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승훈
입력일 2025-03-05 09:05:56 수정일 2025-03-05 09:05:56 발행일 2025-03-09 제 3432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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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최종 목적은 행복…진짜 행복은 인격의 고유성에서 출발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새롭게 발전한 ‘챗지피티’(ChatGPT) 등을 이용하여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소외, 권태, 상실, 좌절, 절망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제II부에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 구분 
인간적 행위만이 행복 찾는 출발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철학과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에 대한 매우 풍부한 성찰이 제시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철학과 신학이 쌓아 온 행복 개념에 대한 통합적인 성찰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이제 우리는 성 토마스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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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

행복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적 행위’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인간이 행하는 호흡작용, 소화작용, 수면, 무릎 반사 등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란 오직 인간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행위만을 의미한다.(I-II,1,1) 성 토마스에 따르면, 다른 피조물들은 마치 궁수의 의지에 따라 화살이 표적을 향해 쏘아지듯이 육체적 필요성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I,2,3)

그러나 인간만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행위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된 인간 인격의 고유함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인간]는 스스로 자기 활동들의 원리이고, 말하자면 자유 의지를 소유하고 자기 활동들을 통제한다.”(I-II, 머리말) 따라서 오직 이 ‘인간적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구분은 동물, 심지어 곤충에 대한 생태 연구로부터 인간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의 타당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이성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낄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행복”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일부 심리학적 경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려면 필수적으로 인격이 지닌 고유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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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전

인간 추구의 최종 목적인 ‘행복’

성 토마스는 계속해서 인간은 행위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I-II,1,4)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간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행위를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 본성 지닌 개별 실체
최고선은 ‘행복’으로 모두 동일해도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최종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성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기본 틀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종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같이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와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 활동의 목적들은 인간이 행복을 찾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만큼이나 여러 가지이며, 그 최종적인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가운데 인간은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을 찾는 우리 성찰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욕구 내지 의지의 건전함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떤 개별적인 대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많은 이가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강력한 후보들, 즉 부(재물), 명예 또는 명성, 권력, 육체의 건강, 풍부한 지식 등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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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