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는 트로이의 공주였다고 한다. 아름답고 총명한 그녀를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거절했으나 아폴로는 그녀에게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예언의 능력을 주며 그녀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 예언의 능력을 받고도,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신은 불멸이고 늙지 않는데, 자신은 인간이고 늙고 죽으니 그 결과는 비참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젊은 그녀가 이 당연한 것을 알고 있다니 놀랍다. 대개 젊은 아가씨일 경우, 얼굴이나 성격이 맘에 안 들어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가 아닌가. 그러니 어쩌면 그녀가 아폴로에게 능력을 받기 전에 이미 예언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면 예언이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 아무튼 이 신의 아들은 화가 났으나, 한번 부여해 준 예언의 능력은 철회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카산드라의 입에 침을 뱉으며 자신이 사랑하며 축복하던 그 입으로 저주를 내린다. “그래 너는 올바른 예언을 할 것이다.하지만 아무도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카산드라는 아름다워서 사랑을 받았다가 총명했기에 신의 사랑을 거부하자 바로 그 이유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독과 고통의 터널로 영원히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나라와 함께 멸망하여 목숨을 잃는다.
일전에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라는 책에도 썼지만, 몇 년 전 예루살렘 광장에 섰을 때 나도 카산드라를 떠올렸었다. 내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거기서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 성인을 생각했고, 이곳에서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이던 젊은 예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구세주를 환영하던 그 군중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했던 그 군중으로 변해버렸던 것을.
하지만 또 생각해 본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도 분명 저주이지만 어떤 사람이 거짓만 말해도 열광하는 군중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저주라는 것을 말이다. 이미 인류의 역사는 우리 모두를 비극으로 이끌어 가던 이런 종류의 열광을 수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만일 두 기로에 서 있다면 어떨까. 만일 둘 중에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묻는다면 말이다.
스테파노 성인 혹은 이 땅과 온 세상의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그들이 겪은 육체적 고난보다 더 고통스레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의 외로움이었다. 언제나 그것이 나를 더 많이 울렸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어둡고 절망적인 책이 아니다.
요나가 있고 니느웨의 군중들도 있다. 그곳의 군중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고 절제하기 시작했기에 멸망의 예언을 거슬러 구원받았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치다가, 예언자의 말을 듣고 깨달아 “호산나”라고 외친 것이다. 어떤 순서를 밟을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예수에게 외쳤던 내 지난날은 변화할 수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 하고.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반드시 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거짓을 말해도 열광 받으며 이 지상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힘겹지만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결심,“이의 있습니다” 하고 말해야 하는 용기. 그리하여 홀로 있는 시간에 “주님 저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당신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결심을 말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