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군일 주일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할 때 우리는 먼저 상을 차립니다. 그 정성에는 손님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하는 식탁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친교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생명의 상을 차려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경에서 상과 잔치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은 왜 잔치를 베푸실까요? 성경에서 ‘상’과 ‘잔치’는 그저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행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과 친교를 상징합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친교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잔치는 관계와 친교, 배부름과 생명 등 하느님의 복을 나타냅니다. 제1독서에는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임이 잘 드러납니다.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먼저 준비하시고 죽음과 눈물과 수치를 모두 제거해 주시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잔치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 넓은 구원의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려 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돌보심 속에서 드러납니다. 시편 23장 5절에서는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합니다. 이는 위협 속에서도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시고 먹이시며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상은 하느님의 보호와 환대와 친교를 상징합니다. 이 상을 차려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의 식탁에서 당신 백성을 먹이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이야기로 비유하십니다. 임금은 먼저 잔칫상을 마련한 뒤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다른 이들은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임금의 초대, 곧 하느님의 초대보다 자기 일과 관심사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마음과 힘을 다 쏟으며 일과 책임, 계획과 걱정에 매여 하느님의 초대를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어 그분의 부르심에 선뜻 응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주 세상의 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겨 하느님께서 차려 놓으신 잔치의 기쁨을 놓치곤 합니다. 초대된 이들이 거절하자 임금은 종들에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라고 합니다. 이에 많은 사람이 잔치에 들어옵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애와 은총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잔치를 마련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풍요로움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필리 4,19 참조) 그런데 복음은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이 예복은 세례로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이 받은 은총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을 상징합니다. 예복은 하느님의 초대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우리를 초대하시지만,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생명의 식탁으로 초대받습니다. 혹시 우리는 그 초대를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께서는 먼저 생명의 식탁을 차려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의 예복을 입고 주님의 식탁으로 나아갑시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10-11 제351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7주일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임자는 두 번 나오고, 그가 보낸 종들도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무려 여섯 번 나옵니다. 주인의 자리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만 잠깐 비칠 뿐, 한복판은 온통 소작인들의 차지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결국 소작인들의 이야기, 곧 우리 이야기입니다. 포도밭은 이미 다 마련돼 있었습니다. 주인이 포도밭에 울타리를 두르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습니다. 소작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할 일은 가꾸고 거두는 일뿐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 대목 앞에서 주인은 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놀라워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의 은총, 어머니의 기도, 먼저 믿은 이들이 흘린 피, 오늘 아침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숨결까지 포도밭은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필로칼리아의 은수자 마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공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고. 그러므로 소출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멀리 떠났습니다. 이 떠나심이 비유에서 가장 신비로운 대목입니다.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하느님께서 자리를 옮기신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그 긴 시간은, 사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비켜서신 자리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되 감시하지 않으시는 사랑, 하느님의 비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의 자리에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비극은 아주 짧은 한 문장이었습니다.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맡았다’는 말이 ‘차지하자’는 말로 바뀌는 데는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필로칼리아의 스승들은 이것을 소유의 생각이라 부릅니다. 맡겨진 것을 제 것으로 셈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은 이미 살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직분, 내 성당이라고 말할 때, 그 ‘내’라는 한 글자가 어느새 울타리에서 감옥으로 바뀌곤 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종이 맞아 죽자 더 많은 종을 보내고, 그들마저 죽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힘을 키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더 약한 이를 보냅니다. 무장한 군대가 아니라 아들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 앞에서 더 강해지시는 분이 아니라 더 약해지시는 분입니다. 아들은 포도밭 밖으로 내던져져 죽임을 당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이 순서를 일부러 그렇게 적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참혹한 이야기 끝에 시편을 읊으십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버려진 아들이 곧 버려진 돌입니다. 그리고 그 돌은 앙갚음하지 않고 기초가 됐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시는 장면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열매를 내지 않는 포도밭은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포도밭이기를 그만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어떤 민족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택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새 소작인은 멀리서 오는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손을 펴는 바로 그 소작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칠 소출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제때에’ 바치라고 합니다. 수확에는 때가 있습니다. 용서에도 때가 있고, 화해의 전화 한 통에도 때가 있고, 병상에 계신 분을 찾아가는 일에도 때가 있습니다. 소출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그대로 참된 것, 옳은 것, 사랑스러운 것 하나를 마음에 품고 그대로 사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미사성제 때 빵과 포도주를 제대에 올립니다. 그것은 밀밭과 포도밭의 소출입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우리 손으로 조금 매만져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미사는 소작인들의 예식입니다. 그러니 소작인으로 산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신 그분께서 오늘도 우리 손에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제때에, 기쁘게 돌려드립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8면

[말씀묵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순교자들이 피로 증거한 신앙의 모범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특별히 더 결심하는 날이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고귀한 정신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에서 ‘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거절하다’, ‘거부하다’ 또는 ‘부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지요. “믿음으로써,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파라오 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였습니다”(히브 11,24)라는 구절에 사용됩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태 26,70)라고 할 때도 쓰이지요. 모두 어떤 주장이나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용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여기서 ‘버리다(아르네오마이)’는 물건이나 쓰레기 따위를 내다 ‘버린다’고 할 때처럼 물질적 차원에서 소유를 포기하는 버림이 아니라, 내적인 차원에서 결코 내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르네오마이는 단지 부정이나 거부 의사만 표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관계의 단절까지도 나아갑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어 완전히 인연을 끊어 버리는 거지요. 이때는 그냥 버리다가 아닌 ‘저버리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묵시 2,13) 이 ‘저버림’은 존재론적으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와 맺어왔던 관계 자체를 끊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가 표현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아예 ‘벗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옛것을 ‘버리고’ 옛 악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건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는 존재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따르려면,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와 회심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많은 소유 중에서 어느 정도만 덜어내는 ‘선택적 버림’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온전히 비워내지 못하는 건 양다리를 걸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버림’이란, 그냥 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 버림’입니다. 남김없이 비워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완전하게 끊어 버림은 단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버리고, 또 버려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버리는 일은 결코 일생에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공관복음 중에서 루카복음에만 유일하게 삽입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날마다”(루카 9,23)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날마다’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게 노력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만 내 고집을 꺾는다거나 이런 조건에서만 내 뜻을 접는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날마다’ 그래야 합니다. 어제 버린 나를 오늘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내일도 버릴 수 있어야 하지요. 자신을 버리는 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자신을 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처음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처럼 그분을 따르십시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예전 신학생 때 만난 한 아이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일일 노동자가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저 같으면 “그래, 꼭 갚아라”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예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형제적 교정’입니다. 오늘날은 충고나 조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는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 앞에서 쉽게 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난하고 험담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를 단죄하기보다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바라십니다. 사람을 포기하기는 의외로 쉽습니다. 많은 경우 ‘괜히 말했다가 관계만 더 나빠질 텐데’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침묵하거나, ‘어쩔 수 없어’ 하며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침묵이 사랑이라고 여기지만, 기다림에서 비롯된 침묵은 사랑일 수 있어도 두려움과 무관심에서 나온 침묵은 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면 형제를 잃고 맙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악한 길을 가는 이에게 그 잘못을 일러 주어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바로잡는 일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책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때로 충고하고 권고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과 함께 만나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를 망신 주거나 처벌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그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심지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도 그를 단죄하고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방인 가나안 여인과 세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때 우리는 그 형제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얻는 것”(마태 18,15 참조)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바로 ‘듣는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들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는 악인이 경고의 말을 들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화답송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라”(시편 95,7-8 참조)고 노래합니다. 사랑은 무딘 마음에서 자라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형제를 향한 사랑도 싹틉니다. 복음에서 ‘듣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형제를 바로잡는 일이 일방적인 판단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고 마음을 여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형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시는(마태 18,14 참조) 사랑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허물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잘못한 형제를 품을 수 있습니다. 형제를 얻으려는 사랑은 먼저 우리를 품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무뎌지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잘못한 형제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잘못한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그의 회개와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아주 힘든 고백을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환영이 아닌 조롱과 모욕이었습니다.”(예레 20,7-8 참조) 그는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침묵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대로 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과 주님이 이끄시는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내 생각보다 하느님의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말씀을 시대 앞에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인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뒤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인간적으로 보면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베드로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메시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애정이 하느님의 뜻보다 앞선 것입니다. 이 지점이 한국교회가 넘어야 할 커다란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자녀가 가야 할 길을 대신 정해 주기도 합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생각을 교회의 뜻처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여라.”(마태 16,23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아주 정확한 해답을 줍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분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감정적인 열심만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요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로칼리아」(사막 교부들의 내적 고요 생활 발췌 글)의 ‘마음지킴(깨어있음)’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마음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동의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분노와 욕심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내가 하나가 되거나,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자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지킴은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세상의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생각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지킴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내 뜻을 하느님의 뜻 안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듣게 해주십시오.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세요.” 그때 조금씩 알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때로 어려워도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하며, 겸손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0주일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상대방이 사랑을 주지 않음에 크게 슬퍼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 친구 등의 사랑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고 울며 말합니다. 그러나 이때 자기 사랑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사랑인지, 욕망인지를 말입니다. 사랑이 욕망으로 흐를 때, 상대를 소유하려는 집착이 생겨납니다. 욕망의 본질은 자기 안의 불안을 달래는 데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달래줄 수 있는 상대가 늘 내 곁에 있어야 하고,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상대를 소유하려고 할 때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기 필요만을 청하고 있다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을 경험해도 이를 인정할 수 있고, 그 인정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때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필요를 얻으려는 가짜 사랑인 욕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상대를 통제하려 하고,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려 합니다. 욕망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사랑은 상대를 자유롭게 합니다. 욕망은 확인을 요구하고, 사랑은 바라보고 존중합니다. 이렇게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진짜 사랑을 보여주는 한 여인을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방인 지역인 이곳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알아보며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고, 종교적으로도 적대적인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 이방인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여인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침묵을 통해 여인의 믿음이 점차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소리치다가, 예수님께 가까이 와 엎드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 응답합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침묵이 곧 거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3)라고 말하면서 여인의 고통보다 자신들이 겪는 불편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도움의 목소리가 아닌 귀찮은 소음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제자였지만 그분의 자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자비를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성경에서 개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흔히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표현에 분노하거나 물러날 수 있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라면서 물러나지 않고, 더 큰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자녀들이 먹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빈약하지 않다고 믿은 것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딸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제자들은 자주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책망받지만, 이 여인은 칭찬받습니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기에,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바로 진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욕망이 아닌 사랑. 그 사랑은 어떤 상황이든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을 때 완성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8주일

복음서가 전해 주듯이 예수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렀을까요?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뒤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침묵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을 보고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배고픈 사람들, 아픈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태 14,14 참조) 그 연민이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슬픔 속에서도 사람들의 아픔을 먼저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자신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온유하고 부드럽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연민은 예수님을 군중에게 다가가게 했고,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며, 제자들의 계산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자체보다 그 기적을 낳은 예수님의 연민에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특별한 사람만이 실천하는 거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배움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산책을 하다가 맨발의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르신은 맨발 걷기를 하려고 쉼터에 신발을 벗어두었는데 관리인이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바람에 신발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전철을 타고 집에 가야 하는데 맨발로는 갈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저는 제 신발을 벗어드렸습니다. 산책로에서는 맨발이 괜찮았지만, 수녀원까지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걸어가려니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날 저는 맨발로 수녀원까지 걸으며 깨달았습니다. 연민은 반드시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편을 내 불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연민은 멀리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삶 속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 사랑입니다. 연민은 연약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곧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성경에서 연민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라하밈(rachamim)’과 복음서의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품고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부족한 현실에 머문 제자들의 시선과 배고픈 군중을 보시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참조)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시선 사이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일깨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대개 작지만 깊은 연민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연민의 실천은 때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오늘, 교회가 전해야 할 가장 큰 힘은 예수님의 연민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인간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능력은 없지만,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의 불편을 내 불편으로 받아들이는 연민은 오늘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작은 연민의 순간들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고,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를 닮아 갑니다. 예수님의 연민이 살아 있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오늘 말씀들은 ‘참으로 값진 것을 알아보는 눈은 어디서 오는가’를 제시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위해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는 지혜를 제안합니다. 주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고 물으십니다. 솔로몬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듣는 마음’을 청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하느님의 뜻대로 이끌 수 있는, 듣는 능력입니다.(1열왕 3,5.7-12 참조)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은 아드님과 같은 모습을 닮아가는 것(로마 8,29 참조)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알아봐야 할 참된 가치의 기준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솔로몬이 청한 ‘듣는 마음’과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는 결국 하나로 만납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과 가라지 비유의 결론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값진 진주 하나를 찾아낸 상인의 공통점은 ‘가진 것을 다 팔아’(마태 13,44) 그것을 산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 교부의 해석에 따르면, 밭에 묻힌 보물은 밭으로 비유되는 성경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그것을 캐내는 일은 곧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영적 독서의 수고’를 가리킵니다. 한편 눈여겨볼 부분은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과 달리 이미 ‘좋은 진주를 찾고 있던 상인’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어떤 이에게는 뜻밖의 은총으로, 어떤 이에게는 오랜 추구 끝의 응답으로 주어지지만, 그것을 알아본 뒤의 반응은 동일합니다. 그 반응은 기쁘게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보물을 다시 숨겨두고 ‘기뻐하며’(마태 13,44)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손익 계산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그물 비유(마태 13,47-50 참조) 역시 성장 시기의 교회 안에 선한 이와 악한 이가 함께 있음을, 그리고 최종 판별은 종말에 이뤄짐을 말합니다. 그물이 지금 당장 물고기를 가려내지 않듯, 교회 역시 지금은 심판자가 아니라 그물의 역할, 곧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옛 계약의 지혜와 새 계약의 은총을 함께 간직하고 나눠 줄 수 있는 사람 곧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의 새로움에 눈뜬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들을 관통하는 하나는 ‘보물을 알아보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보물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흐려진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맑게 하는 그리스도교 수련 고전이 「필로칼리아」인데, 여기에서 교부들은 정념을 정화하고, ‘예수 기도’로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게 함으로써, 점차 일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는 눈은 은총으로 주어지고, 그 눈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내어놓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듣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이웃 사랑,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사실 밭을 사고 진주를 사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그 밭 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데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나는 지금 내 삶의 밭을 갈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밭에 묻힌 보물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우연히 만난 보물인가, 오래 찾던 진주인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의 눈’을 주신 주님께 그 마음을 청합시다. 세상의 값어치와 하느님 나라의 값어치를 혼동하지 않고, 참된 보물(그리스도와 복음 선포)을 알아보았을 때는 손해라 여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도 주님께 청해 봅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마태오복음 13장은 일곱 가지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인 ‘하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이라는 완전수에 담아내고 있지요.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상인, 그물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제시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중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입니다.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는 동안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내용이지요. 가라지와 하늘 나라는 어떤 의미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요? ‘가라지’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은 생육 기간에는 밀과 생김이 흡사해 분간하기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또한 밀과 같은 계절에 열매가 익기 때문에, 추수 때 곡식이 섞이기는 더욱 쉽지요. 하지만 맛은 쓰기 때문에, 밀에 섞였을 경우 밀가루의 맛을 훼손한다고 하여 ‘독보리’라고도 불립니다.(김영숙, 「성경에 나오는 식물들」 참조) 복음에 의하면, 밀의 품질을 떨어뜨릴 가라지가 자라고 있으니, 종들은 그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대로 두게 하지요. 종들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마태 13,29) 모를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만약 집주인이 질 좋은 밀을 얻으려고 했다면, 가라지는 그냥 뽑아 거두어 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복음은 그 점이 ‘하늘 나라’에 비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 복음서는 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이 비유는 세상에 선과 악이 왜 항상 공존해야 하는지 묻게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 걸까요? 거룩한 성교회 안에는 왜 여전히 위선과 죄인이 존재할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그 죄악을 없애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실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만약 하느님께서 죄악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밀 또는 가라지‘만’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모두 ‘함께’ 자라도록 하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밀이 긍정성이라면 가라지는 부정성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부정성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은 것이지요. 철학자 한병철은 「신에 관하여」에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제거하려 드는 긍정성의 사회에서 산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은 세상을 마치 무균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부정성을 제거한 나머지 세상을 온통 매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보기 싫은 것은 아예 없애거나 안 보려고 하는 이러한 태도는 세상을 긍정성으로만 획일화시킵니다. 이를테면,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는 타인의 저항을 줄이고 부정성이나 아픔을 일으킬 만한 맞수를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며, 끊임없는 ‘좋아요’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거지요.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오히려 깨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깨짐’은 아픔이라는 부정성에 의해 발생하고요.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가라지의 비유는 부정성이 오히려 우리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 내면의 가라지를 발견했을 때, 비록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겪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하느님이 왜 가라지를 밀과 함께 자라도록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모아들일지, 거두어서 태워 버릴지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확 때, 곧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나의 가라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우리를 당장 거두시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투성이인 나와 너, 우리지만,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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