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서울대교구 백민관 신부 (4)

정리=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2-03-03 수정일 2002-03-03 발행일 2002-03-03 제 2288호 1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마침내 사제품 … 첫임지는 논산 포로수용소
“역경속에서 희망주시는 하느님”
백민관 신부는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고 함께 놀기를 즐겨했다.
어머님을 뒤로 하고 내려온 나는 동료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 교실에 수용됐다. 얼마 뒤에 교수들이 도착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거주지를 옮겨 서귀포에 있는 공소로 옮겨 비로소 수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한 20여명 정도였던 우리는 교우 집에 댓 명씩 할당을 받아 잠을 자면서 공소 건물에 모여 수업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한라산에 공비들이 출몰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마을 주변에는 돌로 담을 쌓아 4개의 문을 만들어 드나들곤 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여자들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었다.

젊은 장정들이 도착하자 주민들은 우리들을 반겼다. 남자들이 없어서 여자들이 공비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매일 밤 보초를 서곤했는데 우리들이 도착한 다음에는 신학생 3명, 주민 2명 등 5명으로 조를 짜서 밤을 새웠다.

하루는 공비가 마을로 내려왔다. 주민들은 마을 곳곳에 몸을 숨겼다. 곳간이든 나무 위든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숨었다. 공비들이 사라진 후 인원 파악을 하는데 신학생 한 명의 종적이 묘연했다. 밤을 새워 마을 곳곳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걱정을 했다.

아침 동이 트자 사라졌던 신학생이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공비들이 우리들과 주민들을 인질로 잡고 자기를 찾고 있는 줄 알고 밤새도록 숨어있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우리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를 지내다가 다시 부산으로 올라왔다. 소신학교는 밀양에 대신학교는 부산 영도의 공소에 자리를 잡았다. 공부보다는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부산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한 나는 마침내 1952년 사제품을 받았다. 평양교구 소속인 나는 메리놀회 신부들이 사목활동을 하고 있는 곳으로 발령을 받았고 첫 임지로 간 곳이 논산에 있는 인민군 포로수용소였다.

수용소와 논산읍 사이에 있는 은진공소에서 거주하면서 수용소로 출근했는데, 출퇴근은 국군의 석탄 수송 트럭을 타고 다녔다. 석탄 위에 서서 출퇴근하는 일 뿐만 아니라 수용소 안에서의 일도 아주 고된 것이었다. 그 때 건강을 많이 해쳤다.

얼마 뒤 수용소가 해산되고 또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교구청으로 갔다. 가회동본당 보좌로 발령이 났고, 사제로서 비로소 안정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품 때 내게는 소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명동성당처럼 고딕양식을 높은 종탑이 있는 성당에서 살았으면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회동본당에서는 두 가지가 모두 불가능했다.

옛날 왕실 서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을 성당으로 사용했고 보좌신부 방도 따로 없었고 임시가옥에서 생활해야 했다. 20가구에 신자수가 100명 남짓, 재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알리는 공지사항도 종이 살 돈이 없어 신문지에 적어 붙여야 했다.

제일 큰 문제는 성당을 짓는 일이었다. 당시 25살의 젊은 나는 건축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궁리를 거듭하다가 교구청에 가서 상의를 했지만 교구에서도 성당 건축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투덜거리며 성당으로 돌아오다가 눈이 확 뜨이는 공고문을 봤다. '주한미군원조단'에서 지원 신청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앞 뒤 없이 무작정 들어가서 담당 장교를 찾았다. 천행으로 중위인 담당자가 가톨릭 신자였다.

자기 부대에 할당된 것이 3건이었는데 2건은 개신교 목사가 이미 신청을 해 받았고 한 건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신자수가 500명이라고 허풍을 떤 뒤 서류를 제출키로 했다.

문제는 건축 설계 도면이었다. 주교님의 서명을 받고 서류를 만들었지만 도면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신자 가운데 서울대공대 1학년생을 찾아 성당 그림을 그려 갖다 주니 장교가 웃었다. 이른바 청사진이라고 불렀던 제대로 된 설계도면을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한 신자가 3개월 뒤 미국을 가는데 그 안에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영세를 할 수 없겠냐는 것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였다. 나는 『영세는 나중에 하고 도면부터 그리자』며 닥달을 했다. 다행히 그는 이미 미군 부대에서 여러 차례 유사한 도면들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사흘밤을 새서 도면을 완성해 제출했고 견적도 넉넉하게 신청했다. 한달 뒤 미8군에서 통보가 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부대로 들어가니 2만9000달러가 나왔다.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가 없었던 나는 교구청으로 갔다.

『큰 일 했네. 그 돈이면 성당 3개 짓고도 남을걸』

본당에 돌아와 소식을 전하니 교우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교우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벽돌을 찍는 일부터 시작해 성당을 짓는 일에 직접 몸으로 나섰다. 그렇게 지어진 성당이 바로 지금의 가회동성당이다.'

정리=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