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태조 왕건>이란 사극이 방영되었을 때 정작 고려를 건국한 왕건보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한쪽 눈이 먼 궁예가 주목을 더 받았다. 나도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쳤고 늘 말썽을 피우다가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어 혼란해지자 궁예는 891년 절에서 나와 한창 득세하던 세력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서 “부하들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다.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궁예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협조가 절실했다.
궁예는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궁예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불렀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무리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공평무사한 인물이었지만, 왕이 된 후 민생파탄과 공포 분위기로 결국 백성들도 등을 돌렸다. 궁예는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분노한 백성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찌야는 16살의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선대 왕의 정신에 따라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중요한 성읍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찌야의 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우찌야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 그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성공을 이루면 교만해지기 쉽다. 우찌야도 강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몰락했다. 그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고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우찌야는 주변의 찬송에 취해 하느님의 율법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고쳐 실천하려고 했다.
이때 대사제들이 말렸지만 교만해진 우찌아는 하느님의 법을 거스렀다. 우찌야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한 우찌야는 별궁에서 홀로 한센병을 앓으며 쓸쓸히 지내다 죽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지만,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속엔 하느님이 사라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물거품이 되게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