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일리아드」 : 아킬레스의 눈물

“분노.”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몇 주간을 묘사하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는 이 단어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맹장 아킬레스의 분노이다. 기원전 1200년경 발발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는 500년 후인 기원전 8세기경 대서사시로 승화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는 두 번 분노한다.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아킬레스가 선물로 받은 트로이 여인을 빼앗아 버린다. 전쟁의 영웅에게 주어진 선물은 단순히 전리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명예와 영광을 상징한다. 아킬레스는 빼앗긴 소유물이 아니라, 짓밟힌 명예에 대해 분노한다. 단 한 번도 숙여보지 않은 자존심에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여기에 대한 분노로 아킬레스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군에게 차마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던 그는, 간접적 침묵의 폭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그가 전장에서 철수하게 되자, 그동안 전쟁에 거의 이겨왔던 그리스 군대는 궤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투에 뛰어들며, 다시 아킬레스가 전장에 돌아온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의 왕자이면서 최고의 명장인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형제와 같았던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스는 두 번째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킬레스가 트로이 적군들에게 직접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른다. 특히 제21권 강변에서의 전투는 피에 굶주린 아킬레스의 잔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아킬레스의 인간성 파괴에 이르는 분노의 표출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주검을 돌려주지 않고 갖은 모욕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한 모습이 조각된다. 아킬레스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안에 품었던 분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결과는 인간성 파괴까지 이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어쩌면 작가는 트로이전쟁보다, 인간 본성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싸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인 G. K. 체스터턴은 “모든 삶이 전쟁이기 때문에, 일리아드는 위대하다”라고 극찬하였다. 아는 선배가 가족들과 자동차로 유럽 여행을 하였다. 형수님과 자존심 대결하느라, 2시간 넘게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운전하였다. 결과는 어린 두 아이의 몸과 마음의 탈진으로 하루를 까먹었다고 한다.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적개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4,26)라고 권고한다. 내면의 분노는 우리의 눈빛, 말, 행동을 통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비인간적인 폭력 극에 달하며 아킬레스에 죽임 당한 헥토르 적장 앞에 엎드린 헥토르의 부친 함께 눈물 흘리며 인간성 회복 호머는 동정심이라는 감정으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킬레스는 당시 관행을 어기고, 적장 헥토르의 주검을 모욕하고 트로이 진영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늦은 밤 아킬레스를 찾아가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암 왕은 인간성의 회복을 보여준다. 노구를 이끌고 홀연 단신으로 적진을 찾은 프리암의 모습에 아킬레스와 그리스 장군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더욱이 자기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욕을 자행한 그 두 손에 입맞춤하는 프리암의 행동은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식의 주검을 찾기 위해,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다. 그러면서 아킬레스에게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받아 마땅하오”라고 호소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간청하는 프리암의 호소에 분노로 가득 찼던 아킬레스의 마음은 누그러진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분노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은 강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한 아버지의 용서하는 연민이다. 프리암은 “아킬레스의 발 앞에 쓰러져” 헥토르를 위하여,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위하여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온 집 안에 가득 찼다.” 학자들은 이 장면을 감정의 정점으로 여기며, 주제의 흐름이 아킬레스의 분노에서 연민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해석한다. 아킬레스의 눈물은 프리암에게 느끼는 연민과 화해의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회심과 용서의 표시로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다윗 임금,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한 여인, 밖으로 나가서 몹시 많이 울었던 베드로 사도 등 다양한 눈물을 만날 수 있다. 초대 교부들도 눈물의 은사를 두 번째 세례라고 여기며, 신앙생활에서 눈물을 강조하였다.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인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며 울 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자 잘못에 대해 울도록 권고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막의 철학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는 “무엇보다도 눈물을 구하라. 울음이 당신 영혼의 거친 완고함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라고 초대한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측은지심의 눈물이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프리암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흘린 눈물을 통하여, 완고하였던 분노의 마음을 마침내 무너트렸다. 진정한 승자가 되었다. 호머의 작품들은 로마제국 귀족 자녀들의 필독서였다. 철인 황제라 불리는 제16대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의 평정심을 기초로 하는 스토아 철학의 정수인 「명상록」에서 “범법자들도 나와 같은 혈통이나 집안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 연관이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과 나는 신성을 지닌 동일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프리암이 아킬레스를 찾아갔던 이유는, 분노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아킬레스조차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략 180명의 인물을 다루면서, 24권의 책과 1만 5000행 이상의 운문으로 쓰인 「일리아드」는 서양 문학의 초석이다. 동시에 다양하게 갈라져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정체성의 뿌리였다. 더 나아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묘사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는 측은지심을 깨닫도록 빛을 밝힌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만 세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비신자가 많이 방문하는 성당이나 큰 행사 등에서는 미사 중 성체 분배에 앞서 해설자가 이렇게 안내하는 것을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천주교(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들만 성체를 모실 수 있습니다”라고요.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는 물론이고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가톨릭교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성사를 교류할 수 없는 이유는 교리·신앙이나 성사, 제도 등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들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한 세례가 아니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든지 적법한 방식으로 이뤄진 세례라면 가톨릭교회에서도 유효합니다.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가톨릭교회로 입교하는 분이 계시다면 먼저 물로 씻는 예절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세례를 받는 본인과 세례를 준 집전자의 의향이 적합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켜진다면 꼭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례는 유효합니다.(「교회법」 제869조 2항 참조) 이 기준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는 성공회와 정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별도로 물로 씻는 예절과 천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형식을 확인할 수 있으면 인정합니다. 만약 적법한 세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면 조건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세례가 불확실하거나 유효하지 못하다면”이라는 조건을 두고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비가톨릭 그리스도교파의 세례 유효성 관련 사목 지침」 참조) 이처럼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직제에 있어 온전한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은 분이 가톨릭교회에 입교할 때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포함한 교리교육을 받은 후에 ‘일치 예식’을 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일치교령」 3항 참조)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일치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교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길 희망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반려동물도 세례받을 수 있을까?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10가구 중 3가구(약 28.6%)는 집에서 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동물보호법」은 이렇게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가까이에서 교감하며 생활하는 동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다 보니 우리 집 강아지나 고양이도 세례받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다 보니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동물에게는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모든 ‘사람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교회법 864조 참조) 기본적으로 세례성사를 비롯해 교회의 모든 성사와 전례는 ‘믿는 사람’을 위해 거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세례성사에 관해 말씀하시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3,5-15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례성사 때 “여러분은 무엇을 청합니까?”라는 주례자의 질문에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답하고, 이어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물음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사람도 아니고, ‘믿음이 있다’고도 보기 어렵지요. 그렇다고 동물이 구원과 관련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홍수 때 동물들도 방주에 태워 구해주시고, 홍수가 끝난 뒤 인간뿐 아니라 방주에 탄 모든 동물도 계약에 참여시켜 주십니다.(창세 9,9-10 참조) 이 홍수는 세례성사의 예표기도 하지요. 교회는 “짐승들도 인간의 속죄 의식에 참여해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축복 예식」 728항 참조)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영혼을 식물의 생장혼, 동물의 감각혼, 인간의 이성혼으로 구분했는데요. 동물의 감각혼은 인간과 달리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죄는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항)입니다. 그러니 동물들이 ‘죄를 짓는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통해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라고 고백합니다. 죄를 짓지 않은 동물에게 세례는 필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마 많은 분이 신앙 안에서 동물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싶을 겁니다. 그렇다면 ‘동물 축복 예식’이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동물 축복 예식은 이탈리아에서는 동물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1월 14일)에, 세계적으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10월 4일)에 하는 등 성인의 축일에 열리곤 합니다. 최근에는 한국교회에도 ‘동물 축복 예식’을 하는 본당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덕 없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덕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단어이자, 사람들이 그에 대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구식 단어”라고 말했다. 사실 근대 이후에는 전통 철학에서 윤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던 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의무론·공리주의·감정주의가 채웠다. 계몽주의와 근대 자연과학은 자연과 인간 안의 목적 개념을 배제했고, 이와 연관된 덕은 부수적이거나 개인적 성향 정도로만 취급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생활에서는 도덕과 관련된 언어가 남아 있으면서도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공통된 기반이 붕괴돼 버렸다. 그나마 20세기 중반 이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앤스콤(E. Anscombe)과 매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학자들은 도덕 생활을 위해 덕에 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덕 윤리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덕 전통이 실제 삶을 포괄하는 도덕의 기준으로 작동하던 시대와는 달리 현대 사회에는 덕 윤리 자체가 하나의 ‘경쟁 이론’으로 취급될 뿐이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말처럼 덕을 강요된 사육이나 운동선수의 지나친 훈련처럼 여기며, 수도원에서나 적합한 것으로 취급한다. 철학 상담의 창시자 아헨바흐(G. Achenbach)에 따르면, 오늘날 덕이 사라진 곳에는 악덕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러나 덕은 특별한 것이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것으로서, 덕 없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학대전」에서 누구보다도 덕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까? 본격적인 성찰에 앞서 우선 철학사 안에서 덕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토마스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커다란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한 덕 개념 이미 소크라테스는 덕 있는 습성이 올바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덕이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도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혼에 따르는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절제’라는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또한 기개혼에 따르며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망에 종속되면 오히려 ‘비굴함’을 드러내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성혼을 따르는 사람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지식을 가지려면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올바르게 되는 상태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제 일을 하는’ 경우이며, 이때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덕이 필요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4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다. 윤리적 판단 기반 붕괴된 현대사회…덕의 윤리도 경쟁 이론으로만 취급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이론…「신학대전」에서 종합해 계승·발전 하느님의 은총 통해 가지게 되는 신앙·희망 등 초인간적 덕까지 포괄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기회가 왔을 때 언제나 주요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다. 따라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서 올바른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의 최종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성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간을 실행하는 것, 즉 ‘중용(中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절제도 인색과 마구 돈을 쓰는 낭비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자신의 상태와 그 상황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시도해야 하는 윤리적 과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고전적 덕 이론의 체계화 플라톤의 4추덕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온 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초기 스콜라 학자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한 강조는 13세기 중반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절묘하게 종합해 낸다. 토마스는 “작용적 습성인 인간적 덕은 하나의 선한 습성으로서 선을 산출한다”(I-II,55,3)고 말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토마스에 따르면, 덕은 획득된 능력이자 작용적 습성이며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된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덕에 관한 규정뿐만 아니라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에 관한 구분도 그대로 수용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플라톤이 강조한 지혜는 이해, 지식과 함께 지성적 덕에 속한다.(I-II,57,2) 따라서 그는 도덕적 덕의 핵심을 이루는 4추덕에서 지혜라는 용어를 ‘현명’(prudentia)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또한 그 순서도 조금 변형시켰지만, 4추덕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의 규범에 ‘현명’, 의지의 규범에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으로 ‘절제’, 분노적 욕구의 규범인 ‘용기’(I-II,61,2), 이 네 가지면 도덕적 덕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지나침이나 부족 때문에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인 “덕은 중용을 지키는 데 있다”(I-II,64,1)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철학의 다양한 유산이 「신학대전」 안에서 종합되고 놀라울 정도로 체계화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덕에 관해서 단지 고대철학을 계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들이 언급했던 인간적 덕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가지게 되는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초인간적 덕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토마스가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며 이를 통해 악덕이 잡초처럼 자라는 현대 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다음 호부터 단계적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진다

유명한 의사가 강의하던 중에 “이것을 먹으면 가장 오래 사는데 무엇일까요?” 하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밥을 잘 먹어야 오래 산다”, “욕을 먹어야 오래 산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깔깔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의사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이것을 먹으면 죽는데 무엇일까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이요”하고 대답했다. 의사는 “정답”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어 오래 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죽게 된다. 나이라는 것은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도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죽음을 모든 것이 끝장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하느님과 만나는 날로 생각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신앙의 민족인 유다 민족이 바빌론 유배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했는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의 유다 민족은 이웃 나라 강대국 바빌론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다. 그 고난의 유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멸망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다른 민족들이라면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강한 바빌론이 쳐들어와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맞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민족이었던 유다 민족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웃 나라가 강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부패해서도 아니다. 그러면 왜 멸망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늘날 유다교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건을 해석하고 난 뒤에 그 해석에 따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신앙이 달라지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관계

신비주의의 영어 단어인 ‘mysticism’에 대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유명한 유머가 있다. 이 단어는 안개를 의미하는 ‘mist’와 분열을 뜻하는 ‘schism’으로 이루어졌는데, 신비주의란 안개 속에서 시작해 분열로 끝난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명확하지 않은 개인의 영적 체험이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고립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신학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르침이라면, 영성은 각 개인의 실질적 경험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영성에 대해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과 영성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신학이 하느님에 대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이해와 그리스도교 진리를 다룬다면, 영성은 그러한 이해와 진리를 각 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하고 살아가는 영역이다. 영성은 신학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공간이다. 또한 신학은 역사를 단일하며 보편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성은 구체적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개인의 살아 있는 경험이다. 영성은 신학의 보편적 역사성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따라서 신학의 보편성과 영성의 개별성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신학의 보편성을 통해 영성의 개별성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빛 안에 머물게 되고, 동시에 신학의 보편적 가르침은 영성의 다양한 개별적 체험을 통해 확장되고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 문학과 신학의 관계도 영성과 신학의 관계와 비슷하다. 문학의 기원을 종교적 신화와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길가메시 서사시」는 최초의 서양 문학작품이면서 최초의 종교적 신화로 여겨진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언어와 신화, 의례를 연구하면서, 언어가 시작되었을 때, 의례와 언어는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초기의 언어적 예술은 의례적 행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 작가들에게 문학은 신앙을 확인하고 증언하는 중요한 방식의 역할을 했다. 물론 종교에 적대적인 작가들은 문학을 통해 신앙에 도전하였다. 동시에 하느님의 계시인 성경도 문학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은 성경이 문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명시하고 있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12항) 즉 문학의 요소들이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T. S. 엘리엇은 문학이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신학은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다룬다고 이야기한다. 불완전하고 이기적 존재인 인간의 삶은 뭔가 결점과 어두운 면이 있다. 반면 신학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선한 빛을 제시한다.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그냥 성찰에서 멈춘다면 인간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진리의 빛이 현실의 인간 삶을 품지 못하고, 이상화된 모습만을 비춘다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문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 보완적 관계 형성이 요청된다.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개인 삶의 경험이다. 색칠되고 꾸며진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날 것으로서의 경험. 왜냐하면 하느님은 흠 없이 가공된 모습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의 본질이 교리나 제도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행동 등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계시는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완결되었다는 전통적 명제보다는,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영향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드러낸다. 계시가 끊임없이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길 위의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서 개인의 경험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문학과 차별화된다. 하지만 문학에서 묘사되는 개인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드러나는 경험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신앙인의 인간 본성과 비신앙인의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교도였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선한 빛의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였던 칼 라너는 ‘근본적인 인간의 경험들(foundational human experiences)’ 안에서 초월성을 제시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거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초월적 경험이 가능하다. 서양의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다양한 문학작품들에 관한 연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폭과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한층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비록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언어를 직접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적인 가치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호머의 「일리아드」는 용서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우정을,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순명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사랑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캣츠비」는 자존감을 흥미롭게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오늘날 현대 사회는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 공동체 의식의 약화, 노인 문제, 인구 소멸,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대면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직결된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양한 문학작품들의 세계가 의미 충만한 새로운 문을 열어 주길 희망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1996년 예수회에 입회해 2007년 사제품을 받았다. 영국 런던대학교 히쓰롭 칼리지에서 영성신학 석사 학위, 워릭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9면

[교회 상식 더하기] 동방 박사는 세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 “동방 박사는 몇 사람인가요?”라고 질문하면 많은 분이 “세 사람!”이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의 왕’이라는 의미로, 삼왕(三王)이라 부르기도 하니, 세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교회 지식에 해박하신 분들은 이 세 사람의 이름이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라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동방 박사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은 분들도 계실 테고요. 그런데 동방 박사의 이야기가 실린 마태오복음(2, 1-11)을 잘 읽어보면 동방 박사를 ‘박사들’이라고 여러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그 수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지하 묘소인 카타콤바의 벽화에서는 동방 박사를 세 명으로 표현한 작품 외에도 두 명이나 네 명으로 표현된 작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덟 명 심지어 열두 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 박사는 세 명이라는 인식이 정착됐고, 6세기 무렵에는 이름도 퍼졌습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으로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기 예수님께 봉헌한 예물 때문입니다.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세 가지 예물에서 세 사람을 연상한 것이지요. 이 예물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드러내기에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단순히 세 가지 예물에 맞춘 숫자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성 베다 신부(673~735)는 「마태오복음서 주석」에서 “영적으로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세계의 세 부분,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또는 노아의 세 아들(셈·함·야펫)로부터 씨를 얻은 사람들의 종족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은 그 당시 이해하던 세상 전체고, 노아의 세 아들들은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을 쓸어간 대홍수 이후 세상에 인류를 퍼트린 조상입니다. 다시 말해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미술 안에서도 동방 박사를 백인, 흑인, 황인으로 그리거나, 혹은 청년, 장년, 노년으로 그렸습니다. 모든 인종, 모든 세대의 사람을 표현한 것이지요. 그 안에는 2026년 오늘 이곳에 있는 우리도 포함돼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서 「놀라운 표징」을 통해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집으로 돌아온 동방 박사들은 분명 메시아와의 이 놀라운 만남을 다른 이에게 전했으며 그리하여 민족들 사이에 복음 전파가 시작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만남’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성당에서 구유에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가 바로 또 하나의 동방 박사가 아닐까 합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훈련이나 ‘습성’이 있을까?

현대 사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쁨과 쾌락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더 맵고, 더 달고 심지어 이것이 합쳐진 ‘단짠’ 음식들이 대성공을 이루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인생을 성찰하게 해주는 긴 영화나 강연보다는 순간의 관심을 사로잡는 숏폼이 인터넷 안에서 조회수를 집어삼킨다. 요즘 웬만한 궁금증은 AI에게 물으면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과 훈련을 요구하는 일들이 과연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을 돌아보게 해주는 중요한 성찰이 「신학대전」의 일부인 ‘습성에 대한 논고들’(I-II, qq.49-54)에 등장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논고를 인간의 행복과 긴밀하게 연결된 윤리적 덕과 악덕에 관한 논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다룬다. 그의 성찰은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습성이란 무엇인가? ‘습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이가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따분한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반대로 각 분야의 천재들은 끝없는 일상의 반복에서 생겨난 습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특이한 행위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토마스는 ‘습성’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다. ‘습성’의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는 ‘소유하다’를 뜻하는 ‘하베레’(habere) 동사로부터 온 것으로서, “어떤 것이 잘 또는 나쁘게 준비를 갖추고 있는 하나의 상태”(I-II,49,2)를 의미한다. 이런 규정에서 토마스는 “습성은 더 지속적이고 더 오래 간다는 점에서 (일시적) 상태(dispositio)와 차이가 난다”고 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런 습성은 능력(potentia)과 행위(actio)의 중간에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습성에 의해서 활성화된 능력은 추후 똑같은 행위들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만 고유한 습성 현대인은 인간보다는 동물을 습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하기 쉽다. 더욱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서 짐승의 행동이나 심지어 벌레 등의 작용을 관찰하는 연구는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엄밀하게 규정된 습성을 취득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의 경우에, 감각적 욕구의 활동은 그 본성과 더불어 바로 주어졌고 이미 규정되어 있다.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훈련을 받을 경우에만, 어느 정도의 습성이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I-II,50,3) 이와는 대조적으로 습성의 피조물이라 불릴 만한 인간은 장차 발전될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잠재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능력들 자체는 다만 자라날 수 있는 씨앗들에 불과해서, 그것들이 결실을 풍부히 내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해 특별한 ‘습성’을 획득해야 한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습성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육체적 구성이나 단순한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의 성질일 뿐이다.(I-II,50,1) 그래서 토마스는 영혼의 행위적 습성은 행위의 영적 원리들인 지성과 의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의 반복 통해 획득되는 습성 훈련 통해 한계 늘릴 때 강화 가능 본성적 목적으로 이끄는지 여부로 덕과 악덕으로 구분할 수 있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습성 토마스는 지성의 원리들을 손쉽게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들이나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입된’ 습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I-II, 51,1&4)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기본적인 ‘획득된’ 습성들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습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획득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 안에 동일한 어떤 원초적 능력이 있다면, 각 개인이 획득한 습성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요즘 세계를 놀라게 하는 조성진이나 임윤찬과 같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예술성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수많은 훈련을 통해 획득한 ‘습성’이다. 습성은 실제로 힘들고 반복된 노력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계발된 능력으로 접붙여진 가치처럼 본성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두 번째 본성’이라 불린다. 습성이 시작될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습성이 강해질수록 노력은 덜 필요하게 되고, 같은 행위를 더 쉽고 무난하게 완수할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는 습성을 “행위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 습성은 전혀 자유에 반대되지 않는다.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습성의 강화와 약화 습성은 보다 ‘증대’되거나 ‘위축’될 수 있다. 습성의 성장은 단지 양적인 반복 횟수에 달려 있지 않고, 행위의 질과 의도,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의 깊이에 달려 있다. 습성은 모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습성 자체보다 더 강하고 더 진지한 행위들에 의해서만 증가된다.(I-II,52,2) 따라서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한계를 확장하는 더 강렬한 훈련을 통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어떤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특정 습성과 합치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습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존의 습성이 파괴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행위를 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나태함만으로 충분하다. 오랫동안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대부분을 망각하듯이, 단순히 습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습성을 매우 약화시키며 때로는 완전히 소멸시킨다. 계속해서 지성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훨씬 하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급속하게 퇴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습성은 도대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본성과 마찬가지로 습성은 우리의 행위들이 더 쉽게, 더 유쾌하게 흐르도록 만들어 주므로 모든 진보의 조건이다. 천재적인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습성을 통하여 그의 본성적 능력들에 완전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습성의 강화와 약화는 신앙인의 일상을 향해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습성을 키우고 있는가?” 습성은 인간을 본성적 목적으로 인도하는지 아니면 그 목적에서 멀어지게 하는지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토마스는 이 선한 습성을 ‘덕’(virtus)이라고 부르고, 악한 습성을 ‘악덕’(vitium)이라 부른다. 자유의 결실인 습성은 덕의 경우에는 자유 자체를 강화하지만, 악덕의 경우에는 자유를 약화시킨다. 다음 호부터는 우선 자연적으로 획득된 덕들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고마운 돌’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은 그의 <고마운 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는데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물살이 무척이나 센 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건넌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강을 건너면서 어쩌면 그것이 거친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 줄 고마운 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은 한마디로 고마운 돌이다. 신앙은 돌처럼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위기의 순간에 생명을 주는 고마운 돌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거친 물살들,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닥쳐온다. 이때 신앙이라는 고마운 돌은 우리가 그 물살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굳건하게 붙들어 주는 닻이 되어 준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고통과 위기의 순간에 그 죽음을 편안하게 넘어가게 해 준다. 신앙은 삶 안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고마운 돌이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귀한 선물이다. 세례식 때 주례 사제는 세례받는 예비 신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앙을 청합니다.” 교회에 돈이나 부귀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말한다. 육체와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최고의 것, 가장 귀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이어 주례사제가 묻는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돈과 부귀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권력과 명예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인간을 참 진리와 참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따라서 신앙만큼 좋은 것이 없다. 신앙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 없으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 중 하나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에 이미 이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 입문할 때 첫 번째로 청한 것이고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신앙은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말하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깊고 정확하게 알아 기쁘고 올바른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 때 행복하고 죽을 때 웃으면서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일반 가톨릭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라는 신앙 시리즈를 연재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전공하고 대전교구 유성본당 주임, 대전 가톨릭대 교수, 정하상교육회관 관장, 법동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제주도에 있는 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의 연수원장으로 소임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성직자가 아니어도 ‘강복’할 수 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미사의 마침 예식 중 우리는 신부님을 통해 강복을 받습니다. 미사 때만이 아닙니다. 다른 성사에서도, 그리고 기도, 모임 등에 신부님이 함께하시면 강복을 받곤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는 기도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강복 받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교님이나 교황님의 강복을 받는 일은 더 그렇지요. 그러다 보니 강복이라 하면 성직자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문득 하느님의 복을 청하는 기도가 강복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강복, 다시 말해 ‘축복’은 준성사에 해당합니다. 준성사란 우리가 아는 일곱 가지 성사를 모방해서 교회의 간청을 통해 영적 효과를 얻을 수 있고, 또 이를 보여주는 거룩한 표지입니다. 성사의 집전자가 성직자인 것처럼 교회법은 “준성사들의 집전자는 합당한 권력을 받은 성직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1168조) 이렇게 보면 ‘아, 역시 성직자만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준성사의 거행은 보편 사제직에 속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이 사제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이 ‘복’이 되어야 하며 남을 축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9항) 다만 교회 생활과 성사 생활에 더 밀접한 축복은 서품을 받은 성직자만 할 수 있습니다. 「축복 예식」을 보면 평신도가 어떻게 축복 예식을 집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축복 예식」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축복 예식서들을 모은 전례서입니다. 사람을 축복하는 예식에서부터 신자들의 생활과 건물, 성당 기물, 신심 증진을 위한 물건 축복 등 다양한 축복 예식들이 실려 있습니다. 「축복 예식」에는 평신도가 집전할 수 있는 예식도 많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자녀 축복 예식’과 같이 “부모나 사제나 부제가 집전할 수 있다”고 평신도인 ‘부모’를 집전자로 명시하는 경우도 있고, ‘병자를 위한 축복 예식’, ‘새 집 축복 예식’ 등 많은 예식서들이 평신도 집전자를 위한 예식문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 실은 축복 예식이 아니어도 이미 우리는 일상 안에서 자주 강복을 청하고 있습니다. ‘식사 전 기도’에서는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저녁 기도’에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지켜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렇지요. 공적 전례가 아닌 개인의 기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우리 자신과 주변, 이웃을 위한 축복을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의 복을 빌어 주며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롭게 해가 시작되는 오늘, 가족·친구·이웃에게 세속적인 복만을 빌어 주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청하며 기도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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