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별 가족 동반 프로그램 ‘위로의 샘’ 여는 김명호 신부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김명호 신부(요셉·남미 이주민사목 담당)가 7월 19일부터 매주 토요일 2시간씩 수도회 부천 역곡동 본원에서 사별의 아픔을 겪는 이들을 동반하는 ‘위로의 샘’ 제2기 프로그램을 연다. 사별의 아픔을 몸소 경험한 김 신부가 직접 동행해 프로그램은 더욱 의미를 갖는다. 남미에서 10년간 선교한 김 신부는 선교 중이던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부모와 사별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팬데믹도 한창인데 아마존 정글에서 교통편을 쉽게 구할 수 없어 슬퍼하며 출국을 단념했다. 1년 후 어머니가 위독하자 새벽에 쪽배로 정글 강을 거슬러 지역 소도시에 도착했지만, 국제공항이 있는 수도로 가는 경비행기는 수리 중이었다. 임종 4일 뒤에야 한국에 닿은 김 신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는 염습 전 어머니께 병자 성유를 발라 드리는 것뿐이었다. 한국에서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와 상실감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깊이 잠든 적이 거의 없다”는 그의 말처럼, 부모의 부재는 검은 호수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하느님도 야속했어요. 선교사 소명을 처음으로 원망했을 만큼요. 선교 중이라는 핑계로 아무것도 못 해 드렸다는 후회는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죠.” 우울증까지 앓던 김 신부에게 힘을 준 건 함께하는 이들이었다. 김 신부는 아버지이자 형님, 오랜 친구 같은 ‘아버지 신부님’ 최종수(윤호 요셉·전주교구) 신부에게 내면을 털어놓으며 위로받았다. 2024년 사별 가족 동반자 양성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수료 직후 제1기 위로의 샘을 열게 된 것도, 사별 가족들을 오래 동반해 온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손 카리타스 수녀의 공감 어린 권유 덕분이었다. 공감의 치유력을 여실히 체험한 김 신부는 위로의 샘 참가자들이 유대감 위에 아픔을 나누고 스스로 치유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중 1박2일 야외 피정은 참가자들이 지난 삶의 시공간을 벗어나, 갇혔던 감정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시간이다. 섬마을에서 피정했던 제1기 위로의 샘 참가자들은 사별한 이에게 마음의 편지를 적어 종이배로 만들어 바다에 띄워 보내고,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모아 그의 이름을 쓰고 ‘나 잘살고 있을게, 지켜봐 줘, 사랑해’라고 바다를 향해 마음껏 외쳤다. 사별은 그 누구도 기꺼이 끌어안을 수는 없는 어둠이다. 그 속을 똑같이 걸었던 김 신부가 전하고자 하는 위로는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이자 시작”이라는 통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사무치는 건 사실 그의 현존이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할 만큼 내 삶에 나 자신보다도 깊게 들어와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을 부자유하게 하던 슬픔을, 같은 아픔을 지닌 이웃들과의 공감대를 통해 마음껏 표현해 보세요. 다 듣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위로의 빛을, 우리 함께 찾아 떠나요.” ※‘위로의 샘’ 신청 문의: 010-4518-9907 김명호 신부, 032-345-9907 수도회 부천 역곡동 본원

입력일 2025-07-09

[인터뷰]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감사패 받은 서봉흠 대표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성공적으로 마쳐 헌법재판소에 전달했지만 결국 헌법불합치가 돼 입법 공백이 이어진 현 상황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서울대교구 본당 생명분과 서봉흠(요셉·서울대교구 하계동본당) 교구 대표는 2017년 겨울, 주말마다 명동 거리에 나서 서명운동을 벌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 생애 명동성당에 가장 많이 갔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서명운동은 전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의 주도로 시작됐으며, 단 두 달여 만에 전국 교구의 참여 속에 성과를 이뤘다. “생명은 너무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갈수록 사명감이 생겨 10년 넘게 봉사 중입니다.” 서 대표는 처음부터 생명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당 봉사자로 시작했지만, 2011년 ‘생명 수호 담당’을 맡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화됐다. 이후 생명분과로 조직이 확대되며, 생명을 위한 기도와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산하 본당 생명분과는 현재 약 150개 본당에 설치돼 있으며, 500여 명의 봉사자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매일 생명 수호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반생명적 정책과 입법에 반대하며 ▲생명 전시회, ‘생명을 위한 40일 기도’, ‘참 생명 학교’ 등 다양한 교구 활동에 참여한다. 또 태아와 임산부 돌봄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서 대표는 생명 분야는 특히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중에서도 ‘생명분과 정기연수’와 ‘사목 위원 교육’의 필요성을 내세운 서 대표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봉사 분야보다 교육이 필수”라며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생명의 봉사자가 많이 양성돼야만 본당 생명 수호 운동이 확산될 수 있다”고 전했다. 물론 생명의 소중함은 지식과 교육만으로는 온전히 체감하기 어렵다. 서 대표 역시 생명의 끝자락에서 그 가치를 깊이 깨달은 경험이 있다. 12년 전 갑작스레 위암 판정을 받은 서 대표는 수술 경과가 좋아 안도했지만 5년 전 암이 재발해 또 한 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지만 당시 본당의 5000여 신자들과 사제, 봉사자들의 기도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서 대표는 “생명 봉사자로 활동한 덕분에, 또 앞으로 더욱 생명 운동에 투신하라고 하느님께서 큰 은총을 내려주신 것 같다”고 밝혔다. 생명위는 6월 29일 열린 설립 20주년 기념미사에서 그간 헌신해 온 서 대표에게 정순택 대주교 명의의 감사패를 전달했다. 서 대표는 이제 스무 살 청년이 된 생명위가 앞으로 펼치는 활발한 활동에도 힘닿는 데까지 계속 함께하고 싶다. “12년간 교구 대표를 맡으며 세상의 과학 기술과 법 제도의 생명 경시 풍조에 실망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진리에 희망을 두고 꾸준히 나아가겠습니다.”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21면

[인터뷰] 외과 의사에서 사제가 된 예수회 남정수 신부

“의대 재학 중 사제라는 꿈에 다시 불을 지피게 된 건 병원 원보에 나온 고(故) 이태석(요한) 신부님 이야기였어요. 당시 부제셨는데 사제 서품을 받으면 해외 선교를 나가 봉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외과 의사의 길을 걷다 예수회에 입회해 7월 2일 사제품을 받은 남정수(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어릴 적부터 성당의 신부님을 보며 성소를 꿈꿨지만 학업에 소질이 있는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기대가 컸고, 신학교에 가더라도 사제 성소에 대해 자신이 없어 결국 의대를 택했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직업이라 지원했다”며 “혹시라도 사제 성소를 다시 꿈꾸게 되면 의대에서 배운 지식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의대생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미혼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내 프로그램 ‘선택 주말’에 참가했다가 점차 성소에 대한 열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남 신부는 “예수님이 말 그대로 ‘역사적인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나의 구원을 위해서도 오셨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성소에 대한 고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대학병원 원보에 실린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였다. 남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으로 선교를 가고 싶다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접하고 크게 감명을 받아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며 “교구 사제 외에 수도 성소도 있다는 것을 신부님을 통해 알게 됐다”고 했다. 이태석 신부가 특별히 더 깊이 마음에 남은 이유는, 그가 바로 자신의 대학교 선배였기 때문이다. 남 신부는 “내가 성소를 꿈꿔왔는데, 같은 학교의 선배가 내가 열망했던 성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예수회에 입회해 내성적이면서도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하기를 좋아하는 수도자가 됐다. 물론 기대와는 다른 자신의 수도 생활에 실망한 적도 있었다. 남 신부는 “수도회 밖 외부 활동이 잦은 실습기 시절, 일반 신자들보다도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며 “몸이 고되다는 이유로 주일미사만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저 자신을 돌아보고 성체 앞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고 했다. 수도회 입회 전 대학병원에서 외과의로 근무했던 남 신부는 수도회 실습기 동안 또 다른 전문 분야인 내과를 전공했다. 외과에서 배울 수 있는 과정은 이미 마쳤고, 앞으로 사제로서 국내에서 활동할 때 내과 지식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아직은 제 사제 생활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 능력이 언젠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쓰이길 바랍니다.” 그는 사제로서 자신이 바라는 모습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예수회 사제로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의사라는 탤런트를 교회 안에서 활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환자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점을 먼저 물어보는 그런 수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발행일 2025-07-03 제3450호 21면

[인터뷰] 한국 카리타스 50주년 맞아 특별 공로상 수상한 최재선 전 사무국장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공감대’를 신자들 사이에 형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모금의 액수보다 중요한 건 나눔의 정신이 교회 안에 뿌리내리는 것이었죠.” 지난 6월 19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한국 카리타스 설립 50주년 기념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한 최재선(폴리카르포·85) 전 한국 카리타스 사무국장은 한국 카리타스의 전신인 인성회(仁成會) 창립 이전부터 2003년까지 30여 년 동안 한국교회 사회복지와 해외원조 사업의 기반을 닦고 성장시켜 온 주역이다. 미국 가톨릭교회 해외원조 기구인 가톨릭구제회(CRS) 한국지부에서 일하던 최 전 사무국장은 CRS가 1974년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당시 지부장이던 조지 캐롤 몬시뇰(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아 국제 카리타스 본부와의 연락을 주도하며 인성회 설립을 준비했다. 이듬해인 1975년 인성회가 창립되면서 그는 한국 카리타스 초창기 체계 구축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손을 거쳐 이뤄진 대표적인 사업들로는 ▲1977년부터 전개된 단식 자선 모금인 ‘사순절 운동’ ▲1993년 ‘해외원조 주일’이 제정되며 시작된 한국교회의 해외원조 ▲1995년부터 본격화된 대북 지원 사업 등이 있다. 이는 단순한 지원을 넘어, 한국교회 안에 ‘나눔’의 문화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사순절 운동의 표어는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자’였어요. 중요한 건 액수가 아니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죠. 그래서 흩어져 있던 자선·복지 단체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전국 단위 협의체도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 이전, 한국 사회는 가난과 정치적 억압 속에 놓여 있었고, 교회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외부 지원이 점차 줄어들면서 한국 카리타스는 스스로 모금하고 자원을 모아 도움이 필요한 국가와 지역에 나눔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전환해 갔다. “초기엔 걱정도 많았지만, 매번 기대 이상의 성금이 모였어요. 이를 통해 한국교회도 이제는 원조를 받는 데서 나아가, 나누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죠.” 그는 한국 카리타스가 지금도 지켜가는 핵심 가치로 ‘인간 존엄성 수호’를 꼽는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자극적으로 드러내어 모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 정신에도, 인권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교회를 다 팔아 도움을 준다 해도, 그것은 빈곤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정도일 뿐이에요. 중요한 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곁에 있을 가난한 이들, 그리고 그들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태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 역시 바로 이 연대에 있다고 강조했다. “하느님 아래 같은 자녀인 우리는, 이념과 정치, 국경을 넘어 서로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칩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 끝으로 그는 한국 카리타스의 설립 50주년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언제부턴가 도움의 손길이 끊긴 북한을 비롯해, 더 많은 가난한 세계 이웃에게 한국과 국제 카리타스 활동가들이 위로와 희망을 전할 수 있도록, 많은 분이 마음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1면

[인터뷰] 미수습 전사자 유해 발굴과 영원한 안식 위해 기도하는 이충호 할머니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갈 때마다, 어딘가 묻혀 있을 오빠의 유해를 하루라도 빨리 찾아 양지 바른 곳에 모셔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이충호(제노베파·93·수원교구 군포 용호본당) 할머니는 해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6·25전쟁 중 전사했지만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를 찾지 못한 오빠 이종호 씨 영혼을 위해 더욱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오빠가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입교한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1950년 11월 26일, 강원도 양구·화천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나중에서야 듣게 됐지요.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것이 여전히 가슴 깊은 한으로 남아 있어요.” 이 할머니는 오빠의 유족이라고는 이제 자신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생각에 위패를 모신 국립서울현충원을 찾는다.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 아들이나 손자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꼭 발걸음을 옮긴다. “좁은 공간에 무려 10만4000여 명의 미수습 전사자 이름이 검은 오석에 빼곡히 적혀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전사자 유해를 발굴했다는 소식이나 수습한 유해가 최고의 예우 속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장면을 뉴스에서 접하면, 우리 오빠를 비롯해 수많은 미수습 전사자 유해도 하루 빨리 찾아 정성껏 비석을 세우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이 할머니는 미수습 전사자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섭섭함도 토로했다.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이 국립묘지에 찾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미수습 전자사 위패봉안관에 모셔진 분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혈육이 아니라고 이렇게 무관심해서는 안 되지요.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임에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와 사회가 더욱 합당한 예우를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21면

[인터뷰] 대구대교구 찾은 홍콩교구장 초우 추기경

홍콩교구장 초우사오얀 추기경(Chow Sau-yan, S.J.·周守仁·스테파노)이 6월 9일부터 11일까지 대구대교구를 방문했다. 초우 추기경의 방문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가 홍콩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본당(주임 김종호 요셉 신부) 견진성사를 위해 2024년 10월 홍콩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성사됐다. 대구대교구는 홍콩 한인본당에 1991년부터 전담 사제를 파견하고 있다. “조환길 대주교님께 ‘시노달리타스’를 한문으로 표기한 족자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홍콩교구와 대구대교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 걸어가는 좋은 관계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초우 추기경은 10일 오전 대구대교구청에서 교구 사제단과 환담하고 성모당에서 조 대주교와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이어 이틀에 걸쳐 교구 성직자묘지, 대구대교구 대신학교, 관덕정순교기념관, 가톨릭신문사, 대구가톨릭평화방송, 주교좌계산대성당, 대구가톨릭대학교 효성캠퍼스 등을 둘러봤다. “대구대교구의 114년 역사가 교구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님을 시작으로 지난 세월 동안 모든 교구 사제·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홍콩가톨릭교회 역사는 1841년 홍콩에 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시작됐다. 현재 홍콩교구 신자는 약 40만 명이다. 초우 추기경은 대구대교구의 사회복지와 교육 활동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홍콩교구 역시 사회복지와 교육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대교구 학교법인 선목학원에는 21개 교육기관과 병원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10개의 사회복지법인과 118개 사회복지시설·단체가 지역사회에서 활동 중이다. 초우 추기경은 특히 대구가톨릭대학교에 24개 국가 1787명의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으며, 그중 1177명이 중국 학생인 것에 놀라워했다. “이번 방문으로 많은 곳을 둘러보고 많은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대구대교구를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교류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초우 추기경은 예수회 소속으로, 2021년 홍콩교구장에 착좌했다. 2023년 9월 30일, 현 레오 14세 교황인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과 함께 추기경에 서임됐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1면

[인터뷰] (재)통합의료진흥원 신임 이사장 장병배 신부

6월 12일 재단법인 통합의료진흥원 제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장병배 신부(베드로·대구대교구 1대리구 교구장 대리)는 “환자 중심의 참다운 전인적 치료 실현이 ‘통합의료’의 시작이고 목적”이라며 “특이 질환뿐 아니라 감기부터 만성질환까지, 어떤 병이든 전인병원에서 치유(Healing)와 돌봄(Care)까지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통합의료진흥원은 현대의학과 한국전통의학을 융합한 신개념 의료모델인 통합의료를 연구, 진료, 교육하고 있다. 통합의료라는 개념과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한 통합의료진흥원은 양·한방이 조화롭게 융합된 환자 중심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자 2009년 대구가톨릭대학교의료원과 대구한의대학교의료원, 대구광역시가 손을 잡아 탄생했다. 통합의료진흥원의 연구 성과로 치료율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의료를 현실화하기 위해 2015년에는 ‘전인병원’(원장 추성훈 바오로 신부)을 대구 대명동에서 개원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장 신부는 지역민 특히 신자들조차 아직 대구대교구가 전인병원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통합의료진흥원과 전인병원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의 전인적 치료를 우리 삶 한가운데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인적 의료를, 사람들을 낫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배웁니다.” 통합의료진흥원은 지난 16년 동안 미국 하버드 암센터 등 세계 유수 의료기관들과 활발하게 연구와 정보 공유, 인적 교류 등을 하면서 미국 식품의약국(FDA) 신규 건강보조성분(NDI) 4건 인증, 국내외 다수 논문 발표, 국제회의 개최 등 성과를 거뒀다. 이 같은 성과는 지난 10년 동안 전인병원의 진료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장 신부는 전인병원이 많은 사람에게 암과 같은 난치병만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오해되는 것 같다며, 병의 경중(輕重)을 떠나 모든 환자에게 전인적 치유가 이뤄지도록 돕는 병원임을 강조했다. “전인병원의 치료 분야는, 암 환자에게 중요한 전인적 치료뿐 아니라, 의사와 한의사의 통합의료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재활치료에도 특화돼 있습니다. 당연히 일반 감기 환자분들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열린 병원입니다. 통합의료진흥원과 전인병원이 많은 분에게, 특히 그리스도의 전인적 치유를 믿는 신자분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합니다.”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21면

[인터뷰] ‘청년 자립 지원 쉐어하우스’로 아파트 기증한 김춘미 씨

지난 5월 중순,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가 ‘사회복지법인 안나의집’(대표 김하종 빈첸시오 신부, 이하 안나의집)의 청년 자립 지원 쉐어하우스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안나의집은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안정된 일상과 독립을 대비할 수 있도록 ‘쉐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공간은 안나의집이 경기도 곳곳에 운영하는 ‘쉐어하우스’ 가운데 열 번째 시설로,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김춘미(예수의 성녀 데레사·82·수원교구 분당구미동본당) 씨의 기증으로 가능해졌다. “20여 년을 남편과 함께 살아온 집이에요. 근처 호수공원을 자주 산책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집을 처분해 노후 자금으로 쓸 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이곳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김 씨가 증여한 아파트는 실면적 148㎡(45평) 이상으로, 방 네 개와 넓은 거실 등을 갖췄다. 이미 두 명의 청년이 입주해 직장생활을 하며 자립을 준비 중이다. 안나의집은 현재 단기쉼터, 중장기 쉼터, 그룹홈, 자립지원관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통해 청소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집이 있는 청년들이 한 달에 두 번 방문해 상담과 지원을 받는 형태, 집이 없는 청년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쉐어하우스’ 형태 등을 운영한다. 김 씨는 오래 전부터 안나의집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정기 후원도 이어왔다. 실버타운으로 이주하면서, 김하종 신부를 직접 만나 아파트 기증 의사를 밝혔다. “오랫동안 위기 청소년들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언젠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안나의집 홈페이지를 보면서 신부님이 청소년과 노숙인을 돌보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고,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깝다’, ‘아쉽다’는 생각은 없었을까. 김 씨는 "그런 섭섭함보다는 ‘내가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을 했구나 라는 기쁨이 더 크다”며 “신부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남편도 ’복 받을 거야'라는 말로 응원해 줬다”고 전했다. ‘쉐어하우스’는 김 씨의 세례명을 딴 ‘대 데레사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거실에 작은 팻말도 걸렸다. “예전 십자가와 성모상을 걸어두었던 곳에 자리한 팻말을 보니 참 기뻤다”는 그는 “하느님께서 ‘나누고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는 자부심이 조금 생겼다”고 했다. “어떤 청년이 들어와 살게 되든, 이 집에서 잘 지내며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행복하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면 좋겠어요.”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21면

[인터뷰] 노숙인 위한 목욕탕 ‘우리물터’서 25년간 봉사한 홍순용·조재순 부부

“봉사를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물터에서 봉사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서울대교구 남대문시장준본당 ‘우리물터’에서 25년 간 봉사해 온 홍순용(이냐시오)·조재순(클라라) 부부는 “노숙인 이용자들과 함께한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부는 지난 5월 21일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명의 감사패를 받았다. 우리물터는 노숙인, 쪽방촌 거주자 등이 목욕·빨래를 할 수 있도록 본당이 마련한 공간이다. 본당 초대 사목회장이었던 홍 씨는 본당 초대주임 이성원(베드로) 신부와 함께 우리물터 설립에 앞장섰다. 당시는 IMF 외환위기로 노숙인이 급증한 때였다. 성당 완공 후 “내적 성전을 세우자”는 이 신부의 제안에 홍 씨는 지하도에서 노숙인들을 직접 만나 식사나 방한도구 등을 전하며 노숙인을 위해 봉사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도움은 큰 힘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고, 모임을 구성해 지속적인 도움을 줄 방법을 고민해 마련한 곳이 우리물터다. “단 한 두 사람이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물터의 문을 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봉사합니다. 굉장히 어렵고 막막한 순간에도 일이 해결되는 걸 보며 ‘이건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남대문시장 신자들이 좋은 뜻으로 설립한 곳이었지만,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많은 노숙인이 모여들어 민원이 들어오고, 후원금과 봉사자 부족으로 운영 중단을 고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물터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왔다. 홍 씨 개인적으로도 가게 운영이 어려운 시기도 있었고, 암 투병도 했다. 그래도 그는 힘 닿는 대로 매주, 또 우리물터에 문제가 생기면 가게를 비우고서라도 찾아 봉사했다. 홍 씨가 그렇게 봉사에 매진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준 것이 아내 조 씨였다. 홍 씨 대신 가게를 지켜야했기에 우리물터 현장에 나설 수는 없었지만, 조 씨는 홍 씨가 봉사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런 노고에 감사패도 함께 받았다. 조 씨는 “처음에는 세상일은 뒷전으로 하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온전히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라며 “노숙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잘 대접하려는 남편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이 아들을 얼마나 예쁘게 생각하실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이용자들이 가족 같다는 느낌입니다. 힘들었던 순간들도 이용자들과 함께하면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봉사하면서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은, 참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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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프라도 수녀회 전 국제총장 마리 조 바리에르 수녀

프라도 수녀회 전 국제총장 마리 조 바리에르(Marie-Jo Barrier) 수녀가 프라도 한국 진출 50주년 기념 행사 참석을 위해 5월 24일부터 6월 9일까지 방한했다. 프랑스인 바리에르 수녀는 프라도 한국 진출 직후인 1978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며 프라도 영성을 널리 전파하고 프라도 수녀회 성장의 기틀을 다졌다. 한국교회 ‘노동사목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고(故) 올리비에 드 베랑제 주교(한국명 오영진)가 한국 프라도 사제회 발전의 선구자였다면, 바리에르 수녀는 한국 프라도 수녀회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바리에르 수녀는 “한국 프라도가 ‘파견된 고장 사람들의 생활 조건,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 그들의 기쁨과 갈망을 함께 나누는’(프라도 수녀회 회헌 202항) 영성을 한결같이 지켜왔기에 50주년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처지에서 함께했다는 게 저희 사도직의 특별함이에요. 우리는 설립 초기부터 각자 공장 일꾼, 파출부, 비닐하우스와 밭에서 땀 흘리는 삯일꾼이 되어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촌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활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내어놓고 같은 인간이 되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요.” 프라도 수녀회는 사제들과 달리 수도자로서 공동생활을 한다. 바리에르 수녀는 “그래서 오히려 제약 없이 가난한 이들과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공동체(수녀회)가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덕에, 구성원은 바뀌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도중에 두고 떠날 일이 없었다. 덕분에 한국 프라도 수녀회는 가난한 이들과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었다. 바리에르 수녀는 “마치 ‘옆집 아줌마’처럼 그들과 밀착해야만 가능한 사도직들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1994년에는 장애나 생활고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파출부’ 활동에 나섰다. 같은 해 서울의 낙후된 마을에서 시작한 ‘맛있는 것 해 먹는 모임’도 가난과 가정불화 등으로 방치된 청소년들을 집으로 초대해 몸과 마음의 굶주림 모두에서 벗어나게 해 준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바리에르 수녀는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만나 꽃처럼 활짝 피어날 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5월 27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열린 50주년 기념 미사에서 바리에르 수녀를 감동시킨 것도 성당을 가득 채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프라도 수녀회 회원들과 긴 세월 동고동락했던 노동자와 아이들, 가난과 아픔을 짊어진 이들이었다. “그날 한 자매님의 증언이 지금도 감동으로 다가와요. ‘계속 가난한 삶을 살더라도, 가난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제가 계속 가난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고백이었죠.” 바리에르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주체”라며 “그런 복음의 사도들과 일치해 살아가는 소중한 영성을 프라도 사제회와 프라도 수녀회, 프라도 여성 재속회 등 한국 프라도회 모든 가족이 앞으로도 소중히 간직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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