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열강·교회에 대한 반발… 끝내 비극 부른 증오와 폭력 비밀종교의식 공유하던 의화단 민생파탄으로 조직 급속 확대 청일전쟁 후 위기 몰린 서태후 서양과의 투쟁에 의화단 이용 사제·신자 살해 등 참극 불러
■ 서태후의 개입과 의화단사건
특히 의화단사건을 초래한 원인은 이를 이용하고자 한 권력투쟁 때문이었다. 의화단은 서태후의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함으로 국가 위기가 고조되자 서태후(西太后)는 광서제 중심의 변법파를 숙청하고 재집권을 노렸다. 1900년 1월 서태후는 광서제의 폐위를 시도했으나 열강의 간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의화단 세력으로 열강을 중국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1900년 6월 11일 의화단이 북경을 공격하자, 6월 21일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화단과 관군의 연합세력이 각국 공사관을 공격했다. 북경의 천주당도 공격 대상이었다. 프랑스 병사가 지키고 있던 북당을 제외하고, 동·서·남당이 모두 훼손됐다. 연합군은 폭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의화단을 제압했고, 북경의 동교민항(東交民巷, 외국 공사관이 있었던 지역)은 55일 만에 의화단의 포위에서 풀렸다. 청조는 1901년 9월 7일에 열강과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 12개조를 체결했다. “중국은 각국에 배상금 백은 4억5000만 량을 1940년까지 39년간 연이율 4리로 원리금 합계 9억8000만 량을 배상한다. 북경의 동교민항의 민간거주지를 사관구(使馆區, 대사관 지역)로 설정하고, 각국 군대가 주둔해 보호하며, 중국인의 경계 내 거주를 불허한다” 등의 내용이 신축조약에 포함됐다. 이 조약으로 열강에 대한 중국의 종속과 굴욕감, 반그리스도교 정서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 반그리스도교를 넘어 사랑과 평화의 길로 의화단사건으로 중국교회 주교 4명, 신부 31명, 3만여 명의 신자들이 희생됐다. 희생된 천주교인들은 비오 12세 교황 때부터 복자 반열에 올랐다. 2000년에는 소화 데레사 축일인 10월 1일에 로마에서 중국천주교회 120위 시성식이 있었다. 이 중 86위가 의화단사건으로 순교한 성인이었다. 이에 대한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의 반발 역시 거셌다. 8개국 연합군 침략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에게 적국 열강의 종교로 인식됐다. 중국천주교회의 아픈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의화단사건은 우리에게 더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회, 어떠한 기득권도 먼저 포기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선교와 복음화가 그리스도교의 세력화가 아니라 종족을 넘어 인류가 사랑과 평화의 길로 나가는 과정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중국교회에서도 이 길을 찾아간 이들이 이어졌다. 중국 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소화 데레사는 전교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역시 중국 선교를 열망했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방법으로 반그리스도교를 넘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길을 두 성인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다. 전교의 달 10월을 지내며, 중국교회를 위해, 각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이들과도 평화의 길을 이어가고자 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특히 의화단사건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두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가 먼저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다. 민심을 잃은 종교,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이 오지 않고 그들이 외면한 그리스도교, 그들을 품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김윤선(소화 데레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와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