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신앙의 증언(묵시 19,11-21)

요한 묵시록 19장 그리스어 원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Καὶ εἶδον(그리고 나는 보았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각적 보고가 아니다. 성경에서 ‘본다’는 것은 사태의 겉모습을 목격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 안으로 들어가는 사건에 가깝다. 원문에서 이어지는 말,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 역시 이야기의 웅장함이나 신비감을 덧붙이기 위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해석해 오던 관점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리는 신학적 신호다. 요컨대, ‘열린 하늘’은 우리의 눈을 하늘의 눈, 곧 하느님의 뜻을 비추는 자리로 옮겨 놓는다. 에제키엘이 유배의 절망 한가운데서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보았다”(에제 1,1)라고 증언했듯, 요한도 로마 제국의 화려함과 사치, 그 압도적인 질서의 한복판에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본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더 이상 제국의 계산과 힘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으로 역사를 새롭게 읽겠다는 신앙의 결기이자 조용한 외침이다. 그 열린 하늘 아래, 백마를 탄 이가 나타난다. 백마는 고대 세계에서 전장의 승리를 상징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승리는 누군가를 꺾고 나서 차지하는 전리품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백마는 비교우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백마는, 하느님 앞에서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기 위해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반복되는 ‘흰색’은 단순한 순결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구원과 인정의 색이다. 흰 말과 흰 옷은 상처를 딛고 견뎌 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하느님의 위로다. 그러므로 백마는, 우리 삶이 어떤 모양으로 흔들리든, 하느님께서 끝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성실함 자체를 상징한다. 그래서 백마를 탄 이는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묵시 19,11)이라 불린다. 성실함은 감정의 온기가 아니라 약속의 무게다. 하느님은 역사를 시작하신 분일 뿐 아니라, 그 끝을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묵시 19,11)이시다. 여기서 싸움은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아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싸움은 언제나 억눌린 이들을 위한 심판의 자리였다. 시편은 이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께서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성실하게 다스리시리라.”(시편 96,13) 이사야 예언자 역시 메시아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이사 11,4)라고 그린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심판은 파괴나 단죄의 잔혹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구원의 외침이 마침내 역사 위로 터져 나오는 사건이며, 진실이 더 이상 밀려나지 않는 순간이다. 이제 요한은 백마 탄 이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묘사한다. 그의 옷은 피에 젖어 있고, 그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온다. 이 장면은 자칫 모순처럼 보인다. 날카로운 칼이 심판의 도구이고 백마 탄 이가 승리를 상징한다면, 왜 그의 옷은 피에 젖어 있는가. 피에 젖은 옷은 승리와는 무관한 패배의 흔적이 아닌가.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이 모순된 두 이미지를 구약 예언 전통 안에서 일관되게 연결한다. 먼저, 입에서 나오는 칼은 물리적 무기가 아니다. 이는 이사야가 말한 “입에서 나오는 막대 …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이사 11,4 참조), 곧 하느님의 말씀에 의한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들과 상응한다. 악은 무력 충돌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 앞에서 제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피에 젖은 옷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이미지는 이사야서 63장의 심판자 환시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이사 63,1–3 참조) 그곳에서 피는 무차별적 학살의 흔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제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말하자면, 말씀의 심판은 공허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억압과 폭력을 낳은 악의 체계를 반드시 무너뜨리는 사건이라는 선언이다. 피는 폭력의 흔적이 아니라, 정의가 지연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백마 탄 이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다. 지혜서 18장 15절에 ‘말씀’이 ‘전사’처럼 단호한 심판의 형상으로 등장하듯, 하느님은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말씀으로 현실을 바꾸신다. 말씀은 승리의 선언이 아니라 승리 그 자체다. 백마 탄 이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 또한 흰 말과 흰 아마포를 입고 있다. 이는 그들이 전투에 가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지켜 온 증언의 삶, 침묵 속에서 견뎌 온 신앙의 시간이 하느님 앞에서 옳았음이 선포되는 순간을 뜻한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끝까지 진리를 놓지 않는 인내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어떤 순간에도 지지 않는다는 믿음과 그 진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자가 흰 말과 흰 아마포를 입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백마 탄 이와 함께할 자격을 얻는다. 이제 천사는 새들에게 “하느님의 큰 잔치”(묵시 19,17)로 오라고 외친다. 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와 분명히 대비된다. 하나는 구원의 식탁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식탁이다. 에제키엘이 곡과 마곡의 패배를 새들의 잔치로 예언했듯(에제 39,17–20 참조), 요한 묵시록은 악의 종말이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되돌릴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붙잡히고, 그 추종자들은 말씀의 심판 앞에서 무너진다. 요한 묵시록 19장의 환시는 심판의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말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가. 힘의 언어인가, 아니면 진실의 언어인가. 백마를 탄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성실한 약속을 되새기게 한다. 요컨대, 진리가 사라지고 혐오와 비난의 언어가 광기의 춤을 추는 시대에도, 하느님의 말씀은 끝내 현실을 심판하고 바로잡는다는 것.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논리 속 처세의 기술이나 변호가 아니라, 신앙 증언의 성실함이다. 진리를 위해 조용히 견디는 우리의 하루 속에서, 백마 탄 이의 승리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 그동안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을 집필해 주신 박병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5-12-25 제3471호 23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 19,1-10)

‘할렐루야’라는 외침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히브리어 ‘할랄(הלל, 찬양하다)’과 하느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야(יה)’가 결합된 말, 곧 하느님을 향한 가장 큰 찬미의 호응이다. 이 외침이 터져 나오는 까닭은 분명하다. 대탕녀 바빌론이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바빌론을 경제적 사치와 부의 폭력으로 이해해 왔다. 바빌론으로 은유 되는 로마의 번쩍이는 문명 뒤편에서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제국의 욕망을 가차 없이 고발했다.(17–18장) 이제 그 고발은 한 시대의 끝맺음으로 응답받는다.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묵시 19,2)는 표현은 열왕기 하권 9장 7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제벨의 손에 죽은 나의 종 예언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모든 종의 피를 갚게 해야 한다.” 구약 전통에서 피의 복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이들에게 내리는 최종적 심판의 은유였다. 그리고 그 심판은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묵시 19,3)는 표현이 바로 그 비극적 결말을 연기로 형상화한다.(이사 34,14; 묵시 14,11 참조)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다시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 4~5장에서 천상과 지상의 만남을 상징하던 이들이, 바빌론의 몰락 앞에서 또다시 하나의 찬미로 모인다. 그 하나 됨의 중심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이 찬란히 서 계신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자연스레 “아멘, 할렐루야!”(묵시 19,4)가 된다. 시편 106편 47절의 외침처럼,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하느님을 향해 수렴되어 간다. 5절은 그 장엄한 찬미 안으로 더 많은 존재가 초대됨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모든 종, 낮은 이든 높은 이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은 모두 그 찬미 안으로 부름을 받는다. 마지막 시대에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노래하게 된다는 이 장면은 종말 묘사의 오랜 전통을 잇는다. 그 찬미의 소리는 거대한 물살 같고, 굉음의 천둥 같고, 무수한 무리의 목소리 같다.(시편 113,1; 134,1; 135,2 참조) 하느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로,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찬가로 빚어내신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곧 하느님에서 어린양으로 이동한다. 어린양의 혼인날이 도래했고, 신부는 이미 단장을 마쳤다.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아내로 그리던 예언자들의 오래된 이미지(호세 2,16; 이사 54,6; 에제 16,7–8 참조)는 이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공동체의 관계로 확장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고(마르 2,19–20; 마태 22,1), 바오로는 이 이미지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2코린 11,2) 어린양의 신부는 특정 집단의 특권적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묵시 5,9; 7,14; 14,3–4 참조) 신부가 몸단장을 마쳤다는 표현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교회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지만(에페 5,26–27), 그 은총은 특정 제도나 사람들의 이름으로 독점되지 않는다. 이미 앞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모든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고, 바빌론의 몰락과 함께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권세가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약하고 상처투성이지만,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모든 민족이 속량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묵시 5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입은 “고운 아마포 옷”(묵시 19,8)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입히신 의로움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록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 책이 ‘행복’을 위해 쓰였음을 기억한다. 그 행복은 세상이 약속하는 부·명예·권력의 언어에서 찾을 수 없다. 하느님과 어린양과의 일치, 상호 개방과 존중, 그리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요한 묵시록이 가리키는 행복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며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한다. 하느님의 편과 어린양의 자리에서 흐르는 것은 언제나 ‘보편’의 은총이며, 용과 짐승과 대탕녀 바빌론의 편에 흐르는 것은 오직 ‘배타성’과 그로 인한 폐쇄적 집착뿐이라는 것을. 10절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로 소개된다. 그들은 천사와 같은 위상을 부여받지만, 천사의 권위는 더 이상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 위치가 아니다. 천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동료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하느님을 따라 사는 이들, 하느님의 구원 안에 초대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 바빌론의 멸망은 인간 사이를 가르던 모든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와 배제와 증오가 사라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다시 선포하는 일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가 말한 한 문장이 이 지점에서 더욱 깊게 와닿는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인생의 역사」 168쪽)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부와 사치, 그리고 사람(묵시 18,9-24)

울며 가슴을 치는 장면은, 예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한다. 티로의 멸망 앞에서 바다의 임금들이 통곡하던 모습(에제 27,16–18 참조)이 그러했고, 오늘 세상에서도 화려함에 매달리던 욕망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그렇게 절망 앞에 무너져 내린다. 땅의 임금들이란 결국 부에 대한 집착이 무너질 때 폭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대변하는 얼굴들일 것이다. 그런데,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 결핍과 가난 속에 있었다. 세상의 화려한 부는 가난한 자에게 ‘넘사벽’처럼 보였지만, 요한 묵시록은 그 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울어야 할 이는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와 사치를 붙잡던 이들이어야 했다. 그 울음은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삽시간에 닥칠 불가역적인 심판의 울음이었다.(여기서 ‘삽시간’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단 하나의 시간’을 뜻한다.) 부와 소유를 향해 목을 매고 사는 우리 역시, 늘 급박한 울음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더디 오지만, 결핍과 상실은 갑자기 그리고 무참하게 삶을 무너뜨리곤 한다. 본문은 이러한 부의 붕괴를 상품 목록이라는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12절부터 나열되는 물품들은 에제키엘 27장의 목록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활발한 무역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장로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는 동방과의 교역에서 연간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얻었다고 한다.(1세스테르티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고,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는 오늘날 가치로 거의 1조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금, 은, 보석과 진주는 바빌론의 불륜을 상징했던 사치의 언어이다.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도 마찬가지다. 부와 사치를 하느님의 뜻과 대립하는 힘으로 바라보는 요한 묵시록의 시선은 보석의 화려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관철된다. ‘비단’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극치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향나무는 정교히 다듬어져 귀족의 탁자로 놓였고, 상아 공예품과 대리석 장식은 부유층의 집안을 가득 채웠다. 계피와 향료 역시 귀족적 취향의 일부였는데, 특히 계피는 인도에서 건너온 고급 향이었고, 귀족의 향수, 연회장의 공기 그리고 옷장과 침실의 향을 채우는 데 쓰였다. 한 리브라, 곧 300g의 계피는 2000데나리온에 해당했으니, 노동자가 5년 반 동안 일해 버는 임금과 맞먹는 가치였다. 올리브기름과 고운 밀가루는 당시 서민들이 심각하게 겪던 결핍을 떠올리게 한다. 물가가 치솟아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그 현실 속에서, 이 식품들은 단순한 재화를 넘어 굶주림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 등장하는 단어 - 노예, 곧 σώμα, ‘몸’ - 는 가장 잔인한 진실을 드러낸다. 부와 사치의 정점은 결국 사람을 몸뚱이, 노동 기계, 객체화된 신체로 만든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는 물건이었고, 오락과 향락을 위해 소모되는 존재였다. 인간의 존엄은 값으로 환원되었다. 요한 묵시록은 말한다. 부와 사치는 인간을 ‘사람답지 않게’ 만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의 구조가 된다. 14절에서 ‘네 마음이 탐내던 열매’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물질과 권력이며, 그것은 이제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선언된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 그 절정에 있다. 모든 선장, 선객, 선원, 바다에서 일하는 이들까지도 바빌론의 몰락을 보며 울부짖는다.(17-20절 참조) 그들은 바다 무역의 번영을 등에 업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돈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지는 그들의 운명은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이며,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살해된 이들의 피(24절 참조)는 증언의 흔적이고, 그 증언은 바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다. 세상의 사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만, 신앙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존재로 회복시킨다. 부와 사치는 한때 달콤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생활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대우받는 것,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 우리의 존엄이 가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욕망의 자리, 대바빌론(묵시 18,1-8)

요한 묵시록 18장은 에제키엘서 27~28장을 선명히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있다. 옛 예언자는 몰락해 가는 티로를 향해 장송곡을 불렀고(에제 27장 참조), 그 도시 위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을 단호한 어조로 선포했다.(에제 28장 참조) 요한 묵시록은 그 오래된 비애와 심판의 언어를 되살려, 이번에는 대바빌론의 추락을 노래한다. 로마 제국의 은유로 기능하는 대바빌론은 부와 힘이 응축된 무대였고 사치와 문화가 폭발하는 도시였다. 이런 대바빌론이 추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상의 해석이며 그 해석을 요한 묵시록 18장은 과거 예언자들의 애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문명의 가장 화려한 무대가 돌연 폐허의 무대로 전환된다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해석의 다짐이다. 그 다짐은 ‘다른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다른 천사가 나타나고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지는 장면은, 마치 구약에서 하느님 영광의 발현이 풍성히 묘사되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에제 43,2 이하 참조) 빛은 단순한 조명 이상의 의미를 띤다. 그것은 한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가 문을 열기 직전, 경계 위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임을 빛은 가리킨다. 천사가 힘찬 목소리를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우렁찬 외침을 암시한다.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외침이 이 지상을 향해 울려 퍼진다. 이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결의에 찬 외침이다. 천사의 목소리는 ‘무너짐’에 대한 선포다. 대바빌론의 몰락은 단지 도시가 파괴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마귀들의 거처, 더러운 영들의 소굴, 그리고 더러운 새들의 둥지뿐이다. 묵시문학에서 ‘더러움’은 단순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질서가 무너진 뒤 남는 세상의 잔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된 예언서들이 폐허의 자리에서 들짐승과 재앙의 새들을 불러 모았듯(이사 13,21–22; 34,11–15; 바룩 4,35; 예레 50,39 참조), 요한 묵시록은 대바빌론을 더러운 것들의 본령으로 선언한다. 인간 문명의 정점이었던 곳이, 몰락의 순간 가장 낮고 추한 것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 이 아이러니가 묵시의 핵심 서사다. 대바빌론이 왜 이런 추한 자리로 전락했는지 요한 묵시록은 아주 묘하게 짚어낸다. 그 중심에는 ‘난잡한 불륜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 술은 특정 행위의 상징이라기보다, 모든 민족을 하나의 욕망의 연동 장치로 이해시키려는 은유다. 힘을 향한 갈망, 주류의 대열에 끼어들고자 하는 조급함, 사치에 자신을 비벼 넣어 존재를 증명하려는 충동, 이 모든 것이 한 잔의 술처럼 서로 뒤섞인다. 술을 마시면 가려지는 것처럼, 욕망에 취하면 자기 파멸의 흔적도 흐릿해진다. 요한 묵시록은 이 욕망의 구조를 ‘사치’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 그러나 그리스어 ‘스트레노스(στρῆνος)’는 단순한 사치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교만, 거만, 건방, 욕망의 과잉을 동시에 가리키는, 인간 영혼의 팽창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사치는 물질적 번영만이 아니다. 영적 우월감, 정신적 허영, 자리를 차지하려는 끝없는 경쟁심 모두가 대바빌론의 얼굴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적 번영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욕망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이 본문은 특정 시대에 갇히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욕망 앞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4절에서 하늘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와라.” 이 목소리는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초대다. 하느님을 잊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종종 성공의 서늘한 그림자다. 성취와 번영의 달콤한 향이 오랫동안 영혼을 감싸면, 어느 순간 하느님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언제나 ‘나오라’고 외쳤다.(이사 48,20; 예레 50,8; 51,6.9.45 참조)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은 종종 자기 욕망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6절에서는 다시 ‘잔’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미 14장에서 살펴보았듯, 이 잔은 하느님의 분노가 담긴 상징이다. 대바빌론이 누린 사치만큼, 아니 그 사치의 깊이만큼 하느님의 심판은 되돌아온다. 욕망이 잔을 채웠다면, 심판 또한 잔에 가득 찰 것이다. 대바빌론의 목소리는 무례하고 허영으로 가득하다. “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니 슬픔도 모를 것이다.” 이 말은 구약의 바빌론과 티로가 과거에 외쳤던 교만의 울림을 되풀이한다.(이사 47,7–9; 에제 28,2 참조) 하느님의 자리는 비워둔 채, 스스로의 힘과 화려함에 취한 이들의 고집스러운 독백, 그 마지막 회오리가 바로 대바빌론이다. 이 교만의 도시는 결국 흑사병, 불, 붕괴의 잔해 속으로 추락한다.(8절) 큰 능력 앞에 인간 문명의 허세는 먼지처럼 흩어진다. 예언자들이 오래전 예고했던 그 무거운 심판의 단어들이, 이제 다시 18장의 공기를 채운다.(이사 47,9; 예레 50,32 참조) 많은 학자가 이 장을 로마 제국 번영에 대한 영적 비판으로 읽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다. 권력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 길게 흔들린다. 거대한 도시는 무너져도, 욕망의 도시는 인간 마음 안에서 여전히 건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의 외침은 고대 로마를 향한 비판이기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무너져야 할 대바빌론, 우리의 과도한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은 어디에 있는가? 그 도시로부터 “나오라”는 부름은 결국, 나 자신이 만든 욕망의 감옥에서 제발 벗어나라는 자유에의 호소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악의 내부 분열(묵시 17,15-18)

대탕녀 바빌론으로 장면이 옮겨간다. 그녀는 ‘큰 물’ 곁에 앉아 있다. 요한 묵시록이 소개하는 ‘큰 물’은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 백성과 대척점에 있던 여러 제국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 익숙하게 사용되던 이미지다.(이사 8,7; 예레 46,7-8; 47,2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이미지를 “백성들과 군중들과 민족들과 언어들”(17,15)이라는 네 가지 범주로 해석한다. 요한 묵시록이 세상의 보편성을 규정할 때 반복하던 방식이 이번에도 이어진다.(묵시 5,9; 7,9 등 참조) 말하자면, 대탕녀 바빌론의 공간은 특정 제국 또는 지역에 갇힌 역사적 세력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뒤엉켜 있는 어떤 거대한 영향력으로 소개된다. ‘물’의 이미지를 고대 바빌론의 유프라테스강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시대는 로마 제국의 시대였다. 요한 묵시록은 오래된 바빌론을 불러내어 로마 제국을 비판적으로 가리키는 은유적 장치로 사용한다. 옛 제국의 이름이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제국의 상징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한 단어가 시대를 건너며 얼마나 완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바빌론은 ‘지명’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거대 권력의 이름이 되고 그 거대 권력이 자리 잡은 곳에 세상의 모든 이는 마치 신을 경배하듯 모여들게 마련이다.(묵시 13,4 참조) 문제는 16절에서 발생한다. 대탕녀 바빌론이 오히려 열 뿔과 짐승에게 공격당한다. 앞서 그녀와 가까이 붙어 있던 세력들이 돌연히 등을 돌리는 장면이다. 역사적 해석은 이것을 로마를 위협하던 주변 민족들의 저항으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것은 특정 전투의 기록이 아니라, 악의 내부에서 시작되는 자멸의 논리이다. 로마 제국은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린 파멸은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세상의 화려한 권력이 곧 허무의 다른 이름’이라는 묵시적이고 영성적인 통찰에 가깝다. 바빌론의 파멸을 묘사하는 언어는 에제키엘서 23장 25절부터 29절까지의 예언을 그대로 끌어온다. ‘탕녀’처럼 타락한 예루살렘이 벌거벗겨지고 짓밟힐 것이라는 예언이, 여기에서는 바빌론에게 적용된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이 바빌론을 단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제국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종교적 타락의 형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을 먹는다’(묵시 17,16 참조)는 표현 또한 예언서의 심판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다.(예레 34,22; 호세 2,5 참조) 우리가 이미 읽었던 요한 묵시록 2장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알려준다. 우상 숭배적 경제 구조와 타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조차 ‘탕녀’ 이미지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경고 말이다.(묵시 2,14.20–22 참조) 요한 묵시록에게 탕녀의 이미지는 성적 비유를 넘어, 내적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힘에 기대어 안정과 번영을 얻으려는 모든 움직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요한 묵시록의 견해는 불편할 정도로 정직하다. 더 어려운 질문은 17절에서 나온다. 악의 무리처럼 보였던 열 뿔과 짐승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마음을 ‘넣어주신다’는 것. 이 역설적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를 설명하는 데 마르코복음 3장 26절 말씀이 도움이 된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요한은 이 역설의 원리를 묵시적 장치 안에 담아낸다. 악은 외부의 심판보다 내부의 분열을 통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는 통찰이다. 다니엘서도 마지막 시대의 악한 세력을 ‘나뉘어진 나라’로 묘사하고(2,41–43 참조), 구약 여러 본문에서 하느님은 악한 민족들이 서로 공격하게 하여 스스로 쇠퇴하도록 하신다.(에제 38,21; 하까 2,22 참조)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이 말하려는 핵심은 단순하다. 하느님은 악의 결탁을 외부에서 억지로 깨뜨리지 않으신다. 악은 자신이 만든 구조 속에서 서서히 붕괴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관해 다시 질문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들만을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 때로는 당신을 거역하는 이들의 완고함조차, 당신의 더 큰 구원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하신다. 경쟁과 서열에 의해 존재하며 하느님 거역하는 완고한 세상 스스로 파멸 향하는 모습에서 하느님 섭리 읽을 수 있어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다.(탈출 4,21; 7,3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조용하며, 인간의 선택과 그 결과들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것을 눈치채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과 악의 식별이 아니라 선과 악을 규정하는 관념과 그 관성에 대한 성찰이다. 18절에서 대탕녀 바빌론은 ‘왕권을 가진 큰 도성’으로 규정된다. 로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이 옛 바빌론을 빌려 로마를 지칭했듯,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을 읽을 때도 로마 제국 자체를 넘어 오늘의 세계가 만들어낸 또 다른 바빌론의 형태를 질문해야 한다. 자본과 기술이 만들어낸 경쟁의 구조, 국경을 넘어선 힘의 집중, 그 속에서 조용히 지워지는 이들의 고통.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모든 현실을 향해 ‘그 구조의 총체’가 정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라고 묻는다. 큰 물로 상징된 모든 민족이 하나의 힘 앞에 종속되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아니면 각 민족이 저마다의 고유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가 오늘의 우리가 읽어야 할 요한 묵시록의 주제다. 세상은 경쟁과 서열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런 질서 안에서 누군가의 성공은 다른 누군가의 실패를 전제로 한다.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묻는다. 과연 이런 방식의 승리와 패배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간 사회의 모습일까. 누군가의 화려한 성공 앞에 모여든 오늘의 ‘열 뿔’들이 행여 그 내부의 갈등과 다툼으로 파멸과 죽음의 길을 기어이 걸어가고야 마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질문이, 오늘 우리 시대가 새롭게 마주한 바빌론을 들추어낸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신비로운 식별(묵시 17,7-14)

요한 묵시록 17장 7절부터 우리의 시선은 대탕녀 바빌론이 아니라, 그녀가 앉아 있는 짐승으로 향한다.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그 짐승 앞에서 천사는 이것을 ‘신비’라 부른다. 그리스말 ‘신비’는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으로 ‘입을, 눈을 닫거나 감는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신비라는 말마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밀어내는 암흑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더 깊은 층위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부르는 하느님의 계시 방식이다.(로마 16,25-26 참조) 신비는 인식의 어둠이 아니라 깊이이며, 이성의 도피가 아니라 초대이다. 그러므로 짐승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 짐승은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다시 올라올 것”이라 소개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이미 명시되어 있다. 짐승은 멸망으로 방향 지어져 있다는 것. 요한 묵시록 13장에서 상처 입어 죽은 듯하였으나 다시 살아난 짐승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두려워하던 네로의 부활 전승이 이 서사에 스며 있겠지만, 성경은 특정 황제의 귀환보다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낸다. 짐승은 ‘그 옛날의 뱀’, 곧 세대마다 얼굴을 바꿔 나타나는 악의 원형이다. 그가 올라오는 자리가 죽은 자들의 심연, 곧 ‘아뷔소스(ἄβυσσος)’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악은 언제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지만, 마치 하늘의 것인 양 위장을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하나다. 짐승은 결국 무너진다. 악은 오래가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멸망 이전의 시간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 곧 “생명의 책”(묵시 17,8)에 이름이 없는 이들이 그 짐승을 보고 놀라워하며 경배한다. 악은 종종 추해서가 아니라, 찬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멸망할 줄 알면서도 끌려다니는 수많은 논리와 제도, 유행과 집착이 존재한다. 효율, 성과, 속도, 성공, 그 모든 것이 짐승의 빛나는 외피일 수 있다. 한 번의 클릭과 한 줄의 말이 마음을 흔드는 시대에, 짐승은 더 이상 붉은 괴물이 아니라, 합리와 관성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묵시록은 말한다. 이 상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하느님의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르는 식별력,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는 영적 민감함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자 일곱 임금이라 한다. 이는 고대 독자들에게 일곱 언덕의 도시, 로마를 즉시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동시에 “다섯은 이미 쓰러졌고 하나는 지금 살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묵시 17,10)는 표현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로 이어지는 제국의 연대를 상기시킨다. 여섯째는 요한 묵시록 시대의 로마이며, 마지막 일곱째는 그 제국의 연대가 다시 모습을 바꾼 짐승일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일곱 산의 소개는 역사적인 제국의 목록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악의 권력은 언제나 형태를 바꾸어 되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시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하느님 백성을 억압하는 힘의 구조는 본질상 같다. 열 뿔은 열 임금이다. 그들은 아직 왕권을 받지 않았으나 잠시 권세를 얻어 모두 짐승에게 바친다고 한다. 힘의 연합은 언제나 더 큰 힘을 섬기기 쉽다. 그것은 1세기 로마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은 여전히 짐승의 이름을 빌려 움직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이라 부르고, 그 현실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지혜’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응이지, 식별이 아니다. 묵시록이 보여주는 시선은 분명하다. 짐승의 마지막은 멸망이며, 어린양의 마지막은 승리다. 어린양은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이시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패배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초대교회는 황제의 권력과 부유함도, 죽음의 위협도, 세상의 논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도 초대교회가 살아낸 삶이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가. 따라서 짐승에 대한 이해는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짐승은 붉은 몸 대신 투자와 수익률, 조회수와 효율, 진영과 혐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성공과 성장의 언어가 은총과 회개의 언어를 밀어낸다. 믿음을 수치로 계산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이미 짐승의 문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무엇에 놀라고 있는가. 무엇을 멋지다고 여기며, 무엇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가. 짐승은 다시 올라오겠지만, 결국 사라진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경배가 어디를 향할지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할 일이다. 신비는 현실을 벗어나라는 부름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보라는 부름이다. 그 부름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맑아지기를, 세상이 아니라 어린양께 마음이 향하기를, 조용히 소망한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번영의 뒷자리,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6)

드디어 대탕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묵시록의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심판을 선고받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에게 허락된 존중은 없다.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를 우리말 번역은 ‘탕녀’라 하여 방탕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본문이 고발하는 바는 더 노골적이다. 땅의 임금들과 몸을 섞은 여인(17,2), 그러니 차라리 ‘창녀’라 부르는 것이 정직하다. 이 단어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불편을 피하려 돌려 말하는 순간, 이 계시의 순수성과 급진성이 희석된다. 그녀는 그냥 창녀가 아니다. ‘큰’ 창녀다. 이 과장된 수식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 17장 5절에서 밝혀지는 그의 진짜 이름, ‘큰 바빌론’과 닿아 있고, 다시 예레미야서 51장 13절이 말하는 대바빌론의 패망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가 말하던,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 그 바빌론을 요한 묵시록은 ‘물 위에 앉은 창녀’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치며 심판의 대상을 분명히 한다. 예레미야의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 시대에 로마로 은유되며 심판은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제국이라는 체제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심판받는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륜은 육체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결탁의 비유다. 땅의 임금들은 바빌론, 즉 로마와의 동맹 속에서 경제적 평온함을 확보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 현실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묵시 2,9.13; 13,16–17 참조) 요한은 이 상황을 한 단어로 비유한다. ‘취기.’ 그는 말한다. 땅의 임금들이 창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취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로지 성장과 돈의 감미로운 향에 취한 삶, 그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경고하던 영적 실명이다.(이사 29,9; 호세 4,11–12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은 정치·경제적 번영과 그에 수반한 우상숭배를 흔히 불륜과 창녀의 이미지로 그렸다.(이사 23,18; 1열왕 5,1–12; 아모 1,9; 요나 3,5–10; 에제 16,33–34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오래된 언어를 끌어와 18장(3.9–19)에서 경제적 번영을 곧 ‘불륜’과 ‘취기’라고 단언한다. 고대 창녀가 몸을 팔고 돈을 받았듯,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땅의 임금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셈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이미지는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무역의 복잡한 외교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가난한 나라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번영의 논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요한의 언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누리는 번영이 혹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은 아니냐?” 이 질문을, 우리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면은 갑자기 광야로 이동한다. 광야는 시선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사 21,10 참조) 이사야는 그곳에서 바빌론의 몰락을 보았고(이사 21,1–10 참조), 요한도 같은 자리에서 바빌론과 로마의 종말을 조망한다. 광야의 시선은 제국의 거대함을 상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바빌론과 로마는 든든히 서 있다. 바빌론은 묵시록 쓰이던 시기 ‘로마’ 은유 종교·정치·경제적 결탁 현실 비판하며 오로지 성장과 물질에 취한 삶 경고 그러나 광야에 서면, 그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권력과 돈과 명예는 광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과도한 무게를 실어 온 우리의 삶을 뚜렷이 보게 되는 자리. 광야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 광야는 단순히 거룩한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진홍빛 짐승을 탄 여인을 본다. 머리 일곱, 뿔 열.(17,3) 12장 3절의 붉은 용과 동일한 형상이다. 광야는 하느님의 시선이 열리는 곳임과 동시에 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요한 묵시록은 선과 악을 단순히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통찰이 깊어질수록 악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창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다. 이는 곧 제국의 경제적 번영이 악의 시스템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번영 역시 하느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번영이라는 이름의 신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릎 꿇어왔는가. 4절로 넘어가면 창녀의 외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견고한 번영의 색깔인 자주와 진홍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큰 창녀 바빌론. 그녀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불륜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화려함은 로마 제국의 무역 품목들과 정교하게 연결된다.(묵시 18,12–14 참조) 상업적 성공이 창녀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왜 창녀의 짓인가?”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그 번영이 만들어낸 자리는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로마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모여 유행이 되는 곳.” 요한은 창녀를 “역겨운 것들의 어미”라고 부른다. 유행과 번영이 결합한 자리를 ‘어머니’라 이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기 위함이다.(예레 27,12 참조) 다시 말해, 세상이 탐하는 모든 화려함의 모태가 그 창녀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화려함 앞에서 박해를 받는다. 창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것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행렬에서 낙오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본질이다. 화려함의 앞줄에서 환호하는 대신, 뒤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론적 운명, 예수님의 운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그런 예수님을 미련하다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창녀의 후손인가. 나는 때때로 백화점에서 그 질문을 떠올린다. 명품매장 앞에 늘어선 줄, 그 긴장된 눈빛들.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눈빛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좋은 삶’인가, 아니면 ‘옳은 삶’인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종말에 대한 성찰(묵시 16,17-21)

일곱 번째 대접은 일곱 번째 나팔과 닮았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여전히 등장한다.(묵시 11,19 참조) 이집트에 내려졌던 다섯 번째 재앙과 역시 닮았다.(탈출 9,22 이하 참조)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집트의 탈출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길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재앙들은 믿음의 길을 촉구하는 하나의 호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되짚었다.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대개 ‘하느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다. “다 이루어졌다.” 이 외침은 단순한 종말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안에 비로소 개입하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하느님이 등장하는 서사들 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 그러니까 천둥, 번개, 요란한 소리, 지진 등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탈출 19,16; 묵시 4,5; 8,5; 11,19 참조)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한다는 믿음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문장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좌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큰 도성’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큰 도성’을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은 은유적 표현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은유를 통해 인간 세상과 그 역사의 불의와 부패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로마와 이방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이기도 하겠고, 내일의 우리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앞에 어느 민족이, 어떤 세상이 지진과 같은 징벌의 대상이 될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적인 태도로 요한 묵시록의 징벌을, 세상의 불의를 살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에게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온전히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자세 말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로마 혹은 그 이전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실재이나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축인 것인 양 이해하면서 마치 특정 세력이 악하므로 그 특정 세력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의로움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놓고 ‘세속’에 따라 살지 말자는 외침을 함부로 남발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이 아니라 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선동가의 아집일 경우가 많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느님 입장에선 당신의 섭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의 공간이다. 교회는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분의 정의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저만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형제적 공동체다. 하느님은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신다’(묵시 16,19 참조)는 문장 역시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이미 확고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예컨대 모든 섬과 산이 자취를 감출 만큼 결정적이다.(묵시16,20) 교회가 세상 속 하느님의 정의를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권태로운 타협이나 눈치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고, 저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기대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세상이라는 곳은 견고한 시스템과 복잡한 사상들이 얽혀 있는 곳이라 어느 하나도 쉬이 돌아서거나 변화되긴 힘들다. 21절에 엄청난 우박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박의 무게가 한 탈렌트인데, 26~36kg의 무게다. 이 무게는 로마군이 쏘아 올린 투석기에 담긴 돌의 무게와 일치한다. 재앙 묘사는 종말의 의미 아닌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세상에 당신의 섭리 펼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담긴 표현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할 때 쏘아 올린 그 투석기의 돌이 한 예다. 유다 사회는 로마의 그러한 군사적 행동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는 때 여전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박이라는 재앙을 로마 군대의 투석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재앙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사람들의 모독이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므로 사람들의 죄악이 그만큼 독하고 무겁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엔 성급하다. 큰 도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우박이 매섭게 이 땅 위에 떨어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 익숙해져 있고, 익숙한 만큼 변화를 싫어한다.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도 온 나라가 갑론을박의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요한 묵시록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특정 불의나 구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이어지는 17장부터 바빌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그것은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었고, 로마가 유독 잘못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뜻을 반한다고 여긴 하나의 ‘해석’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익숙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익숙해서 다른 것과 낯선 것에 귀와 마음을 닫고 있는 일들 말이다. 가까이는 내 이익을 위해, 멀리는 거대 담론을 무턱대고 수용한 무지하고 성급한 사상들을 위해 타인과 그의 다름을 무작정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완고한가, 유연한가. 요한 묵시록이 끝나기 전에, 우린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고통이란 행복(묵시 16,10-16)

다섯째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는다. 대접은 정확히 짐승의 중심부를 향한다. 짐승의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는 ‘왕좌’를 향하고 있어서 짐승의 영향력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게 다섯 번째 대접이다. 그 결과 짐승의 나라는 어두워졌다. 탈출기 10장 22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완고함에 어둠이라는 재앙을 내리셨다. 이집트는 태앙신 ‘라(Ra)’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어둠이 내린 이집트는 하느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 무너진 것이다. 지혜서는 어둠을 가리켜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은유로 소개한다.(지혜 17,2 참조) 이 단절을 요한 묵시록은 혀를 깨물 정도의 고통으로 다시 해석한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인간에게 고통이 된다는 도식은 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단절의 고통을 자주 언급한다.(마태 8,12; 22,13; 25,30 참조)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유다서에서도 ‘어둠’의 자리는 배교자들이 심판받는 자리로 제시되기도 한다.(2베드 2,17; 유다 1,13 참조)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고통이 닥쳐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은 불편함과 고통을 피하고 싶도록 작동할 터인데,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회개가 삶의 방향을 돌이켜 멀어진 것을 다시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전환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이 고통이지만 다시 하느님께 향하는 방향의 전환이 더더욱 싫은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일 때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고통의 자리를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넘쳐나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힘들어도 그것을 놓아 버릴 때 오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상실감이 회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혜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타를 받고도 훈계로 삼지 않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신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들로 징벌을 받자 그것들에게 화가 난 저들은 사실을 보고서야 자기들이 전에 알아 모시기를 거부하던 그분께서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가장 무거운 단죄를 받았습니다.“(지혜 12,26-27) 고통과 질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운명이 징벌과 단죄라는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확연하다. 그럼에도 요한 묵시록의 ‘사람들’은 다만 하느님을 모독할 뿐이다. 고통은 더 이상 회개를 위한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회개에로의 초대는 계속되나, 그 초대에 응답하는 건, 하느님의 재앙이나 그로 인한 고통으로도 가능한 게 아니다. 고통의 재앙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여섯 번째 대접은 이제 유프라테스강으로 향한다. 유프라테스강은 말라버린다. 그 강이 마르는 것과 해 돋는 쪽 임금들의 길이 나는 것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 제국을 제압하는 역사적 사건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물을 마르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심판으로 바빌론은 영원히 황폐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의 묘사다.(예레 28,3; 50,39-40 참조) 바빌론은 하느님을 거역한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세상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실행되어 회개를 촉구한다. 고통에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은 그 위대한 바빌론마저 무너뜨리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끝내 항복할 것인가. 13절은 더 이상 사람들의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악의 세력 그 자체가 전면에 나선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나타난다. 유다 사회는 개구리 형상을 기만적인 헛된 소리, 파괴와 혼란의 울음 등으로 이해해 왔다. 그렇다면, 악을 가리키는 용과 짐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헛된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은 온 세계 임금들을 모아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려 한다. 전투는 ‘저 중대한 날’에 펼쳐지는 것으로, 구약의 즈카르야가 말하는 ‘종말론적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즈카 12~14장; 스바 3장 참조) 종말론적 전투는 하느님의 승리로 끝이 나며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난다고 소개한다.(묵시 19,11-21 참조) 악의 세력 그것은 그리 힘센 것이 아니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다. 악의 세력에 기대어 완고해진 사람들의 회개 문제도 그 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우린 유추할 수 있다. 완고함의 끝은 사람들에게 허무하다. 끝내 버리지 못해 움켜쥔 것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야 마는가. 깨어 있어 의로움 지키는 일 우리가 희망하고 촉구할 자세 신앙 안에 고통 겪는 신자에게 하느님은 ‘행복’을 선물하실 것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하고 스스로 촉구해야 할 자세는 15절의 성도들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자세는 ‘깨어 있어 제 옷을 지키는 일’이다.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가리키고 벌거벗음은 우상숭배로 드러나는 수치를 말한다.(에제 16장; 나훔 3,5; 이사 20,4 참조) 이런 권고의 말은 악이나 그의 세력에 맞서는 대립적 자세를 부추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떻든 제 삶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라는 격려에 가깝다.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묵시록은 더러운 영이 세상 임금들을 모은 곳이 ‘하르마게돈’이라고 한다. ‘므기또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르마게돈’은 의인들이 악한 왕국에 의해 공격받던 곳이고(판관 5,19 참조) 거짓 예언자들이 꺾인 곳이며(1열왕 18장 참조) 이스라엘의 슬픔이 가득한 곳으로(2열왕 23,29 참조) 이해되어 왔다. ‘므기또의 산’은 그러므로 또다시 한번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그분이 공격받는 곳을 상징한다. 어떤 공격이든, 어떤 위협이든 성도들은 제 옷을 지켜야 한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재앙의 고통과 다르다. 제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면서 겪는 고통은 거룩하고 보람되며 의미가 있다. 제 완고함에서 비롯된 재앙의 고통은 스스로 옥죄는 자기 파멸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은 겪고 나면 자신이 사라진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겪을수록 자신이 단단해진다. 하느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행복이란 선물을 주신다. 그 행복은 설익은 감정의 환희가 아니라 억척스럽게 달릴 길을 달리고 난 후 내쉬는 가쁘고 깊은 호흡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분명하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린 행복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대접의 호소(묵시 16,1-9)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을 두고 잘못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징벌이나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로 시작한다. 구약성경 도처에서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 것이 ‘큰 목소리’(시편 69,25; 예레 10,25; 42,18; 44,6 참조)다. 하느님의 개입이 재앙으로만 읽히는 건 슬픈 일이다. 일곱 대접이 쏟아져 벌어지는 현상이 참혹할지라도, 그 재앙이 가리키는 바가 이 땅의 멸절이나 파괴라는 사실로만 읽힌다면,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폭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건 참 슬픈 일이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이 그렇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사고에 갇혀 해석될 때가 많다. 잘못하면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잘 살았다 싶으면 하느님으로부터 큰 상을 당연한 듯 기대하는 신앙은 얄팍한 상술(商術)과 다르지 않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것이 인간의 악행에 따른 결과론적 징벌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판단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 55,8 참조) 첫 번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에게 고약한 종기가 생겼다고 전한다. 탈출기의 재앙과 닮아있는 서술이다.(탈출 9,8 이하 참조) 탈출기의 재앙은 재앙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알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재앙의 적확한 표적은 파라오의 완고함이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 그러니까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재앙이 내린다. 그들은 하느님을 싫어하거나 거부해서 재앙의 대상이 된 게 아니다. 자신들이 바라보고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에 열심한 이들이어서 그들에게 하느님은 부수적인 존재였고 좋거나 싫어할 가치 부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요한 묵시록의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완고함은 하느님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일곱 대접으로 시작되는 재앙의 서술에 대해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이 무엇이냐고, 그 구원과 생명을 거부한 탓이 재앙으로 서술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히 하느님께 등 돌린 이들에게 죄와 벌이 떨어져 아픔과 고통이 그들을 덮쳤다는 식의 가볍고 무지한 해석에 더 이상 붙들려 있지 말아야 한다. 사실 재앙의 서술은 묵시 문학적 장치이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봤듯이 하느님의 어좌와 어린양의 자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속량되는 자리였고, 7장의 십사만 사천은 한계가 없는 무한대의 구원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자리는 제한이나 한계, 조건이나 자질의 정도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탈출기의 재앙도, 요한 묵시록의 재앙도 잘못 살거나, 실수하거나, 부족하거나, 게으른 이들을 탓하며 징계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 제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이 너무나 옳고 분명한 것이라 단정 지은 채, 이웃과 세상에 닫혀 있는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려 유연하게 만드는 도구가 재앙이란 것이다. 탈출기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탈출 7,13; 8,15.32; 9,7.12; 10,20.27; 11,10; 14,8 참조) 탈출기든, 요한 묵시록이든 닫힌 마음을 여는 일에 재앙의 서사는 그 수준이 원시적이고 투박한 것이나, 그럼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재앙은 그러므로 징벌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호소였다. 둘째 천사와 셋째 천사의 대접도 탈출기의 재앙과 엇비슷하다.(탈출 7,17-21 참조) 바다와 강이 핏빛으로 물드는 재앙은 물을 주관하는 천사를 통해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묵시 16,5-6 참조) 주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라는 것, 그리고 재앙이 마땅한 것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이 피를 쏟았기 때문이라는 것.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 16장 5절부터 6절까지의 이 말씀이 제단 아래 영혼들이 바랐던 ‘피의 복수’(묵시 6,10 참조)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들이 마시는 이른바 복수의 피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고통과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인가. 다만 우리는 6절과 7절의 외침이 하나의 전례적 찬가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를 흘리는 현실은 피를 통한 복수로 해결되지 않았다.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현실 안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고 그 피에 대한 복수는 요원한 것이었다. 재앙, 징벌 아닌 구원의 호소 자기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과 이웃 배척하는 자세를 부드럽고 연하게 만드는 도구 다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전례적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 그것 하나만 갈망할 뿐이었다. 피 흘리는 현실 속 실체적 징벌과 심판을 기대하기보다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신앙적 결기가 전례적 찬가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되어 마땅합니다”(묵시 16,6)라는 외침은 주님을 위해 흘린 피는 여전히 흘리고 있고 그 피에 대한 대가는 여전히 요원한 것이라는 현실을 끝내 받아들이는 외침이다. 그러므로 어떤 피 흘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신앙의 마땅함은 늘 그렇게 현실을 이겨내고야 만다. 사실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8절에 이르러 네 번째 대접은 해의 뜨거운 열기로 사람들이 타 버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세상은 불에 타도 회개하지 않는다. 징벌이 내려져도 회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파라오가 그랬고,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 그랬고, 오늘날 우리마저 그럴 것이다. 제 지식과 신념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만큼, 우리는 얼마간 완고하고 완고한 만큼, 세상과 이웃에 배타적일 것이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은 세상 모든 이에게 향해 있을진대, 우리는 가끔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도덕 윤리로 세상을 가르치려 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거친 삶에 대해선 거리낌을 가지고 세상에 비켜서서 무릉도원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할 때가 많다. 잘못 사는 것이 독한 게 아니라 잘 산다고 여기는 그 완고함이 참으로 독한 것이다. 재앙의 서사는 그래서 더 독해지고 더 참혹해야 한다. 아직 세 개의 대접이 남아 있다. 우린 아직 회개해야 할 이유가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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