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성당들의 이야기다. 인생이 어느 단면만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성당도 지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공존했던 것들, 곧 정치와 경제, 종교와 사회, 문학과 예술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강한수(가롤로) 신부가 르네상스 시대 성당에 담긴 이야기들을 매주 풀어나간다. 피렌체의 유명한 바르젤로 미술관(Museo Nazionale del Bargello)에 가면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의 다윗 청동상과 산 조르조 조각상, 그리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바쿠스 조각상과 브루투스 흉상 등 미술책에 나올 법한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원래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고위 행정관 포데스타(podestà, 중립을 위해서 외국인을 임명)가 머무는 건물이었는데 13세기에 지어져서 19세기 중엽까지 경찰서, 법정, 감옥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302년 어느 날 이곳의 법정(현 도나텔로 방)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한 건의 판결이 선고됩니다. 당시 피렌체는 황제당(기벨린)과의 전투에서 이긴 교황당(구엘프)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교황당은 얼마 가지 않아 교황과 긴밀한 동맹을 원하는 흑파와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는 백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러한 혼란 중에 백파가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피렌체에는 장차 이탈리아를 넘어서 온 세상이 기억할 시인 한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며 절체절명의 위험에 처해 있는 그는, 바로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백파에 가담했고, 흑파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등에 업고 피렌체를 위협하자 교황과 협상하기 위해 백파를 이끌고 로마로 갔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단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파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나, 단테만은 로마에 머물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피렌체는 흑파의 손에 넘어갔고, 1302년 피렌체 법정은 단테의 재판을 진행하여 로마에 억류된 그의 항변은 듣지도 않고 2년의 유배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6년 후인 1308년 백파가 피렌체를 재탈환하려는 음모에 단테가 가담했다는 이유로, 단테는 종신 유배형 곧 아르노강의 베키오 다리에 다시는 갈 수 없는 영구적인 피렌체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단테가 「신곡」을 1308년에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해와 종신 유배형을 받은 해가 같은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현실이 단테의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르젤로 미술관의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당시 포데스타 경당) 제단에 ‘파라디소’(paradiso, 천국)라는 제목의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조토(Giotto di Bondone·1267-1337)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이 그림 속에는 파라디소로 향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 있는 단테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단테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후에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토는 나이 든 단테의 모습이 아닌 정의를 위해서 전투에 나서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잊지 못하는 피렌체 시절의 열정 가득한 젊은 단테의 모습을 남겨주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을 두 살 아래의 조토는 피렌체를 주름잡았을 당시의 단테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토는 최초로 단테의 초상을, 그를 단죄한 법정의 성당에 그것도 하느님 나라의 성인들 무리 속에 그려놓았습니다. 조토는 단테에게는 죄가 없다고, 오히려 「신곡」에 나오는 것처럼 그를 단죄한 자들이 지옥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단테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피렌체에서 추방된 단테가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조토를 다시 만난 것은 페라라에서입니다. 화가이며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는 “조토가 단테에게 매우 좋은 친구였다”고 말합니다. 오랜만에 조토를 만난 단테는 고향 친구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조토가 거기서 그림 작업을 의뢰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또한 조토는 젊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1375)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얼마나 가까웠는지 보카치오가 “피렌체에서 조토만큼 못생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사실인 듯, 조토가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에서 인생 최고의 역작을 작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멀리 외지에서 작업을 할 때면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지냈는데, 그가 파도바에서 작업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날 단테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비범한 외모를 쏙 빼닮은 그의 자녀들이 작업장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단테는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찌 저리도 못생긴 아이들을 낳았는가?”하고 조토에게 장난기 섞인 우스갯소리를 건넸습니다. 이에 조토가 “여보게 밤은 어둡지 않은가?”하고 응수했다는데, 그 순간 멈칫하다 서로를 쳐다보며 박장대소했을 대가들의 짓궂으면서도 소탈한 모습이,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듯, 아련합니다. 14세기 전후 아직은 세상 속 작은 도시인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살 터울의 절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펜을 들고 다른 사람은 붓을 들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이전에 보고 들은 것과는 다른 그들만의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살았던 오래된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는 중세 시대의 신 중심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인문주의가 발생했고, 경제 분야에서는 양모 무역과 은행업의 발전으로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중상주의가 생겨났습니다. 이와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새로움은 천 년 전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자취를 감췄던 그리스와 로마 곧 고전이 부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문주의의 발달이 대중의 종교적 신심을 대체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삶 안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적 가치는 문학과 예술, 경제 전반에 걸쳐 더 활발히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 방식에 인문주의와 고전주의가 도구로 사용된 것인데, 이런 새로운 표현의 물결이 문학 분야에서는 단테에게서 그리고 미술 분야에서는 조토에게서 처음으로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대의 조심스러운 변화를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시대의 이름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200년이 지난 1550년경 조르조 바사리의 저서에서인데, 그는 생물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지듯 미술도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중세 미술을 넘어서서 다시 태어나는 이 시대가 미술의 ‘리나시타’(Rinascita), 곧 미술의 재생(부활)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이름이 이 시대를 지칭하게 된 것은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가 그의 역사서에서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부터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1998년 사제품을 받았다. 2001~2008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했고, 2017년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고대·중세 건축사 연수를 했다. 현재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통합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