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 52,7-10 / 제2독서 히브 1,1-6 / 요한 1,1-18 (또는 1,1-5.9-14)
오늘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는 ‘로고스 찬가’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특별히 1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밤미사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과 그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알려주었다면(루카 2,1-14), 낮미사에서는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정체, 곧 다윗 고을에서 태어난 구원자(루카 2,11-12 참조)에 대해 찬가의 형식에 맞추어 신학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강론지침」 115항 참조)
요한복음 1장 14절을 원문에 따라 직역한다면, 그 표현은 조금 달라집니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에 장막을 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먼저 ‘살’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사륵스’는 ‘살’ 혹은 ‘육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말씀의 육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하였고, 이를 통해 신성을 지니신 분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표현은 “장막을 치셨다”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스케노오’는 ‘머물다’ 혹은 ‘거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어 명사 ‘스케네’와의 어원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막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이자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장막 안에 현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탈출 25,8-9; 40,34; 1열왕 8,10-11.27 참조). 말씀이 살을 취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육신은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이 머무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살을 취하신 말씀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동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개념적 혹은 사변적 대상이 아닙니다. 로고스 찬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실제적이며 역사적 사건으로 알려주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그분의 신원과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곧 ‘말씀’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세상 창조에 참여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1,1-4 참조)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 특별히 1장 14절에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며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요한 1,1-2), 당신이 소유하였던 부유함을 포기하시고 가난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천상의 권한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힘없고 나약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요한 1,14 참조)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이가 되시어 초라한 구유에 머무르고자 하십니다.(루카 2,7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풍요로움’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하며, 이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낮미사 본기도)
10여 년 전 유학 중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순례 일정 중에 베들레헴을 찾아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념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헬레나 성녀의 관심과 주도 아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라고 전해지는 동굴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의 구조 중에서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 있었는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굉장히 좁고 작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몸을 낮추지 않고서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작은 이’, 곧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적 가난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고, 나눔을 통해 실현할 수 있습니다. 가난의 상대 개념은 ‘부’(富)가 아니라, 재물이나 물건에 집착하여 놓지 못하는 ‘탐’(貪)입니다. ‘부’(富)를 나눈다면, 풍요와 충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갈등과 분열은 부유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인색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소유한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을 직접 살아갈 때, 그 곳에서 살을 취하신, 곧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