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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서울대교구 백민관 신부 (6)

정리=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2-03-17 수정일 2002-03-17 발행일 2002-03-17 제 229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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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경본 등 개혁에 한몫”
어려움 많았던 개신교와 성서 공동번역
학문적 기반위해 가톨릭대사전 발간 추진
영어 라틴어 불어 독어 등 여러 언어 습득 큰 도움
귀국해서 신학교에 교수로 온 것이 1963년. 하루 온종일 강의 준비를 해도 막상 강의를 하려고 하면 막막했다. 그럴 때 유학시절에 노교수가 한 말이 생각나곤 했다.

『대학교수는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10년이 넘어가면 자기가 아는 것만 가르친다. 그리고 노교수가 되면 꼭 필요한 것만 가르친다』

오랫 동안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분의 이런 말씀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당시에는 내가 가르치는 것이 참므로 무엇인지도 모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제자들을 만나면 당시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이 구술시험이었다고 한다.

유학 때, 유럽에서는 필기 시험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두 교수와 학생이 일대일로 마주 앉아 구두로 시험을 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필기시험보다는 구술시험이 부담도 덜 되고 여러 가지로 손이 덜가는 듯해서 나도 처음 한 2년 동안은 구술로 시험을 보게 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서 대답을 유창하게 잘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 번 하니까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학생들을 만나 시험을 보니 저녁에는 뒷골이 당기고 머리가 아팠다. 학생마다 일일이 다른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다음에는 학생이 들어오면 『공부한 것을 모두 말해보라』고 지시했다. 학생들은 당황스러워했다. 몇 번을 해보다가 나 자신도 그것이 고역이었던 터라 결국은 다시 필기시험으로 돌아왔다.

백민관 신부의 사제생활은 후배 신학생들에게 진정한 사제의 삶과 길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삶이었다. 사진은 1986년 7월 6일 시종직 및 독서직을 받은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
당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고 있던 때였다. 공의회에 즈음해서 각 지역교회마다 쇄신의 바람이 불었다. 1965년 2월 교회의 모든 용어를 현대화하기 위해 가톨릭공용어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내가 총무로 임명됐고 김남수 주교, 김창렬 주교, 허창덕 신부, 이문근 신부 등 성직자 5명과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 마해송 선생 등 평신도 5명, 도합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가톨릭의 주요 기도문인 이른바 「12단」의 용어를 개정했다.

그 작업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사경본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문과 미사경본을 고치는데 걸린 시간이 3년 남짓, 초안 원고를 전국에 회람해 의견을 구하고 보완하면서 모든 교회 용어들을 현대화했고 주교회의에 상정해서 승인을 받음으로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와 개혁이 이뤄졌다.

이어진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와의 성서 공동 번역이었다. 당시에 가톨릭교회에서는 완전한 성서 한글 번역본이 없었다. 때마침 교회 일치 바람이 불어와 이 작업을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진행하기로 했고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만나서 공동번역 추진을 제안했다.

공동번역은 시작부터가 어려웠다.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워낙 많은 종파가 있어서 일일이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복잡했다. 결국 장로교, 감리교 등 주요한 교단들이 우리와 합의를 이루고 각각 대표 학자들을 파견해 1968년 1월 「성서번역 공동위원회」가 조직됐다.

원래는 신구약 성서 각 권마다 번역자들을 전담시켜야 하지만 워낙 성서 전공자들이 모자랐던 때인지라 신약과 구약 두 파트로만 나눠서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가톨릭의 경우에는 성서 전공자가 부족했다. 신약 파트는 내가, 그리고 구약파트는 선종완 신부님께서 대표로 작업에 참여했다.

우리로서는 성서 번역 작업이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왜냐하면 교회 용어 현대화를 위해 이미 기도문과 미사통상문을 개정했지만 성서가 번역되지 않아 미사경본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작업을 하다 보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러던 중 1971년 4월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대한성서공회의 발행으로 간행됐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77년 4월 부활절을 기해 구약성서 1997면, 제2경전 328면, 신약성서 505면 등 총 2420면에 달하는 공동번역성서가 간행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 안에서 일하고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어학이었다. 나의 경우에 여러 해 동안의 유학 시절을 통해 영어와 일어, 불어, 라틴어, 그리고 약간의 독일어 등 여러 언어를 습득한 것이 가장 보람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내가 배운 것을 토대로 교회와 신앙생활에 바탕을 이루는 작업들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기도문, 미사경본, 성서 번역 등이 모두 이러한 범주에 속한 것들이었다.

다음에는 한국교회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가톨릭대사전」의 발간을 추진했다. 문교부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당시 돈 200만원을 지원금으로 받아 일을 시작했다. 그 작업은 30여년이 지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물론 외국의 백과사전을 번역하는 일은 불과 2~3년 정도면 가능하겠지만 우리 한국교회, 한국인의 입장에서 집필을 하겠다고 다짐한 터인지라 이 작업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르겠다.

그 사이에 허창덕 신부님께서 라틴어 사전을 편찬할 계획을 갖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반 정도 작업을 했을 때 허신부님이 작고하셨고 나머지 일을 최승룡 신부, 장익 주교, 성염 교수 등과 함께 작업을 해 고전라틴어연구소의 이름으로 완성했다.

정리=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