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머물러라!

사막 교부들의 금언 모음집을 읽다 보면 ‘독방에 머물라’는 권고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 권고는 특히 사막으로 물러나 수도승 생활을 시작하는 초심자나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수도승에게 주어지는 권고다.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수행으로 간주됐다. 독방에 머무는 수행 누군가 압바 비아레에게 “제가 구원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근심 없이 당신 독방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비아레 1)라고 말했다. 또 구원을 위한 말씀을 청한 형제에게 압바 히에락스도 비슷한 권고를 하였다. “당신 독방에 머무르십시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도록 하시오. 단지 누구에게든 악한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히에락스 1) 독방에 머무는 자체가 마치 구원에 중요한 수단인 듯한 인상마저 준다. 독방을 떠나려는 유혹이 들 때, 원로에게 가서 자기 생각을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권고는 언제나 ‘독방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이런 말이 덧붙는다. “가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일하지 마시오. 다만 독방을 떠나지는 마시오.”(아르세니우스 11) 이 권고에 놀라 또 다른 원로를 찾아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전혀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독방에만 머무르십시오”(파프누티우스 5)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독방을 나가려는 유혹에 대한 원로들의 처방은 한결같았다. 즉 독방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절대 독방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 항구히 머물라는 것이었다. 이 권고가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무의미하게까지 들릴 수도 있다. ‘단순히 독방에 머무는 것 자체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왜 그토록 중요한 수행으로 간주하여 권고했을까? 독방에 머무는 이유 이 권고는 사막 인구가 증가하던 시대에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하느님과 홀로 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자기 암자에 은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러 사막에 왔다. 사막에 항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독방의 고독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핵심은 자기 독방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어디서도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방은 그들의 금욕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압바 모세는 어떤 형제가 한 말씀을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가서 당신 독방에 앉으십시오, 그러면 독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입니다.”(모세 6) 그들은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것이 수도승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준다고 믿었다. 독방에 머무는 수행은 정주(定住)와도 관련된다. 정주란 한곳에 항구히 머무는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사랑, 깊은 신앙이 전제되며, 무엇보다도 인내와 끈기가 요구된다. 정주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서약하는 삼대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여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을 통해 하느님을 찾겠다는 약속이다. 사실 여기저기 이식(移植)된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듯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수도승도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곳에 머무는 것은 중요하다. 유혹자와의 싸움 수도승을 독방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적은 아케디아(akedia)다. 이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오는 권태나 지루함, 무기력 혹은 나태라 하겠다. 이레네 하우스헤르에 의하면,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아케디아와 대적하는 데는 큰 용기와 영웅적인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부들은 알고 있었다. 아케디아는 정주에 권태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34~135) 고독과 권태의 버거움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회피하기 위해서 독방 밖으로 나가려는 끈질긴 유혹에 저항하면서 독방에 머무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수도승이 견뎌야 할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외출의 유혹은 강하게 엄습했고 온갖 구실로 다가왔다. 한 형제는 9년 동안 독방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는 매일 떠나기 위해 외투를 준비했고, 저녁이면 “내일 떠나야지!” 하고 말했다. 이튿날엔 “주님을 위해 오늘도 여기 머물러야지!”라고 했다. 9년 동안 이렇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모든 유혹을 거두어 주셨고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같은 책, 135) 참된 머무름 독방에 머무는 것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압바 암모나스는 말한다. “사람은 독방에 백년을 머물면서도 독방에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포이멘 96) 참된 머무름은 몸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머무는 것이다. 몸으로 독방에 머물면서 밖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독방을 떠난 것이었다. 압바 요한의 다음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누군가 자기 영혼 안에 하느님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의 도구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독방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하느님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독방에 머물기 위해 세상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구도, 이 세상의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독방에 머물 수 없습니다.”(요한 콜로보스 44) 참된 머무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라고 말씀하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 교부들이 그렇듯 독방에 항구히 머물라고 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 항구히 머물라는 권고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한 강론에서 주교, 사제, 수도자,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머물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 살기, 머물기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 전부를 특징짓습니다.”(「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세요 I」, 74)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머물라는 이 권고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하여 늘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사막 교부들은 그런 우리에게 ‘머물러라!’고 권고하며 마음으로 내려가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잡고 이리저리 떠다니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2025-02-16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일치, 인격들 간의 친교

하느님 손에 의해 빚어진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자신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본능적 고백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했으면 내적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감탄이 터져 나왔을까? 이 감탄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너’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뼈에서 나왔고 내 살에서 나왔으니 ‘나’도 멋지다는 것이다. 나와 너를 동시에 긍정한 이것을 ‘원일치’라 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러한 일치를 갈망하며, 일치할 수 있는 조건도 제시된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다르게 표현하면 나를 긍정하고 너를 긍정할 때 일치할 수 있는 능력이 샘솟는다. 어느 날 선물처럼 너는 내 삶에 들어왔고, 나 또한 너의 삶에 들어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알았던 것처럼, 나도 너를 만나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더 완전하게 알게 됐으니, 그대가 바로 나의 얼굴이다. 이는 너의 삶이 내 삶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나의 삶 또한 너의 삶이 됐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치에는 중요한 특성이 있다. 같아서 이루는 일치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치(하나)이다. 일치라고 쓰고 행복이라 읽는 두 사람의 역사가 출발했는데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보이는 것만 다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각, 성격, 시각 등등, 도대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다름이 신기했는데 시간에 시간이 더할수록 불편했다. 다름을 써놓고 틀렸다고 읽으며 밀어냈다. 너를 밀어내고 보니 나도 나의 정체성에서 멀어졌다. 이제 다시 틀림이라 읽지 않고 다름으로 읽으니 처음 상태로 돌아가 그가 다시 보이게 됐다.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 너의 시선도 나의 시선도 아닌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시선을 갖게 됐다. 그것이 아담의 고백이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너’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너도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성(남성성-여성성)과 다른 너의 성을, 몸에 쓰여진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된다. 내가 너에게 갈 수 있는 길은 나를 탈출해 너에게 갈 때에 가능하다. 이는 인간이 지닌 초월성으로 가능하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하여 인간이 됐듯이, 인간도 자신을 탈출해 너를 만나 하나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과 여성성을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정적 사고와 힘(경제력 권력 등)의 논리로만 받아들인다면, 성을 역할 분담이나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남성성, 여성성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보이는 육체적 차원을 넘어 보이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신 그 신비가 있다. 교리서 제8과 1항은 이렇게 표현한다. “‘원고독’의 의미는 ‘원일치’(unità originaria) 의미의 일부를 이룹니다.” 결국 인간은 고독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찾고, 자신에서 탈출하여 너에게 가는 친교적 일치를 이루게 된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고백에는 서로의 성(性)은 다르지만 본성은 동질함을 의미한다. 너는 내가 소유할 누구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누구이며,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이 지닌 진리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2-16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완전한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 수용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던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유래한 이원론을 따르는 인간관은 우리의 경험과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극복되기에 이른다. 그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전적인 단일성을 지닌다는 성경의 관점을 12세기부터 새롭게 유행한 그리스 철학적 개념을 통해 정리했다. 이 작업은 성 토마스가 서방 세계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인간관을 계승해 변형시킴으로써 착수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의 불완전한 실체가 결합돼 비로소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완전 실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아니고 육체와 함께 할 때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활동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지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통해 사유하고 배우며, 사물을 관찰하는 지각 행위는 영혼이나 육체의 한 측면에 제한되지 않고 육체를 통해서 영혼이, 영혼을 통해서 육체가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나름대로 고유한 도구를 가지고 자신의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듯이, 영혼도 각자 고유의 육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 즉 사유 능력을 영혼과 구별했다. 바로 이 지성과 육체의 형상인 영혼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함으로써 이후에 많은 혼란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정신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불분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성경의 관점과 상응하는 인간관을 피력했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인간관 성 토마스는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어떤 것임이 명백하다.”(STh I,75,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어서 ‘영혼이 육체의 유일한 형상’(forma)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STh I,76,1&3) 여기서 인간은 두 개의 실재로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영혼은 육체를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적 형상인 이성적 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다만 이성 작용들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을 유지하고 감각 기능을 수행하는 원리이기도 하다.(STh I,76,4) 성 토마스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 복수라고 가정하게 된다면 인간의 통일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토마스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이란 부자연스러운 어떤 것일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통일되어 있음은 영혼이 그 본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STh I,84,6) 그는 영혼이 엄격하게 육체와 연관되어 있어서, 육체 없는 영혼이란 몸에서 떨어진 손과 같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게서 육체는 영혼과 대조적으로, 즉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다. 육체는 영혼의 현세에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나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의 결과(오리게네스)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은 육체를 통하는 과정을 거쳐서 진리를 발견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운 것이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은 가톨릭교회의 공적 교리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 교회는 인간을 물질적 육체와 정신적 영혼이라는 두 개의 구성 원리로 이루어진 합일체로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인간관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플라톤적 이원론은 서구의 문화적 유산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이 지닌 의미 일상적인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정신적으로 넘어설 수 있고 육체를 마치 대상처럼 관찰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화될지라도, 그의 정신은 건강하고 젊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 존재는 단 하나의 유일 원리로 소급시킬 수 없는 복합적 존재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두 요소를 하나로 환원하는 유물론자나 유심론자들의 일원론적 해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을 세계와 관계하도록 해주는 육체와 그 육체의 제약성을 극복하도록 상승시켜주는 영혼은 긴밀한 상관관계 속에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소우주’라고도 지칭되는 인간은 모든 영역 안에서 자신을 하나요, 동일한 인간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조화롭고 통합적인 인간관은 성경의 히브리적 사고에 잘 나타났으며, 성 토마스를 통해서 이론적인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서로 분리된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단 하나의 통합된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바탕으로 타인이나 자연 사물을 구체적으로 접촉하고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간 존재를 현실화할 수 있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성적 영혼에 의해 통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때, 참다운 인간 실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인간의 내적, 개인적 영역뿐만 아니라 외적, 공적, 사회적 영역도 다루었다. 이렇게 그는 근대 데카르트 이후 널리 퍼져 있는 인간에 대한 이원론이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사고틀을 제공해 줬다. 더욱이 이러한 해결책은 르네상스와 근대를 넘어 서양 사상 안에서 명시화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찰에 기초를 제공해 준 ‘인격’ 개념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다음 회에서는 ‘인격’ 개념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2025-02-09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고독, 자신의 인격을 자각하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그 존재 본성상 고독(혼자 있음), 일치(함께, 하나 되고자 하는), 순수(깨끗함)라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그 사람 몸에 쓰여 있고 또 깊이 체험한다. 그래서 단어 앞에 ‘원’자를 더해 원고독, 원일치, 원순수라 한다. 두 권으로 출판된 우리나라 번역본 제I권 5과 ‘원고독’의 의미부터 살펴 보자. 창세기는 2장이 1장보다 먼저 쓰였다. 야훼계 문헌인 2장에선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를 볼 수 있고, 인간의 본성적 특징도 잘 드러나 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7.18) 흙과 생명의 숨으로 창조된 이 ‘사람’은 남성성-여성성, 성(性)이 주어진 상태가 아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던 하느님이 그를 잠들게 했고,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자신과 다른 그 사람을 여자로, 자신을 ‘남자’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첫 번째 특징인 고독의 이중성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사람의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고독으로 인간만의 독창성, 즉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이고, 그 다음은 남자-여자, 즉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이다. 인간은 고독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혼자이면서도 혼자 살 수 없는 관계성의 존재라는 것이다. 즉 닫힌 존재가 아니라 너로 나아가는 개방성의 존재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 자신을 열어야 하는 본성이 몸에 쓰여져 있음을 말한다. 이는 누군가를 향해 자신을 열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고독의 이중성이란 한편으론 자기 안에 무한에 대한 갈망을, 영원에 대한 동경을,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사랑에 대한 갈망을, 절대자를 향하도록 하는 빛과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론 세상 안에서 너를 만나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밥을 먹고 자신들이 지닌 추억으로 역사를 빚게 한다는 것이다. 고독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 되고 싶은 그리움이요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목마름이다. 자신을 만들어 떠나보낸 그 하느님을 만나 당신처럼 거룩할 수 있도록 인간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지를 알게 하고, 방향을 잡아 항로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장치와 같다. 결국 고독은 인간이 지닌 특별한 존엄성을, 자신을 만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품격을 드러낸다. 사람과의 관계, 특히 남자와 여자에게서 오는 고독은 이 땅에서 더 충만한 삶을 살게 한다. 단순히 누군가 옆에 있기를, 이야기 나누기를,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온다. 어떤 필요나 부족함이 아니라 너에게 가고 싶은 나도 선물로서 너에게 다가가고 싶은, 그래서 나를 건강하게 살도록 한다. 이러한 고독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줄기차게 따라온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왔던 그 고독 덕분에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고, 사람과의 관계 특히 부부간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은 오래 살아 서로가 서로를 다 안다고 할 때에도 긴장을 낳는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완성을 향한 초대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2-09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침묵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 배우는 두 번째 삶의 지혜는 ‘침묵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자기표현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에 거침없는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침묵의 중요성 사막으로 물러난 그리스도인들은 침묵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사막 교부의 금언에는 그들이 침묵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다. 일례로,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스케티스 사막을 방문했다. 형제들이 팜보 압바에게 대주교가 감화될 수 있도록 그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테오필루스 2) 팜보 압바의 이 대답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준다. 즉 ‘침묵 자체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사람을 진정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현란한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다. 성숙한 인격과 고귀한 품성, 진실성, 내적 깊이를 드러내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일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법을 배울 때까지 3년 동안 입에 돌을 물고 살았다는 아가톤 압바의 이야기도 전해진다.(아가톤 15) 우리에게는 너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막 교부들이 침묵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왜 침묵을 그토록 중시하고 강조했을까? 침묵과 경청 침묵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듣기 위한 것이다. 자기 안팎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분주히 떠들면서 우리는 결코 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침묵 중에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은 들음, 곧 경청과 연결된다. 침묵은 잘 듣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 경청은 순종의 시작이고,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최초 인류는 불순종으로 낙원에서 쫓겨나 하느님에게서 분리되고 멀어졌다. 우리가 멀어진 하느님께 되돌아가 그분과 다시 일치되기 위해 우리가 잡아야 하는 무기는 순종이다. 따라서 침묵은 곧 경청을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순종과도 연결된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이유로 순종을 강조했고, 순종의 시작인 경청, 경청의 전제인 침묵을 그토록 중요시했던 것이다. 사막 전통에 충실한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아무리 좋고 거룩하고 교훈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제자들에게도 말하는 것을 드물게 허락할 것이다.”(규칙 6,3) 또 “점잖지 못한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 웃음을 자아내는 말은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금하고 단죄하며, 이런 담화를 위해 제자가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이다.”(규칙 6,8) 심술궂은 침묵 베네딕토 성인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는 고대 수도승들이 전혀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하지만 고대 수도승들은 대화를 금지하지 않았고 유머도 지니고 있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애덕이 요구할 때 말하지 않는 경우를 ‘심술궂은 침묵’이라 표현하며 이런 침묵은 가장 포악한 말보다 더 고약하다고 말하고 있다.(담화집 16,18) 실제로 말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공격수단이 될 수 있다. 그는 또 ‘분노의 무거운 침묵’을 언급하며 “그 목적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겸손과 인내를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원한을 더 오래 간직하려는 것”(규정집 12,27,6)이라 말하고 있다. 포이멘 압바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사람은 항상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참으로 침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포이멘 27) 침묵은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말해야 할 때 상대를 무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적이고 교만하거나 비겁한 침묵은 모두 심술궂은 침묵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사막 교부들은 코헬렛의 이 말씀에 따라 침묵이란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말해야 할 때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때 해서 늘 문제가 된다. 참된 침묵 침묵은 단지 외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적 침묵으로 시작되지만 내적 침묵, 곧 마음의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 아무리 외적 침묵을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엄청 수다스러울 수 있다. 또 이웃에 대한 비판이나 불평불만, 뒷담화로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참된 침묵이란 마음의 침묵, 곧 하느님 사랑으로 내적 고요와 평화 속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침묵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의 의미나 중요성을 모른 채 말이나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현하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나 속으로 늘 시끄럽고 불안하다. 침묵 중에 내면으로 들어가 고요와 평화중에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노력이 아쉬운 때다. 사막 교부들의 ‘침묵하라!’는 권고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씀처럼 다가온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2025-01-26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에 대한 전망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고 더러워진 5만 원권 지폐 한 장이 손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묻은 오물을 닦고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 은행으로 간다. 은행원은 훼손된 지폐를 받고 깨끗한 5만 원권으로 돌려준다. 어떻게 한마디의 잔소리도 찌푸림도 타박도 없이 깨끗한 돈으로 바꿔 줄 수 있을까? 그거다. 손상된 5만 원권이지만 그 가치는 5만 원이었어! 이 예를 사람으로 옮겨보자. 손상된 5만 원은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이지만 그 가치, 즉 인간의 초월적인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긴 세월 동안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보다 창세기 3장의 인간, 즉 죄, 원죄에 대해 더 강조했다. 이는 행동 결과에 집중하여 돈이 더러워지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다. 예수가 바리사이들에게 ‘한처음’으로 돌아가 너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고 한 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한처음 상태로 돌아가 그 사람의 존재를 먼저 알기를 바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는 죄성으로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있었지만,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면서 사람의 얼굴도 되찾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타락한 본성에서 구원된 본성으로 회복된 것이다. 나를 한처음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곳에서 나를 찾아야 하고 나에 대한 정의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ᅠ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완성돼야 할 부분이 우리 마음에 씨로 뿌려졌다. 어떤 씨일까? 바로 '당신의 모습'(창세 1,27 참조)이다. 시선을 바꿔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몸의 눈으로 믿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대전환이다. 매일 숨 쉬고 있는 이 생명의 숨은 애초부터 나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숨’이고(창세 2,7), 매일의 삶은 ‘일하라’(창세 1,28; 2,5 참조)는 그분의 전망 안에 있는 것이다. 내게서 당신의 숨을 거두어 가는 그날, 하느님의 자비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희망의 완성이 영광 속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교리서 2과 5항에서는 “그리고 창조의 형이상학적 상황에 필연적으로 직결된 생성, 곧 우유적 전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유적 전망’이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에겐 변하지 않는 본성적인 모습이 씨앗으로 뿌려져 있고, 씨앗은 씨앗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썩고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잠재적 수동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 모상인 ‘나’가 나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색과 머묾이 길어질 때, 우리는 앎을 더 깊이 하게 된다. 사색과 머묾의 시간은 곧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배움의 시간이 된다. 교리서 내용이 어렵다고 책장을 덮고 포기한다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보물, 진귀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나’는 묻어두고 주위만 맴돌다 간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맛있는 밥이 되기 위해선 뜸이 필요하듯 교리서의 어려운 내용에서도 그런 뜸을 들인다면, 안에서부터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1-26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고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놀라운 성찰들로 가득하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을 제시하는 「신학대전」 제2부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성 토마스가 지닌 ‘인간관’은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격적인 행복 논의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고찰해 봐도 좋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성적 동물’, 또는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표현들 안에는 함축적으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과 통일성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이원적인 사고가 야기한 여러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근대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침내 이를 창안한 인간마저도 ‘하나의 검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육체만을 분리시켜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려던 서구 의료제도는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최근에 등장한 AI를 활용한 로봇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에서도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은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다. 신화 등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은 바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이다. 그는 영혼이 사멸하는 육체에 속하지 않고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영원을 인식하는 영혼은 지상의 현실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으며,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데 그 영혼이 지상의 육체 세계로 하강하여 “마치 감옥이나 무덤 안에처럼,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약하는 것으로 육체를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결국에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육체를 거스르고 통제함으로써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플라톤적 이원론은 플로티노스에서 아우구스티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서구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들어서며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철학에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自我)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 끝에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공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에 불과한 육체는 단지 기계와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발견한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는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버렸다. 데카르트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후대의 사상가들도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한쪽을 편파적으로 더욱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의 작용만을 강조하는 유심론(唯心論)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요소를 너무나 격하시켜 육체노동의 천시, 더 나아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 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유심론이 극단적인 관념론으로 발전할 경우, 인간 존재의 개별성을 가차 없이 말살하는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작용을 모두 육체로 환원시키는 유물론(唯物論)은 인간 고유의 영적 고귀성을 해치기 쉽다. 육체만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천민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육체와 성의 상품화 등 왜곡된 형태의 육체 중심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육체와 영혼 각각의 고귀함을 인정하며, 이들 사이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을까? 성경의 통합적 인간관 많은 신학자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놀랍게도 성경 안에 담겨있는 통합적인 인간관 안에서 찾으려 한다. 성경의 통합적인 사유 방식에서는 인간을 육체, 영혼, 정신이 함께 합쳐진 전체로서 고찰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히브리 사상에 뿌리를 둔 통합적인 사고의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차 그리스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체를 경멸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물질로 표현되는 육체와 세계 창조를 경시했으며, 영혼의 승천만을 강조함으로써 육체의 부활을 사실상 부정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성적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인간 영혼이 상부의 광명 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자유 의지를 통한 범죄로 말미암아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는 강하게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만 파악했다. 이처럼 그의 육체-영혼관은 인간의 육체성을 경시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서구에서 고행과 금욕의 수행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이 퍼져 가면서,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조됐다. 육체는 저급한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감옥이며, 육체의 쾌감은 천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의해 육체의 경시와 학대가 강화되고 있을 때, 성경에 나타나는 통합적인 인간관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학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성 토마스가 제시한 통합적인 인간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2025-01-19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두 번이나 언급한 ‘한처음’(마태 19,3; 마르 10,2)은 모든 인간의 근원이기도 하다. 한처음에 중심을 두고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을 다시 들어보자.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무엇일까? 왜, 그와 내가 행복을 꿈꾸고 시작했던 혼인 생활을 끝내려 할까? 왜, 시작한 축성/봉헌생활을 그만두려 할까? 맞지 않아서? 두 사람은 원래 다르다. 겉만 다른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속속들이 다르다. 그러니 다름은 이혼 사유가 안 된다. 큰 어려움이 있어서? 그것도 아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다독이고 힘을 내자고 한다. 그럼 원인이 무엇일까?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사랑이 넘쳤는데 지금은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사랑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이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처음’, 즉 너의 근원으로 돌아가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 하신 것이다. 한처음을 확대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4장 1절까지를 말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타락하기 전 본성의 상태를, 3장에서 4장 1절까지는 타락한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역사의 인간은 이 둘이 통합된 본성이지만, 우리는 구원된 상태로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이다. 두 상황의 경계선상에서 처음 상태를 기억하고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몸 신학의 전망이요 신학적 인간학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마태 19,8; 마르 10,5)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혼을 합법화했지만, 예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의미, 혼인과 사랑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찾도록 촉구한 것이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고 질문했는데 ‘사람’으로 응답한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던 사과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알록달록하게 생긴 사과 하나가 창세기 1장에서 4장 1절의 나이다. 반으로 잘라 오른쪽에 있는 것이 창세기 1장과 2장 상태의 나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4장 1절의 상태의 나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창세기 3장 1절에서부터 교육받았고, 또 결의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원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제 그 껍질을 벗고 규범론적으로 만나보자. 왜 그래야 하는가? 삶은 무엇보다 표현이고, 이 표현에 변화를 줄 때가 왔다. 이 가르침은 내 삶의 변화를 희망하고 도전하는 용기를 얻게 한다. 머리론 알지만 행동에는 두려움이 앞서기에 나를 숨기려 갈등하는 나에게 나의 근원과 완성을 바라보고 깨어 있어라 한다. 결국 이 가르침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요, 그 앎의 자리에 내가 있기 위함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은 사람과 그의 아내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셨다. ‘무엇을 했느냐?’, ‘왜 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느냐?’ 하지 않고, “어디에 있느냐?” 물으신 것이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곧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자유로운 인격적 행위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고, 그분은 저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지난호(1월 12일자)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는 편집과정 상의 오류로 김혜숙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원고가 아닌 다른 글이 게재됐습니다. 이에 이번 호에 다시 게재합니다. 게재 오류로 불편을 겪으신 김혜숙 선교사님과 독자 여러분께 깊은 사과 말씀 올립니다.

2025-01-19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물러나라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서 듣게 되는 첫 마디는 ‘물러나라’는 권고가 아닐까 한다. 이 권고는 본래 ‘세상에서 달아나라’(fuga mundi), ‘세상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아르세니우스의 물러남 물러남의 대표적 인물은 압바 아르세니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황실 고관으로 황제의 아들들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렸던 고관대작이 어느 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물러났다. 아르세니우스에 관한 금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황궁에 살던 시절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끄소서.’ 한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피해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고독한 생활로 나아가면서 그는 다시 같은 기도를 바쳤는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세니우스,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아르세니우스 1-2)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는 권고는 구원을 위한 길로 간주되어 이후 수많은 동방 수도승의 모토요 생활 지침이 되곤 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행에 옮긴 대표적 인물로 제시된다. 아르세니우스는 스케티스 사막(4세기 이집트 북부의 수도승 생활 중심지 중 하나)의 한 암자에 살면서 암자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고독과 고요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 로마의 한 귀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아주 매몰차게 대하였다.(아르세니우스 28) 그는 고요를 지키려고 주교들과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맞섰다. “압바 마르쿠스가 압바 아르세니우스에게 말했다. ‘왜 우리를 피하시는 겁니까?’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소. 수천수만의 하늘의 군대는 하나의 뜻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자고 하느님을 떠날 수 없소.’”(아르세니우스 13) 물러남의 이유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독과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는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고독과 고요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독과 고요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내적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 없이 우리는 결코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권고하시는 자녀다운 신뢰의 덕을 뜻한다. 즉 이 지상 생활의 근심과 일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을 밀쳐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아니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막으로 물러난 동기와 목적은 적어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물러남 우리는 분명 가정과 사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 모두 사막으로 물러날 수 없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세속적 가치와 정신,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라는 울타리,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에고일 것이다. 이런 것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삶에서 ‘함께’와 ‘홀로’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있음’이 사람들과의 친교의 때라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고요의 때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일상과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고독과 고요 중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과 하느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고요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이다. 예수님도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의 필요에 봉사하셨지만, 어떤 결정적 결단의 순간이라든지 유혹의 때 혹은 재충전이 필요한 때에는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홀로의 시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그분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셨다. 고독과 고요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허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만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다닐 수 있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모르고 인간적 친교만을 추구하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의 가벼움과 공허함을 종종 보게 된다. ‘홀로 있음’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물러나 홀로 고요히 침묵 중에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앞만 바라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물러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정이나 어떤 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일상에서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 본문에서 인용된 사막 교부의 일화나 말의 출처는 알파벳순 모음집 사막 교부들의 금언(베네딕다 워드, 「사막 교부들의 금언」,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7 참조)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2025-01-12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왜 그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가?

가톨릭교회 신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회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지만, 정작 그의 저작을 읽기란 쉽지 않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학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성인이다. 성 토마스가 보여주는 행복의 길은 어떤 것일까. 성 토마스 탄생 800주년을 맞아 가톨릭대 박승찬(엘리야) 교수의 글을 통해 성 토마스가 전하는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유례없이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뤘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보릿고개’라는 말은 사라졌고,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첫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화적으로도 K-드라마, K-영화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다. 이런 안정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는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2020년부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K-방역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한 일상은 사치스러운 꿈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2년 넘게 지속됐다. 간신히 팬데믹 상황을 벗어나서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기상 이변이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폭염, 상상조차 못 할 폭설로 변한 첫눈 등이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코로나19와 기상 이변에 이어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계엄군을 막아선 일반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발 빠른 대처로 간신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할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더 이상 각 개인이 ‘소확행’만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나빠지던 경제 사정은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이가 추구하지만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그리고 여전히 개인의 힐링과 워라밸을 추구하는 주관적 행복의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라고 지탄받던 MZ 세대가 비상계엄의 위중한 시기에 소중히 간직했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추위에 떨면서 “계엄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는 자기 개인의 행복조차도 방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추구되던 개인의 주관적 ‘행복’은 생각할수록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인간들을 괴롭히던 질병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많은 현대인은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적인 꿈을 꾸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 안에서 전통적으로 종교가 강조하던 내세의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게 됐고, 현세적인 행복에 매몰되어 버린 수많은 대중이 양산됐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욱 행복해졌을까?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의 승리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낮은 행복지수와 높은 자살률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런 추정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이미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상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근대 사상과 산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이성과 이에 근거한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이제 AI와 이를 탑재한 로봇으로 상징되는 과학 발전은 상상조차 힘든 놀라운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이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기술의 발전을 활용하면서도 인간이 그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답해 줄 멘토가 바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완성해 가톨릭교회의 스승으로 선포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5~1274)이다. “실상 그(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에 의해서 이룩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78항). 성 토마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에 차서 신학과 세속 학문의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인정했다. 이렇게 그는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가지고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이러한 성 토마스의 가르침이 집대성된 작품이 바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신학대전」의 분량은 엄청나서 보통의 책 크기로 출판한다면 어림잡아 1만 쪽에 달하고,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대전」 번역 작업이 완료된다면 총 72권에 달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이 대작을 공식 가르침의 튼튼한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대전」을 통독한 사람은 전문가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국내의 성 토마스 연구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신학대전」 제1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엄청난 충고들이 담겨 있는 「신학대전」 제2부는 아직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최종목적인 행복, 올바른 행위를 판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기준들, 이를 실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해 주는 덕과 이를 방해하는 악덕들, 악을 피하고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구체적인 충고 등 무수한 보화가 가득 담겨 있다. 더욱이 2025년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지 8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해 이번 특별 연재에서는 「신학대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 제2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물질적인 풍요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방황하는 많은 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중세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장 및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신 앞에 선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 「대이교도대전II」, 「존재자와 본질」, 「신학대전: 31 & 32(STh II-II, qq.1-13)」 및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을 라틴어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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