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5-19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대중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 사도직 수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홍보 주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이 홍보 주일로 제정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특별사명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복음 홍보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사로부터 ‘말씀묵상’ 원고청탁을 받고 망설일 무렵, 친구 수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 모친 고 분다(베네딕타) 어르신은 시골 작은 동네에 사시는 여건상 주일미사를 대체로 공소예절로 하셔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매주 가톨릭신문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홍보 매체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순간인 것은 물론, 가톨릭신문이 수행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교회’ 역할이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께서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사건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영원한 축복의 복음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주님의 승천은 부활 사건의 완결입니다. 그런데 주님 승천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복음서가 매주 적은 지면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 이야기는 단 한 구절에 불과하고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승천 이야기를 아예 생략했으며, 루카복음 역시 후속책인 사도행전에 유보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주님 승천 이야기를 요약하면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주님의 지상 사명의 완성으로 사도들 앞에서 일어난 공개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승천은 주님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를 복음선포 홍보대사로 위촉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은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선포(16,15)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부활 메시지 전체는 다른 이를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에게 선포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과 주님 부활 소식은 선교라는 사명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와 사도신경이 선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마르코만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시편(2편과 110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구절을 마르코가 전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표징으로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이적들이 그 보증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위임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귀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극복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이 표징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6,20)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크고 대담한 배포를 선물한 듯 보입니다. 기적의 첫째 목적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의 탁월한 본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선교지가 ‘온 세상’임을 확인합니다. 지역과 대상의 제한 없이 온 세상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번째 선포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사명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존재가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 삶의 지표를 재정립하는 은총을 빕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5-12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5-05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에 교회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부활 제2주일과 제3주일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사건이었다면,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에 관한 비유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목록지침」 100항 참조) 전례력에 따라 매년 선포되는 복음 내용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복음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 곧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복음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목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들을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1사무 17,34-35; 이사 31,4)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들이 이리의 거센 공격을 받더라도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기노스코’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라고 할 때, 목자는 양들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 차원에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양들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이 바탕이 되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 죽음은 목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사랑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제자들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민족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한 곳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고 양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백성의 목자’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참조: 예레 23,3; 이사 40,11)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에제 34,11-16 참조) 요한 10장에서 사용된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백성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목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죽음과 사랑을 소개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활 시기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포함함으로써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비유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비추는 부활의 빛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10장 17절의 말씀이 이러한 묵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힘주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60년 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던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4-21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이야기로 부활 체험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이지만 다른 제자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저자 루카는 두 제자의 신원보다는 그들의 행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들이 함께 길을 가며 근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차근차근 복기하고 있었고, 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세밀히 전해줍니다. 절망감에 포획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흔하고 자잘한 우리 인생살이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불쑥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는데,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두 가지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셨다’ 그리고 ‘함께 걸으셨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수난의 시간에 도망갔던 제자들, 두려움에 숨어 있는 제자들 그리고 무덤 곁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먼저 찾아가셨음을 성경은 들려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먼저 다가가셨고, 절망에 끌려 들어간 그들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우리 역시 절망과 실의에 휩싸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먼저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은 그늘 드리운 삶에 큰 위안이 되어 줍니다. 생면부지 낯선 이가 ‘무슨 일이냐?’며 던지는 질문에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두 제자는 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그가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는 볼멘소리를 합니다. 제자들은 낯선 이가 탐탁지 않았지만, 그분의 거듭된 질문에 그간 세간을 뜨겁게 달궜던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의 입을 빌려 예수께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24,19)이셨음을, 또 그분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셨는지 그 도시와 온 이스라엘이 알고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께 걸었던 기대와 비극적 최후가 빚어낸 절망감과 좌절까지 속마음을 모두 비워냅니다. 덧붙여 여자 몇몇이 전해준 부활 소식과 빈 무덤이 초래한 불안과 혼돈스러움도 쏟아내었습니다. 그러자 낯선 동행자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서를 두루 인용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24,27)하시며 그들의 둔한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 서야 영광 속에 들어가신다”(24,26)는 것입니다. 얽힌 타래를 풀어내는 가르침으로 그들 마음에 아슬아슬한 희망이 시작되려는 찰나,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적잖이 인상적이었던 낯선 이가 더 먼 길을 가려는 듯 하자 그들이 그분을 붙잡습니다. 제자들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기운과 매력을 지닌 낯선 이와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분이 “빵을 들고 찬미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24,30) 모습에 지난 기억이 되살아났고, 그 순간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루카는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알아봄’은 시각적 작용을 통한 알아봄이 아니라 이성적 작용을 통한 알아봄입니다. 제자들의 알아봄과 동시에 예수께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지만, 주님은 이제 그 신비로운 만찬을 통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알아봄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그들이 낯섦을 받아들인 데에 있습니다. 이 낯섦과의 만남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흔의 의미를 심도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에서 보듯이 이미 길에서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만찬의 ‘친교’에서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지만, 시각적으로 제한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낯선 이에게서도, 외로운 이웃에게서도 만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십니다. 객관적이고 파편적 이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경험되고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두 제자는 즉시 절망으로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역전이 제자들에게도 일어났음을 봅니다. 그들이 도착해 보니 다른 제자들 역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경이로운 체험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은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떠나갔던 제자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자신의 체험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부활 신앙의 이야기는 더욱 생생해지고 풍성해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셨을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우리도 말씀 안에서 마음 뜨거워지는 날들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4-14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어떤 의심을 대하는 태도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토마스가 모진 말을 내뱉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제야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서양말에 ‘Doubting Thoma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의심하는 토마스’라는 말이지요. 결정적인 증거나 체험 없이는 어떤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로 토마스는 불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조금 불편합니다. 토마스를 그저 의심 많은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토마스의 의심을 이렇게 희화화해도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토마스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의심의 이유 전승에 의하면 토마스 사도는 후일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할 때 인도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같이 공부하던 프랑스 신학생이 농담을 건넸습니다. “인도의 수호성인이 토마스이니, 아마 인도 신앙공동체는 의심이 많지 않나?” 웃자고 던진 말에 신부님께서는 죽자고 답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주셨지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는 동안 바쁜 아버지가 급히 집을 다녀갔다고 해봅시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에게 다른 가족 모두가 엊저녁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고 아무리 아이에게 말해도, 아이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혹 믿는다고 해도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인도교회 사람들은 의심하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오히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아이와 같이 깨끗하고 간절해서, 생떼를 쓰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께 뜨겁고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지방으로 가시겠다고 하자 제자들은 말립니다. 그곳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오히려 다른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제자들이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두려워 숨어있을 때, 토마스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토마스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만, 다른 제자들이 죽음이 두려워 숨었을 때 토마스는 밖으로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토마스가 유일합니다. 과연 토마스의 의심을 불경하다 하겠습니까. 그 의심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람은 토마스 자기 자신 밖에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토마스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사랑이 아닐까요. ■ 의심도 쓸모가 있나요 우리는 사도들이 건넨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사도들처럼, 주간 첫날 바로 이 주일에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토마스와 같이 뜨겁고 순수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과 희망의 이면에는 의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 굳건하게 되기는 하는 걸까요. 토마스가 의심했다면, 우리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서 한 사람은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사람. 어떤 상황과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신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의심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의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의심은 무한자 하느님을 마주한 유한자 인간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동안 자신의 의심을 견뎌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의심을 도구 삼아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은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 불편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신의 의도를 덧붙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셨던 것처럼, 토마스는 자신의 부끄러운 의심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모든 것을 기록하여, 우리를 믿음에로 이끌고 있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4-07

[말씀 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전하는 복음서의 첫 이야기는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사람들이 놀라고 모두 환호하는, 그런 기쁨과 경탄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담담하게 ‘빈 무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이를 공통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복음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부활의 감동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간 첫날, 즉 유다인들의 안식일 다음 날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놀라고 두려워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을 보고 놀라고 혼란스러웠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는 못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로 부활에 대한 복음이 시작할까요? 가장 먼저 무덤으로 간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충격이 사라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는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갑니다. 어떤 마음에서 그녀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덤으로 발걸음을 향했을까요? 어쩌면 소리 내어 주검 앞에서 통곡하지 못해서 혹은 그리움에 눈물지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잊지 않고 어둠이 채 가기도 전에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그녀는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 제자입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이 부활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체험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처음 마주한 것은 텅 빈 무덤입니다. 당혹스럽습니다. 누가 선생님의 시신을 훔쳐 갔는지 두려움도 듭니다. 죽어서조차 선생님은 반대자들에게 표적이 되어 해코지당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들 역시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큰 환호를 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온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갑작스럽게 벌어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가 외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뛰어가 보니 여인의 말처럼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들어가 보니 시체가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고 수건과 아마포가 개켜 놓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욱 혼란에 빠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부활에 대한 첫 증언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일까요? 제자들이 부활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분의 죽음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다인 대부분의 기대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따른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지도자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누가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툴 뿐 아니라(루카 22, 24) 제베데오 아들들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좋은 자리를 미리 부탁합니다(마태 20, 20~21). 그렇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정치적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통치할 것을 기대했으나 이런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조차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으로 살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자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무력하게 우리의 죄와 어둠을 끌어안아 주시는 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간 사랑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분이 왜 십자가에 달리신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이며, 그 죽음과 함께 자신들의 기대와 욕망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죽음 너머에 있는 예수님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가 ‘죽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인생이 제자들의 생각처럼 실패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살아간 사랑이 현실적 힘 앞에서 무력해 보이지만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또한 예수님의 새로운 초대입니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하느님이 원한 삶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빈 무덤’을 묵상하면서 세상의 판단과 달리 결국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봄길’이 떠오릅니다.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사랑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가는 길이 있고, 그런 사랑의 길은 우리가 피해야 할 고통의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이 동반하는 따뜻한 봄길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따뜻함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3-31

[말씀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유학 시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 조그만 마을 성당에서 성주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약 20여년이 흐른 지금, 특별히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거행된 예루살렘 입성 행렬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행렬은 성당 마당이 아닌, 마을 광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성지 주일 아침, 사람들은 전통 복장을 입고 손에 성지가지를 들고서 마을 광장에 모였습니다. 곧이어 주례 사제의 인도로 행렬 예식은 시작됐고, 부제의 행렬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은 시작됐습니다. 성지가지로 장식된 십자가를 앞세우고, 그 뒤를 이어 사제와 부제, 복사들, 관악기 밴드와 기수단,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성대한 행렬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다소 낯선 이국적 풍경이었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했듯이, 20여 년 전 오스트리아 마을 주민들도 환호했고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합니다. 오늘 축복하는 성지가지는 2000여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며 흔들었던 그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함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의 행렬은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하는 하느님 백성의 행렬이자, 순례자의 발걸음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행렬을 마치면, 이어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중 하나(제1독서: 이사 50,4-7)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르 14,1-15,47)가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위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습니다.(요한 19,19-20과 비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히브리말, 라틴말, 그리스말로 기록) 예수님께서 사셨던 시절,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은 죄명이 적힌 나무패를 들고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여기에는 죄 명패를 죄인의 십자가 위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이것을 본 주민들이 죄인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는 통치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맨 위에 붙어 있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나무패는 로마 제국에 맞서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국사범의 죄를 예수님께 덮어씌우고 있으며, 동시에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갈망하는 유다인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오시기 전,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마르 15,2.9.12) 이 칭호로 빌라도는 예수님과 유다인을 조롱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자기 앞에 무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유다인들이 로마 제국을 대항하여 품은 자유의 소망이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오늘 거룩하고 장엄하게 거행된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에서 만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임금’이셨습니다. 군중들은 손에 가지를 들고 흔들며 암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이시다.”(따름 노래 1) 그러나 주님의 수난기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했던 임금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분의 왕좌는 십자가 나무였고, 그분의 왕관은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분의 통치 방식은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일치와 평화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종’이었습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빰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제1독서: 이사 50,5-6) ‘고난 받는 종’을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성됐습니다. 전례시기에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도록 초대받는 거룩한 주간에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강론지침」은 성주간을 위한 길잡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주간에 교회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정서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주간의 전례 거행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바로 그 파스카 신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77항) ‘파스카 신비’는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는 실체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더욱더 요원한 목적지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곳으로 뛰어보라는 요구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수영장 다이빙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영장 물속은 깊고 그곳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물속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포는 우리의 발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용기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사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희생과 고통이 없다면, 영광 또한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사랑이 드러나는 ‘파스카 신비’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거룩한 주간, 성주간을 보냅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3-24

[말씀묵상] 사순 제5주일

제임스 티소트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 제1독서 예레 31,31-34 제2독서 히브 5,7-9 복음 요한 12,20-33 예수님은 씨앗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비유에서 씨앗이 주인공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지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며 ‘저절로 자라나는 씨’, ‘겨자씨 비유’도 그렇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알 밀알’은 씨앗 이야기에서 독보적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야기꾼 예수님의 말씀에서 씨앗은 생명의 근원으로, 자기희생으로, 그리고 우리네 삶에 채색되는 다양한 이야기가 되어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수난의 색채가 점점 짙어 가는 이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주간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울려 퍼진 가르침임을 의미합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올라온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뵙길 열망했고,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필립보에게 만남 주선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께 가서 그들의 청원을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을 만나셨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만남을 주선하는 제자들의 요청을 들으시고 뜬금없는 답변을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하시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시며 ‘한 알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과 ‘영광의 때’는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영광 받을 시간’과 ‘한 알 밀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닿게 되는 의미가 형성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땅의 이치나 자연적 섭리를 가르치기 위한 말씀도, 보편적 진리 확인을 위한 말씀도 분명 아닐 것입니다. ‘한 알 밀알’이 된다는 것은 ‘밀알’ 자체로 남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알 밀알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한 줌의 흙을 만나 썩게 되었을 그때 ‘한 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많은 열매가 달리는 새 역사, 새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거룩함의 시작은 ‘한 알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덧붙여서 주님은, 자신을 버리지 못하여 열매 맺지 못하는 초라한 삶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대조를 보이는 ‘사랑하다–미워하다’, ‘잃는다–보존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열매 맺는 삶’과 ‘열매 맺지 않는 삶’의 의미를 분명히 하십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엇갈리고 일시에 전부를 흔드는 혼란에 빠지신 예수님께서 번민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대면 안에서 확신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양가감정을 체험하십니다. 죽음의 위협을 인지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주할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이러한 내적 동요를 통하여 극적으로 내보이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 나타난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그 고뇌가 요한복음의 이 말씀 저 바닥에 묻어 있는 대목입니다.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은 의연하게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며 끝을 향하여 내달릴 준비를 하십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곁에 있던 군중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예수께서는 확신에 차서 아버지의 뜻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당신이 땅에서 높이 들어 올려질 때 모든 이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들이겠다며(12,27-32), 당신의 죽음이 어떠할지, 나아가 당신 죽음이 가져올 구원에 대하여 담백하게 술회하듯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고백에 마음이 아리어 옵니다. 한 알 밀알이 되고자 하시는 주님은 당신이 묻힐 자리가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실 자리가 십자가임을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이로써 ‘한 알 밀알’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생명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품은 표현임이 분명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기도와 하늘에서의 응답 역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지상의 사건이며 동시에 하늘 사건임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을 때 생명이 시작되는 신앙의 역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흙의 품에 안긴 씨앗은 썩게 되지만 밀알 속에 깃든 생명의 힘은 많은 열매로 변화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부활 역시 죽음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한 알 밀알로 썩을 자리는 어디인가요?

2024-03-17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마티아스 스톰 ‘예수 그리스도와 니코데모’. 오늘 복음 이야기 한가운데에, 우리 신앙의 핵심을 잘 요약한 구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3장 16절의 말씀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복음서를 읽고, 전체를 요약할 만한 한 구절을 딱 짚어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구절을 짚어낼 수 있겠지요. 예쁜 말로 깊은 의미를 담아낸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을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 사랑 그리고 심판 말씀의 축을 이루는 두 낱말을 골라보라면, ‘사랑’과 ‘생명’이겠지요. 굳이 한 단어를 더 골라내야 한다면 결국은 ‘사랑’일 겁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가장 좋아하고 줄곧 강조해 온 말이기도 하지요. 사랑한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마다할 신앙인이 없겠지요. 그런데 복음 이야기는 또 다른 낱말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사랑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저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낱말입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 낱말은 사랑이라는 낱말을 마주하며 복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심판’은 ‘사랑’과 함께 이야기를 떠받치는 또 다른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심판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심판을 이해하면 사랑마저도 알아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애써 고개를 돌려 ‘심판’이란 낱말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다 어떤 마음을 담고자 하셨을까요. ■ 심판은 정말 그런 것인가요 심판이라는 말을 마주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시나요. 이 막연한 낱말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사제로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로 사제를 찾지 않습니다. 대부분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그렇게 사제는 세상의 어두움을 마주합니다. 장사하면서 사람을 속였다고 자책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되물어 보니 어떤 업계의 시장구조는 남을 속이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는 모습이더군요. 가족이나 남편을 미워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되물어 보면, 가정 폭력이나 무능력에 수도 없이 시달린 분이 많았습니다. 수십 년도 전에 아이를 지웠다는 이야기 뒷면에는, 무책임한 남성이나 가난이라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벌어진 일의 이면에는 언제나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자리는 무척 막막했습니다. 무참해진 마음으로, 사람들의 죄는 짓는 게 아니라 빚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은 절반 이상이(혹은 대부분인지도) 태어나면서 결정나더군요. 질문이 생겼습니다. 어떤 시대에, 어떤 나라에, 어떤 성별로,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가에 따라 한 인생이 결정된다면, 그렇게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어떤 삶으로 내몰리게 된다면, 그리고 생의 끝에서 그 삶을 심판해야 한다면, 섭리의 이름으로 삶을 계획하신 하느님께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과 함께 항변하는 마음,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 성경이 말하는 심판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심판은 우리가 가진 사법적인 개념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되더군요. 성경에서 심판은 계약과 상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를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준비해 놓되 반으로 갈라 잘린 반쪽을 마주 보게 차려놓게끔 하시고, 그 사이를 오가시며 계약을 맺으셨습니다.(창세 15장 참조) 이처럼 구약의 사람들은 짐승을 반으로 갈라놓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이 깨질 때, 그 관계가 그 짐승처럼 갈라져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그것을 심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계약을 어겼을 때, 계약을 맺은 두 당사자가 서로 그 ‘관계를 끊어내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하게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의 심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을 심판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버린 적은 있어도, 하느님이 사람을 버린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립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어져 버린 관계를 되돌리시고자 아드님까지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성을 살려주실 때,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논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8,15)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으신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려 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저버릴 때도, 당신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줄곧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심판’을 다시 마주 놓습니다. 두 낱말을 긴장하게 하는 것은 오해였을 뿐, 심판이라는 낱말은 사랑이란 낱말을 도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있군요. 뒤늦게나마 말씀 사이로 예수님의 손이 슬몃 보입니다. 우리가 놓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꼭 잡고 있을 그 손. 다시 한번 그 손을 꼭 잡고, 신앙의 여정을 걸어보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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