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영적 돌봄에 힘써 온 임상사목교육(CPE) 100년(3)] 예수님이 가진 ‘치유의 권위’에서 시작

최용택
입력일 2025-05-21 09:45:15 수정일 2025-05-21 09:45:15 발행일 2025-05-25 제 3443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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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E 탄생의 역사와 영적 돌봄터의 변화(상)

영적 돌봄의 역할을 요구받은 교회

1900년대 전후로 남북전쟁(1861~1865)과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겪고 난 미국인들은 극심한 경제난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암담한 현실에서 미국인들에게는 주일에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종교 지도자들의 강론이나 설교를 듣는 게 유일한 위로와 낙이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신학 과목만 가르쳤던 신학교 과정에서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과목을 배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정서적으로 피폐했던 신자들을 위해 할 수 있던 것은 강론이나 설교 뿐이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정서적으로 힘든 신자들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더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고, 이에 대한 해답을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가르치는 교회에서 돌봄과 치유의 교회로: CPE의 태동

‘정신 분석 이론’을 사용해 정서적으로 힘든 신자들을 도우려 했던 종교지도자들 중에 성공회 엘우드 우스터(Elwood Worcester, 1862~1940) 신부가 있었다. 그는 뉴욕성공회신학교(GTS) 과정에 ‘실제적으로 사목에 도움이 되는 과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독일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품 후 보스톤에 있는 ‘엠마뉴엘 교회’의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위한 개혁적인 일을 많이 하였는데, 특히 1906년에 신자들의 암울한 정서를 돕기 위해 의사들과 함께 상담을 하였다. 이것은 성직자가 교회에서 신자들을 위해 상담을 한 최초의 사건으로, 엠마뉴엘 교회에서 시작했다고 하여 ‘엠마뉴엘 운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엘우드 우스터 신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그동안 교회가 소홀히 하였던 ‘예수님의 치유의 권위’를 다시 세워 신자들을 ‘돌보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치유 사목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이러한 생각은 CPE 정신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엠마뉴엘 운동은 훗날 CPE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CPE는 사목 상담이 생겨난 기반이 되었다.

실용적인 교육 방법론에 발맞춘 신학교육의 변화: CPE 교과목 도입

1870년 이후 미국 교육은 ‘이론 중심’에서 벗어나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교육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하버드대학교 법대 교수들은 ‘사례연구(Case Study)’ 과목을 개설하여 법대생들에게 ‘강의가 아닌 실전을 위한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획기적인 새로운 방법론의 탄생은 신학교의 교수들에게도 도전을 주었고 그래서 생겨난 교육이 바로 ‘CPE’ 교육이었다. CPE 교육은 신학교에서만 공부하던 신학생들을 병원 임상 현장으로 이끌었다.

신학생들은 임상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면서 성찰하게 되는 ‘신학적 주제’와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적 신학을 통합시키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 신학교의 이런 교육 방법론의 변화는 이론 중심이었던 신학 교육을 현장의 사목 경험과 통합시켜 적용하는 이른바 ‘임상 신학’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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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정무근 다미안 신부(한국CPE협회장·예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