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인간도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 교리는 현대 지성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과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과거의 비합리적 관행이었던 ‘연좌제(連坐制)’가 폐지된 현대적 법 감정에서, 원조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논리는 시대착오적인 신화로 치부되기 쉽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인간을 교회의 권력 아래 종속시키기 위한 불순한 통제 도구’라고 비판하며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적 낙관론을 앞세웠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보편적 악, 즉 구조적 불평등과 환경 파괴, 그리고 집단적 광기는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재구성한 원죄론 원죄론이 가톨릭의 정통 교리로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어떤 사람들의 죄를 통해서 죽음이 들어왔고”(로마 5,12 참조)라는 말씀을 근거로 ‘유아 세례’라는 초대교회의 관습을 원죄의 실재를 증명하는 신학적 토대로 삼았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가 세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인격적 죄는 없을지라도 원초적 죄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며 당시 유행하던 펠라지우스의 낙관론에 맞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에는 육체적 욕망과의 투쟁에서 좌절했던 그의 개인적 체험이 투영되어 있다. 그에게 원죄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헛된 의지로 창조주께 반항한 결과 발생한 무질서한 상태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의 실재를 선언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더욱 정교한 형이상학적 틀 안에서 재구성한다. 토마스는 원죄를 단순한 행위가 아닌 ‘본성적 습성(habitus naturalis)’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를 ‘본성의 질병’에 비유하여 설명하며, 원죄를 분석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누리고 있던 ‘본래의 의로움(iustitia originalis)’이라는 조화 구조를 상정한다.(I-II,82,1) 본래의 의로움은 세 단계의 위계적 질서를 갖는다. 첫째, 이성이 하느님께 복종하고, 둘째, 하위 능력인 욕구가 이성에 복종하며, 셋째, 육체가 영혼에 복종하는 상태이다. 원죄는 이 질서의 정점인 이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전체 조화가 붕괴된 상태이다. 즉, 하느님을 향한 질서가 사라짐으로써 내면의 욕망이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 것이 원죄의 본질이다. 원죄의 구조적 분석에 이어, 이 부패가 어떻게 인류 전체에 전수되는지에 대한 전이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토마스는 인류 전체를, 아담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한다. 그는 “인류는 한 몸의 많은 지체들”과 같다고 비유한다.(I-II,81,1) 그에 따르면, 원죄는 개별 인격의 죄가 아니라 ‘본성의 죄(peccatum naturae)’이기에, 자연적 출산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이된다. 그는 원죄가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 타락’임을 강조한다.(I-II,82,4) 아담이 인류 본성의 첫 기원이기에, 그가 훼손한 본성은 그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후손에게 결핍된 채로 전달된다. “우리 모두가 곧 아담이다”라는 명제는 인류가 맺고 있는 존재론적 유대를 의미하며, 각 개인이 자신의 근원적 죄성에 대해 책임을 공유함을 뜻한다. 원죄는 인류의 원초적 타락…비록 본성이 훼손됐다 해도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냐 ‘선’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면…하느님과의 관계 회복하고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인간 행복의 가능성 토마스는 인간 본성이 원죄로 인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위축된 것이라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한다.(I-II,85,2)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는 개신교적 ‘전적 타락론’에 대한 반론이 된다. 토마스에 따르면,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악의, 무지, 나약함, 탐욕이라는 ‘네 가지 상처’가 남았다. 이 상처들은 인간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겪는 내적 마찰과 저항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는 자연적으로 덕에 끌리는 힘이 감소하였고, 그 힘은 “죄 때문에 지속해서 감소한다.”(I-II,85,3)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덕으로 향하는 본성적 이끌림’과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특별한 은총 없이도 ‘집을 짓거나 포도나무를 심는’ 등의 자연적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본다.(I-II,109,2) 원죄로 인해 본성은 상처 입었으나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선을 인식하고 부분적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 본성의 회복 가능성을 열어둔 토마스의 견해는 현대의 사회 구조적 악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원죄와 구조적 악 현대 신학은 원죄를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회적 조건’으로 재해석한다. 칸트의 ‘근본악’ 개념과 현대 신학자들의 관점은 원죄를 ‘사회악이 널리 퍼진 조건’ 속에서의 실존적 상황으로 설명한다. 아기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뒤틀린 세계의 선택들에 의해 방향 지어져 있다는 ‘인생 출발의 훼손’은 원죄의 현대적 형태이다. 이러한 “세상의 죄”(요한 1,29)의 관점은 구조적 악이 개인의 무지와 탐욕을 어떻게 증폭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원죄 교리는 인간의 ‘자력 구원’이라는 오만을 경계하고, 개인이 구조 내부에서 발현하는 악의 보편성을 인정하게 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결국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며, 초자연적인 회복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원죄 교리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 본성에 대한 폄하와 혐오가 아니라, 원초적 죄성과 상처의 정체를 직시함으로써 시작되는 ‘치유의 여정’을 제시하는 데 있다. 토마스가 논증하듯 인간 본성에는 여전히 선함이 존재하지만, ‘병자’와 같은 상태에 처한 인간은 치유하는 은총 없이는 초자연적 선은 물론 자연적 선조차 완벽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원죄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은총의 필연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사멸의 길에 놓였으나, 부활찬송에 나오는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라는 역설처럼 이 결핍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향한 첫걸음이다. 원죄 교리는 인간 실존의 어둠을 밝힘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빛과 은총의 신비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참행복에 도달하게 하는 이정표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예수님의 나이는 33살이다?

성당에 가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문득 ‘저기 계신 예수님은 몇 살이실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수난·부활·승천이 모두 같은 해의 일이니 십자가 위 예수님의 나이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던 햇수기도 합니다. 흔히 그 햇수를 33년이라고들 합니다. ‘33살’이라는 추정은 복음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루카 3,23)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더해 33이라는 햇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공생활의 ‘기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세 번의 파스카 축제(요한 2,13; 6,4; 13,1)가 있었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보고 2~3년가량으로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33년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단 서른 살‘쯤’이라는 표현에서부터 명확하지 않고, 공생활 기간도 추측이기 때문이지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계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수난일이 “파스카 축제 준비일”(요한 19,14)이었고, 그다음 날이 “안식일”(요한 19,31), 곧 토요일이었다고 말하는데요.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지역에 파견된 서기 26~38년 사이에 이 조건에 맞는 해는 서기 30년과 33년 두 번입니다. 서기 33년이면 예수님 나이 33살이 딱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서기’를 만들 당시 계산이 잘못돼 서기 1년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헤로데왕 생존 당시 태어나셨는데, 헤로데왕은 기원전 4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기원전 6~7년경 탄생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학자들은 서른 살쯤과 가까운 서기 30년을 예수님 부활 연도로 추정합니다. 성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예수님의 정확한 나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33’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수난·부활을 묵상하도록 해줍니다. 구체적인 숫자 덕분에 예수님이 우리의 시간 안에 실제로 계셨음을 기억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1933년(1900+33)과 1983년(1950+33)에 희년을 지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2025년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얻어 주신 속량을 기념하는 2000주년이 될 2033년을 향한 여정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밖에도 여러 기도나 신심 활동에서 33이라는 상징이 활용됩니다. 오늘날 33살이면 청년입니다. 혹시 너무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예수님의 젊음은 매 순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향한,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한 ‘속량’의 소중한 준비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3항 참조)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을 맞이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지금, 한 번쯤 ‘청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하느님의 구원 경륜 3단계와 믿음

우리는 마음속에 ‘인간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큰 질문을 지니고 있다. 이 큰 질문에 대하여 가톨릭 신학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첫 번째, 양심대로 살면 구원받는다. 두 번째,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 세 번째,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바라신다.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구원의 방법을 달리하셨다.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던 기원전 2000년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양심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기원전 1500년 모세의 시대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약 2000년 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셨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아브라함의 시대, 율법도 모르던 시대에는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모세의 시대, 율법이 주어진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시대에는 믿음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결국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과정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3단계로 이루어졌다. 즉 양심의 단계에서 율법의 단계로, 율법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하느님의 인간 구원 경륜 과정이 역사와 더불어 진화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은 양심과 율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양심과 율법을 포함하면서 초월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 속에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믿음이고, 죽어 있으면 죽어 있는 믿음이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홀론(Holon)’ 이론과 같다. 홀론이란, 그리스어로 전체를 뜻하는 ὅλος(holos)와 개체 혹은 부분인 ὀν(on)의 합성어다. 실재는 전체(whole)이면서 부분(part)인 홀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는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홀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온전한 원자는 한 온전한 분자의 부분이며, 그 온전한 분자는 한 온전한 세포의 부분이고, 그 온전한 세포는 온전한 한 유기체의 부분이다. 현실적 존재들의 각각은 단순한 하나의 전체도 아니고, 하나의 부분도 아니며, 다만 한 전체이자 부분인 하나의 홀론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포는 아원자, 원자, 분자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초월하고 있다. 믿음 역시도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결여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이 많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신자들은 살아 있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갖춘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부활」: 양심의 부끄러움과 은총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함의 척도는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공동체나 죄스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죄스러움에 대한 태도가 그 공동체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법적인 판단과 처벌에 따른 처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양심에 기초한 부끄러움의 감정이다. 1899년 71세의 나이에 톨스토이는 10년의 작업을 거쳐 「부활」을 출판한다. 로맹 롤랑이 ‘예술적 성서’라고 극찬한 작가의 마지막 장편 소설은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내적으로 부활하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출간 2년 후인 1901년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교회와 사회의 무디어진 양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동시에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다시 깨어나는 양심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바오로 사도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주된 이유에 대해, 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한다.(사도 24,16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덕적 감각과 관련하여 외적인 법정보다는, 내적인 법정을 강조한다.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한 것처럼, 내적 양심은 단지 고귀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를 만나는 성스러운 곳이다. 네흘류도프는 살인 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는데, 절도와 살인 혐의로 피고석에 앉아 있는 매춘부가 과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쫓겨난 카츄샤임을 알아본다. ‘그 같은 죄를 양심에 파묻은 채 편히 살았던’ 그는 자신의 ‘냉혹함과 잔인함, 비열함을 인정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만, 혹시라도 그녀와 변호사에 의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당할까 두려워한다. 또한 주인공은 과거의 죄스러운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특히 동물적 욕망을 채우고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쥐여주고 달아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비열했는지‘ 자책한다. 소리 내어 자신을 ‘그런 무뢰배, 그런 악한‘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악행으로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실한 성찰엔 부끄러움이 따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면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끄럽고 역겹다. 역겹고 부끄럽다’라는 감정을 경험한다. 남들 앞에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외적 창피함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적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선 내적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고, 내면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세상의 심판을 대면해야 하는 진퇴양난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의 대립이다. 외적 창피함은 남의 평가나 시선을 중요시한다. 의도적으로 내면의 상태를 감추는 외적 이미지를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위선과 자기기만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적 부끄러움은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 혹은 진리에 기초한다. 두 개의 가치관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어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 개의 가치관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활」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여성의 삶 파괴했던 과거 악행에 부끄러움 느끼며 진실하게 반성…이타적인 삶 결심하고 사랑 실천 부활은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하느님의 가치관 지켜내는 여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대립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지상의 도성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가치관을 따르지만, 하느님의 도성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관이 우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지상의 도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상의 가치관을 경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 결국 이러한 대립 사이에서, 네흘류도프는 진리의 목소리를 선택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마음대로 판단하라지. 그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라고 깨닫는다. 지상의 도성에서 창피함보다, 하느님의 도성에서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초월하여 내면의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책임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가슴속에는 고통스럽기는 하나 평안을 주는 뭔가가 있었다.” “정말 좋다! 정말 좋다. 아, 정말 좋다!”라고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카츄샤를 버린 이후 ‘그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신적 존재가 깨어난 것을 기뻐하는 눈물‘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의 중요성을 여러 강론에서 언급한다.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반드시 ‘양심 성찰‘을 한다. 고해소에서의 진정한 고백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단순히 ‘죄의 목록‘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바로 도덕적 판단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것이다.”(2020년 9월 3일 강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은총이다”(2025년 10월 13일 강론)라고도 한 바 있다. 왜냐하면 죄스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은 나약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절망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 악행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카츄샤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참회하고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양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은 더 이상 내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나를 얽매고 있는 이 허위를 부숴버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며 진실만을 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카츄샤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간다. 감옥에 있는 그녀를 방문해 용서를 구하고, 자기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녀의 유배지인 시베리아까지 따라간다. 그러면서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불의를 목격한 후에, 카츄샤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전히 이타적 삶을 결심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에게 구원의 문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물리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양심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양심을 흔들어 깨울 때, 발생하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이 감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다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삶 안에서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며 부끄러워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다.(루카 5,8 참조) 그래서 부활한 양심은 내면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간다. 부활은 한 순간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의한 사회 안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도성의 가치관인 이타적 사랑을 살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영혼을 볼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영혼이 등장하곤 하는데요. 보통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종종 영혼을 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이 영혼, 영화에서처럼 보는 것도 가능할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영혼은 영화에 나오는 영혼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먼저 비슷한 점을 보자면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고 인간 창조의 장면을 전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하느님이 불어넣어 주신 영혼을 통해 생명력을 얻게 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66항, 이하 교리서) 이렇듯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교리서 363항)을 가리킵니다. 영혼이 육체에 생명을 깃들게 하고,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면, 인간이란 사실 ‘영혼’만 중요하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해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고 육체의 중요성을 말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4항) 육체가 살아있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육체가 없는 영혼도 온전하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 곧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개별 심판으로 연옥이나 천국이나 지옥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교리서 1022항 참조) 그리고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교리서 997항) 죽은 이의 영혼은 다시 육체와 결합해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곧바로 연옥·천국·지옥에 이른다고 하니, 영화와는 달리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라면 육체와 단일체를 이루고 있을 테니 영혼만 따로 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은 육화된 영, 즉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이요, 불멸의 영을 부여받은 육체이기에 통일된 전체로서 사랑할 소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 11항) 영혼과 육체가 아주 긴밀할 뿐 아니라 영혼은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겉모습, 일부분만이 아니라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영혼 전체를 바라보려 노력한다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초자연 신학은 신앙을 다룬다

초자연 신학 또는 고유한 의미의 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전통적 분류 방법에 따르면 네 가지 있다. 성서 신학, 역사 신학, 조직 신학, 실천 신학이다. 첫 번째, 성서 신학은 ‘신앙의 원천성’을 다룬다. 확실한 신앙의 증서로서의 문헌의 발생 그리고 원래의 의미와 현재를 위한 의미를 다룬다. 성서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성서학, 구약학, 신약학, 구약 입문, 신약 입문 등이 있다. 두 번째, 역사 신학은 ‘신앙의 전통성’을 다룬다. 세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는 신앙의 전달 과정 안에서 다양한 신학들과 교회들의 역사를 다룬다. 역사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고대 교회사, 중세 교회사, 근세 교회사, 현대 교회사, 한국 교회사, 교부학, 신학사 등이 있다. 세 번째, 조직 신학은 ‘신앙의 합리성’을 다룬다. 신앙의 합리성이란, 첫째로 신앙이 정서적 경험을 넘어서 논리적·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로는 신앙의 교리와 고백이 현대인의 이해 가능성 안에서 철학·역사·사회학적 근거들에 의해 설명·구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앙 내용의 논리적 진술, 표현 방식의 형성 그리고 그 전달 방식을 포함하는 포괄적 작업이다. 따라서 조직 신학은 교회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그리고 구조 안에서의 신앙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의 해명 가능성을 다룬다. 조직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기초 신학, 신학 입문, 교의 신학, 윤리 신학, 그리스도교적 사회학, 교회일치 신학 등이 있다. 네 번째 실천 신학은 ‘신앙의 실천 가능성’을 다룬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같은 시대를 살면서, 오늘날 하느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다룬다. 실천 신학에는 개별 학문으로서 사목 신학(설교학, 교리 교수법, 사목 심리학, 사목 사회학 등), 교회법, 전례학, 종교교육학, 선교학, 영성 신학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초자연 신학은 ‘신앙의 원천성’, ‘신앙의 전통성’, ‘신앙의 합리성’, ‘신앙의 실천 가능성’을 다룬다. 즉, 신앙을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진리를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 시대의 놀라운 신학의 발달로 이루어진 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읽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내면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 중 하나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기초 신학은 단어가 의미하듯 신학의 영역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의 기초는 무엇인가? 바로 계시와 신앙이다. 따라서 이를 전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기초 신학이다. 신학의 방법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증적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변적 방법이다. 실증적 방법은 ‘신앙의 들음(Auditus fidei)’에 해당하고 사변적 방법은 ‘신앙을 이해함(Intellectus fidei)’에 해당한다. 실증적 방법은 신앙에 대한 사실의 문제를 다루고 사변적 방법은 신앙에 대한 본질의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은 따로 분리될 수 없고 서로를 도와 신앙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죄와 벌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장애물인가?

사이비 종교 집단이 과도하게 ‘죄의식’을 이용해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죄 자체나 죄의식을 경감하려는 경향도 널리 퍼져 있다. 현대의 지나친 낙관주의는 죄를 실재하지 않는 심리적 위축으로 치부하거나, 오히려 죄를 ‘매력적인 벗’으로 여기며 그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인들은 대개 ‘안락’과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서 행복을 찾으며 고통과 불편을 악(惡)으로 간주하여 회피한다. 이런 경향에 따라 많은 이가 죄란 실재하지 않거나, 설령 실재하더라도 그 결과가 별것 아니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강조하는 ‘죄(Peccatum)’와 ‘벌(Poena)’이라는 개념은 현대인에게 자율성을 침해하는 비이성적 권위의 압제로 비춰지곤 한다. 그렇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과 이에 따른 거부감이 상당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심리적 욕구 충족에 따른 자아 긍정과 ‘무질서한 자기 사랑’의 대비 내면의 평안과 욕구의 충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현대 심리학과는 대조적으로, 토마스는 ‘무질서한 자기 사랑(inordinatus amor sui)’을 모든 죄의 뿌리로 규정한다.(I-II,77,4) 이는 자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사랑의 서열이 뒤바뀐 상태에 대한 지적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올바른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이성적 본성을 보존하고 최고선인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지만, ‘무질서한 자기 사랑’은 세상의 선에 집착함으로써 불변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어리석음(愚)에 빠지고 만다. 현대인은 죄를 개인적 실수나 트라우마의 산물로 보며 자기 용서에 집중하는 반면, 토마스는 이를 이성의 규칙과 영원법에 대한 무질서로 규정한다. 무질서한 자기 사랑이 결국 본래적 자아를 포기하고 가변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과정임을 깨달을 때, 토마스의 엄격함은 인간 본성을 지키기 위한 경고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성적 본성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된 죄 토마스에게 죄는 외부 권력의 명령을 어긴 행위이기 이전에, 인간의 행복을 스스로 침해하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이다. 그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인 동시에 ‘가변적인 선으로의 무질서한 전향’으로 정의한 바 있다.(I-II,84,1) 죄를 짓는 자는 이성이 사려 깊게 정한 목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파괴하고 내면의 무질서(chaos)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죄가 인간다움의 실현을 방해하는 비본성적 행위임을 입증한다. 죄를 경계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상대주의 윤리는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라며 책임을 외부 환경이나 운명으로 전가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죄의 원인을 무지, 정념, 혹은 악의(malitia)라는 내적 요인으로 세밀히 분석함으로써(I-II, qq.76-78), 인간이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는 ‘주체성’을 역설한다. 즉,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 죄가 본성의 왜곡임을 이해할 때, 그에 따른 ‘벌’의 의미 또한 단순한 보복에서 질서의 회복으로 전환된다. 죄는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스스로의 존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벌은 파괴된 질서 다시 세우는 ‘환원’…하느님 은총으로 인간 본성 회복해야 이성적 성찰로 자신의 결여 직시할 때 진정한 행복과 평온함 되찾을 수 있어 응보를 넘어선 죄악의 치료와 질서 회복을 위한 벌 토마스에 따르면, 벌은 일차적으로 권력자의 복수가 아니라, 파괴된 질서를 다시 세우는 ‘정의의 환원’이자 ‘죄악의 치료제(medicina culpae)’이다. 죄는 세 가지 질서 즉 개인의 이성, 사회적 관계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 질서를 동시에 파괴한다. 죄의 결과로 수반되는 양심의 가책, 사회적 불명예, 신적 진노는 현대인에게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만, 이는 사실 파괴된 질서에 대한 본성적 경고이다.(I-II,87,1) 따라서 벌은 이 세 영역에서 정의를 재정립하는 필수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보다는 엄격한 응보와 처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자유와 욕망을 존중하는 인간들을 죄책감의 노예로 만드는 체계처럼 느껴진다. 특히 정의를 일종의 공평함이나 비례로 보는 현대인들은 시간 안에서 저질러진 일시적인 죄에 대해 영원한 벌(poena aeterna, 영벌)이 부과된다는 점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낀다. 토마스는, 하느님이 그런 벌을 내리시는 것은 멸망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정의의 질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영벌이 하느님의 강요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완고함’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I-II,87,3) 인간이 궁극 목적인 하느님으로부터 영구히 돌아서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기를 고집했기에 영원한 벌이 성립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벌을 ‘영원한 처벌의 벌(poena damni)’과 ‘유한한 감각의 벌(poena sensus)’로 정교하게 구분한다.(I-II,87,4) 또한 그는 죄의 경중을 생명 현상에 비유한다. 사죄(死罪, peccatum mortale)는 최종 목적으로부터의 회복 불가능한 전복(顚覆)으로서 ‘죽음’과 같으며, 경죄(輕罪, peccatum veniale)는 질서의 방향은 유지하되 수단에 혼란이 생긴 ‘질병’과 같다. 벌은 이 질병을 치유하고 죽음의 질서를 정의로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I-II,89,2) 이렇게 벌의 치유적 성격을 이해하면, 인간은 은총을 통한 본성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 담론은 현대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왜곡된 본성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심리적 해부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본성의 손상’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치유된 본성의 상태’로 나아가는 관계적 회복이 필수적이다.(I-II,87,7) 이는 자기만의 힘으로 자아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대적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타인 그리고 자신과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참된 행복은 죄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메커니즘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있으며, 벌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의 과정으로 수용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성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직시하고 책임질 때, 비로소 인간은 주관적 만족을 넘어선 진정한 평온함에 도달하게 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우리도 ‘예언’할 수 있다?

‘예언’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종말을 예언했다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날 수도 있겠고, 이스라엘에 닥칠 재앙이나 메시아의 탄생 등을 알린 예언자들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예언은 어쩐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로 이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우선 예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예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豫) 말하는(言) 것’을 뜻하는데요. 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현재의 일을 과거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등 예언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다뤘고,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을 동시에 하기도 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정치, 사회, 신학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처지나 상황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세대에 하느님을 대신해 말한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두고 “주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내렸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예언자들은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위해 살고, 또 죽기까지 하면서 온 삶으로 하느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면서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그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때, 평신도이건 성직자이건 간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을 통해 이뤄진다”고 설명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85항)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예언자로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언자가 되기를 꺼렸거나 예언자적 자질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성경 속 예언자처럼 하느님 말씀을 환시로 듣거나 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위대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영광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당신의 예언자직을 수행하신다”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권력으로 가르치는 교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예언자직을 수행하신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35항) 일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며 말로써, 또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언입니다. 혹시 이번 주 복권 1등 당첨번호나 주가 상승 종목을 미리 알 수 있는 예언이 아니라 실망스러우신가요? 하지만 우리의 예언은 복권이나 주식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사랑을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알려줍니다.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어린 왕자」: 불완전한 대상과 온전한 사랑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이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근본적 경험인 사랑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관계를 통해서 용서와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신처럼 흠 없는 인간은 없기에, 완벽한 관계의 대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 대상이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는 그 대상을 온전히 품을 수는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방황과 회귀의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행성인 B612를 떠나 여러 행성을 여행하며 마침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떠남, 여행, 귀향에 대한 여정은 모두 관계에 대한 선택의 문제와 연결된다.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도 여행과 귀환의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 여정을 시작한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예수님은 소외당한 죄인들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 다시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스승을 만나고 복음 전파를 시작한다. 어느 날 어디에선가 날아 온 씨앗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되었다. 어린 왕자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지만, 동시에 장미의 여러 가지 요구들과 태도에 묻어나는 ‘교만함‘과 ‘허영심‘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더 이상 장미를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자신의 행성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비록 그 꽃이 ‘자신을 향기롭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지만, 주인공은 꽃의 완벽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여섯 개의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여섯 명의 어른을 만난다. 모든 것을 통제하며 권력에 집착하는 왕, 남들의 칭찬만을 갈망하는 허영쟁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술에 중독된 술꾼, 자신이 소유한 별들의 숫자만을 세고 있는 탐욕스러운 사업가, 기계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로등 켜는 사람, 실제 경험을 무시하고, 책으로만 탐구하는 지리학자. 이들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갇혀 있다.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몰두한 나머지, 삶의 더욱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한다. 겉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뭔가를 이루어 가며 스스로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지만, 내면은 공허할 뿐이다. 삶의 참된 충만함을 채울 수 있는 관계의 역동성을 놓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껍데기만을 추구하는 어른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어린 왕자는 매번 “어른들은 정말 아주, 아주 이상해”라며 다른 행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황하던 어린 왕자 ‘길들임’으로 소중한 존재 만들며 관계 속 ‘선택’ 의미 깨달아 예수님이 죄인들 회심 시키셨듯 윤리적 책임감 갖고 관계에 끝가지 충실해야 마침내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에 도착하여 여우를 만난다. 주인공이 여우와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슬픈‘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아서‘ 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길들이기는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두 존재가 서로에 대한 의미를 천천히 가꾸어 가는 과정이다. 갑작스럽게 처음부터 뜨거운 열정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좀 떨어져서‘ 앉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서‘,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라‘고 요청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 길들여지게 된다. 여우의 길들이기는 관계를 맺는 상대방에게 물리적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는 것이다. 한 존재에 대한 지식을 밤새워 달달 외워서, 그 존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함께 보낸 평범한 일상 시간의 양만큼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제 뭘 알려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 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는 거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길들임의 관계를 통해 평범한 것은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가 된다. 길들이기 전에는 각 존재가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주인공이 길들이기 전 여우는 다른 여우로 대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이 여우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내재적으로 타고난 속성이 아니라, 주인공이 들인 시간과 정성이다.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함께 물리적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기적들과 죄인들의 용서를 말씀으로 행하신다. 세관장인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 즉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한다. 사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회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캐오는 죄인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한 존재가 된다. 어린 왕자는 깨닫는다. 자신의 행성에서 돌보던 장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도망쳐 나온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비록 장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장미를 돌보며 보낸 시간이 이미 장미를 소중하게 했다는 것. 그래서 그 장미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매우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길들임은 인식의 변화를 불러온다. 마지막에 여우는 주인공에게 “본질적인 건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고 일깨워준다.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장미는 교만하고 허영심으로 가득했지만, 비로소 마음으로 바라본 장미는 모든 장미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유한 존재가 된다. 시간을 통한 길들임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장미는 어린 왕자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목사인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싸우다 죽은 작은아들의 장례식에서, “이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루카복음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변명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들로서 안아주고 잔치를 베푼다. 또한, 이 관계는 단순한 정서적 친밀감을 넘어서, 윤리적 책임감을 수반한다. 여우는 주인공에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라고 알려준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면, 그 관계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 동물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도 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혼배’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다?

성당에서 ‘혼배(婚配)’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하고 한자이다 보니 일반적인 용어처럼 느껴지는데요. 사실 이 말이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시나요? 아시는 것처럼 혼배는 ‘혼인’을 뜻합니다. 물론 조선시대나 옛 중국 문헌 등에 ‘혼배’가 등장하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혼배’라는 단어는 주로 신자들이 사용합니다. 여러 국어사전을 살펴봐도 ‘혼배’는 가톨릭 용어로 분류됩니다. 현재 전례나 교회 문헌에서는 혼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만, 신자들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혼배미사, 혼배성사, 혼배공시 등으로 자주 쓰입니다. 혼배는 신앙 선조들이 사용한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에서 온 표현입니다. 혼인, 결혼이라는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 있는데, 왜 혼배를 썼을까요. ‘혼(婚)’은 혼인을 뜻할 테니, ‘배(配)’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교요리문답」은 혼배의 특성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합(配合)인 것과 또한 부부가 서로 갈리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배합, 즉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혼인의 단일성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혼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혼인성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신자와 비신자의 혼인, 관면혼을 ‘관면혼배’라고도 부르는데요. 관면혼은 성사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신자들의 혼인은 성사로 이뤄져야 하지만, 교회법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면해 비신자와 혼인하도록 해주는 것이 관면혼입니다. 관면혼은 성사가 아니니 의미가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혼인의 제정자’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사목헌장」 48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혼인성사는 ‘한 처음에’ 창조주가 제정하신 부부 계약 자체의 성사”라고 강조하십니다.(「가정공동체」 68항 참조) 그러니 비록 성사는 아니지만 혼인이 지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고 혼인성사는 이를 완성해 줍니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교회의 신랑께서 혼인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러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그렇게 부부도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영원한 신의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48항 참조) “성사의 은총은 부부의 인간적 사랑을 완성하고 해소할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굳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그들을 성화”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1항) 혼인의 사랑은 배우자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이미 배우자에게 다 내어줬기에 ‘한 몸’이 되고,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그 모범입니다.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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