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68) 헨리 8세와 영국의 교회 분열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2-12-22 수정일 2002-12-22 발행일 2002-12-22 제 232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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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권위에 도전
‘국왕 이혼과 결혼’ 다분히 개인적 문제가 발단
39개항 신조 인준, 성공회의 국교회 체제 확립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다른 지역의 종교개혁들과는 달리 그 기원에 있어서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국왕의 개인적인 문제와 교회 정책적인 문제에서 시작됐다. 즉 튜더왕조의 헨리 8세 국왕의 이혼과 결혼 문제를 둘러싼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가 발단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헨리 7세(1485~1509)에 의해 시작된 튜더 왕조(1485~1603)는 강력한 정부의 힘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헨리 8세(1509~1547)에 와서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의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영국교회는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교회의 국교화 추세가 나타났다. 원칙적으로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교황이 권한을 지닌다고 인정됐지만 실제로 교회법은 왕권에 의해 제한됐다. 에드워드 3세(1327~1377)는 「성직 임명 제한법」(1351)으로 교황의 성직자 임명을 제한했고 성직에 대한 분쟁에서 교황청에 상고하는 것을 금지한 「상고 금지법」(1353)을 발표했다. 하지만 어느 교황도 이 제한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러한 국교화 추세는 영국 교회가 로마와 단절하는데 현실적인 배경이 됐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영국 교회는 종교 개혁적 성격을 띤 국가주의 교회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위계 제도나 전례, 신심 생활 등에 있어서는 늘 전통적, 가톨릭적 특성을 간직했다.

헨리 8세는 원래 아라곤 왕가의 캐서린과 결혼했었다. 캐서린은 15세때, 4개월간 헨리의 형이자 왕위 계승자인 14세의 아서와 결혼했었는데 중병을 앓고 있던 아서가 사망했고 1503년, 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12세의 헨리와 약혼했다. 1509년 헨리가 즉위한 뒤 결혼식이 거행됐고 18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7명의 아이를 두게 된다.

나중에 여왕이 된 메리(1553~1558)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사망하고 헨리는 정부인 앤 불린과의 사이에 적자를 갖기를 원했는데 그녀는 결혼에 대한 보장 없이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1529년 그는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 선언을 교황청에 청원했지만 1531년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는 의회와 어떤 법정에서도 만일 교황의 명을 어기면 파문될 것이라는 위협 아래 왕의 결혼을 풀거나 또는 무효로 선언하는 것을 금지했다.

헨리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결심을 하고 토마스 크랜머(T. Cranmer, 1489~1556)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만든 후 궁정 고문인 크롬웰(T. Cromwell, 1485~1540)의 도움을 받아 1531년 영국 성직자 전체회의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 회의를 통해 영국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허용하는 한 국왕은 영국 교회와 그 성직자들의 최고 으뜸이며 보호자』라고 선언했다. 1533년에는 「상소 제한법」으로 의회가 어떤 소송도 교황청에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고 1534년에는 의회가 국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전권을 지녔다고 규정한 「수장령(首長令)」을 제정해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국교회를 탄생시켰다.

한편 크랜머 대주교는 1533년 1월 비밀리에 헨리를 앤과 결혼시켰고 이어 1533년 5월 23일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다. 교황은 7월 11일 파문을 경고했고 이듬해 5월 교회 재판을 통해 헨리의 캐서린과의 결혼이 유효함을 확인한 뒤 7월 헨리 8세, 앤 불린, 크랜머 대주교 모두에게 각각 파문이 내려졌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반교황적 형태로 그리라'는 1548년 크랜머 대주교의 지시이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교회는 여전히 가톨릭 체제를 유지했다. 1536년에 헨리 8세는 수장령을 거부하는 수도자들을 처형하고 수도회를 해산, 재산을 압수했지만 1539년에는 가톨릭 교리와 규율을 담은 「6개 항령(Six Articles)」를 반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볼 때 헨리 8세의 교회 개혁은 종교적 동기보다는 개인적이며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한 뒤 셋째 아내인 시모어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1547~1553)가 9세로 왕위에 오른 뒤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가 시작됐다. 외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 아래 칼뱅주의 성향의 서머싯 공과 크랜머의 주도로 영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화하기 시작해 1547년에 성당에서 성화상이 철거되고 교황권을 반대하며 국왕의 수장권을 지지하는 설교를 명하는 국왕 포고령들이 반포됐다. 의회는 「6개 항령」을 폐기했고 크랜머가 1549년에 작성한 기도서와 1553년 루터와 칼뱅주의를 절충한 「42신조」는 명백하게 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영국교회는 그러나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 사망 후 즉위한 메리(Mary, 1553~1558) 여왕으로 인해 다시금 가톨릭으로 전환됐다.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메리는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반교황적이고 반가톨릭적인 법령들을 폐기하고 친 가톨릭 교회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메리 여왕의 교황청과의 관계 회복은 영국 국민의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줌으로써 반란이 이어졌고 1558년 메리의 사망으로 가톨릭 복귀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메리에 이어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왕위에 올라 종교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다. 1559년 여왕을 국가와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선언한 개정된 「수장령」과 「예배 통일법」이 공포됐고 메리 시대에 반포된 법들은 폐기됐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신학과 전례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중간을 유지하려고 했고 1563년 성직자 회의는 칼뱅주의적 성향의 「39개항 신조」를 인준, 1571년 여왕의 공포를 거쳐 영국교회의 공식 교리 체제로 자리잡았다. 이로써 영국 성공회의 국교회 체제가 확립됐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