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선’ 안에서 발견될까?

이승훈
입력일 2025-05-14 09:22:11 수정일 2025-05-14 09:22:11 발행일 2025-05-18 제 3442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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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최종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 가능
명상 등으로 얻는 만족은 일시적…현세의 이성적 삶은 불완전한 행복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후보들에 대해 하나씩 검토해 왔다. 토마스가 받아들이는 인간의 세 가지 선에 대한 구분, 즉 외부적인 선, 육체와 관련된 선, 영혼의 선에 비추어보았을 때, 진정한 행복은 재물 등의 외적인 선이나 건강 등의 육체의 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 영혼의 선, 달리 말하면 인간성 자체의 완성이야말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자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건강한 육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mens sana in corpore sano)이라는 라틴어 속담도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은 건강한 정신이라는 영혼의 선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 사회의 욕구 이론을 대표하는 매슬로(A. Maslow)도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를 넘어서는 ‘자아 실현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영혼의 선에 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는, 바로 토마스가 행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멘토로 삼아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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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출처 위키미디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 한계와 극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 행복을 찾기 위해 ‘좋은’ 또는 ‘잘’(eu)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들을 분석한다.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지닌 대상에 대해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혹은 해야 할 행위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바로 그 평가 대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됐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특정 분야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기능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기능, 즉 이성과 사유에서 찾는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해 주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이성적 역량을 충만하게 실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로 대표되는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잘 이루어지는 것에서 행복이 온다는 주장을 듣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 난무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저자나 독자는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과 태도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자기 계발서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가짐만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식의 비현실적 약속을 남발한다. 실제로는 불평등과 차별 등 사회 구조의 문제 때문에 삶을 바꿀 수 없는 경우에도, 모든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는 비판도 등장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다른 방식으로 돌보려는 시도도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종종 매스컴에서도 소개된 ‘멍 때리기 대회’나 템플스테이 등과 연계된 ‘명상에 대한 열풍’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시도는 외적인 선, 육체의 선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직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을 능력을 과연 인간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검토가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최종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이 삶에서 가능한 관조(contemplatio)에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모든 인간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조건, 곧 감각들의 영역에 묶여 있는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I,83,‘머리말’)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II,3,6)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자기실현’은 결코 인간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개방성 덕분에 인간 영혼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실현되고 완성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세의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그렇지만 토마스는 ‘영혼의 선’이 진정한 행복과 관련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임을 지적하면서, 최종 목적으로서 ‘욕구되어야 하는 대상’과 ‘그 대상 자체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작용’의 측면을 구별한다. 그 안에 인간의 최종 행복이 있는 대상은 영혼 자체도 아니고 영혼의 어떤 한 능력도 아니라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획득이나 사용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영혼의 선’과 직접 관련된다.(I-II,2,8)

최종 행복에 대한 강력한 후보들에 대한 검토를 마치면서 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행복은 잃어버릴 수 없어야 하고 확실하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 삶에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이나 불행에 맞닥뜨릴 수 있으며, 이 삶에서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덕적인 결함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무위와 휴식의 단계가 필요하며, 심지어 어떤 개인이 이룩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다시 파괴되어 버린다.(ScG III,48)

따라서 토마스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명상, 영혼의 선한 활동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진리와의 완전한 합일 없이는 이런 만족은 지속될 수 없다. 선을, 창조된 선과 창조되지 않은 선으로 이등분한 것은 이제까지의 행복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토마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제시했던 현세의 이성적 삶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욕구를 전적으로 쉬게 해야 하는 완전한 선”인 최종 행복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된다.”(I-II,3,3) 

그렇다면 오직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회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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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