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당신의 유리알] 빈무덤으로 온 편지

이주연
입력일 2025-04-29 11:16:01 수정일 2025-04-29 11:16:01 발행일 2025-05-04 제 344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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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께 전달한 인사·편지에 기쁨과 은총 담긴 답장 도착
빈 무덤 같은 우리 마음에도 주님께서 사랑 전하심 느껴
“생각도 못 했던 교황님의 답장…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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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54명의 청소년 희년 순례단이 한복 차림으로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박홍철 신부 제공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공경하올 테오필로스(하느님의 벗) 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 부활 이후,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의 복음들은 빈 무덤을 본 제자들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두움에 빠져 있었지요. ‘어두움’은 길을 잃게 합니다. 빈 무덤 속에서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의 사라짐, 부재는 언제나 슬픔을 안겨주고, 사랑한 만큼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당신도 아실 겁니다. 마치도 지난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선종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 교황님을 한 번도 직접 뵙고 인사드린 적이 없습니다. 꿈에서 딱 한 번 그분이 저를 아기처럼 안아 주신 적은 있지요.

어떤 사람은 운 좋게 교황님과 악수를 하고 나서 평생 손을 안 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런 기회가 저에게도 있을까요. 그러다가 지난 2월 말, 제가 본당 청소년들과 함께 2025년 희년을 맞아서 일 년 반 동안 준비한 로마 성지순례를 가게 됐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멀리서나마 교황님께 인사를 드리고, 설날 세배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 뵙기 일주일 전부터 그분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교황청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주님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시고 급히 입원하셨지요. 그래서 대신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찍은 사진과 새해 인사가 담긴 편지를 대신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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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교황청 국무원 국무장관 보좌관 로베르토 캄피시 몬시뇰이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의 답장.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저희 본당은 지난 1월 새벽 미사 후 성전에 불이 났습니다. 신자분들은 성모상 앞에서 많이 우셨고, 청소년들의 이탈리아 성지순례도 취소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성당 화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마음속에 ‘내적 성전’을 세우는 일도 중요했기에, 서울에서 로마까지 이렇게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편찮으시단 말씀을 들었습니다. 쾌차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나중에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때 꼭 뵙고 싶습니다”라고요. 54명의 청소년 희년 순례단은, 교황님을 뵙는 대신에 로마 성모대성당에서 그분의 건강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테오필로스 님, 누구보다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돌아가신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은, 그분의 빈자리가 제게 무척 크게 느껴졌습니다. 알지요. 인간이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성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대성통곡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활 제2주일인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저는 많은 분들께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1월 12일 성당에 불이 났고, 소화기 들고 불 끄러 갔다가 유독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했다’고 하느님의 벗들에게 하소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이 난 2층 성당은 내부 철거로 텅텅 비어 버렸고, 십자가까지 사라져 스산한 공간으로 변해 마치 예수님의 빈 무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어디에도 주님이 안 계실 거 같은 이 자리에, 비 오는 토요일 어김없이 부활 성야를 맞이해야 했고, 본당 신자들은 비좁은 성당 카페에 앉아 미사에 참례하고 있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날 중에 지난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아침 수신인 삼각지본당 신부 이름으로, 교황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것은 3월 26일 교황청 국무원 국무장관 보좌관 로베르토 캄피시 몬시뇰이 보낸 '교황님의 답장'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께서 정성껏 전해주신 편지를 기쁘게 받아 보셨고, 그 안에 담긴 자녀된 마음의 신심과 존경의 뜻을 깊이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삼각지본당 신자들과의 희년 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전해주신 데에, 깊이 관심을 보이셨고, 성하께 드린 선물에 고마워하셨습니다. 또 신부님과 맡으신 사목 직무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를 약속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의 진심 어린 배려와 영적으로 함께해 주신 마음, 그리고 애정 어린 연대에 깊은 감사를 표하셨고, 삼각지본당 공동체가 함께 나눈 희년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아울러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과 신부님의 사목 직무에 맡겨진 모든 이들을 제대 앞에서 기도로 기억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희망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애로운 전구를 청하시고, 마음을 다해 교황 강복을 내리시며, 그 강복이 위로와 평화의 표징이 되고, 주님 안에 바라는 모든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이 ‘평화’를 빌어주시자, 그제야 그들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당신 육신을 챙기기에도 버거우셨을 그 순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보내신 교황님의 답장은, 갑작스러운 화재와 복구의 지난한 과정에 지친 삼각지 본당 공동체에 부활의 선물을 주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테오필로스 님.

언젠가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뵙게 되겠지요. 아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부활이어도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느낄 수 없는 빈 무덤 같은 우리 마음에, 주님께서는 예기치 못한 편지로 그 사랑을 전하십니다. 그래서 빈 무덤은 이제 죽음의 거처가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고,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