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고(故) 최익형 씨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2-19 제 109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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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 교육자로 나라찾는데 몸바쳐 
6ㆍ25때 국군 음장죄로 공산군에 피살
서울 해방동본당주임 최익철 신부의 맏형인 故 최익형(놀베도) 씨가 지난해 11월 30일 독립유공자로 선정 국민장을 수상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1890년 1월 25일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동읍리에서 출생한 최익형 씨는 1909년 서울보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 이천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자주독립전신을 학생들에게 고취시키는 한편 처남인 안명근을 비롯 김구, 김흥달, 도인권 등과 함께 당시 왜총독 寺內正의를비롯 국내에 산재해있던 왜인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에 무기구입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을 추진하던 중 사전발각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한 끝에 7년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룬 후 석방됐다.

그 후 본향인 황해도 안악으로 귀가, 3ㆍ1운동을 계기로 재차 왜인제거운동을 위해 나태설과 함께 고시복, 김상직, 권영선, 최한명 등을 포섭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1921년 8월 18일 체포되어 3년 언도를 받고 3년 복역 후 석방됐다.

석방된 후 다시 귀향, 자주독립 쟁취를 위해 후배양성에 주력하다가 1933년 비밀리에 天津을 거쳐 上海에 가서 국내지하활동의 밀령을 받고 귀국했다.

계속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청년들에게 일제에 의한 고문담을 서슴없이 들려주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서울을 방문한 재중(在中)동포청년들을 대오 각성케 하여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었다. 이에 왜인들로부터 정신이 불순하여 교육자의 자격이 없다고 탄압을 받자1940년경 황해도 장연으로 옮겨 본당에서 회장으로 일하던 중 8ㆍ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이 된 후 천주교신자이며 지주라는 명목으로 공산군의 탄압을 받게 되어 1948년 백령도를 거쳐 황해도 웅진으로 월남,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웅진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6ㆍ25공란이 발발하자 피신하지 못하고 있던 중 미처 후퇴하지 못한 국군 수명을 은신시켜 주었다가 이 사실이 공산군에게 발각되어 그해 10월 공산군에 의해 웅진탄광에서 피살되었다.

현재 미망인 안익근 여사는 차녀 명옥 씨, 손자 최석한 씨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다.

외아들인 최성옥 씨는 부친을 따라 월남 도중 공산군에게 발각되어 해주에서 3년형을 받고 복역 중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으로 이감. 폐병으로 치료불가능하자 석방되어 1950년 7월 황해도 장연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큰딸 故 최 놀벨따 수녀는 한국인으로서는 샬트로 성 바오로회 초대관구장을 지냈다.

한편 4남 5녀의 형제중 첫째 동생의 딸인 최진옥(마지아) 수녀는 원주 성 바오로의원에서 일하고 있으며 둘째 동생은 노기남 대주교와 동창으로 삭발례를 받고 선종하였으며 서울 해방동본당 주임 최익철 신부는 셋째 동생이 된다. 그리고 여동생 1명은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로 있다가 선종하였으며 나머지 여동생 4명은 월남하지 못해 생사를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