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십사만 사천(묵시 7,1-8)

우세민
입력일 2025-05-14 09:20:17 수정일 2025-05-14 09:20:17 발행일 2025-05-18 제 344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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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백성이 진정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

요한묵시록 6장까지 여섯 개의 봉인이 연거푸 열리다가 7장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번째 봉인은 8장부터 다시 이어진다. 7장은 6장의 마지막, 그러니까 어린양의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이를 찾아 나서는 질문에 이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린양을 진노의 주체로 읽어내었고 이 세상은 그러므로 산과 바위 뒤에 숨어야만 하는 절망의 자리가 된 듯하여 허망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요한묵시록 7장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 읽기에 또 다른 대답은 내놓는다.

7장은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천사들이 종말론적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이해한다.(에녹 60,11; 희년서 2,2) 요한묵시록 역시 천사가 불의 권한을 지녔거나(묵시 14,18) 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묵시 16,5) 7장의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5절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장면은 징벌의 시간 바로 전, 하나의 ‘멈춤’, 혹은 ‘쉼’을 상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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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된 가장 오래된 그림 신약성경인 「오트하인리히 성경」(Ottheinrich Bible) 중 <인장 받은 십사만 사천 명>

하느님의 종 이마에 받은 인장, 주님 구원 뜻하는 명징한 은유
구원,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무한·보편으로 주어지는 선물

왜 멈추는가. 후기 유다이즘의 사상, 예컨대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하는 에녹서의 생각에서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징벌을 준비하는 천사들이 있었다. 홍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천사들이었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천사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찰지라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얼마간의 시간과 방도를 마련하신다는 이야기다.(에녹 6)

다시 요한묵시록으로 돌아오자면 7장에 등장한 천사들은 분명 징벌을 준비하고 있는 천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람을 붙들고 멈춤과 쉼을 이끌어내는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얼마간 간직하게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추는 곳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야기는 구원을 향해 급하게 전환된다. 2절에 다른 한 천사가 ‘해 돋는 쪽’에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올라온다. ‘해 돋는 쪽’은 구원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이 동쪽이었고(창세 2,8),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키루스 임금이 동쪽에서 왔고(이사 41,2) 하느님의 영광이 해 뜨는 동쪽에서부터 나타났다고 구약은 말한다.(에제 43,2) 

하느님의 인장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장은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혀야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춘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 종말을 맞닥뜨린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곤 한다. 열두 부족에서 시작한 십사만 사천이라 유다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신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요한묵시록에 자주 등장한다.(1,1; 2,20; 6,11; 19,2.5; 22,3) 말하자면 ‘땅의 자리’에서 속량되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의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묵시 14,3)

하느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장은 또 무엇일까. 에제키엘서 9장 4절은 예루살렘에 징벌을 내리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도록 주님께서 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표’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타우’(תָּו)를 두고 십자가의 예형으로 인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라고 읽어내는 해석과 맞닿아 있다. ‘인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 말마디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하기도 한다. ‘인장’이라는 그리스말은 ‘스프라기스’(σφραγίς)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초대교회는 이해했기 때문이다.(2코린 1,21 이하) 어떤 해석이든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징벌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보호는 분명히 살아 있다는 명징한 은유가 된다.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이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와서 총합이 십사만 사천이다. ‘12’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1000’은 풍성함, 충만함, 완벽함을 가리킨다. 하여 ‘1만2000’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을 품는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해야 십사만 사천이 된다. 같은 수를 다시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으로 ‘마땅하고, 당연하여,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진정으로 가득하고 완전하고 풍성하다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 7장 9절은 그리하여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셀 수 없는 무리’라 규정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실은 무한대의 사람이다. 요한묵시록이 숫자에 민감하여 여러 숫자들을 소개하고 제시하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하느님과 어린양 쪽의 서술에서는 무한적이고 보편적인 숫자를, 악과 그의 부속 형상들, 예컨대 용과 두 짐승과 대탕녀 쪽의 서술에서는 한계지워지고 제한적인 숫자를 배치시킨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무한하나 악의 자리와 그 힘은 제한적이어서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요한묵시록 7장은 잠시 쉬어가는 대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우리는 ‘구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십사만 사천,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리다. 구원은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고자 애쓰는 이의 특별한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러니까 무한하신 하느님을 닮았다. 우리가 넓어질수록 구원은 뚜렷해진다. 우리가 좁고 좁아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수록 구원은 그만큼 좁아지고 어려운 것이 된다. 구원은… 그러니까 주어진 선물이지 갖고 싶은 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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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