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거룩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권력과 부의 상징이 아니라 기도의 장소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함이 기도와 활동을 연결시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2-38)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군중에 휩싸여 계시지만 당신의 활동에 매몰되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는 복음서 끝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에 질려 이 시간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시는 동시에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맡기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지막 활동, 즉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세 가지 힌트를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로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찾는 것이고, 셋째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간결하고 급박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즉각적인 특징을 지니며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활동은 바로 고요함으로 물러감 내지 홀로 하느님과 기도함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마치 생리 과정처럼 숨을 들여 쉼과 내심으로, 묵상과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긴장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각인시켜 왔습니다.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도미니코회의 ‘묵상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 예수회의 ‘활동 안에서의 관상’ 내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 가르멜 영성과 일반 직업 생활을 연결하는 최근 새로운 영성 공동체의 모습 등은 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을 낸다’, ‘충분한 시간’, ‘시간이 가는 것을 잊는다’, ‘시간을 투자한다’, ‘시간표’, ‘시간을 쓴다’, ‘예약 시간’, ‘시간을 희생한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적다’, ‘후회되는 시간’, ‘시간 낭비’, ‘무의미한 시간’, ‘시간을 죽인다’ 등.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반성하게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활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동은 기도를 실제가 되게 하며 기도는 행동을 진리 안에 놓는다.”(에버하르트 베트게: 개신교 신학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친구)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