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마에 재를 얹으며 시작된 사순 시기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가난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어긋나고 균열이 가 폐허 된 세상 곳곳을 바라보며 ‘희망의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근간을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 실존의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길 위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큰 사랑으로 걸음을 떼어 길을 내시고, 급기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 솟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내신 예수님의 우주적 사랑을 거슬러 사사로운 생각의 틀에 붙잡힌 악의 하수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은 집행되었다. 여전히 행해지는 불의의 한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희망을 품은 순례자’로서 발걸음을 떼어갈 수 있을까.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20세기 정치철학의 중요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사유’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과정을 다루며, “히틀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그를 비판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공무원’으로서의 아이히만의 진정한 무능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에 있다고 보고했다. ‘현실에 맞서 말할 수 없는 무능’,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무능’,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 안에 깃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지닌 이가 곧 아이히만이다. 악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채 개인주의에 머물러 아무 식별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드러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명령 혹은 사적 안위만을 따르는 것은 악을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비극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제주 4·3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참사, 심지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학살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낳은 참상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직사회 상부의 명령이다. 이 명령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해 수행하는 것이 명령 혹은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자질이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상부의 명을 받고 출동한 군 장교 중에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하들에게 총을 뒤로 메라고 한 이도 있었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맡은 직위에서 숙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유하는 상급자는 항명하며 수하들을 바르게 통제할 수 있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12·3 비상계엄에 대항했던 성숙한 시민들과 죽음을 불사하고 진실한 증언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어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성 있는 이들과 달리 법 지식을 악용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조인들과 위헌·위법에 위증을 일삼는 최고 통치권자에 대해 마땅한 판결이 내려지길 기다려 왔다.
십자가는 생사를 넘나드는 식별을 통해 수락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예수님이 받아안은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답하는 말씀(프란치스코 교종)이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서도 묵묵히 정의를 지켜내고, 마음이 일러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길어 올린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잠깐 멈춰 십자가에 깃든 하느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둠 한가운데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