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희망의 순례자들(Pilgrims of Hope)

이승훈
입력일 2025-01-06 09:55:59 수정일 2025-02-03 13:32:34 발행일 2025-01-12 제 342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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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님은 신년 메시지에서 아래와 같이 ‘희망’을 강조합니다.

“지난 2024년은 우리 사회에 큰 아픔과 혼란을 안겨 주며 마무리됐습니다. 갑작스러운 계엄으로 촉발된 어려운 시간들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 의식과 평화로운 연대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믿음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희망’이라는 말이 이토록 마음 깊이 와 닿았던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이 꽂힙니다. 마치 ‘희망’이라는 글자를 꾹꾹 눌러 쓴 것처럼 그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희망이라는 말에서 전율이 느껴집니다. 마니피캇(Magnificat)의 첫 소절,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니”가 읊조려집니다. 내 영혼이 얼마나 희망을 염원하고 있는지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의 메시지를 접할 때, 분명 위로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염원하는 희망은 위로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하고 길을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느님의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법은 한 개인의 이익을 넘어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10월 성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에서 희망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에 ‘중점을 두며’ 살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래서 희망은 ‘가장 겸손한 덕목’임을 강조합니다. 만일 이러한 관점을 잃는다면, 삶은 정체되고 모든 일은 멈추며, 결국 부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에게 진리에 순응하고 깨어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진리가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진리는 연대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고 공동선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 진리에 닿아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가 희년으로 선포한 해로서, 그 주제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희년 주제인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말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위한 희망의 표징이 되어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면 어려움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의 표징이 되어달라는 것은 시대적 소명 같습니다.

불의를 저지르며 정의를 외치는 자에게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각자의 이익에 우선해 불의를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자에게도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정순택 대주교님이 말했듯이 “각자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향해 서로 손을 내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집단지성의 힘과 새해 첫날 무안공항을 찾은 수많은 추모객과 봉사자들의 따뜻한 연대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 희망의 순례자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 매일 매일 생각할 과제가 생겼습니다. 1976년 김수환 추기경은 한 인터뷰에서 희망을 꿈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꿈이란 말은 인간다운 사회, 정의롭고 진리에 바탕을 두고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사회를 건설해 보자는 꿈”입니다.

“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촛불을 하나 밝히면 나도 촛불을 밝혀야 되겠다, 너도 밝혀야 되겠다 하여 수백만 그리스도인이 모두 촛불을 밝히게 되고, 그러면 그 촛불의 빛이 분명히 현실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김수환 추기경 인터뷰, ‘이 민족에게 희망을’, 「대화」, 1976.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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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최진일 교수는 로마 교황청립 레지나 아포스톨로롬대학에서 생명윤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서강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교구 생명윤리자문위원,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