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준비운동: 고통을 경감시키는 구체적 방법

우리는 지난 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이를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 충고를 듣고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안에서, 현대 사회의 고통 경감법과 비교해 보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현대의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조작 가능하고 제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연구 방향은 고통의 근원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느끼는 경로를 차단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취나 무통분만이며, 이런 경향은 일반 생활에도 널리 퍼져있다. 또한 현대인들의 다수가 정신적인 고통이 다가오면 알코올이나 마약 등을 통해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고, 심지어 많은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차단하려 한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즐거움을 통한 고통의 약화 토마스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치료법은 ‘잠과 목욕’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힘을 되찾게 해 주고 몸의 신체적 균형을 회복시켜 주어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게 해 준다.(I-II,38,5) 밤잠을 줄여도 된다는 특별 허가를 받아서까지 연구에 매진했던 토마스이기에 이런 충고는 더욱 유별나게 들린다. 그럼에도 잠이나 목욕 등이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돌림으로써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치료 방법은, 이미 현대 의학에 의해서 훨씬 더 효과적인 마취와 통증 완화의 방법을 통해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방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토마스는 기쁨이나 쾌락이 슬픔이나 고통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쾌락(Delectatio)’은 고통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I-II,38,1) 만일 직면해 있는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겪고 있던 고통은 약화될 수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은 환자의 슬픔을 감소시킨다. 때로는 슬픔을 잊을 정도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좋은 영화는 우울함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풍선에 바람이 빠질 때 바람을 조금 불어 넣으면 다시 팽팽해지듯, 인간이 느끼는 쾌락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 슬픔의 치료제로 작용할 수 있다. 눈물과 한숨을 통한 슬픔의 배출 그렇지만 진정으로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잠깐의 즐거움이 마치 한 여름의 뙤약볕에 달구어진 바위 위에 몇 방울의 물을 떨구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토마스는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기 위해 ‘눈물과 탄식(Lacrymae et Gemitus)’이 자연스럽게 고통을 바깥으로 배출시킴으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I-II,38,2) 마음속에 있는 모든 해로운 요소는 영혼의 주의가 그리로 쏠릴 때 더욱 고통스럽지만, 바깥으로 분출될 때는 주의가 분산되어 내면의 고통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울고 싶을 때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안정이 되고 슬픔을 이기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수용, 즉 눈물 흘리기나 깊은 탄식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현대에도 적극 권장되는 방법이다. 가까운 이들의 위로와 공감…진리 탐구·종교적 묵상으로 육체와 정신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 이뤄낼 수 있어 친구와 가족의 위로 토마스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위로가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강조한다.(I-II,38,3 참조) 마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었을 때 가벼워지는 것처럼, 영혼의 짐인 심적인 고통도 동료들의 위로를 통해 가벼워진다. 또한 친구들이 고통받는 이에게 가지고 있는 ‘공감(Compassio)’이나 사랑은 그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친구나 가족, 공동체와의 교감과 위로는 고통 완화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의 고립과 단절 문제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토마스가 중요시했던 위로의 힘이다. 진리의 관조를 통한 고통의 극복 이런 일시적인 고통의 완화와는 달리 강렬한 즐거움을 포함하는 더 지속적인 치료제가 있는데, 바로 ‘진리에 대한 관상(Contemplatio Veritatis)’이다. 토마스는 이 관상이 고통을 대단히 완화시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관상의 쾌락은 ‘흘러넘쳐(Redundat)’ 감정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까지도 완화시켜 준다.(I-II,38,4) 지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관상이 고통과 슬픔을 완화시킨다. 지복직관과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토마스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온갖 시련을 참된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야고 1,2)”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다가올 기쁨 때문에 타오르고 있는 숯불 위를 마치 ‘장미 꽃밭’ 위를 걸어가듯이 걸어가는 순교자도 소개한다. 진리 탐구와 영적 명상, 신앙적 희망은 현대의 정신 건강과 영성 돌봄 분야에서 여전히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강조하는 명상, 마음 챙김, 종교적 혹은 철학적 묵상 방식들은 고통과 슬픔을 초월할 수 있는 내적 힘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신학대전」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의 슬픔 해소법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면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단순히 과거의 뒤처진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상호 관계, 몸과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의 길로, 오늘날 심리치료와 영성 상담, 공동체 활동 등 다양한 현대적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질병, 사고 등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2차 가해에 가까운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문제와 같은 ‘고통에 대한 오해’를 집중적으로 성찰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하기 위해 고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도 고통은 육체적·정신적 차원에서 질병, 실직, 사랑하는 이의 상실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능력 위주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고통을 무조건 없애버리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누구도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상가가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열쇠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도 육체적인 통증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이처럼 고통의 실재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삶이 단지 ‘고통의 바다(苦海)’일 뿐이라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섭고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고통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수한 정념들에 관한 모든 논의 가운데 ‘가장 적절하게’ 정념이라고 불릴 만한 고통을 매우 길게 무려 다섯 개 문제(I-II,q.35-39)에 걸쳐 다룬다. 고통(Dolor)과 슬픔(Tristitia)의 구분 우선 토마스는 고통(Dolor)을 그 원인이 육체에 있긴 하지만, 영혼의 한 정념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손에 화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아픔과 같은 육체의 상처, 질병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육체의 정념이라면, 친밀했던 친구와의 이별이나 가족의 죽음에서 오는 비통함은 영혼의 정념이다.(I-II,35,1) 이어서 그는 지성이나 상상력의 깨달음에서부터 오는 정신적 고통에게 슬픔(Tristitia)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다.(I-II,35,2) 슬픔은 단순히 괴로움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성취하려는 어떤 선(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느끼는 낙담은 성취, 자부심 같은 선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기쁨과 슬픔은 그 대상인 선과 악이 대립되기 때문에, 서로 반대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저 서로 다르기만 할 뿐 상호 배척하지 않는 수도 있다. 친구의 죽음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천상 행복을 누리리라는 영생의 기쁨으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I-II,35,4) 이어서 토마스는 ‘내면적 고통은, 다만 육체만 아프게 하는 외적 고통보다 더 강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외적 고통을 일부러 찾기도 하기 때문이다.(I-II,35,7) 또한 그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슬픔의 다양한 종류를 검토하며 그것들이 육체적 고통과는 달리 과거, 현재, 미래의 악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슬픔을 느끼는 역량이야말로 인간됨의 한 조건인 것이다.(I-II,35,8) 삶에 필연적인 고통과 슬픔…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 자기 성찰 계기로 삼는다면…내적 성장 도모할 수 있어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분석 토마스는 계속해서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을 다룬다. 감각적 욕망을 증가시키려는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이 동시에 슬픔의 원인들을 증가시킨다. 즐거움이 많아지면 불가피하게 그에 반대되는 것도 많아진다. 만일 한 사람이 어떤 선을 상실하고 또 그 손실을 하나의 악으로 포착한다면, 슬픔의 정념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또한 현존하게 된 악뿐만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못한 그릇된 바람도 고통이나 슬픔의 원인이 될 수 있다.(I-II,36,1) 특히 정신적인 고통은 우리가 재능이나 노력을 통해서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체험이다. 토마스는 슬픔이 우리의 의지와 사랑에 근거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증오 없이는 고통도 없고 또 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기 때문에, 사랑(Amor)이 ‘고통의 보편적 원인’이라고 밝힌다. 해로운 것에 대한 욕망, 원하는 선을 얻지 못함, 누리던 선의 상실이라는 세 가지 경우에 갈망은 모두 슬픔을 낳지만, 그 가운데 ‘결합의 욕구(Appetitus Unitatis)’가 특히 강렬하다. 특정 대상과의 결합의 욕구가 클수록, 그 대상이 상실될 때 더 큰 슬픔이 찾아온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 애정을 쏟은 반려동물의 죽음은 짧게 관계 맺은 다른 대상보다 더 큰 슬픔을 유발한다. 더 나아가 재물들을 소유하고 싶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I-II,36,2), 사랑하는 이와 하나로 결합되고 싶은 바람이 채워지지 못할 때도 고통은 발생할 수 있다.(I-II,36,3) 우리의 슬픔은, 우리의 사랑과 미움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지표다. 이렇게 시작된 고통과 슬픔은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에, 모든 활동 능력을 위축시키며, 심하면 사람들의 지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감각적 고통이 심할 경우 정신적 능력도 저하시켜 학습 능력이 약화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토마스는 고통과 슬픔을 심장으로부터 오는 생명 운동과 대비시키면서, 다른 어떤 ‘영혼의 정념들’보다 더 육체에 해를 끼친다는 결론을 내린다.(I-II,37) 고통의 성찰을 통한 인간적 성장 이러한 고통과 슬픔의 부정적 결과 때문에 누구나 고통 또는 슬픔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토마스는 슬픔이 올바르게 조절되기만 한다면 상당히 유용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의 가장 큰 유용성은 인간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저 고통 혹은 슬픔을 제거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그것을 제거하려고 더 노력하게 된다.”(I-II,37,3)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내적 성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반면, 고통의 원인과 구조 그리고 그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단순 회피를 넘어 자기 삶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신학대전」에 나오는 토마스의 섬세한 연구는 우리를 고통에 관해 성찰하라고 초대한다. 고통 없는 완전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으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더 온전히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토마스는 고통의 문제를 피하기보다, 이를 통해 윤리적·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기를 촉구한다. 잃어버린 선에 대하여 괴로워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 내면에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면 곧 행복한가?

현대 사회는 눈부신 물질적 발전과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루었으나, 이와 더불어 ‘즉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의 경험’이 곧 행복이라는 가치관이 널리 퍼졌다. SNS, 게임, 유튜브 등 각종 디지털 매체는 즉각적 도파민 자극과 일시적 즐거움을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든다. 음식, 여행, 소비, 오락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가운데 많은 현대인은 날마다 쉽게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행복’이라는 등식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선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정념들 가운데 특히 ‘쾌락’과 ‘고통’을 심도있게 다루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쾌락과 즐거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쾌락과 즐거움의 구분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제2부 제1권(제31~34문)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단순한 감각적 향유 또는 일시적 충족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delectatio)’이 ‘선(善)’을 획득하고 소유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정념임을 강조했다. 즉, 우리는 선을 향한 사랑과 갈망에서 시작하여, 그 선을 추구하고, 마지막에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쾌락에 도달한다.(I-II,31,1). 더 나아가 토마스는 자주 쾌락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그 활용범위가 더 좁은 ‘즐거움(Gaudium)’을 구별한다. 즐거움도 쾌락의 일종이지만, 무엇보다 “이성이 인식하는 선의 현존에서 오는 주체 내면의 정서적 반응”에 좀 더 강조점이 있다. “따라서 동물들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 말하지 않고, 쾌락이라고 말한다.”(I-II,31,3) 토마스에 따르면, 쾌락은 다양한 감정적 형태인 즐거움, 기쁨, 용약, 유쾌함, 참행복 등으로 나타난다. 즉, 육체적(감각적) 쾌락과 정신적(지성적) 쾌락 모두를 포함한다. 정신적 쾌락은 지식, 우정, 신적 관상 등에서 오는 쾌락으로, 영적 성장과 연결되는 쾌락이다. 그런데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차이에 따라 강도, 가치, 도덕적 평가가 달라진다. 육체적 쾌락은 육체의 변화를 수반하며 더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정신적 쾌락이 차원의 깊이와 지속성에서 더 탁월하다.(I-II,31,5) 육체적 쾌락 중에서는 촉각(Tactus)의 쾌락이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장 강렬하지만, 시각(Visus)의 쾌락은 인식적 쾌락과 결합되어 더 고상하다.(I-II,31,6) 토마스는 또한 인간이 존재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쾌락들, 즉 건강한 본성에 따르는 것이 자연적 쾌락이지만, 오류에서 비롯된 비자연적 쾌락, 곧 자연에 어긋나는 쾌락도 있다고 강조한다.(I-II,31,7) 쾌락의 원인과 결과 쾌락은 선의 인식과 획득에서 유래하지만, 변화와 다양성, 기억과 희망, 사랑, 경탄까지도 쾌락의 원인이 된다. 토마스는 특히 친구에게 베푸는 행위, 선행과 같은 다른 사람의 선 역시 즐거움의 원인이 된다고 밝힘으로써 개인적인 쾌락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강조한다.(I-II,32,5&6). 인간은 갈망하는 선을 즉각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차츰 획득해 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쾌락은 “정신과 마음을 확장”시키고 활동을 완성하게 하며, 새롭고 더 큰 쾌락과 목적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I-II,33,1&2) 특히 정신적 쾌락은 이성의 작용을 더욱 활발하게 한다. 쾌락은 그것을 낳는 행위를 더욱 기대하게 하고, 건강한 도덕적 활동의 보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I-II,33,4) 쾌락을 넘어 행복에 도달하기 토마스에 따르면 쾌락은 본연의 선에서 비롯되고, 일정한 윤리적 질서 속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토마스는 극단적 금욕주의도, 무분별한 쾌락주의도 경계했다. 스토아학파처럼 감각적 쾌락 자체를 모두 부정하면 인간 본성과의 조화를 깨트리고 오히려 무감각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자연적 질서에 맞는 쾌락의 향유는 필요하다고 봤다. 자연은 쾌락을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기능들에 연결시켰다. … 따라서, 만일 누군가 자연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소홀히 할 정도로 이런 쾌락들을 삼간다면, 그렇게 자연적 질서를 위반하는 가운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II-II,142,1)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쾌락 그 자체를 목적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거슬러 토마스는 절제가 사라지고 과도한 쾌락 추구가 목표가 되어 개인의 삶과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때, 행복은 오히려 멀어진다는 점을 경고한다. 쾌락이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만 선한 경우도 있고 또 보기에는 선하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I-II,34,2) 더욱이 과도한 육체적 쾌락은 이성의 기능을 저해한다.(I-II,33,3) 실제로 현대 사회에 만연한 반복적인 감각 자극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내성을 높이고, 더욱 강한 자극, 더 짜릿한 경험을 찾아 헤매게 만든다. 그러나 만족은 순간적일 뿐, 남는 것은 더 큰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욕구의 반복적 악순환이다. 알코올, 도박, 게임, 쇼핑 등 쾌락적 욕구가 제어되지 않을 때 ‘중독’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자극, 강한 소비, 넘치는 경험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평범한 일상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런 인간의 욕구에 따라 끝없는 소비와 유혹을 제공하며, 결국 대중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불행함을 호소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목적에 이르기 위해 쾌락들을 삼가는 것은 때때로 찬사받을 만하며 필수적이다.”(II-II,142,1) 토마스는 쾌락 자체를 일률적으로 죄악시할 필요는 없으나, “이성에 일치될 때만” 선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절제(Temperantia), 자기조절, 선한 욕구로의 전환과 같은 덕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암묵적 믿음은 현대사회에서 삶의 공허, 중독, 공동체의 해체, 도덕적·인격적 위기 등 심각한 문제로 연결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같은 흐름에 균형 잡힌 해답을 제시한다. 쾌락과 즐거움은 선한 삶, 자기 성찰,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 이성의 지배 아래서만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은 덕을 통해 절제되고, 고귀한 목적‧공동체의 선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인간다운 즐거움으로 승화할 수 있다. 토마스의 성찰과 함께 외적 쾌락보다 정신적 즐거움, 자기실현과 공동체 가치, 이성적 삶과 고귀한 가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본질임을 되돌아보게 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해 피해야 할 사랑의 왜곡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행복을 꿈꾼다. 그렇지만 사랑의 시작이 반드시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불행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 3년간 대한민국에서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범죄 신고와 검거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를 잡았다. 많은 여성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로에게 호감으로 시작되었던 만남이 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사랑의 다양한 단계를 이해함으로써 그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사랑의 단계와 내포된 위험 사랑의 첫 단계는 상대를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대가 얼마나 능숙하게 자신의 욕구(특히 성적 욕망)를 충족시켜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처럼 상대를 단순한 도구로 여기고 피상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다음 단계는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단계다. 사랑에 빠졌다는 감정, 상대에게 사로잡혔다는 느낌, 상대에게 의존하는 경향 등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외적 매력에만 의존하다 보니 상대방의 매력이 사라지거나 더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 역시 금세 식어버린다. 사람의 취향 또한 변하기 마련이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언제 식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내재한다.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의 단계에 이르면 상대의 외적 조건을 넘어서 내면과 본질적인 면모, 즉 인격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바로 당신이기에 사랑한다”는 단계이며, 여기서부터 진정한 결합과 존중의 관계가 형성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원인으로 선, 인식, 유사함에 대해 설명한 이후에, 곧바로 이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사랑의 결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참된 사랑의 결과: 합일, 내속, 무아지경 토마스는 “사랑의 결과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것 사이의 합일”(I-II,28,1)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구절로 사랑의 합일을 강조한다. 다만 토마스는 사랑하는 이들은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가 소멸될” 실체적 합일이 아니라 즉 공동생활, 대화, 상호작용 등 다양한 방식의 ‘감정적 합일(Unio Affectus)’을 추구한다고 본다. 사랑이 발전하면 ‘내속(Inhaesio)’의 경지에 이르는데, 이는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 속에 있고, 반대로 사랑받는 자도 사랑하는 자의 ‘삶의 중심’에 깊이 들어오는 단계다.(I-II,28,2) 우리의 정신과 기억 속에 사랑하는 대상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그 대상이 삶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황폐함을 겪는다. 더 나아가 ‘무아지경(Extasis)’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모든 정신이 상대에게 몰입되어, 완전히 자기 외의 존재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I-II,28,3) 사랑하는 친구의 슬픔이나 행복이 곧 나의 것이 되고, 우정의 사랑에서는 상대를 위한 선이 곧 자신의 선이 된다. 이처럼 사랑의 깊은 단계에서는 자기 존재와 타인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것이 심화되면, 상대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고통이 된다고 해도 곧 자기의 행복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왜곡과 불행의 원인 그러나 이런 깊은 합일과 자기초월이라는 결과만이 사랑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때로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사랑의 처음 두 단계에서 보이는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사랑은 치명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랑은 나눔이나 공유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폭압적이고 소유욕에 의해 움직인다. ‘질투’(Invidia)는 강렬한 사랑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인데, 사랑의 강도에 비례해 사랑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한다.(I-II,28,4) 이런 태도는 결국 폭력과 불행을 낳는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성의 상품화’, ‘성적 사랑에 대한 탐닉’, ‘관계의 도구화’ 등이 더해져 사랑이 오히려 혐오와 파괴, 자기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욕구, 자기를 희생한다는 이기주의적 열망 등이 문제를 심화시킨다. 스토커나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은 자신의 집착, 독점욕, 폭압적 감정마저 사랑으로 오해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상대의 인격과 고유성을 존중하지 못한다. 더욱이 부적합한 대상(마약, 음주, 도박 등)에 대한 집착은 내적 해체와 영적 붕괴, 심지어 신체적 파괴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토마스는 “사랑받는 대상이 위험한 만큼 사랑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사랑과 미움의 역동 - 정념의 변증법 토마스에 따르면, 미움은 사랑에 반대되고 사랑의 대상이 선이라면 미움의 대상은 악이다.(I-II,29,1) 미움은 나쁜 것, 해악이나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념이다. 그러나 모든 미움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즉 사랑받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사라지거나, 그 선에 반하는 대상이 등장할 때 미움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I-II,29,2) 미움은 때로 사랑보다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사랑이 먼저다. 사랑의 결핍이나 변질이 미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악에 대한 미움만 남는다. 심지어 미움이 성장하면 악에 대한 집착이나 왜곡된 쾌감으로 굳어진다. 자기증오, 진리에 대한 증오, 도덕적 혼란과 자아상실 등도 사랑의 결핍 또는 왜곡에서 설명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은 단순한 욕구, 소유, 집착을 넘어 상대방의 인격과 자율성, 독립성, 성장에 대한 존중과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타인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거나, 대화와 나눔 없는 결합은 오히려 지배와 종속만 남긴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존경과 책임의 균형, 나와 상대 모두의 성장, 인격적·상호적 나눔이 실현되는 사랑이어야만, 우리는 불행과 파괴를 막고 인간적 성취와 만족, 성숙을 얻을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첫 번째 정념인 사랑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념들의 첫 번째이자 근본은 바로 사랑이다”(I-II,26,2)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어떤 선한 것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할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은 그 대상인 선과 결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이란 매우 다양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토마스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토마스는 우선 ‘어떠한 유형의 선을 향해서도 기우는 모든 경향’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곧 이것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식물도 지닌, 그들의 본성에 합치되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연적 사랑’, 동물이 감각적 욕구를 따라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감각적 사랑’, 인간의 자유로운 판단과 의지를 뒤따르는 ‘이성적 사랑’이 그것이다.(I-II,26,1) 물론 인간에게는 그 세 가지 모두가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공기에 대한 폐의 응답, 더운 날의 시원한 바람에 대한 감각적 욕구의 응답,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의지의 응답이 모두 있다. 토마스는 완전한 사랑으로 알려진 ‘참사랑(Caritas)’을 중시하지만, 이것은 ‘신학적 덕’을 다루는 「신학대전」 제2부 제2편에서 상세히 다루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루어 두도록 하자.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정념으로서의 사랑’은 바로 인간의 이성적 사랑에 속한다. 욕정의 사랑과 우정의 사랑 구분 토마스는 이성적 사랑을 ‘욕정의 사랑’(Amor Concupiscentiae)과 ‘우정의 사랑’(Amor Amicitiae)으로 세분한다.(I-II,26,4) 욕정의 사랑은 어떤 선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유익이나 기쁨을 바랄 때 이루어진다. 예컨대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사랑하는 것은 음식 자체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그 음식이 자신에게 주는 유익 때문이다. 그런데 토마스가 여기서 사용한 욕정이란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소유’라는 중립적 개념과 상통한다. 이 자동차, 이 집은 나의 것이고 내가 그것을 소유한다. 이렇게 욕정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물 또는 사람 자체의 실체적인 본성이나 인격성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우정의 사랑은 상대 자체의 선함을 위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태도이며 그 대상의 개별성을 깊이 존중한다. 예를 들어, 친구의 행복이나 성취 자체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그로 인해 직접적 이득을 얻지 않아도,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정서이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 자체를 바라는 마음 역시 우정적 사랑의 대표적 예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 두 사랑은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작용한다. 그는 욕정의 사랑의 타당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우정의 사랑에 종속시킨다.(I-II,26,4) 따라서 우리는 먼저 욕정의 사랑 즉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할지로 시작하지만, 진정한 덕의 관점에서는 존재 자체의 선을 바라는 우정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의 원인 이어서 토마스는 사랑의 세 가지 원인을 언급하는데, 그 원인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북돋워 주고 서로 안에 포함된다. 우선 사랑의 고유한 원인은 ‘선(善)', 즉 각자의 본성에 어울리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악이 선처럼 나타나게 될 때도 사랑하게 된다.(I-II,27,1) 말리고 싶은 이와 사랑에 빠진 이에게 하는 ‘사랑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사랑하는 사람은 흔히 다른 모든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귀한 선을 찾아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둘째, 사랑의 가까운 원인은 선에 대한 ‘인식’이다. 로미오가 사랑한 줄리엣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언젠가 파티에서 인식하게 된 구체적인 인물이다. 모르는 자는 결코 어떤 것을 욕심낼 수 없다.(I-II,27,2) 유사함(Similitudo)도 사랑의 원인이다. 따라서 ‘각자는 자기와 비슷한 것을 사랑한다’.(I-II,27,3)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또 하나의 자아(Alter Ego)’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혜롭게 머리를 끄덕이며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거나 ‘완벽한 한 쌍’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유사함을 고려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들은 우리가 무엇이며 우리 마음속에서 무엇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다.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리라.” 사랑은 ‘상대방의 성공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선, 인식, 유사함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단순히 욕정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우정의 사랑으로 상승했는지를 검토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성공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홍수로 삶의 보금자리를 하룻밤 사이에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동정의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성공을 기뻐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자신이 성공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성공했을 때 과연 진심으로 상대방을 축하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서 참된 사랑이 기뻐해야 할 상대방의 ‘성공’이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었다고 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뻐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상대방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돈이 상대방이 진실로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즉 기뻐해야 할 성공이란, 사랑받는 이가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자식이 선택한 길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그 부모가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여 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토마스는 이렇게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철저하게 분석한 이후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의 원인”(I-II,28,6)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가 꿈꾸는 사랑과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실제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인다. 오히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이 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는 ‘사랑이 낳는 결과란 무엇이며, 왜 사랑하는 이들이 종종 불행에 빠지게 되는가’를 검토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해지려면 감정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버려야 할까?

계몽사상가 루소는 인간의 감정이 신성하여 힘과 가치 면에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종종 행복을 자신이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 상태인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개인이나 사회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는 모두 감정들을 억누르는 데서 기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토아학파는 정념 또는 감정을 이성과 법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서 그에 맞서 싸우고 버려야 하는 강렬한 감각 충동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감정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버려야 할까? 이 질문에 새로운 빛을 줄 수 있는 이론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발견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념’에 대한 정의 토마스는 행복에 필요한 인간적 행위의 내적 원리를 탐구하면서, ‘정념’에 대한 논고를 가장 먼저 다루며, 엄청난 분량(I-II, qq.22-48)을 할애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감정’으로 번역될 수 있는 ‘에모시오’(Emotio)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Affectus)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주로 ‘파씨오’(Passio)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파씨오라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받는 것, 어떤 행위를 당하거나 거기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통상적으로 정념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를 “감각적 욕구와 관련해서, 영혼이 외부의 사물에 의해 움직일 때 일어나는 내적 변화”(I-II,22,1)라고 정의한다. 모든 감각 활동과 마찬가지로 정념은 육체적 변화를 수반한다. 사람은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고, 두려우면 창백해지고, 갈망이 있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그런데 정념과 관련된 육체적 변화를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주체는 인식 능력이 아니라 욕구 능력이다. 더 나아가 정념은 지성적 인식이 아니라 감각적 인식을 따르는 현상이므로 의지가 아니라 감각적 욕구 능력에 속한다.(I-II,22,3), 즉 정념은 감각적으로 인식된 어떤 것이 유익(선)하거나 유해(악)하다고 평가될 때 발생한다.(I,78,4) 이와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토마스는 정념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정념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다만 그것이 이성에 따라 인도될 때 선이 되고, 이성에서 어긋날 때 악이 된다.”(I-II,24,1) 토마스는 인간이 정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윤리적인 잘못은 아니지만, 정념에 휘둘려 행동할 때 책임이 따른다고 본다. 즉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이에 따라 공격적인 행동을 할 경우, 이성적 판단의 부재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토마스는 감정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고, 인간 행동의 원동력으로 본다. 오히려 잘 훈련되고 이성에 의해 ‘길들여진 감정’은 도덕적 덕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달콤한 음식에 갈망이나 즐거움을 느끼더라도 이를 절제할 수 있다면 건강이 유지된다. 이렇게 인간의 윤리적 정당성은 이성의 판단에 뒤따라 “결과되는” 정념에 의해서 증대될 수도 있다.(I-II,24,3,ad1) 따라서 토마스는 ‘정념’을 그 자체로 악한 것으로 보는 스토아적 관점을 비판하며, 고통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 조정되지 않았을 때만 혼란이나 질병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I-II,24,2) ‘욕정적 정념’과 ‘분노적 정념’의 구분 토마스는 더 나아가 정념을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욕정적(Concupiscibilis) 정념’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좋은 것으로 인식된 대상을 향해 끌리는 것으로 ‘무엇을 원하거나 갈망하는’ 내적 움직임이다.(I-II,22,2) 예를 들어 목마를 때 맑은 물을 향해 생기는 욕구나, 좋은 성적,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기대 등이 해당한다. 여기에는 사랑, 갈망, 기쁨과 이에 상반되는 감각적 악에 대한 반응인 미움, 등 돌림(꺼림), 슬픔이 속한다. 둘째, ‘분노적(Irascibilis) 정념’은 도달하기 어려운 선 또는 악을 대상으로 어떤 고통스러운 난관이나 불의, 방해에 맞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여기에는 추구하기 어려운 선을 향한 자세인 희망과 담대함, 극복하기 어려운 악에 대한 반응인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이미 겪은 악에 대하여 일어나는 분노가 속한다.(I-II,23,4) 토마스는 이렇게 정념을 11가지로 요약하는데, 각 정념은 ‘사랑-미움’, ‘기쁨-슬픔’, ‘희망-절망’처럼 서로 짝지어 대립하거나 연속되는 구조를 지닌다. 정념에 대한 적절한 조절이야말로 행복의 든든한 토대 토마스는 지나친 정념이 이성을 압도하여 도덕적 결정을 방해하고, 부적합한 행동 선택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했다. 심지어 분노나 사랑 때문에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I-II,77,1) 비록 정념이 단독으로 행복을 결정하지 않더라도, 이성에 의해 잘 길들여지고 도덕적 덕과 결합될 때(I-II,59,5) 행복 실현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분노’라는 정념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 분노를 약자를 도우려는 실천과 정의 실현으로 인도한다면, ‘용기’라는 덕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렇게 행복은 정념의 긍정적 형상화 및 통제에서 비롯하는 ‘참된 기쁨’, ‘완전한 즐거움’과 연결된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감정이나 정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도, 무조건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아 철학처럼 지나치게 감정을 억누르거나 버리려 할 경우, 심리적 불균형이 생겨 내적 갈등과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감정과 정념은 인간 존재의 본성에 속하며, 행복에 필요한 동력이자 경험이다. 그렇지만 감정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도 인간을 짐승 차원으로 격하시켜 불합리하고 해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념을 억압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통제와 덕의 실천을 통해 올바르게 조절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정념에 대해 일반적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정념들을 철저히 다루며 일상에서 정념을 조절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모든 정념의 출발점이 ‘사랑’(Amor)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서 중요한 정념들을 하나하나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8-17 제3454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의 자유에 기초한 인간 자유의 충만함

현대의 몇몇 사상가들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신학적 결정론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 안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모두 인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주제를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에서 철저히 다루었다. 특히 모든 것을 잃고 상심했던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신의 섭리를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선한 이들의 고통조차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밝힌다. 그러나 마지막 제5권에서 ‘전지전능한 신이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예견하시므로 인간의 행동, 생각, 원의를 다 알고 계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산문 3) 보에티우스는 우연, 예지(豫知), 필연성 등의 개념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순히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느님의 섭리 토마스에 따르면, 하느님의 실재는 인간의 자유와 양립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그 확실한 토대를 구성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창조주의 주권적인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이 서로를 제한하는 경쟁자라는 잘못된 가정이 포함된다. 창조주는 피조물들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하시고 당신 피조물들을 존중하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존재 구조를 보존하면서 그들의 행위에 개입한다. “신적 운동을 통해서 필연적 원인으로부터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르지만, 우연적 원인로부터는 결과가 우연적으로 뒤따른다. …하느님은 의지가 필연적으로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운동이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인 채로 남아 있도록… 그렇게 의지를 움직인다.”(I-II,10,4) 토마스는 ‘영향을 미치는 것’(Immutare)과 ‘강요하는 것’(Cogere)을 구별하고, 하느님이 의지에 대해 강요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만, 은총으로 그것에 영향을 미쳐 그것을 강화하거나 특정 대상들을 향하도록 만들 수 있음은 인정하고 있다.(「진리론」 22,8) 더욱이 하느님의 영원성은 신적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영원성’은 “시작도 끝도 없는 지속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I,10,2) 만일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다면 그분의 전지함은 미래를 확실하게 예견하는 것을 포함하므로 인간은 하느님이 예견한 행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로봇처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지 않게 되어 그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이며 인간의 기도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지 않다면’, 그분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것도 ‘미리’ 아는 것이 아니며, 단지 현재 속에서, 우리에게는 과거나 미래인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의 현재에서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특수한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실 뿐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니라 최종 목적에 비례하는 행동만이 인간을 그 목적 안에서 완성되도록 인도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에 의존되어 있다. 그의 자유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자유이며, 인간은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빛이 색을 완성하는 것으로 비유된다. 빛은 모든 색을 초월하므로 모든 색을 완성한다. 하느님 또한 피조물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분의 은총은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힘,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완성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을 향하는 가운데 선을 선택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선물로 주신 소명을 실현할 수 있다. 만일 인간 존재자가 자신의 근원적인 원리를 망각하고 참된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을 잃어버리면, 근대의 인간들이 지상 과제로 여겼던 온전히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 자유의 근본 원천이다.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가 어떻게 해야 충만함에 이르는지 그 진정한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더 큰 관계, 즉 자연과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참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운 커다란 삼각형(하느님, 이웃, 자연)의 세 변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또한 자기 자유의 수행을 위한 한계와 규칙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자기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필요한 도구로 이해된다. 자유는 진리를 알기 위해, 그리고 선을 추구하도록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귀중한 선물이며, 자기 자신의 인격의 깊이를 실현하고, 보다 아름답고 참된 세상을 건설하라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값진 도구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너’로 부르시며 당신의 협력자로 삼으시고 그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이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자신을 이루어가는 일종의 ‘공동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이 도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할 때, 인간 각자는 참된 자기완성과 아름다운 세계 건설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내적인 요인 중에서 감정과 충동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은 바로 전통적으로 ‘정념’(Passio)이라고 불렸던 인간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놀라운 지식을 축적해 왔다. 토마스는 이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다음 호부터 집중적으로 인간의 정념을 고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7-27 제3452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현대인은 이전 세대보다 자연재해, 궁핍과 기아, 갖가지 질병, 미신, 폭군들의 압정과 같은 많은 굴레에서 벗어나 생활하고 있다. 최근 등장한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과학과 이에 함께 급성장한 교통과 통신의 기술은 인간을 제약해 왔던 시간과 공간의 장벽마저도 허물어뜨렸다. 이처럼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편리한 수단들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할 인간 본연의 천부적 권리, 즉 ‘자유권’의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참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의 등장과 이에 대한 비판 결정주의를 거슬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와 같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투신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주목할 만한 성찰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구속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결정주의’를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인간이란 자유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더 높은 힘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인정하려는 입장은 많은 비판에 부딪혔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세계와 사회와 역사에 의존해 있는 상태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인간은 또한 외부적인 요인들뿐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나 심리적 중압감 등으로부터도 제약을 받는다. 실제로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보이고 그들 중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더욱 적어 보인다. 자유 개념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이를 추구할 때 ‘불안’이나 ‘고독’을 느끼게 되고 때로 그 심리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인간의 자유는 단일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향한 의지의 경향 자체는 필연적임(「진리론」 14,2)을 인정하면서도, 의지가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는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실행(Exercitii)의 자유는 의지가 자신의 의지 행위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 곧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종별화(種別化, Specificationis)의 자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반대(Contrarietatis)의 자유는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진리론」 22,6) ‘실행의 자유’는 전적으로 의지의 재량에 달려 있지만, ‘종별화의 자유’는 권력, 명예, 재화 등의 가치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외적으로 방해받지 않을 때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단계에서 프롬(E. Fromm)이 ‘~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라고 부른 ‘소극적 자유’, 즉 관계·강제·구속·방해 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을 위한 자유’(Liberty for~)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는 ‘반대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측면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도 자유가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현대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고, 일부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듯하다. 외적인 성공에만 집착해서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팽배하고 희생, 절제, 정의, 이웃에 대한 배려 등을 경멸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한 애순과 관식의 사랑이 전 세계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다. 양친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이 청춘 남녀가 단지 부모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산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은 원했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단순한 벗어남, 혹은 도피만으로는 개인의 독립이 아니라 당사자와 양친들에게 더 큰 속박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순수한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함을 뚜렷이 자각하고 살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결정을 통해서 엄청난 어려움들이 생겨났지만, 애순과 관식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새롭게 맺어진 관계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확신에 찬 의식과 행동이 자신들의 결정에 반대했던 이들도 설득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양한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가치 자체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이것이 좋으니까 내가 한다’라고 말해야지 ‘내가 하니까 좋은 것이다’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기준은 행위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만약 인간의 의지가 나쁜 것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자유의 결함을 의미한다. 비도덕적인 결정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 자유의 모습을 지녔지만, 자유도 아니며 자유의 한 부분도 아니다. 많은 현대인이 빠져드는 도박, 마약 등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중독이라는 부자유를 남길 뿐이다. 인간은 항상 선한 대상과 악한 대상 중, 자신의 자유를 성숙 또는 억압하는 방향 중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도덕적인 욕구가 의지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면, 의지가 확고히 선을 향하고 있을수록 그 자유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환경이나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인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섭리가 우주 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면, 과연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있을까?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해 다음 호에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내지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 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善)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 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 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에 대한 직관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행복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있는 창조된 선 안에서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밝혔다. 이어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I-II,4,4)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지극(至極)한 행복(幸福)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直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러왔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세 문제(I-II,qq.3-5)에 걸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적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지복직관이라는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따라서 지복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최종적인 진리, 즉 제1원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이 지상에서의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을 직관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I-II,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다면,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토마스의 지성 강조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결론을 보면서,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통해 자연사물을 향유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향유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신국론」 8,8) 두 성인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토마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참행복은 실천적 지성의 작용보다는 사변적 지성의 작용,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일에 사로잡히는 실천적 삶보다는 진리를 관상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I-II,3,2,ad4) 이러한 관상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적 행위이며, 이는 다른 것들보다 그 자체로 갈망되기 때문이다.(I-II, q.3, a.5)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완전한 행복이 없다. 인간 인식이 육체적 역량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조건 아래에서는 신적 본질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I,12,11) 토마스는 이를 올빼미나 박쥐가 너무도 밝은 태양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현세의 인간도 본성만으로는 진리의 근본인 신적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끝난 뒤에야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지복직관이 지닌 중요한 특성들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통해서 내세에 얻게 될 ‘지복직관’이란 개념을 배운 신자들에게도 이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멀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지복직관은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에 따르면, 참행복이란 완전한 상태이므로 그 상태에서 모든 행위와 욕구는 정지되며 획득한 선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천상에서의 참된 행복은 결코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되면 의지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떠한 잘못도 불가능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도 지복직관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배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상실할 두려움까지도 사라지게 된다.(I-II,5,4)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므로,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I-II,5,6,ad1) 인간의 자연적 본성만으로도 불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하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복직관’이라는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선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하느님은 홀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 지복직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신다.(I-II,5,7)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사랑했던 의지는 궁극적 단계에서의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I-II,4,1,ad1)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얻게 되는 지복직관이라는 참행복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포상”(I-II,5,7)인 셈이다. 비록 불완전한 행복을 주는 ‘세상의 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가장 좋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외적인 선(재물, 명예, 권력 등)이나 육체와 영혼의 선들이라도 이를 올바로 추구한다면, 내세에서의 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원동력”(I-II,5,8,ad3)이자 이를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지닌 자연적 역량과 도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차이는 ‘공로’(meritum)의 성격을 가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현세에서 ‘나그네’(viator)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걷는 여정은 끝없는 방황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를 위해 마련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복직관’이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짐승들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도 이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복직관이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여행할지, 또는 도중에 있는 역에서 머물러 이를 포기할지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지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논의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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