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지상 신학강좌] 206 세계교회사 26 중세 - 전성기(1054-1294년) 6 이단논쟁/최석우 신부

최석우 신부ㆍ한국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7-06-01 수정일 2017-06-01 발행일 1992-05-10 제 1804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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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부 축재로 비판세력 득세
수많은 이단자 화형으로 오명
교회는 중세 전성기에 있어서도 이단과 투쟁해야 했다. 11세기에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가 상징적일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단 하나가 나왔을 뿐이다. 이것은 곧 단죄되었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체의 전질변화(全質變化)가 공의회에서 신조로 정의되었다 (1215).

그런데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타리파와 발도파 등 여러 이단이 나타나기 시작, 그 후반에 이르자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상황이 위급해졌다.

가타리파와 발도파는 그 본질이 다르다. 전자는 동방에서 전해졌고 그래서 그 바탕이 이교적이었다. 반면 후자는 교회안에서 나왔고 그 기반도 그리스도교적이었다. 그러나 부유한 교회와 속화된 권력에 대해서만은 공격을 함께 했다.

이 시기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그것이 도시로 집중되었다. 그 결과 상업도시들이 많이 생기고 또 십자군을 계기로 그 도시들이 부유해졌다. 그러나 그 부(富)는 도시의 극소수 가족이 차지하고 일반 시민집단은 거기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사회투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교회는 이 소외층을 돌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간 교회는 평신도의 기증과 제왕들의 증여로 너무 부유해지고 주교와 고위성직자들도 부유해졌다. 이제 교회의 가난이 그 어느때보다도 문제시 되기에 이르러 교회가 재산을 포기하고 스스로 가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도시에서 또 평신도의 입에서도 처음으로 나왔다.

■ 가타리파와 발도파

순전(純全)을 자칭한데서 가타리파로 불리는 이 이단은 동방에서 보고밀파를 통해 발칸반도와 북이태리를 거쳐 서구에 전해졌고, 12세기 중엽, 특히 남부 프랑스의 알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그래서 알비파로도 불린다. 그 교리는 그노시스와 만니교가 혼합된,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을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으로서 악의 원리인 육(肉)이나 물질과 결부되는, 예컨대 결혼, 육식, 사유재산 등을 일체 배척한다.

교리대로 엄격한 절제생활을 하는「완전자」를 보통「평신자」와 구별한다. 그러나 평신자도 임종때 일종의 세례인「위안식」을 받으면 완전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의식은 두번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사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알비파들은 대립교회를 세우고 로마교회를 부패한 교회로 맹렬히 공격했다. 교회는 처음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 했다. 그 일환으로 베르나르도와 도미니꼬같은 성인들을 보내 설교케했고 교황사절도 파견했지만, 소용이 없었을 뿐더러 교황사절마저 살해했었다(1208). 교회는 부득이 무력에 호소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1209년부터 일종의 십자군인「알비전쟁」이 20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전쟁은 잔혹했으나 어쨌든 알비파는 거의 소멸되었다.

발도파는 리옹의 베드로 발두스에 의해 1170년경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열심하고 돈많은 상인이었다. 그는 가진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회설교를 하고 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리옹의 가난한 사람들」로 자칭하며 절대적 가난생활을 실천했다. 그런데 발도파들은 복음적 가난만이 아니고 성서만을 인정하고 미사, 고해, 성인공경, 연옥 등을 부정하고, 평신도 사제직을 주장하는 등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리옹 주교로부터 설교를 금지 당하고 이어 교황으로부터 파문되었다. 이래 그들은 지하로 숨어서 투쟁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으며 잔당은 종교개혁때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다. 실제로 발도파는 그 교리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개척자 구실을 했다.

■ 이단 심문제인 종교재판

이단은 비단 교회만이 아니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위험한 존재였다. 특히 가타리파 같은 것은 교회와 국가의 존재를 동시에 위협했다. 그러므로 이단에 대항해 교회와 국가가 함께 투쟁하게 되었다. 또 그것은 중세에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먼저 국가측에서 볼 때 11~12세기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이단자를 화형에 처했다. 다음 독일에서 황제가 이단자를 속권에 넘겨주도록 교회에 요구했고 또 그 절차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게 되었다. 한편 교회측에서는 기타리파와 발도파를 공의회에서 단죄했으나(1179) 효과가 없자 알비파의 중심지에 주교재판소를 설치하고 이단을 다스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교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는 이단을 색출하고 심문할 교황 지속 이단심문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도미니꼬회원을 심문관으로 임명하여 이단 심문과 그 운영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중죄자는 속권에 넘겨 처형케 했다. 이리하여「종교재판」으로 불리는 저 유명한 이단심문이 시작되었다.

이 제도는 분명히 무서운 제도였다. 과장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이 얼마나 죽어갔는지 모른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언급하고 싶지 않은 가장 슬프고 가장 어두운 장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에 있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는 관용이란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진리는 하나일 뿐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없었다. 이 진리를 거부하는 자에게 중세 사람들에게는 처벌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종교재판이 북이태리와 남부프랑스에서 자행되고 있을뿐 전반적이 아니었다는 점,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종교재판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페인에서 15세기에 그 절정을 이룬 종교 재판은 교회가 아니라 주로 국가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세의 가장 큰 비극의 하나였다. 불관용에서 빚어진 이러한 잔혹성은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치지 않았고 18세기 계몽주의에 이르러 비로서 소멸되었다.

한편 가톨릭교회에서는 종교개혁때 신앙문제의 최고 기관으로「검사성성」(檢邪聖省)을 설치하여(1542) 신앙의 순수성을 감시하며 특히 이단과 이교 여부를 판단케 했다. 그런데 이 기구가 최근에 와서(1965)「신앙 교리성성」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최석우 신부ㆍ한국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