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나의 기도에 대한 확신인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인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루카 11,9-10 참조)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모든 기도가 들어질 것처럼 여겨지고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경우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내지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등의 성경 본문은 의도적으로 ‘누가’ ‘무엇’을 주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루카 11,11-13 참조) 이어지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핵심 본질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우리의 바람이 들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떨치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라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사는 어린이들처럼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마태 6,25-34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1-22; 마르 11,22-24; 루카 17,6 참조) 하지만 기도는 ‘하면 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빵과 생선을 주되, 돌과 뱀을 주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가 청한 것이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또 산을 옮기는 대신 산을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을까요? “기도할 때는 마치 하느님만이 계신 듯이, 일할 때는 마치 자기만이 있는 듯 행하라!”는, 루터 내지 이냐시오 로욜라로 소급되는 영성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은총의 영역에, 활동은 윤리의 영역에 속합니다. 둘은 각각 고유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두 가지 자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설명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드릴 때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라는 데레사 성녀의 단순한 기준,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제가 옮길 수 없는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제가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제 자신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또 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혜를 주소서! (어느 수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0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연도가 났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왜 모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아마 비신자들에게는 마치 암호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연도(煉禱)라고 불러왔습니다. 연도는 연옥의 영혼을 위해 바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온 말인데요. 지금은 ‘위령기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연도가 났다”는 말은 주로 ‘상이 났으니, 위령기도를 바치러 가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느 신자의 집에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연도가 났다”고 서로에게 알립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여러 신자들과 함께 빈소를 찾아 빈소에 ‘연도 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요. ‘연도 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위령기도, 연도는 보통 선창자와 후창자가 주고받으며 우리 고유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바칩니다. 우리 소리에 담긴 기도문에 어쩐지 더 정감이 가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토착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입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위령기도를 노래로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도는 단순히 노래로만 바치는 위령기도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기도가 우리 문화와 정서, 전통에 잘 융화된 우리 고유의 기도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위령기도에 우리 가락을 붙여 연도를 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미 박해시대부터 연도가 자리 잡았다고 추정됩니다. 박해시대 우리 선조들은 신자 집에 장례가 나면 밤을 새워 기도해 줬다고 하는데요. 이때 연도를 바쳤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연도는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가락으로 노래해 왔는데요. 1991년 연도의 가락이 오선악보에 수록됐고, 2003년 한국교회 차원에서 「상장예식」을 마련하면서 전국 모든 신자들이 같은 가락으로 연도를 바칠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신앙선조들은 연도를 노래로 바쳤을까요? 신앙선조들이 상장례 때 사용한 「텬쥬셩교례규(천주성교예규)」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텬쥬셩교례규」에는 “왜 소리 높여 노래하며 연도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노래하는 소리로써 내 생각을 들어 주께 향하게 해 내 마음을 수렴하게 하고 더욱 구원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밝히고, 또 “우리가 죽음의 슬픔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슬픔은 희망 없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라 전합니다. 혹시 ‘연도를 노래로 바치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다’고 불편해하신 적 없으신가요? 하지만 가족이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겨있을 때, 빈소에서 이어지는 연도 소리는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에게 연도는 신앙 공동체가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부활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노래하는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이번 위령 성월이 가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한 번쯤 연도를 바치시면 돌아가신 분께도, 또 우리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11-1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활동과 기도: 마르코 복음서가 가르치는 기도

기도는 거룩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권력과 부의 상징이 아니라 기도의 장소로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함이 기도와 활동을 연결시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2-38)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군중에 휩싸여 계시지만 당신의 활동에 매몰되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는 복음서 끝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에 질려 이 시간이 비켜 가기를 기도하시는 동시에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맡기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지막 활동, 즉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세 가지 힌트를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로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찾는 것이고, 셋째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간결하고 급박한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즉각적인 특징을 지니며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활동은 바로 고요함으로 물러감 내지 홀로 하느님과 기도함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마치 생리 과정처럼 숨을 들여 쉼과 내심으로, 묵상과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긴장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각인시켜 왔습니다.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도미니코회의 ‘묵상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 예수회의 ‘활동 안에서의 관상’ 내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 가르멜 영성과 일반 직업 생활을 연결하는 최근 새로운 영성 공동체의 모습 등은 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 ‘시간을 낸다’, ‘충분한 시간’, ‘시간이 가는 것을 잊는다’, ‘시간을 투자한다’, ‘시간표’, ‘시간을 쓴다’, ‘예약 시간’, ‘시간을 희생한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적다’, ‘후회되는 시간’, ‘시간 낭비’, ‘무의미한 시간’, ‘시간을 죽인다’ 등.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반성하게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활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동은 기도를 실제가 되게 하며 기도는 행동을 진리 안에 놓는다.”(에버하르트 베트게: 개신교 신학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친구)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0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미사는 위령미사가 아니다?

‘연미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옛 말이라서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들어보지 못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전에는 성당에 성가를 표시하는 안내판에 ‘연’, ‘생’ 등으로 미사 지향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연(煉)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생(生)은 ‘산 이를 위한 미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위령미사도 역시 죽은 이를 위해 드리는 미사일 텐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요? 먼저 ‘연미사’와 ‘위령미사’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미사라는 말은 박해 시대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박해 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해 1880년 출판된 「한불자전」에는 연미사를 “연옥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한 미사”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연옥은 죽은 신자들이 천국에 이르는 거룩함을 얻기 위해 정화 과정을 거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신자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연옥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대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미사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위령미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라면서 “위령미사와 연미사는 본래 동일한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연미사는 위령미사의 옛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마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전례와 죽은 이를 지향으로 하는 미사의 차이점을 두고 하신 말씀일 듯합니다. 앞서 예전에는 안내판에 ‘연’이라고 표시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미사 지향을 의미합니다. 교회법은 “사제는 산 이들이거나 죽은 이들이거나 누구를 위하여서든지 미사를 바쳐 줄 자유가 있다”(제901조)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신부님께 돌아가신 분을 미사 지향으로 부탁한다면 그 신부님은 그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를 바칩니다. 그러나 미사 지향이 연미사, 즉 죽은 이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전례가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본당에서는 연미사여도 그날의 전례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미사 경본」에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죽은 이를 위한 고유한 기도문과 독서가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미사 지향은 신부님 개인이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치는 것이라면, ‘죽은 이를 위한 미사’는 전례를 통해 미사를 드리는 공동체 전체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친다 것이 다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어떤 지체를 위해 영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다른 지체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379항) 돌아가신 분들도, 살아있는 우리도 모두 예수님을 통해 연결된 지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연미사, 위령미사를 포함해 모든 미사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잔치입니다.

2024-11-0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핼러윈은 원래 교회 축일이다?

가정에 어린이가 있으시다면, 핼러윈 행사를 챙겨보신 일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은 이날 유령이나 캐릭터 등으로 분장을 하며 사탕을 나누는 활동을 하곤 합니다. 청년들 사이에서도 핼러윈은 널리 퍼졌는데요. 청년분들 중에도 이날 또래들과 파티를 열어본 일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핼러윈하면 호박머리를 한 유령이나 귀신, 괴물 같은 다소 공포스러운 것들이 떠오릅니다. 또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들도 생각나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세속적인 행사라고만 여겨지기 쉬운데요. 실은 핼러윈은 교회 축일에서 나온 날입니다. 핼러윈이 교회 축일에서 온 날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핼러윈(Halloween)은 올 핼러우스 이브(All Hallows’ Eve)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브’는 잘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전야를 뜻하는 말이고요. 핼러우(Hallow)는 ‘성인’(聖人)을 뜻하는 말입니다. 핼러윈은 바로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 전날인 10월 31일에 핼러윈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사실 10월의 마지막 날은 고대 영국과 아일랜드 지역에서 생활하던 켈트족이 한 해를 마무리하던 날이었습니다. 켈트족들은 이때 사윈(Samhain)이라는 큰 축제를 지냈는데, 축제기간에 죽은 이들이 찾아온다고 생각했고, 죽은 이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가면을 쓰거나 귀신으로 분장하곤 했다고 합니다. 켈트족 국가들이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자,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 핼러윈을 지내며 켈트족들이 오랜 풍습을 교회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사윈이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축제였다면, 핼러윈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핼러윈은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지 않는 개신교가 널리 퍼지면서 사라졌는데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지역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핼러윈 풍습을 가져간 것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핼러윈으로 변화했습니다. 핼러윈의 배경이 된 모든 성인 대축일을 시작으로 교회는 특별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시기를 보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날인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고, 11월 1~8일 교회 묘지 등을 찾아 전대사의 조건을 채우면, 죽은 이에게 양도할 수 있는 특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월 전체는 위령 성월이지요. 이처럼 핼러윈은 특별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시기와 이어지는 날입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축제처럼 변한 핼러윈이지만, 지난해와 올해 핼러윈은 그리 떠들썩하지 않은 듯합니다. 많은 분들이 2022년 10·29참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추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핼러윈은 핼러윈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2024-10-2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시편 22; 마태 27,46)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시편 22편을 읊으셨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침묵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만 기도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에 허무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선 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유다인 회당 안 동편의 기도하는 곳에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라!”는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기도는 자기 영혼에게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질문, 두려움과 의심에서 나오는 하소연과 고발, 침묵과 경청,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타인을 향함, 청원과 신뢰, 더듬으면서 답을 찾아감, 기도가 들어졌음에 대한 확신, 감사와 찬양과 충실함의 맹세 등으로 이루어진 시편 22는 기도가 상대방과 나누는 극적이면서도 참된 대화임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멀리 계신 듯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2,2) 시편 저자는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22,15)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22,22)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놓인 벽에 금이 가고 그것이 허물어지면서 기도하는 이는 갑자기 하느님 앞에 마주 섭니다.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가 실현되고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22,4)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바로 기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아계신,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답하지 않는 죽음의 벽 앞에서 서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마태 27,39-44; 시편 42,4)라는 믿지 않는 이들의 빈정댐,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라는 신앙인의 절규는 침묵하시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기도가 즉각적으로 들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갈고, 하느님이 관대함으로 맷돌을 천천히 돌리신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준엄하게 만회하신다.”(플루타르코스/섹스투스 엠피리쿠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는 말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때가 되면 그분이 개입하실 것이라 희망합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비극을 희극으로 당장 바꾸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혜와 희망의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22,25)라는 구절은 항구히 기도하는 이의 체험을 전해줍니다. 기도하는 이는 자신을 버러지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으로부터 긍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의 먼지를 응시하면서도 모태로부터 자신을 빚어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구일’기도인데 ‘9일’이 아니다?

중세 초 바치던 성탄 전 9일 기도에서 유래 특별한 은총 필요할 때 바쳐 어떤 지향을 두고 묵주 기도를 할 때 많은 분들이 ‘구일기도’를 하곤 하십니다. 그런데 구일기도를 바치는 분들을 보면 기도를 시작한 지 9일이 지나도, 19일이 지나도, 29일이 지나도 끝나지 않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계속 ‘구일기도 바치는 중’이시지요. 구일기도면 9일 동안 하는 기도인데 왜 끝나지 않는 걸까요? 실은 구일이 아흐레를 뜻하는 말이 아닌 걸까요? 구일기도의 구일은 아홉 날, 그러니까 말 그대로 아흐레를 뜻하는 말이 맞습니다. 서양에서는 라틴어로 9를 뜻하는 노벰(novem)을 따서 노베나(novena)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숫자 9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상징하는 수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 신약의 열 달란트, 열 처녀의 비유 등에서 알 수 있듯이 10은 완전함을 상징했는데요. 그래서 신자들은 10을 향해가는 9에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을 향한다는 의미로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성령 강림에 얽힌 9일이 구일기도의 가장 직접적인 유래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분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열흘째에 성령께서 오셨는데요. 제자들이 기도하며 기다린 기간이 9일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이 9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큰 축일 전이나 특별한 은총이 필요할 때 9일에 걸쳐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특히 중세 초기부터 프랑스와 스페인 등에서 성탄 전에 9일 기도를 바친 것이 널리 퍼지면서 대중적인 신심 행위가 됐습니다. 구일기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9일에 걸쳐 정해진 기도를 바치거나,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것인데요. 매일 바쳐서 9일을 기도하거나,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 9주간 기도하는 방식도 있고, 9일 간의 기도를 연속으로 여러 번 바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적인 구일기도는 9일 동안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는 형식의 기도인데요. 9일 동안만 기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청원을 드리는 구일기도를 3차례(27일), 감사를 드리는 구일기도를 3차례(27일) 바쳐서 모두 54일 동안 구일기도를 바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빛의 신비가 제정되기 전에는 환희·고통·영광의 신비를 돌아가면서 9일 동안 바쳐 각 신비를 3번씩 바쳤습니다. 이렇게 구일기도를 3번하면 신비들을 각각 9번씩 바치는 셈이었지요. 우리는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특별히 주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구일기도를 바치곤 하는데요. 어떤 분은 9일 중 하루를 빼먹으면 청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식의 말씀을 하곤 하십니다. 그러나 구일기도는 조건을 갖추면 반드시 이뤄지는 마법도 아니거니와 ‘소원 자판기’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공동번역 루카 11,13)

2024-10-2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참회 기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시편 51편, 130편)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위령기도를 바치는 위령성월이 다가옵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하시나이다.”(시 130,1-40: 최민순 역)라는 구성진 위령기도 소리를 들으면 돌아가신 가족과 친지를 떠나보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막막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함께 바치는 위령기도는 경황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줍니다.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 51편과 130편은 죄를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죄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과연 들어 주실까요? 시편은 악인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를 행복한 이로(시편 1편 참조), 죄인을 하느님이 미워하는 이 내지 기도하는 이의 원수로(시편 63,10-12; 139,19-22) 칭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들은 깨끗하고 흠 없는 이들입니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라네.”(시편 15,1-2).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당신께서 제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중에도 캐어 보시며 저를 달구어 보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시편 17,3) 그러므로 반복하여 죄짓는 이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집회 34,31)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은 죄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 기도 반성과 회개, 신뢰로 용서 구하며 하느님과 관계 회복 위해 애써 하지만 참회 시편은 죄를 지음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 중의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의 결백하심에 대비시킵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5-6) 이어서 시편 저자는 변화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로이 만들어 주시길,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 51,12-14) 끝으로 시편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겸손되이 자기 잘못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종합하자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올바르고 정직하거나, 적어도 그렇기를 원해야 한다고, 또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반성과 회개, 그분에 대한 신뢰로 하느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힘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상태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죄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극명한 대비 속에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이 죄스러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에 근거합니다. 이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용서를 구하는 시편 기도가 이 무상함을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게 해달라는 이들의 기도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느님(토빗 3,16;3,11-15;13,1-14,1)

20번 정도 기도를 언급하는 토빗기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4,19;12,6.7.17.20), 건강과 안전의 청원(5,17), 보살핌과 축복의 청원(7,11;9,6), 후손의 기원(10,11), 부모 공경의 청원(10,13), 자비와 평화의 기원(7,11), 하느님 찬양의 권고(12,6), 조신함과 성공의 청원(4,19), 자비와 구원의 청원(8,4)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토빗기는 죽고 싶다는 이의 기도도 들려줍니다. 토빗은 고지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외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미 고향에 살 때도 집안 사람들과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물을 드렸고, 이방인들 사이에 포로로 살면서도 까다로운 음식 규정을 지키고 동족에게 큰 자선을 베풀고,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1,6-20) 축젯날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된 상황에서(민수 9,10;19,11) 하필 성결법을 지키고자 방이 아니라 담 옆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그의 고집스러운 신앙생활은 이웃은 물론이고 부인조차 불편하게 한 듯싶습니다.(2,14) 아내를 의심하고 그와 다툰 뒤 토빗은 자기 연민에 쌓여 죽기를 청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3,6) 한순간에 눈이 멀어버린 토빗과 남편을 일곱이나 잃게 된 사라 절망 속에서도 목숨 거둬주시길 기도 진실한 기도 하느님께 다다르자 두 사람 고쳐 주도록 라파엘 파견돼 모든 문제 해결되면서 하느님 찬양 일곱 남자와 결혼했지만, 신랑과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모든 남편을 잃은 사라는 이웃의 흉흉한 입담과 자기 신세 한탄으로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부잣집 딸입니다. 그녀로부터 매 맞은 여종들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하자 사라는 목을 매 죽으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남아계실 아버지가 받을 수모를 생각하여 하느님께 죽음을 청합니다. “분부를 내리시어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다시는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게 하소서. … 아버지에게는 저를 아내로 맞아들일 가까운 친족도 일가붙이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남편을 일곱이나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저를 모욕하는 저 말이라도 들어 보소서.”(3,13-15) 둘 다 외로움의 낭떠러지에서 죽고 싶은 생각으로부터 올려진 절망적인 기도이지만 이는 하느님 앞에 다다르고 마치 극의 한 장면처럼 라파엘이 파견됩니다.(3,16-17)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을 기도로 장식합니다.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 내 후손 가운데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임금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나 얼마나 행복하리오? … 복을 받은 이들은 거룩한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라.”(13,4.16.18) 그의 시선은 포로 생활과 나그네살이라는 현실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릅니다. 재산이 많은 토비야 이야기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도 재산을 많이 모으는 유다인들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 하지만 토빗, 토비야, 사라, 라구엘, 라파엘 등 앞 세대와 뒷세대, 남녀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띕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12,8;14,8-9)는 말씀은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선행을 잊지 않게, 재산을 지닌 이로 하여금 자선을 잊지 않게 도와줍니다. 기도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12,12)는 라파엘 천사의 말씀 자체가 힘이 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1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끝에는 꼭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많은 분들이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한 단의 마지막, 바로 영광송 뒤에 이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구원송’이라고도 부르는 ‘구원을 비는 기도’입니다. 보통 묵주 기도를 배울 때 이 기도를 같이 배우곤 하는데요. 그래서 평소에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치는 분들 중에는 묵주 기도를 바칠 때가 아닌데도 영광송 후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저희 죄를…”이라고 외우다가 ‘아차!’하는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을 비는 기도처럼 영광송 다음에 오는 이 기도를 ‘짧은 마침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짧은 마침 기도는 구원을 비는 기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묵주 기도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짧은 마침 기도를 곁들이는 것을 권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짧은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하다”면서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다양한 짧은 마침 기도 중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을 비는 기도는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나타나셨는데요. 성모님은 전쟁의 종식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묵주 기도의 모후’라고 칭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발현 중 세 번째 발현이었던 7월 13일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알려주시며 묵주 기도의 한 단을 마칠 때마다 바치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비는 기도는 ‘파티마의 기도’(Fatima Prayers)라고도 불립니다.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면서 구원을 비는 기도도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가 널리 퍼져 신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교회의 차원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신심과 함께 기도문이 번역돼 전해지다 보니 구원을 비는 기도에 의역도 있고, 또 기도문의 문구가 달라 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주교회의는 2011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현재의 기도문으로 통일했고, 2017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구원을 비는 기도를 「가톨릭 기도서」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의역은 아직 남아 있는데요. 구원을 비는 기도의 라틴어 기도문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모든 영혼들’을 ‘연옥 영혼’으로, ‘특별히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장 버림받은 영혼’으로 의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는 통일된 기도문으로 바쳐야 하겠지만, 본래 기도문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바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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