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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3) 서상돈(아우구스티노) 가문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3-06-15 수정일 2003-06-15 발행일 2003-06-15 제 235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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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헌금·독립운동…성직·/수도자 수십명
서상돈(아우구스티노.1851∼1913)이 조선시대와 구한말에 걸친 신앙 자유기에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바는 지대하다. 또 그는 지물상과 포목상을 통해 이룩한 막대한 부(富)를 바탕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 사회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민족운동가로서 또 다양한 전교활동과 자선사업을 펼친 신앙실천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대구지역의 거상(巨商)으로 경제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상돈의 고조 할아버지인 서광수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천주교 신앙이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뿌리깊은 신심을 이어받은 실천적 신앙인이자 사회운동가인 서상돈이 있기까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선조들의 신앙생활, 그리고 서상돈과 그 후손들이 교회의 빛과 소금으로 신앙의 명가를 이루게 된 모습들을 찾아본다.

쌀밥 입에 대지 않아

대구 달성 서씨 도위공파인 서상돈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784년 전후이다. 상돈의 고조부이며 대구 달성 서씨 20세 손인 서광수가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듬해 천주교의 첫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 서광수는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 당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후 상돈의 조부 치보(서광수의 손자)는 경북 문경 여우목으로 옮겨와, 성 이윤일 가정과 함께 포교활동을 했다. 현재 여우목에는 치보와 아들 인순의 묘가 성지 내에 자리하고 있다. 치보의 셋째 아들인 철순의 아들 상돈(가계도 참조)은 가족과 함께 대구 인근으로 이주, 주변 친지의 도움으로 낙동강 배편을 이용해 종이와 기름장사로 돈을 모았다.

당시 상돈은 병인박해로 대구 감옥에 갇혀 있는 삼촌 인순을 자주 방문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생활하는 삼촌을 보고, 이후 거상(巨商)이 된 후에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다. 또 봄, 가을 곡식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자선.구휼사업에 힘쓴 것도 이 일이 있은 후부터라고 한다.

지역교회 발전에 헌신

서상돈은 1895년 대구 읍내에 임시 성 요셉 성당을 지을 때 집 매입부터 수리까지 1000여달러 이상을 봉헌했으며, 현 계산동 성당 터에 기와집 십자성당을 건축할 때인 1897년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립되고 드망즈 안세화 주교가 부임하자 상돈은 주교관 부지로 현재 중구 남산동 교구청 자리 1만여 평을 교회에 헌납했다.

당시 상돈의 사촌동생인 동정녀 서마리아는 자신이 살고 있던 남산동의 기와집을 비워 드망즈 주교의 임시 주교관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서 마리아는 또 대구지역의 동정녀들을 규합, 「동정녀회」를 설립하고 양로원을 꾸리는 등 초기 대구교회의 자선?복지사업이 뿌리를 내리는 데 일조했다. 상돈은 또 집 사랑채에 모인 식객들을 수시로 만나 복음을 전하는 등 간접적인 전교활동에도 나섰다.

서상돈은 일찍 죽은 장남과 병조, 병주, 병민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또 대구대교구 류흥모 신부의 동생인 류흥민을 데릴사위로 삼았다. 아들 병조는 아버지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이어받아 교회활동을 이어나갔다. 병조는 주교좌 계산본당 총회장을 지냈으며, 1899년 아버지 상돈이 헌납해 세운 대륜중고를 인수해 교장으로 재직하며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눈에 띄는 이는 데릴사위 류흥민이다. 그는 독립운동이 한창이었던 1910년대 말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국내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류흥민은 만주로 건너가 이 지역에 신자 집성촌을 세워 해외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 부소장은 『아직까지 류흥민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지만, 서상돈의 데릴사위인 류흥민이 대구지역 독립운동과 만주지역 신자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서상돈의 아들 병조가 일제의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 행적을 한 사실은 그간 서상돈의 교회내외 업적을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류흥민 중심의 독립운동이 서씨 가문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 서씨 가문의 친일과거에 대한 역사적 해석도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지적이다.

순교자의 삶 대물림

『집안 어른들은 항상 저를 보고 「너는 천주교 8대 손이니 항상 신앙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서상돈의 사촌 상홍의 손자인 만석(요셉.80.부산교구 울산 월평동본당)씨는 7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특히 어른들은 달성 서씨 집안인 것도 중요하지만, 천주교 입교자이며 신앙 가문으로 이끈 광수 할아버지의 8대 손인 것을 더욱 강조했다고 만석씨는 전했다.

『믿는 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죠.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저는 천주교 신자였고 가족 전체에게 그 사실은 여지 없는 진리였습니다』

열 살이 채 못되어서 복사를 시작한 만석씨는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노인복사로 활동하고 있다. 만석씨는 어린 시절 어른들이 이야기 해 준 선조 순교자들의 이야기,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난 하루 생활이 지금도 신앙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고 밝혔다.

서상돈의 증손자로 손꼽히는 성서학자인 서인석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자신이 성서학 연구에 평생을 몸담을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순교자와 집안 어른들이 보여준 성서 사랑에 연유한다고 밝혔다. 서신부는 『성서를 읽지 않으면 할머니가 잠도 재우지 않았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성서 속에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고, 성서 말씀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고 말한다.

서신부는 또 『서씨 가문을 비롯해 모든 한국의 선조 신앙인들은 성서를 교회의 중심으로 여기고 또 성서에 바탕을 두고 신앙생활을 했기에 떳떳이 순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면서 후손들이 선대 순교자의 신앙을 이어 내려온 것도 성서 중심의 신앙생활 전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상돈의 후손들 중 눈에 띄게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은 이는 보기 힘들다. 대신 성서학 등 학문발전에 몸담은 성직자와 학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서상돈의 직계 후손 외에도 천주교 시조라 할 수 있는 광수의 후손 중에도 성직자와 수도자가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성직자·학자 많이 배출

서상돈의 직계 후손으로는 공석(부산교구).인석(대구대교구) 신부와 준석 수녀(포교 성베네딕도회)가 있다. 또 서상돈의 삼촌인 인순, 명순, 태순의 후손들로는 정도, 형석, 태석 신부, 그리고 외손으로도 신부 1명, 수도자 3명이 있다. 서상돈의 증조부 유오의 형제 유덕, 유도의 후손 중에는 친손으로 정혁 신부(청주교구)와 성직자 3명.수도자 1명이, 외손으로 오윤수 신부 외 성직자 1명, 수도자 10명이 배출됐다.

지난 해 10월. 경북 문경 여우목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바로 서상돈의 삼촌인 순교자 인순과 인순의 아버지 치보가 묻혀 있는 이곳에서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여우목성지 축복식이 열린 것. 여우목 성지가 조성된 데는 서상돈의 증손자 공석 신부를 비롯한 후손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버려지다시피 했던 묘소를 찾아 지난 99년부터 성지로 조성할 1300여평의 토지를 헌금으로 구입하고 묘소를 이장하는 등 성지 조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

박해를 피해 방방곡곡을 떠돌다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 선조 순교자들. 잡초만 무성한 채 역사속에 묻힐 뻔했던 거룩한 순교 정신이 100여년이 넘게 신앙을 이어 온 후손들의 헌신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승환 기자