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보는 우리와 우리가 잃어가는 것

이번 주 내내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되고 있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중이다. 말라야대학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장 주변의 자판기에 한국의 라면은 한국어 상표 그대로 진열되어 있다.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외국 연구자들은 나에게 K-드라마, K-팝, K-푸드의 영향력을 들려준다. 이제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이리라 짐작하니, 생경하면서도 뿌듯하다. 그러나 이내 씁쓸하다. 그들이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세계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무거운 책임감도 느껴진다. 동시에 한국을 떠나기 전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우리나라의 고독사와 자살 문제가 오버랩된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위상을 누리는 시대에 정작 한국 사회 내부에서는 곪아가는 문제들이 있다. 타국에서 K-문화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경험하면서도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불편한 현실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이러한 문화적 성취 뒤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인간이 고립되고 생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는 현실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우리나라만 직면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국가의 정책이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춰질 때 겪는 문제는 이제 서구를 지나 아시아로 흘러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체제는 이제 세계의 기본 질서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한편으로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따라 일어나는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로고테라피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빅터 프랭클은 1960년대 미국의 한 강연에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젊은 세대는 영적 가치의 침식을 경험하고 있다”(The Feeling of Meaninglessness, 1967)고 말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물질이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영적 가치가 외면당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그 어떤 물질로도 채워지지 않는 실존적 공허를 경험하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선지자이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 떠오른다. 아마도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분의 외침이 여전히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는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인간 존엄성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 인간을 정치나 경제의 도구로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오히려 정치와 경제 등 그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가톨릭언론인협회 정기총회 미사,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1998년 3월 7일)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흥미롭게도 지금 참석하고 있는 이 국제학술대회에서도 윤리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후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기본 원리는 윤리에 기초할 수밖에 없음을 모두가 입을 모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바탕 중의 바탕은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데 있다. 이를 외면할 때 인간은 다른 인간의 존엄을 판단하려 들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너무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부한 말을 외면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선택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선택권의 확장은 인간의 존엄을 표방하며 자유를 개인의 욕망 실현으로만 이해하게 만든다. 즉 인간의 존엄이 진리와 분리되어, 자유는 절대화되고 인간의 존엄은 왜곡되어 이해된다. 그리고 시장경제 체제는 이를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누구인지 탐구하고 교육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를 실현할 것인가?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23면

생명의 문화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며 자랑스러운 한국을 이야기한다. 드라마, 영화, 음악, 게임, 웹툰 등 K-콘텐츠에 대한 인기는 서울 명동에만 나가봐도 실감할 정도다. 모든 단어에 ‘K’를 붙여서 이야기할 만큼 한국의 위상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드높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물어보던 외국인들도 이제는 그런 질문 대신 K-Pop의 아이돌 가수에 대한 궁금증을 이야기할 만큼, 어느새 한국은 세계인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나라가 됐다. 한국인들의 자유와 민주에 대한 열망 역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이른바 K-민주주의를 모든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고 비폭력 저항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한국 현대사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진심 자랑스러운 일이다. 지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80돌 기념 열병식이 평양에서 있었다. 열병식에서는 북한의 신형 무기들이 등장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20형’, 단거리 탄도 미사일인 극초음속 ‘화성-11마’, 무인 전술 공격기(자폭 드론) 발사대 등 엄청난 무력을 가진 살상 무기들이 공개되었다. 이를 바라보는 평양 시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어떤 적들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자랑스러운 조선의 기상이라며…. 한편 이에 질세라 연일 방송에서는 KF-21 전투기, K2 전차, 현무5 미사일, K-9 자주포, 한국형 극초음속 미사일 등 전쟁 무기의 탁월한 성능과 세계 곳곳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활약상을 커다란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과연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일인 것인가? 우리가 생산하고 수출하는 전쟁 무기가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살상의 도구로 쓰이는 일이 그렇게 감사할 일이어서 효자 품목이라고 추어올려도 되는 것일까? K-방산이 평화의 꽃이며 평화를 수출한다고 선전하지만, 결국 한국산 무기가 닿아 터지는 곳은 소중한 인명이 죽어가는 살상의 현장일 뿐이다. “무기 생산은 이미 알려진 대로 오늘날의 평화를 보장하는 계기가 된다고 그 정당성을 외치는 자들이 있으나, 결코 평화가 ‘무기라는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한 국가가 무기를 보강하면, 다른 국가들도 더욱 크게 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 … 그 결과 인간들은 일순간에 세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수도 있는 위험한 악몽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요한 23세 교황, 「지상의 평화」 110~111항) 60년 전에 발표된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무기의 생산과 판매, 사용을 옹호한 적이 없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난 1월 18일 비영리 단체를 지원하는 베로나 가톨릭 재단 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돈은 이웃을 위해 쓰일 때 가장 큰 가치를 창출해 냅니다. 이를 잊지 마세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투자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무기 제조업이 가장 수익성 높은 투자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투자한다는 것은 정녕 광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투자는 결코 인류의 선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바티칸뉴스 1월 18일자 참조) 당장 먹고사는 걱정에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세상이라지만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명을 먹이 삼아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죽음의 문화에 사로잡힌, 참으로 비루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문화로 시선과 발걸음을 돌릴 때, 더 큰 인류애로 참된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23면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희년의 아주 특별한 한 부분을 차지했던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는 ‘평화를 향한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축성이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실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세례 축성 때 파스카의 인호를 받는다. 그러니 축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축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살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원의에 따라 지식기반 사회, AI 기술 혁신, 기후위기, 초고령화 등 사회적 이슈가 혼재하는 세상 안에서도 시대를 초월해 내적 가치들에 투신하며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축성생활자들(수도회, 사도 생활단, 재속회)이다. 이들을 위해 교회가 특별한 시간을 내어준 것이다.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시작과 마침의 시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반포 60주년인 2024년 11월 21일과 수도생활 쇄신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60주년인 2025년 10월 28일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긴밀히 연결된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는 축성생활자 저마다가 그 의미를 심화하는 데 의의가 있다. 즉, 축성생활자 스스로가 그 본질적 의미를 깨달아 핵심을 살도록 시간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축성생활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인류의 빛」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세례 은총의 더욱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복음적 권고들을 서원하여 사랑의 열정과 완전한 하느님 예배를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에서 해방되고자 하며, 하느님 섬김에 더욱 깊이 봉헌되는 것이다.”(제6장 44항) 이를 통해 축성생활을 신학(교회론) 안으로 가져왔을 뿐 아니라 「완전한 사랑」에서는 수도 생활의 시대 적응과 쇄신(Aggiornamento)을 언급했다. 수도자 신분의 중요성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그 생활 양식을 철저히 본받아(마르 3,13-14 참조)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지상의 모든 것 위에 들어 높이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지닌 사랑의 힘과 교회 안에서 기묘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모든 이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도자는 교회의 삶과 거룩함에 속한다.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는데, 이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부활, 즉 파스카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수도자들이 사는 사회는 명예와 부와 건강을 따라 살도록 부추긴다. 이 흐름은 대부분의 사람들 삶의 양식 안으로 흘러 들어와 명예를 추구하고, 건강을 챙기며 자신을 채우며 살도록 욕망하게 한다. 이 가치가 물질주의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돈의 힘으로 축적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는 것처럼”(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218항) 보이게 하는 이 저속한 체제는 창조주 없이 사는 세속 사회를 부추긴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강생하시고, 기름 부음 받으시며(축성) 구원의 역사를 써가신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추세로 빚어지는 성소자의 감소와 수도자들의 고령화로 축성생활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그 틈새로 본질에 충실한 축성생활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불필요한 가치들을 잘라내고 하느님만 남는 영의 힘, 그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앗(이사 6,13 참조)이 트여 축성생활이 이어지는 것이리라. 근원적 질문을 품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려는 이들이 있는 한 축성생활은 계속될 것이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이렇게 말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 안에 진리가 살고 있다.”(「참된 종교」 39권 72장)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23면

시공을 넘나드는 사랑의 순환

지난 9월 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50차 WWME 아시아회의’에 다녀왔다. 부부가 하나 되어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메리지 엔카운터(ME) 운동’을 함께 하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대만, 중국,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인도, 필리핀, UAE, 한국 등 12개 나라 대표들이 모였다. 올해로 50회째를 맞는 뜻깊은 회의여서 세계ME 대표인 다니엘·클라렐 부부와 마이클 주교도 내내 함께했고, 지난해 말 한국대표가 된 우리 부부에겐 처음 참석한 아시아회의였다. 일주일 동안 많은 걸 보고 느꼈는데, 무엇보다 사랑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순환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값진 시간이었다. 한국의 ME 운동도 교구마다 사정이 다르고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교구가 있듯, 아시아 각국 역시 형편이 달랐다. 특히 일본과 대만은 발표팀 부부와 사제가 부족해 ME주말 개최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외로이 작은 불씨를 지키듯 ME를 이어가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회의 기간 중 일본 대표팀 히로미·히사미 부부와 에드몬드 신부, 대만 대표팀 에디·에스터 부부와 안토니오 신부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과 대만 현지에서 사목 중인 한국인 사제들 가운데 ME주말 발표를 맡을 수 있는 분들을 연결하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가능한 한국 발표팀도 필요하다면 파견하기로 했다. 한국ME가 일본과 미국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듯, 이제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차례라는 것을 절감했다. 받은 사랑은 필요한 곳으로 다시 흘러갈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한국ME의 첫걸음은 1976년 주한미군을 위한 영어 주말이었다. 미국에서 파견되어 한국에서 사목 중이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마진학 도널드 신부와 주한·주일미군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군속 부부들이 발표팀을 맡았고, 영어주말에 참가한 한국인 부부들이 이듬해 1977년 3월에 첫 한국어 주말을 열면서 한국ME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가 초창기에 중국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크나큰 도움을 받아 뿌리내렸듯, ME 역시 이웃 나라 사랑의 손길로 싹틀 수 있었다. 아시아회의 중 소풍 시간에 가보았던 ‘착한목자대성당’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성당은 2대 조선대목구 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엥베르 주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는 조선 입국을 앞두고 한동안 싱가포르에 머물며 준비했는데, “목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어도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마침내 조선에 들어와 한국교회를 돌보다 순교했다. 싱가포르 신자들은 그를 기려 성당을 세우고 유해를 모셨다. 목숨을 걸고 한국의 양들을 찾아온 엥베르 주교와 샤스탕, 모방 신부의 사랑을 싱가포르에서 느끼며,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순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막미사에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평생 ME 운동을 해온 97세 미카엘 아롤 신부를 만났다. 그 역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싱가포르ME의 역사이자 산증인이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폐막미사를 함께하는 모습은 뭉클한 감동이었다. 그처럼 젊은 날 아시아의 다른 나라 한국에 와서 평생 사랑을 쏟고 올해 선종하신 두봉 레나도 주교님이 떠올라 감사기도를 드렸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현 싱가포르ME 대표사제인 도미니크 신부께 한국인으로서 깊은 감사를 전했다. 아시아 안에는 아직 ME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베트남과 태국이 그렇다. 현지 한국인 부부들을 위한 한국어 주말을 열고, 한국어가 가능한 현지 부부들을 함께 초대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또 다른 그늘을 만드는 사랑의 순환이 아시아로 또 세계로 퍼져가는 꿈을 꾼다. 이번 아시아 회의는 연례적인 회의라기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준 깊은 체험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두지 않고 다시 흘려보낼 때, 사랑은 더 커져 돌아온다. 사랑은 살아 움직인다. 머무르지 않고 흐른다. 시공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그 사랑이 세상을 치유하고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이다. 나는, 우리는 어떤 사랑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을 오늘 누구에게 되돌려 줄 것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23면

출산에서 낙태까지, 생명이 거래되는 시대

국가생명윤리정책원 홈페이지에는 생명윤리 관련 기사들이 연이어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드러난다. 특히 생명의 시작 단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려는 사례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여러 쟁점이 겉으로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겠다. 첫째, 성별 선택을 위한 원정 출산이다. 최근 국내 일부 예비 부모들이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얻기 위해 태국으로 출산 원정을 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정 성(性)을 선택할 목적으로 배아를 생성하거나 수정하는 행위를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23조 제2항 제1호에서 금지하고 있다. 이는 생명을 개인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성별을 가려 출산하려는 부모의 개인적인 욕구나 선호는 생명을 상품화하는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태국의 IVF(체외 인공수정) 전문 병원들은 ‘성별 선택 가능’, ‘착상 전 유전자 검사’ 등을 내세우며 한국인 고객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최근 1~2년 사이 한국인 내원 사례가 급증한 것으로 언론은 전한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을 욕구 실현의 수단으로 다루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둘째,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다. 영국에서는 80대 이상 고령부부들이 해외에서 금전 거래(대리모)를 통해 아기를 얻고, 영국 법체계에서 합법적 부모로 인정받으려 한 사례가 논란을 일으켰다. 시민단체들은 이를 “아이의 권리보다 성인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제도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도 2023년 60대 남성이 대리모를 통해 자녀 3명을 얻은 사건이 큰 파장을 낳았다. 최근에는 8000만원을 주고 계약한 대리모가 출산 후 금전을 추가로 요구하며 아이의 출생 비밀을 폭로했고, 이후 수감 중에 친모임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법원은 이를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무효로 판정했다. 하지만 생명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사례라는 점에서 깊은 논란을 남겼다. 셋째, 난임 시장의 확대다. 난임 시술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 확대와 맞물려, 국내 난임 치료제 시장이 약 1000억 원 이상 규모로 추산된다. 시험관 시술이 급증하면서 1년 새 새롭게 생성된 배아가 80만 명에 달했다. 같은 해 폐기된 배아는 53만 3266명으로 전년 대비 30.8% 증가했다고 언론은 보도한다. 이는 배아가 점점 필요에 따라 생성되고 폐기되는 ‘소모품’처럼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정부의 낙태 약물 도입이다. 이재명 정부는 낙태 약물 도입을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권 보장을 위한 국정 과제로 확정했다. 정부는 낙태법 공백을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생명을 약물을 통해 쉽게 결정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특히 낙태 약물이 여성에게 가져오는 대량 출혈, 극심한 복통, 불완전한 유산 등 부작용의 위험은 간과된 채, 태아의 생명 보호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선택된 생명만이 보호 가치가 있다는 생명 경시 현상을 정부가 결과적으로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상의 사례들은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생명을 시장 논리와 개인 욕구 그리고 국가 정책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생명의 상품화’라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생명이 욕망 충족이나 이윤 추구 혹은 정치적 전략의 도구로 전락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개인 선택이나 제도적 편의로만 볼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권리가 어디까지 생명 존중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혹은 생명을 도구화하면서 실현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23면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온몸을 흰색 가운으로 두르고 머리에는 두건을, 입에는 마스크를 쓴 보건소 근무자가 쉬는 시간도 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의 코에 면봉을 넣어 체액을 채취하는 코로나19 신속 항원 검사의 풍경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의 모습처럼 아른하기만 하다. 매일 텔레비전에 나와 브리핑하던 사람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내 흰머리로 바뀌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해안과 남부지방에 산불이 났을 때 그을음으로 가득한 얼굴로 길바닥에 지쳐 쓰러졌던 소방관들과 진화대원들의 모습에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짧은 순간이든 오랜 기간이든 최선을 다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안녕과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말기 극심했던 신분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그야말로 창조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 보시기 좋은 세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치명!’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분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불렀다. 당시의 사회는 대역죄인이라는 말로 그 역행을 용납하지 않았다. 투옥과 고문과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반상과 남녀의 구별이 분명한 세상에서 평등을 외쳤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온 마음과 몸으로 받아 안은 고난이었다. 더구나 멀고 먼 타국에서 진리를 전하고자 고향을 떠나왔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사서 고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꿈을 실현하고자 폭력을 사용하거나 세를 모아 대항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리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1886년 조불 조약 체결 이후라면 가능했을 일을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백 년을 앞서 살았는지 실로 동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각 분야에서 불가능하다는 일을 하는 사람들, 대세를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다 지어진 군사기지 옆에서 평화는 무력으로 이룰 수 없다며 전쟁기지 폐쇄를 외치는 사람들, 이미 완공된 4대강 16개의 보를 해체하라는 환경운동가들, ‘아직도 그 타령’이냐는 소리를 들으며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가 당연한 세상에서 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하는 사람들…. 조금 더 세상이 좋아지면 가능할 일을 하필 그때, 그 암울하고 힘든 시기에도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일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사람들! 그나마 그 하루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하루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람들, 매달 갚아야 할 빚으로 메꾸고 또 메꾸는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치매 어른을 모시며 긴장과 불안을 살아가는 사람들, 알코올이나 도박과 게임 중독으로 폐인이 된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 그래도 그 하루를 버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 던져버리고 훌훌 떠나고 싶은 유혹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찾아올 텐데, 끝내 그 손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 오늘날의 순교가 아닐 수 없다. 그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그 최선이 덧없고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늘 이야기하고 꿈꾸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살해되며 도살된 양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는 세상을 확신하며”(로마 8, 36-38 참조) 살아가는 최선이기를, 다른 이를 짓밟고 이겨내는 최선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순교자 성월을 보낸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23면

세상의 가치를 역행하는 삶에 대한 소고

부와 명예를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의 끝이 어떠한 지를 이 땅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방주의 창을 활짝 연다. ‘순교자 성월’이다. 교회는 순교의 개념을 ‘적색 순교’에서 창조 세계를 보존하는 지향으로 살아가는 ‘녹색 순교’, 또 삶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인내하며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는 ‘백색 순교’로 확장하여 이해한다. 올해 우리는 이 확장된 순교의 의미를 세상에서 몸소 살다가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중, 안동교구 두봉(레나도) 주교 그리고 서울대교구 유경촌(티모테오) 주교의 삶을 기렸다. 세 분의 발자취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단순한 감동을 넘어 우리 각자가 품은 지향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초대하는 ‘선물’이 되었다. 백색과 녹색을 아우르는 순교의 삶으로 가난한 자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살아가신 분들이기에 언젠가 성인으로 공경받아 선한 일을 지속해 나가는 이들을 위해 전구를 구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적색 순교로 땅을 적신 박해 시대, 최초의 조선대목구장으로 파견된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이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였다. 프랑스 카르카손-나르본교구 레삭 도드가 고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23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1820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태국 방콕의 샴대목구에서 사목하던 당시, 심각한 사목 공백을 겪고 있었던 조선교회 신자들이 사제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접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인력과 재정 부족을 이유로 조선 파견을 꺼렸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원했다. 그는 결국 1831년 교황청 포교성성의 칙서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중국 마가자에서 여정을 준비하던 중 1835년 뇌출혈로 선종했다. 향년 43세. 짧은 생애였지만 한계와 위험을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의 땅으로 향한 그 믿음이 놀랍다.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또 마치 그 혼처럼”(「사목헌장」 40항) 지금도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구성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필자는 수도회 역사서 편찬 작업을 하면서 현재 시복시성 과정 중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구를 청했다. 낯선 자료를 찾아 재해석하고 편집하는 작업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선교지를 향한 연민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지닌 브뤼기에르 주교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길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 살았던 조선 첫 주교의 발걸음은 낯선 땅에서 역사서 작업을 하는 필자에게 용기가 되었다. 한 번은 영국에서 자료를 찾던 중, 모든 것이 멈춘 듯 막막한 밤을 맞았다. 간절한 기도로 성모님과 브뤼기에르 주교께 청원한 뒤 어렵게 잠이 들었는데, 경당 창문이 연둣빛으로 가득 차 성체 앞에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다가왔다. 꿈이었다. 그윽한 빛 속에서 깨어난 이른 새벽, 문득 떠오른 자료실에 있는 문서 상자 하나를 열었을 때 초기 역사를 담은 편지들이 보였다. 이미 확인했었는데, 처음 그 귀한 자료를 마주했던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것이 성모님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구로 인해 비춰 주신 ‘생명의 빛’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당신 닮은 선한 이들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를 당신 자리로 초대하신다. 돈이면 다 된다는 가치관으로 사는 현대인들에게 ‘증거자’로서의 삶의 모델이 절실하다. 함께 걷는 길에는 희망이 있다. 매 순간 선택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복음의 가치로 응답하기 위해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자.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성인이 되자. 그래서 당당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라고 고백하면 어떨까.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23면

시선의 확장

지난 성모 승천 대축일에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가 우리 곁을 떠났다. 애통한 소식에 마음이 아렸다. 오래전 잠실성당에서 신학생과 주일학교 교사로 처음 만나 갑장 친구로 오랜 인연을 이어 왔다. 주교가 된 이후엔 자주 보지 못하다가 우리 세곡동본당의 빚을 탕감해 주러 왔을 때 반갑게 해후했고,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을 때 고마웠다. 투병 중이던 올해 초에 우리 가족 이름을 쓴 묵주 여섯 개를 손 글씨 편지와 함께 보내왔을 땐 고맙고 또 미안했다. 황망히 그를 떠나보낸 뒤, 8월 내내 시간 날 때마다 유튜브에서 그의 강론과 강연을 찾아 들었다. 명동밥집에서 노숙인과 함께 밥을 나누던 모습,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던 자리, 그리고 환경과 생태를 주제로 한 거리미사와 강론까지 그의 삶은 일관된 기도였고 적극적인 실천이었다. 그의 깊은 생각이 담긴 두 권의 책을 찾아 읽으며 무엇을 꿈꾸고 이루고자 했는지 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첫 책 「21세기 신앙인에게」는 이전에 쓴 네 편의 논문을 쉽게 풀어 펴낸 책으로, 2014년 고인이 주교 서품 때 출간됐다. 신앙의 시선을 나에서 이웃으로, 사회로, 더 나아가 환경과 지구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십계명의 2계명과 7계명을 오늘의 현실에 비춰 새롭게 해석하며, 책임 없는 신앙 고백과 불의한 재물 사용이야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고 도둑질하는 일이라고 일깨웠다. 주교가 되면서 이 책을 낸 것은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살겠다는 자기 선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책 「우리는 주님의 생태 사도입니다」는 주교로서 8년의 삶을 살아낸 뒤 2022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7주년에 맞추어 출간되었다. 주교로서 했던 강론과 강연을 모은 1장은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였고, 2~4장은 이전에 쓴 논문들을 「찬미받으소서」회칙과 연결해 새로 다듬은 글들이었다. 두 책 모두 보편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인식하고 지향해야 할 내용을 담은 회칙들을 소개하고 있다.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라는 ‘정의’의 메시지로 가톨릭 사회교리의 토대가 된 레오 13세 교황 회칙 「새로운 사태(1891)」, 전쟁과 빈부격차로 고통을 겪는 이웃들을 돌보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민족들의 발전(1967)」,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피조물과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고 돌보라는 ‘창조질서의 보호’ 메시지가 담긴 프란치스코 교황의 「찬미받으소서(2015)」에 이르기까지 ‘정의 - 평화 - 창조질서’로 이어지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맥을 짚어주었다. 두 책을 읽고 나니 좀 더 명료해졌다. 유경촌 주교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했던 하느님의 소명은 바로 ‘시선의 확장’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 신앙에만 머물지 말고, 이웃과 사회를 향해 시선을 넓히는 것.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온갖 피조물과 환경까지 내 형제자매처럼, 내 몸처럼 바라보고 돌보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공동의 집 지구에 불이 났음을 알아차리고, 불을 지른 게 바로 우리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깊은 뉘우침으로 생태적 회개를 한 뒤, 이제부터는 ‘생태사도’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그를 떠나보낸 슬픔은 크지만 애도에만 머물 수 없다. 사제로서 주교로서 혼신을 다해 이루려 했던 그의 꿈을 알았으니, 이제 남은 우리가 그 꿈을 이어받아 이웃과 사회, 자연과 지구를 향해 시선을 확장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 그러면 그는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23면

자유와 진리, 그리고 생명…소화 데레사에게 배우다

고등학생 때와 대학생 시절 두 번이나 시도하고도 끝내지 못한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 올해 시성 100주년을 맞아 8월 22일 열린 가르멜 수도회 한국 관구 학술대회에 간 것은 오래된 호기심을 마무리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대강당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나는 입석으로 겨우 서 있었다. 생명윤리에도 이만한 관심이 모이면 좋으련만 - 이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그날 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97년 소화 데레사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말한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떠올렸다. 더불어 소화 데레사의 ‘하느님을 향한 시선’이 분석과 평가에 머무는 오늘의 생명윤리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발표를 들으며 두 대목이 유난히 마음을 잡아끌었다. 하나는 ‘자기성찰의 자의식이 분석과 평가를 넘어선다’라는 점, 다른 하나는 성녀의 하느님을 향한 시선이다. 나는 종종 학문적 생명윤리가 분석과 평가에 머문 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심리와 행위를 계량화하는 도구, 이해타산이 앞선 선택적 정의, 경제 성장을 앞세운 법·정책 환경이 맞물리면 인간 생명과 존엄을 지키려는 논의는 때로 공허하게 울린다. 그러나 소화 데레사의 성찰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자의식은 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바라보는가 - 이 ‘시선’이 곧 윤리의 기준을 세운다. 시선은 가치 서열을 정하고, 정책 판단에도 영향을 준다. 분석과 평가는 수단일 뿐이며, 진리와 사랑에 맞춰질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이때 분석은 도구가 되고, 평가는 방향을 잃지 않는다. 이 관점은 ‘국가’(혹은 집단)와 ‘우리 각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지난 7월 이재명 대통령은 세계정치학회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는 자유란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지 간섭받지 않을 자유, 제약받지 않을 자유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곧 자유가 공동체적 책임과 함께할 때만 정당성을 가진다는 뜻이며, 생명 보호는 그 어떤 자유보다도 앞서는 공동체의 책임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최근 여당은 7월 한 달간 두 차례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하며 무제한 낙태 허용과 건강보험 적용을 강력히 추진하고, 정부 역시 ‘미프진’ 등 낙태 약물 합법화를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인권을 위하는 조치라는 설명이 따르지만, 그 실현을 위해 태아의 생명을 수단화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다시 수단의 논리에 머문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인권 보호’가 인간다운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태아의 생명을 수단화하는 주장은 정당한가? 권리의 정당성은 생명 보호라는 공통 토대 위에서만 선다. 생명 보호가 무너지면 권리 담론은 스스로 근거를 잃는다. 생명은 수단이 아니라 기준이다. 우리의 시선이 생명 보호라는 보편적 진리를 향할 때, 자유는 책임과 만나 존엄을 지킨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의 결정이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유가 근본적으로 진리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진리의 광채」 34항) 인간은 내면성을 찾는 존재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데 인색하다. 나의 내면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묻는 일 - 이 물음이 곧 생명윤리가 직면해야 할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 물음은 양심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만드는 제도와 정책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실천적 요구로서 우리를 생명윤리로 초대한다.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23면

‘새·사람행진단’

사람이 사는 곳! 주거지이다. 개발의 광풍이 불었던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지금까지 더 나은 주거지를 만들겠다고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몰아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주거지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지하로, 옥탑방으로, 고시원으로 쫓겨나 이른바 ‘지옥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마저 갈 곳을 찾지 못해 변두리로, 더 외진 변두리로 밀려나야 했다. 살기 좋은 나라, 아름다운 환경을 위해서 정작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자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는 고층 아파트에 내어줘야만 했다. 사람뿐만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라고 마냥 하늘에만 있을 수만은 없다. 내려서 먹이도 찾아야 하고, 보금자리를 꾸리고 알을 낳고 번식하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서식지이다. 모든 창조물은 이렇게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데, 인간이 개입하는 개발의 이야기만 나오면 사시나무 떨듯 움츠리게 된다. 개발이 지나간 자리에 서식지는 파괴된다. 여기서 저기로 옮겨서 될 일이 아니다. 살아남으려는 최선의 노력이 힘에 부칠 때 소리가 나게 된다. 아픔이 울음이 되고 울음이 외침이 된다. 그 외침에 응답하는 것은 같은 창조물로서의 도리이다. 함께 살아야 하기에…. 그렇게 아프다고 소리칠 때 함께 응답한 기억들이 있다. 2003년 삼보일배. 세 걸음을 걷고 한 번 절하며 새만금 갯벌 보존을 위하여 전북 부안에서 서울까지 320km를 65일간 쉬지 않고 행진했다. 단순히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늘날 더욱 심각하게 다가오는 환경파괴에 의한 기후 위기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물질 위주의 삶, 개발과 성장 위주의 정책은 살아가는 모든 생물을 아프게 하고 마침내 울부짖게 만든다. 그 울부짖음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공멸의 길을 걷는다는 종교인들의 예언이었다. 하지만 결국 새만금 사업은 그 많은 생물의 외침을 외면하고 그럴싸한 비전을 제시하며 물을 막아 갯벌을 가두고 말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수없이 제기된 문제에도 불구하고 새만금은 완공되었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래서 새만금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새만금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만금 방조제 안쪽 만경강 수역인 수라갯벌에는 수많은 법정 보호종과 저어새가 찾아와 서식하고 있다. 저어새는 멸종위기 1급으로 세계에 오천여 개체도 안 되는 국제 멸종위기종이다. 이곳에 새만금 신공항을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만약 계획대로 새만금 신공항이 건설되어 비행기가 이륙과 착륙이 반복되면 조류를 포함한 수많은 생물의 생존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저어새와 도요새, 물떼새, 황새 그리고 가마우지들과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연말 끔찍한 참사를 빚은 무안공항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말이다. 끊임없는 인간의 개발 의지는 이렇듯이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해가 되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새만금 개발 사업을 중단하고 해수 유통을 확대하여 수라갯벌을 비롯한 새만금 갯벌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2003년에 이어 창조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응답하는 행진이 진행되고 있다. ‘새·사람행진단.’ 새만금 신공항 기본계획을 취소하라고 서울행정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역지사지라고 할까? 도요새의 마음이 되어서, 밀려나고 쓸려가는 생명의 아픔을 품고서 오늘도 비를 맞으며, 태양 빛을 맞닥트리며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마음을 전하고 있다. 지난 8월 12일 시작되어 9월 11일 새만금 신공항 취소소송 선고가 있는 날까지 마음을 담은 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워낙 새로운 뉴스와 정보에 밝은 우리이니 잠깐의 검색을 통해서라도 함께 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돼 있기에 사랑과 존경으로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42항)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23면

기억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성찰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라.”(신명 16,12 참조) 하느님은 고통받던 그 시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와 연민을 일깨우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또한 약한 우리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관상하도록 초대한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아픔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흔이다. 이 세월의 결은 우리 민족 안에 굽이굽이 흐르는 ‘한(恨)’의 정서 안에 새겨져 결코 잊힐 수 없다. 한반도 오욕의 역사는 남산 ‘국치길’에서 생생히 되살아난다. 이토 히로부미가 버젓이 거닐던 길목에서 통감관저, 조선총독부,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우리 민족이 겪은 치욕과 수난의 현장이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한일 강제 병합을 맺은 그 터에 2만여 시민이 모여 ‘기억의 터’를 조성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그곳은 단순한 기념지가 아니라, 고통의 기억이 현재를 관통하며 미래를 밝히는 ‘원체험’의 장소이기도 하다. 기억의 터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처절한 고통을 증언한다. 그러나 이 기억의 표적은 2023년 9월 5일 새벽,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 정부에 의해 기습 철거된 후 재설치되었으나 그 의미는 약화되었다. 이는 과거를 지우려는 시도이며,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고통을 부정하며 오욕의 역사를 미화하는 행위로 보인다. 그 역사적 현장에 곤돌라 설치 공사를 한창 진행하여 관광 명소로 탈바꿈해 나가는 현장에서도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의 역사는 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식민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공감의 부재는 ‘악의 평범성’으로 이어진다.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 한나 아렌트(1906~1975)가 경고했듯,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와 행동의 무능으로 확장된다.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며 일본과의 파트너십을 운운했던 오욕의 시간은 역사적 책임과 도덕적 감수성을 저버린 무능과 어리석음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연민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한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존재의 변혁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이 신앙의 맥락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수치심과 치욕에 짓눌려 침묵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빼앗긴 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기억의 터, 큰 바위에 새겨졌던 문구를 떠올린다. 우리에게는 고통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정의를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존엄과 자유의 권리이다. 기억의 터 진입로를 벗어나면 보이는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가 명시하듯, 인권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포괄한다. 8월에는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즉 ‘인권 감수성’을 한껏 길어 올리자. 역사적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없다. 기억의 터에 누워 있던 바위들과 관저 터 앞에 우뚝 선 400년 된 은행나무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기억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묻고, 민족과 인류의 정의로운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시간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원체험의 회복이며 우리를 다시 정의롭게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우리 신앙은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억으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되찾는 데(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 받으소서」 84항 참조) 의미를 둔다. 인권을 유린당한 이들 안에 아로새겨진 아픔과 세월의 격랑이 우리 안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면 좋겠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08-24 제345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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