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마귀가 가지지 못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하느님은 그걸 우리 인간에게 주셨어. 그걸 아니?”하고. 나는 별생각 없이 “사랑 아닐까?”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가끔 마귀도 자식 정도는 사랑하지 않을까? 그것에 ‘참’ 자가 붙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는데, 그가 말했다. “정말로 마귀가 가지지 못한 것은 바로 ‘희생’이야. 네가 어떤 사람이 악한지 선한지 살펴보려고 할 때 이 부분을 유의해. 그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지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지.”
나는 이 땅에 여성으로 살면서 오랜 세월 희생이라는 것에 대해 민감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내 또래 중에서도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이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으며, 경제력 없는 어머니가 남편에게 맞고 살면서도 아이를 위해 헤어지지 못하는 것도 숱하게 보았다. 이에 열거한 사례들에 대해 반항심 가득한 내가 반감을 품었음은 물론이며, 나는 희생이라는 말이 가지는 폭력성이 싫어 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회심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명제를 묵상하면서 오래전 들었던 마귀의 일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 소녀들에게 강요되었던 희생, 힘없는 아기 엄마에게 강요되었던 희생, 더 나아가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이나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에게 강요되었던 것을 우리는 희생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희생은 선로에 떨어진 할머니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청년에게 걸맞은 단어이다. 신장이 망가진 늙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주는 큰딸의 의지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건강하고 강한 자가 약자에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희생이라기보다 그냥 폭력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 보였다. 자신의 미각을 위해 신자 전체에게 다른 음식을 강요하는 사제부터,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런 희생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뻔뻔함은 전염병처럼 더 무섭게 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도소 봉사를 오래 한 법륜 스님의 말 중 하나는 그 정곡을 찌른다.
“처음에 나는 교도소에 가서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썼어요. ‘희망을 가지셔야 한다’고도 했고,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인생을 사시라’고도 했죠. 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죠. ‘여러분 다들 억울하시죠?’ 그 순간 엄청나게 힘찬 합창이 들려왔어요 ‘예!!’ 하고. 교도소에는 억울하다는 사람이 이미 만원입니다.”
사순 기간 동안 나는 십자가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세 분의 희생이 수놓아져 있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내놓으신 하느님, 자신을 오롯이 희생하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침묵으로 견디신 성모님. 그래서 십자가에는 악을 물리치는 힘이 있나 보다. 우리보다 만 배는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마귀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하는 그것,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이자 어리석음으로만 보였다는 그것, 십자가의 희생.
“그러니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