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서울대교구 백민관 신부 (5)

정리=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2-03-10 수정일 2002-03-10 발행일 2002-03-10 제 228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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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렬 대주교 후원으로 벨기에 유학길에 올라
“루르드 순례하며 시험 통과 기도”
원조금을 받아 성당을 짓다가 다시 발령이 났다. 이번에는 소신학교, 즉 성신중고등학교였다. 내 두 번째 소원인 공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이 이뤄졌다.

2학년 담임을 맡고 라틴어와 영어를 강의했다. 그야말로 『가르치면서 배운다(Docendo discimus)』라는 라틴어 격언처럼 라틴어의 대가인 허창덕 신부님 밑에서 공부하면서 가르쳤다. 당시 함께 가르치던 선생님 중에는 윤공희 대주교도 있었다.

2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다가 유학을 가게 됐다. 원래부터 유학을 하고 싶었지만 평양교구 출신인지라 후원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려웠던 터라 나는 매우 기뻤다. 내가 유학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대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후에 광주대교구장을 지낸 한공렬 대주교 덕분이었다.

내가 학생 때 한대주교는 윤리신학을 강의했었다. 1학년부터 부제반까지 모두 한 강의실에서 윤리신학을 배웠는데 첫 시험에서 나는 답안지를 모두 라틴어로 적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교과서의 라틴어 원문을 모두 외워야 했고 시험에서도 외운대로 라틴어를 쓰는 것이 더 쉬웠던 것이다. 한 대주교는 라틴어 답안에 깜짝 놀랐고 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유학을 가게 된 곳은 벨기에 루뱅대학교였다. 네덜란드 방언인 플래밍어와 불어 두가지가 국어였고 강의도 이 두 가지 언어로 이뤄졌고 나는 불어로 공부하기로 했다.

첫 강의를 들어가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큰일이었다. 당시 나보다 먼저 루뱅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분들 중에는 최익철 신부, 최석우 신부 등이 있었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루뱅에 집 한채를 전세 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러 기숙사로 삼고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이국땅에서의 생활에 위로가 됐지만 어학을 배우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됐다.

하루는 현지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대사관에서 영어로 된 홍보영화를 빌려 상영했다. 영어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다시 불어로 해설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현재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이 일을 맡았다.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치고 한 교우의 초청으로 그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됐다. 우리를 초청한 그 분이 『어제 해설을 했던 분이 프랑스인인 줄 알았다』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장익 주교는 그야말로 어학에 있어서는 천재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불어를 제대로 모르니 시장보는 일조차 힘이 들었다. 거스름돈을 받으려 해도 돈 계산이 안돼 그저 주는대로 받아와야 했다. 그러니 강의를 알아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나를 살려 준 것은 어느 프랑스 수녀님이었다.

내가 수업 시간에 제대로 강의를 받아 적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수녀님이 내게 왜 안 적느냐고 묻고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하니 당장 『내일부터 먹지와 종이를 사오라』고 일러주었다. 먹지를 깔고 필기를 하니 먹지 밑에 수녀님이 적은 글들이 깨알같이 함께 적혔다. 하지만 워낙 휘갈려 써서 수녀님의 글을 알아보는데에만 한달이 걸렸다. 어쨋든 내게는 구원이었다.

시험도 학기마다 보는 것이 아니라 연말에 치러지기 때문에 그것도 다행이었다. 시험은 필기가 아니라 구술로 치러졌다. 다행히도 그럭저럭 웬만한 과목은 통과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학철학만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워낙 잘 모르는 분야였고 담당 교수인 노신부가 원체 무뚝뚝한 분이어서 한 번 묻고 잘 모르면 그걸로 끝이었다. 낙제였다.

방학 3개월 동안 다시 준비해서 재시험을 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준비해도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도 뿐이었다. 매일 성당에 들어가 묵주기도를 했지만 그 정도의 기도로는 「약했다」. 루르드를 순례하기로 했다. 루르드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기적수에 몸을 담가 성모송을 3번 바치고 어떻게든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루뱅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그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위스를 다녀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크게 외쳤다. 『됐다!』.

다른 교수가 임명됐다. 몇 마디 나누자마자 그는 내게 『말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겠어요』하고 위로를 건넸다. 교수의 도움을 받으며 아는 것을 대답했고 교수는 『60점이면 되죠?』하더니 통과시켜 줬다. 나는 다음 여름 방학에 파리에서 어학연수를 3개월간 집중적으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유학생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석사 과정까지 루뱅에서 마친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지만 2년 뒤 귀국해야 했다.

1956년 벨기에 유학 당시 함께 공부한 동료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4번째가 필자.

정리=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