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의 ‘일초’ 영성살이를 그리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찬미받으소서」를, 2023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를 발표해 기후위기 시대에 새로운 삶과 문명의 전환을 이룰 것을 요청한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가톨릭 신앙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장일순(요한 세례자)을 들 수 있다. 그는 1928년 원주에서 나서 1994년 5월에 귀천했다. 올해로 그가 하늘나라 시민이 된 지 30년이 된다. 장일순은 1940년 세례를 받았는데, 이 땅의 종교 전통에 열려 있던 그는 ‘걷는 동학’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동학에 정통했다. 특히 해월 최시형의 사상과 생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불교 전통은 물론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밝았다. 그런 가운데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와 사회 복음화를 이뤄 갔던 그는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할 만큼 가톨릭 신앙을 깊이 내면화해서, 한국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존재 지평을 통합 생태적으로 심화시켜 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소중한 책을 쓰셨고, 이 책의 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이라고 말한다.(「찬미받으소서」 85항) 하느님은 이 책으로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다.(12항) 장일순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一草之中聖父在矣.”(일초지중 성부재의) “풀 한 포기 안에 성부 계시네.” 장일순은 여기서 하느님을 ‘성부’로 표현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Πάτερ: ‘아버지’로 시작하는) 기도에 충실한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된 모든 존재의 ‘공동 원천’(un’origine comune)에 근거해서 풀과 벌레를 ‘형제’ 혹은 ‘누이’로 불렀다.(11항) 교황은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서 ‘우주적 가족’(universal family)(89항)과 ‘우주적 형제애’(universal fraternity)(228항)를 살아 가자고 요청한다.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돼 ‘우주의 일부로서’(89항) 그분의 숨으로 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의 계시체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요 하느님의 가족이다. 한 하느님에게서 와서(공동 원천, 11항) 하느님을 공동 도착점(a common point of arrival, 83항)으로 갖는 모든 존재는 이 ‘공동성’으로 하여 서로 하나로 이어져 있다. 교황은 이것을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89항)고 표현한다. 장일순은 무위당(无爲堂)이라는 호와 함께 ‘일초’(一草)나 ‘일속자’(一粟子), 우리말로 ‘하나의 풀’이나 ‘조한알’이라는 호를 쓰면서, 이같은 존재의 상호성을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1984년 봄에 자신을 ‘치악산 사람’으로 지칭하며 화폭 아래 왼쪽에 난들을 그리고 위쪽 공간에 글을 쓴 한 서화에서 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원주교구 태장1동성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님은 왼손으로 지구를 들고 계신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님 안에서 모두 하나의 지구 위에서 하나로 이어진 존재로 사는 것인데, 이것은 ‘너는 이어진 나’이고, ‘나는 이어진 너’라는 것을 말한다. 장일순은 이 통합생태적 진리를 30년도 더 전에 저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교회와 사회에 선물했다. 이 기후위기 시대에 그의 ‘일초’ 영성과 ‘그대는 나일세’ 영성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생태적으로 좀 더 깊게 내면화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글 _ 황종열(레오)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5-19

발달장애인에게 ‘스스로 결정’하는 삶 주려면

“선생님 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들, 누군가가 준비해 주고 또 누군가가 계획한 것을 따라서 해야 하는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멀게만 보이는 이들. 바로 발달장애인들이다. 성인이 되면 일상의 매 순간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발달장애 청소년들도 성인이 되면 당연히 자유롭게 자기결정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다. 오히려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자신이 자녀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자녀보다 하루만 더…”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고, 자녀에 대해 애틋함이 묻어있다. 장애인 복지를 위한 시설과 활동 보조 서비스가 있기는 하지만 부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해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장애를 가진 자식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인이 된 장애인들은 갈 곳이 별로 없기에 부모들은 자신들이 죽고 난 후에 자녀들이 어떻게 될까에 대한 걱정을 늘 안고 살아간다. 이미 사회적으로 이 이슈는 공론화됐지만 아직 뚜렷한 결과는 없다. 갈 곳은 없는데 가야 할 사람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여전히 대기 중이다. 성인이 된 이들이 스스로 자기결정을 할 수 있도록 반복적 훈련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공간과 제공되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비록 적은 인원이기는 하지만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복지관이 있다. 바로 성인 전환기 발달장애청소년 자기결정능력 향상을 위한 ‘혼자 다녀오겠습니다!’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참가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그래서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마주하는데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은 스스로 계획하는 것은 물론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누군가 자신을 위해 선택해 주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이제는 그것이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임을 느리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젠 혼자서도 버스를 타고, 은행도 다녀오고, 좋아하는 햄버거와 음료를 주문하고 결제도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보고 싶은 곳을 다녀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를 위한 맛있는 과자도 산다. 친구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양보하는 것도 배웠다.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며 조금씩 재미있는 삶의 맛을 느낀다. “선택할 필요 없이 다 알아서 해 준다는 것이 어찌 보면 매력적이고 편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면 결국 저희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쉽게 포기해 버리고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참지 못하면 지금까지 겪었던 그대로 변하지 않은 행동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발달장애인 자기주장대회 구례군장애인복지관 류종호씨 발표 中) 이제 당사자들은 누군가가 선택해 주는 삶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 한다. 다양성 안에서 삶의 형태를 선택하여 주체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야겠다. 따라서 교회도 지역사회도 이들이 자기결정권의 경험치를 늘려 갈 수 있는 공간의 역할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부모님들의 이유 있는 외출을 허락하고 어울려서 아름다운 우리가 되는 다가오는 미래를 꿈꾼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5-12

혐오를 대하는 자세

가톨릭교회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단죄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성찰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면서 후보들의 이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후보에서 사퇴한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비판을 무시하고 후보로서 선거를 치르거나 당선된 이들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혐오뿐 아니라 장애인, 노인, 이주민 등 다양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 이들의 발언이 소셜미디어, 개인방송 채널을 통해 인기를 끌고 명성과 부를 가져오기도 한다. TV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거나 다양한 가족의 구성원을 폄하하는 발언을 한 연예인들은 비판받기도 했고 한동안 출연이 정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혐오를 제재하거나 처벌할 근거가 강력하지 않아 혐오는 비판에 그치고, 혐오발언을 한 사람들은 잊히고 다시 방송에 등장한다. 개인방송 채널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 아래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 폭력적인 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혐오발언은 지지자들의 응원 속에서 간과돼 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의 혐오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 경우에도 몇몇 후보는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거나 본인이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고 억울하다고 호소하거나 실수했다고 얼버무렸다. 또한 이들을 지켜보는 유권자들은 투표를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황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혐오발언은 발화자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좀 더 혐오발언을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차별에 감수성을 요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섞인 언어나 정책을 일절 삼가자는 신념을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이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자유로운 발언이나 토론이 억제되 민주주의의 발전에 저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표현과 행동에서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혐오발언이나 행동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 학교, 정치 등의 영역에서 혐오발언에 대해 개인 차원의 성찰을 넘은 자문과 심의, 교육, 법적 제재 등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각 정당에서는 성인지교육이나 성폭력 예방교육 등을 통해 혐오에 대한 감수성을 고양하고, 당원 자격 기준에는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미국의 여성주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저서 「혐오발언」에서 혐오발언을 하는 발화자의 입을 막는 것만으로 그 사회의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발화를 가능하게 한 집단 또한 사회의 지지를 받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혐오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이들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혐오가 갖는 문제점을 인식할 때 혐오가 사라질 수 있고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나 미디어에서 발견되는 혐오발언은 혐오발언으로 주목을 끌고 스타가 된 사람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들의 혐오발언을 지지하고 환호한 사람들, 이에 대해 침묵한 사람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혐오발언에 대한 감수성이 길러지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톨릭교회 미사 강론이나 교리교육에서도 혐오발언이 무심코 사용되지는 않는지 감수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교회 조직 내에서도 성인지교육, 성폭력 예방교육 등 성평등 교육을 실시하고 매뉴얼을 만드는 한편, 교회가 사회의 혐오발언을 비판하고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5-05

갈라짐이 익숙한 세상

총선이 끝났다. 원래도 정치 뉴스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 선거를 앞두고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 지냈다. 선거 공보물이 사제관에 도착한 이후에야 우리 동네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가 누구인지, 비례대표 의석 확보를 위해 어떤 위성 정당이 생겨났는지 알 정도였다. 그마저도 자금력 부족으로 공보물을 보내지 못하거나 보내지 않은 정당이 훨씬 많았다. 천성이 얕고 지력이 일천해 골치 아픈 것은 딱 질색이고, 그리하여 뉴스도 일절 보지 않았던 게으름을 기워 갚기라도 하듯, 검색창을 두드려 정보를 알아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정당투표 용지에 기입될 정당의 수를 찾아보고선 기함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됐다. 과연 다음 총선에서 얼마나 더 긴 투표용지를 만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난 2012년부터 주교회의는 총선 및 대선과 같은 주요 선거를 앞두고 정당(총선) 및 후보들(대선)에게 정책 질의서를 보내고 그 답변을 발표해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가치와 교회의 가르침에 좀 더 부합하는 후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주교회의는 주요 4개 정당에 정책 질의서를 보내 3개 정당으로부터 받은 답변을 발표했고, 각 교구별로도 교구장 재량에 따라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정책 질의서를 보내 답변을 받아 발표하기도 했다. 주교회의가 보낸 질의서는 노동, 민족화해, 사회복지, 생명윤리, 생태환경, 여성, 정의평화, 청소년 등 8개 분야 43개 문항으로, 각 분야는 모두 한국교회가 관심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주교회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답변 가운데 노동(노란봉투법 입법 재추진), 생태환경(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 및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고준위방사성폐기물특별법 제정,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정의평화(전세사기특별법 제정, 생명안전기본법 및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분야에서 정당 간 의견 차이가 크게 드러났다. 문제는 이런 의견 차이가 정당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자들이 자신의 지지 정당의 입장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정당 간 의견 차이가 신자 간 의견 차이로 전이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목 일선에서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현안에 따라 교회의 입장이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어 따라가기 어렵다”며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복음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보라”고 권면하면 대부분은 적어도 사제 앞에서는 수긍하고 돌아가긴 하지만, “교회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단순히 세상을 영과 육, 성과 속으로 나누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이를 도구 삼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은 교회 안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다시 말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더불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조차 자기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가르침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못한다면, 그가 가슴에 새기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분열적이며 헛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온전한 존재일 텐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든 영혼이든 절반만 구원받고자 하는 꼴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속에 솟아난다. 갈라짐이 익숙한 세상이라곤 하지만,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증언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조차 갈라짐에 아파하며 회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갈라짐에 익숙해져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4-28

지정환 신부와 무지개가족을 기억하며

지정환 신부(池正煥, Didier t’Serstevens)는 1931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뱅상 레브 신부(Vincent Lebbe, 1877~1940)가 세운 벨기에 선교협조회(La Société des Auxiliaires des Missions)에 들어간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가서 민중의 형제로서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고, 그들에게 배워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랐다. 지정환 신부는 1958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12월 8일 부산에 도착한 이래 전주교구 전동·부안·임실본당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면서 특히 가난한 농민들과 동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부안에서는 쓸개를 잃었고, 임실에서는 다발성 신경경화증을 얻었는데, 이것들은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하느님의 빛’으로, 하느님이 보내 주신 ‘카리타스의 무지개’로 살면서 그가 받은 훈장이었다. 그는 임실 치즈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1976년대 초에 벌써 몸에서 마비 증상을 감지하곤 했다. 그러다가 1976년에 오른쪽 다리가 마비돼 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불편한 몸으로 임실 치즈 조합 활동을 정리하고 1981년에 벨기에 고향으로 가서 치료받았지만, 결국에는 완치가 불가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의사가 퇴원을 권유하면서 “일을 그만두면 더 악화될 것”이라고 조언했는데, 이 말을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인 그는 조금 나아진 몸 상태로 1983년 10월 13일 휠체어를 타고 다시 한국, 전주교구로 돌아왔다. “이곳이 내 고향이다.” 전주교구로 돌아와서 자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정환 신부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 말이다. “그래, 이제 여기에 뼈를 묻자!” 그는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살다가 어디에서 그분께로 돌아갈 것인가를 결단했다. 지 신부는 박정일(미카엘) 주교에게 장애인사목을 권유받았을 때 즉시 답하였다. “예.” 1984년 2월 그는 교구에서 장애인사목 지도신부 소임을 맡게 됐다. 그해 7월에 김영자(마르타) 등의 협력 속에서 지정환 신부는 박남숙(루치아)과 함께 첫 장애인 공동체를 동반해 갔다. 이들은 다음 해 3월에 공동체를 확장해 옮겼고, 이후 이 공동체는 ‘무지개가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1989년에 하느님 희망의 증거자 지 신부는 ‘무지개가족’과 함께 오늘의 완주 ‘소양면’(所陽面), 볕 따스한 마을로 옮겨 와서 삶의 기쁨과 희망을 일구어 갔다. 거의 20년 동안 무지개가족을 동반한 지 신부는 2002년 5월에 사회봉사 부문에서 호암상을 받았고, 다음 해인 2003년 7월에 은퇴해 무지개가족을 떠난다. 그는 호암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장애인들과 이들의 가족들의 교육을 위해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무지개가족에서 멀지 않은 소양면 ‘별아래’ 집에서 살면서, 무지개장학재단 일과 19세기와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들을 복원하는 작업 등을 하면서 하느님의 사제로 살다가 2019년 4월 13일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올해는 그의 선종 5주기이자 무지개가족이 탄생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이 땅의 민중에게 하느님의 희망을 전하는 과정에서 장애를 얻었고, 자신의 장애를 장애인들을 섬기는 거룩한 기회로 삼아서 수많은 장애인들이 새 삶을 살도록 매개했다. 그의 장애인 동반 사목의 밑바닥에는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장애인이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 ‘하느님에게서 온 한 사람’이라는 존재 중심 인간 이해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 신부가 자신의 전 존재로 증거한 ‘존재 중심’ 장애인 동반의 전통이 오늘의 무지개가족과 모든 장애인 동반 기관들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육화되고 승화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물’ 지 신부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초빙교수)

2024-04-21

중도입국 청소년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최근 10년간 다문화 학생 현황을 살펴보면, 다문화 학생수는 2012년 4만6954명에서 2022년 16만56명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 전체 학생 중 다문화 학생이 차지하는 비율 또한 2012년 0.7%에서 2022년 3.0%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 유형별 다문화 학생 비율을 살펴보면, 국내출생(국제결혼가정)이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가장 높으나 점차 감소하는 반면, 최근 들어 이주배경 아동·청소년(중도입국) 및 외국인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한국교육개발원(2012-2021), 연도별 교육통계연보) 한국 사회는 빠르게 다인종 다문화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분석한 ‘2022 지방자치단체 외국인주민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1월1일 기준, 국내 거주 외국인주민 수는 225만8248명이다. 이주배경 인구가 전체 인구의 5% 이상이면 다인종 다문화 국가로 분류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준에 따르면, 국내거주 외국인 수가 총인구 대비 4.4%인 한국은 이미 다인종 다문화 국가의 문턱에 다다른 셈이다. 이 중 한국으로 입국한 이주배경 학생들을 중도입국 청소년이라 부른다. 이 아동·청소년들은 한국에서 출생한 다문화가정 자녀와는 매우 다른 배경적 특성을 보인다. 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던 중 입국하게 된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입국 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중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 장벽이다. 언어로 인해 겪는 학업의 어려움, 준비 없이 마주하게 된 문화적 충격, 외모 비하 놀림 등은 이 청소년들이 감수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이들 중에는 관광 비자로 입국해 불법체류자로 분류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 국적의 유무를 떠나 아동·청소년은 보호받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기본권 보장 차원에서의 이주배경 청소년, 특히 중도입국 청소년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우리에겐 중도입국 아동·청소년들에게 한국어 및 기초학습을 제공해 언어능력과 학습수준 향상시키고, 한국 생활을 위한 정보를 제공해 새로운 사회의 기준을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사회적 숙제가 있다. 중도입국 아동·청소년들이 또래 간의 집단활동으로 서로에게 정서적 지지가 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 초기 적응에서 겪는 스트레스나 위기상황 등을 극복해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교회도 사회도, 이웃 모두 관심을 가져야겠다. 특히 중도입국 아동·청소년들은 한국에서 엄마와 살고는 있지만, 소외감을 느낀다. 여러 사정으로 외국인 자격으로 체류하고 있는 경우에는 심리적, 정서적 불안감을 안고 살고 있기에 모든 일에 위축되고 미래가 어두운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줄 수 있는 품이 필요하다. 품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은 모두가 다인종 국가로 들어서는 지금의 사회를 받아들이고 우리 곁 가까이에 있는 이웃으로 맞이하는 실천이 있어야겠다. 중도입국 아동·청소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가족들과 이웃과 공유해 보자. 내 자녀의 친구로 잘 맞이해 이웃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안정적 관계 맺음을 할 수 있도록 하자. 어른과 친구와 대화할 때 소통 방법을 알려주고, 인사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친구들이 말투를 따라 하고 놀렸다며 학교생활이 심적으로 힘들었음을 내비치는”(주간조선, 2011) 일이 없도록 그들을 돕자.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중도입국 아동·청소년들이 천천히 우리 마을에 스며들도록 품을 내어 주자.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2024-04-14

찾아가는 서비스와 가톨릭교회

여행을 다닐 때 주일미사는 늘 부담이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행지의 성당을 찾아 현지인들과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체험이 됐다. 현지 문화를 체험하면서도 여행 중 도난이나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 심신의 피로, 긴장감을 내려놓고 평화와 위안을 받는 소중한 시간이다. 지난해 10월 도쿄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 성당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하철에 적응하지 못해 공항에서 호텔로 도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지쳐 있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너무 힘들어 성당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도쿄 세키구치 주교좌성당 12시 주일미사는 한인성당 미사로 거행되고 있었다. 주교좌성당 미사지만, 코로나19 여파인지 모르겠지만 신자가 많지 않았고 다들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미사 시작 전 간신히 도착한지라 거리두기의 원칙을 모르고 노인 여성 신자 옆에 앉았다. 내가 거리를 많이 두지 않아 그분을 불편하게 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 한편 장궤틀이 설치돼 있지만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가 너무 넓어, 어떻게 저기에 장궤를 하고 기도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봉헌할 때 신자들은 제대 앞에 나가지 않고 유럽 성당과 마찬가지로 긴 막대기에 들린 천 바구니에 헌금을 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신자들이 영성체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좌석과 뒷좌석이 넓은 이유는 사제가 성체를 분배하기 위해 신자들을 직접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신자들은 제자리에서 서서 영성체를 했다. 코로나19 시기에 생긴 방식인지 알 수 없으나 신선했다. 한국 성당뿐 아니라 다른 나라 성당에서도 주로 신자들이 영성체를 하기 위해 움직인다. 신자들은 영성체를 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제대 앞으로 다가가며 하느님 앞에서 낮아지는 체험을 한다. 수도원 피정 미사나 소규모 미사에서 동그랗게 서서 영성체를 했던 기억은 있다. 그래도 작지 않은 성당에서 사제가 신자들 자리로 옮겨다니며 일일이 성체를 분배하는 방식은 낯설지만 신선했다.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느끼고 겸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겸손은 현 세대의 미덕이 아니고, 플렉스와 자기과시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여유 없는 세상이 됐다. 이러한 세상에서 겸손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로감을 느끼던 차였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과 성취는 주요한 덕목이 됐고, 자신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 자신감 있는 사람이 매력적이고 긍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일본 성당에서의 체험은 내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는 한편 교회의 ‘찾아가는 서비스’를 생각하게 했다. 가족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신자들이 바쳐주던 위령기도는 사별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진심 어린 위로가 됐다. 최근 지병으로 누워 계신 어머니를 위해 봉성체를 신청했을 때, 신부님과 구역장님을 비롯한 신자들이 집을 방문해 주셨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신부님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사제나 수도자들, 신자들에게 친절과 봉사를 요구한다면 이들은 판매직, 서비스직 종사자들처럼 감정노동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가 ‘찾아가는 서비스’ 정신으로 소외된 자들, 교회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함께 사는 공동체보다는 복지의 축소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노인, 장애인, 여성 등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교회가 좀 더 낮은 곳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사회적 차별이나 편견들을 시정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적극적으로 탐색했으면 한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4-07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 / 이종원 신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란 주제를 화면에 띄워 놓고 멍하니 바라본다. 기쁨이라⋯. 기쁨이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 본다. 아스라이, 학부 시절 은사님께서 해주셨던 ‘joy’와 ‘pleasure’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배고픈 사람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주면 기쁘게 먹는다. 두 그릇까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세 그릇, 네 그릇 계속 주다 보면 그때부터는 먹는 게 기쁨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이게 pleasure다. 그런데 책을 읽는 기쁨을 생각해 봐라. 한 권을 읽어도 백 권을 읽어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joy다. 너희가 말 배우고 문학 배우는 애들이거든 joy와 pleasure는 꼭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벌써 15년도 더 전에 들은, 선생님은 그저 우리가 먹고 노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선택하길 바라며 해주신 이야기이지만, 그날 이후로 내가 뭔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기준점이 된 참 소중한 이야기이다. 금세 질릴 pleasure가 아닌 언제고 남아 있을 joy를 좇는 것, 그건 예수님을 좇는 일뿐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해당할 테니 말이다. 요즘 내가 느끼는 즐거움은 joy일까 pleasure일까. 부끄럽게도 내 생활은 joy보다는 pleasure에 더 빠져 있는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보고 싶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물론 시간기도도 드리고 성체조배도 하지만, 기도 생활 틈틈이 여가를 쓰는 게 아니라 여가생활 틈틈이 기도를 끼워 넣는 듯한, 중심축이 흔들린 느낌이다.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출가’한 사람들이다. 단어의 음절이 반대일 뿐이지만, 출가와 가출은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성자(聖者)의 수행 생활에 들어감’이란 의미라면, 후자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감’을 의미한다. 나는 분명 전자를 선택했는데, 지금의 내 삶은 후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어 맘이 살짝 아리다. 출가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joy는 사실 하느님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 예수회원인 제임스 마틴 신부가 쓴 책 제목처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고 삶이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모든 것 안에서 다른 것을 찾을 때가 있다. 언제는 하느님 대신 ‘돈’을 찾기도 하고, 언제는 ‘명예’를 찾기도 하고, 언제는 ‘권력’을 찾기도 한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필부필부가 이것을 좇고 찾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무겁게 다가올 뿐이다. 하느님의 자리에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놓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에 푹 빠져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와야 할 현실일 것이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 참 꿈 같은 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이 책의 제목이 내게 가슴 깊이 박힌 이유는, 아마도, 아니 분명히, 나의 이런 현실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좋다고 하느님과 함께 살겠다고 선택한 삶에서조차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좇으면서 매일 강론 시간에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내 삶의 궤적이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나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당신의 이름(=그리스도)을 달고 사는 사람(=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와 아량에 나는 그저 기댈 뿐이다. 내가 하늘을 째려보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새를 추스릴 수 있는 까닭은, 하느님의 이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와 아량 덕분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이 시간에, 다시 한번 다짐한다. 새로이 열어 주신 이번 한 주 동안은 열심히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찾겠노라”고.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3-31

우리는 지금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는가? / 황종렬 교수

인간의 뇌 작용은 ‘시냅스’(synapse)를 통해 이뤄진다. 뇌신경세포는 그물처럼 하나로 이어져서 작용하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인접해 가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시냅스는 ‘함께’를 뜻하는 그리스어 ‘syn’과 ‘연결하다’ 혹은 ‘움켜쥐다’를 뜻하는 ‘haptein’이 결합된 말이다. 이것은 정보를 전하는 뉴런과 받는 뉴런이 화학적 작용이나 전기적 작용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부분을 말한다.(매튜 코브 지음, 이한나 역 「뇌과학의 모든 역사」 194~212쪽) 신경세포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떨어져 있는 간격을 ‘시냅스 틈’이라고 한다. 그 간격은 20~50nm(나노미터) 정도다. 시냅스가 떨어져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틈 내지는 간격이 있으므로 사고의 흐름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그냥’ 이뤄지지 않게 된다. 이 정보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산소와 에너지다. 사고와 의식의 흐름을 위해 건강한 식사와 숨쉬기가 필요하다. 생각이 많으면 영양과 산소가 그만큼 많이 필요하므로 맥박이 빨라지고, 너무 허기지거나 호흡이 약해지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켈란젤로(1475~1564)가 16세기 초에 그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에 시냅스 현상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하느님이 하와를 안고 천사들과 함께 아담에게 날아가셔서 밑으로 처져 있는 아담의 손가락에 당신의 손가락을 뻗어 생명의 기운이 전해지게 하시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가 뇌의 신경세포들이 떨어진 상태에서 신호를 전달하고 전달받아서 작용하는 것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은 현대 뇌과학자들도 경탄할 만큼 시냅스 작용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이때 하와를 안고 계신 하느님과 주위에 있는 존재들이 원형 비슷한 형태 안에 그려져 있는데, 이 형태가 뇌를 옆에서 본 것과 유사하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이미 하와를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 신비를 뇌와 연결해 그려낼 만큼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에 대해 깊게 통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통할 때 저렇게 건너야 하는 틈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것부터 먼저 건너게 할까? 경험에 의하면, 친근하고 도움이 되는 것부터 먼저 건너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창조돼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면서도 그분과 ‘저절로’, ‘언제나’, ‘당연히’ 이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들과 이어져서 심지어는 의식과 행동으로 그분 밖에서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에게 익숙하고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선택하고 낯설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기피한다. 하와와 아담은 자기의 욕망에 불을 지른 뱀과 시냅스한다. 그리하여 선악과를 따먹고는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 7-8) 이들이 비록 하느님의 명을 어겼어도 존재로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으로는 하느님 밖에 있고 싶어한 것이고, 그 결과 행동으로 하느님 밖에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시냅스 틈은 인간의 존재 구조다. 이 구조를 모르고는 인간의 선입견과 폭력을 이해하기 어렵다. 도덕적으로 접근해서는 한계가 있다. 이 틈을 있는 대로 보고 이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잇는 것. 무엇과? 하느님과! 이것이 ‘re-ligio’, ‘종교’다.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 안에서 살도록 이어주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우리 교회가 할 거룩한 사명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교회는 지금 존재와 의식과 행동으로 그분 안에서 살고 있는가?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초빙교수)

2024-03-24

[방주의 창] 할배쉐프의 비밀 레시피 / 강성숙 수녀

“맛 좀 볼텨? 간이 맞는가 모르것네 그려….” 할아버지 요리사(할배쉐프)들이 음식을 만들며 나누는 대화이다. ‘할배쉐프’는 독거 남성 어르신들의 정서 지지 및 일상생활 기능 향상을 위한 역량 강화 프로그램이다. 할배쉐프!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지도 않는 이름. 월 1회 할아버지 요리사로 변신하여 스스로에게 대접할 음식을 배우는 시간이다. 대부분 어두컴컴하고 습기 가득한 지하 단칸방에서 날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지내시는 분들, 우리가 정겹게 부르는 이름 할아버지이다. 우리나라 문화에는 지금까지 잘 맞지 않는 풍경이기도 했다. “무슨 남자들이, 할아버지들이 음식을 배우느냐고. 그냥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안 그래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셨던 프로그램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어느덧, 하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시는 모습이 멋있어졌다. 화려한 요리 거창한 메뉴는 아니지만, 우리 어르신들의 삶의 역사인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지혜와 청춘, 어쩌면 그 시절엔 다 차려진 밥상에서나 마주했던 그 요리를 직접 만들고 있다는 것에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행복한 모습과 함께 웃음꽃이 피어났다. “오늘 배운 이것과 지난번 메뉴로 또 한 달은 살 수가 있으니까 이젠 걱정 없어요.” 이렇게 일 년의 추억을 기록해 「할배쉐프의 비밀레시피」 요리책을 발간했다. 소박하지만 출판 기념회도 열어서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직접 만드신 반미 샌드위치를 대접하시고 어깨를 으쓱으쓱하시며 함박웃음을 얼굴에 담으셨다. 지금 우리 사회 고령화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예전과 달리 노년기가 늘어나고 있는 이 시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는 증대되고 있지만, 가정과 사회는 노인을 의존적 존재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늙어서 혼자 살면, “남성이 더 외롭고 우울해”(서울대학교 간호학과 연구팀-박연환·고하나). 지난 2018년 8~10월 경기도에 사는 65세 이상 독거노인 1023명을 대상으로 남녀별 전반적인 삶의 질에 대해 심층 인터뷰한 보고서 제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 독거노인이 여성 독거노인보다 더 우울해했다. 아마도 문화적 배경 아래 긴 세월을 살아온 남성들이 혼자가 됐을 때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에 노년의 주체적인 삶과 노년의 사회통합을 지향하기 위한 사회적 환경 구축은 필요하다. 건강하신 분들도 사회적인 직업 역할을 상실하게 되면서 갑자기 밀려드는 여가시간을 고민한다. 특히 남성 독거노인들은 그 간절함이 배가 된다. 인구 사회학적 특성상 활발한 상호교류를 통해 관계를 맺는 여성에 비해 훨씬 취약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가족 및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치매나 우울증 등 정신적 질병이나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고립되기 쉬운 독거노인, 특히 남성 독거노인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안전망을 갖추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배쉐프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먹거리 준비를 넘어 지역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며 나눔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 축제에 매년 초대받아 음식 부스를 운영하고 얻어진 수익금으로 지역 안에서 나눔을 실천하며 교류하고 만남의 장을 통해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어르신들이 존재감을 높이고 일상에서 정서적 관계를 쌓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작게라도 뒤늦게 얻은 솜씨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노령사회 속으로 로켓처럼 달려 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 아직은 그 단계에 속하지 않는 이들도 다가올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이미 늦은 감이 있다. 이참에 우리 사회 안에 노인을 위한 복지는 무엇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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