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워싱턴, 정치의 두 얼굴

시간은 자주 과거의 고통을 빌려 현재의 길을 묻고는 한다. 지난 4월 13일은, 7세기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의 위협에 맞서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다 유배지에서 굶주려 숨을 거둔 성 마르티노 1세 교황의 축일이었다. 지금 로마와 워싱턴 사이에는 1400년 전만큼이나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를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은 정신 차리고 상식을 발휘하라”며 날 선 비난을 쏟아냈다. 교황이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이런 언사를 보면, 당파적 ‘강권 통치’의 상태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미 미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 시기에 임명된 블레이즈 수피치, 조셉 토빈, 로버트 맥엘로이 세 추기경을 통해 트럼프의 강경 정책에 맞설 윤리적 보루를 마련해 두었다. 추기경들은 낙태뿐 아니라 이주민 문제 역시 핵심적인 생명 윤리임을 선언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공포 정치에 맞서왔다. 갈등이 정점에 달한 것은 미국의 이란 침공이다. 맥엘로이 추기경은 이 전쟁이 목적이 불분명하고 최후의 수단도 아닌, ‘일부러 선택한 비극’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피치 추기경은 폭격 영상을 편집해 오락처럼 소비하는 백악관의 행태를 두고 ‘역겨운 비인간화’라고 규탄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취임 초기부터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단순히 외교 현안이 아니라 도덕적 위기와 생명의 문제로 봤다. 평화가 그 자체로 추구되는 선이 아니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은 이 세계가 얼마나 깊게 ‘힘의 욕망’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것은 이익의 갈등을 전쟁으로 증폭시키는 정치의 근본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세 추기경도 성명을 발표하며 교황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강대국의 대통령 한 사람이 벌이는 광란을 보며 교회는 한가하게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가(MAGA) 세력은 교황이 정치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며 끊임없이 불평한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문제에는 입을 다물라는 소리일 뿐이다. 반면, 인간 존엄과 공동선, 연대의 기준으로 공적 질서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행위가 정치라면,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정치적이었다. 교회가 불평등, 낙태 문제, 생명 옹호, 사회 복지, 이민 정책에서 지속해서 공적 발언을 하며 세상에 헌신한 것은 복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다루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공공의 삶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 혼돈과 만성적 빈곤 해결을 위해 교회가 오랫동안 실천해 온 ‘육신의 자비 활동’은 모두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정치는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필요한 가치들을 찾아내 가꾸어 나가는 공공적 삶의 기술이다. 그래서 교회의 정치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두고 형성해 가는 정체성의 문제다. 교황의 목소리는 권력이 계산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기억하는 언어에서 출발한다. 전쟁은 생생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사건이며, 평화는 협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할 생명의 원칙이다. 신앙인은 공적인 삶에서 신앙에 기반한 가치를 뒤로 제쳐둘 수 없다. 신앙은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교회가 아니라, ‘어떻게’ 정치적인 교회가 되는가이다. 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인간의 길을 묻는 교황의 용기는 증오와 폭력에 길들어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내내 붙들고 있어야 할 윤리적 삶의 지표가 된다. 교황의 전쟁 반대는 이상주의적 호소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이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정치적인 형태를 띤다. 전쟁과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 평화를 끝까지 추구하는 일은 가장 불편하지만, 또한 가장 필요한 정치일 것이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3면

설거지의 철학

요리한다, 밥상을 차린다, 식사한다, 식탁을 정리한다, 설거지한다, 밀가루 반죽을 한다, 빵을 굽는다, 함께 먹는다, 설거지한다, 국을 끓인다, 김장김치를 썬다, 밥상을 차린다, 밥을 먹는다, 설거지한다, 라면을 끓인다, 설거지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기. 하지 않으면 단박에 표나지만, 열심히 해도 표가 안 나는 일들이다. 생색을 낼 만한 일도 아니다. 식구 외에는 잘한다는 칭찬도 별로 하지 않는다. 가족조차 무관심하면 기운이 빠지는 일이다. 매일 쌓이는 설거지가 특히 그렇다. 청소는 하루이틀 건너뛸 수 있지만, 설거지는 하루를 넘길 수 없다. 요리는 “잘 먹었다” 인사도 받고 누군가를 살게 하는 유의미한 일이기도 하지만, 설거지는 주변의 반응도 별로 없고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단순노동이다. 그런데 하지 않으면 음식을 만들 수도, 먹을 수도 없고 생활도 안 된다. 하기 싫어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안에서든 성당에서든 청와대에서든 교황청에서든,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해야 하지만 의미는 가려져 있는, 거의 허드렛일 취급을 받는다. 설거지도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일까.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 ‘객체-지향적 존재론’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쉽게 정리하면 이런 뜻이다. 인간만이 주체가 아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객체다, 인간은 객체를 다 파악할 수 없고, 모든 객체는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고유의 깊이가 있으며, 인식할수록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는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그 인식에서 벗어나 깊은 심연으로 끝없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설거지. 그 대상인 밥그릇 모두 이 이론의 사례로 삼을 수 있다. 설거지는 주방의 일인가 싶으면 주방 밖으로 멀어지고, 건너편 집 부엌에서 벌어지는 일인가 싶으면 누군가의 직장 생활과 연결되고, 사실상 인간 생존의 세계가 된다.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인가 싶으면 식탁에서의 대화로 이어지고 가족 관계, 더 큰 인간관계와 연결된다. 이렇게 설거지는 주방 밖으로 물러나고, 확장되고, 끝없는 심연으로, 전 우주로 이어진다. 설거지가 우주적 행위이자 사건이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주방 세제, 계면활성제, pH 조절제, 향료, 보습제, 방부제의 세계로 끝도 없이 나아간다. 식후에 마셨던 커피, 잔에 남은 얼룩, 아프리카의 태양과 토양, 커피 볶는 이의 땀, 원두 운송선의 화석 연료. 남은 김칫국물, 강원도 고랭지, 대형트럭과 한겨울 아스팔트, 배달업자의 방한복, 누군가의 생존과 생활. 커피 한 잔은 아프리카까지 멀어지고, 밥상에 흘린 김칫국물은 강원도 배추밭과 농부의 손으로 연결되며, 태양까지 나아간다. 경계가 끝도 없이 확장된다. 설거지는 커피 한 잔에 얽힌 우주적 인연의 고리(多)를 지금 여기서 수세미와 그릇을 씻는 손과 시원한 물줄기 안에 수렴시키는(一) 과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 속의 여럿(一中多)’의 사건이다. 주방에서 벌어지는 작은 행위면서 우주로 이어지며 물러나는 거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하나 속의 여럿(一中多)’의 실례다.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있다’는 종교적 세계관은 설거지통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현된다. 무의미에 가까운 일상의 반복이 우주적 성소가 된다. 음식 찌꺼기와 깨끗한 그릇, 부정과 정결은 둘이 아니다. 숟가락 하나의 더러움을 닦아내는 행위가 생명의 원리가 된다. 소소함에 담긴 우주적 진리, 불교에서는 그것을 ‘일즉다 다즉일(一即多 多即一)’,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라 한다. 그렇게 작은 주방 속 설거지는 불교의 언어로 하면 꽃들로 장식된 화엄(華嚴)의 세계가 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2베드 3,8 참조)것이 주님의 세계 아니던가.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23면

의사조력자살과 호스피스 완화의료

우리는 가족 혹은 가정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 아마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녀로 구성된 3~4인의 가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한 가족의 모습을 흔히 전통적인 가족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족상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소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소위 정상 가족에 해당하는 3~4인 가구의 비율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1인 가구의 비율은 현재 40%를 넘어섰다. 그런데 1인 가구의 비율 증가는 특별히 의사조력자살이나 안락사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무관할 수가 없다. 1인 가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돌볼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며 이는 병에 걸렸을 때, 안락사가 유일한 해결 방안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돌봄의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의사조력자살이 법제화된다면 가장 먼저 위축될 수 있는 돌봄의 영역이 있다. 바로 호스피스 완화의료이다. 1967년 최초의 현대적 호스피스 센터를 설립한 시슬리 손더스(Cicely Saunders)는 조력자살과 안락사에 분명히 반대하였으며, 호스피스를 그러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대안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년간 조력자살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던 네덜란드의 경우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의사조력자살이 세계 최초로 법제화된 미국 오리건주의 경우 말기 환자의 통증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례가 증가했다. 일정 기간 미국의 다른 주에서는 1832개의 호스피스 시설이 개설되는 동안, 오리건주에서는 고작 5개의 호스피스만 개설되었다. 조력자살의 법제화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이는 미국의 경우 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를 포함한 많은 의료 단체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호스피스가 애초에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중립적인 생각은 많은 호스피스 종사자가 조력자살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견해를 더 이상 견지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호스피스 돌봄이나 완화의료가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은 환자의 고통과 통증을 줄여주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타인이 환자와 함께 고통을 겪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팀, 가족, 돌봄 제공자에게는 그들과 고통을 겪을 기회가 주어진다. 고통을 겪을 기회를 준다는 것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환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은 환자와 함께 그들의 삶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통이 지닌 의미의 발견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참된 연대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그러한 태도는 이 사회가 참으로 인간다운 사회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간다움의 참된 척도는 고통과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중요하게 판가름됩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고통을 겪음’(compassio)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안으로 견디도록 돕지 못하는 사회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 그러나 개인들 스스로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면 그 사회는 고통 받는 구성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8항)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3면

팔현습지가 던진 질문, 언제까지 인간만이 주인공일까?

팔현습지는 금호강이 길러내는 안심습지, 달성습지와 함께 대구의 3대 습지 중 하나이다. 대구 수성구 고모동과 동구 방촌동 일대 금호강 변에 발달한 하천 습지인데, 3km 구간 안에 하식애(강이 깎은 절벽)를 포함한 산지, 초지, 습지, 강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생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멸종위기 2급인 수리부엉이와 수달, 삵, 담비, 얼룩새코미꾸리 등 25종이 넘는 법정보호종 야생동물과 식물, 곤충 등 다양한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집이 되었다. 2025년 3월 한일 어류 연구자들도 팔현습지를 탐방하고, 도심을 관통하는 이런 습지는 매우 드문 귀한 생태적 공간이라 칭송했다. 지난해 초 우연히 기사를 통해 알게 된 팔현습지를 초여름에 찾아가 보았다. 마침 이곳이 본가와 지척이었는데 등잔 밑이 참 오래도 어두웠었다. 강촌 햇살교를 건너니 왼편에는 안타깝게도 수성 파크골프장이 습지의 절반을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수많은 습지 생명이 강제 철거당했을 시절이 겹쳐 보였다. 오른편으로 들어서니 과연 기사에서 보았던 팔현습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왕버들이 태곳적 기운을 뿜으며 강변에 무리 지어 있었고, 하식애는 갑옷 입은 장군처럼 서 있었다. 그 사이엔 꽤 넓은 초지도 펼쳐져 있었다. 순간 거룩함이 느껴져 모세처럼 신발을 벗어야 할 것만 같았다.(탈출 3,5 참조) ‘저 절벽이 2월에 새끼 세 마리를 낳은 수리부엉이 부부 ’팔이‘와 ’현이‘가 사는 집이라고 했는데…’ 하고 눈을 드니 실제로 수리부엉이 2마리가 절벽 중턱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첫 방문에 기대 이상의 환대를 받은 것 같았다. ‘도시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니… 정말 잘 보존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다. 팔현습지의 귀함을 일찍이 알아본 사람들의 호소도 간절한 기도처럼 안내판마다 적혀있었다. ‘낮에는 수리부엉이가 쉬는 시간이니 소음을 내지 않도록 할 것’, ‘10~11월엔 남생이의 짝짓기 기간이니 물가에 접근하지 말 것’ 등이다. 그런데 이곳에 304억 원을 들여 사람을 위한 1.5km 길이의 산책로와 길이 886m, 높이 8m 규모의 보도교를 설치하려는 계획이 있어 3년째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보도교가 수리부엉이 집 바로 앞으로 나게 된다는 것이다. “Oh, No!” 사실 팔현습지에는 이미 자연스럽고 다소곳한 산책로가 나 있다. 건너편 강변에도 인간을 위한 산책로가 너무나 잘 조성되어 있다. 자전거길, 맨발 걷기 길까지. 굳이 수리부엉이 집 앞에 배를 가르듯 보도교를 세운다면 인간의 무례와 욕심이 너무 크지 않은가! 선물 같은 팔현습지를 자연 그대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 3장에서 생태위기의 원인으로 강력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를 깊이 성찰하고 있다. 레오 14세 교황도 2025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에서 성경이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횡포”(「찬미받으소서」 200항)를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창세기만이 아니라 과학이 밝힌 지구 역사에서도 인간은 모든 창조세계에서 맨 마지막에 태어난 가장 어린 피조물이다. 먼저 창조된 선배 피조물들이 없다면 인간은 하루도 살 수 없다. 하느님은 새 한 마리, 나무 하나, 물고기를 위해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모두 이 땅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래서 생태 사상의 선구자인 토마스 베리도 저서들에서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라 하였다. 하느님과 창조된 모든 것, 인간이 함께 사는 공동의 집 푸른 지구에서 언제까지 인간만이 주인공일 것인가?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23면

수녀님의 마지막 미사

지난 1월, 재개발을 앞둔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에서 큰 화재가 났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200여 주민들이 한순간에 집을 잃었다. 23년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회 이정숙(루치아) 수녀도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들의 공부방, 작고 초라한 방 한 칸이 전부인 수녀원도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다. 그 세월을 아이들을 돌보며 주민들과 밥을 나눴던 곳이다. 하루 250여 명 분의 식사를 준비했는데, 주방에 냉장고만 8대가 있었다. 그 누구도 관심 두지 않던 이들을 위해 함께 일했던 분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수녀님의 헌신도 각별했다. 새벽 5시, 어느 빈집에서 시작된 불길이 솜과 비닐, 합판으로 지어진 판잣집들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보며 수녀님은 ‘그리스도의 몸’이 불타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이 마을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바글거리며 웃고 떠들던 어린이집과 노인들이 따뜻한 국 한 그릇에 잠시 시름을 잊던 공간이 화염에 싸여 사라지는 모습은 한 편의 거대한 수난곡이었다. 세상 끝으로 밀려나 금방이라도 사그라져 버릴 것 같았던 주민들과 함께 수녀님은 기쁨과 행복을 나누고 싶었다. 폭력과 도박, 술에 절어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근심 가득한 말들은, 막상 돌멩이가 되어 다시 날아왔다. 이럴 때 수녀님을 견디게 한 힘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의 전례였다. 올해 부활 대축일 미사가 구룡마을 공동체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다. 부활 전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이 마지막 미사가 실제로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짐작할 수 있는 하나는, 말 그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기억이 될 것은 분명하다. 죽음 같은 현실을 생명의 활력으로 바꾸는 사랑의 역동 없이 여기서 견디기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사로 대표되는 전례는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며, 살아가는 특권적인 장소다.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긴급하며, 필요한 일은 없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이 사랑의 요구에 직면한다. 전례 공간은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더 나은 길을 찾고, 방향을 다시 가늠하는 곳이다. 전례의 공간 안에서 온 세상은 도전받고 새롭게 질서 잡힌다. 이미 우리 삶 자체가 전례적이어서, 단지 성당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세계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전례는 우리를 날마다 세상으로 보내는 환송식이다. 전례에 참여하며, 우리는 자신에 대한 걱정은 조금은 덜 하게 되고, 세상을 어떻게 잘 돌볼 수 있는지는 더 고민하게 된다. 전례는 아주 구체적이고 강력하다.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어느 가난한 이웃이 점심은 먹었는지,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머물 지붕은 있는지 염려한다. 자비송을 부를 때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려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고백한다.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섬기는 방식이며,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사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고 묻는다.(10권 6장)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인간, 사물, 사건에 참여하며, 우애와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들은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어지는 ‘사랑의 사건’에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다. 조금만 주의 기울여 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랑의 사건이 넘친다.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곳에 화해의 말을 건네고,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함께하자는 작은 손을 건네는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건너가도록’ 도울 때, 그곳이 바로 부활의 현장이다. 루치아 수녀는 신당동 오래된 동네, 광희문 순교성지가 감싸고 있는 골목 한구석에 무료 밥집 ‘달그락’을 열어 그 사랑을 이어간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3면

힘에 대하여

만물은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물리학에서는 자전거를 움직이고 돌을 들어 올릴 때, 이 물체에 가한 물리량(길이, 시간 등)을 ‘힘’이라고 한다. 힘에는 방향성도 있다. 수레를 미는 힘과 끄는 힘은 양적으로는 같지만, 방향이 다르다. 물체를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는가 하면, 서로 밀어내는 척력도 있다. 같은 힘으로 건물을 지어 올리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크기는 같은데 살리는 힘과 죽이는 힘이 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힘도 있다. 돈, 지위, 명예 등을 기반으로 인간관계에 작용하는 힘들이다. 무력은 개인이나 집단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으로 나타난다. 권력, 재력, 무력 등을 기반으로 국력의 크기도 정해진다. 현실에서 보통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힘들이다. 이 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크기를 앞세워 경쟁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크기와 세기로 우열을 매기니, 위계가 생기고, 차별을 당연시한다. 너를 누르고 내가 올라가려 애쓴다. 저마다 힘들을 경쟁적으로 키워간다. 그런데 그럴수록 키우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안보를 추구하는데 도리어 불안해지는 ‘안보 불안’의 역설은 자기를 위한 힘들을 나만이 아닌 모두가 쌓아가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어디 그뿐이던가. 하나를 만들면 둘을 더 만들라며 재촉하는 성과 지향 사회의 요구, 자유경쟁을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속박, 인공지능을 키울수록 ‘인간지능’은 밀려나는 모순은 계속 증폭된다. 근시안적인 인간은 이 힘을 이용해 짧은 성과를 누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에 속박되어 간다. 비인간 존재까지 죽임의 세계로 몰아간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힘을 어떤 방향으로 추구해야 할 것인가.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는 모든 힘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힘의 여러 형태라고 생각했다. 물체의 속성을 갖지 않으면서 물체보다 앞서 주어져 있는 거대한 실재가 물체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물체를 물체 되게 해주는 ‘장이론(Field Theory)’으로 발전시켰다. ‘힘의 장’이 개별 자연 사건들로 현시한다는 것이다. 대문자 ‘힘(Force)’ 안에서 소문자 ‘힘들(forces)’이 드러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은 힘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서는 해명하지만, 가치와 방향까지 묻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힘의 가치를 묻고 그 가치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이들도 있다. 만물을 움직이는 힘에서 옳은 가치를 찾고 구체화하려는 운동도 지속되어 왔다. 종교가 대표적인 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힘의 장에서 보편과 공평이라는 가치를 보고, 차별과 소외를 넘어서라는 요청이다. 하느님의 힘 안에는 선과 악, 의와 불의의 이분법이 없으니, 누군가에 의한 죽임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큼도 작음도, 많음도 적음도 온전한 하느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온갖 생명들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런 원리를 깨닫고 타자의 죽임이 아닌 모두의 살림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 부활 대축일의 메시지일 것이다. 부활은 남을 죽이고 자신만 사는 이에게 적용되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해와 비는 모든 이에게 비추고 내린다는 원천적 사실을 드러내는 삶이 부활의 삶이다. 하느님은 죽이는 힘이 아닌 살리는 힘이기에 그렇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7면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의 문제점

2024년 6월 26일 민주당 남인순 의원의 대표 발의로 연명의료결정법의 일부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개정안의 핵심은 현재 연명의료결정법이 연명의료의 중단이나 보류를 이행할 수 있는 시점을 임종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면, 그 이행의 시기를 말기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법안은 기존의 법안에서 임종 과정이라는 용어만을 삭제하면서 매우 단순하게 개정되었다. 남인순 의원의 법안 발의를 전후로 한국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도 이런 논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연명의료의 중단이나 보류는 현재 환자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아예 적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연명의료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 가운데 치료적 효과가 없이 임종 과정만을 연장하는 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명의료는 고정된 목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연명의료결정법은 인공호흡기를 연명의료의 목록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인공호흡기 자체가 연명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임종 과정, 즉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 있을 때 연명의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이나 보류의 이행은 환자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이는 죽음을 인위적으로 초래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생명의 연장을 중단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행 시기를 말기로 확대할 경우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생명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행 시기의 말기 확대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이행 시기의 말기 확대는 의사의 책임을 말기에 대한 판단으로 제한하고 의료에 대한 결정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온전히 맡겨버린다. 지금까지 담당의사는 환자가 임종 과정에 있는지를 판단했다면, 이제는 환자가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을 판단하게 되며 이후에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이행 시기가 말기로 확대된다면, 의사는 환자나 가족들의 일방적인 결정을 수행하는 역할로 전락하고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까지 중단할 가능성도 커진다. 둘째, 이행 시기가 말기로 확대된다면 환자에게 무익한 의료를 판단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현재 법이 규정하고 있는 임종 과정, 즉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는 대부분의 적극적 치료가 환자에게 부담과 고통만을 주는 무익한 의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말기가 되면 환자의 상태는 더 다양해지고 무엇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무익한지를 판단하기는 그만큼 더 어려워질 것이다. 세 번째는 비암성 질환의 경우 이행 시기의 말기 확대는 더 큰 어려움과 위험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현재 이행 시기의 말기 확대를 추진하는 중요한 이유가 말기와 임종 과정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인데 이는 암 같은 일부 질환에만 해당한다. 호흡기 질환 환자의 경우 현재의 말기 판단 기준에 부합하지만 환자가 수년간 생존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암이 아닌 질병의 경우는 그만큼 말기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만약 현재 질환별로 존재하는 말기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경우, 더 살 수 있는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는 상황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연명의료결정법의 유일한 목적처럼 내세우는 분위기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의 또 다른 목적이자 생명의 가치를 고려하게 하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 공존의 핵심 가치인 생명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 때 그 피해는 태아나 말기 환자 같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먼저 돌아간다. 우리나라의 낙태죄 폐지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23면

못다 한 순천만 국가정원과 습지 이야기

지난달 방주의 창에 이어 순천만 국가정원이 세계적으로도 생태와 경제발전의 모범이 되는 이유를 좀 더 나누고 싶다.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훌륭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순천만이 생긴 모습 그대로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가꾸어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순천만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로 구성된 생태지역을 말한다. 국가정원은 다채로운 볼거리 조경 때문에 다소 인공적인 듯하지만, 여전히 멋지고 아름답다. 반면에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습지 쪽은 순천 시내를 흐르는 동천이 남해로 들어서며 천혜의 갯벌을 펼치고 있다. 갯벌 800만 평과 갈대군락 170만 평을 지닌 세계 5대 연안습지이다. 사철 아름답지만, 특히 습지의 겨울철엔 동천을 중심으로 한쪽은 엄청난 금빛 갈대밭이, 다른 쪽은 넓은 안풍 들판에 앉아 합창하는 수많은 철새가 보는 이의 귀와 시선을 사로잡는다. 더욱이 강과 갯벌과 논을 오가며 휴식과 식사를 해결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흑두루미와 다양한 새들의 군무를 보노라면 장엄하고, 또 장엄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듯한 습지와 정원이다. 정녕 순천만의 고유한 모습대로 잘 조성되어 마치 자기다워서 자유롭고 매력적인 사람 같다. 다음으로는 순천 사람들의 공동체적 생태감수성 때문이다. 2006년부터 생태 기반 경제도시 만들기를 공약으로 삼고 국가정원을 추진한 시장들, 이에 손발이 되어주는 공무원들 그리고 협력하는 시민들의 노력은 새들의 군무만큼이나 아름답다. 분명히 불확실한 결과에 대해 반대도, 의심도 컸을 텐데 결국은 협력했기 때문이다. 정원을 만들려고 아스팔트 도로를 뜯어내고 잔디를 깔았다. 찾아오는 새들에게는 친환경농업으로 지은 볍씨들을 들판에 뿌려주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다. 생태계서비스 지불제에 따라 새들에게 쌀을 준 농부는 환경부에서 대가를 받는다. 일본 이즈미시에 서식하던 흑두루미들이 조류 독감보다 전깃줄에 걸려 죽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2009년 논에 즐비했던 282개의 전봇대를 제거하였다. 세계 최초의 일이다. 그랬더니 100여 마리였던 흑두루미가 지금은 8000여 마리로 늘어났다. 전 세계 흑두루미의 절반이 순천만을 찾아와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머문다. 겨울이면 이 장관을 보기 위해 많은 이가 순천만을 찾고, 흑두루미와 온갖 새들도 노래하며 군무를 펼친다. 마침내 2023년 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했을 때는 겨우 27만여 명의 순천 시민이 그 한 해에만 980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해 1등 관광도시로 우뚝 섰다. 2025년에도 1위였다. 무려 333억 원의 수익에 생산유발효과가 1조를 넘었다. 이쯤 되면 정원 하나만으로도 생태와 경제 모두를 살린 자랑스러운 모델이지 않은가? 세계 50여 개국 전문가들이 와서 노하우를 배운다. 가보면 정말 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순천이 대한민국 생태 수도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철새들이 때마다 이곳을 찾아온다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라 아직 인간이 살만한 곳이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강화 우리마을에 날아다니는 기러기 떼를 볼 때도 참 반갑고 또 고맙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0년 1월 1일 세계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절박한 호소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14항) 노관규 순천시장도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인간의 욕심을 조금만 줄여주면 굉장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같이 이렇게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롭습니까!” 그래서 어디선가 ‘무조건 개발’부터 하려고 덤벼드는 곳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순천만 같아라.”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23면

기계의 새벽, 인간의 밤

1813년 겨울, 잉글랜드 요크에서 14명의 노동자가 반란 혐의로 교수대에 올랐다. 방직 산업의 급격한 기술 혁신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있던 때였다. 숙련은 존중받지 못했고, 임금은 추락했으며, 생계는 흔들렸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부수는 파괴적인 저항으로 알려진 ‘러다이트 운동’도 그 하나다. 흔히 무지한 폭도들의 반란으로 묘사되고는 했지만, 역사학자 E. 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이를 새롭게 읽었다. 그것은 단지 기술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균형, 스스로 삶을 규정하는 힘이 파괴되며, 자신들의 생활과 존엄을 아무 가치도 없게 만드는 질서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 노동 현장은 방직기에서 반도체 클린룸과 데이터센터로 바뀌었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떠들썩한 시대, 한국 사회는 AI와 반도체를 국가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거대한 산업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고 초고압 송전선로가 농어촌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종일 꺼지지 않는다. 욕망과 눈물이 함께 떨어지는 풍경이다. 효율과 경쟁력이 지상과제가 되고, 주식과 AI가 성장의 상징이 되면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지역 공동체의 삶, 환경의 착취, 에너지 자원의 과다 소비 같은 생존과 보호의 문제들은 배제되었다. 온갖 종류의 특별법과 육성 정책은 사적 기업의 위험을 공공이 떠안는 ‘디리스킹(De-risking) 국가’ 기제로 전락하고, 생명과 생태의 가치는 사라졌다.(김상현, 「반도체·AI 신드롬에 짓밟히는 노동과 생태」, 창비주간논평)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살만한 미래를 상상한다면, 과잉과 남용을 피할 수 없는 성장 방식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려는 욕망이 우리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게 하겠는가? 사회·생태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발전을 지연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발전을 인간화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다. 특히 노동은 단순히 생산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며, 창조에 협력하는 행위이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건이다. 이를 비용으로만 환산하는 체제는 경제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왜곡된 질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노동은 ‘존엄으로 가는 통로’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로 가는 길’이다.(「찬미받으소서」, 128항)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움직이게 하는’ 통로다. 러다이트의 처형대와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시간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의 질문이 있다. 노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기술의 변화는 누구의 삶을 지우는가. 자본의 막대한 이익은 누구에게 가는가. 사회적 삶의 재구성도 근본적으로는 ‘회개’의 요청이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행위다. 속도를 늦추고, 기준을 다시 세우며,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영적 결단이며, 노동과 기술을 관계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는 영적 용기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고, 노동이 존엄을 드러내며, 창조 세계가 선물로 존중받는 질서로의 전환은 거창한 전략 선언을 믿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타자의 자리를 더 존중하고 욕심을 더 묻어놓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선택은 기계의 새벽이 아니라, 인간의 새벽이다. 그 새벽은 정의를 향한 결심, 연대를 위한 발걸음, 전환과 회개의 용기 속에서 비로소 떠오른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3면

하느님과 고양이, 우박과 벌레

그리스도인은 종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자문하곤 한다. 하늘이 어디일까. 하느님이 구름 너머, 허공 어딘가에 있다는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하느님이 구름 너머 창공 어딘가에 있다면, 그 창공이 하느님을 감싸안는 더 위대한 존재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천지의 창조자라면서, 하느님을 천지의 어느 한 특정 장소에서 찾다니, 모순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이 어떤 장소에 있다면, 그 장소가 하느님을 포용하는 더 큰 세계가 된다. 하느님보다 더 큰 세계라니. 물론 허공 한쪽에 있는 신도 신일 것이다. 신이되, 인간이 상상한 신일 것이다. 인간의 상상 이전의 하느님, 상상의 근원이자 너머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인간의 좁은 생각에서 해방해야 한다. 신을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나 공간에서 신을 보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모든 것,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일갈했다. 일면 정당한 말이다. 니체가 죽인 신은 인간이 광활한 세계의 한구석에 숨겨 두었다가 아쉬울 때 자신의 온갖 욕망을 채워주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편협한 신이기 때문이다. 신을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신의 주변이나 배경까지 따라오곤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 신을 둘러싼 그 주변과 배경에서도 신을 보아야 한다. 허공에서 빛나는 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주변을 중심으로 보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신이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는 그런 식으로 타당해진다. 우리 집에 열한 살 된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고양이들이랑 여러 해 살다 보니 뭘 찾는지, 기분이 어떤지 어지간히 교감이 된다. 고양이들도 집안 분위기를 적절히 파악한다. 가족이 밝게 다 모여있으면 얘들도 같이 모여 편안해하고, 무언가 진지하면 얘들도 움츠러든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동물이나 사물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고양이 눈으로 보면, 인간이란 것들은 말도 못 알아듣는, 답답하고 희한한 존재일 것이다. 다른 눈으로 보니 인간만의 고유성이 아닌, 모든 존재의 평등성과 고유성이 느껴진다. 시편 148편을 다시 읽었다. 하늘, 천사, 해, 달, 별, 땅, 깊은 바다, 큰 물고기, 번개, 우박, 눈, 안개, 바람, 산, 언덕, 과일나무, 송백, 들짐승, 집짐승, 길짐승, 날짐승, 임금, 추장, 고관, 재판관, 처녀, 총각, 늙은이, 어린이…. 모든 것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란다. 이 구절을 읽노라면 찬양으로 넘실대는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찬양받는 하느님을 성경의 주인공으로 여겼다. 그런데 요사이는 그렇게 찬양하는 모든 존재,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귀한 존재라는 메시지가 더 다가온다. 인간, 동물, 하늘, 땅, 산, 바다, 벌레 모두 하느님 앞에 차별이 없다. 이들 모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향한다. 사람만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 방식 그대로 하느님을 증명한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라고도 한다. 삼라만상이 평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 새와 벌레, 물고기와 나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의 신앙과 신학을 다시 세워가야 한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생물만이 아니라, 방주의 창밖에 있는 모든 비인간 존재와 함께 사는 훈련이 신앙의 근간이어야 한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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