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리들은 실제로 아우구스티노 및 여러 교부들이 과거에 성경에 대해 취했었던 접근법과 많은 부분 일치하는 것으로서 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그 글을 쓰던 시점이 공교롭게도 종교개혁이라는 위기를 맞아 이전보다 더욱 보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특히 적응의 원리는 종교개혁가였던 장 칼뱅(John Calvin·1509~1564)이 성경 해석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던 방식이라는 점도 가톨릭 측에서 보기에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갈릴레오의 입장 표명은 ‘누가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있는가’하는 당시의 심각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이래로 프로테스탄트 측은 가톨릭에 대항해서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즉 ‘성경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교도권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스스로가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측의 주장에 대해 가톨릭은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제4회기(1546)의 「성경들과 전승들의 수용에 관한 교령」에서 성경 해석의 자격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맞대응했었습니다.
“그밖에도 경솔한 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는 바이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교 교의의 체계에 속하는 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서 자신의 전문 지식에 의지하면서, 성경을 자신의 견해에 따라 왜곡해서는 안 되며, 성경의 참된 의미와 해석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가 간직하며 고수해 온 그 의미를 거슬러 바로 이 성경을 왜곡해서는 안 되고, 교부들의 일치된 합의를 거슬러 성경을 감히 해석해서도 안 된다. 비록 이 해석이 어느 시대에도 출판을 위해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교회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갈릴레오는 ‘무엄하게도’ 성경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고 실제로 재해석할 권한이 일개 평신도에 불과한 그 자신에게도 있다는 생각을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암시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이 편지의 사본은 자유롭게 복사되고 회람되었기 때문에, 그 글을 읽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보기에 그는 오만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프로테스탄트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인상마저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갈릴레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1615년 말에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