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는 없다?

성모 성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성모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바치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하면 떠오르는 기도도 많은데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바치는 기도로는 성모송이 있겠고요. 그리고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흔히 묵주기도는 로사리오(rosario), 바로 장미꽃다발이라는 의미로 성모님께 장미꽃다발을 봉헌하는 기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모상을 유심히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성모상 중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이 자기 자신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싶으신 것은 아닐 테고요. 성모님은 왜 묵주를 들고 기도하시는 걸까요? 교회는 그 이유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섭리의 계획에 따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자 겸손한 종이셨기 때문에 우리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물론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다만 성모님은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고 계십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61~62항) 전구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도록 함께 기도해주는 중재기도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기도가 필요할 때 가족이나 주변 신자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경을 통해 고백하듯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천상교회에 있는 성모님이나 성인, 복자들에게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 하고, 부활삼종기도에서도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기도들이 실은 성모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달라고 성모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중에서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 이뤄지도록 전구하신 성모님께 청하는 전구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7항)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함으로써 성모님의 덕행을 본받아 신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을 향한 이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오히려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줍니다.(「교회헌장」 66항)

2024-05-19

[알기 쉬운 미사 전례] 예물 준비 성가? 봉헌 노래?

오랫동안 성가대 봉사를 하신 신자분이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해야 하나요? 봉헌 노래라고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전례위원회에서 2008년 라틴어 제3표준 개정판의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 용어에 대해 논의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라틴어인 ‘cantus ad offertorium’(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7, 74항)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미 2009년에 발간된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에서는 ‘예물 준비 성가’라고 표현을 했었기에 이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직역을 하여 ‘봉헌 노래’라고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다른 언어권에서의 번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직역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 개정판에는 ‘봉헌 노래’(57항)를 기본으로 하고 옆에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하여,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지요. 봉헌 노래는 신자들이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가는 행렬에 동반하며, 적어도 예물을 제대 위에 차려 놓을 때까지 계속하는데, 분향이 이어질 경우에는 분향을 마칠 때까지 노래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상을 차리고 고유 음식인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을 ‘예물 준비’라고 하며, 이는 최후 만찬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드셨던 빵과 포도주와 물을 제대로 가져가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초기에는 교우들이 예물을 아무런 기도나 노래 없이 행렬을 지어 제대로 가져갔으나, 4세기 말경부터 행렬이 더욱 길어지고 예물 봉헌의 의미를 드러내는 행렬에 동반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8세기까지 동방이든 서방이든 누룩 든 일반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했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 서방에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때 사용하는 누룩 안 든 빵 사용을 도입하였고, 11세기경에는 현재와 같은 작은 제병들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은 여전히 누룩 든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합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는 ‘예물 준비 기도’는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파스카 축제, 학가다에 포함된 축복 기도인 베라카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빵 축복 기도는 빵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땅의 열매이며 인간 노동의 결실임을 기억하고, 이 빵을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생명의 빵인 주님의 몸이 되게 해주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포도주에 물을 섞는 이유는 고대 관습이 그대로 예식에 들어온 것으로, 의미는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인간인 신자 공동체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잔 축복 기도는 포도나무를 가꾸어 얻은 결실인 술을 주님께 돌려드리니 구원의 음료, 곧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피가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의 예물로 준비하며 아버지 하느님께 이 빵과 포도주를 마치 우리를 보듯 보아 달라고 청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준비합니다. 예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물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곧 주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놓으시듯,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봉헌되는 제물처럼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9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보편지향기도’인가 ‘신자들의 기도’인가?!

신학생 때 읽었던 책 중 요즈음 다시 읽는 책이 있습니다. 루이 에블리의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인데,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주 적게 기도하고 보기 드물게 기도하며 또 보잘 것 없이 기도한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몹시 분주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활은 활동과 혼란, 때로는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 … 즉 우리는 일을 정지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며 기도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통찰력있는 지적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혼자보다는 이웃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1-2; 2코린 1,11; 에페 6,18-19 참조). 이러한 모범에 따라 교회는 이미 1세기 말경부터 세상 구원을 위한 특별기도를 전례 중에 바쳤습니다. 95년경에 기록된 클레멘스 교황 저서에는 고통받는 이, 국가 지도자, 평화 등을 위한 여러 청원 기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론 후 예비 신자들을 보낸 다음 신자들만 남아서 이 기도를 바쳤는데, 기도 내용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예비 신자들과 모든 이의 구원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전통이 남은 형태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바치는 ‘보편지향기도’인데, 당대의 기도 내용과 형식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사라진 원인은 전례 시간을 줄이려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전례 역사가 테오도로 클라우저는 「서방 전례의 역사」에서 밝힙니다. 현재의 ‘신자들의 기도’와는 달리 기도의 수가 많았고, 각 기도 다음에 주례자의 본기도가 있어서 다소 장황했으며, 반복이 잦아서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축일 미사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는 것을 문제 삼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개혁을 통해 신자들의 기도를 없앴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현재의 자비송이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1400여 년 전 사라졌던 ‘신자들의 기도’의 가치를 인정하여 복구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용어인 ‘신자들의 기도’(oratio fidelium)와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기도’(oratio communis)를 ‘보편지향기도’(oratio universalis)로 대신하면서, 누가 기도하고, 어떤 지향으로 해야 하는 지를 더욱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 기도는 세 가지 특징, 곧 ‘하느님을 향한 간청’이며,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고, ‘교우들의 참여와 그들의 현실 반영’을 특징으로 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여 세상 구원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사람임을 이 기도를 통해 실천합니다. 물론 기도한 내용을 살아가려는 실천 의지가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2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상에도 종류가 있다?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을 맞이하는 성상이 있지요. 바로 성모상입니다. 성모님은 가톨릭신자라면 아마 누구나 사랑하는 성인이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여러 성모상을 자세히 살핀 분이라면, 성모상의 모습이 대체로 몇 가지 모습으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듯합니다. 성모상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저 유명한 작품을 따라 만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많은 성모상이 ‘성모 발현’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발현이란 성모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일입니다.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기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회합에 사용해서 볼 수 있는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파리 뤼드박에서 성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님에게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이 성모상은 머리에는 흰 수건을, 어깨에는 푸른 망토를 두르고 양손을 아래로 펼쳐 보이는 모습인데요. 발로 지구를 감싼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 특징입니다. 혹시 성모상이 동굴에 모셔져 있다면,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나타나신 성모님의 모습이 아닐까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루르드 성모상은 흰 머리 수건과 흰 옷, 푸른 허리띠를 착용하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형상입니다. 발 등에는 노란 장미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의 마사비엘르 동굴에서 성 베르나데트 수녀에게 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어린 목동에게 발현한 성모님은 전신을 감싸는 흰 베일에 지구 모양을 한 금색 목걸이를 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묵주를 팔에 걸고 두 손을 모은 채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모상은 비오 12세 교황님이 1946년 ‘세계의 여왕’으로 선포해 왕관을 쓴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또 푸른 망토에 붉은 옷, 검은 허리띠를 두르고 기도하는 인디언 여인 형상의 성모상이라면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이고, 루르드 성모상 같은 복장인데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성모상이라면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할 때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셨지요. 물론 성모 발현과 관계없이 예술적으로, 또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담아 성모님을 표현한 성모상들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양한 성모상을 통해 성모님을 기억하는 이유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성화를 증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어머니로 세우신 천주의 성모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특별하고 효성 지극한 공경을 권장”하고 “신자들이 성인들의 모범으로 성장하고 성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는 올바른 경배도 장려” 합니다.(교회법 제1186조) 성모상을 앞에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지나치기보다 이 성모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성모님은 이 성모상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지 생각하며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05-12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 축일은 얼마나 많을까?

누가 “성모님의 축일이 언제냐”고 물으면 언제라고 답을 할까요? 많은 분들이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례력을 잘 살펴보신 분이라면 ‘어? 성모님 축일이 또 있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은 몇 번일지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전례력」을 꺼내서 2024년에 성모님에 관련된 축일이 몇 번인지 하나씩 세어봤습니다. 축일은 크게 대축일, 축일, 기념일로 나뉘는데요. 먼저 성모님을 기념하는 대축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그리고 ‘성모 영보’를 기억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있습니다. 축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있고요. 그리고 기념일들이 11개 있습니다. 이렇게 2024년 전례력에 있는 성모님 축일을 세어보니 16개나 됩니다. 성모님의 축일은 참 많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축일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성모님의 축일이 더 있습니다. 이를테면 올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9월 8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2월 11일)들이 전례력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이 축일들이 주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축일과 같은 전례일에는 등급과 순위가 있는데요. 축일과 기념일은 주일과 같은 더 큰 전례일이 같은 날에 겹치면 그 해에는 지내지 않습니다.(「전례력 규범」 60항) 교회는 초기 교회부터 성모님을 공경하며 기념해 왔습니다. 특히 431년 에페소공의회를 통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하면서 축일들이 제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에페소공의회가 끝난 후 곧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는 8월 15일에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축일을 거행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은 날을 축일로 삼듯이, 성모님이 승천하신 날을 축일로 삼았던 것이지요. 이후로 성모님을 기념하는 다양한 축일들이 생겨나 오늘날처럼 많은 성모님의 축일이 생겼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성모님의 축일이 새롭게 제정됐는데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18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교회가 전례력에서 이렇게 많은 성모님의 축일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축일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원 신비와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의 이 연례 주기를 지내는 동안, 거룩한 교회는 당신 아드님의 구원 활동과 풀릴 수 없는 유대로 결합되어 있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마리아를 특별한 사랑으로 공경한다”면서 “그분 안에서 교회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를 경탄하고 찬양하며, 이를테면 그 지순한 표상 안에서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열망하는 모습을 기쁨으로 바라본다”고 가르칩니다.(「전례헌장」 103항)]

2024-05-05

[알기 쉬운 미사 전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신경’

정신없이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덥다’와 ‘춥다’로 표현하는 단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 주변의 꽃과 나무,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참 이쁘다’라는 감탄,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렇게 감성에 열린 마음이면 인간 역사에 개입해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에 대해 고백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했지요. 신자들은 강론 후에 잠시 침묵을 하면서 막 들은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고 한 목소리로 ‘신앙 고백’(Professio fidei) 곧 ‘신경’(Symbolum)으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합니다. ‘신앙 고백’이 처음 행해진 곳은 ‘미사’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성 치프리아노(+258)가 처음으로 세례 때 행하는 신앙 고백에 ‘상징’을 뜻하는 ‘Symbolum’이라는 용어를 적용합니다. 특정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간의 상호 식별과 인정 수단인 ‘Symbolum’을 신앙 고백에 사용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게 하는 ‘상징’이라는 의미이지요. 다양한 신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경 예루살렘의 세례 고백문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 초엽 히폴리투스 교부가 저술한 「사도전승」에 수록된 세례 고백문입니다. 미사 중에 신앙 고백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 후반이며, 안티오키아 교회가 가장 먼저 도입하였고, 6세기 말경에는 스페인의 톨레도 시노드(589년)를 시작으로 하여 갈리아 등 서방에도 번져갔습니다. 당시 교회가 미사에 신경을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아니즘 이단을 막고 믿음의 기본 도리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신경의 위치가 현재와 같이 복음 후로 변경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으며, 1014년에 이르러 로마 전례에서는 신경이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두 신경, 곧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을 바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예루살렘에서 사용하던 세례 신앙 고백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신경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거쳐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세례 신앙 고백에서 발달했으며, 3세기경에 이미 기본 골격이 형성됐습니다. ‘사도 신경’이라는 명칭은 성 암브로시오가 393년에 성 시리치오 교황(재위 384~399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신경’은 주일과 대축일 및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미사 때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신경을 바칠 때, 구원의 시작인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구절에서 깊은 절을 하여 육화의 신비와 파스카 신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5000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라고 묻는 군중처럼, 많은 신자들 경우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하시며, ‘먼저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답하십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0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피엑스(PX)’가 있다?

형제님들이 모이면 하는 군대 이야기 중에 종종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착각하고 일어난 사연입니다. 이등병 시절에 성당에 피엑스가 있는 줄 알고 선임병 몰래 성당에 갔다던가, 같은 이유로 천주교 종교행사에 참가했다가 실망했다던가 하는 이야기지요. 피엑스(Post eXchange)는 군대에 있는 일종의 매점입니다. ‘어떻게 성당에 피엑스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라며 우스갯소리로 여기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기호에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떠올리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기다란 P의 기둥 아래에 작은 x모양이 합쳐진 형태의 기호입니다. 힘든 군 생활 중 마음을 달랠 군것질이 간절한 장병들이기에 이 기호를 보고 오해하게 된 것이지요.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일단 이 기호는 ‘피엑스’(PX)라고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엑스피(XP)도 아닙니다. 그리스어 ‘크리스토스’(ⅩΡⅠΣΤΟΣ)의 앞에 두 글자를 따서 만든 기호지요.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기호입니다. 글자라기보다는 기호다보니 ‘그리스도’라 불러도 되고, 사용한 글자대로 읽자면 ‘키’(Ⅹ)와 ‘로’(Ρ)를 합친 것이기에 ‘키로’라 읽을 수 있습니다. ‘키로 십자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문자를 합친 기호를 모노그램이라 하는데요. 특별히 ‘키로’처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모노그램을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이라 합니다. 크리스토그램에는 ‘키로’ 외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IHS’ 혹은 ‘IHC’는 예수(ΙΗΣΟΥΣ)의 그리스어 표기의 첫 3글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시그마(Σ)가 발음을 따른 S와 모양을 따른 C로 변형된 것이지요. 그리고 ‘IC XC’는 이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그리스어 ‘예수 그리스도’(ΙΗΣΟΥΣ ⅩΡⅠΣΤΟΣ)의 약자입니다. 이콘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동방교회에서 널리 쓰인 크리스토그램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예언자, 왕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공경하는 고유한 칭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임금이요, 사제이며, 예언자이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자 메시아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신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어딘가에서 크리스토그램을 발견하셨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4-04-28

[알기 쉬운 미사 전례] 파스카 초의 상징

제단 위에서 빛을 밝히는 파스카 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이 있습니다. 하얀 눈이 덮인 설악산을 보좌 신부님과 선배 신학생들과 함께 등산하면서,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서 없어진 길을 헤치며 오르다가 해가 떨어지며 어두워지는 즈음에 만난 ‘산장의 불빛’이 파스카 초 촛불에 오버랩됩니다. ‘어둠의 골짜기’(시편 23,4)에서 만난 희망의 빛이었지요. 예전에는 ‘파스카 초’를 ‘부활 초’라고 했었는데, 현재 전례서에서는 ‘파스카 초’라고 합니다. 이유는 라틴어 ‘Cereus paschalis’를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파스카 신비에서 하나의 사건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전체를 드러내는 초의 상징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파스카 초의 유래는 어떤가요? 이 초는 파스카 성야를 많은 횃불로 밝히던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크기의 초로 파스카 성야 동안 하느님의 집에 필요한 빛을 밝히던 로마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축복하는 관습은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 바실리카에서만 국한된 관습이었으며, 5세기까지는 교회 전체에 퍼지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례에서 파스카 초는 단 하나의 큰 초로 제한했으며, 갈리아의 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상징성을 지닌 우의적인 요소들로 초는 장식됐습니다. 그 요소들로써 다섯 개의 향 덩이로 이루어진 십자가와 알파와 오메가와 당해 연도는 자유재량으로 남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든 거룩한 밤샘 전례의 어머니’라고 칭송한 거룩한 밤인 파스카 성야에 봉사자들은 성당 앞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주례자는 그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 초에 옮겨 붙임으로써 전례가 시작됩니다. 이 파스카 초는 칠흑같이 어두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끕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하시고 밤새 앞장서 이끄시며 자유를 향해 밝혀주셨던 불기둥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3,21 참조) 다른 한편으로 파스카 초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자연적으로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의 불꽃으로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불꽃은 돌무덤의 어둠에서 부활하시어 걸어 나오는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파스카 초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파스카 초를 선두로 제대를 향해 들어가는 행렬은 세 차례에 걸쳐 멈추어 서고, 그때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독서대 옆이나 제단 안에 마련된 촛대에 파스카 초를 놓은 다음, 빛의 예식을 마무리하는 ‘파스카 찬송’(Exsultet)을 독서대에서 노래합니다. 곧 파스카 초를 옆에 놓은 독서대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전례 공간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에 독서대 옆이나 제단에 마련된 촛대에 놓여있는 파스카 초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후에는 성당에 세례대가 있으면 그 옆에 둡니다. 세례식에서 세례자에게 촛불을 켜줄 때, 파스카 초에서 불을 당겨주고, 장례미사 때에는 파스카 초를 고인의 머리맡에 놓는 까닭은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곧 교회는 신앙인 모두가 세상에서 ‘파스카 초’가 되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이길 기원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스카풀라는 원래 옷이다?

스카풀라를 아시나요? 성물방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데요. 보통 성모님 그림이나 글귀가 적힌 두 개의 작은 천이 긴 끈으로 연결된 형태의 물건입니다. 스카풀라는 생김새 때문에 ‘목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카풀라는 목걸이가 아니라 옷입니다. 수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꼭 앞치마 비슷하게 몸 앞뒤로 길게 걸쳐 입고 있는 옷을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옷이 바로 스카풀라입니다. 스카풀라(scapula)는 라틴어로 ‘어깨’라는 뜻입니다. 어깨너비의 천을 몸 앞뒤로 길게 늘어뜨려 입는 소매 없는 겉옷이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스카풀라는 초기에는 수도자들이 일할 때 수도복 위에 걸쳐 입는 옷이었는데요. 점차 어깨에 지는 십자가와 멍에를 상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각 수도회의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평신도들도 13세기경부터 스카풀라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6세기부터 점차 간소화되고 작아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착용하는 스카풀라의 모습이 됐습니다. 특별히 스카풀라 하면 ‘성모님’이 떠오릅니다. 성물방에서 파는 스카풀라들도 성모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곤 하지요. 스카풀라와 성모신심이 깊은 연관을 지니게 된 것은 1251년 가르멜수도회 성 시몬 스톡 신부님께 성모님이 발현하시면서부터입니다. 성모님은 스톡 신부님께 갈색 스카풀라를 보여 주면서 “이 스카풀라를 죽는 순간까지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특권을 누릴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첫 번째 토요일에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천국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스톡 신부님께 나타난 성모님만 스카풀라를 언급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님은 묵주와 함께 스카풀라를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파티마 성모님을 목격한 가경자 루치아 산토스 수녀님은 이것이 “모든 사람이 스카풀라를 착용하도록 하려는 까닭”이라면서 “스카풀라는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대한 봉헌의 표시이며 스카풀라와 묵주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보통 스카풀라라고 하면 갈색을 떠올립니다. 수도복에서 온 것이니 갈색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녹색 스카풀라도 있습니다. 1840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쥐스틴 비스케뷔뤼(Justine Bisqueyburu) 수녀님에게 나타난 성모님은 녹색 스카풀라를 보급할 것을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지니고 (녹색) 스카풀라를 착용하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신앙이 없는 이들과 냉담한 이들을 회개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카풀라는 언제까지나 옷일 뿐입니다. 스카풀라가 아니라 스카풀라를 착용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겠지요. 가르멜 수도회 윤주현(베네딕토) 신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착용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부적처럼 여긴다면 왜곡된 신심에 빠질 수 있다”면서 “성모님의 마음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스카풀라를 통해 늘 상기시키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4-21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복음의 탁월함

‘우월’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예전 어머니들이 자식을 야단치면서 주변에서 보기 쉬운 비교 대상이자 자기 자식이었으면 하는 허상인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 ‘엄마 친구 딸’(엄친딸)을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비교 우위를 말할 때 ‘우월’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반대로는 ‘열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급의 ‘우월’보다는 최상급인 ‘탁월’이 복음에 더 적합한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말씀 전례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1독서 구약, 화답송, 제2독서 서간서, 복음환호송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대화 구조는 ‘복음’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에는 파스카 신비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교우들이 인지 했든 못했든 교회는 전례에서 복음의 탁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예식을 행합니다. 백성 전체의 일어섬, 복음 준비 기도, 향과 촛불 행렬, 교우들에게 인사, 십자 표시, 복음집 분향, 복음 후 기도, 복음집 강복 등은 모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요약하면 복음을 통해 현존하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 환영, 존경, 경청, 감사, 결심, 간청 등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 환호송(알렐루야)을 부를 때는 모든 이가 일어섭니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께 대한 존경심과 환영을 드러내며, 그분 말씀을 경건히 경청하여 실천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봉독할 부제는 주례자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축복을 청합니다. 부제가 없는 경우에는 주례자가 제대에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합당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은총을 청합니다. 이 기도는 11세기경 미사에 들어왔으며, 이사야서 6장 5-7절의 소명 기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부제는 제대로 가서 입당할 때 들고 온 「복음집」을 높이 들고 향로와 촛불을 든 복사들과 함께 독서대로 갑니다. 이런 성대한 행렬은 고대 로마의 황제 행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복음집」에 존경과 예우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복음집」은 주일과 의무 축일 미사 때 봉독하는 복음만 수록해 놓은 전례서로, 동방과 서방의 전례 전통에서는 늘 「복음집」과 「미사 독서」를 구별했습니다. 복음을 봉독하는 부제나 사제는 독서대에서 먼저 교우들에게 인사합니다. 12~13세기에 도입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복음을 선포하심을 암시하며, 다른 때와 달리 손을 벌리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복음서와 이마, 입술, 가슴에 십자를 그으면서 복음 명칭을 알립니다. 복음의 참 저자는 하느님이시고, 복음사가는 오직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교우들은 “주님, 영광 받으소서”하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분향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의 수난 복음 봉독 때에는 복음 전 인사, 십자 표시, 분향, 촛불 등이 모두 생략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수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일시적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예식들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복음의 탁월함은 이런 예식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살아있는 복음집’인 우리들을 통해 드러날 때 그 탁월함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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