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이름을 다시 생각한다

2023년 8월 부실한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장으로 떠들썩할 때만 해도 새만금이라는 곳은 내 관심사에서 희미했다. 그러다 그 이름이 인장처럼 박히게 된 것은 2024년 노틀담 수녀회 생태영성세미나 때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보고 나서다. 영화는 군산, 김제, 부안 사이에 흐르는 만경강과 동진강 발치에 펼쳐진 천혜의 갯벌 해안에 33.9km의 세계 최장 방조제가 생기면서 일어난 사연을 들려주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갯벌을 파괴하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의 사투가 펼쳐졌다. 새만금은 바로 이 갯벌을 매립해 옥토로 만들겠다며 만경평야의 '만'과 김제평야의 '금(김)'을 합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전에 만경강-동진강 하구 갯벌로 불리던 때는 바지락과 온갖 생물들이 지천이었고, 풍부한 먹거리 때문에 하늘을 가릴 만큼 많은 다양한 철새가 춤을 추던 곳이다. 주민들도 이 갯벌에 기대어 풍족하게 살았다. 특히 도요새 십만 마리의 군무를 목격한 이들은 1991년 방조제 공사의 첫 삽을 뜨던 때부터 지금까지 만신창이가 된 새만금을 부둥켜안고 새 한 마리, 조개 하나라도 더 살아남아 있는지 찾아 헤매고 있다. 대표적인 그룹이 ‘시민생태조사단’이다. 누가 시킨 것도,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수십 년간 이 일을 해오고 있다. 그 이유가 나를 새만금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아름다움을 본 죄’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고 ‘아름다움을 본 죄’만으로도 이토록 자연을 돌보는 그들 앞에서, 나는 ‘아름다움’ 자체인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사는 수도자인데도 새만금에서 벌어진 생태 학살조차 몰랐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너무 늦게야 새만금을 알게 된 것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그 후 나는 ‘아름다움을 본 죄’라고 답하는 아름다움을 본 죄인이 되어 2025년 2월 새만금 환경생태 1차 기행에 참가하였다. 새만금 내 수라갯벌과 해창갯벌, 잼버리 야영장까지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방조제가 생기고 매우 적은 해수 유통이 얼마나 새만금을 썩게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조개와 생물들이 폐사하고 철새들이 줄어들고 갯벌 생태계가 무너졌는지,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한 개발을 위해 갯벌을 육지화하는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고 수십조가 넘는 혈세를 부어야 하는지, 이미 적자운영 중인 군산공항 옆에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을 없애고 지으려는 신공항의 조류 충돌 위험이 무안국제공항의 650배에 달할 만큼 높은지 등이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창조 작품을 인간이 감히 이렇게 훼손하고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기후학자들의 예견으로 보면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하지 않는 한,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 도시들이 잠길 날이 그리 멀지 않은데 개발자들은 이 사실을 염두에나 두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도 새만금이 옥토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새만금보다는 옛날처럼 만경강-동진강 하구갯벌로 부르자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새만금이 이름값을 못 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옥토는 갯벌 그 자체로 있을 때였다. 그 위에 사람들이 거룩할 정도로 무릎 꿇고 바지락을 쓸어 담을 때였다. 철새들이 하늘을 덮을 때였다.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흙으로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의 협력자로 데려오셨다. 다만 사람이 그들을 알맞은 협력자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창세 2,18-20 참조) 우리는 정녕 새들이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생태계 균형을 이루는 중요한 협력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군무는 ‘아름다움을 보는 죄인’을 더 많이 낳고 최선을 다해 창조세계를 돌보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새겨졌던 새만금이 흐려지고 ‘새만은(새많은) 갯벌’이라는 이름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새만은(새많은) 갯벌’을 너도나도 자꾸 부르면 말이 씨가 되지 않겠는가!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1988년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했고,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서 생명문화학 석사를 받았다. 인천교구 환경사목부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에서 생태영성교육을 담당하며,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환경운동 실천 공로로 인천광역시의 ‘제1호 환경특별시민’에 선정됐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빈곤의 얼굴

서울역 앞 남산 오르막길 옆 동자동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이 있다. 화려하고 분주한 도시 한 복판 곁에, 무너지고 내려앉은 폐허가 조용하게 숨어있다. 홈리스 활동가들과 함께 쪽방촌을 방문하다 보면, 이 세상은 빈곤과 풍요, 둘로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낡고 음침한 건물 하나에 한두 평 남짓한 30~40개의 쪽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누구라도 여기 와서 보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런데 왜 여기 사람들이 사는가? 거리 노숙인뿐 아니라 쪽방, 고시원, 숙박시설 같은 ‘비적정’ 주거 공간에 사는 이들을 모두 ‘홈리스’라 부른다. 홈리스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집은 모두의 권리이지만, 실상은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로 ‘땅, 집, 일’을 들었는데, 이를 각별히 ‘성스러운 권리’라고 불렀다. 이 권리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배제된 이들이 겪는 파괴적인 현실이 빈곤, 사회적인 불의, 환경파괴, 전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빈곤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우리는 음식과 집, 일과 안전 없이는 살 수 없다. 우애와 애정 없이는 온전하게 살 수 없다. 차별과 모멸을 당하며 수치심과 외로움 속에 웅크려 기죽어 사는 것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며 충만하게 살아야 하는 인간의 길을 방해하는 가장 결정적인, 그러나 극복 가능한 ‘사회적 해악’이 빈곤이다. 빈곤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관계적이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누리는 안락과 혜택은 사실은 누군가의 비참함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빈곤이 다양한 얼굴을 지닌 것처럼 그 해법도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그러나 빠질 수 없는 하나는, 우리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의미에 따라 살기 위해,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는 인간 본연의 자유를 확보하는 일이다. 부유한 사람과 달리 가난한 이에게는 이런 자유가 없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 위한 실질적인 가능성과 역량을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페루 리마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이곳의 가난한 이들을 대표해서 한 부부가 교황을 맞이하며 “교황님, 우리는 배가 고픕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시작했다. 교황은 너무 놀라기도 하고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응답했다. “여기 하느님께 대한 굶주림이 있고 또 빵에 대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 매일 먹어야 하는 양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합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그 권리입니다.” 교황이 리마를 방문한 때는 1980년대이지만, 지금도 바뀐 것은 없다. 오히려 빈곤으로 인한 고통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때로는 그저 앉아서 듣기만 하거나, 뒤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상황은 행동을 요구한다. 신앙의 책임은 사회적 책임이다. 굶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성체성사를 말한다고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이 상황은 말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치료받지 못한 질병이 만연한 가운데서 병자성사를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이 상황은 돌봄을 요청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 배제된 이들, ‘작은 이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사셨다. 신앙은 그 부르심에 따라 헌신하는 일이다. 우리가 마치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깊고 중요한 의미에서 이런 부르심은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 부르심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1991년 예수회에 입회해 2001년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정치철학과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17년부터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을 맡아 사회적 약자와 빈곤, 불평등 문제 등에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3면

땅이 먼저 있었다. 12월 31일 밤 11시 26분 생

지구는 인류에 비할 수 없이 나이가 많다. 지구의 나이를 1년으로 잡는다면, 인류는 12월 31일 밤 11시 26분경에 태어난 정도다. 이제 겨우 30분 남짓 산 셈이다. 인간은 지구의 시작과 활동을 본 적이 없다. 지구라는 모태에서 주어진 생명의 원리에 맞게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 전부터 인간이 지구를 급격히 흔들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기 삶의 조건인 지구의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환경에 다시 영향받으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처했다. 지구의 지질 구조 안에서 살던 인간이 지구의 지질 구조를 바꾸는 행위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는 지구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간이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생물 다양성을 급격히 감소시키는, 전에 없던 변화의 동인이 된 것이다. 자연 안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바꾸게 되었을까. 인류의 조상은 언젠가 마른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불이 일어나는 일은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다. 물질들이 서로 부딪치면 마찰열이 생기고 불까지 일어나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서 일으킨 불은 인간이 추상화한 자연법칙의 효과이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표준화하고 기술로 만들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고기를 굽고 집을 데우기 위해 불을 일으키고 어둠을 밝히는 기술로 밤을 낮처럼 산다. 자연법칙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통제자로 인식했고, 그 과정에 문명도 발생했다. 그리고 자연법칙을 수단화하면 할수록 문명도 정교해졌다. 물론 문명도 자연법칙에서 찾은 기술의 작품이다. 수백 톤 되는 철 덩어리가 하늘을 나는 것도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만든 기술의 효과이다. 철이 바다 위를 다니게 되는 것도 자연법칙을 조작한 결과이다. 그러나 비행보다 더 큰 자연법칙은 추락이다. 추락이 더 심층적 자연법칙이다. 바다 위의 배는 언젠가 가라앉게 되어 있다. 가라앉아 삭아가는 것이 더 심층의 자연법칙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연법칙에서 찾아낸 기술은 언제나 더 큰 더 심층의 자연법칙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로 무수한 생명이 신음하고 있고, 인간도 신음하고 있다. 더 심층의 자연이 인간에게 도전해 오고 있다. 당연한 사실이거니와, 땅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 성경에서도 풀, 나무, 물고기, 새, 동물, 당연히 곤충과 미생물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창세 1,1-25 참조) 그런데 지구에서 겨우 ‘30여 분’ 밖에 살지 않은 인류가 앞선 생명 전체를 수단화하며 지구의 질서를 흔들어 왔다. 급기야 생명체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심각한 현실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성경의 질문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4) 지구의 시작을 보지 못한 인간이 지구를 다 안다는 듯, 원래부터 인간의 것이었던 양 행동하다가, 급기야 인간이 거의 신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때 그리스도인에게는 퍼뜩 이런 경각심이 든다. 2000년 이상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해 왔는데, 왜 세상은 무수한 생명을 짓밟는 ‘인간의 나라’로 치닫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하느님 나라’조차 인간 중심으로 사유하며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세워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닫힌 ‘실선’에서 열린 ‘점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상생적으로 소통하며, 생명의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 인간의 토대인 땅의 유기적 생명 원리를 다시 보아야 한다. 창조의 원리를 되새기고 창조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급격한 추락보다 상처가 덜한 연착륙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 최후의 과제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강남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연구했으며, 「인간은 신의 암호」, 「평화와 평화들」 외 단행본 100여 권을 출간했다. 현재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이며,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3면

임종의 존엄성…조력존엄사 법안이 던진 질문

요즘 생의 말기 돌봄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특별히 두 개의 법률안과 관련이 되는데, 첫 번째는 22대 국회에서 안규백 의원이 연명의료결정법의 일부개정안으로 대표 발의했다가 지난 7월 5일 단독 법안으로 다시 발의한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제2201412호)이고 다른 하나는 2024년 6월 26일 남인순 의원에 의해 대표 발의된 ‘연명의료결정법 일부 개정안’(제2201001호)이다. 안규백 의원의 법률안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가 자살할 수 있게 하는 ‘의사조력자살’을 법제화하려는 법안으로서, 2022년 발의된 이후 한국 사회에 의사조력자살을 둘러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의사조력자살 혹은 안락사의 법제화를 주제로 여러 설문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법률 단체도 등장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의료계와 종교계 등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계속 진행 중이다. 남인순 의원의 법률안은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이 규정하고 있던 연명의료 중단 등의 이행 시기를 임종 과정에서 말기로 확대하려는 법안이다. 그렇게 되면, 사망에 임박하기 전 그러니까 환자의 여명이 수개월이 남은 말기에도 환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된다. 연명의료 중단의 이행 시기를 말기로 확대하는 문제는 특별히 의료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의사조력자살’은 환자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초래하는 행위로써 일종의 안락사라고 할 수 있으며,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인순 의원의 법률안은 직접적으로 안락사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연명의료 중단 시기의 말기 확대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서 아직 수개월 혹은 그 이상을 살 수 있는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안락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닌다. 그리고 두 법안 모두 소위 ‘자기결정권’의 보장을 중요한 동기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은 더 크다. 안규백 의원의 법률안에 등장하는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용어는 이미 미국의 오리건주에서 의사조력자살을 법제화하는 법률에 사용된 명칭이다. 이 법률에서 말하는 존엄한 방식의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의 때와 장소, 방법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즉 죽음의 존엄성은 그저 스스로 그 죽음을 선택했느냐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질병의 고통과 싸우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마지막까지 살아내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요즘 한층 더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생애 말기 의료비용에 대한 논의다. 최근 한국은행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치료가 불가능한 생애 말기 환자의 임종 전 의료비가 막대하게 들어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논의가 환자에게 무익한 의료 행위를 하지 않고 적절한 돌봄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경제적 가치가 우선시될 경우 인간 생명의 가치는 쉽게 상대화되고, 사람들은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을 생애 말기 비용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법률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공동선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상대화시키고, 가장 근본적인 공동선인 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는 법률은 법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법률이 제정되지 않도록 노력할 엄중한 의무가 있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2006년 사제품을 받았고, 로마 성심가톨릭대학교에서 생명윤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소장, 서울대교구 가톨릭생명윤리자문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육전담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3면

사람, 희망의 안무가

익숙한 고향길, 집으로 가는 도중, 방향을 바꾸려 큰 몸체를 움직이는 트럭 하나와 뒤에서 쫓아 오던 승용차 사이에 끼어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린 적이 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초 디지털화되어 가는 시대 안에서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 모르는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아 잠시 상념에 빠졌다. 출산율 저하로 국가 소멸 위기에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경제성장을 도모하며 인공지능(AI) 선도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움직임 안에서 재생 에너지 문제와 노동시장 안에서의 인간 소외나 그에 따른 윤리 문제 등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도 개진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에 대한 세계사적 흐름을 짚어 보는 논의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진단 안에서도 한 발 더 들어가 삶의 본질적 질문을 던져보면, 가장 기초가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크게 변화됨 없이 인간 노동을 필요로 한다. 여전히 밥 짓고, 파와 마늘을 다듬어 살림을 산다. 디지털 문화가 손안으로 들어와 있어도 사람은 정성을 다해 일상을 살며 기도하고 고통을 직면한다. 기본권이 박탈당했을 땐 아낌없이 투쟁해 그것을 다시 성취하려 온몸으로 저항하여 바른길을 내기 위해 함께 연대한다. 쉽게 변화되어 가는 이 시대는 계승하고 싶은 아름다운 가치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것들이 밀려와, 머물면서 존재를 들여다보고 나는 누구이며 세상은 어떻게 움직여지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사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듯 초고속으로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여전히 수녀원에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근원을 향해 침잠해 착복, 첫 서원,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에서는 그 옛날 사막에서 수도하기 위해 머물던 은수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행성 지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전 지구적 차원의 긴급한 사안들 안에서도 늘 새로운 희망은 스며든다. 단적으로 하느님의 강생, 이 어마어마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주,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취약한 아기로 탄생하신 그 신비를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얽히고설킨 문제들,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우리는 늘 처음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거기서 다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점검하고 신발을 고쳐 신어야 한다. 희망은 있다. 희망 안에서 다시 우리 사람만의 고유한 춤사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신앙이 주는 기적, 그렇다. 우리에게는 애써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함께 보존할 기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2012년, 홀로 죽어가다 뇌사 판정을 받은 프랑스의 어린 메일린을 살려낸 기적 이야기를 익히 들은 바 있다. 가족과 메일린의 언니가 다니던 학교의 학부모는 19세기 교황청 전교회를 설립한 폴린 자리코의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들이 만들어낸 기도의 기적이 우리에게는 아주 오래된 새 희망의 표지가 아니겠는가. 매일 꾸준히 기도하며 걸어 온 이 신앙의 길을 내일도 여전히 희망하며 걸어가는 것에 우리의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레오 14세 교황에 의해 올해 11월 교회 학자로 선포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John Henry Newman, 1801~1890)이 쓴 시의 일부로 이 은혜로운 성탄의 빛 안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의 존재를 주님께 봉헌한다. “이끌어 주소서, 온유한 빛이여, 이 암울한 세상 한가운데서 저를 인도하소서. 밤은 깊은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저를 인도하소서. 제 발걸음을 지켜주소서. 먼 곳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걸음만 밝혀주시면 족하겠나이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그동안 ‘방주의 창’을 집필해 주신 이은주 수녀님, 나승구 신부님, 최진일 교수님, 정석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5-12-25 제3471호 27면

‘집’에 대하여

집은 상품이나 재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인 ‘인권’이다. 이런 인식이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1900년 전후 유럽이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도시화로 슬럼과 과밀주거가 확산하자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은 주택을 시장에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잇달아 ‘주택법’을 제정했다. 공공과 비영리 기관이 공공임대주택과 사회주택을 직접 공급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임대료 상한과 세입자 보호 장치를 제도화했다. 주택법은 집을 ‘재화’가 아닌 ‘사회 인프라’로 올려 세운 출발선이었다. 그 결과 유럽 도시의 상당 부분은 사회주택과 공공임대로 채워졌다.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늘 손꼽히는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 중에는 자가주택 거주자보다 임대주택 거주자가 훨씬 많다. 유럽의 대부분 임대주택은 사실상 평생 임대다. 세입자가 원하지 않는 한 쫓겨나지 않고, 임대료는 법으로 정해져 급등하지 않는다. 임대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며, 사회주택은 사회적 약자들만이 아닌 중산층까지 아우르는 보편적 주거 시스템이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정반대다. 한국의 임대주택은 대부분 기한부 주거다. 민간 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공임대도 대부분 5년, 10년으로 기한이 정해져 있다. 임대료는 시장 논리에 맡겨져 갱신 때마다 급등할 수 있다. 임대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한시적 대기 공간이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위태로운 집이다. 이런 불안은 “영혼까지 끌어 빚을 내어 집을 사라”는 ‘영끌’과 “얼어 죽어도 신축”이어야 한다는 ‘얼죽신’이란 프레임을 낳았다. 집은 삶의 기반이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할 투자 대상이 되었다. 역대 정부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외 없이 ‘공급론’에 매달리며 ‘자가 보유율’로 성과를 평가했고, 임대는 소유 이전 단계로만 취급했다. 임대주택 수는 늘었지만, 비중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임대를 안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목표를 바꿔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집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사 걱정 없이 안심하고 오래 살 수 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공공임대·사회주택 비율을 높이고, 단기 계약 중심의 임대차 제도를 장기 임대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신도시와 대단위 재개발·재건축 등 ‘대규모 개발 방식’ 대신, 빈집·빈상가·빈사무실을 집으로 고쳐 쓰는 ‘소규모 재생방식’으로 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 서울 SH공사가 추진했던 ‘연리지’와 ‘누리재’처럼 노후화된 저층주택을 공공에서 매입해 쾌적한 주택으로 갱신해, 원 거주자들은 거래 차액을 연금으로 받으며 새집에서 평생 살아가고, 추가된 주택을 청년과 신혼부부들에게 임대하는 좋은 대안이 많다. 주거정책은 인구·가족정책과도 결합해야 한다. 신혼부부에게 부담 없는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아이 수에 비례해 임대 기간과 평형을 10년씩, 10평씩 늘려주는 ‘다신공(다자녀 연계 신혼부부 공공임대주택)’ 같은 모델을 제도화해야 한다. 아이를 낳을수록 집 걱정이 줄어드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저출생의 해법도 열린다. 전셋값이 오를까 밤잠을 설치는 청년과 신혼부부, 계약 만료 때마다 짐을 싸는 세입자들까지 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절박한 주거 현실을 바라보며 가만히 묻게 된다. 청년 예수가 오늘 대한민국에 산다면 집을 가질 수 있었을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는 말씀처럼, 예수께서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거처를 잃고 존엄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집은 소유의 성취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인권이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이 자라는 존엄한 자궁이다. 집은 상품도 재화도 아닌 인간의 기본권 곧 인권이다. 집에 대하여 다시 묻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응답해야 할 가장 절실한 신앙의 질문이다. ‘집’은 과연 무엇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3면

머지않은 미래, 유전자는 이미 우리의 운명인가?

1997년 개봉한 영화 <가타카(GATTACA)>가 최근 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람하게 되었다. 20여 년 전에 이 영화를 볼 때와, 그동안 변화된 세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된 ‘가타카’는 매우 달랐다. 특히, 첫 자막 “The not-too-distant future(머지않은 미래)”를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하고 생각했다. 앤드루 니콜(Andrew Niccol)이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모두 맡았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90년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앤드루 니콜은 이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윤리적 우려와 경고를 이 영화에 담아냈다. 머지않은 미래 사회에서 인간은 적격자(valid)와 부적격자(in-valid)로 나뉜다. 태어난 아기의 피 한 방울이면 그 아기의 모든 신체적·지적 잠재력, 수명까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적격자의 지위는 체외 수정을 통해 배아를 생성하고 유전자 검사를 거쳐 우성 유전자를 가진 배아를 선별한 뒤, 그 배아의 사소한 결함도 유전자 편집을 통해 모두 제거된 채 태어난 사람에게 주어진다. 유전자 선택을 거부하고 부부의 사랑 행위 안에서 자연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를 지칭하는 ‘신앙에 의한 출산자(Faith birth)’에게 사회는 ‘부적격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자연 임신 출생자들은 건강 여부와 상관없이 최적화된 완벽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불확실성 때문에 부적격의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질 수 있는 직업 또한 한정되어 있다. 현실에서 유전 정보에 기반을 둔 고용 접근성의 제한 시도는 공평성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특권을 누려도 좋은 사람은 없다”는 전제하에 각 개인의 이익과 복리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특권층은 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그 일원이 되기를 열망하기도 한다. 그 특권층에 도달할 사다리로서 우월한 유전자는 매우 매혹적이다. 최근 한 언론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이 유전자 조작 아기 실험을 추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일부 기업은 유전자 편집 없이도 ‘다유전자 스크리닝(polygenic screening)’을 통해 특정 특성을 예측하는 기술, 이른바 ‘진화형 선택 도구’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에서도 무분별한 신생아 유전체 검사 관행이 지적되었는데, 이는 유전적 운명론이 현실로 스며드는 위험한 징후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배아 또는 태아에게 시행되고 있는 유전자 검사를 가족계획을 위한 선별이나 낙태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생명윤리적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차별을 거부하면서도 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이 사회의 모순에서 우리의 머지않은 미래가 어떤 사회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덧 보조생식술은 저출산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매우 유용한 도구처럼 비치고 있다. 여기에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결합되면서 윤리적 통제가 어려운 기술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부모가 자녀의 유전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할 때, 비윤리적 선택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어 이기적 이타주의로 포장될 위험이 커진다. ‘차별을 거부하지만 차별을 강화하는’ 모순된 사고가 이미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했다. 그렇다면, 입법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출산이라는 명분이 이 위험한 사고의 흐름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생명기술을 허용하고 있는가?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2015년 프랑스 파리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서 전 세계 195개국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하기 이전(1850~1900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가능하면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파리협정’을 맺었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산호초의 70~90%가 멸종하며, 극심한 폭우, 가뭄, 홍수, 태풍, 산불 등 각종 이변이 일어나 지구와 인류를 괴롭힐 것이 예측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세계기상기구는 산업화 이전 대비 1.55℃가 올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제 인류라는 종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인가? 그래서 단순한 경고는 위기를 넘어 재앙이라고 표현된다. 이미 재앙의 시기는 다가온 것 같다. 작년에는 빗방울이 살짝 보이기만 해도 반가워 뛰쳐나온다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하루 만에 1년 치 강수량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다. 성경 말씀대로 사막에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사태였다. 이런 위기 상황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11월 10일부터 21일까지 브라질 벨렝에서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가 열렸다. 아마존을 배경으로 살아오던 남미의 8개 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선주민(원주민이라는 말과는 미묘한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요즘 사용되는 단어) 대표들이 에콰도르에서 출발해 벨렝까지 3000km를, 아마존강을 따라 항해했다. ‘물의 어머니’라는 배를 타고 그 먼 거리를 횡단한 이유는 정작 가장 적게 온실가스를 배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나라의 대표들, 트럼프도, 푸틴도, 시진핑도 오지 않은 회의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몸짓을 더욱 결연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현장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보내온 레오 14세 교황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간곡한 당부에도, 행사 결과에서 ‘화석연료 퇴출 로드맵’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는 뒤로 미뤄졌다. 그리고 강대국과 산유국의 입김이 작용한 그저 그런 절충안을 마련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기 전에도 한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자연보호운동이 있었다. ‘자연보호’ 헌장이 선포되고 국민적 운동으로 전국을 휩쓸었다.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하여 멸종위기 식물 복원, 하천 정화 등 환경보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운동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려워졌다. 폐지를 모으고, 일회용품을 안 쓰겠다고 선언하고, 재활용을 생활화하자고 했고 이를 위한 ‘아나바다’ 운동도 있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단순한 운동이었지만 국민의 호응은 대단했다. 당시 각 성당에서는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말자고 스테인리스 컵을 사서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비치하기도 했다. 성당 한구석에는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친환경 비누를 만들고, 공병과 폐지를 분리해서 수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풍경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아껴 쓰고 고쳐 쓰기보다는 싸고 편리한 일회용 세상이 되었다. 가정용품, 생활용품들도 고장이 나면 고치기보다는 ‘천원 가게’로 불리는 저가형 생활용품·잡화 전문 판매점에서 싼 맛에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일회용품은 차고 또 차는, ‘그래도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기후 위기와 지구 온도 1.5℃를 이야기하기 훨씬 전에도 지켜지던 소중한 가치들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걸까?’ 우리의 일상에서 살리지 못한다면 세계 어떤 유력한 회의를 통해서도 이루지 못하는 창조 보전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23면

사랑의 통치 앞에 무너져 내릴 악이여!

수녀원 성 요셉 상 앞에는 늘 꽃이 꽂혀 있는데, 누군가 그 옆에 연둣빛 모과 두 개를 올려 두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런 황금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흘러도 생명이 있는 것은 여전히 있는 그대로 존재함으로 자신의 값을 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은 이렇게 여여(如如)한데 인간의 악행은 세기를 거듭해 순수한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비인간적, 비윤리적, 비상식적 삶의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적 현상들은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돈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거센 세상의 흐름 안에서 무섭게 드러난다. 전쟁을 조장하는 몇몇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소지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받아봤을 보이스 피싱도 개인의 삶을 무너트리는 폭력이다. 스마트폰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거기서 들려오는 지시에 따라 가슴을 조이며 은행으로, 더러는 희망에 부풀어 먼 타국으로 향하고, 익숙한 이름으로 온 낯선 청첩장을 열어보다 정보를 다 털리기도 한다. 이 국제적 조직이 순박한 사람들의 손안으로 들어와 그들 삶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일부는 국가와 결탁해 부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니 당해낼 이 누구인가. 제1차 세계대전 후 팽배해진 세속주의와 무신론을 경계하면서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제정한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허름한 말구유를 요람 삼아 극도의 가난 안으로 들어오셨고, 최후는 십자가 극형이었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마태 8,20 참조) 그분의 삶은 가난으로 점철되었으나 부족함이 없으셨다. 따뜻한 동행으로 함께 머물며 제자 됨의 도를 배워 익힌 당신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분이시다.(마르 6,8 참조)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 외에는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당부다. 이른 나이에 생의 마무리를 할 시점이 왔을 때, 그분은 사랑하시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시며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것의 진면목을 드러내셨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 군림하는 것이 왕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끌어안아 함께 걸어가는 것(시노달리타스)이 진정한 왕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거대 사기행각으로 부를 축적하는 조직, 국익을 위해 과도한 관세를 물리거나 군사력으로 가난한 지역을 초토화하는 반인륜적 작태들은 사랑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보편적 왕권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리라. 불신과 폭력으로 가득 찬 이 무서운 사회에,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의 통치’가 진정한 다스림이자 부(富)임을 보여 준다. 본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텔로스(τέλος, telos)’라는 용어는 ‘완성’ 혹은 ‘목표’를 뜻한다. 이 텔로스는 구원 역사의 완성을 의미하는 ‘혼인 잔치’라는 뜻으로도 쓰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피조물과 하나 되신 예수님의 강생으로 시작된 인류 사랑의 여정이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요한 2장, 묵시 19장 참조) 가난한 말구유에서 시작된 탄생에, 처절한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인생이 어찌하여 사랑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 곧 부활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는 늘 성모님께서 계셨다. 그러기에 그분을 ‘하늘의 문’이라고 일컫는다. 하느님이 없는 듯 사는 이들에게 다른 이의 것을 삿된 방식으로 취하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나 되겠는가. 성모님께서는 영혼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고 끊임없이 아드님 앞으로 데려갈 채비를 하실 것이다. 무시무시한 악들은 가난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섬기는 통치권에 의해 구원으로 채워질 것임을 믿으시면서.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23면

우면동성당과 서귀포 솔숲

서울대교구 우면동성당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리풀 2지구 공공주택 건설사업’에 성당과 인근 마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서울의 주택난 해소를 위한 불가피한 공익사업이라 설명하지만, 신자들과 주민들은 공익의 이름으로 신앙의 터전을 지우는 일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아파트를 건설할 때뿐만 아니라 오래된 동네를 재개발·재건축할 때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주택 건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신개발이든 재개발이든 기존의 현황을 세세히 살피고 남겨 보존할 곳과 철거하고 새로 지을 곳을 구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구역 경계 안의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 짓는 거칠고 무자비한 건설 방식을 고수하는 게 문제다. 존치를 원하는 성당과 식유마을은 구역 경계의 서쪽 끝에 있고, 역시 보존을 바라는 송동마을은 동쪽 끝에 있다. 사업 구역에서 이곳을 제외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이곳들은 존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주택을 지으면 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서울 강남구 자곡동·세곡동 일대에 추진했던 보금자리주택 사업은 기존 마을을 철거하지 않고 빈 땅에 공공주택을 조성했다. 오래된 옛 동네 단독주택 마을과 3층 다세대주택, 15층 안팎의 아파트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새로운 주택공급과 오래된 공동체 보존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선례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행정은 다시 ‘전면 철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왜 그럴까? 더 쉽고 빠르게, 더 많이 짓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서울시와 국토부는 부디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성당과 마을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지혜롭고 유연한 해법을 찾길 바란다. 비슷한 일이 제주 서귀포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서귀포 옛 도심을 가로지르는 4.3km 우회도로 건설로 ‘100년 솔숲’이 사라질 위기다. 서귀포 우회도로는 1965년에 도시계획도로로 지정되었다. 60년 전의 도시계획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실행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사이 서귀포에는 이미 충분한 도로망이 생겼고, 솔숲 일대는 초등학교·도서관·학생문화원 등 문화시설이 모인 보행 중심 생활권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자동차가 쌩쌩 달릴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행정은 여전히 ‘도로 건설이 곧 발전’이라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민들이 즐겨 찾는 솔숲과 잔디광장을 밀어내며 넓은 차도를 새로 내려 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인사동 입구의 동헌필방 등 붉은 벽돌의 근대 건축물을 관통하는 도로계획선이 일제강점기에 그어져 200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 인사동은 이미 보행자 중심의 문화지구로 자리 잡아 오래된 건물까지 헐어가며 도로를 낼 이유가 없었다. 결국 2000년 ‘인사동 지구단위계획’을 세울 때 도시계획도로를 해제했다. 보행이 우선되는 거리에서 넓은 차로는 필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샹젤리제 거리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 파리를 상징하는 이 거리는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인데, 안 이달고 시장은 차로를 왕복 4차선으로 대폭 줄이고, 남은 공간을 보행 공간과 녹지로 바꾸는 ‘샹젤리제 정원화’ 계획을 세웠다. 자동차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다. 도로를 넓혀야 발전한다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차도를 좁혀야 도시가 살아난다. 우면동성당과 서귀포 솔숲은 다른 장소이지만 본질은 같다. 하나는 신앙의 숲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숲이다. 오랜 시간 공동체의 기억이 배어있는 곳이라면 성당이든, 마을이든, 숲이든 함부로 철거해서는 안 된다. 개발지구 안에도 남겨야 할 섬이 있다. 성당과 마을과 숲은 단순한 건물이나 나무들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혼이 담긴 장소(Genius Loci)’다. 하느님의 숨결 같은 ‘장소의 혼’이 꼭 지켜지길 바란다.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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