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묵시록, 예수님이 당신 이야기를 상징 통해 풀어놓은 글 언젠가 이미 만난 예수님 다시 만나려는 ‘희망의 기록’
“왜 요한묵시록을 읽는가”라는 물음에 흔한 답들은 이런 것이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알고 싶으니까, 그 종말의 시간에 도대체 무엇이 펼쳐지는지 궁금하니까, 아니면 종말의 심판, 재앙 등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이 무엇일까 살펴보기 위해서라는 답들. 종말을 염두에 둔 이런 답들은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낯설다. 우리 일상과는 멀어도 한참 먼 시간의 일들이라 낯설고, 그 먼 시간에 대한 얼마간의 호기심이 어른거리는 답을 얻고자 성경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다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테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요한묵시록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나가려 한다. 무엇보다 종말에 대한 괜한 호기심이나 막연한 두려움은 우리의 독법과 무관하다. 요한묵시록의 첫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로 시작한다. 그리스말로 ‘아포칼립시스’라는 ‘계시’는 ‘장막을 걷어낸다’는 뜻을 지닌다. 숨겨지고 가려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문법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Ἰησοῦ Χριστοῦ)는 그리스말 명사의 속격(屬格·Genitive case) 형태로 쓰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말의 속격은 주체적 의미와 객체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두 의미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주체) 예수 그리스도를(객체) 밝히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 요컨대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여러 상징들을 통해 찬찬히 풀어놓은 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알고 그분을 이미 믿고 있다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새로울 게 없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간략하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분의 공생활이 모든 계시의 절정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계시라는 말마디는 밀교나 신비주의자들의 감추어진 정보 따위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계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으로 이해했고(로마 16,25; 갈라 1,16 참조), 복음서에서 계시는 젖먹이 어린이들에게조차 건네어진 하느님의 구원에로의 초대로 읽혀진다.(마태 11,25 참조)
그럼에도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염두에 둔 태도가 흔한 이유는 아마도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란 문장 때문일 것이다.(묵시1,1) 특별히 ‘머지않아’로 번역한 ‘엔 타케이’(ἐν τάχει)가 아직 남아 있을 또 다른 계시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엔 타케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시간 개념이다.(다니 2,28 참조)
이를테면, 종말의 시간이 ‘이미’ 다다랐다는, 그래서 ‘결정적으로’ 종말의 시간이 지금 여기서 펼쳐졌다는 의미가 엔 타케이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엔 타케이를 ‘갑자기, 곧, 느닷없이’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떠한 시간적 여유나 기다림조차 허락치 않는, 지금이야말로 계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지금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의 사건들이어야 한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사건들을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으로 해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한 요한묵시록은 그 읽기가 끝난 지점에 예수님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여, 요한묵시록의 모든 읽기는 예수님을 찾는 것으로 방향 지워진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마지막 시대의 구원에 관련된 것이고 요한묵시록 스물두 개의 장을 읽는 것은 그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갑자기, 곧, 그리고 느닷없이’ 이루어졌다는 희망과 위로를 얻어 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열거하는 요한묵시록의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이나 사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1장 1절은 계시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그리고 요한에게 ‘알려졌다’고 말한다. ‘알려졌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세마이노’(σημαίνω)로 ‘상징화하다’는 뜻을 지닌다.
요한묵시록은 미래에 펼쳐질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두고 여러 상징으로 새롭게 소개한 글이다. 요한이 보고 듣고 그래서 기록한 요한묵시록은 요한이 가진 수많은 상징들로 꾸며진 새로운 예수님이다. 다만 그 상징들은 예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오래된 것들이라 누구나 이미 알고 있어서 새로울 게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익숙한 상징들의 새로운 조합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님을 제 삶의 언어(상징)로 수없이 상상하며 갈망하는 사랑의 노래가 된다.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무엇을 위해 읽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무엇을 더 알고, 더 챙겨서 내 신앙의 정도를 한껏 들어 높이려고 요한묵시록을 읽지는 말자. 지금 내가 읽는 요한묵시록은 언젠가 내 삶의 어느 곳에서 이미 만난 예수님을 다시 만나려는 희망과 설렘의 기록이기에.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통해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한 그 사람, 요한을 우리는 부러워해야 한다. 그의 믿음을, 그의 사랑을….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