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선동열의 야구인생 30년(4)

정리 마승열 기자
입력일 2006-02-12 수정일 200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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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선판규씨와 함께. 나에게 아버지는 야구의 길을 걷게 해준 든든한 조력자이자 후견인이다.
“최고의 코치는 바로 아버지”

형 죽음 후 깊은 슬픔에

형의 죽음은 어린 나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했다. 나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착한 형을 죽게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형을 더 가까이 두고 싶으셔서 먼저 불러갔으니 오히려 기뻐하거라. 그리고 앞으로 기도중에 항상 형을 기억하며 살아라. 형은 하느님 곁에서 이곳에서 못다 받은 사랑을 충분히 받을 거야.”

어머니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우리 형제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기전까지 늘 기도중에 형을 기억했다.

나도 어머니의 이런 말씀을 듣고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형몫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갑자기 철이 들었다고 할까.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나들까지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전에는 오냐오냐하며 응석만 받아줬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졸지에 외아들이자 장남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야구만은 포기 못해

형이 죽고나서 아버지는 내게 야구를 그만두라고 하셨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야구를 시킬 수 없다는게 이유였다. 아버지는 나를 사업가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야구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운동을 했다. 학교에서 연습을 마치고 나면 티나지 않게 깨끗이 몸을 씻고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꽤나 속을 끓이셨던 것 같다.

어느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 앉혀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 말문을 여셨다.

“정 야구를 하고 싶으면 공부도 하면서 해라.”

결국 가정교사를 들이셨다. 학교에서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면 곧바로 책상머리에 앉아야 했다. 주로 영어와 수학을 보충했다. 하지만 녹초가 된 몸으로 가정교사 앞에 앉아 있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꾸벅꾸벅 졸기만했다. 아버지에게 혼도 많이 났다.

결국 아버지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다시 나를 불러 앉히셨다. “그렇게 야구가 하고 싶으냐?”고 하시길래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버지는 집 앞 공터에 일꾼들을 불러 모았다. 땅을 고른 뒤 그물망을 설치하고 조명등까지 달았다. 하루만에 훌륭한 개인연습장이 생긴 것이다.

“꼭 하려거든 최고가 돼라”

그날 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평생 잊지 못한다.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야구다. 이왕 할 바에는 최고가 되거라.”

송정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한동네에 살던 친구들과 모여 연습을 했다. 밤늦도록 팀배팅을 하고 캐치볼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아버지는 나의 코치이자 최고의 후견인이 되셨다.

나 역시도 이런 아버지의 배려에 감사하며 지금까지도 그분의 말씀이라면 거역해본 적이 없다.

정리 마승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