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보목(寶木)을 다 모으면 배 한 척 분량이 된다?

‘보목(寶木)’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실 때 사용됐다고 전해지는 십자가 나무를 일컫는 말로 ‘성 십자가’라고도 합니다. 보목은 세계 여러 성당에 안치돼있는데요. 세계 각지의 보목을 다 모으면 커다란 배 한 척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나무가 모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짜 보목이 많다는 말인데요. 정말일까요? 전설에 따르면 보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성인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골고타 언덕에서 여러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그중 한 십자가에서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 십자가가 보목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목은 조각으로 나뉘어 분배됐는데요. 그러다 보니 보목 조각을 안치하고 있는 성당의 수가 점차 많아졌습니다. 이 점을 들어 장 칼뱅은 「성유물에 관한 논고」에서 보목 조각을 다 모으면 배 한 척 분량이 나올 것이라 주장합니다. 성유물 공경을 비판하면서 그 양을 볼 때 상당수가 가짜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칼뱅만이 아니라 당시 개신교 신학자나 계몽주의자들이 보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주장에 반대되는 연구가 발표됐습니다. 1870년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샤를 로제 드 플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도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요. 그는 당시 알려진 보목 조각들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그 부피를 계산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크기를 가정해 계산한 결과, 확인된 보목 조각들의 부피를 모두 합쳐도 십자가 전체의 약 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가 보목의 진위까지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양이 넘쳐서 가짜가 많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한 희생 제사를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고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고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항) 우리가 보목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목을 바라보지만, 실은 그를 통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목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광주대교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대성전(교황 직속)과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일은 꼭 보목 앞이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9월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 성당이나 집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중)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오디세이아」: 환대

낯선 여행객을 집안에 받아들이고 돌보는 환대의 문화는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교통수단이나 안전망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여행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쉬어 갈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집주인의 친절함에 달려있었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지은 「오디세이아」는 인류 최고의 영웅 서사시로 여겨진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10년 동안의 여정과 모험을 그리고 있다. 물리적 여정을 통하여 내적 성장으로 나아가는 휴먼 스토리다. 그리고 환대라는 주제가 그러한 과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환대는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일단 환영한다. 그리고 자리를 권하고 음료와 음식을 제공하며,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오디세우스의 귀향 여정·모험… 작품 이루는 핵심 주제 ‘환대’ 현존하시는 하느님 맞이하듯 낯선 이 환영하며 극진히 대접 서로의 존엄·정체성 회복하고 신앙 안에 함께 성장할 수 있어 제3권에서 텔레마쿠스는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알기 위해 필로스 섬의 현자 네스토르왕을 방문한다. 텔레마쿠스 일행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이들을 보자 “주위로 몰려들어 손을 맞잡으며 왕 앞으로 인도했다.” 네스토르왕의 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맞이한 뒤, 부드러운 양털 가죽 위에 그들을 앉혔다.” 그런 다음 “고기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황금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충분히 먹고 마신 후에 네스토르왕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손님들께서 식사를 마치셨으니, 그분들이 누구인지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 이방인 여러분, 여러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매우 흥미로운 점은 환대의 순서이다. 어떤 낯선 이가 찾아왔을 때, 일반적으로 제일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환대는 손님의 정체성을 알아내기 전에, 먼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접한다. 그러고 나서 손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사람이 해를 끼칠지 혹은 친구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손님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감을 보여준다. 즉, 손님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돌봄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설사 손님이 주인의 적 혹은 원수일지라도, 그 전에 손님은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보호받아야 한다. 제우스 신은 손님들의 보호자로서, 환대는 신성한 의무이다. 제8권에서 알키노오스왕은 “손님을 자신의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손님은 가족과도 같은 신성한 관계로 여겨진다. 그리스도교에서도 환대는 그저 예의를 지키거나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핵심 가치이다. 환대란 소외당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낯선 사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존엄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실천이다. 환대는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관계성 안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받아들이고 환영한다. 창조, 용서, 계약, 구원을 통하여 죄인과 이방인, 길을 잃은 이들을 사랑 안으로 받아들이신다. 동시에 인간이 되신 강생을 통하여 인간의 환대를 기대하신다. 강생을 통하여 인간의 취약함과 의존성이라는 조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한 아기로, 나그네로, 손님으로, 마침내 죄인으로 고난받는 이로 우리에게 오신다. 「오디세이아」에서 환대는 문명, 사회 그리고 한 가정의 도덕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손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푸는 환대는 주인의 윤리적 깊이를 드러낸다. 오디세우스와 여러 등장인물은 자신들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숨긴 채 자주 손님으로 나타난다. 에우마이오스는 가난한 모습으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환대한다. 반면 폴리페모스는 환대의 의례를 거부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특히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거지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자신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주인공 가족의 환대를 악용하고 있던 구혼자들에게 음식을 구걸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발로 차이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분노를 참아낸다. 넘치도록 환대를 받고 있던 그들의 오만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마므레의 참나무 아래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누구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평범한 나그네인 줄 알고, 이 세 명의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다. 이들은 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긴 천사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고 나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감추어진 정체성과 환대에 대해 언급한다.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를 가르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고 말한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환대를 베푼 것과 같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나그네 안에 현존하신다. 제14권에서 에우마이오스도 제우스 신에 대한 신앙심에 기반하여 나그네를 대접한다. 오디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한 자신을 극진히 대접해 주는 에우마이오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나그네여, 설령 이곳에 당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오. 모든 나그네와 거지는 제우스에게서 오는 이들이기 때문이오.” 에우마이오스가 보여준 환대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가난한 사람이 베푸는 친절이다. 돼지치기(swineherd)로 일하고 있는 그는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환대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고급 침대는 아니지만, 자신이 사용한 가죽과 나뭇잎을 모아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 준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제공한다. 즉, 환대는 단지 물질적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나 부유한 이들의 과시적인 환대와 달리, 돼지치기의 환대는 손님에 대한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부자들이 풍족한 재산 중에서 큰돈을 헌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전 재산 렙톤 두 닢이 훨씬 더 크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더욱이 에우마이오스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나서, 손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정서적 교감으로까지 나아간다.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주인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다. 이름 모를 거지를 환대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인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환대는 정서적 친밀감을 통하여 완성된다. 환대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환대를 통하여 나그네는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정체성을 공동체 안에서 회복하고, 주인은 집안에서의 도덕적 품격을 더욱 높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환대는 나그네와 주인 모두를 성장시킨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악습의 극복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참사랑의 질서

현대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연결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영적, 윤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며 느끼는 극심한 박탈감과 질투, 익명성 뒤에 숨어 특정 대상을 향해 쏟아내는 무차별적인 증오와 비난, 그리고 모든 가치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무기력증과 우울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영적인 가치보다 감각적 쾌락에 침잠하며, 나와 의견이 다른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과 악습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참사랑의 질서(ordo caritatis)’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이기주의와 맹목적인 자기희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정교한 지혜의 체계다. 미움·나태·질투·불화·스캔들 등 악습… 참행복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질서’ 세우고 참사랑 실천해야 일치 이룰 수 있어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 질서 토마스는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 이 세 가지 사랑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덕임을 강조한다.(II-II,23,5; 25,1) 참사랑은 하느님을 참행복의 원리로 사랑하고, 이웃은 그 행복에 함께 참여하는 동료로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사랑은 흔히 비난받는 이기심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합된 자신의 영혼을 긍정하고 보존하려는 우정의 성격도 지닌다. 토마스는 자신과 하나임이 타인과 하나가 됨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보았기에, 올바른 자기 긍정이 곧 이웃 사랑의 원초적인 본보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웃 사랑 역시 상대의 매력이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참행복을 나눌 동료이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근거 위에서 성립한다.(II-II,25,12) 그런데 참사랑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부모나 가족같이 더 가까운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며, 점차 모든 이웃으로 사랑의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 이런 유기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인간은 비로소 사랑의 가장 어려운 단계인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나를 해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불가능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토마스에게 이는 참사랑이 지닌 신적 탁월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는 원수를 ‘원수로서’ 사랑하는 것, 즉 그가 지닌 악의와 적대감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악한 일이라고 엄격히 선을 긋는다. 그러나 원수가 비록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일지라도, 그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의 참행복으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II-II,25,8) 감정적으로 친밀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에 부합하는 선한 일이지만, 오직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훨씬 더 강인한 참사랑의 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원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의 산물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더 강한 참사랑의 힘을 증명하기에 더 뛰어난 탁월함을 지닌다.(II-II,27,7) 그러나 이러한 참사랑의 고결한 운동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다양한 악습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참사랑을 거스르는 악습들 참사랑의 내적·외적 효과를 거스르는 악습들은 인간의 참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토마스는 미움, 나태, 질투, 불화, 걸림돌과 같은 다양한 악습을 통해 사랑의 결핍이 가져오는 실존적 비극을 분석한다. ‘미움(odium)’은 최고선인 하느님과 이웃의 존재 자체를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무질서이며, 이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거부하기에 가장 중대한 죄가 된다.(II-II,34,2) ‘나태(acedia)’는 신적인 선에 대해 슬픔이나 권태를 느끼는 행위를 말한다.(II-II,35,3) 이는 현대인의 번아웃이나 영적 무기력과 맞닿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며 오히려 그 선함을 짐으로 여겨 슬퍼하는 치명적인 게으름이다. ‘질투(invidia)’는 타인의 선을 자신의 열등함이나 손해로 여겨 슬퍼하는 이기적 성향으로, 토마스는 질투가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고 성공을 괴로워하게 만듦으로써 인간관계를 파괴한다고 경고한다.(II-II,36,1) 이는 SNS 등 현대적 공간에서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불화(discordia)’는 마땅히 동의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의 선에 의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지의 분열이다.(II-II,37,1) 선을 온전하게 식별하지 못하는 인간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한 불화가 있게 되지만, 동일한 목표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스캔들(scandalum)’은 타인을 죄와 영적 몰락으로 이끄는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스는 스캔들을 올바르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써 타인이 영적으로 넘어지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로 규정한다.(II-II,43,1) 이는 오늘날 영향력을 지닌 자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통찰이 된다. 현대 사회의 병폐로 지적된 다양한 악습들은 결국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세속적인 선에 집착할 때 발생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악습들이 단순히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인 참행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임을 밝혀냈다. 단적으로 말해,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질투와 증오의 시대에도 참행복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한편으로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선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회복할 때만 얻을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자만이 타인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멈추고 영적인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다스려질 수 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올바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넘침으로 이웃과 원수까지도 품는 것이 그 길이다.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우리의 의지를 정렬할 때, 인간의 내면은 비로소 질서 잡힌 평온함에 도달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시복시성에 가경자 단계는 없다?

교회사에 관심을 둔 분이라면 ‘가경자(可敬者)’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부르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시복시성 절차에는 ‘가경자가 되는 별도의 단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가경자는 ‘공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 베네라빌리스(venerabili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과거에는 시복 안건이 교황청에 접수된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었지만, 이는 현재의 공식 절차와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시복 안건이 교황청에 올라갔다고 해서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132위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도 교황청 시성부에 시복 안건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경자 호칭의 사용이 변화한 것은 1913년 성 비오 10세 교황이 가경자 칭호 사용에 관한 규정을 변경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에는 가경자라고 부르는 관행 때문에 신자들이 마치 교회가 그 하느님의 종의 성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경을 허락한 것처럼 오해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성 비오 10세 교황은 가경자 칭호에 관한 교령을 통해 “사도좌가 영웅적 성덕 또는 순교에 관한 교령을 발표한 이후가 아니면 하느님의 종들에게 가경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즉, 하느님의 종이 교황청에 시복 안건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가경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적 성덕이나 순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뒤에야 가경자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83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을 통해 시복시성 절차를 전면 개편했습니다. 이때 과거처럼 ‘가경자가 되는 절차’는 사라지고, 영웅적 성덕 또는 순교를 인정하는 교령 발표 여부가 가경자 칭호 사용의 기준이 됐습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의 경우 순교 사실이 인정되면 시복되기 때문에 가경자라고 불릴 별도의 과정 없이 바로 복자가 됩니다. 다만 순교하지 않고 영웅적 성덕으로 시복 절차를 밟는 ‘증거자’의 경우에는 여전히 가경자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영웅적 성덕이 인정되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도 2016년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교령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하느님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시복재판을 통해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가경자는 기적 심사를 통해 복자로 선포됩니다. 가경자의 전구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의학적·신학적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인정되면 시복이 이뤄집니다. 올해 3월 26일 교황청 시성부 의학자문위원회 심사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전구로 이뤄진 치유 사례가 기적적 치유임이 인정됐습니다. 이는 기적 심사의 첫 단계를 통과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성인과 복자들은 모두 순교자였기 때문에 한국교회 시복시성 역사에서 교황청의 기적 심사 통과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은 심사들도 무사히 통과돼 최양업 신부님을 ‘복자’로 부를 수 있는 날이 빨리 다가오길 기도해 봅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인간은 누구나 믿으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 커피를 마신다. 만약 그 커피에 독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면,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믿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만약에 ‘이스라엘에 가는 비행기에 어떤 테러범이 시한폭탄을 그 비행기에 장착해 놓았다’라고 믿는다면, 그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서 살아간다. 약이나 의사를 불신하면 할수록 약의 효과나 치유는 더뎌지지만, 약이나 의사를 신뢰하면 할수록 약의 효과나 치유의 속도는 빨라진다. 우리가 사람이나 인간에 대해 믿으면 믿을수록 점차 그 대상에게 가까워지지만, 불신하면 할수록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이렇게 믿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의 삶에 깊숙한 바탕을 이루며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의 기본행위이며(W.카스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참조), 사람은 누구나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이 말에 어떤 이들은 ‘실제로 세상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존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믿음 없이도 살 수 있다’라며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삶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의 지평을 넓혀서 잘 살펴보면 비신자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실제로는 저마다의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비신자들은 ‘믿음이란 허황된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행위’라는 점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비신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결국은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믿음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결국 그들의 강한 신앙 거부가 그들도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비신자가 존재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니체의 ‘신의 죽음’ 선언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점차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우리 신앙인들이 깊이 각성하고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삶의 행동과 실천으로 세상에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이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믿는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믿게 되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말만의 신앙에서 벗어나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삶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증거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기도문에 왜 ‘펠리컨’이?

“사랑 깊은 펠리칸(컨), 주 예수님. 더러운 저를 주님의 피로 씻어 주소서.” 성시간에 열심히 참여하신 분이시라면 이 기도문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성 토마스의 성체찬미가(Adoro te devote)’의 한 구절입니다. 주요 기도문들을 보면 동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요. 도대체 펠리컨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기도문에, 그것도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등장하는 걸까요? 펠리컨은 우리말로 사다새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긴 부리 아래 주머니가 있는 모습이 특징인 새입니다. 주위에서 보는 새는 아니지만 다양한 매체에 등장하다 보니 사다새가 친숙하게 느껴지는데요. 사실 구약시대까지 사다새는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구약의 율법에서 사다새는 먹을 수 없는 정결하지 못한 동물로 분류됩니다.(레위 11:18, 신명 14:17) 그리고 스바니야서에서는 “사다새와 부엉이도 니네베 기둥 꼭대기에서 지내리라”(2,14)라며 폐허가 된 니네베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언급됐습니다. 사다새 자체가 나쁜 새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예수님을 상징할 법한 동물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런 사다새의 이미지를 바꿀만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끼를 살리는 어미 사다새의 이야기인데요. 새끼들이 부모 사다새의 얼굴을 쪼면 부모는 그 새끼들을 죽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미 사다새는 사흘 동안 새끼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신의 옆구리를 쪼아 피를 흘려, 그 피로 새끼들을 다시 살려낸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 사다새의 생태와는 다릅니다. 언제부터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는 3~4세기경에 작성된 그리스도교 문헌인 「피지올로구스」에 등장하는데요. 이 책에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하느님께 지은 죄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시편 주해」에서 사다새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고 신중하게 언급하면서도 “사실이라면 당신의 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께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보라”고 예수님을 떠올리도록 초대했습니다. 사다새 이야기는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우화로써 사용된 것입니다. 이 우화는 많은 신자들에게 감명을 줬고, 특히 중세에 다양한 저술과 동물우화집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자기희생, 성체성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역시 이런 상징을 활용해 기도문을 만든 것입니다. 이후로도 다양한 교회 미술에도 사다새가 등장했고, 여러 문장에도 사다새의 상징이 사용됐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성체성사에 관해 논의했던 2005년 세계주교시노드 당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주교단에게 사다새가 각인된 반지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펠리컨, 사다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시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해 봅니다.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성 토마스의 성체찬미가)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레 미제라블」: 혁명과 인간 존엄성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지식인은 “인간 본성의 새로운 탄생”이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 정치로 변질되어 버린 혁명에 실망한 영국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제도적 혁명도 필요하지만, 각 “개인의 내적 회심”이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완벽한 제도가 있더라도 미성숙한 사람이 운영하면 그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갈등을 빚었던 부분이 바로 제도와 내적 태도의 문제이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반문하신다. 율법의 완성은 제도적 보완이 아니라, 한 인간이 보여주는 생명과 자비다. 총 1752개로 이루어진 교회법전의 마지막 조항은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영어 단어 justice는 ‘공정한 행위’, 혹은 공정성을 이루기 위한 ‘법 집행’ 등을 의미한다. 올바르고 공정함은 한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의 관계를 규정하는 본질적 가치이다. 은 식기 훔쳐 달아났던 장발장, 용서받은 뒤 타인에 대한 자비·자기희생 실천 인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 자비와 용서로 존엄성 회복하는 진정한 혁명 1862년 출판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의 여러 혁명과 정치적 혼란, 산업화, 빈곤 등의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대서사시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베르 경감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준법정신이 철저한 타락하지 않은 경찰이다. 그러나 장발장의 대척점에 서게 되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이유는 법적 정의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에게 법은 인간의 제도를 넘어서 거의 신성한 도덕적 질서이다. 그는 자신을 “악을 짓밟아 없애는 천상의 사명을 수행하는 정의와 빛과 진리의 화신”으로 생각하였다. 법은 타협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에, 법에 대한 절대적 순명이 요청된다. 따라서 선과 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세상에 오로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은 죄수들로서 악한 사람, 법을 잘 지킨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선한 시민이다. 선함과 악함 사이의 애매모호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베르는 누군가가 법을 어겼을 때,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범법자는 그저 범법자일 뿐이다. 더욱이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즉 악에서 선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다. 한번 구별된 선과 악은, 그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러한 자베르의 법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인간 존엄성의 결여이다. 사람들에 대한 그의 판단은 주로 사회적 신분과 법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가난한 사람, 매춘부, 거지, 전과자 등의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존중이나 연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엄격한 법의 심판, 벌, 응징의 폭력적인 방법이 정의이다. 자베르와는 대조적으로, 장발장에게 정의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출소한 전과자에게 발급되던 노란색 통행증은 사회적 차별과 불신의 상징이었다.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장발장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 주교는 장발장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존엄성을 바라본다. 팡틴이 사람들 앞에서 체포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장발장은 자베르의 엄격한 율법주의에 도전한다. 자베르는 팡틴이 저지른 잘못만을 지적한다. 그러나 장발장의 첫 질문은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녀의 이런 상황에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먼저 물어본다. 샹마티외라는 노인이 사과를 훔치다 체포된다. 법정은 그를 탈옥수 장발장으로 오인한다. 마들렌 시장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던 장발장은 침묵해버리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자수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달콤한 목소리도 듣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노인의 삶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자수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어도 근본적인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장발장의 인간 존엄을 근간으로 하는 정의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으로 확장된다. 길거리에서 체포될 위기에 처했던 팡틴을 구출해 병원에 입원시키고, 임종까지 돌본다. 그녀와의 약속대로 코제트를 찾아 돌봐준다. 바리케이드에서 총상을 입고 기절한 마리우스를 망설임 없이 업고, 파리의 복잡한 하수구를 통해 구출한다. 궁극적으로 장발장이 추구하는 정의는 범죄자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비와 자기희생을 근간으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은, 19년 동안의 감옥 생활이라기보다는, 은 식기를 훔쳐 달아난 그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자비와 용서이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 스파이로 들통난 자베르는 혁명군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오랫동안 절대적 법의 심판을 믿었던 자베르는 장발장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확신이 사라진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법의 눈에도 눈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에게 의존하는 정의였다. 그는 지금껏 이런 정의는 알지 못했다. 도덕의 태양이 암흑 속에서 무섭게 뜨는 아침이었다. 아침이 그를 겁나게 했다.” 범죄자였던 장발장이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변화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 인간의 파멸이라기보다는, 법에 갇힌 정의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이야기다. 구시대의 악습을 개혁하는, 혹은 정의로운 사회를 회복하는 혁명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존엄성 회복은 혁명이나 법적 정의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능하다. 바리케이드 에피소드는 1832년 6월 파리 봉기를 배경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가난에 맞선 민중의 저항,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애를 상징하는 서사의 절정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적 미래의 열망은 폭력적인 현실과 죽음으로 얼룩진 비극의 공간이다. 예수님도 혁명가이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십자가 사건을 ‘위험한 기억’으로 해석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믿는 사람들은 부정의한 현실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혁명의 중요한 특징은 소외당한 사람, 죄인, 혹은 병자 등, 한 개인의 근본적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모든 덕의 어머니인 참사랑을 통해 이르는 행복

성령 통해 전달되는 ‘참사랑’, 하느님과 인간의 영적 우정 기쁨·평화·자비 불러일으키며 선행·자선 실천하도록 이끌어 상호 혐오 가득한 현대사회… 형재애적 유대 위한 버팀목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흔히 개인적인 감정이나 일시적인 열정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참사랑(caritas)을 단순한 정념(passio)이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인간의 영혼 안에 주입되는 초자연적인 덕이자 습성(habitus)으로 정의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적인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하느님이 당신의 참행복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맺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우정(amicitia)이다.(II-II,23,1) 토마스는 참사랑이 본성적인 욕구인 에로스(eros)와 구별됨을 명확히 하며, “참사랑은 우정이지만,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소중한 분인 하느님을 향한 우정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명제집주해」III,27,2,1,ad7) 결국 참사랑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선 신적 본질에 대한 참여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생명을 공유하는 통교(communicatio)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참사랑이 모든 덕의 어머니’이며 “모든 덕의 형상”(forma virtutum, II-II,23,8)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도덕적 행위라도 참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falsa similitudo virtutis)’에 불과하며, 엄밀히 말해 악습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한다.(II-II,23,7) 그런데 토마스는 이러한 원론적인 체계화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랑이라는 덕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 행위에 미치는 구체적인 효과들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평안과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소중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참사랑의 내적 효과: 기쁨, 평화 그리고 자비 토마스는 참사랑이 인간 영혼 내부에 일으키는 첫 번째 효과로 즐거움(gaudium) 또는 기쁨을 꼽는다. 이 즐거움은 자신이 사랑하는 선(善)이 현존할 때 발생하는 결과이다.(II-II,28,1) 현대 사회에서 많은 이가 물질적 성취나 타인의 인정과 같은 가변적인 선에 행복의 근거를 두기에 끊임없는 불안과 우울을 겪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참사랑의 대상인 하느님의 선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기에, 이를 통해 얻는 영적인 즐거움은 어떤 외부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쁨이 된다고 설명한다. 둘째 효과인 평화(pax)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바와 같이 “질서잡힌 평온함(tranquillitas ordinis)”이다.(II-II,29,1) 토마스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들이 하나의 참된 선인 하느님을 향해 올바르게 질서잡힐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본다. 현대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무한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내적 불화는 욕망의 무질서에서 기인한다. 참사랑은 인간의 의지를 최고선에 결합시킴으로써, 내면에 상충하는 갈망을 조화롭게 통합한다. 참사랑의 또 다른 내적 효과인 자비(misericordia)는 타인의 ‘비참함(miseria)’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동정심이며, 이를 돕고자 하는 의지적 움직임이다. 토마스는 자비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낮지만, 타인을 향한 덕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덕이라고 평가한다.(II-II,30,1) 참사랑의 외적 효과: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선행과 자선 참사랑은 내면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외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그 첫째는 선행(beneficentia)이다. 토마스는 선행이 다른 사람의 선을 원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결과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선행은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는 자발적인 자세에서 기인한다.(II-II,31,1) 둘째는 구체적인 자선(eleemosyna)이다. 토마스는 이를 육적인 자선과 영적인 자선으로 세분화한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의 육적인 자선뿐만 아니라, 무지한 이를 가르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며 죄짓는 이를 훈계하는 영적인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II-II,32,1) 인공지능 시대에 정보의 비대칭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지식을 공유하거나, 극심한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행위는 현대적 의미의 탁월한 자선이다. 특히 토마스는 영이 육체보다 고귀하므로 영적인 자선이 우선이지만,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는 육적인 자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지침을 제시한다.(II-II,32,3) 형제적 교정: 혐오의 시대에 필요한 사랑의 훈계 외적 효과의 마지막인 형제적 교정(correctio fraterna)은 형제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막는 영적인 자선의 일종이다. 이는 물질적인 도움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의 행위로 간주된다. 토마스는 형제적 교정이 공동선을 위한 정의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대방이 잘못을 바로잡아 참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는 참사랑의 실천이라고 본다.(II-II,33,1)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 만연한 온라인상의 무분별한 비난은 타인의 잘못을 배척과 혐오의 수단으로 삼는다. 반면 토마스가 제안하는 형제적 교정은 상대방의 품위를 존중하며,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은밀하고 자애로운 권고이다. 만약 교정이 상대방을 더 악화시킬 것이 예상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토마스의 조언은(II-II,33,6), 진정한 사랑 없는 비판이 오히려 공동체에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토마스에게 참사랑은 일시적인 쾌락의 허무를 뚫고 영원한 평온과 진정한 행복을 성취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다. 지식이나 예언과 같은 다른 모든 능력은 현세의 종말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참사랑만은 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된다. 더욱이 참사랑의 내적, 외적 효과들은 파편화된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실질적인 약방문이 된다.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적 동정을 넘어선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난민 문제나 소외 계층의 빈곤 문제를 대할 때 참사랑을 지닌 이는 그들의 비참함을 자신의 결함으로 인식하고 이를 치유하려 노력한다. 이는 자선이 시혜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애적 유대라는 영적 기초 위에서 수행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성당은 ‘동쪽’을 바라보고 짓는다?

학교나 직장 등에 새로 온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성당 건축에서 널리 쓰이던 말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오리엔테이션은 ‘동쪽’을 뜻하는 오리엔트(orient)에서 비롯한 말로, 본래 방향을 잡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에서는 제대가 있는 성당의 중심축을 동쪽으로 향하게 배치하는 것을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당을 동쪽을 향하도록 지었을까요?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쪽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전통은 이미 2세기경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교부와 성인들이 동쪽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의미에 관해 가르쳤는데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신학대전」에서 이 전통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우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이 하느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낙원,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도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동쪽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방향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쪽에서 친 번개가 서쪽까지 비추듯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마태 24,27)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지요.(「신학대전」 II-II, q.84, a.3, ad 3 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2010년 파스카 성야 강론 중 “동쪽은 빛의 상징이며, 역사 안에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 곧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동쪽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동쪽을 향해 성당을 짓는 전통은 중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독일 쾰른 대성당 등 중세에 세워지기 시작한 유명한 성당들도 제대가 있는 성당 후진을 해 뜨는 방향에 두었습니다. 심지어 성당 주보성인의 축일에 해가 뜨는 지점을 정밀하게 계산해 제대 방향으로 삼기도 했는데요. 오스트리아 성 슈테판 대성당의 경우 성당 주보인 스테파노 성인 축일인 12월 26일이면 성당의 중심축을 따라 해가 떠오릅니다. 물론 모든 성당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등은 제대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그밖에 여러 성당도 지형이나 도로, 성인의 무덤 등 중요한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동쪽이 아닌 방향을 향한 성당들도 많습니다. 현대 성당 건축도 여러 이유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성당을 짓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기도한다는 상징이 중요한 것이지 동쪽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동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오리엔테이션은 오늘날 어떤 일에 앞서 방향을 정하는 활동이라는 의미로 확장됐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7)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아침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도 오늘 하루의 방향이 빛이신 예수님을 향하도록 스스로 ‘오리엔테이션’을 해 보면 어떨까요?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의존한다

신앙(Fides)이란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특별한 인식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록」에서 “님”이라고 불렀던 분, 그리고 우리가 항상 기도와 전례 중에 부르는 그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아는 인간의 특별한 인식이 바로 신앙이다. 이성(Ratio)이란 사물과 사물의 이치, 사건과 사건의 의미와 맥락을 받아들이고 알고 인식하는 인간의 개념적 사유 능력이자, 지성 활동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이성은 ‘하느님’이라는 신비(Mysterium)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 정신 속에는 신앙과 이성이 있다. 이 둘은 인간 인식의 두 영역이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인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과 사물의 이치를 인식한다.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신앙은 이성을 강화하고 순수하게 해주며, 이성은 신앙이 헛된 믿음과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을 보호해 준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신비 주변에 서성이는 사람은 철학자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도 모르고 거룩함도 모르는 사람은 이방인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의존한다. 신앙은 이성을 완전하게 해주며, 이성은 신앙을 받아들여 완전하게 된다. “이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고, 초자연적 진리를 역사적 조건 속에서 수용해야 하는 신앙은 이성의 날카로운 분석과 해명을 필요로 한다.”(이재룡 「회칙 ‘신앙과 이성’의 역사적 의미」 참조) 이렇게 이성은 신앙의 조명과 인도를 필요로 하고, 신앙은 이성의 검증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대이교도대전」 참조) 따라서 교회는 신앙만을 고집하는 신앙주의(fideismus)도, 이성의 자율성과 절대성을 내세우는 이성주의(rationalismus)도 반대한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한다. 끝으로 신앙 행위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믿어야 할 것이라고 선포된 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한 것임을 명백히 한다. 둘째, 신앙에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존재자는 바로 신 자체임을 명백히 한다. 이것은 곧 ‘신앙의 동기’에 대한 완전한 확실성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셋째,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에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곧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넷째, 계시된 신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이끌어 준다.”(김정호 「신을 아는가 믿는가?」 참조)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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