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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돈 수녀의 주의 기도 해설 묵상] 8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정하돈 수녀·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력일 2017-08-31 수정일 2017-08-31 발행일 1994-07-24 제 191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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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문자 그대로가 아닌 의미에서 이웃의「잘못」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 자기 눈에 있는「들보」에 몰두하는 사람은 형제의 눈에 있는「티」를 크게 볼 수 없다(루가 6, 41 이하 참조).『우리가 용서하듯이』-이 선언, 맹세에서는 우리가 이미 저지른 잘못들을 다시 좋게, 회복시키려는 의무에 대해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오 5, 23 이하), 또 관장에게로 가는 동안에 적수에게서 풀려나도록 힘쓰라(루가 12, 58 이하)고 명령하셨을 때에 물론 예수는 이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셨었다.

◆하느님 용서가 바탕

주의 기도의 선언 형식에서는 우리가 잘못해서 피해를 준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잘못한 이」,「빚진 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고 우리의 사랑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이웃에게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이는 하느님이 그에게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마르코 11, 25:마태오 18, 23~24). 마태오는 자신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의 바탕임을 강조하고 있다. 큰 불의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하지 않으며(루가 6, 27 이하:마태오 5, 42), 상황에 따라서는 하루에 70번을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 4)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 되기 위해 좋은 아버지와 같이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만 한다. 이처럼 누구든지 먼저 형제에 대한 관계를 선명하게 정리해 놓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비는 그의 용서는 진실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느님께서도 그런 청을 들어주실 리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용서를 남에게도 베풀어 줄 용의를 늘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바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이 용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용서의 간청은 이처럼 고차원의 행위, 창조적인 선, 무반응의 용서를 요구한다. 마침내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예수는 원수 사랑 안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위한 시금석을 발견하셨다.

「우리가 용서하듯이」-이 후문장은 앞문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후문장은 하느님의 용서하시려는 자세를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하느님의 용서가 인간의 노력이나 성과, 그 조건 여하에 달려있단 말인가.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의 거룩함을 보여주셨던 제자,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을 지고 있었음을 안 제자가 구제의 희망없이 잃어버려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무죄선언」을 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판을 받아들이고, 합당한 책벌을 받아들여 보속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용서와 벌의 면제에 대한 대사(죄를 잊어줌)의 희망을 가지는 자들은 적어도 희망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을, 즉 우리도 그 앞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주어야 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나부터 먼저 용서해야

하느님의 용서가 이미 제자에게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용서가 언제나 조건적인 것이다. 이 용서는 최후 심판 때에「회개의 열매들」(루가 3, 8)을 보게 될 때에 최후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언제나 죄의 용서를 입술로 뇌이며 청할 때『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도 용서해 줌과 같이』-마음 안에 이런 각오를 가지고 빌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우리가 용서해야만 하는 의무는 바로 자기 자신이 받은 용서 안에 뿌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용서가 주어졌음과 동시에 용서할 자세를 선언할 수 있었던 제자들에게 용서의 간청기도를 권장한 것이다.『빚진 자의 비유』(루가 7, 41 이하)는 선사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며,「향유를 바른 죄녀 이야기」(루가 7, 36~47)는 이 진리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예수의 큰 사랑을 체험한 세리 자케오의 큰 회심과 각오(루가 19, 1~10) 또한 우리에게 같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값진 진주 보화를 찾아 얻은 사람에게는 당연스럽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마태오 13, 44 이하) 큰 기쁨이 주어진다.

죄에서 해방된 자만이 죄인의 회개에 대해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왜 예수께서 죄인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실 수 있는지(루가 7, 36~47)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죄의 용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그 얼마나 큰「불쾌함」속에서 나날을 살아갈까.

용서를 자기 자신의 노력의 결실로 기대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그처럼 요구할 것이며, 기대하는 성과를 얻기 전에는 죄인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고맙게도 예수는 뉘우치는 회개로 만족해 하신다.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의 회개에 대해 함께 기쁨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다시 찾은 양과 다시 찾아 얻은 동전에 대한 기쁨을 묘사한 이중 비유(루가 15, 4~10)를 말씀하셨다.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루가 15, 11~32) 역시 그들에게 이야기하신 것이다.

주인이 일거리가 없는 가난한 품삯꾼에게 장시간 일을 시키고 난 뒤 하루 전체의 품삯을 주어도 그 누구도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마태오 20, 1~15). 이미 받은 용서는 함게 기뻐할 수 있게 해주고 또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해준다.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이 첫째이고 또한 우리의 모든 용서하는 행위의 영혼이다.

◆기도·행동으로 실천을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우리가 용서해 주듯이』라고 감히 선언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기 대문에 최후적인 용서를 또한 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이중 용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문 안에서 용서의 간청은 다만 기도로써 바쳐질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누가 자신의 죄와 잘못에 대해 말 듣기를 좋아할까? 그 누가 자신의 잘못을 즐겨 이야기하며 혹은 다른 이가 자기 죄를 판단하는데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거나 무관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주의 기도 안에서 우리들 서로 간의 죄와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하는 기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거듭거듭 경험하지 않는가. 하느님께 내 죄의 용서를 빌 때마다 내 마음과 생각 속에서 아직도 진심으로 용서,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사건이나 상황들까지도)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 용서와 화해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한 내 기도는 참된 기도가 되지 못함을 알 때에 고통마저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혹은『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하는 간청들처럼『우리 죄를 용서하소서』하고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구태여 생각하거나 큰 부담을 가지지 않은 채 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간청기도에서만은 후문장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는 것과 하느님의 용서를 비는 것이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간청기도를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었음과 같이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보다 진실된 삶 중요

하여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이웃에게 대한 우리의 용서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마태오 6, 14~15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죄에 구속 받는 생의 존재와 자신의 삶 안에서 결코 죄를 부정할 수 없다. 이미 다른 간청 안에서도 본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과 이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하느님에게 죄를 지음과 인간에게 죄를 지음, 파트너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공동체에게 죄를 짓는 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죄이다.

「신학적인 죄」와「인간적인 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행동하며, 함께 생활하고 혹은 서로 간에 잘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진중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이 참 인간이 되셨다는 것과 하느님을 하늘에서 말고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간 상호 간의 용서 안에서 진정 알게 될 것이다.

◆용서는 곧 사랑·생명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같이 풀 수 없이 깊은 관련을 가지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한 하느님이신가? 무엇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탕자의 비유」안에서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느님께 있어 크게 경축할, 축제를 벌일 만큼 큰 기쁨이다. 하느님은 남을 속이는 세리들과 창녀들에게 그리고 경건한 자들보다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더 가까이 계심을 예수의 태도 안에서 잘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자기 신하에게「빚」을 탕감시킨 왕의 비유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참아주지 않고 요구한 것을 알게 된 왕은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어 버리지 않았던가.

우리는 성서 안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찾을 수 있다. 언제나 이 모든 이야기 안에서 중점은 하나이다:하느님은 생명이 보존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추상적인 규정이나 자신들의 과거 때문에 좌절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전통 안에서 이를「자비」라고 한다.

이 자비는 제일 먼저「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베풀어진다. 자비는 완전한 자에게가 아니라 가장 변두리에 있는 자들, 좌절 당한 자들, 규정을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바로 이처럼 자비로운 하느님이다.

우리는 쉽사리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 얼마나 종종 법 선언이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일까. 비록 재판장에서 유죄 선언, 판결 선언을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그룹 안에서, 학교에서 또는 직장에서까지 법이 지닌 이런 위험성 때문에 우리는「법보다도 용서」를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움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법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임시적인 의로움을 줄 뿐, 그것은 결코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움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법은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용서는 사랑이며 사랑의 불꽃을 당겨준다.

나는 몰랐었다. 그러니 내겐 큰 잘못이 없다. 나는 죄가 없다. 우리는 이런 논증을, 자기 합리화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알지 못하면 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죄가 없을까? 그러면 아는 사람만이 용서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아니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필요한 것일까. 우리 모두 서로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를「용서하고 또한 용서 받아야」만 한다.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친 예수는 죽음 앞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즉 용서가 생명을 준다는 것을.

정하돈 수녀·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