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믿음을 가질까?
아마도 많은 신앙인, 아니 대부분의 신앙인은 아주 예전에 부모님들이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믿을 것이다. 부모님들에게 왜 그랬는지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며, 때로는 우리의 의사에 반해 교회에 다니게 했는지 말이다.
결국, 그 대답은 신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믿음은 신앙과 희망, 의심의 혼합체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의심과 씨름하며, 의심 속에서 살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비신앙인, 즉 무신론자들이 신앙인들보다 더 독단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반면, 신앙인들은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신론자들은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며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왜?”라고 묻는다. 무신론자들은 우주의 광대함을 보며 하찮은 우리 인류에게 신경을 쓸 신이 있을지를 의심한다. 신앙인들은 똑같은 고통과 과학, 그리고 세상의 혼란스러움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없다거나 누군가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신은 산타클로스와 경찰의 혼합체 같은 존재일 것이다. 우리가 정중히 요청하면 선물을 주지만, 잘못을 저지르면 잡으러 오는 존재로 말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기도해도 종종 응답이 없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존재일까? 그렇다면 ‘나쁜’ 일이란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할까? 암에 걸린 어린이? 이건 막아야겠지만, 주말에 비가 오는 건? 글쎄다. 결국, 그런 신은 모든 것을 통제하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꼭두각시 조종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의 행동이나 자연의 작용은 실제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신이 모든 것을 고치거나 막아버릴 테니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실제 결과나 자유 없이 단순한 연극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사랑이 신앙인은 항상 의심을 품어야 한다. 특히 고통과 신의 부재처럼 보이는 상황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비신앙인 또한 항상 의문을 품어야 한다. 신앙인이 고통과 신의 부재를 묻는 것처럼, 비신앙인은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해야 한다. 비신앙인들은 또한 고통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고통은 세상의 자연스러운 상태일 테니까.
우리의 삶에서의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이들은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조차 자연 외부의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에 대해 왜 화를 내야 할까? 왜 고래나 나무를 보호해야 할까? 왜 후손에 대해 신경 써야 할까? 왜 이웃의 복지에 대해서 걱정하면서도 이기심을 물리쳐야 할까?
우리 안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대개 우리의 안락이나 우리의 이익에 반대된다. 이 당위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분명히 경험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외부에서 온다. 그렇다면 어디서, 누구에게서 올까?
또한, 우주의 질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우주의 수학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아무런 이득이 없지만,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해하려는 열망, 그것을 더 깊이 알아가려는 열망,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조직되어 있는지에 대해 경탄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주의 기원에 대한 현재의 빅뱅 이론을 처음 제안한 벨기에 천문학자 조르주 르메트르가 가톨릭 신부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만하다.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 왜 무(無) 대신 어떤 것이 존재할까?
결국,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그 어느 쪽도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그것은 신념에 관한 행위이다. 하지만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 무신론보다 현실을 더 근본적으로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믿음을 선택하면 의심과 명백히 반대되는 증거를 무신론보다 더 잘 수용할 수 있다.
신앙인에게는 믿음을 선택할 의지가 있다. 우리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공동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그것에 반대되는 증거들 앞에서 끊임없이 지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선택이 갖고 있는 함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앙인은 의심과 끊임없는 성장의 필요성을 정직하게 마주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 모든 것이 그 선택에 의해 그리고 그 믿음을 살아가는 모험을 향한 우리의 의지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 _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