네시모스는 콜로새 필레몬의 집에서 일하던 노예였다. 당시 노예들은 대개 전쟁 포로나 노예상에게 팔려 온 사람들이었고, 노예제도는 고대사회의 산업 활동을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오네시모스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 자라면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견디기 어려웠고 노예 신분을 벗어나길 갈망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주인 필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었고, 사도 바오로를 통해 가족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집을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줄 만큼 신앙에 열정적이었다. 바오로와도 친구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오네시모스는 마침내 주인에게서 도망쳤다. 그 시대에는 도망 노예가 주인의 물건을 훔치거나 가족을 해치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오네시모스는 주인의 재산을 훔친 뒤, 당시 세상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향했다. 그는 로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로마에 있던 오네시모스는 감옥에 수감 중이던 바오로를 운명처럼 만나 그의 말에 깊이 감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인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하자고 권했다. 오네시모스는 이에 훌륭히 협력하며 바오로를 도왔다. 오네시모스의 사정을 들은 바오로는 편지를 써 주며 필레몬에게 돌아가라고 권했다. 필레몬은 편지를 손에 들고 돌아온 오네시모스를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맞이했다. 신앙을 통해 오네시모스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과거에는 어둡고 쓸모없어 도망치고만 싶던 삶이었지만, 이제는 참으로 ‘쓸모 있고 유익한’ 인생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넘치는 세상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고통이란 행복(묵시 16,10-16)

다섯째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는다. 대접은 정확히 짐승의 중심부를 향한다. 짐승의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는 ‘왕좌’를 향하고 있어서 짐승의 영향력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게 다섯 번째 대접이다. 그 결과 짐승의 나라는 어두워졌다. 탈출기 10장 22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완고함에 어둠이라는 재앙을 내리셨다. 이집트는 태앙신 ‘라(Ra)’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어둠이 내린 이집트는 하느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 무너진 것이다. 지혜서는 어둠을 가리켜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은유로 소개한다.(지혜 17,2 참조) 이 단절을 요한 묵시록은 혀를 깨물 정도의 고통으로 다시 해석한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인간에게 고통이 된다는 도식은 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단절의 고통을 자주 언급한다.(마태 8,12; 22,13; 25,30 참조)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유다서에서도 ‘어둠’의 자리는 배교자들이 심판받는 자리로 제시되기도 한다.(2베드 2,17; 유다 1,13 참조)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고통이 닥쳐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은 불편함과 고통을 피하고 싶도록 작동할 터인데,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회개가 삶의 방향을 돌이켜 멀어진 것을 다시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전환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이 고통이지만 다시 하느님께 향하는 방향의 전환이 더더욱 싫은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일 때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고통의 자리를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넘쳐나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힘들어도 그것을 놓아 버릴 때 오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상실감이 회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혜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타를 받고도 훈계로 삼지 않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신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들로 징벌을 받자 그것들에게 화가 난 저들은 사실을 보고서야 자기들이 전에 알아 모시기를 거부하던 그분께서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가장 무거운 단죄를 받았습니다.“(지혜 12,26-27) 고통과 질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운명이 징벌과 단죄라는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확연하다. 그럼에도 요한 묵시록의 ‘사람들’은 다만 하느님을 모독할 뿐이다. 고통은 더 이상 회개를 위한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회개에로의 초대는 계속되나, 그 초대에 응답하는 건, 하느님의 재앙이나 그로 인한 고통으로도 가능한 게 아니다. 고통의 재앙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여섯 번째 대접은 이제 유프라테스강으로 향한다. 유프라테스강은 말라버린다. 그 강이 마르는 것과 해 돋는 쪽 임금들의 길이 나는 것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 제국을 제압하는 역사적 사건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물을 마르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심판으로 바빌론은 영원히 황폐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의 묘사다.(예레 28,3; 50,39-40 참조) 바빌론은 하느님을 거역한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세상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실행되어 회개를 촉구한다. 고통에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은 그 위대한 바빌론마저 무너뜨리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끝내 항복할 것인가. 13절은 더 이상 사람들의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악의 세력 그 자체가 전면에 나선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나타난다. 유다 사회는 개구리 형상을 기만적인 헛된 소리, 파괴와 혼란의 울음 등으로 이해해 왔다. 그렇다면, 악을 가리키는 용과 짐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헛된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은 온 세계 임금들을 모아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려 한다. 전투는 ‘저 중대한 날’에 펼쳐지는 것으로, 구약의 즈카르야가 말하는 ‘종말론적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즈카 12~14장; 스바 3장 참조) 종말론적 전투는 하느님의 승리로 끝이 나며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난다고 소개한다.(묵시 19,11-21 참조) 악의 세력 그것은 그리 힘센 것이 아니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다. 악의 세력에 기대어 완고해진 사람들의 회개 문제도 그 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우린 유추할 수 있다. 완고함의 끝은 사람들에게 허무하다. 끝내 버리지 못해 움켜쥔 것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야 마는가. 깨어 있어 의로움 지키는 일 우리가 희망하고 촉구할 자세 신앙 안에 고통 겪는 신자에게 하느님은 ‘행복’을 선물하실 것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하고 스스로 촉구해야 할 자세는 15절의 성도들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자세는 ‘깨어 있어 제 옷을 지키는 일’이다.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가리키고 벌거벗음은 우상숭배로 드러나는 수치를 말한다.(에제 16장; 나훔 3,5; 이사 20,4 참조) 이런 권고의 말은 악이나 그의 세력에 맞서는 대립적 자세를 부추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떻든 제 삶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라는 격려에 가깝다.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묵시록은 더러운 영이 세상 임금들을 모은 곳이 ‘하르마게돈’이라고 한다. ‘므기또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르마게돈’은 의인들이 악한 왕국에 의해 공격받던 곳이고(판관 5,19 참조) 거짓 예언자들이 꺾인 곳이며(1열왕 18장 참조) 이스라엘의 슬픔이 가득한 곳으로(2열왕 23,29 참조) 이해되어 왔다. ‘므기또의 산’은 그러므로 또다시 한번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그분이 공격받는 곳을 상징한다. 어떤 공격이든, 어떤 위협이든 성도들은 제 옷을 지켜야 한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재앙의 고통과 다르다. 제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면서 겪는 고통은 거룩하고 보람되며 의미가 있다. 제 완고함에서 비롯된 재앙의 고통은 스스로 옥죄는 자기 파멸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은 겪고 나면 자신이 사라진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겪을수록 자신이 단단해진다. 하느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행복이란 선물을 주신다. 그 행복은 설익은 감정의 환희가 아니라 억척스럽게 달릴 길을 달리고 난 후 내쉬는 가쁘고 깊은 호흡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분명하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린 행복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능력

몇 년 전 한 선배 신부님의 소개로 명동 근처의 한 치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아주 성실한 분으로, 단골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대하며 항상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흘러도 늘 한결같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실 난 치과 공포증이 있어 치료도 계속 미루곤 했었다. 어느 날 잇몸 치료를 위해 의자에 누워 얼굴 가리개를 덮고 입 주변만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이 오시더니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신부님!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 연세가 많은 어르신의 위험한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안수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내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나는 얼굴 가리개를 한 채로 누워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수술 부위 근처에 신경이 아주 가까이 있어 많이 걱정되었다고 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난 뒤, 그는 밝은 얼굴로 “안수 덕분에 수술이 아주 잘되었다”고 웃었다. 안수는 손을 얹어 축복을 전하는 행위로, 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다른 이들에게 성령을 전할 때도 안수를 했다. 최근 사도행전을 읽다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례까지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안수하는 장면이 새롭게 다가왔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5-17)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사도들의 안수 후 비로소 하느님의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여러 성사에서 안수가 행해진다. 이때 손을 얹어 기도하는 안수 동작은 악의 세력을 쫓고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위한 축성과 거룩한 권능을 전수한다는 표지가 된다. 따라서 안수는 하느님의 성령이 교회가 선발한 이들에게 직무를 수행할 합당한 능력을 수여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때 안수를 받았다. 그 안수는 교회 안에서 당시 사도들이 믿는 이에게 했던 안수와 똑같은 효력과 의미를 지닌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몸과 마음이 병든 이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기적과 치유를 쉽게 체험하지 못할까? 그 답은 성경 속에 있다.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19-20) 그렇다. 성령을 받았다고 만사가 다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하며 믿음을 크게 하고 단단히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30주일

‘묵주 기도 성월’이요, ‘전교의 달’인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며칠을 지내면 11월 ‘위령 성월’을 맞이합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라고 말씀하면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도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살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고백 말씀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묵주 기도 성월’을 되돌아봅니다.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그리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또한 ‘위령 성월’ 동안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그때를 준비하는 시간을 보낼 결심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신을 굳세게 해 주셨기’(2티모 4,17 참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의 삶의 태도, 삶의 모습에 대해 복음은 일깨워줍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질이나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으며, 세금을 포탈하거나 착복하지도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다면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 칭찬받을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사람은 이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삶을 살아왔던 바리사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그 세금을 포탈하고 착복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바리사이일까요, 아니면 세리일까요? 우리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태도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는 혼잣말로 기도를 합니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겸손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꼿꼿이 서서’(루카 18,11 참조) 기도를 합니다. 더욱이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났습니다’(루카 18,11-12 참조)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심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랑을 늘어놓고 싶어 합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루카 18,13 참조)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낸 채 자기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아룁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진솔히 자기 성찰을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잘 걸려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이고,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자신을 더 뛰어난 존재로 여겨 잘난 척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경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라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데 너는 왜 못하니?’라는 판단과 단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바리사이와 세리 중 누구의 삶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길에 있어서는 바리사이처럼 해야겠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세리처럼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었다면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로 보내주신 누군가가 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협력자를 떠올릴 수 있을 때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높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신부(아우구스티노·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대접의 호소(묵시 16,1-9)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을 두고 잘못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징벌이나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로 시작한다. 구약성경 도처에서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 것이 ‘큰 목소리’(시편 69,25; 예레 10,25; 42,18; 44,6 참조)다. 하느님의 개입이 재앙으로만 읽히는 건 슬픈 일이다. 일곱 대접이 쏟아져 벌어지는 현상이 참혹할지라도, 그 재앙이 가리키는 바가 이 땅의 멸절이나 파괴라는 사실로만 읽힌다면,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폭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건 참 슬픈 일이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이 그렇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사고에 갇혀 해석될 때가 많다. 잘못하면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잘 살았다 싶으면 하느님으로부터 큰 상을 당연한 듯 기대하는 신앙은 얄팍한 상술(商術)과 다르지 않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것이 인간의 악행에 따른 결과론적 징벌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판단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 55,8 참조) 첫 번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에게 고약한 종기가 생겼다고 전한다. 탈출기의 재앙과 닮아있는 서술이다.(탈출 9,8 이하 참조) 탈출기의 재앙은 재앙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알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재앙의 적확한 표적은 파라오의 완고함이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 그러니까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재앙이 내린다. 그들은 하느님을 싫어하거나 거부해서 재앙의 대상이 된 게 아니다. 자신들이 바라보고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에 열심한 이들이어서 그들에게 하느님은 부수적인 존재였고 좋거나 싫어할 가치 부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요한 묵시록의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완고함은 하느님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일곱 대접으로 시작되는 재앙의 서술에 대해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이 무엇이냐고, 그 구원과 생명을 거부한 탓이 재앙으로 서술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히 하느님께 등 돌린 이들에게 죄와 벌이 떨어져 아픔과 고통이 그들을 덮쳤다는 식의 가볍고 무지한 해석에 더 이상 붙들려 있지 말아야 한다. 사실 재앙의 서술은 묵시 문학적 장치이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봤듯이 하느님의 어좌와 어린양의 자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속량되는 자리였고, 7장의 십사만 사천은 한계가 없는 무한대의 구원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자리는 제한이나 한계, 조건이나 자질의 정도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탈출기의 재앙도, 요한 묵시록의 재앙도 잘못 살거나, 실수하거나, 부족하거나, 게으른 이들을 탓하며 징계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 제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이 너무나 옳고 분명한 것이라 단정 지은 채, 이웃과 세상에 닫혀 있는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려 유연하게 만드는 도구가 재앙이란 것이다. 탈출기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탈출 7,13; 8,15.32; 9,7.12; 10,20.27; 11,10; 14,8 참조) 탈출기든, 요한 묵시록이든 닫힌 마음을 여는 일에 재앙의 서사는 그 수준이 원시적이고 투박한 것이나, 그럼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재앙은 그러므로 징벌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호소였다. 둘째 천사와 셋째 천사의 대접도 탈출기의 재앙과 엇비슷하다.(탈출 7,17-21 참조) 바다와 강이 핏빛으로 물드는 재앙은 물을 주관하는 천사를 통해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묵시 16,5-6 참조) 주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라는 것, 그리고 재앙이 마땅한 것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이 피를 쏟았기 때문이라는 것.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 16장 5절부터 6절까지의 이 말씀이 제단 아래 영혼들이 바랐던 ‘피의 복수’(묵시 6,10 참조)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들이 마시는 이른바 복수의 피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고통과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인가. 다만 우리는 6절과 7절의 외침이 하나의 전례적 찬가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를 흘리는 현실은 피를 통한 복수로 해결되지 않았다.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현실 안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고 그 피에 대한 복수는 요원한 것이었다. 재앙, 징벌 아닌 구원의 호소 자기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과 이웃 배척하는 자세를 부드럽고 연하게 만드는 도구 다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전례적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 그것 하나만 갈망할 뿐이었다. 피 흘리는 현실 속 실체적 징벌과 심판을 기대하기보다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신앙적 결기가 전례적 찬가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되어 마땅합니다”(묵시 16,6)라는 외침은 주님을 위해 흘린 피는 여전히 흘리고 있고 그 피에 대한 대가는 여전히 요원한 것이라는 현실을 끝내 받아들이는 외침이다. 그러므로 어떤 피 흘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신앙의 마땅함은 늘 그렇게 현실을 이겨내고야 만다. 사실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8절에 이르러 네 번째 대접은 해의 뜨거운 열기로 사람들이 타 버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세상은 불에 타도 회개하지 않는다. 징벌이 내려져도 회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파라오가 그랬고,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 그랬고, 오늘날 우리마저 그럴 것이다. 제 지식과 신념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만큼, 우리는 얼마간 완고하고 완고한 만큼, 세상과 이웃에 배타적일 것이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은 세상 모든 이에게 향해 있을진대, 우리는 가끔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도덕 윤리로 세상을 가르치려 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거친 삶에 대해선 거리낌을 가지고 세상에 비켜서서 무릉도원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할 때가 많다. 잘못 사는 것이 독한 게 아니라 잘 산다고 여기는 그 완고함이 참으로 독한 것이다. 재앙의 서사는 그래서 더 독해지고 더 참혹해야 한다. 아직 세 개의 대접이 남아 있다. 우린 아직 회개해야 할 이유가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과 따듯한 대화로 구원받은 사마리아 여인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스탕달(마리앙리 벨, 1783~1842)은 변화와 혼란이 극심한 시대에 살았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부유했지만 보수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자유롭고 계몽주의자였던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1800년 나폴레옹 군대에 입대해 이탈리아 원정군 장교로 이탈리아에 가면서 예술과 문화, 특히 문학과 음악, 미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는 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는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고 보수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직에서 점차 멀어져 문학 활동에 몰두하였다. 1810년대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문학과 미술, 음악에 관한 평론을 발표하였고 ‘스탕달’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애정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을 힘껏 사랑했던 경험의 덕택이라고 고백했다. 남에게 정성껏 사랑을 베풀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도 넓고 따뜻해지기에 마음도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더욱 값지고 보람차다. 그런데 사랑과 호의를 받는 것도 경험이 없거나 상처가 많으면 힘들어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일행과 함께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다 지쳐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대표적이다. 당시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과 대화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을 청한다. 그래서 여인은 “당신은 유다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막 지방에서 아침나절이 아닌 한참 더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분명히 사람의 눈을 일부러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사마리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마리아 지방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기원전 721년경 앗시리아가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식민지정책으로 잡혼을 실시했다. 그래서 사마리아 지역은 잡혼으로 민족 간의 피가 섞이게 된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게 되었고, 원수지간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만약 당신이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오”라며 말을 이어간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그녀는 솔깃해졌다. 예수님은 그녀가 혼인을 다섯 번이나 했고, 지금 함께하는 사람도 남편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녀는 단번에 자신의 과거를 정확히 알아맞히자 깜짝 놀라며 예수님을 분명히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이야기를 나눈 것에 감동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이 싫고 무서워서 일부러 피했던 그 여인을 한 인간으로 대해주셨다. 편견 없이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네고 소통하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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