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커버스토리]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입니다’ - 한국의 순교자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4-08-05 수정일 2014-08-05 발행일 2014-08-10 제 2907호 11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시복·시성식은 우리 위한 은총의 시간, 불꽃 신심 타오르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식이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거행된다. 시복식을 교황이 직접 주례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시복(諡福)이란 가톨릭교회에서 성덕이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이에게 복자라는 칭호를 주어 특정 교구, 지역, 국가 혹은 수도단체 내에서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황의 선언으로 정의된다. 성인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경 받기 때문에 공경의 지역적 범위에서 복자는 성인과 구분된다.

시복과 복자

한국교회 역사에서 시복식은 두 차례 열린 바 있다.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1925년 7월 5일,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1968년 10월 6일에 각각 열렸다. 두 차례 모두 시복식 장소는 로마였다. 이들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돼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을 갖고 있다.

시복식 또는 시성식을 통해 순교자가 복자 또는 성인이 되는 것일까? 흔히 ‘시복식(시성식)을 통해 복자품(성인품)에 올랐다’거나, ‘복자반열(성인반열)에 올랐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본다. 이에 대해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장신호 신부는 “순교자는 시복식이나 시성식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느님 곁에서 복자와 성인으로 복락을 누리고 있으므로 시복식이나 시성식이 갖는 의미는 순교자들이 복자(성인)임을 전례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103위 성인 시성 청원인을 지낸 수원교구 손골성지 전담 윤민구 신부도 “시복식(시성식)은 순교자들의 천상세계에서는 무의미한 일로 순교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복자(성인)반열’이라는 말은 과거 신분제적 사고가 깔려 있어 적절한 용어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윤민구 신부는 다른 한 편으로 “지상세계에서 본다면 많은 순교자 중에서 특히 신자들에게 모범과 도움이 되는 순교자를 선정해 복자(성인)로 선포한다는 의미에서는 시복식(시성식)을 통해 복자나 성인이 된다고 해서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순교와 순교자

16일 광화문에서 시복되는 124위 역시 모두 순교자다. 한국교회 역사상 3차례의 시복식은 모두 순교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한국교회를 ‘순교자의 땅’, 한국교회 신자를 ‘순교자의 후손’이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그런 만큼 한국교회 신자들이 가장 자주 듣는 어휘 중 하나도 ‘순교’다. 순교란 무엇일까? 순교는 사전적으로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침’,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과거에는 순교라는 말보다 ‘치명’(致命)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인 적도 있다. 치명은 글자 그대로 ‘목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름’이라는 뜻으로 적극성과 능동성의 의미가 강조된 말이다. 결국 순교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고 풀이된다.(「서울대교구 시복시성자료집」 57쪽)

사전적 정의 외에 가톨릭에서는 순교와 순교자를 규정하는 전통적인 기준이 있다. 순교자와 박해자 각각에게 질료적(質料的) 순교 사실과 형상적(形相的) 순교 사실이 증명돼야 한다는 점이다.

순교자 측에서 질료적 순교는 ‘실제로 죽는 것’,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며 형상적 순교는 ‘신앙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을 말한다. 박해자 측의 질료적 순교는 ‘죽인 행위 또는 죽음의 직접 동기가 된 가해 행위’를, 형상적 순교는 ‘신앙에 대한 증오’ 또는 이러한 증오가 주된 동기가 돼 죽게 한 것을 이른다.

한국교회가 현재 시복을 추진하는 대상 중에는 ‘증거자’로 최양업 신부가 있다. 증거자의 시복시성 절차는 순교자와는 독립적으로 진행되지만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나 ‘백색 순교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순교자나 박해자에게 요구 되는 질료적, 형상적 순교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땀의 순교자’나 ‘백색 순교자’는 비유적, 문학적 의미로만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법적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증거자의 경우 죽은 사람은 있지만 죽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 그 순교의 역사

16일 시복되는 순교자 124위는 한반도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일정한 시기에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는 이유로 시복이 ‘통합추진’ 됐다. 124위 순교자 중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윤지충 (바오로)이다. 순교자의 시복이 통합추진 될 경우에는 시복 안건 제목에 대표순교자의 이름이 앞에 등장한다. 윤지충은 1791년 12월 8일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다.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의 시복을 앞두고 신앙 선조들이 100년 가까이 이겨낸 순교 역사가 궁금해진다. 윤지충이 순교한 1791년의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라는 4대 박해에서 1만 명 내외의 순교자가 나왔다. 4대 박해 이외에도 정사박해(1797년),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등 크고 작은 박해는 박해시기 내내 상시적으로 지속됐다.

순교자 수에 대해서는 무명 순교자가 많은데다 문헌기록이 부족해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렵다. 연구자에 따라 크게 잡아도 1만 명이 넘지 않는다는 견해부터 3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던 정조가 1800년 6월 사망하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형태로 시작됐다. 신유박해에서 정약종과 홍낙민, 최창현,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는 등 남인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희생됐다.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 사건은 신유박해를 가열시키는 원인이 됐고 외국인 최초의 신부인 주문모 신부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기해박해를 거치며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과 이성례, 교회의 회장 등 100명 이상의 순교자가 나왔다. 조선교회는 다시 성직자 없는 교회가 됐고 교회 재건 운동에 큰 타격을 받았다. 기해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문이 거의 제기되지 않아 신유박해와는 달리 정치성을 띄지는 않았다.

병오박해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1846년 6월 순위도에서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 체포 후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출현해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3명이 순교한 사실에 대해 항의했다는 것이 이전 박해와는 다른 점이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은 20년 후 병인박해의 서막이었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의 체포로 공식적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8000명 이상이 순교한 최대의 박해이면서 마지막 박해였다. 병인박해를 끝으로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처형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병인박해는 1873년 12월 24일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고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면서 막을 내렸다. 병인박해 종식 후 20년이 지난 1894년이 돼서야 한국교회는 박해 이전의 교세인 신자수 2만 명을 회복했다.

하느님의 종 124위는 기해박해 이전 순교자가 86위로 주로 초기 순교자가 중심을 이룬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79위 순교자 시복식을 표현한 성화.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68년 10월 6일 로마 교황청에서 열린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례로 거행된 103위 시성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박지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