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길을 걷느라 지쳐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요한 4,6 참조)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겸손을 느끼듯이, 주님께서 한낮에 우물가에 계셨던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온 죄 많은 여인을 만나기 위한 치밀한 자비로 보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8)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하고 반문하지만, 사실 그녀에게 물을 청하신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목말라하신 것입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5,2)라는 제1독서처럼, 주님은 갈증을 해소하려 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 안에 오히려 생명의 물을 부어주기 위해 대화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성령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신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라는 것은 우물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성령의 은총은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예지력을 발휘해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요한 4,16)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솔직하게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함께 사는 남편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아직 참된 신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헛된 우상이나 집착 속에 살고 있음을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의 수치를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참회로 이끌기 위해 그녀의 과거를 비추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바라보며 저희 조상들은 산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선생님네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예배의 장소 ‘그리짐 산’에 집착했고, 유다인은 전통 곧 ‘예루살렘’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함을 선언하십니다. 영 안에서라는 것은 성령의 비추심을 뜻하며, ‘진리 안에서’라는 것은 그림자인 구약의 제사를 넘어 실체 그리스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의 오심을 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바로 모세가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탈출 17,6) 했던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요한 4,27-30 참조)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 여인이 이제 육체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물동이를 버린 것은 더 소중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복음의 기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만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즉시 주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요한 4,31)하고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몸의 음식을 걱정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구원’에 굶주려 계셨습니다. 주님께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길 잃고 지친 영혼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영성은 ‘목마름의 전환’입니다. 세상의 우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우물물이지만, 주님의 우물은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우리도 참된 생명수를 맛본 사람이 됩시다. 과거의 물동이(집착)를 미련 없이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전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모두 주님과 영적으로 대화하는 새로운 사마리아 여인 곧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말씀의 우물] 속죄에 대하여

레위기의 핵심 내용은 16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직 개별 고해성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속죄일(贖罪日, 히브리어 욤 키푸르), 속죄 예식 이야기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질러진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부정은 물론, 백성 전체의 부정을 씻어주는 정화 예식의 날이 거행됩니다. 이 속죄일 대정화 전례는 에즈라의 개혁 이후(기원전 4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해마다 한 번씩 욤 키푸르를 지내게 되는데 차츰 그날을 더욱 중요한 날로 여기게 되어 욤 키푸르 대신에 그냥 ‘날(욤)’이라고만 부르게 됩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산모의 정결례, 악성 피부병과 환자의 정결례 등 정결과 부정에 대한 긴 가르침(레위기 11~16장 참조) 끝에 가서 이스라엘의 대축일, 속죄의 날 예식이 나오며, 이 속죄일은 이스라엘 해방의 날이자 대정화의 날, 곧 대축일로 자리 잡습니다. 부정한 이가 정화되어 성소에, 나아가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부정에서 풀려나, 다시금 영원하신 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속죄의 전례는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대축제로 굳건히 자리 잡습니다. 특히 ‘속죄 염소’에 관한 전례 의식은 오늘날 우리 눈에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론은 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는데, 제비 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제비는 아자젤(불모지를 떠도는 귀신)을 위한 것이다.”(레위 16,8) 주님을 위한 제비(염소)는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데 쓰입니다.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서,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위와 속죄판 앞에 뿌린다.”(레위 16,15) 다음은 불모지를 휘젓고 다니는 귀신 아자젤을 위한 예식의 주요 장면입니다. “아론은 살려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레위 16,21-22) 사실 이와 비슷한 의식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문화권에서도 나타납니다. 흔히 죄와 부정을 어떤 생명체나 물건 위에 전가하거나 아니면 그 생명체나 물건에 뒤집어씌워서 아예 없애버리는 방식입니다. 이는 우리 모든 인간 내면에 들어있는 죄의식에서 생겨난 정화 예식, 또는 속죄 예식으로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 내면 한쪽에 서려 있는 죄의식 또는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늘 치유와 화해를 목말라합니다. 속죄일 대정화 전례의 주요 예식은 산 채로 대기시켜 둔 염소에 두 손을 얹음으로써 백성의 죄를 그 희생 염소에게 온전히 전이시켜, 이 희생 염소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멀리 광야로 가져다 버리도록 하는 예식입니다. 바오로의 의화론(로마 3,21-26 참조) 안에 레위기 16장의 속죄 예식이 깊이 뿌리 박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로마 3,25)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2주일

오늘 마태오복음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이때 복음에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베드로가 보니, 모세와 엘리야가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마태 17,3 참조)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거룩한 신성이 발현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는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요? 그들과 예수님의 변모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건 단지 그들이 구약을 대표하는 위대한 예언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모세를 참 예언자로(신명 18,15 참조), 엘리야를 다시 올 예언자로(말라 3,23 참조)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실존적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깊은 시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을 체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들 삶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갖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인 일로 파라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미디안 땅으로 피신하였고, 그 광야에서 양 떼를 치다가 호렙산으로 올라가게 되지요. 그리고 그곳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탈출 3,1-6 참조)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을 죽인 일로 이제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광야로 나갔고, 거기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느님께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던 그 역시 호렙산으로 가게 되고, 그곳 동굴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1열왕 19,1-18 참조) 모세와 엘리야 모두 쫓기는 신세였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어디론가 피신하려 하였을 때, 다시 말해, 극한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야 비로소 하느님을 만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두 사람은 모두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었고, 그들 응답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을 향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야말로 몸소 삶의 초월적 변화를 체험한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변모’란 꼭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거룩한 신성과 마주하는 한, 우리의 삶도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증거하는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인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비참한 인간 존재를 변화시켜 주는, 실존적 변모의 원천임을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그러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함 속에서 거룩한 자기 현존을 드러내심으로써 인간을 새로운 소명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초대하십니다. 절망에 빠진 우리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어, 쓰러진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를 이끄시는 능력이며, 새로운 삶을 향해 오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 초대와 부르심에 온 존재를 던져 응답할 때야 비로소 참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이 ‘변모’라는 의미로 사용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는 단순한 ‘변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월적(메타) 존재가 인간 실존을 변화하게(모르포오) 한다는 뜻입니다. 하얗게 빛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해 주는 주님의 ‘현존’ 그 자체입니다. 빛나는 그분의 현존 안에서 우리도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그분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 새로움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변모했다면, 그건 분명히 그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8면

[말씀의 우물] 연옥은 무엇입니까?

‘연옥(Purgatorium)’은 본디 라틴어 ‘Purgatio(정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연옥 본연의 의미는 정화하는 곳 또는 정화 과정을 뜻합니다. 갇혀 있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지난날 나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마음 아파하며, 주님께 또 이웃에게 저지른 거짓, 교만, 배반 등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속죄하는 정화 과정으로 보면 연옥에 대한 이해가 보다 수월할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이자 사제인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연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만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일생 사랑하시던 그 선하심과 사랑의 척도를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 우리의 독선, 무정함, 냉혹함, 이기주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평생 쌓아 올린 모든 자기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감싸고 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 우리 앞에서 찬란히 빛나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본디 존재했어야 할 참모습과 실제로 존재했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게 될 것이다. 심판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연옥이다.”(「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44~45쪽, 이석재·신교선 신부 공역) 그때 비로소 나는 삐뚤어지고 일그러진 생전의 내 모습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며 우리가 일컫는 연옥, 곧 정화 과정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 나그네 살이 하는 동안, 욕심과 위선 등으로 일그러진 실제의 우리 모습과 동시에, 한없이 크신 주님 자비와 선하심과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로핑크는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각자의 죽음에서 나는 나 홀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했던 모든 이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내가 함께했던 부모님과 형제자매, 배우자와 가족, 친척과 친구, 내가 돌보던 이들, 나를 위해주던 분들 모두가 마치 거미줄처럼 엮여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을 통하여 우리 영혼만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점을 사도 바오로가 분명히 밝혀줍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2) 로핑크는 이어갑니다. “죽음에서 ‘육신과 영혼’과 함께한 인간 전체가, 곧 자신의 온 생애와 더불어 자신의 세계와 함께 자기 생애의 고유한 자기 업적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간다.”(「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54쪽) 이처럼 우리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천상 영혼과 천상 육신으로 부활하여 천상에 걸맞은 지복직관의 세계에서 주님을 뵙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주님 품 안에서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선조도 만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도움이 되어준 모든 이들,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게(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주었던 분들, 이웃과 이웃이 되어준 나라와 민족까지도 만나게 되어 다 함께 천상 축제에 참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8면

[말씀의 우물] 죽음 후에는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이가 묻습니다. “죽은 육신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부활한 사람 모습은 어떠한가? 흔히 말하는 연옥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이들은, 마치 윤회설을 믿는 듯, 다음 생은 좀 다르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이 세상에 다시 오는 다음 생은 실상 없습니다. 영원한 행복(구원) 아니면 어둠이 뒤따를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주 선명한 답을 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죽은 후 부활한 사람의 모습을 세상 언어로 상세히 표현해 내기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서 ‘부활한 사람’ 모습을 찾아보는 일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는 구절을 꼽으라면 다음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사도는 죽은 이들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4) 사도는 설명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첫 인간)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이제 창조의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지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 새로운 창조(creatio nova) 등입니다. 지속적인 창조는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피조물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을 이릅니다. 새로운 창조란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신비의 영역을 일컫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한(새로 창조된) 육체, 곧 주님의 자녀들이 도달하여 누리게 될 천상 신비의 모습을 이 세상의 육체와 대조시킵니다. 물질적이라 늙어가고 병드는 생로병사의 테두리에 갇혀 살아가는 가련한 육체가 있듯이, 천상 신비의 세계에 속해 영적이고 영광스러운 육체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늘에 속한 몸체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체들도 있습니다.”(1코린 15,40) 묵시록 저자 요한은 구원받은 성인들이 천상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명쾌하게 전해줍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3-4)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흔히 사람들은 죽은 후에 겪게 될 연옥을 시·공간의 틀에서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마치고 죽은 다음 맞이하게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6면

[말씀묵상] 연중 제6주일

호주의 간병인 브로니 웨어의 책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에는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일만 열심히 했다). 3)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많은 것을 억누르며 살았다). 4) 친구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그때의 친구가 보고 싶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큰 집에 살거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과연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게 될까요? 그보다 생각, 말과 행동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 전체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후회 많은 삶이 아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정리한 관습적인 조문의 수는 모두 613개(긍정 명령 248개, 금지 명령 365개)입니다.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깜짝 놀라고, 어쩌면 불가능한 말로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살인의 뿌리가 되는 성내고(내적 감정), 바보라고 부르며(언어 폭력), 멍청이라고 하는(인격 모독) 행위까지 살인의 범주에 포함하십니다. 가장 거룩한 행위인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와의 화해에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간음 역시 물리적 행위 이전에, 마음속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여자를 소유의 대상이나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모세 율법은 이혼장을 써주도록 허락했지만, 배우자를 버리면 그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근원적 가르침을 전달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은 아예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평소의 말에 거짓이라는 악이 섞여 있다는 증거이기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만 잘 지키고 죄라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죄를 만드는 뿌리인 분노, 음욕, 거짓 마음 등을 마음에서 지우는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높은 기준을 우리 힘만으로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코린 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억압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의 자유인이 되라고 지금 초대하십니다. 그래도 지키기 힘든 주님의 계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자기 삶의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회복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행만 하시지 않습니다. 방랑벽이 있어서 오랫동안 많이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만, 어떤 여행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출발지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여행 중인 우리는 이 여행을 마치면 출발지인 고향으로, 즉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행 중인 지금 삶에서 계속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6면

[말씀의 우물] 룻은 누구입니까?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를 담은 룻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나의 하느님은 임금님)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나의 사랑스러움)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마흘론(질병)과 킬욘(허약)이었는데…”(룻 1,1-2) 모압 땅에 정착한 후 얼마 안 되어 남편 엘리멜렉과 사별한 나오미는 두 아들을 혼인시킵니다.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애정, 원기회복)이었다.”(룻 1,4) 10여 년이 지나자 두 아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차례로 세상을 떠나서, 결국 세 여인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서글픈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쓰라린 여인)라고 부르셔요. …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주셨답니다.”(룻 1,20-21)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는 1장에서 끝나고, 나머지 2장부터는 평화와 사랑과 축복이 넘쳐흐릅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펼쳐지는 보리와 밀 이삭줍기 이야기는 옛날 우리나라 논밭에서 펼쳐지던 이삭줍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나아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사이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면서 불행이 덮쳤다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는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룻기는 판관기 끝에 배치돼 역사서로 분류되지만, 내용을 보면 주님의 섭리를 깨우쳐주는 교훈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엿보게 해주는 장면을 봅니다. “주님께서 네가 행한 바를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룻 2,12) 룻기는 기원후 아가,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와 함께 유다인들의 다섯 주요 ‘축제 두루마리(축제오경)’ 중 하나로 오순절이나 수확절에 봉독되기도 했습니다.(레위 23,15-21; 신명 16,9-11; 사도 2,1 참조) 룻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세사의 한 획을 보게 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마태 1,5-6) 모압 여인 룻이 다윗 임금의 증조모가 되었기에 마태오복음 1장은 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길이는 짧지만 그 내용이 더없이 따뜻하고, 풍요롭고, 평화가 넘칩니다. 그 덕에, 언제부터인가 저는 룻기를 읽거나 떠올릴 적마다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솟아나는 행복함과 치유의 힘을 느낍니다. 세대 차이로 인한 갈등과 가족 간의 어려움을 겪는 분이 요즘 참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룻기를 천천히 읽어 보시기를 곧잘 권하곤 한답니다. 제가 느끼는 행복과 치유의 힘이 여러분께도 전해진다면 좋겠습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5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마태 5,13-16 참조) 소금은 녹아 사라질 때 제 역할을 하고, 빛은 드러날 때 세상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 사라짐과 드러남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라 부르신 말씀은, 구약에서 소금이 지닌 계약과 상징을 배경으로 합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곡식 제물에 소금을 치게 하십니다. 소금은 부패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 계약의 변치 않는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민수기 18장 19절과 역대기 하권 13장 5절에서 언급되는 “소금 계약”은 바로 이러한 ‘영원한 계약’을 의미합니다. 예언자 전통에서도 소금은 정화와 치유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에제키엘은 신생아를 소금으로 문질러 깨끗하게 하는 관습을 언급하고(에제 16,4 참조), 번제물에 소금을 뿌리는 정화 의식을 소개합니다.(43,24) 엘리사는 오염된 물을 소금으로 되살립니다.(2열왕 2,19-22 참조) 지혜문학에서 소금은 음식의 풍미를 더함으로써 먹는 기쁨과 삶의 의미를 더해 주는 상징입니다. 욥이 “간이 맞지 않은 것을 소금 없이 어찌 먹겠느냐?”(욥기 6,6 참조)라고 말하듯, 소금은 삶의 즐거움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신약에서도 확장되어 바오로도 “말이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한다”(콜로 4,6 참조)고 하며, 지혜롭고 분별 있는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소금이 뿌려진 땅이 황폐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습니다.(신명 29,22; 판관 9,45 참조) 소금은 생명을 보존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타내는 강렬한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상징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부르신 뜻이 분명해집니다. 소금은 자신을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질 때 제 역할을 하듯, 우리 역시 자기희생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세상을 보존하고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빛”의 상징은 성경에서 더욱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일으킵니다. 구약에서 빛은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의 표지입니다. 시편 27장 1절은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시편 119장 105절은 하느님의 말씀이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말씀의 빛, 주님의 빛을 받아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을 “민족들의 빛”(이사 42,6; 49,6)으로 세우셨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4)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바로 이 종의 사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신학이 잘 드러나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시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전히 어둠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둠 속에서 빛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빛이 어떤 삶을 통해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나누고, 떠도는 이들을 맞아들이며, 헐벗은 이들을 덮어주는 자비와 연대의 실천 속에서 주님께서는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올 것”(이사 58,8 참조)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복음 역시 우리의 “착한 행실”(마태 5,16)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참된 빛이 드러나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의 근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임을 밝힙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선포가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1코린 2,4)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때는 소금처럼 기꺼이 녹아 사라지고, 어둠을 밝혀야 할 때는 담대히 믿음의 빛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8면

[말씀의 우물] 예수님의 희년 선포

예수님의 희년 선포 내용은 신약성경에는 루카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 회당 예배 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은혜로운 해(희년)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 해로 지정됩니다.(레위 25,8-55 참조) 그러나 실제로 희년이 실행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만큼은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다음 구절이 희년의 기본 정신을 잘 설명해 줍니다. “땅은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우리의 모든 소유는 영원토록 우리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돌볼 뿐입니다. “너희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너희 곁에서 허덕이면, 너희는 거들어 주어야 한다.”(레위 25,35) 예수님께서는 희년 선포에 이어서 곧바로 그 희년의 성취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궁극적 희년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의 성취(완성)는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까? 예수님의 희년 선포에 뒤따른 루카복음 전체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희년의 성취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희년 선포의 첫 번째 성취는 회당에서 더러운 영(마귀)을 쫓아내시는 단락에서 잘 나타납니다.(루카 4,31-37 참조) 여러분은 희년이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저는 여러 교우분으로부터 희년을 맞이하여 ‘전대사’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 뜻깊은 은사도 좋지만, 희년의 참뜻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더욱 큰 축복이라고 봅니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먼저 매 일곱째 날이 안식일,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 그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이어지는 오십 번째 해를 희년으로 지내게 됩니다. 엿새에 걸쳐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일곱째 날은 쉬십니다. 그날은 거룩한 날로 주님을 기억하며 일손을 멈추고 쉬면서 그분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까지도 쉬도록 하고, 희년이 되면 땅도 되찾고 모두가 주님 축복 속에 새로 출발하도록 묶인 데서 풀려나는 거룩한 해방의 해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1코린 6,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궁극적 희년을 어떻게 맛볼 수 있습니까? 먼저 치유의 말씀 안에서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루카 17,21 참조; 마태 12,28 참조)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4주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참행복(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진짜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세상과 복음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외치는 행복에 부, 명예, 권력, 쾌락 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가난’이 단순히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라 ‘겸손’과 연결된다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칠죄종 첫 자리의 교만이 모든 죄의 시작이듯, 겸손은 모든 축복과 미덕의 기초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 안에 가득 찬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욕망을 비워내어, 그 빈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도 “주님을 찾아라.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스바 2,3)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겸손한 이, 곧 비천한 이들은 힘이 없어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마음을 두지 않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이 내 영혼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즉 영적인 가난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세상은 강함, 지식, 가문, 능력을 행복의 조건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하느님의 선택 기준이 세상과 정반대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수단 곧 권력이나 지혜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약한 이들을 통해 구원사업을 이루시는데, 그 이유는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나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내 자신의 부족함과 악함을 인정할 때(마음의 가난),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하는”(1코린 1,31) 이유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가톨릭의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쾌락과 소유욕을 절제하는 단계로서 욕망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자를 말합니다. 둘째,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로서 사랑으로 활동적인 삶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단계로서 관상적인 삶으로 인간 완성을 향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해를 받는 것은 이 모든 덕행의 시금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옛 율법의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은총의 새 법을 선포하시는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비워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강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온유하고 자비로워야 땅을 차지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행복을 원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 아는 것에서 실수가 발생합니다. 오늘 나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행복을 찾고 있나요? 사라져 버릴 세상의 위로일까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하느님의 약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의 힘과 욕망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를 하느님으로 채워보시지 않으실래요?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지금 여기서 맛보는 유일한 길입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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