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깊게 하기 위한 왕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표지는 많은 성인들과 위대한 영성가들이 그동안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수없이 역설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들이 지닌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얘기해온 묵상이 길고 어려운 영성적 상승의 첫 단계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관상으로 들어가게 하실 시기에 신비들의 의미와 적절한 기도 방법에 대해 당신 스스로 배려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주 묵상으로써 자신을 헌신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관상의 은혜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본래적 의미의 관상
단순한 작업을 통해 어떤 영적 실재를 포착하기에 이르는 활동을 본래적 의미의 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묵상 활동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단순 작업으로서 능동적 또는 「수득(收得)된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묵상이다.
또다른 하나는 묵상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하느님 역사 앞에서 수동적인 측면으로 특징 지워진, 하나의 특별한 영적 상태를 이루는 「신비적 또는 수동적 관상」이 그것이다.
신비적 관상은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직접 활동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한편 영혼이 직관-정서적 형태의 단순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다.
관상이란 선물은 「본질적으로 영혼이 자신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인식하는 사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인식 방법과 정도는 다양하다.
보통 그러한 인식은 점점 더 심화되는 내면화의 방향으로 발달한다. 대 데레사 성녀가 사용한 상징들을 빌려서 설명해보면, 내면에 지어진 성은 많은 방을 지니고 있고 그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적 인식은 하느님 현존 체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관상적 인식은 「함께 있음」의 양상을 통한 인식이다.
우리가 우리 곁에 실재하는 한 친구를 알고 사랑하듯이, 자신안에 살고 계신 하느님 나라에로 달아드는 영적 인식은 필요한 은총을 주시면서 영적 인식을 끌어 당겨 그러한 일치를 이루게 하시는 하느님 자신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능동적 현존에 대한 인식을 주시느냐 하는 것과 그리고 그 인식의 방법들과 정도를 정하는 것은 하느님 자유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 당신 자신과 삼위일체 신비,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께서 사셨던 신비들에 대해 영혼을 밝혀주시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그러한 하느님의 자유가 영혼에게는 자신의 수동성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느님의 이 현존에 달아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시의 주도권이 그 기간과 형태와 함께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선이 단순하고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를 크게 요청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깊게 향유하는 사실 등에서 관상행위는 기도의 여러 다른 형태에서 표현된 활동과 비교할 때 마치 휴식과 같아 보인다. 수동성은 당신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움직이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정을 동반한다. 모든 당신의 현시는 하나의 은총으로 느껴지며 흠모와 감사의 감정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관상의 주요 열매는 하느님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관상의 단계
주부(注賦)적 관상은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두가지 방법과 접해 있다. 묵상(meditatio)이 그 전 단계이고 관상의 정점에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 있다.
그중에서 지복직관은 향주덕 믿음의 테두리를 넘어 「어두움」 없는 관상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이 그 예에 속한다.
관상은 「불완전한 관상」, 「완전한 관상」 두가지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첫째는 가벼운 수동성(주입) 형태로 간헐적이고 순간적인 관상 행위(하나의 상태를 형성하지 못한다), 영(정신 의지 정서)의 산발적 영역과 힘의 개입으로 신비에 대해 아주 부족한 이해(예를 들어 우리 안에서, 당신 말씀 안에서, 혹은 교회와 다른 이들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희박한 포착)들로 특징지어진다.
둘째 완전한 관상은 그의 최종 단계에서 대단한 힘을 지닌다. 눈에 띠는 정도의 단절이 없다. 왜냐하면 영은 자신의 가장 깊은 뿌리 속으로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서 이미 민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격렬한 외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게 하느님께 항구하게 열려있고 집중한다.
신앙과 사랑 주의 정성의 일치는 관상 행위속에서 다른 영의 활동들과 동반하며 하느님 위격과 인간의 일치에 힘입어 「신비」에로 가득 진입한다.
관상으로의 첫 걸음은 엄격한 극기 생활로 유지되는 묵상에 의해 시작되며 이는 잠심과 단순화로 향하게 한다.
단순성과 잠심에 더욱 깊이 젖어들면서 하느님의 조명은 더욱 풍성해지고 점점 기도의 모든 시간을 주님과의 일치 속에서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는 묵상적 수고를 통해 영혼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직접 역사하시어 사람인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우리 감각이 영에 대해 적응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격정과 유혹적인 것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한 사막 횡단은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 이행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