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봄의 쓸쓸함

이승훈
입력일 2025-03-25 17:41:09 수정일 2025-03-25 17:41:09 발행일 2025-03-30 제 343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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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 쌓인 눈들이 땅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새순이 아니라 가을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작년의 낙엽인지, 재작년의 낙엽인지 모를 지난날의 흔적은 한껏 초라해진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작년에 단풍이 유독 예뻤는지, 유난히 별로였는지는 상관없습니다. 가을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볼품없는 모습은 따듯해진 날씨와 상관없이 쓸쓸한 시간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 허무를 체험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은 자신의 과거가 찬란했든 비참했든 과거를 현재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고,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순이 돋기 전, 황량한 나무들과 바닥에 보이는 나무들의 지난날에서 우리도 성장하기 위한 굳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나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고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무는 성장하고 기적과 같이 새잎을 다시금 피워냅니다. 지난날을 충분히 수용하며 과거에서도 자양분을 얻고 성장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종종 과거의 영광은 언제나 빛나길 바라고 과거의 상처는 빨리 사라지길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없어질 결과물에만 집착하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만약 나무가 자신의 잎이 너무나 아름다워 월동 준비를 하지 않고 잎들을 붙잡고 있다면, 겨울에 내린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지마저 부러질 것입니다. 만약 지난해 충분히 노력하고 뿌듯한 결실을 맺었다면 그 순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 또 다른 결실을 위해 한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부족했던 순간이 부끄러워 외면하기만 한다면 그곳에서 얻을 귀중한 보화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만약 나무가 풍성히 자라지 못한 잎들을 저 멀리 치워버린다면 내년에는 더 빈약한 잎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만약 지난날의 실수나 상처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한다면 같은 곳에서 또다시 넘어져 더 많은 아픔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에 따라 함께 작용하고 우리에게 선으로 이어짐을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켜켜이 쌓인 낙엽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나무에게 선으로 작용하듯이, 우리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 모든 것도 영원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깨닫고 자유로워진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영원함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고 주님의 작품입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통해 모든 순간 체험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바람, 곧 성령을 통해 하루를 살아가고자 기도하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충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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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