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 보호를 위한 미사를 반기며

드디어! 한국에서도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미사가 고유 전례문으로 곳곳에서 처음 봉헌됐다. 2025년 레오 14세 교황께서 고유 전례문과 독서를 사용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미사(Missa pro custodia creationis)’를 거행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잔잔한 기쁨과 함께 안도감마저 밀려왔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창조질서를 보전하려는 의식이 일부 활동가들만의 몸부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전례로까지 강조된다는 교회의 공식적인 선포였기 때문이다. 비록 선택사항의 미사이긴 해도 말이다. 지금까지 미사에 참여하면서 그날의 주제에 맞는 고유 전례문이 바쳐지는지에 대해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기다려보기는 처음이다. 심지어 9월호 매일미사 책에 피조물 보호를 위한 미사 고유 기도문이 어디에도 없어서 내심 서운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에서 주관해 서울 명동 파밀리아 채플에서 거행한 이날 미사의 고유기도문인 본기도, 예물기도, 영성체 후 기도 속에 담긴 의미가 더욱 간절하고 깊게 느껴져 함께 나눈다. ‘아버지,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저희가 생명의 숨이신 성령께 순종하며 아버지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사랑으로 돌보게 하소서.’ ‘아버지, 이 땅에서 저희 손으로 거둔 열매를 받으시어 그 안에서 아버지의 창조 사업을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변화되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과 음료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일치의 성사로 형제들이 아버지와 더 깊은 친교를 이루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모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하소서.’ 위의 기도문과 같이 모든 피조물 곧 아버지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돌보려면 피조물의 의미를 먼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쓰신 책이고 계시(12항, 85항)이며, 하느님 현존의 자리(88항)라고 한다. 이를 알아들으려면 시간을 할애하여 피조물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믿는 이들에게 피조물에 관한 관상은 메시지를 듣고, 역설적인 무언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85항)이다. 작은 체험을 나누고 싶다. 생태영성피정을 진행할 때였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길에 깔린 자갈을 관상한 후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주위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돌처럼 하느님도 항상 저희 곁에 계신 것 같아서요.” 그 순간 나는 개구쟁이 아이도 자연을 관상하며 순식간에 깊은 영성가가 되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성인 피정자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먼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라고 인간에게 눈, 귀, 코, 입을 주신 것 같다”고 했다. 이번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러고 보니 성경 속 하느님도 대부분 구름, 불, 바다 등 피조물과 함께 나타나 인간과의 역사를 이루신다. 예수님도 십자가 나무라는 피조물에 못 박혀 그의 사명을 완성하시지 않았는가! 마치 하느님도 피조물 없이는 당신의 일을 안 할 작정이신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피조물의 가치를 제대로 존중할 때 인간다움도 더 성장한다고 본다.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은 우리가 피조물을 돌보며 기도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명령대로 피조물이 우리를 얼마나 보호해왔는지를 감사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으로 지구촌의 모든 그리스도교가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부터 10월 4일까지 함께 기념하는 창조시기 한 달 만이라도 뜻을 모아 기도하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하면 좋겠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피조물의 탄식(로마 8,19 참조)에 조금이라도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서울 노틀담 피정센터)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23면

모든 사람이 안전할 때까지

얼마 전, 로힝야 학살 9주기를 맞아 로힝야 난민과 연대하는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이 모여 영화 <로스트 랜드> 상영회를 열었다. 영화는 누나인 소미라와 동생 샤피가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난민 캠프를 떠나 삼촌이 사는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수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담고 있다. 풍랑과 더위와 목마름을 견뎌가며, 배는 태국 남부 어느 해안에 도착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그냥 온 게 아니다. 탈출 경로마다 현지 브로커들이 돈을 갈취한다. 돈을 못 내면 때려서 살해한다. 태국 국경 마을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호의를 베풀며 도와주는 듯했지만 결국 브로커에게 난민들을 팔아넘겨 버린다. 강제 이주와 생존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은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무궁화가 피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숨바꼭질을 한다. 폐가 안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 웃음소리는 깊은 어둠을 뚫고 조금씩 번져 나오는 연한 빛과도 같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빼앗긴 시간을 되찾으려고 한다. 이런 순간은 단순히 휴식이 아니라, 아이들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복원력과 다름없다. 아이들은 아늑했던 과거의 기억과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창의적인 생존 방식을 통해, 점차 자신들 전체를 빼앗으려는 세계에 맞서 ‘우리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에서 아동 심리치료를 했던 어느 의사는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만약 내가 어느 낯설고 위험한 장소에 제멋대로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누구도 환대하지 않는 곳에서 도대체 한순간이라도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난민에게는 아주 특별한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아니지만, 그 상태를 견뎌내는 역량이다. 혼란스럽고 취약하며 공포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여전히 경이로움의 순간들을 보는 시선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인간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세상에 대항해,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이어가는 질긴 회복력을 품어야 한다. 소미라와 샤피의 웃음소리가 그런 것이었다. 올해는 1951년 제네바 난민협약이 체결된 지 75년 되는 해이며, 기념하는 주제는 ‘모든 사람이 안전할 때까지’다. 세계의 난민은 흔히 규모와 숫자로 집계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아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해 말까지 1억1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떠나야 했다. 이 가운데 3000만 명 이상이 난민이었다. 그러나 통계 뒤에 전쟁과 박해와 굶주림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의 인간적인 얼굴과 가족, 그리고 그들이 품고 온 이야기가 있다. 난민에게는 ‘백만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난민협약은 갈수록 무력화되어, 인간의 가치를 유용성과 시민권 안으로 구겨 넣는 비인간적인 세계로 만들어가고 있다. 난민은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번영과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된다. 그들의 얼굴과 삶의 이야기를 지우고, 마치 물건처럼 국가와 수용소 사이로 떠넘긴다. 이런 비인간성은 결국은 단절과 편견, 적대감과 폭력을 확산시킬 뿐이다. 레오 14세 교황도 우리가 참으로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면’ 사람을 타자화하며 두려움에 굴복하는 태도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두려움과 배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직접 만나며…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한다.(「고귀한 인류」, 14-5항) 몇 년 전 로힝야 난민 캠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먼지로 뒤덮인 벌판에 빽빽하게 붙어있는 움막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의 안온한 집에 사는 것과 로힝야 난민 캠프의 움막에 있는 것은 한마디로 우연에 불과하다. 누가 꼭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모두 가장 깊은 뜻에서, 있어야 하고 속해야 하는 곳을 여전히 탐색하고 있는 유민이다. 쫓겨난 이들과 함께하는 일은 우리가 정작 있어야 하고 속해야 하는 곳을 찾도록 도와준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인간의 행로가 있을지 궁금하다. * 미얀마의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는 오랫동안 차별과 폭력에 시달렸다. 1982년 시민권을 박탈당해 모두 무국적자가 되었다. 2017년 8월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이 살고 있던 라카인주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여, 두 달 사이에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글라데시로 피신했다. 유엔은 이 사태를 ‘집단학살’로 규정했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3면

“~라고 보면 된다”와 “~라고 성경에 써 있다”

TV에서 어떤 전문가가 정치 상황을 분석하며 ‘~라고 보시면 됩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다’가 아니라 ‘~라고 보면 된다’니, 왜 이런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이것은 자기 발언의 판단을 시청자에게 맡김으로써, 말하는 이의 책임을 유보하거나 회피하는 화법이다. 말에 퇴로를 열어둠으로써 본인의 책임을 흐릿하게 하고, 최종 해석은 그렇게 ‘본 이’의 몫으로 전가하려는 언어적 호신술이다. 발언의 주도권은 자기에게 있으면서도 마치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식의 유연한 권위주의 화법이기도 하다. ‘내가 기준을 정할 테니 넌 내 말을 받아들이면 돼’라는 오만함의 표현일 수도 있고, ‘사실은 나도 확신이 없다’는 암묵적 고백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화법은 발언의 신뢰성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들어있다. 가령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는 ‘죄송하다는 사과의 감정’이 아닌, ‘죄송하다고 말하는 행위’에 초점을 둔다. 마치 제3자처럼, 자신의 진짜 감정은 괄호에 치고, 형식적 의무에 따라 사과의 형태만 취하는 감정의 외주화로 보인다. 말과 달리 사과받는 대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 이런 거리감 때문에 듣는 이는 ‘저 사람이 정말 사과하고 있는 걸까’ 의심하게 된다. 이때 한 가지 ‘신앙적’ 질문이 생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와 ‘~라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종종 한다. 가령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의 내심에는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해’, ‘예수님이나 가능하지 보통 사람은…’이라는 은근한 불신과 회피가 있는 것 아닐까. 정말 믿거나 깨달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나 문헌에 기대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자신의 언어로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는 말에는 ‘나는 사실을 전달했을 뿐, 성경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은 너의 몫이야’라는 내적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그가 성경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아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지 않아도,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정보를 전달할 것일 뿐이니까. 성경의 내용과 자기의 삶 간에 일부 거리를 두는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라고 성경에 써있다’는 식의 발언은 일종의 정보는 되어도, 듣는 이의 몸과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그에 비해 ‘~이다’라는 단정적 언어는 한편에서 건방지거나 교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단언하는 이의 내면에서 진리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질 수도 있다. 정말 깨달은 사람은 그저 정보 전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역술인은 내담자에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며 어설프게 말하지 않는다.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한다. 역술인의 발언이 결과적으로 틀릴 수도 있지만, 내담자는 역술인의 명확한 말에서 판단의 근거와 위로를 얻는다. 역술인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이 들면 역술인 자체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이런 심리를 반영하며 신종교가 탄생하기도 한다. 성경이나 교회 문헌에 기댄 언어는 일단 안정적이다. 하지만 큰 힘은 없다. 듣는 이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은 말하는 이의 분명한 주체성과 겸손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누군가 ‘~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듣는 이가 거기서 진리의 기운까지 느끼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몸까지 움직인다. 누군가 주체적으로 힘 있게 말하고 듣는 이가 거기서 자신감과 겸손함을 동시에 느낀다면, 그것이 진리가 작동하는 대화방식이 아닐까. 예수님의 대화법이 그랬으니까.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23면

의사와 환자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삶이 의료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돌봄을 받고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의사의 역할과 의사에게 거는 기대도 커졌습니다. 의사조력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합법화 요구는 의사에게 생명에 대한 처분까지 맡기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요구와 함께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의사를 환자의 원의를 단순하게 수행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것은 의사의 그러한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면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과적으로 현대 의료는 점점 상업화되어 가고 있고, 의료인들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제공자가 되며, 환자는 그러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이 됩니다. 의사의 의지와 생각이 점점 더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과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에 의사라는 존재는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고, 치료 과정에서 환자에 대한 권한도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환자의 의향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만이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환자의 선익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온정주의(paternal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일방적인 태도 역시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결코 동등하기가 어렵습니다.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의사는 환자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적인 상황을 그저 환자의 의사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에게 그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자는 환자 자신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아픈 사람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기력의 저하, 정신적인 명료함의 감소, 신체적 고통과 불안감, 관계의 단절 등이 환자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환자가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선택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의사는 여러 가지 역할을 요구받습니다. 즉, 환자의 상태와 그에 맞는 적절한 치료 방법들에 대해서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환자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자가 스스로 결정을 잘 내릴 수 있도록 환자의 능력을 최대한 회복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사의 양심에 비추어 환자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내린다고 여겨질 때는 최대한 환자를 설득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설득은 강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득은 환자로 하여금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의사는 환자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환자의 가치관을 존중하면서도 그 선택이 환자의 생명과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과정은 환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 의사 역시 의사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수 있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치료적 동맹’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맹은 양자가 자유롭게 맺는 계약입니다. 의사와 환자는 환자의 생명과 건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의사와 환자는 모두 한 인격으로서 존중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의료는 단순히 의학적인 지식을 적용하는 기회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며, 그 상호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의사와 환자 모두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3면

슬기로운 ‘물’생활

3리터 정도의 물을 하루에 다섯 시간 걸려 길어와야 하는 나라, 그것마저 수질이 나빠 쉽게 병이 나지만 마실 수밖에 없는 나라들이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남수단과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30항에 의하면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대한 접근권은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권이다.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물을 마실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커다란 사회적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에 맞갖은 생명권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을 마련해주려고 재정 지원을 확대하면 그 부채가 어느 정도 경감됩니다.”(「찬미받으소서」 30항) 내가 물 절약에 눈을 뜬 것은 2012년 어느 에코센터에서 나온 리플릿 내용에 한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 달 사용할 물의 양을 하루에 다 쓴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을 때다. 우리의 평상시 물 쓰는 모습을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중 어디에 물이 많이 쓰이는지 집안을 둘러보았다. 설거지, 세탁, 샤워 등등이 있었지만, 화장실 변기가 눈에 들어왔다. 변기 수조엔 기종에 따라 대략 10~13리터의 물이 담겨있고 일을 볼 때마다 쉽게 버려진다. 용변 빈도를 고려하면 1인당 1일 평균 약 100리터의 물이 변기 사용에만 소모되는 셈이다. 구조적으로 물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나의 슬기로운 물생활이 시작되었다. 양치컵 사용은 물론이고 옛날처럼 소변통을 다시 사용하여 변기는 한두 번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빨래는 가능한 손세탁으로 바꾸었다. 그 후 물 사용에 또 한 번 정신이 들게 된 일이 있다. 로마에 있는 우리 노틀담수녀회 모원에 아프리카에서 온 수녀가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가 모원의 화장실을 보고 분노를 쏟아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은 물을 길어오려면 그 고생을 해야 하는데, 이곳에선 너무나 좋은 물을 대소변 처리하는데 써버린다는 불공평함에 분개한 것이다. 그 분노가 나에게 깊은 회심을 일으켰다. ‘나도 아프리카에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대한민국에 태어나 손만 까딱하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맑은 물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었구나….’ 덕분에 화장실은 나에게 성당만큼이나 거룩한 곳이 되었다. 성당에선 오히려 매일 생각나지 않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화장실에 들어서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져 내가 쓸 물의 양을 조절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물부족국가는 아니지만, 지역과 계절에 따라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기후위기의 영향으로 해마다 이런 현상은 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재난 사태가 선포되었던 강릉시에 이어 올해는 순천, 대구 등 남부 지역의 주민들이 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정부와 시민사회, 산업계가 협력하여 효율적 물 분배, 재활용, 첨단 기술 활용 등을 통해 물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의 제1 목표인 지구의 울부짖음에 응답한다는 실천사항이기도 하다. 케냐의 경우는 물을 길으러 가려면 10km를 걸어야 했는데, 한국 정부가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여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수도시설을 70여 군데 설치해 준 좋은 사례가 있다. 민간 차원에서도 물을 제공할 수 있는 기부와 더불어 물을 절약하는 생활로 물부족을 겪는 이들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을 낭비한 것도 결국 기후위기의 한 원인이 되고 그래서 어딘가엔 물이 부족하게 되는 하나의 생태계 안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23면

착시의 대가

얼마 전 우파 단체 ‘휴먼스 퍼스트’가 주도한 데이터센터 반대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그동안 미국 정부와 우파 진영은 인공지능 패권 경쟁에서 중국을 앞서려면 데이터센터를 더욱 빠르고 광범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데이터센터로 인한 과도한 전기 요금 인상, 극심한 물 부족, 소음공해와 수질오염 같은 심각한 폐해가 드러나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이제 좌우 진영을 넘어 데이터센터는 ‘물과 전기를 많이 쓰는 시설’이라는 수준을 넘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키며 시민들의 삶을 직접 위협하는 파괴적인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데이터센터 반대 운동은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아일랜드 등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하는 추세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알고리즘, 데이터, 클라우드 같은 ‘깨끗하고 무형’의 단어들이 연상된다. 그러나 이는 착시이며 환상이다. 광물 자원 없이는 그 어떤 인공지능도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 연구자인 케이트 크로퍼드와 마크 그레이엄은 인공지능의 본질을 지구의 천연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하는 대규모 ‘추출 산업’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추출의 대상은 자연 자원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 문명이 창조한 데이터와 노동력, 그리고 인간 자신마저 추출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마주하는 가상 세계는, 실제로는 이 모든 자원을 무자비하게 긁어모으는 물리적인 공간에 기반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핵심 기초 설비인 배터리와 전력 시스템을 가동하려면 리튬이 필수적이다. 단 0.15g의 리튬을 내장 메모리 칩에 넣기 위해 미국 네바다주는 물론 볼리비아, 콩고, 몽골,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수많은 대지가 파헤쳐진다. 반도체 제작에 핵심적인 희토류 채굴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 장시성의 경우, 채굴된 희토류 광물에서 실제 가치 있는 자원은 단 0.2%에 불과하다. 나머지 99.8%에 달하는 독성 폐기물은 고스란히 자연에 버려진다. 그 결과 바오투 지역에는 지름 8㎞가 넘는 유독성 검은 진흙 호수가 형성되기도 했다. 광물 자원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인공지능 산업은 지구의 뼈와 살을 발라내는 약탈의 역사와 다름없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증설되는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전력량은 이미 웬만한 중소 국가 전체의 에너지 소비량을 넘어섰다. 막대한 화석연료를 태워 만든 전기가 거대한 기계 장치들을 돌리고 있으며, 수만 대의 컴퓨터 서버가 내뿜는 초고열을 식히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수자원이 소모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설비 확장과 대규모 투자가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들은 환경 오염과 자원 부족, 저주파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직접적인 피해를 온전히 떠안지만, 데이터센터가 창출하는 막대한 부는 소수 빅테크 기업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50여 년 전 출간된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당시의 추세를 바탕으로 2100년 이전에 지구의 자원과 인구가 붕괴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면서 자원의 지속 가능한 관리와 재사용으로의 전환만이 장기적 안정을 가져올 해답이라고 제안했다.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고 환경적 위험과 비용은 약자에게 떠넘기는 불평등은 결국 기술 자본을 향한 분노와 새로운 정치적 저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 곳곳으로 퍼지는 데이터센터 반대 운동은 이 파괴적인 산업이 대다수 보통 사람의 삶을 얼마나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3대 메가프로젝트’의 하나인 데이터센터 건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사업자들에게는 싼 전력과 용수를 보증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착시와 환각도 정도를 넘어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처럼, 우리는 ‘단순히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바꾸는 전환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 전환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지구와 인간 삶의 회복 말고 어떤 것이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3면

‘하려고 함’과 실제로 ‘함’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좋은 의도로 말했는데 왜곡 전달되거나, 누군가의 오해까지 사면 씁쓸하다. 화가 나기도 한다. 나의 선한 의도가 달리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의지’와 ‘행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의지’란 ‘~하려고 함’이다. 사물과 사태를 이성적으로 판단한 뒤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내적 자세다. ‘실행하려고 하는’ 상태, ‘실행해야지’ 하는 내적 다짐이다. ‘실제로 행하기’ 직전의 단계다. 철학자 칸트는 이성이 나침반처럼 인간 본연의 도덕 법칙의 방향을 보여주면 그 방향대로 따르려는 내적 마음이 의지라고 해설했다. 이성이 방향을 밝혀주면 그에 따라 의지라는 엔진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릉부릉하는 엔진의 힘을 받아 실제로 차가 움직이면서 생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고 함’과 그것을 실제로 ‘함’의 영역은 아주 다르다. 차가 가만히 있을 때와 움직일 때의 차이에 비할 수 없이 다르다. 말이든 행위든 실제로 ‘함’은 예상 밖의 경로로 나아간다. 다양한 갈래를 만들며 무한한 파장을 일으킨다. 실제로 한 말과 행위는 의지의 영역을 떠나 다른 환경에 있는 타자를 매개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전달된다. 사태는 상상 밖의 갈래들을 만들며 전개된다. 내가 ‘하고자 함’이 나와 다른 너를 만나 완전히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신부님이 강론 중에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인용하며 한국 무속의 원초적 종교성에 대해 좋게 말했다고 치자. 어떤 신자는 그 강론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듣고, 어떤 신자는 무언가 꺼림칙해 하고, 어떤 신자는 딱히 감흥이 없다. 강론이 인상적이었던 어떤 신자가 미사 후에 지인들과 무속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연결되고, 한국적인 것이라고 해서 좋기만 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론을 좋지 않게 들은 신자는 나중에 ‘저분은 강론 중에 왜 무당 얘기를 하시냐’며 자기의 부정적 느낌과 생각을 여기저기 퍼뜨린다. 그의 지인은 ‘그 성당 좀 위험한 것 아니냐’며 부추긴다. 누군가는 무속의 긍정적 의미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일부러 점을 쳐보며, 누군가는 무속을 더 경계한다. 특히 부정적 이야기들은 여러 갈래를 만들며 더 증폭된다. 누군가를 부정할 때 그렇게 부정하는 자신이 긍정된다는 착각이 부정성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어떻든 누군가 속 생각을 실제로 표현하고 나면 거기에 저마다의 각종 이야기와 판단들이 뒤섞이며 복잡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하고자 함’과 실제로 ‘함’이란 그런 것이다. 이렇게 강론해야겠다는 신부의 내적 의지와 그 외적 표현 간에는 비할 수 없이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신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원리다. 내적 의도가 외적으로 표현되면서, 개인의 의도와는 확연히 다른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중층적으로 전개되어 간다. 모두가 자기가 경험한 만큼 듣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전달할 때는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되게 말하는 내용들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실제로 할 때, 너를 인정하려는 마음으로 하느냐,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렇게 해도 개인의 선한 의지에 언제나 부합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예단할 수도 없고, 개인이 결정할 수도 없다. 하물며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사실상 ‘혐오’ 발언을 하는 데서 생기는 부정적 파장은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를 힐난하거나 비판하는 ‘함’이 아니라, 가능한 살리려는 ‘함’이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내면의 선한 의지가 외적으로 표현되면서 만일 사태가 복잡하게 꼬인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몫이다. 인간은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하게 말하려 하며 그에 어울리게 살려 노력할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의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3면

유전자 편집 기술은 바람직한 것인가?

최근 기존의 3세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보다 발전된 4세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4세대 유전자 가위의 경우 3세대 유전자 가위처럼 DNA를 잘라내는 기술이 아닌 염기 한 개를 치환할 수 있는 기술로 더 정밀한 유전자 교정이 가능하고 유전자를 대규모로 손실할 수 있는 위험도 적다고 합니다. 이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등장했을 때도 많은 사람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허젠쿠이라는 과학자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통해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쌍둥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많은 이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유전병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상황에 온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유전자 편집 기술은 아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전성 문제입니다. 허젠쿠이 박사의 발표에 대해서 많은 과학자가 비판했던 이유는 이 기술의 적용이 미칠 결과를 아직 분명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전자 하나하나가 우리 몸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어떤 유전자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쌍둥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도 장차 어떤 유전적인 문제를 갖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유전자 편집 기술이 질병 치료에 활용될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안전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 기술이 체외 수정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전자 편집 연구는 실제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 연구를 통해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이 파괴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한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르침은 과학적인 사실을 토대로 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도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서 배아를 만드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난임 시술을 위해서 생성된 배아의 사용은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체외 수정 즉, 시험관 아기를 위해서 필요보다 많은 숫자의 배아를 만들게 되고, 그 가운데 일부만이 어머니의 태중에 이식됩니다. 이식되지 않은 배아는 잔여 배아라고 하는데, 잔여 배아는 냉동 보관이 되고, 5년이 지나면 폐기되거나 연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잔여 배아가 냉동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매년 폐기되는 배아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서 엄청난 숫자의 인간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서 유전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꿈같은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언제 안전하게 질병 치료에 적용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고 연구 과정에서 계속해서 인간 배아가 희생되고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 앞에서, 생명을 위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이끄는 인공 생식 기술을 비판하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통찰이 지금 절실히 필요합니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3면

서울 마포구 주민들의 소각장 반대 다시 보기

2021년 환경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고시한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에 따르면, 2026년부터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생활폐기물은 직매립이 금지된다. 즉, 소각재만 매립하는 방식으로 변경되는데, 이는 수도권 매립지 공간이 부족한 까닭이다. 폐기물을 소각 후 매립하면, 배출량도 100분의 1 규모로 줄어든다. 이에 따라 수도권 지자체에는 올해부터 광역소각장을 설치·운영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주민들이 소각장을 기피 시설로 여기는 경향 때문에 부지 선정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도심 한복판에 지어진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이다. 1987년 화재 이후 1992년에 새로 세워진 곳으로, 환경 예술가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했다. 쓰레기 소각장의 개념을 뛰어넘은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어 관광객들이 붐빈다. 유해 물질을 굴뚝으로 내보내기 전, 특수 개발한 필터에 의해 모두 걸러지고 수증기만 약간 배출된다. 또한 소각 시 발생하는 열을 이용하여 인근 6만 가구에 난방도 공급하고 있다. 빈에서 쓰레기를 묻을 땅이 부족해지자 관계 부처는 소각 후 매립하는 것만이 대안임을 결정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이러한 결과를 이뤄낸 것이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아마게르 바케 쓰레기 소각장도 창의적인 대안이 된 곳이다. 여왕이 사는 궁전도 소각장에서 불과 2㎞ 거리에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서 신규 소각장을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사례가 나타났다. 2022년 8월 서울시가 마포구 상암동에 앞서 말한 외국의 모델들을 참고하여 광역소각장을 짓겠다고 발표하였다. 한동안 마포구 아파트들에 ‘소각장 결사반대’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일어나는 님비현상(Nimby, Not in my back yard)이려니 했었다. 수도권매립지를 끌어안고 사는 인천 사람 쪽에서 보면 ‘서울 쓰레기를 인천에 버리는 것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내걸 것 같았다. 그러나 마포구 주민들은 단순히 님비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의 내용을 분석하고 철저한 분리배출을 유도하면 소각할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음을 데이터로 증명하였고, 기존 소각장의 현대화와 효율적 이용이라는 대안을 동시에 제시하였다. 이러한 해법에 결국 법원도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4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올해 3월 마침내 신규 쓰레기 소각장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었다. 현명한 주민들의 승리로 보인다. 박강수 전 마포구청장의 각오는 한층 더 희망적이다. “발생지 처리 원칙에 기반한 폐기물 감량과 재활용 극대화 정책이 서울시 전역으로 확산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서울시는 행정에서의 섬세한 정책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당연히 마포구 주민들은 협조에 앞장설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 대란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월 14일자 방주의 창에 소개했던 ‘자원순환가게’와 같은 제도를 서울시가 서둘러 도입하고 마을마다 거점을 마련한다면, 버리는 문화에서 자원순환 문화를 선도하는 이상적인 사례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따르면, “버리는 문화는 물건을 쉽게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회칙 「찬미받으소서」 22항) 아울러 생산과 소비 과정 끝에 나오는 쓰레기와 부산물의 처리·재사용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 우리 산업 체계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 세대들을 위하여 재생 불가능한 자원 사용의 최소화, 소비 절제, 개발 효율의 극대화, 재사용·재활용 등을 논의하는 것이, 지구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버리는 문화에 맞서는 한 가지 방법임이 더 깊은 영성으로의 초대로 느껴진다.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3면

에어컨을 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6월 중순, 프랑스 파리의 한 가전제품 매장에 에어컨을 구입하려는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약탈 현장을 방불케 하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온난한 여름 기후와 까다로운 설치 규정으로 굳이 에어컨을 설치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어서, 에어컨 보급률이 25%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일 40도를 넘는 폭염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인명 피해가 속출하자, 에어컨 사용 문제가 일상의 선택을 넘어 국가적 정치 쟁점으로 비화했다. 이 틈을 타고, 극우세력은 에어컨을 ‘생존을 위한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기후 독재자들’이 에어컨을 쓰면 안 된다는 죄책감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며 선동했다. 이 주장은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며 확산하는 중이다. 그동안 기후위기의 대응 방안으로 크게 두 가지의 주장이 경합해 왔다. 당장 폭염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에어컨을 켜서 생명을 보호하는 대응이 ‘기후적응’이라면, 그 에어컨을 구동하는 에너지 시스템을 재생에너지로 바꾸고 도시 구조를 리모델링하는 방식을 ‘기후 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응’과 ‘완화’가 이런 방식으로 구분되며 충돌할 문제는 아니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런 구분이 기후위기의 본질을 매우 흐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에어컨을 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양자택일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개인이 죄책감이나 고통을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생태계를 위험에 몰아넣는 사회의 작동 방식을 바꾸면서도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지켜내는 다른 종류의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기후위기에 물어야 할 질문은 에어컨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왜 에어컨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도시와 사회를 만들었는가이다. 기후위기는 개인들이 무분별하게 전기를 소비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성장의 기준으로 삼아 온 경제체제,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정책, 그리고 막대한 이윤을 위해 탄소배출의 비용을 사회 전체에 떠넘겨 온 산업 시스템이 위기의 근원이다. 요즈음은 기업도 탄소배출 축소와 재생에너지 같은 ‘탄소중립’ 정책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자신들도 자본에 피해를 줄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녹색 성장’이니 ‘지속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이념들이다. 생태환경을 염려하며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실천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의 뿌리를 건드릴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친환경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정치와 기업에게 책임을 묻고 대안을 요구해야 하는 더 근본적인 행동을 방해한다. 우리의 안도감이 오히려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기업은 ‘친환경’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소비자의 양심을 만족시키면서도, 실제로는 대량 생산과 과잉 소비를 부추기는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 결국 우리의 선의는 사회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어야지, 구조적 문제를 덮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합생태론’을 통해 생태적 회심과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함께 가는 근본적인 해법을 제안했다. 과도한 편리함과 끝없는 소비주의에 길든 우리가 ‘생태적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일은 단순한 인내나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 선전하는 가짜 행복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주권을 스스로 되찾는 영성적 독립 선언과도 같다. 파국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삶의 격조를 지켜내고 ‘참된 행복’을 스스로 재정립하는 가장 아름다운 저항이다. 사소한 일상의 실천이 쌓여 형성된 생태 감수성은 구조를 변혁하는 ‘기후정치’의 단단한 심정적 토대가 된다. 기후위기, 노동의 위기, 생명의 위기를 넘어서려면 ‘또 다른 성장’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 기후위기를 가장 먼저 견뎌야 하는 이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는 생태적 선택이 기후재난에 시달리는 취약계층의 고통을 줄이고 지구 공동체의 생명에 기여하고 있다는 연대의 감각은, 자본이 주는 물질적 풍요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실존적 밀도를 부여한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안으로부터 가꾸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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