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어농성지 성당

11월은 위령 성월이다. 특히 1일부터 8일까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2일)’을 포함한 기간 중, 정성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연옥 영혼에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교회가 운영하는 일반적인 봉안당이나 추모 공원을 방문할 수 있지만, 많은 성지에 성인과 복자 혹은 순교자 묘역이 조성돼 있기에 성지를 찾는 것도 좋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 복자 윤유오(야고보)의 묘역에서 시작된 어농성지(전담 윤석희 미카엘 신부)를 찾았다. 밀알 하나가 떨어지다, “다 이루었다” 성지는 경기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에 자리하고 있다. 성지 주차장에서 포장도로 혹은 비포장 잔디밭 길 둘 중 하나를 따라 우측으로 올라가면 성당이 나온다. 나지막한 황토색 건물이 대지와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준다. 성당 앞에는 돌아온 탕자를 연상시키는 동상이 부친을 부둥켜안고 “아버지!”를 부르짖고 있다. 동상 이름은 ‘돌아온 탕자’가 아닌 <아버지 상>이다. 나 자신의 회개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회심을 받아들일 줄 아는 용서와 화해의 마음 또한 중요함을 깨닫는다. 2002년 봉헌된 성당 내부는 한층 더 토속적이다. 나무와 황토, 짚으로 마감된 정답고 전통적인 분위기가 이곳이 한국 순교자를 기리는 곳임을 보여준다. 벽에는 성지에서 모시는 한국교회 순교 복자 17위 중 8위의 성화가 걸려 있다. 오동회(가타리나) 화백의 세밀한 그림에 복자들의 따뜻한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성전에 들어서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너머로 걸린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십자가 모양이 아닌 탓에 처음에는 무엇인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그 어떤 십자가보다 더 깊은 묵상을 이끈다. 고상 위에 “다 이루었다”(공동번역 요한 19,30)는 말씀이 새겨져 있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며 고개를 떨구시던 바로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구원의 은총을 빛살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유봉옥(제노베파) 작가가 하나의 소나무로 5개월간 조각해 완성했다.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어야만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성지 성당에서 봉헌되는 오전 11시 미사에 참례한다. 순례 날은 마침 성지의 추수 일이다. 어농(於農)성지는 이름 그대로 농사와 관련이 깊다. 때문에 성지는 자체적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시는 하늘과 땅, 바람과 햇살, 눈과 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기도드리는 선조들의 정신을 받들고 살린다. 자연의 순리에 맞춰 피와 가라지도 뽑지 않고 약도 치지 않아, 이상기후가 더해진 올해는 아쉽게도 풍년은 아니다. 그래도 미사 중에 요즘 도시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잘 익은 벼 이삭을 받으니, 마음은 만석 부자 못지않게 풍성해진다. 오늘 미사의 영성체송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다”를 묵상해 본다. 주님 닮은 ‘좋은 땅’ 17위 어농성지는 을묘박해(1795) 순교 복자 윤유일(바오로), 신유박해(1801) 순교 복자 주문모 신부 등 17위의 순교자를 모시고 있다. 이 가운데 윤유오 복자의 묘에는 유해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묘역은 의묘다. 성지는 원래 파평윤씨의 선산이었고, 유해가 이곳에 모셔진 뒤 집안이 토지를 교회에 봉헌해 성지가 조성됐다. 1987년 성모상과 묘역 축복 미사가 봉헌되며 본격적으로 순례지로 자리 잡았다. 윤유오·윤유일 형제, 윤운혜(루치아), 윤점혜(아가타)는 모두 파평윤씨로, 여주 출신이다. 이중 윤유일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도운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생 윤유오는 형의 뒤를 이어 교리를 연구하고 기도 모임을 갖다가 이어진 박해로 순교했다. 같은 여주 출신으로 부부인 복자 정광수(바르나바)와 윤운혜는 특히 묵주를 많이 만들어 전교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복자 이중배(마르티노), 정순매(바르바라), 조용삼(베드로), 최창주(마르첼리노), 원경도(요한), 심아기(바르바라), 윤점혜(아가타) 등도 모두 경기 출신이다. 성지는 형구전시관에 순교자들의 고문이나 이동에 썼던 의자 형틀과 수레 등을 실물 크기로 전시해 놨다. 또 농사짓는 성지답게 생태 농원이 넓게 자리한다. 십자가 동산에는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묵상의 터를 이룬다. 이 외에도 성지에는 피정의 집인 ‘야고보의 별’,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 등이 마련돼 있다. ■ 청소년 위한 다양한 캠프 ‘인기’ 현양하는 순교 복자들이 비교적 젊은 20~40대인 어농성지는 2007년 청소년 성지로 선포됐다. 숙소, 수영장, 식당, 강당 등 시설을 갖춘 성지에서는 매년 여름과 겨울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캠프가 열린다. 여름 캠프는 각 단체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대관만 가능하며, 4월쯤 방학 시즌 신청을 받는다. 겨울 캠프는 자체 진행과 위탁 모두 가능하다. 참가는 성지 홈페이지 게시판에 공지된 일정에 맞춰 메일로 선착순 접수할 수 있다. 2026년 1~2월에는 초등부, 청소년, 청년 등 연령대별로 찬양 캠프와 피정, 복사 학교가 열린다. ※문의 031-636-4061 어농성지 사무실, 홈페이지: http://onong.or.kr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천진암성지 성모성당

1883년 레오 13세 교황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 있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제정하고, 신자들에게 우리 자신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권고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에 알맞은 가을날, 묵주기도의 의미를되새기며 경기도 광주 천진암성지(전담 양형권 바오로 신부)를 찾았다. 이곳에는 특별한 성모 신심이 깃든 성모성당과 성모상, 묵주기도의 길이 있다. 성모님께 감사하며 봉헌한 성당 성지 정문에서 1km쯤 이어진 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면 성모성당이 자리한다. 성모님을 상징하는 푸른빛의 큼지막한 <천주의 모친> 모자이크가 외벽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성지 내 여러 모자이크를 제작한 남용우(마리아) 작가의 작품이다. 성당은 1988년 약 1600㎡(500평)의 부지에 터를 닦아 1999년 축복식을 거행했고 리모델링을 거쳐 2016년 봉헌됐다. 가로로 긴 형태의 건물은 길이 40m, 폭 20m의 약 800㎡(240평) 규모로 1000여 명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성당은 성지의 성역화 사업 과정에서 인명 사고 없이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성모님께 봉헌됐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성모님께 깊은 공경심을 드려온 데다, 수원교구의 주보 성인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임을 이어받아 성지도 성모 신심을 더했다. 매월 첫 토요일에는 성모 신심 미사와 촛불 기도회가 봉헌된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제대 뒤 벽면 주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황금빛 모자이크가 눈을 사로잡는다.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령이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께 임하고 있다. 십자고상 좌우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자비의 예수님 성화, 열두 제자 성상,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 성화가 균형감 있게 배치돼 있다. 제대 앞에는 순교자들이 옥중에 목에 썼던 칼 형태의 함이 세워져 있다. 함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 남종삼(요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제대 맞은편과 양 측면의 벽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빛을 발한다. 제대를 바라보고 우측은 성모님의 생애, 좌측은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이 영롱하게 성당 벽면을 수놓는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함께하는 묵주기도의 길 성모성당에서 내려와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높이 22m, 폭 6m, 무게 25t에 달하는 대형 파티마 성모상이 순례자를 맞는다. 성모상은 세계 평화와 모든 민족의 신앙의 자유, 특히 남북의 평화를 기원하며 2013년 축복식을 거행했고, 2018년에는 천상모후의 관 대관식이 열렸다. 성모상 앞 묵주기도의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바닥에 놓인 십자고상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시작해 돌로 만든 묵주알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모님의 매듭이 성지를 따뜻하게 감싸는 듯하다. 분홍빛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길 위로 순례자들은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한다. 영광의 성모상과 바닥 십자고상은 다소 대비된다. 문득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떠오른다. 당대 사람들은 위엄 있는 성모님 품에 안긴 예수님이 초라해 보인다며 비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시점에서 바라보았다고 밝혔다.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예수님이 중심이 된다는 뜻이었다. 천진암의 성모상 또한 그러하다.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중심에, 그 곁에 기도하는 성모님이 계신다. 학구열 속에서 싹틔운 신앙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 계절, 천진암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맑다. 예로부터 이곳은 학문과 신앙이 만난 자리, 곧 한국 천주교 신앙이 싹튼 천진암 강학회의 현장이다. 천진암 강학은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이 주도해 성현들의 경서를 공부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선비들의 모임이었다. 1779년 권철신은 제자인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 등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신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고, 1784년 세례를 받았다. 이곳에서 천주교의 진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며 신앙을 싹틔운 한국교회 창립 선조 5위는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의 종 이벽, 권철신, 이승훈(베드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다. 성지에는 이들 한국교회 창립 선조 5위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약 119만㎡(36만 평)에 달하는 성지는 1975년부터 시작된 성역화 사업의 결실이다. 1980년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성 정하상과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복자 정철상(가롤로)의 묘도 함께 모셔져 있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성지는 매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기념미사와 행사를 연다. 이날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교리에 관한 토론을 이끈 이벽의 영명축일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이 순교자들과 함께했던 영광을 묵상한다. 순례자들은 묵주를 손에 쥐고, 천진암의 성모성당을 한 바퀴 돌며 기도한다. 그 기도 속에, 한국교회의 뿌리를 되새기고 오늘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발안성당

경기 화성시 향남읍의 작은 시골 마을. 두 팔 벌린 예수상이 환히 길을 밝혀준다.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그리고 하늘을 향한 종탑까지. 이곳이 하느님의 집임을 알린다. 성당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마치 인간의 땅에서 하느님의 땅으로 들어선 듯한 경외감이 밀려온다. 신자들이 함께 가꾼 하느님의 집은 누구에게나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이렇듯 신앙의 향기가 깊게 배어 있는 제1대리구 발안성당(주임 문상운 알베르토 신부)을 찾았다. 순교자 얼 스민 땅에 세운 지역의 큰 울타리 박해 때부터 이 지역에는 양감면 용소리 ‘양간 마을’과 요당리 ‘느지지 마을’ 등의 신앙공동체가 자리했다. 이중 느지지 마을에서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이 태어났다. 슬기롭고 신앙심이 깊었던 그를 모방 신부는 전교회장(공소회장)으로 임명했다고 전해진다. 기해박해를 피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성인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 배론에서 체포돼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의 6촌 동생 장 토마스도 느지지 마을 출신이다. 이처럼 순교자의 얼이 스며든 땅 위에 발안성당이 세워졌다. 경기도 최초의 본당인 왕림본당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응승(요한 사도) 신부는 화성 지역 복음화를 위해 신자들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였던 발안에 성당을 세웠다. 신자들의 땀과 정성으로 성당은 1956년 완공됐다. 당시 성당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종소리는 10리(약 4km) 밖까지 울려 퍼졌다.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 주민들은 종소리를 통해 시간을 알았으며, 신자들은 밭일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바쳤다. 모든 마을 사람이 성당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종소리가 울리는 곳이 성당임을 알았다. 발안성당은 이처럼 지역의 큰 울타리였다. 본당은 농촌 지역 공동체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1970년 ‘비안네 농장’을 설립해 향나무, 뽕나무, 참외, 포도를 재배했다. 농장 수익으로 농민교육원을 세워 지역 농민을 도왔고, 누에를 길러 양잠 기술을 전파했다. 이어 1976년 ‘꿀벌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신자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금융기관을 세웠다. 이는 오늘날 발안신협의 모태가 됐다. 시대의 아픔도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를 위해 성당 운동장을 제공했고, 지금은 잘 가꿔진 정원과 운동장이 주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았다. 마음에 평안 주는 하느님의 정원, 사랑으로 피어나다 현재 성당은 1999년 새로 지어졌다.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예수님을 지나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기와지붕처럼 보이는 성당의 지붕과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가 겹쳐 보인다. 성당 외부의 거대한 동판 지붕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갓을 형상화했다. 정자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묵주알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에는 묵주기도의 길과 십자가의 길이 함께 조성돼 있다. 푹신한 잔디밭 위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도를 마치고 천국의 문을 지나면 이곳이 하느님의 땅임을 멀리까지 알리는 종탑을 만날 수 있다. 종탑의 4개 면에는 삼위일체상, 예수 부활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 성 장주기상이 새겨져 본당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미사가 끝난 성전은 고요하다. 푸른빛 창으로 스며든 빛이 제대 위 십자가를 감싸며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끼게 한다. 대성당의 십자고상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목장 위 십자가를 본뜬 것으로, 비틀린 구조와 거친 질감이 예수의 고난을 더욱 선명히 드러낸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어두운 배경은 십자가의 의미를 한층 깊게 새겨준다. 성당 문을 나서면 성당이 지어질 당시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순례자를 맞는다. 소나기에는 우산이 되고, 뙤약볕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모과나무와 호박 덩굴 등 곳곳의 식물은 신자들이 직접 가꾼 것이다. 신자들의 정성 어린 돌봄으로 자리한 하느님의 집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라, 마음에 평안을 주는 하느님의 정원으로 지역에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미리내성지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

깊은 산골. 밤이면 아름다운 은하수가 펼쳐지던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의 경기도 안성 미리내성지 자리에 모여 살던 신앙 선조들은 호롱불을 밝히고 별빛과 달빛이 비치는 시냇가 곁에서 기도했다. 호롱불 불빛과 자연의 빛이 어우러진 풍경은 신앙의 빛을 상징하듯 아름다웠다. 선조들이 떠난 자리에는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들이 호롱불 아래 드렸던 간절한 기도는 오늘날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기도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신앙이 만나는 곳, 미리내성지(전담 김진우 베드로 신부)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을 찾았다.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기도하는 성지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1846년 9월 16일, 형장 앞에 선 김대건 신부는 두려움 없이 이렇게 고백하며 순교했다. 당시 국사범으로 처형된 이들은 사흘 뒤 가족이나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시신은 땅에 묻힌 채 파수의 감시 속에 지켜졌다. 이 소식을 들은 미리내의 17살 청년 이민식(빈첸시오)은 유해를 모시기로 결심하고 새남터로 달려갔다. 그는 파수의 눈을 피해 시신을 몰래 수습해 인근에 임시로 매장한 뒤, 40일 후 다시 시신을 모시고 미리내로 향했다. 해가 진 뒤에만 길을 옮긴 여정은 꼬박 일주일이 걸렸고, 마침내 교우촌에 도착해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신자들은 하느님 곁으로 간 사제를 위해 무덤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로부터 55년 뒤인 1901년 5월 20일,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명으로 무덤이 발굴됐다. 이후 성인의 유해는 성지에 자리한 세 곳의 성당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 그리고 성 요셉 성당 제대 아래에 모셔졌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성당 앞마당에는 김 신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179년 전 교우촌 신자들이 무덤 앞에서 올렸던 간절한 기도는, 오늘날 성지를 찾는 신자들의 기도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성인을 기억하는 성당, 신자들 발걸음 멈추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성지를 둘러싼 산록의 푸르름은 여전히 교우촌 시절 청명한 분위기를 전한다. 십자가조차 드러내지 못했던 옛 교우촌 신자들을 위로하듯, 성지 입구에서 보이는 첨탑 위 빛나는 십자가가 이곳이 하느님 백성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십자가를 향해 오르는 길 끝에 웅장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산 중턱에 세워진 이 성당은 아랫지붕이 윗지붕을 받치는 독특한 구조로, 마치 커다란 제대를 형상화한 듯 입체감을 자랑한다. 외부의 장엄한 기운은 성당 내부로 이어지며, 고딕양식의 높은 천장과 제대 뒤에 펼쳐진 장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신자들의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다. 제대 아래 모셔진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봉헌한 뒤 제대 뒤를 올려다 보면, 5개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속 김대건 신부와 103위 성인들의 모습이 찬연히 빛난다. 외부의 빛을 듬뿍 받아 가장 밝게 보이도록 설계된 중앙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여섯 명의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 성모 마리아와 성령이 그려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며 김대건 신부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103위 성인들과 함께 드린 미사는 신자들의 마음을 더욱 깊은 신심으로 채운다. 성전 밖으로 나오면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을 혹은 묵주기도의 길을 기도하며 걷다 보면 순례자들은 성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과 묘소에 이르게 된다.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구산성지 성당

경기 하남시 망월동에 자리한 구산성지(전담 정종득 바오로 신부)는 서울·수원 등 수도권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순례지로 한국교회 초창기 순교사를 간직한 신앙의 터전이다. 특히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명인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이 태어나고 묻힌 자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박해 속에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 고백하며 굳은 믿음을 증거했다. 성지는 그의 신앙을 기억하며, 성당과 묘역 그리고 순례 공간을 통해 믿음을 지켜온 선조들과 함께 걷는 길로 순례자들을 초대한다. 믿음과 순교의 흔적이 살아 있는 길 성지는 김성우(안토니오) 성인과 8위 순교자가 태어나고 묻힌 자리로, 오랫동안 후손들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아온 신앙의 땅이다. 1980년 성지로 선포됐고, 2001년에는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등재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신도시 개발의 여파로 지금은 사방을 둘러싼 고층 아파트 숲이 성지를 감싸고 있지만, 그렇기에 개발의 파고 속에서도 지켜내야 할 순교 성지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성지 입구, 야트막한 동산을 닮은 정문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납작한 기와를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는 구산(龜山)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걸맞게 거북이 등을 형상화했다. 그 위에는 꽃과 십자가 모양의 도자기 조각이 알알이 박혀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자연스레 시선은 형형색색의 도자기 작품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으로 향한다. 성모자상은 초대 주임 고(故) 길홍균(이냐시오) 신부가 꿈에서 본 성모님의 모습을 토대로, 고(故) 김세중(프란치스코) 화백이 조각해 1983년 봉헌한 특별한 작품이다. 성모상 왼편 묵주기도의 길에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상을 의미하는 흰색과 푸른색 도자기 알이 항아리 위에 놓여 있다. 특히 항아리는 박해시대 신자들이 새우젓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 삶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이다. 성지 안에는 옹기 가마도 있다. 옹기는 신앙을 지키며 살아낸 신자들의 땀과 눈물을 품은 생활의 그릇이자, 그들의 굳은 믿음을 상징한다. 박해 속에서도 믿음의 삶을 이어간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오른편 길에는 고즈넉한 기와지붕의 ‘안당문(安當門)’이 서 있다. ‘안당’은 안토니오의 중국어 음역으로,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온 순교 성인들과 동행하는 관문이다. 문을 지나면 맞은편에는 순교자 묘역이 자리하며, 김성우 성인을 비롯해 여덟 순교자의 묘소가 진묘와 의묘 형태로 보존돼 있다. 형구의 창과 고요한 공간, 순례자를 품는 성당 성지 성당은 순교자들의 묘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길게 뻗은 구조의 성당 외벽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창들이 나 있다. 가까이 다가서면 단순한 장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창 하나하나가 박해시대에 쓰였던 형구와 형벌을 형상화한 것이다. 포승줄과 철편, 뜨거운 인두를 본뜬 화저창, 곤장을 모티브로 한 창 등 16가지 창은 신앙 선조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생히 전하며, 동시에 어떤 고문과 칼날도 순교자들의 믿음을 꺾지 못했음을 증언한다. 성당 벽은 층층이 쌓아 올린 기와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신앙의 세월이 켜켜이 담긴 듯한 인상을 준다. 입구에 놓인 기와에는 순례자들이 저마다의 기도 지향을 적어 봉헌할 수 있게 했는데, 이 기와들은 다시 성역화 작업에 사용되거나 성지 정문을 꾸미는 데 보태진다. 순례객의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기도가 성당의 벽돌이 되고, 성지의 문을 세우는 재료가 되어 눈앞에 살아 있는 신앙의 흔적으로 남는 것이다. 벽돌과 나무 기둥이 주는 안정감 속에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기도와 묵상의 분위기를 더한다. 중앙 제대 위의 십자가와 성모상, 전통 회화 양식으로 그려진 순교자 초상화는 순례자들의 마음을 고요히 이끄는 신앙의 중심으로 살아 숨 쉰다. 성당 외부 벽면에는 서양 선교사로는 처음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성 모방 신부의 청동 부조가 걸려 있다. 방인사제 양성과 조선 선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방 신부는 김성우(안토니오) 성인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달레 교회사에는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김성우는 자기 집에 작은 공소를 마련하고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시며 우리말을 가르치고 전교를 도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성당 벽면에 새겨진 그 얼굴은, 선교와 순교의 길을 함께 걸었던 두 신앙 선조의 우정을 지금까지도 증언한다.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동탄송동성당

세련된 신도시 분위기에 걸맞게 현대적이면서도, 유서 깊은 가톨릭 전통과 고전미를 함께 품은 성당이 있다. 도로와 보행로로 둘러싸 사방으로 열려있는 경기도 화성의 수원교구 제1대리구 동탄송동성당(주임 이상훈 바오로 신부)은 2023 경기도건축문화상 경기도건축가회 회장상을 수상했다. 상징성과 장소성, 그리고 비접촉 시대의 특성을 동시에 고려한 건축으로 의미 있다는 평을 받았다. 더불어 동탄호수공원과 마주해 신자와 방문객 모드 자연 풍경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동탄송동성당(이하 성당)을 찾았다. 지역사회를 밝히는 ‘평화의 등대’ 대지는 넓지 않지만, 그 면적에 맞춰 짜임새 있게 설계된 건물이 눈길을 끈다. 새롭게 정비된 지역에 자리한 신축 성당은 깔끔한 외관으로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린다. 경사진 부지에 축대를 세워 지상 1층을 법적 지하 1층으로 구성함으로써 접근성을 높이고, 전체 건물에 안정감을 더했다. 네 면에 문을 내어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성당으로 자리한다. 다홍빛을 띠는 벽돌 외관은 지역의 대표적 장소로서 따뜻하고 품격 있는 인상을 준다. 성당의 대각선 너머로는 초록빛 나무와 파란 물결이 펼쳐진 동탄호수공원이 있다. 때문에 공원을 찾는 시민들도 성당 앞을 지나며 자연스레 관심을 갖고 발길을 멈춘다. 성당의 네 면은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구성됐다. 건물은 단순히 막힌 벽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곳곳에 바람이 스며드는 길목을 두어 마치 성령이 지나가는 듯한 여유를 느끼게 한다. 층고는 높지만, 주변의 고층 아파트보다 낮아 위압적이지 않다. 또 공원의 나무와 호수보다는 높아, 주변 환경 속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지지도, 그렇다고 묻히지도 않는 균형 잡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비례와 조화는 자칫 삭막해질 수 있는 무채색 건물과 아파트 단지 사이에 따스한 온기와 시원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저녁이면 성당 외벽에 조명이 켜져 한층 더 아름다워지며, 그 모습은 처음 설계 단계에서 그렸던 ‘평화의 등대’라는 구상을 그대로 구현해 내고 있다. 오순도순 모이고 통하는 나눔 공간 성당 1층에 올라서면 한쪽에 성가정상이 다복한 모습으로 서로를 보듬고 있다. 김형근(야고보) 작가가 모든 가정이 하나가 되길 희망하며 만든 작품이다. 이어 성모상과 화초들이 싱그럽게 반기는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카페와 작은 도서관이 마련돼있다. 공원이 바라다보이는 현관 바깥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잔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책 한 권 읽기 적격이다. 로비는 열린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타 한 대다. 본당 전 주임 최광호 신부(바실리오·교구 관리국 부국장)가 성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타 본당을 방문해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연주하며 불렀던 바로 그 악기다. 가운데에는 본당이 설립된 2020년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행사 사진들이 걸려있고, 오른쪽에는 본당 신자들과 함께 도보 성지 순례를 이어가고 있는 현 본당 주임 이상훈 신부의 배낭과 등산화가 놓여 있다. 옆으로 이어지는 벽면은 신자들이 직접 찍은, 성당의 이모저모가 담긴 작은 사진 타일과 액자가 장식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이 추억 모음 공간이 모두가 본당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옥상에는 넓은 마당과 함께 다양한 꽃이 심어진 화단과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가 조성돼 있다. 예전에는 이곳도 테라스로 꾸며 신자들에게 개방했지만, 현재는 잠시 정비 중이다. 이렇듯 성당 구석구석은 신자들이 휴식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조성돼 있다. 갖가지 색이 하모니를 이루는 빛의 노래 성문 앞 성모상은 찬란한 은총 속에 고요히 피어난 백장미처럼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성모상과 제대 위 십자가는 모두 김형근 작가의 작품으로 단순함과 선, 조각적 일체감에 중점을 두고 한국적으로 표현돼 있다. 특히 ‘겸손과 기도’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서 빚어졌다. 영롱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2층 로비와 복도에서는 ‘정화’와 ‘조명’을, 성당 안에서는 ‘일치’를 상징한다. 조규석(요한) 작가는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까지도 고려해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성모님 품 안의 파란 하늘 빛깔’로 물들인 좌우 수직 창 사이로, 이종상(요셉) 화백이 그리고 임채욱 작가가 판화로 재탄생시킨 십자가의 길 14처가 불빛을 밝힌다. 크로키를 연상시키는 스케치 형식의 그림은 고난의 절벽 앞에서 죽음의 경각을 마주한 예수님의 심정을 묵상하도록 돕는다. 한지에 배면 조명 기법으로 만들어져 특유의 깊이와 질감을 살렸다. 십자가가 걸린 제대 벽면에는 파벽돌을 빛의 파편처럼 흩뿌려 놓았다. 이처럼 단아하고 고운 성 미술품들과 함께 거룩한 성당이 완성됐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마침에 이르기까지 봉헌된 정성과 기도가 성당 안을 깊게 울리고 있다.

발행일 2025-08-24 제3455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죽전1동 하늘의 문 성당

야곱은 베텔에서 꿈을 꾼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창세 28,12) 그리고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야곱은 주님을 만난 그곳을 ‘하늘의 문’이라 했다. 그분이 살아 계심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함께 키워가는 곳.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죽전1동 하늘의 문 성당(주임 박영훈 요한 사도 신부)을 소개한다. 성모님의 기쁨과 고통, 벽에 새겨지다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의 ‘대치고개’로도 불렸던 죽전(竹田). 고개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하늘의 문 성당은 그 이름처럼 하늘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 하늘을 향해 물줄기가 뻗어나가는 듯한 디자인의 성당 외관. 그 줄기를 세어보니 7개다. 하늘의 문이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는 본당은 성모님의 ‘칠고(苦) 칠락(樂)’의 상징을 외벽에 새겼다. 하늘을 향한 7개의 벽은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천주의 성모로 인정받고, 예수님을 세상에 낳으시어 성모님이 되신 등의 7가지 기쁨을 상징한다. 또 하늘을 향해 숙이고 있는 7개의 벽을 통해 성전에서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신 고통, 아기 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피난 가신 고통,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으신 고통 등 일곱 가지 고통(七苦)을 기억할 수 있다. 외벽 색은 흙색이다. 땅 속에 묻혀 있는 무덤을 표현하고자 외벽 타설 시 안료에 돌가루를 섞어 색을 냈다. 신자들은 성모님의 기쁨과 고통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하느님의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늘의 문 성당은 2013년에 경기도건축문화상 사용승인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대지면적 1984㎡, 건축면적 991.98㎡ 규모의 성당은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과 일곱 가지 기쁨을 빛의 명암을 통해 표현했을 뿐 아니라 건물 전체적으로 비대칭과 비정형성을 드러내 종교 건축물이 가진 근엄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탈피한 실험정신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수님의 부활을 매일 체험하는 성전 성당의 외관은 디자인 측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으나 그 안으로 들어오면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물들로 더욱 빛이 난다. 성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십자가는 여느 성당 십자가와 다르다. 벽에 붙어있지 않고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있다. 성 다미아노 성당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서 착안한 다미아노 십자가는 12세기 시리아 수도자에 의해 그려진 비잔틴 양식의 이콘이다. 요한복음에서 이미지를 가져온 이 이콘은 영광의 신비가 잘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가시관 대신 영광의 관을 쓰고 있는 예수님.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의 몸은 어두운 배경과 대조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예수님 발아래 4명의 성인 중 2명은 각각 의사와 약사의 주보성인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을 그린 것도 인상적이다. 신자들이 보는 십자가의 반대편에는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승리를 의미하는 예수님과는 반대로 수난의 예수님이 제대를 바라보고 있다. 가장 위에는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는 장면도 아래에 있다. 창세기부터 최후의 만찬까지를 하나의 이콘에 담은 것이다. 예수님 발치의 검은 해골로 표현된 아담의 해골은 인류를 의미하며 예수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보혈은 인류의 죄를 사하심을 상징한다. 미사 중 성체, 성혈 거양 시 사제가 성작을 높이 치켜들면 예수님의 피가 성작 안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 흰 배경 안에 걸린 이콘 십자가와 성당 외관 벽을 그대로 옮긴 제대는 심플하면서도 미사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한 상징이 적은 것을 아쉬워하자, 미사가 끝나고 기도를 하고 있던 한 신자가 제대 위 천장을 보라고 손짓한다. 제대 오른쪽 끝에 다다라 고개를 들자 성전 안에서 가장 보물같은 공간을 눈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집모양의 벽을 따라 천장에서 들어오는 빛. 가느다란 빛을 받고 있는 이 자리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남아있던 빈무덤의 현장을 보여준다. 신자들은 성전, 즉 빈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매일 체험하고 있었다. 빈무덤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성전 문을 열자, 아름다운 색을 입은 성모님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형형색색 스테인드글라스로 창문에 새겨진 승천하시는 성모님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신자들을 따뜻한 미소를 맞이한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체험하고 승천하시는 성모님이 인자한 미소로 신자들을 맞는 성당 안에서는 조용히 기도하는 짧은 순간만으로도 따뜻한 신앙의 온기가 채워졌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빈무덤에 모인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며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발행일 2025-08-03 제3453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손골성지 성당

경기 용인시 동천동 손골성지(전담 이재웅 다미아노 신부).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이곳은 박해 시대 당시 교우촌이 있던 자리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속 깊숙이 들어온 신심 깊은 신앙 선조들을 만나기 위해 서양선교사들도 이곳에 머물렀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손골 교우촌을 이렇게 묘사한다. “마을에서 나와 몇 백 발걸음 어쩌면 천 걸음일지도 모를 거리를 가면 예쁘고 아담한 장소가 있어요…. 거기엔 마침 작은 폭포도 있는데, 높이가 대략 두 자밖에 안 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이 있답니다.”(손골에서 보낸 1853년 9월 18일자 서한) 올 여름, 아름다운 풍경과 신앙선조들의 깊은 신심이 깃듯 손골성지를 방문하면 어떨까. 손골 교우촌 이야기 1865년 9월 29일,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랑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손골에는 오직 신자들만 살고 있었으며, 총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를 통해 병인박해(1866년) 이전부터 손골에 교우촌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이들은 서울 근교의 교우촌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손골 역시 선교의 거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도 신자들과 교류하기 위해 서울 근교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로 이곳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857년이다. 3월, 페롱 신부가 손골 교우촌에 거주했고, 1861년에는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머물렀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도 1863년 7월부터 약 1년간 손골에서 지냈다. 마지막으로 손골에 도착한 선교사는 1865년 6월 23일에 온 성 도리 헨리코 신부였다. 교우촌 신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도리 신부는 1865년 10월 16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했다.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고, 논도 약간 있었지만 홍수로 모두 폐허가 되어 먹을 것을 구하기조차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도리 신부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조선에서 활동 중이던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다. 칼레, 오메트르, 프티니콜라, 위앵 신부 등이 손골을 방문했다. 특히 선교사들은 여름철 농번기 동안 사목 활동을 잠시 쉬고 이곳에서 피정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했다고 전해진다. 순교자 기억하는 공간 도리 신부는 이곳에서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열심히 익히던 중 병인박해를 맞았고 1866년 2월 27일 체포됐다. 당시 조선 관리들은 그를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명했지만, 도리 신부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그는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손골이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도리 신부의 출신 본당 주임이었던 조셉 그를레 신부가 도리 신부의 시복을 위한 여정으로 한국을 찾아 손골을 순례했다. 이후 도리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탈몽(Talmont)과 손골을 연결하기 위해,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화강암 맷돌을 깎아 두 개의 십자가를 제작하고 프랑스와 한국에 각각 세웠다. 이 십자가를 기반으로 손골에는 도리 신부 순교 현양비가 세워졌으며, 1966년에는 손골성지가 공식 설립됐다. 성지 곳곳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장소가 자리하고 있다. 손골기념관에는 오메트르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을 비롯해, 도리 신부가 신학생 시절 집에서 사용하던 침대보와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의 방'에는 성 도리 헨리코, 성 오메트르 베드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그리고 손골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당 뒤편 산기슭에는 손골 교우촌에서 생활하다 순교한 4위 유해를 모신 순교자의 묘가 조성돼 있다. 성지 성당에는 순교자들의 삶과 믿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다.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촌에서 신자들과 함께 지내던 모습을 형상화한 12점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신앙의 울림을 전한다. 성지 전담 이재웅 신부는 지난해 부임 이후 성지 운영위원회와 자문위원단을 새롭게 구성하고, 성지를 영적 쉼터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 너머에 ‘오메트르 쉼터’를 조성해, 성지를 찾는 이들이 차 한잔과 함께 조용한 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쉼터는 한쪽 창으로는 성당을, 다른 창으로는 청계산을 바라볼 수 있어, 손골 교우촌이 간직했던 따뜻한 공동체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재웅 신부는 “손골성지가 도시 생활에 지친 신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가장 큰 사목적 역할은 바로 ‘영적인 쉼’이라고 생각한다”며, “성지를 찾는 모든 순례객이 마음의 위로와 신앙의 용기를 채워가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고초골공소

‘신앙 선조들이 박해를 받으며 고초를 당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는 마을, 경기도 용인의 ‘고초골.’ 이곳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직접 연관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성인이 사목하던 시절 방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용인특례시는 고초골공소와 성인이 유년기를 보낸 은이성지 등 다섯 곳의 명소를 잇는 스탬프 투어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을 마련했다. 김대건의 길을 따라 걷기 위한 이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는 수원교구 제1대리구 원삼본당(주임 송영오 베네딕토 신부) 관할 고초골공소와 피정의 집을 찾았다. 되찾은 초가지붕으로 더 뚜렷해진 신앙 선조 숨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좁은 골목과 둔덕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초골공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돌담 사이로 향토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작은 마을 공동체에 들어선 듯 정겹다. 대부분 기와지붕을 얹은 집들이지만 그중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띈다. 바로 옛 고초골공소다. 현존하는 수원교구 공소 중 한옥으로 지어진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공소로 현재는 경당으로 쓰인다. 최근 연 1회 있는 초가 복원을 막 마친 말끔하고 풍성한 지붕 아래로 세월의 흔적이 담긴 ‘고초천주교회(枯草天主敎會)’ 현판이 걸려 있다. 전통 가옥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지 문에는 유리가 덧대어 있고 벽에는 소화 설비가 설치돼 있다. 대들보와 서까래에는 형광등도 달려 있는 등 실용성을 더해 개량된 모습이다. 이는 1891년 세워진 후 기와와 팔작지붕 등으로 개조되며 오랫동안 실제 교회 시설로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이후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 제708호로 등재된 것을 기념해 교구와 용인특례시는 2023년 공소의 원형 모습을 최대한 살려 복원했다. 내부 제단의 감실대 등은 고가구로 갖춰 세월의 손길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둥마다 걸린 은색 주석 십자가의 길이 고풍스러운 나무와 어우러진다. 경당 바깥 왼쪽으로는 검은색 철제 종탑이 눈에 띈다. 인근 용암(용바위)공소가 폐쇄되면서 약 12년 전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지금은 공소의 명물이 됐다. 경당 오른편에는 청보라색 수국과 노란 나리꽃 사이로 루르드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마당 구석구석에 놓인 항아리들은 소박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더한다. 정기적 피정 이어가며 옛 교우촌 구현 고초골공소와 피정의 집에는 교육관, 개인 피정의 집, 수도자·선교사 쉼터, ‘순교자 신안드레아의 집’, 관리동 등 각 용도에 맞는 공간들이 오밀조밀 마련돼 있다. 민가를 개량한 ‘라자로·마르타·마리아의 집’은 순례자들의 식사 준비 공간으로 썼다가 현재는 다른 용도로의 활용을 준비 중이다. ‘순교자 유군심 치릴로의 집’, ‘순교자 박바르바라의 집’이라는 이름의 정자는 순례자 쉼터로 쓰인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안내를 시작으로, 바위와 소나무에 기대어 있는 십자가의 길도 이색적이다. 2003년 원삼본당이 설립되며 피정의 집으로 용도가 변경된 고초골공소에는 전임 교구장 최덕기(바오로) 주교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머물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후 잠시 휴식기를 가진 뒤 2024년부터 송영오 신부의 특강을 재개했다. 현재 송 신부의 봄·가을 피정 프로그램은 교육관 혹은 경당에서 열린다. 올 하반기 가을 피정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9월 9일)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9월 25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10월 14일) 등의 주제로 11월까지 이어진다. 피정은 오전 11시 미사로 시작해 점심 식사 후 특강으로 마무리된다. 개인 피정은 운영 준비 중이다. 순교자들의 덕, 마침내 공소로 꽃 피다 고초골은 1820년경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촌이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 숨어 살던 신자들이 붙잡혀 순교하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이때 끌려간 신자들 중 박 바르바라, 신 안드레아, 유군심(치릴로) 등 다섯 순교자의 기록은 「병인사적 박순집 증언록」,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에 수록돼 있다. 1886년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며 1891년 기도와 집회 장소로 사용할 공소가 세워졌다. 고초골 교우촌 규모는 문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상교우서」에 따르면, 공소 신자 수는 1900년 78명, 1924년 226명, 1937년 242명이다. 고초골공소에 대한 기록은 몇몇 사료에 남아 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1854~1933)가 쓴 「뮈텔주교일기」의 서울 남부지역 사목 순방 기록(1902년 11월 11~17일)에 고초골공소가 등장한다. 뮈텔 주교는 이곳에서 신자들로부터 국수 대접을 받았다고 적었다. 또한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마르코·1863~1929)는 「서한집」 중 <주교님(뮈텔)께 쓴 편지>(1916년 2월 16일) 등 여러 서한에서 고초골공소를 언급했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평택성당

수원교구 평택본당(주임 김현중 요한 보스코 신부)은 하느님의 종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Joseph Molimard, 牟 요셉, 1897~1950)에 의해 시작된 역사 연구와 보존,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 안치 등 성역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 본당 공동체의 보금자리인 성당 또한 하느님이 사랑하신 아름다운 자연과 신자들의 기도를 돕는 성상 등이 자리한 ‘찾고 싶은’ 공간이다. 6·25 한국전쟁 때 순교한 몰리마르 신부가 사랑한 곳, 6월 끝자락에 더욱 의미가 깊은 평택성당을 찾았다. 땅에 모든 걱정 내려두고 한발한발 천국의 계단으로 유치원 건물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오면 복잡한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나무와 꽃이 빽빽이 자리한 가운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 루르드 성모와 성 베르나데트 조각상이 들어선 ‘하늘 섬’ 같은 이곳은 자연스레 신자들을 묵상의 길로 이끈다. 예수님 조각상이 맞이하는 한가운데 계단, 혹은 왼쪽의 십자가의 길이 놓인 둥근 오르막길에 의해 이곳 지상과 성당이 있는 천상이 분리된 듯하다. 땅에 모든 걱정을 내려두고 한발 한발 천국의 계단을 올라가 본다. 상부 공간의 성당 마당은 태초의 에덴동산이 생각날 만큼, 다른 곳에 비해 나무와 바위, 꽃이 울창하면서도 질서가 공존했다. 성당 건물 바로 앞에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다. 몇 년 전 고사 위기를 겪기도 했던 나무의 나이는 200살. 100년 가까이 된 성당의 모든 역사를 나무는 성당 터 한가운데에서 지켜봤다. 느티나무뿐 아니라 봄에는 이름 모를 들꽃까지 가득 피어 성당에 고운 빛을 더한다. 마당에는 놓인 의자와 테이블이 잠시 숨 고르고 쉬라고 반갑게 맞이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 마리아’ 주보로 모셔…파티마·루르드 성모상도 순례자 맞이 본당은 1928년 설립됐으며 현 성당은 1971년 재건축한 것이다. 본당 주보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 마리아’ 부조가 성당 종탑 외벽에 걸려 있다. 성모님을 주보로 모신 본당답게 곳곳에는 다양한 성모님이 모셔져 있다. 성당 문 왼쪽에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이, 성당 안에는 파티마 성모상이 신자들을 맞이한다. 루르드 성모님도 계단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창문은 형형색색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국의 전통 격자무늬 한지 문을 그대로 가져와 성당의 100년 역사를 드러냈다. 창 옆에는 나무에 파스텔톤 색상을 입힌 십자가의 길을 놓아 바위에 무채색으로 새겨져 있던 마당 십자가의 길과 대조를 이룬다. 성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사무실과 교실 등이 있는 몰리마르 관이 있고 오른쪽은 대강당이다. 몰리마르 관 앞에는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몰리마르 신부 흉상과 어우러져 순교의 의미를 더한다. 본당 역사의 시작 하느님의 종 몰리마르 신부…현양과 성역화 노력 지속 몰리마르 신부는 프랑스 님교구 보베르에서 태어났다. 1924년 사제품을 받은 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고 1925년 한국에 파견됐다. 황해도 매화동본당, 경기도 병점 공소를 거쳐 1928년 비전리본당(현 평택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10여 년을 평택본당에서 사목했다. 부임 전 야산을 매입해 성당 건물을 지은 몰리마르 신부는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에 공소 경당을 신축하는 등 신앙의 중심인 성전 건립을 통해 전교에 힘썼다. 매월 본당 소식지인 「성모 월보」를 발행해 신자들을 교육하고 신심을 고취시켰으며, 어린이를 사랑하고 늘 근검절약하면서 청빈한 생활을 했다. 본국에서 휴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본당 3대 주임과 서정리본당 초대 주임을 역임한 뒤 1948년 대전지목구가 신설되며 충남 금사리본당 주임으로 임명됐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여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 성당으로 돌아와 교우들에게는 나오지 말라고 당부한 뒤 홀로 미사를 봉헌했다. 8월 말 인민군에게 체포된 몰리마르 신부는 대전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압송됐고 9월 23~26일 사이 수도원 뒤편 언덕에서 53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몰리마르 신부는 일찍이 유서를 통해 자신의 유산으로 부여나 규암에 성당이 건축되기를 희망했고, 유언에 따라 1955년 9월에 규암, 1972년 12월에는 부여에 본당이 설립됐다. 마당 끝 쪽에는 경건함이 느껴지는 묘가 있다. 본당 초대 주임 몰리마르 신부의 무덤이다. 오랜 노력 끝에 본당은 2003년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를 모셔 왔다. 교육관의 이름을 ‘몰리마르 관’으로 바꾸고 흉상을 세웠으며, 자료집 발간을 통해 몰리마르 신부를 현양하며 성당 성역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4면

[수원교구 성당 순례] 북수동성당

수원 화성행궁 건너편에 자리한 작은 성당.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화성행궁과 달리 아담하고 소박한 북수동성당은 고요하기만 하다. 일제 치하 암흑기와 해방, 6·25전쟁 등 격동기를 거치며 신자들의 피와 땀, 눈물과 굶주림을 보듬으며 세월을 함께한 북수동성당은 오랫동안 수원 지역 신자들의 신앙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다. 수원의 어머니 성당 올해로 설립 102주년이 된 북수동성당은 1923년 11월 23일 수원성당에서 출발했다. 설립 당시 성당 터를 잡을 때 천주교인들이 체포돼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됐던 토포청(중영) 자리로 정했다. 성당 건물이 지어진 것은 9년 뒤인 1932년이다. 4대 주임 폴리 데지레 신부가 고국 프랑스에서 건축비를 마련해 수원 지역 최초의 고딕식 성당을 지었다. 고딕식인 옛 성당의 규모는 247㎡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400명에 불과했다. 신자 수가 점차 증가하자 성당은 1979년 지금의 건물로 신축됐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황토색 벽돌에 왕관 모양의 건물이 신자들을 맞는다. 주교관(主敎冠)을 본떠 설계한 성당은 흙색으로 지어져 위압감보다는 따뜻하게 신자들을 품어주는 느낌이다. 옛 성당 외벽에 쓰였던 파벽돌을 성전 안 마감재로 재사용했고, 주교관 모양의 끝에 걸린 십자가도 구 성전에서 가져왔다. 소박한 외관이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100여 년 전 수원 지역 교회 역사의 흔적들은 과거와 현재의 신자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 피와 눈물의 역사는 성전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대 뒤 벽에 20위 하느님의 종 명패를 걸어놓고 기도하며 시복시성을 염원한다. 이 중 데지레 폴리(Désiré Polly, 심응영 데시데라토) 신부, 유영근(兪榮根) 요한 세례자 신부, 장 콜랭(Jean Colin, 고일랑 요한) 신부 등 3명의 사제는 6·25전쟁 때 순교했다. 순교자의 흔적은 성전 밖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을 맞는 순교자 현양비는 열두 사도와 수원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12개의 침목으로 만들어졌다. 수원화성 치성 구조인 ‘ㄷ’자 형으로 세워진 현양비는 순교자 믿음의 시작은 짧은 침목처럼 미약했지만, 주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체험하며 점차 크게 자란 것을 의미한다. 36대 주임이었던 나경환(시몬) 신부는 성당 마당에 야생화를 심어 성당을 도심 속 쉼터로 조성했다.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조팝나무는 물론이고 야생화 800여 종을 심었다. 무명 순교자와 같은 낮은 자들의 순명과 순교를 보여주고자 야생화와 야생초를 심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흙바닥이었던 운동장에 잔디를 심어 푸근하고 자연 친화적인 성당을 만들었다. 화성의 봉화대 모양으로 만들어진 묵주기도 길은 이색적인 기도 장소로 꼽힌다. 북수동성당 역사에서 데지레 폴리 신부는 빼놓을 수 없다. 1931년 당시 수원본당에 부임한 폴리 신부는 부인들로 구성된 명도회, 청년 신심단체 돈보스코회,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어 전교에 박차를 가하면서 신자 수는 2600명으로 증가했고 관할 공소도 28개에 달했다. 그가 재임했던 시기는 일제 지배 하 암흑기였으나 선교와 교육, 성당 건축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한글을 잊지 않도록 1934년 성당 옆에 소화강습소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1946년 소화초등학교로 인가됐고 현재는 뽈리화랑으로 바뀌어 성당의 역사와 데지레 폴리 신부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났다. 폴리 신부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체포돼 총살형으로 순교했고 성당은 그를 현양하고자 마당 한쪽에 기념비를 세웠다. 피로서 하느님 증거한 순교자들의 자취 수원 화성은 역사·문화적인 가치와 더불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고귀한 넋이 배어있는 장소다. 화성은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의 처형지가 됐다. 성내 수원 유수부가 한강 이남과 경기도 전역, 충청도 일부 지역까지 관할했는데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된 이들이 이곳으로 압송돼 취조와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이에 수원교구는 2000년 북수동성당과 그 일대를 수원성지로 선포했다. 수원화성에 19개 정도의 순교지가 있다고 전해지나 현재까지 확인된 순교지는 토포청, 형옥,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 등이다. 수원성지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김성우(안토니오)의 머리카락과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발뼈,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오른쪽 다리뼈 등 한국 순교성인 6위의 유해를 소장하고 있다. 북수동성당에서는 매일 오전 11시 수원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순례미사가 봉헌되며 매주 목요일 미사 전 성체 현시와 미사 후 성체강복이 거행된다. 순교자들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기도하는 달빛순례도 매월 첫째 주 금요일 열린다. 성지에서 시작해 방화수류길을 따라 화홍문, 방화수류정, 장안문(북문), 북서포루, 사형 터, 이아(貳衙) 터를 거쳐 성지로 돌아오기까지 세 시간가량 이어지는 순례를 통해 신자들은 달빛 아래서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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