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사 (79)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입력일 2002-03-10 수정일 2002-03-10 발행일 2002-03-10 제 228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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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 매매·성직자 결혼 금지로 갈등
황제는 교황 폐위, 교황은 황제 파문
15. 혼란과 개혁시대에 일어난 영성

4) 그레고리오 개혁

그레고리오 개혁이란 제 157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가 행한 제도적인 개혁을 말한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교황 친히 어느 정도의 중앙집중화 내지 교황권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한 정책인데 정치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이론적인 위상을 부여하고 제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니아 지방 소아나에서 1020년 경 출생한 힐데브란트이다. 젊을 때 수도생활을 하였고 교황청과 연관을 맺어 1046년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귀양 갈 때 동행하였으며 원래 클뤼니 수도원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후에 교황청에서 근무하면서 재무 담당관과 로마 성 밖 사도 성 바오로 대성전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게 되었다. 교황 사절로도 파견되어 뚜르 지방 공의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교황청의 일을 하다가 1073년 만장일치로 교황이 되어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혼인과 평신도의 서임을 금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교황 사절들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성무 정지를 내렸다. 이 때부터 교황 사절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과 황실이 주교들을 서임하여 직책과 은전을 베풀던 관행들을 쇄신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가장 심한 마찰을 빚은 나라는 독일이었다. 왜냐하면 독일과 교황청은 여러 면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찰은 전임 교황이 하인리히 4세의 고문 5명을 파문했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큰 교구인 밀라노의 교구장이 공석이었을 때 황제는 황실과 가까운 자를 임명하였으나 빠따리노들(그 당시 이탈리아 북구지방에서 교회의 쇄신을 주장하던 이들이었으나 지나쳤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은 교황청과 가까운 지원자를 추천하였다.

평신도 서임에 관한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밀라노, 스뽈레또, 페르모 그리고 독일에서 황제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주교와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는 1075년 속인의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고 교회의 고유한 권리를 모두 세속 통치자들로부터 돌려낼 것을 파문의 위협으로 결정하여 각 나라에 통보하자 여러 나라들 중에서 특히 독일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이 내용은 독일 제국의 전복을 의미하였다. 제국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해진 것이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076년 1월 말 보름스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주교 26명의 서명을 받아 교황을 규탄하고 폐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그 해 사순절에 황제를 파문하면서 모든 권한을 박탈시키고 신하들에게는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폐위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을 지지하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의 직위를 해임시켰다.

그러나 독일의 제후들은 황제가 1년 내에 교황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힘을 모아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이자 황제는 1076~77년 겨울 소수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교황이 잠시 머물고 있던 알프스의 아펜닌 산맥의 북쪽 카놋사에 가서 회개의 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3일간을 기다렸다(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 황제는 독일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른다는 조건으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아 권한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권위와 독일 제국의 위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는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의 제후들이 1077년 3월 교황의 승인 없이 슈바벤의 루돌프를 독일의 황제로 선출하자 문제가 생겨 3년간 격렬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내란을 중재하기 위해 교황은 「대화」를 발표하여 양측의 분쟁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1080년 사순절에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여 그를 독일과 이탈리아의 황제에서 폐위시키고 제후들이 선출한 슈바벤의 로돌프를 독일의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하였다. 이리하여 유럽의 실권은 독일의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세운 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들어가자 교황은 천사의 성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살레르노로 피신하여 노르만인들의 보호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패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내린 유럽의 최고 통치자와 목자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쇄신을 제도적으로 수행한 훌륭한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개혁 의지는 후대 교황들(빅토리오 3세와 우르바노 2세 등)에 의해 보다 알차게 열매 맺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06년 그레고리오 7세를 성인품에 올렸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