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교육과 복음화에 발벗고 나서야

한국교회는 해마다 ‘청소년 주일’을 포함해 그 전 주간을 ‘교육 주간’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된 교육 주간은 가톨릭 교육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됐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육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교육적·영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는 경쟁주의 교육, 입시 중심 교육, 인권 침해와 교사 권위의 추락 현상이 심각하다.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문창우(비오) 주교는 올해 교육 주간 담화에서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는 생명 존중과 공동체 의식의 결여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교육 현장에서 가톨릭적 가치에 기반한 전인교육과 복음화에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전인교육은 모든 교육기관이 추구하는 목표지만, ‘가톨릭’ 전인교육은 학생의 지덕체 발달뿐 아니라 영성의 발달까지 지향한다.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염두에 두고, 더욱 인간답게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복음 정신으로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방식, 사회제도 등을 변화시키는데에도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가톨릭 교육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천 방안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가톨릭학교교육포럼 같은 단체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바란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귀 기울이고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교회의 지원도 더 늘어나야 할 것이다. 교육은 말 그대로 100년을 바라보고 이뤄야 하는 ‘백년지대계’이기 때문이다.

기도로 희망의 희년을 준비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9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聖門) 앞에서 열린 주님 승천 대축일 저녁 기도회에서, 2025년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 「희망은 실망하지 않는다」(Spes Non Confundit, Hope Dose Not Disappoint)를 발표했다. 이로써 가톨릭교회는 올해 12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을 열면서 시작되는 2025년 희년을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 기념하게 된다. 교황은 이날 희년을 공식 선포하면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세상에 기쁘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고 권고했다. 2025년 희년의 표어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다. 이 표어는 너무나 절망적인 세계 상황 속에서 인류,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희망과 신뢰를 희년을 기념하는 가운데 찾을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교회는 특별히 2025년 희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2024년을 ‘기도의 해’로 선포했다. 교황은 지난 1월 21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삼종기도 중 기도의 해를 선포하면서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희년을 이처럼 기도로 준비하는 이유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가까이 닿아 우리 삶을 변화시키며 그럼으로써 희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의 희망을 되새기는 2025년 희년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발견하고 고백하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대로 기도를 통해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체험으로 희년을 준비하고, 기도한 바를 직접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4-05-19

[현장에서] 가운데 자리

성당에서 아기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초등부쯤 되면 주일학교라도 있지만, 그 전의 어린 아이는 성당에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전례가 시작되면 대부분은 유리벽 너머에 ‘격리’되고, 아기가 얌전해 뒷자리 어디쯤 있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하는 일들을 성당에서는 자연스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당 가운데 자리에서는 울 수도, 먹을 수도, 기저귀를 갈 수도 없다. 혹여 신부님이 괜찮다해도 신자들의 눈총은 여전히 따갑다. 고령를 넘어 초고령이 된 한국교회에서 아기란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5월 11일 수원교구 시흥지구 중심 성당인 시화성바오로성당 가운데 자리에 어린아이들이 가득 찬 모습은 참 반가웠다. 우는 아이, 젖병을 물고 있는 아이, 두리번거리는 아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아이, 잠자는 아이…. 아이들은 각양각색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있었다. 이 각양각색의 어린이들이 성당 가운데 자리에 모여 참례하는 전례에서는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느껴졌다. 물론 유아세례식이니 어린아이들이 가운데 자리를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성당에서 사제들, 봉사자들, 전례에 함께한 모든 신자들이 어린이들을 불편해하지 않았고, 또 어린이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는 모습이 따듯하게 다가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세계 어린이 날을 제정하면서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어린이들을 가운데 자리에 두고 그들을 돌보기 원한다”고 말했다. 보편교회의 흐름에 한국교회는 얼마나 함께하고 있을까? 언젠가 모든 성당에서 어린이들에게 가운데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때가 오길 손꼽아본다.

2024-05-19

장일순의 ‘일초’ 영성살이를 그리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찬미받으소서」를, 2023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를 발표해 기후위기 시대에 새로운 삶과 문명의 전환을 이룰 것을 요청한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가톨릭 신앙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장일순(요한 세례자)을 들 수 있다. 그는 1928년 원주에서 나서 1994년 5월에 귀천했다. 올해로 그가 하늘나라 시민이 된 지 30년이 된다. 장일순은 1940년 세례를 받았는데, 이 땅의 종교 전통에 열려 있던 그는 ‘걷는 동학’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동학에 정통했다. 특히 해월 최시형의 사상과 생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불교 전통은 물론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밝았다. 그런 가운데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와 사회 복음화를 이뤄 갔던 그는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할 만큼 가톨릭 신앙을 깊이 내면화해서, 한국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존재 지평을 통합 생태적으로 심화시켜 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소중한 책을 쓰셨고, 이 책의 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이라고 말한다.(「찬미받으소서」 85항) 하느님은 이 책으로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다.(12항) 장일순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一草之中聖父在矣.”(일초지중 성부재의) “풀 한 포기 안에 성부 계시네.” 장일순은 여기서 하느님을 ‘성부’로 표현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Πάτερ: ‘아버지’로 시작하는) 기도에 충실한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된 모든 존재의 ‘공동 원천’(un’origine comune)에 근거해서 풀과 벌레를 ‘형제’ 혹은 ‘누이’로 불렀다.(11항) 교황은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서 ‘우주적 가족’(universal family)(89항)과 ‘우주적 형제애’(universal fraternity)(228항)를 살아 가자고 요청한다.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돼 ‘우주의 일부로서’(89항) 그분의 숨으로 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의 계시체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요 하느님의 가족이다. 한 하느님에게서 와서(공동 원천, 11항) 하느님을 공동 도착점(a common point of arrival, 83항)으로 갖는 모든 존재는 이 ‘공동성’으로 하여 서로 하나로 이어져 있다. 교황은 이것을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89항)고 표현한다. 장일순은 무위당(无爲堂)이라는 호와 함께 ‘일초’(一草)나 ‘일속자’(一粟子), 우리말로 ‘하나의 풀’이나 ‘조한알’이라는 호를 쓰면서, 이같은 존재의 상호성을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1984년 봄에 자신을 ‘치악산 사람’으로 지칭하며 화폭 아래 왼쪽에 난들을 그리고 위쪽 공간에 글을 쓴 한 서화에서 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원주교구 태장1동성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님은 왼손으로 지구를 들고 계신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님 안에서 모두 하나의 지구 위에서 하나로 이어진 존재로 사는 것인데, 이것은 ‘너는 이어진 나’이고, ‘나는 이어진 너’라는 것을 말한다. 장일순은 이 통합생태적 진리를 30년도 더 전에 저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교회와 사회에 선물했다. 이 기후위기 시대에 그의 ‘일초’ 영성과 ‘그대는 나일세’ 영성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생태적으로 좀 더 깊게 내면화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글 _ 황종열(레오)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5-19

요즘 젊은 것들은

60대에 들어선 내 친구들은 요즘 청년들이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자존심만 세고, 용기와 모험심이 없고, 헌신은 부족하고 계산적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대차는 늘 있어 왔다. 기원전 1800년의 수메르 점토판부터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비판하며 한탄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노인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중요했던 농경사회와 달리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노인들은 소외되기 십상이다. 노령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는 줄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관공서나 식당에 설치된 키오스크의 조작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기성세대는 MZ 세대에게 말을 건네기를 어려워한다. 태어날 때부터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와 MP3 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자라나 '디지털 네이티브’라고도 불리는 이 세대는 디지털 언어와 장비를 특정 언어의 원어민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어떤 사람은 이들을 신세대가 아닌 '신인류'라고 일컫기도 한다. 알아듣기 힘든 줄임말을 남발해서 이들이 “우리말을 하는 외국인 같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소통하기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수천 년 전에도 똑같은 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젊은 세대 앞에서 “나 때는 말이야 ~” 하고 운을 떼는 순간 꼰대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나이든 사람들은 융통성이 부족하고 권위적이며 제대로 경청할 줄 모른다. 서로 다른 세대 사이에 감성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차이가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시간과 자리가 더 필요하다. 내가 대표로 있는 ‘이음새’는 한 달에 한 번씩 여러 세대와 문화가 어우러져 함께 걷는다. 요컨대 같은 눈높이에서 편안하게 만나는 것이다. 인구 절벽의 시대에 세대간 소통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더 많이 들으려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물어본다면 실제로 배우는 것도 있고 관계도 더 좋아질 것이다. 나이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나이든 사람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내가 그들의 나이 때 했던 경험을 똑같이 반복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대학과 한국 사회는 30-40년 전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경험을 기준으로 젊은이들을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각각 다른 경험을 안고서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인이다. 기후 재앙과 저출생 고령화 시대의 도전에 책임있게 응답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동료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처신하면 좋겠다. 그게 진정 나잇값 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수사(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2024-05-19

김대건 신부님을 위한 대리석, 카라라에서 찾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되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상을 만드는 작가로 최종 선정된 후 첫 번째로 시작한 작업은 양질의 대리석을 찾는 일이었다. 작품의 크기는 높이 3.77m 가로 1.83m 폭 1.22m로, 이보다 큰 4m이상의 대리석을 구해야 했다. 무늬가 거의 없어야 하며 크랙이 없고 따뜻한 느낌이 들면서 강도가 강한 대리석이 필요했다. 세계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난 대리석이 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카라라를 염두에 뒀다. 사람도 성격과 얼굴이 조금씩 다르듯이 흰색 대리석도 수백 종류가 있다. 따뜻한 느낌, 차가운 느낌, 쨍쨍거리는 느낌, 신경질적인 느낌, 단단한 느낌, 강도가 약해 푸근해 보이는 느낌, 무늬가 많아 산만한 느낌 등 다양하다. 작가가 대리석을 구입할 때에는 대리석 채석장에 가서 직접 돌을 주문하는 방법과 대리석을 절단해서 육면체로 만들어서 파는 공장에서 구입하는 방법이 있다. 카라라에서 피에트라산타까지 약 25km 정도 되는 구간에 수백 개의 대리석 공장이 있다. 거의 모든 채석장과 공장을 몇 번씩 다녀봤지만 4m가 넘는 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크랙과 무늬가 너무 많아서 성상의 재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주변에 대리석 전문가들이 많아서 양질의 대리석 찾는 일에 동행을 해줬다. 작업 파트너 니콜라와 그의 아들 세바스티아노, 좋은 대리석을 잘 찾는다는 최윤숙 선생 그리고 카라라 아카데미 동창생인 마시모 펠레그리네티 교수 등 ‘돌 박사’들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었다. 카라라에서 피에트라산타까지 수십 번 왔다갔다 하면서 열심히 좋은 대리석을 찾던 중, 니콜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좋은 대리석을 발견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모두가 달려가서 대리석을 보는 순간 좋은 대리석이라고 느꼈다. 무늬가 없고 색상이 따뜻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크기도 충분했다. 무늬를 확인하기 위해 물 호스를 끌고 와서 물을 부어 보니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살펴봐야 하는데 크레인 기사가 출근하지 않아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2023년 1월 9일, 기다림 끝에 대리석을 들어 올려 확인하고 “오케이!”를 외쳤다. 함께 고생한 동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5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최상의 대리석을 찾은 것이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고비가 남았다. 밖에서 보이지 않던 크랙과 무늬가 돌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다시 돌을 구입해 작업을 해야 한다. 최고의 대리석을 찾은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며 생각이 났다. 피에트라산타본당 주임 신부님을 모시고 축복을 받고 싶었다. 니콜라는 바로 전화를 걸고 성당으로 가서 신부님을 모시고 왔다. 신부님이 축복을 해주시면 돌 속의 크랙과 무늬가 없어질 것 같다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기도했다. 축복식을 마치고 모두가 모여 기념 파티를 했다. 나의 아내 고종희, 형제 같은 피엘안젤로, 니콜라, 세바스티아노, 마시모, 마리아, 최인숙 선생과 함께 대리석을 찾은 기념 파티를 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커다란 선물을 받고 난 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대리석 안에 계신 김대건 신부님을 해방시켜 자유를 찾아드려야지!”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5-19

[내 눈의 들보] 역사 앞에 정직해야

가톨릭 상장례 강의를 위해 교회사를 연구하고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면, 신앙 선조들부터 오늘을 사는 우리에 이르기까지 늘 바람직하게 산 것이 아님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때 우리 교회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반일 항쟁에 대한 교회 장상(長上)의 몰이해,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에 대한 왜곡과 은폐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뜻있는 이들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고자 노력한 덕분에 이제는 감출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일제에 부역한 이들의 명단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때 교회 인사의 이름을 빼라고 강요한 이들이 있었다. 혜택을 누렸다면 그로 인한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건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어떤 수사(修辭)를 들이대더라도 왜곡과 은폐는 십계명의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의 변형이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라는 말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후손이나 후배를 위한다며 이 계명을 어기는 그리스도인이 있는지라 왜곡과 은폐에 대한 몰이해가 불러오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역사를 배웠어도 많은 사람들이 입시 위주로 공부한 탓에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외우는 데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건만 자기 목적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그 학문이 지향하는 바를 외면하고 악용하는 이도 있다. “굳이 좋지 않은 내용을 남길 필요가 있습니까?”라며 분명히 있었던 사실인데도 빼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지난날 혹심한 박해로 인해 기도서·교리서·예식서 등에 있는 한글만 겨우 깨친 신앙의 선조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시편 139,7-8)라는 말씀을 듣거나 본 적이 없었을지라도 “교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라는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 세대에까지 물려주었다. 왕실도, 민간도 역사의 현장을 문헌으로 남겼고, 교회도 자기 삶을 분명하게 기록했다. 개인이나 집단의 판단 부족, 잘못된 결정, 어리석은 행동을 나머지 구성원이 수정‧보완한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족과 잘못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겠다는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 이 세상은 선한 것으로만 이뤄지지 않아 악한 세력이 넘보기도 하지만, 악독한 기운은 바깥보다 자기 안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는다. 성령께서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을 늘 지켜보시면서 바르게 이끄심을. 주님께서는 인간 각자의 능력에 맞는 고통을 주신다고 배웠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헤쳐가려는 노력은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지만, 성령께서 그저 쳐다보고 계시지 않는다는 믿음도 이어받았다. 누구나 잘못 저지른 행동을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고 감추거나 억지로 변명하면 더 큰 잘못에 빠질 뿐이다. 늘 어제를 뒤돌아보며 반성하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잘못을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므로 더 큰 부족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야 할 길이기에···. 글 _ 박명진 시몬(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상장례 강사)

2024-05-19

참된 발전에 봉사하는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문명의 화두가 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인류는 과거 수천년 동안 이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급격한 변화를 불과 수십 년 동안 이뤄냈다. 그리고 이제 학습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고 인공지능 체계는 얼마 전 정보화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능가하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이미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한층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인간 삶의 편리에 도움이 되는 한편 그 유례없는 잠재력이 오용될 때 오히려 인류에 큰 해악이 될 것이다. 교회 역시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에 대해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명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기대와 위험성을 동시에 제기하는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형제애와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홍보 주일 담화에서는 인공지능이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야기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더 큰 평등과 자유의 증진에 기여하기를 기대했다. 새로운 문명과 기술이 발명되고 발전할 때, 교회는 항상 그것들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여긴다. 어떤 기술도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인류의 선한 뜻, 하느님의 선물을 선용하려는 확고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교회의 깊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신학자와 평신도 연구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이 놀라운 기술이 가져올 영향을 깊이 성찰하고 선용할 수 있는 방법을 교회는 고민해야 한다.

2024-05-12

브뤼기에르 주교를 생각하며

서울대교구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에 남긴 발자취를 따르는 순례를 동행 취재했다. 4월 16일 이른 아침 김포공항에서부터 21일 늦은 저녁 인천공항에 돌아오기까지 5박6일 일정으로 진행된 이 순례 기간 동안 중국 내에서 버스로 이동한 거리가 2000km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가 설정될 때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뒤 자신의 사목지인 조선에 들어가려 광활한 중국 대륙을 걸어서 이동하다 끝내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마가자(馬架子, 마지아쯔)에서 1835년 10월 20일 선종했다. 과로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회법적으로는 ‘순교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그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이유는 박해시기 조선 땅에 들어가면 죽을 줄 알면서도 초대 조선교구장 직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중국 곳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흔적을 취재하고 3주에 걸쳐 순례기를 연재하면서 190년의 시간 차이가 나는 과거와 현재,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을 연상하곤 했다. 중국은 한국보다 천주교 역사가 먼저 시작된 곳이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도 중국을 통해서다. 현재는 어떤가? 중국에서 취재하면서 지금의 중국 천주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있었고, 사진 한 장 편하게 찍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 중국의 종교 현실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박해시기에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조선에 들어오려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걸음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의 모범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2024-05-12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 착좌를 축하하며

손희송 주교가 5월 2일 제3대 의정부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의정부교구를 더욱 풍성하게 일구어 가게 될 손 주교에게 모든 한국교회 구성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아울러 2010년부터 지금까지 의정부교구를 이끌어온 이기헌 주교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손 주교는 뛰어난 학식을 지닌 신학자로 명석한 판단력과 분별력, 따뜻한 품성까지 고루 갖춘 ‘준비된 교구장’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동안 손 주교가 사제로서, 주교로서 여러 사목 분야를 두루 맡아 풍부한 경험까지 쌓아온 만큼 앞으로 의정부교구가 더욱 발전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3월 의정부교구장 임명 당시 손 주교가 밝혔던 것처럼 ‘주님 포도밭의 일꾼’으로서 포도밭을 비옥하게 잘 일구어 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러한 기대는 곧 확신으로 이어진다. 손 주교는 착좌미사 강론에서 “교구장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나는 그분의 일꾼이자 관리인”이라며 교구 공동체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맞게 성실히 일하며 하나로 일치된 교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당부했다. 이는 손 주교가 평소 지켜온 신념처럼 ‘기본에 충실한’ 신앙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설정 20주년이 된 ‘청년’ 의정부교구는 이제 새로운 교구장과 함께 더욱 힘차게 성장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교구민 전체가 일치하고 화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착한 목자로 앞장서 가는 손 주교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뒤를 따르는 양 떼가 될 모든 교구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길 기대하며 기도를 보탠다.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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