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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특집] 십자가의 길 기도 - 기원과 그 의미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02-25 수정일 2020-02-25 발행일 2020-03-01 제 3184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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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과 죽음 묵상하며 그분 가신 길에 동행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걸었던 실제 장소 따라 행렬하던 전통
후대에 각 처(處) 생겨나면서 오늘날 형태로 정착된 기도
그저 입으로 외는 기도 아닌 수난 동참하는 ‘실천’으로 여겨
해마다 사순 시기가 다가오면 신자들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더 열심히 바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성당을 찾기 어려운 신자들도 많지만, 우리는 비단 14처 앞이 아니더라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할 수 있다. 이번 사순 시기 십자가의 길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쳐보면 어떨까.

■ 십자가의 길의 기원,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의 시작은 초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세기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걸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힌 자리를 방문하곤 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를 통해 우리가 얻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정형화된 처(處)나 기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일어난 장소를 따라 행렬하던 전통은 오늘날 십자가의 길 기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용어는 중세시기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보나벤투라 등의 성인들도 이 십자가의 길에 큰 관심을 두고 참여했다. 성인들은 십자가의 길을 방문하는 순례의 여정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로만 여기지 않았다. 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순례 자체가 신자들의 신심을 수련하는 기도로 봤고, 많은 신자들이 이 십자가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신앙선조들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그저 입으로 외는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 죽음을 묵상하며 그 길에 동행하는 ‘실천’으로 여겼다. 사진은 충남 보령 대전교구 갈매못성지 ‘승리의 성모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 놓인 십자가의 길 14처 중 제1처 청동 조각 작품.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그리스도가 머문 곳, 14처

오늘날 우리는 14처를 만들어 성당에 설치하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곤 한다. 각 처(處)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며 이동하던 중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장소들이다. 이렇게 처를 만들어 기도하는 관습은 12세기경부터 시작된 풍습이다.

신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걷고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먼 땅을 순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순례길은 때로 이교도들에 의해 막혀있는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순례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도시에도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을 본 딴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처다. 각 처를 따라가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행위는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행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십자가의 길 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곳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원들이었다. 작은형제회 회원들은 수도원이나 경당에 처를 설치했고, 이를 통해 십자가의 길 기도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1688년부터는 모든 성당에 십자가의 길 처가 설치될 수 있도록 허용됐다. 이를 공포한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은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십자가의 길이 교회 내에 도입됐지만, 처의 수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클레멘스 12세 교황은 1731년 십자가의 길 14처를 승인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십자가의 길을 마련했다. 이 14처는 ▲사형선고를 받음 ▲십자가를 짐 ▲첫 번째 넘어짐 ▲마리아를 만남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짐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음 ▲두 번째 넘어짐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함 ▲세 번째 넘어짐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함 ▲십자가에 못박힘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둠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무덤에 묻힘 순이다.

이후 19세기경에는 14처와 십자가의 길 기도가 전 세계로 퍼져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기도로 바쳐져왔다. 현재도 14처로 이뤄진 십자가의 길을 사용하고 있지만, 종종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짐을 강조하는 의미로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15처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 십자가의 길이 신자들의 신심수양을 위한 실천임을 설명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 신앙선조들의 십자가의 길, 성로선공

십자가의 길은 우리 신앙선조들이 열심히 바치던 기도 중 하나다. 신앙선조들은 십자가의 길을 성로선공(聖路善功)이라고 불렀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의미만 생각한다면 ‘성로(聖路)’라는 말로도 충분하다. 또 굳이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면 기도를 뜻하는 ‘신공(神功)’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앙선조들은 굳이 십자가의 길 기도에 만큼은 ‘선공(善功)’이란 말을 사용했다. 선공은 선행이나 선업(善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존경할만한 행동이나 찬양할만한 업적을 의미하는 말이다. 신앙선조들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그저 입으로 외는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 죽음을 묵상하며 그 길에 동행하는 ‘실천’으로 여겼던 것이다.

신앙선조들이 성로선공을 대했던 마음은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천주성교공과」는 “예수의 십자가상에서 받으신 고난을 묵상함으로 마음이 감동하여 허물을 고쳐 자기를 새롭게 하며, 혹 의덕을 보존케 한다”면서 십자가의 길이 신자들의 신심수양을 위한 실천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도무지 이 선공(십자가의 길)이 가장 천주의 뜻에 흡합한(흡족하고 알맞은) 바”라면서 “연령(煉靈)을 구하기에 크게 돕는 바”라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쌓을 수 있는 선행도 언급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